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스 에스코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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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레스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의 축구 선수로, 1994년 FIFA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기록한 후 살해당했다. 수비수였던 그는 아틀레티코 나시오날에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을 차지했으며, 콜롬비아 국가대표팀으로 1990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1994년 월드컵에서 자책골을 넣은 후, 에스코바르는 귀국 후 살해당했으며, 이 사건은 콜롬비아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죽음 이후,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4년간 그의 등번호 2번을 결번으로 남겨두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축구 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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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본명 |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살다리아가 |
| 로마자 표기 | Andeureseu Eseukobareu Saldariaga |
| 출생일 | 1967년 3월 13일 |
| 출생지 | 콜롬비아 메데인 |
| 사망일 | 1994년 7월 2일 |
| 사망지 | 콜롬비아 메데인 |
| 키 | 1.84m |
| 포지션 | 중앙 수비수 |
| 애칭 | El Caballero del Fútbol (축구의 신사) |
![]() | |
| 클럽 경력 | |
| 유소년 클럽 |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1985–1986) |
| 클럽 |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1986–1989) 영 보이스 (1989–1990)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1990–1994) |
| 출전 횟수 |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78 (1986-1989) 영 보이스: 8 (1989-1990)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144 (1990-1994) |
| 총 출전 횟수 | 230 |
| 득점 |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0 (1986-1989) 영 보이스: 0 (1989-1990)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0 (1990-1994) |
| 총 득점 | 0 |
| 국가대표 경력 | |
| 국가대표팀 | 콜롬비아 (1988–1994) |
| 출전 횟수 | 51 |
| 득점 | 1 |
2. 생애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살다리아가는 1967년 3월 13일 메데인에서 태어난 콜롬비아의 축구 선수였다.[7][16] 그는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소속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기여했으며,[39]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는 등 남미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1994 FIFA 월드컵 당시 콜롬비아는 강력한 전력으로 우승 후보 중 하나로 꼽혔으나,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루마니아에 패배했다. 16강 진출을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했던 개최국 미국과의 2차전에서 에스코바르는 전반 35분 불운한 자책골을 기록했고, 팀은 1-2로 패배하며 조별 리그 탈락이 확정되었다.
월드컵 이후 대표팀 선수 대부분은 자국 팬들의 비난을 두려워해 귀국을 미뤘지만, 에스코바르는 "자책골에 대해 설명할 의무가 있다"며 홀로 귀국을 결정했다.[41] 그러나 1994년 7월 2일 새벽, 그는 고향 메데인 외곽의 술집 앞에서 움베르토 무뇨스 카스트로라는 괴한에게 총격을 받고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범인은 총격 당시 "자책골 고맙다(Gracias por el auto gol)"고 외쳤으며, 12발의 총을 쏜 것으로 알려졌다.[42] 이 비극적인 사건은 월드컵 기간 중에 발생하여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으며, 이후 "에스코바르의 비극"으로 불리게 되었다.
범인 카스트로는 불법 도박 신디케이트와 연관된 인물로 알려졌으며, 1995년 살해 혐의로 징역 43년을 선고받았으나 모범수로 감형되어 2006년에 출소했다. 에스코바르의 죽음이 단순 보복 범죄인지, 아니면 도박 조직이 개입된 계획적 범죄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남아 있다.
2. 1. 초기 생애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살다리아가는 1967년 3월 13일 메데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다.[7] 칼라산스 학교를 다녔고 콘라도 곤잘레스 연구소를 졸업했다. 프로 축구 선수가 되기 전에는 학교 축구팀에서 활동했다.[16]그의 아버지 다리오 에스코바르는 은행가였으며, 청소년들이 거리에서 방황하는 대신 축구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의 형 산티아고는 전 축구 선수로, 아틀레티코 나시오날에서 안드레스와 함께 뛰었으며 1998년 팀 매니지먼트로 전향했다.
