아우구스트 빌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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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구스트 빌리히는 독일 출신의 혁명가이자 군인으로, 1848년 독일 혁명에 참여하고 미국 남북 전쟁에서 북군 장교로 활약했다. 그는 프로이센 육군에서 공화주의 사상으로 인해 사임한 후, 카를 샤퍼와 함께 공산주의자 동맹의 좌파 지도자로 활동하며 1848년 독일 혁명에 참여했고, 혁명 실패 후 런던으로 망명하여 카를 마르크스와 대립했다. 미국으로 이주하여 남북 전쟁에 참전,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며 준장으로 진급했으나, 레사카 전투에서 부상당했다. 전쟁 후에는 공무원으로 활동하다가 독일로 돌아가 철학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에서 사망했다.
런던에서 빌리히는 프랑스 혁명가이자 정치적 망명자인 에마뉘엘 바르텔레미(Emmanuel Barthélemy)와 교류했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에 따르면, 빌리히와 바르텔레미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너무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그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고 한다. 빌리히는 공개적으로 마르크스를 모욕하고 결투(duel)를 신청했으나 마르크스는 이를 거부했다. 대신 마르크스의 젊은 동료였던 콘라트 슈람(Konrad Schramm)이 빌리히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권총 결투는 벨기에에서 벌어졌으며, 바르텔레미가 빌리히의 보좌인 역할을 했다. 이 결투에서 슈람은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한편, 바르텔레미는 1855년 런던에서 고용주와 다른 남자를 총으로 살해한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848년 독일 혁명 실패 후 추방된 아우구스트 빌리히는 1853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뉴욕에서 육체노동과 측량 업무를 하다가 신시내티로 이주하여 독일계 이민자 사회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북군에 자원하여 주로 독일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었다. 특히 제32 인디애나 보병 연대를 지휘하며 뛰어난 훈련과 리더십으로 명성을 얻었고, "파파"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샤일로 전투, 스톤스 강 전투, 미셔너리 능선 전투 등 여러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준장으로 진급하고 여단을 지휘했다. 전쟁 중 포로로 잡히기도 했으나 교환으로 풀려나 복귀했고, 레사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야전 지휘를 마감했다. 전쟁 후에는 신시내티에서 공직을 맡았으며, 말년에는 독일로 잠시 돌아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와 오하이오주 세인트메리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군사적 능력과 리더십은 동시대 인물들에게도 인정받았다.
2. 초기 생애와 경력
1853년 미국으로 이주한 빌리히는 처음에는 브루클린 해군 공창(Brooklyn Navy Yard)에서 목수 기술을 활용해 일했다. 그러나 곧 그의 수학 및 과학 지식이 인정받아 해안 측량 업무를 맡게 되었다. 1858년에는 신시내티(Cincinnati)로 이주하여 독일어 자유 노동 신문인 ''German Republican''의 편집자가 되었으며, 1861년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했다. 신시내티에서 빌리히는 요한 슈탈로(John Bernhard Stallo), 몬큐어 다니엘 콘웨이(Moncure Daniel Conway), 페터 카우프만 (철학자)(Peter Kaufmann (philosopher)) 등과 함께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의 사상을 따르는 "오하이오 헤겔주의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 1. 프로이센 군 복무와 혁명 활동
빌리히는 동프로이센(Province of East Prussia)의 Braunsberg|브라운스베르크deu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경기병(hussar) 대위(captain (land))였으나, 빌리히가 세 살 때 사망했다. 이후 그는 형과 함께 신학자이자 먼 친척이었던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의 집에서 자랐다. 포츠담과 베를린에서 군사 교육을 받은 빌리히는 프로이센 육군 제7(제1 베스트팔렌) 야전 포병 연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그러나 확고한 공화주의자가 된 그는 1846년에 군에서 사임하고자 했다. 그의 동료 장교 중 프리츠 아네케(Fritz Anneke) 역시 공화주의자였으며, 훗날 1849년 팔라티네이트 봉기에서 혁명 사령관이 되었고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북군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빌리히는 군 당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방식으로 사임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사임이 수락되는 대신 체포되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사임이 허가되었다.
빌리히는 카를 샤퍼(Karl Schapper)와 함께 공산주의자 동맹의 좌파를 이끌었으며, 1848년 독일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49년 바덴-팔라티네이트 봉기 때는 자유군(Freikorps)의 지도자로 활동했고, 혁명 사상가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가 그의 부관(aide-de-camp)으로 복무했다. 이 시기 그의 혁명 동지로는 프란츠 지겔(Franz Sigel), 프리드리히 헤커(Friedrich Hecker), 루이 블렌커(Louis Blenker), 카를 슈르츠(Carl Schurz) 등이 있었다.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빌리히는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했다. 영국에서는 목수 기술을 배워 생계를 유지했다. 1850년 공산주의자 동맹이 분열되었을 때, 그는 샤퍼와 함께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에 반대하는 그룹의 지도자가 되었다.
3. 미국 이민과 남북전쟁
3. 1. 미국 이민과 초기 활동
1853년 미국으로 이주한 빌리히는 먼저 브루클린 해군 공창에서 목수 기술을 활용하여 일자리를 얻었다. 이후 그의 수학 및 과학 분야의 능력을 인정받아 해안 측량 업무를 맡게 되었다. 1858년에는 신시내티로 이주하여 독일어로 발행되는 자유 노동 신문인 ''German Republican''의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이 활동은 1861년 미국 남북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이어졌다. 신시내티에서 빌리히는 요한 슈탈로, 몬큐어 다니엘 콘웨이, 페터 카우프만 등과 교류하며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사상을 따르는 이른바 '오하이오 헤겔주의자' 중 한 명으로 알려졌다.
3. 2. 남북전쟁 참전
1861년 초 남북 전쟁이 발발하자, 빌리히는 오하이오주 남서부 지역에서 독일계 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하여 북군에 합류했다. 그는 제9 오하이오 보병 연대(''Die Neuner'')에 연대 부관으로 중위 계급으로 입대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소령으로 진급했다.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복무하며 리치 마운틴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겨울 동안 오하이오 강 계곡으로 돌아와 징집 활동을 재개했다. 인디애나주의 올리버 P. 모턴 주지사는 빌리히에게 제32 인디애나 보병 연대의 대령직을 제안했는데, 이 부대는 전원 독일계 미국인으로 구성되어 "제1 독일 연대"라고도 불렸다.
모턴 주지사의 요청에 따라 빌리히는 제32 인디애나 연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자신의 연대를 독일어로 매우 전문적인 수준으로 훈련시켰고, 연대는 복무하는 곳마다 좋은 인상을 남겼다. 혁신적인 장교였던 그는 바퀴를 제거하여 폰툰 보트로 개조할 수 있는 특수 마차 제작과, 병력 이동 속도를 높이고 전투 준비 상태를 확보하기 위해 마차로 병력을 수송할 것을 제안했으나, 상관들은 두 아이디어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빌리히는 부하들의 안녕을 세심하게 챙겨 "파파(Papa)"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가능한 경우 병사들이 신선한 빵을 먹을 수 있도록 제빵용 오븐 건설을 명령하기도 했다.
제32 연대는 켄터키주 로울렛 역 전투에서 남부 연합군에 맞서 싸운 활약으로 전국적인 인정을 받았다. 당시 헨리 폰 트레브라 중령이 이끄는 500명의 제32 연대 병력은 테리의 텍사스 레인저와 힌드먼 장군 휘하의 보병 1,300명과 맞섰다. 제32 연대는 "할로우 스퀘어(hollow square)" 방진을 형성하여 여러 차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제32 연대는 10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했지만, 적군 사령관 테리 대령을 포함하여 33명을 사살하고 50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제32 연대는 샤일로 전투 둘째 날에도 참전했으며, 빌리히 대령은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부대가 적의 사격에 흔들리자, 그는 적을 등지고 병사들 앞에 서서 팔 운동을 하며 침착하게 연대를 지휘했다. 또한 연대 군악대에 유럽 공화주의 운동의 상징적인 노래인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하게 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안정을 되찾은 제32 연대는 총검 돌격을 감행했다. 이후 빌리히는 혼 여단(Horn Brigade)의 지휘를 맡게 되었고, 제32 연대는 폰 트레브라와 이후 프랭크 에르델마이어의 지휘 아래 빌리히의 여단에 속하게 되었다.