2. 2. 클럽 경력
에스코바르는 선수 경력 동안 수비수로 활약했으며, 등번호는 2번이었다. 그는 ''"엘 카바예로 델 푸트볼"'' ("축구의 신사")과 "불멸의 2번"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8] 클럽 경력에서는 주로 콜롬비아의 아틀레티코 나시오날과 스위스의 영 보이즈에서 활동했다.[8]1989년에는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구단주로 있던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소속으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9][39]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당시 이탈리아의 명문 클럽 인테르가 그의 영입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39] 같은 해 인터컨티넨탈컵에서는 AC 밀란과 맞붙었으나 0-1로 패배했다.[39]
1994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에스코바르는 AC 밀란으로부터 구체적인 계약 제안을 받았으며,[10][11][12] 이적이 임박했다는 보도가 있었다.[40]
2. 3. 국가대표 경력

안드레스 에스코바르는 1988년 3월 30일 캐나다와의 경기에서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이 경기에서 콜롬비아는 3-0으로 승리했다. 그의 첫 국제 대회는 1988년 루스컵이었으며, 1988년 5월 24일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경기(1-1 무승부)에서 자신의 유일한 국가대표팀 득점을 기록했다. 이는 콜롬비아 선수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넣은 첫 골이기도 했다.[39]
1989년, 그는 22세의 나이로 1989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여 4경기에 출전했지만, 팀은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같은 해 1990년 FIFA 월드컵 예선에도 참여하여 콜롬비아의 본선 진출에 기여했다. 콜롬비아는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이스라엘을 합계 1-0으로 꺾고 1990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에스코바르는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모든 경기에 출전하여 안정적인 수비로 팀의 사상 첫 16강 진출을 이끌었으나, 16강전에서 카메룬에 1-2로 패배하며 탈락했다.
이후 1991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여 7경기를 뛰었으며, 대표팀 주장을 맡기도 하는 등 남미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1994년 FIFA 월드컵 예선에는 출전하지 않았지만[11], 본선 스쿼드에는 포함되었다. 당시 콜롬비아는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를 5-0으로 대파하는 등 강력한 전력으로 조 1위를 차지했고, 카를로스 발데라마, 파우스티노 아스프리야, 프레디 린콘 등을 보유하여 우승 후보로 꼽혔다. 월드컵 직전 에스코바르는 AC 밀란 이적이 유력한 상황이었다.[40]
그러나 1994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 콜롬비아는 부진했다. 조별 리그 첫 경기에서 루마니아에 1-3으로 패배했고, 16강 진출을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했던 개최국 미국과의 2차전에서 에스코바르는 전반 35분 불운한 자책골을 기록했다. 결국 콜롬비아는 이 경기에서 1-2로 패배하며 조별 리그 탈락이 확정되었다.
| 팀 | 연도 | 출장 | 골 |
|---|---|---|---|
| 콜롬비아 | 1988 | 6 | 1 |
| 1989 | 16 | 0 | |
| 1990 | 5 | 0 | |
| 1991 | 8 | 0 | |
| 1992 | 2 | 0 | |
| 1993 | 1 | 0 | |
| 1994 | 13 | 0 | |
| 합계 | 51 | 1 | |
콜롬비아는 1994년 FIFA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를 5-0으로 꺾는 등 강력한 모습으로 본선에 진출하며 큰 기대를 모았다. 에스코바르 역시 대표팀의 주축 수비수로 1994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
3. 1994년 FIFA 월드컵
그러나 본선 조별리그 미국과의 경기에서 에스코바르는 치명적인 자책골을 기록했고, 이는 콜롬비아의 조별리그 탈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월드컵 이후 귀국한 에스코바르는 이 자책골과 관련하여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3. 1. 남미 예선
콜롬비아는 1994년 FIFA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서 강력한 모습을 보이며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특히 예선 1조 최종전에서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원정 경기에서 5-0이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1986년 월드컵 우승, 1990년 월드컵 준우승을 차지했고, 코파 아메리카 2연패를 달성한 강팀이었기에 이 결과는 더욱 주목받았다.
이러한 뛰어난 경기력을 바탕으로 콜롬비아는 조 1위를 차지하며 1994년 미국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이는 콜롬비아의 2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었다. 당시 콜롬비아 대표팀은 공격진에 카를로스 발데라마, 파우스티노 아스프리야, 프레디 린콘, 아돌포 발렌시아 등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펠레가 우승 후보로 꼽을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갖춘 팀으로 평가받았다.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역시 콜롬비아 대표팀의 핵심 수비수로서 본선 참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3. 2. 본선
콜롬비아는 1994년 FIFA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를 5-0으로 대파하는 등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1994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당시 펠레가 우승 후보로 꼽을 정도로 강력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1994년 FIFA 월드컵 본선 A조에서 콜롬비아는 게오르게 하지가 이끄는 루마니아에게 1-3으로 패배했다. 이어진 개최국 미국과의 2차전은 결선 토너먼트 진출을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경기였다. 콜롬비아 수비의 핵심으로 선발 출전한 에스코바르는 전반 35분, 미국 미드필더 존 하키스의 크로스를 막으려다 공을 자신의 골문으로 넣는 자책골을 기록했다.[13] 이 골은 미국이 1-0으로 앞서 나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결국 콜롬비아는 미국에 1-2로 패배했다. 이 패배로 콜롬비아는 마지막 스위스전에서 2-0으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가 미국을 1-0으로 꺾으면서 1승 2패, A조 최하위로 조별리그 탈락이 확정되었다.[14]
조별리그 통과를 기대했던 콜롬비아 국민들은 대표팀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설상가상으로 선수들은 자국 내 범죄 조직인 메데인 카르텔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많은 선수들이 보복을 두려워하며 귀국을 주저했고, 프란시스코 마투라나 감독 역시 에콰도르로 피신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에스코바르는 자책골에 대한 책임감으로 "나는 그 자책골에 대해 팬들과 언론에 설명할 의무가 있다"며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귀국을 결심했다.[41]
월드컵 탈락 5일 후인 1994년 7월 1일 저녁, 에스코바르는 친구들과 메데인의 한 술집에 들렀다가 다음 날 새벽 3시경 나이트클럽 주차장에서 혼자 차 안에 있었다. 이때 세 명의 남자가 나타나 그와 언쟁을 벌였고, 두 명이 권총을 꺼내 에스코바르에게 .38구경 권총으로 6발의 총격을 가했다.[15][16] 범인 움베르토 무뇨스 카스트로는 총을 쏠 때마다 축구 해설자들이 골 장면에서 외치는 ¡Gol!|골!spa이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17][42] 범인들은 토요타 픽업 트럭을 타고 도주했고, 에스코바르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45분 만에 사망했다.[15][18][19] 향년 27세였다.
이 살인 사건은 자책골에 대한 보복으로 널리 알려졌다.[20] 에스코바르의 사망 소식은 대회 기간 중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으며, 직후 열린 결선 토너먼트 1회전 독일-벨기에전과 스페인-스위스전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킥오프 전에 묵념이 거행되었다. BBC 해설가 앨런 한센은 아르헨티나와 루마니아 경기 중계 중 부적절한 발언("아르헨티나 수비수는 그런 실수로 총에 맞을 만하다")으로 공개 사과하기도 했다.[21] 에스코바르의 장례식에는 12만 명 이상이 참석했으며, 2002년 7월 메데인시는 그를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22]
사건 다음 날,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 경호원으로 일하던 움베르토 카스트로 무뇨스가 체포되어 살해 혐의를 자백했다.[23] 카스트로는 또한 경기 결과에 크게 베팅하여 돈을 잃었다고 알려진 산티아고 갈론의 운전사로 일했다.[24] 그는 1995년 6월 에스코바르 살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43년 형을 선고받았다. 2001년 형사 규정에 따르면서 형량이 나중에 26년으로 감형되었다. 카스트로는 2005년 수감 중 노동과 학업에 대한 공로로 모범적인 행동을 보이며 석방되었다. 그의 공범 3명은 무죄 방면되었다.[25]
갈론 형제가 카스트로를 범인으로 지목하기 위해 검찰에 뇌물을 줬다는 의혹도 있는데, 검찰은 카스트로가 단순히 갈론 형제의 명령을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들을 유죄로 판결할 만한 증거가 부족했다. 살인 당시 에스코바르의 여자친구였던 파멜라 카스카르도는 갈론 형제가 정부 관료에게 뇌물을 줬다는 의혹은 카스트로가 전국적인 유명 인사를 살해하고 11년만 복역한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믿고 있다.