1862년 7월, 빌리히는 미국 의용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켄터키주에서 돈 카를로스 뷰엘 소장의 지휘 아래 페리빌 전투에 참전했다. 12월에는 스톤스 강 전투에서 제14 군단 제2사단 제1여단을 지휘하던 중, 타고 있던 말이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남부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의 악명 높은 리비 교도소에서 4개월 동안 수감되었다가 1863년 5월 가석방되어 포로 교환으로 풀려났다.
그 해 말 연방군으로 복귀한 빌리히는 제20 군단 제2사단 제1여단의 지휘를 맡아 툴라호마 작전 동안 리버티 갭(Liberty Gap) 방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치카모가 전투에서 사단을 이끌었으며, 채터누가 작전에서도 활약했다.
채터누가 포위전 동안, 빌리히의 여단은 오차드 노브(Orchard Knob)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쳤다. 특히 미셔너리 능선 전투에서는 능선 기슭을 정리하라는 명령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빌리히는 독단적으로 미셔너리 능선 전체를 향한 공격을 명령했다. 이 과감한 공격은 성공하여 남부군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채터누가 포위를 풀었으며, 조지아주 침공의 길을 열었다. 제32 인디애나 연대와 제6 오하이오 연대는 가장 먼저 능선 정상에 도달한 부대 중 하나였다.
1864년, 제32 인디애나 연대는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과 함께 애틀랜타 작전에 참여했다. 애틀랜타가 함락되기 전, 제32 연대는 테네시주 내슈빌을 거쳐 인디애나폴리스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동 중, 연대는 켄터키주에서 남부 연합군 게릴라 부대와 3일간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빌리히는 테네시주와 조지아주에서 애틀랜타 작전 동안 자신의 여단을 계속 지휘했으나, 레사카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어 야전 지휘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그는 신시내티, 켄터키주 코빙턴, 켄터키주 뉴포트 등지에서 북군 기지를 지휘하는 등 다양한 행정직을 수행했다. 1865년 10월 21일, 그는 명예 진급으로 소장 계급을 받았고, 이후 군에서 사임하여 민간인으로 돌아갔다.
당시 북군 내에는 독일계 병사들에 대한 편견과 반감이 존재했다. 특히 조지프 후커 장군이 챈슬러빌 전투에서의 패배 책임을 제11 군단 소속 독일계 부대에게 돌린 사건은 독일계 병사들의 큰 분노를 샀다. ''뉴욕 타임스''는 제11 군단을 "네덜란드 겁쟁이들(Dutch cowards)"이라고 비난했지만, 실제로는 제11 군단의 12,000명 병력 중 7,000명이 미국 태생이었고, 나머지 5,000명 중 독일계는 3분의 1에 불과했으며, 이들은 스톤월 잭슨이 이끄는 남부 연합군의 맹렬한 측면 공격에 가장 완강하게 저항했던 부대 중 하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32 인디애나 연대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일계 연대 참전 용사들은 3년의 의무 복무 기간이 끝난 후 재입대하지 않았다.
제32 인디애나 연대의 3년 복무를 마친 참전 용사들은 1864년 9월 7일에 해산되었다. 복무 기간이 만료되지 않은 약 200명의 잔류 병력은 한스 블룸(Hans Blume)의 지휘 아래 4개 중대 규모의 대대로 재편성되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 필립 셰리던 장군의 점령군 소속으로 텍사스주 중부에 주둔했다가, 인디애나폴리스로 돌아와 1865년 12월 4일에 최종적으로 해산되었다.
3. 3. 주요 전투와 활약
올리버 P. 모턴 주지사의 요청으로 제32 인디애나 보병 연대 지휘를 맡은 빌리히는 자신의 연대를 독일어로 매우 전문적인 수준으로 훈련시켰다. 그의 연대는 복무하는 곳마다 좋은 인상을 남겼으며, 빌리히는 병사들의 복지를 세심하게 챙겨 "파파"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가능한 경우 병사들이 신선한 빵을 먹을 수 있도록 제빵용 오븐 건설을 명령하기도 했다.
제32 연대는 1861년 12월 17일 켄터키주 로울렛 역 전투에서 남부 연합군에 맞서 싸워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당시 헨리 폰 트레브라 중령이 이끄는 제32 연대 병력 500명은 테리의 텍사스 레인저와 토머스 C. 힌드먼 장군 휘하의 보병 1,300명이라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할로우 스퀘어(hollow square)" 방진을 형성하여 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 전투에서 제32 연대는 10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당했지만, 남부 연합군 측은 테리 대령을 포함해 33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하는 더 큰 피해를 입었다.