한편, 에스코바르의 전 감독인 프란시스코 마투라나는 2013년, 그의 살인이 축구나 월드컵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콜롬비아 역사에서 폭력적인 시기에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부인했다.[26]
4. 에스코바르 피살 사건
1994년 FIFA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자책골을 기록한 후 콜롬비아로 귀국했던 안드레스 에스코바르는 1994년 7월 2일, 메데인 교외에서 총격으로 사망했다. 향년 27세였다. 범인은 총격 당시 에스코바르의 자책골을 조롱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43][42] 월드컵 기간 중 발생한 이 사건은 전 세계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대회 일부 경기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묵념이 진행되기도 했다.
사건의 범인으로 움베르토 무뇨스 카스트로가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조기 석방되어 논란이 있었다.[25] 정확한 범행 동기는 자책골에 대한 보복으로 알려졌지만, 불법 도박 신디케이트나 마약 카르텔의 개입 가능성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되며[43][24] 여전히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에스코바르의 비극'으로 불리며 축구 역사에 기록되었다.
4. 1. 사건 발생
에스코바르의 자책골은 1994년 FIFA 월드컵 A조 조별리그 2차전이었던 개최국 미국과의 경기에서 나왔다. 미국 미드필더 존 하키스가 올린 크로스를 걷어내려 했으나, 공은 그의 발에 맞고 콜롬비아 골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골로 미국이 1-0으로 앞서 나갔고, 결국 경기는 미국의 2-1 승리로 끝났다.[13] 이 패배로 콜롬비아는 다음 라운드 진출을 위해 마지막 스위스전을 반드시 이기고, 미국이 루마니아에 승리하기를 바라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콜롬비아는 스위스를 2-0으로 이겼지만, 루마니아가 미국을 1-0으로 꺾으면서 결국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14]당시 콜롬비아는 1994년 FIFA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를 5-0으로 대파하는 등 강력한 모습을 보여 펠레가 우승 후보로 꼽을 정도였기에, 조별리그 탈락은 콜롬비아 국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대표팀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고, 심지어 선수들은 자국 내 범죄 조직인 메데인 카르텔로부터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선수들이 귀국을 망설였고, 프란시스코 마투라나 감독마저 에콰도르로 피신해야 했다.
하지만 에스코바르는 달랐다. 그는 "나는 그 자책골에 대해 팬들과 언론에 설명할 의무가 있다"며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귀국을 결심했다.[41] 토너먼트가 끝난 후, 그는 라스베이거스의 친척 집 방문 계획을 취소하고 콜롬비아로 돌아왔다.[9]
1994년 7월 2일 새벽(현지 시간 7월 1일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월드컵 탈락 5일 후, 에스코바르는 친구들과 메데인 엘 포블라도 지역의 한 술집에 들렀다가 '엘 인디오' 나이트클럽으로 이동했다. 새벽 3시경, 그는 클럽 주차장에 주차된 자신의 차 안에 혼자 있었는데, 세 명의 남자가 다가와 시비를 걸었다. 두 남자가 .38구경 권총을 꺼내 에스코바르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15][16] 여자친구의 증언과 다른 보도에 따르면, 범인은 총을 쏠 때마다 "Gracias por el autogol|es"(자살골 참 고맙다)라고 비아냥거렸으며, 총 12발(다른 소스에서는 6발[16])을 쏘면서 한 발씩 쏠 때마다 축구 해설자들이 외치는 것처럼 "Gol|es"(골!)이라고 외쳤다고 한다.[17][42][43] 범인들은 토요타 픽업트럭을 타고 현장에서 도주했고, 에스코바르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45분 만에 사망했다.[15][18][19] 향년 27세였다.