1862년 4월 샤일로 전투 이틀째에 참전한 빌리히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의 부대가 적의 사격에 흔들리자, 그는 병사들 앞에 서서 적에게 등을 보인 채 팔 운동 동작으로 부대를 지휘하며 침착함을 유지시켰다. 또한 연대 군악대에 유럽 공화주의 운동의 상징적인 노래인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하게 하여 사기를 북돋웠다. 안정을 되찾은 제32 연대는 용감하게 총검 공격을 감행했다. 이후 빌리히는 혼 여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1862년 7월, 빌리히는 미국 의용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켄터키주에서 돈 카를로스 뷰엘 소장의 지휘 아래 페리빌 전투에 참전했다. 같은 해 12월 스톤스 강 전투에서는 제14 군단 제2 사단 제1 여단을 지휘하던 중, 타고 있던 말이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남부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는 악명 높은 리비 교도소에 4개월간 수감되었다가 1863년 5월 가석방되어 포로 교환으로 풀려났다.
1863년 말 연방군에 복귀한 빌리히는 제20 군단 제2 사단 제1 여단의 지휘를 다시 맡았다. 그는 툴라호마 작전 중 리버티 갭(Liberty Gap) 방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9월에는 치카모가 전투에서 사단을 이끌었다. 이후 채터누가 작전에서도 활약했다.
특히 채터누가 포위전 중 벌어진 미셔너리 능선 전투에서 빌리히의 여단은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당초 능선 기슭을 정리하라는 명령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빌리히는 독자적인 판단으로 미셔너리 능선 정상을 향한 총공격을 명령했다. 그의 과감한 지휘 아래 제32 인디애나 연대와 제6 오하이오 연대는 가장 먼저 능선 정상에 도달하여 남부 연합군을 격파하고 채터누가 포위를 푸는 데 성공했다. 이는 조지아 침공의 길을 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864년, 빌리히는 윌리엄 테쿰세 셔먼 장군과 함께 애틀랜타 작전에 참여하여 테네시주와 조지아주에서 자신의 여단을 이끌었다. 그러나 5월 레사카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어 더 이상 야전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그는 신시내티, 켄터키주 코빙턴, 뉴포트 등지에서 북군 기지를 지휘하는 행정직을 수행했다. 1865년 10월 21일, 그는 명예 소장으로 추가 진급한 뒤 군에서 물러나 민간인으로 돌아갔다.
3. 4. 전쟁 이후
전쟁 후 빌리히는 신시내티로 돌아와 공무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해밀턴군 감사관 등 주요 공직을 맡았다. 그의 옛 집(1419 Main Street)은 현재도 신시내티에 남아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프로이센 군대에 복무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갔다. 하지만 고령, 건강 문제, 그리고 그의 공산주의적 사상 때문에 입대가 거절당했다. 그는 독일에 머무는 동안 60세의 나이로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오하이오주 세인트메리스에서 사망했으며, 그곳 엘름그로브 묘지에 안장되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에 대한 폭로』에서 "북아메리카 남북 전쟁에서 빌리히는 자신이 단지 공상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4. 남북전쟁 이후의 삶
전쟁 후 빌리히는 신시내티로 돌아와 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해밀턴 군 감사관 등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다. 그가 살았던 집(1419 Main Street)은 현재도 신시내티에 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프로이센 군대에 복무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나이, 건강 상태, 그리고 공산주의적 견해 때문에 군 복무는 거절되었다. 그는 독일에 머무는 동안 6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온 빌리히는 오하이오주 세인트 메리스에서 사망했으며, 그곳 엘름그로브 묘지에 안장되었다.
마르크스는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에 대한 폭로''에서 "북아메리카 남북 전쟁에서 빌리히는 자신이 단지 공상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며 그의 군사적 역량을 인정했다.
5. 평가
마르크스는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에 대한 폭로』의 결론에서 "북아메리카 남북 전쟁에서 빌리히는 자신이 단지 공상가가 아님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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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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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Marx: Biographical memo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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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ical note in the Collected Works of Karl Marx and Frederick Engels: Volume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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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ecution of the Murderer Barthel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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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German American Studies
http://www.artsci.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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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아우구스트 빌리히] ((Willich, August; 18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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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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