이 살인 사건은 월드컵 기간 중에 발생하여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20] 사건 직후 열린 독일과 벨기에, 스페인과 스위스의 16강전 경기 시작 전에는 에스코바르를 추모하는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영국 BBC의 축구 해설가 앨런 한센은 아르헨티나와 루마니아의 16강 경기 중계 도중 "아르헨티나 수비수는 그런 실수로 총에 맞을 만하다"는 실언을 하여 공개적으로 사과하기도 했다.[21]
에스코바르의 장례식에는 12만 명이 넘는 추모객이 참석했으며, 메데인 시는 2002년 7월 그의 동상을 세워 그를 기렸다.[22]
사건 발생 다음 날인 1994년 7월 2일 밤,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 경호원으로 일하던 움베르토 카스트로 무뇨스가 체포되었고, 다음 날 에스코바르 살해 혐의를 자백했다.[23] 무뇨스는 당시 콜롬비아 대표팀의 경기 결과에 거액의 돈을 걸었다가 잃은 것으로 알려진 산티아고 갈론의 운전사였다.[24] 그는 1995년 6월 살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43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형량이 26년으로 감형되었고, 2005년 수감 중 모범적인 행동을 이유로 약 11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의 공범 3명은 무죄로 풀려났다.[25] 갈론 형제가 검찰에 뇌물을 주어 무뇨스를 단독 범인으로 만들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증거 부족으로 유죄 판결을 받지는 않았다. 에스코바르의 당시 여자친구였던 파멜라 카스카르도는 이러한 의혹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고 있다.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는 자책골에 대한 보복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20], 불법 도박 신디케이트의 개입설 등 다른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43] 한편, 에스코바르의 전 감독이었던 프란시스코 마투라나는 2013년 인터뷰에서 그의 죽음이 축구나 월드컵과는 관련이 없으며, 당시 콜롬비아의 폭력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 "단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26]
4. 2. 범인과 배경
콜롬비아는 1994년 FIFA 월드컵 남미 지역 예선에서 아르헨티나를 5-0으로 꺾는 등 뛰어난 경기력으로 본선에 진출했고, 펠레가 우승 후보로 꼽을 정도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본선 A조에서는 루마니아와 개최국 미국에 연패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특히 미국과의 2차전에서 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자책골을 기록하며 1-2로 패배한 것이 결정적이었다.[13] 미국 미드필더 존 하키스의 크로스를 막으려다 공이 자신의 골문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패배로 콜롬비아는 스위스와의 최종전에서 2-0으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가 미국을 1-0으로 이기면서 조 최하위로 탈락했다.[14]예상치 못한 조별리그 탈락에 콜롬비아 국민들은 대표팀을 향해 엄청난 비난을 쏟아냈다. 심지어 선수들은 자국 내 범죄 조직인 메데인 카르텔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았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많은 선수들이 보복을 두려워하여 귀국을 망설였고, 프란시스코 마투라나 감독 역시 에콰도르로 피신할 정도였다. 하지만 에스코바르는 자책골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팬들과 언론에 설명할 의무가 있다"며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귀국을 결심했다.[9][41]
1994년 7월 1일 저녁, 월드컵 탈락 5일 후 에스코바르는 친구들과 메데인 엘 포블라도 지역의 술집과 나이트클럽을 찾았다.[15] 다음 날인 7월 2일 새벽 3시경, 엘 인디오 나이트클럽 주차장에서 혼자 차에 있던 에스코바르에게 세 명의 남자가 접근해 시비를 걸었다. 그중 두 명이 권총을 꺼내 에스코바르를 향해 .38구경 권총으로 6발(다른 증언에서는 12발[42])을 발사했다.[15][16] 범인은 총을 쏠 때마다 축구 해설자들이 외치는 것처럼 '골!'(Gol|골es)이라고 외쳤다는 증언도 있다.[17][42] 다른 증언에 따르면 범인이 "자살골 참 고맙다"(Gracias por el autogol|그라시아스 포르 엘 아우토골es)라고 비아냥거렸다고도 한다.[42] 범인들은 토요타 픽업 트럭을 타고 도주했고, 에스코바르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45분 만에 사망했다.[15][18][19] 향년 27세였다.
이 살인 사건은 에스코바르의 자책골에 대한 보복으로 널리 알려졌다.[20] 월드컵 기간 중 일어난 이 비극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사건 직후 열린 독일 대 벨기에, 스페인 대 스위스의 16강전에서는 경기 시작 전 에스코바르를 추모하는 묵념이 진행되었다. 영국 BBC의 축구 해설가 앨런 한센은 사건 다음 날 경기 중계 중 "아르헨티나 수비수는 그런 실수로 총에 맞을 만하다"는 부적절한 발언을 하여 공개 사과하기도 했다.[21] 에스코바르의 장례식에는 12만 명이 넘는 추모객이 참석했으며, 2002년 7월 메데인 시는 그를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22]
사건 당일 밤,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 경호원 출신인 움베르토 무뇨스 카스트로(Humberto Muñoz Castro|움베르토 무뇨스 카스트로es)가 체포되었고, 다음 날 살해 혐의를 자백했다.[23] 카스트로는 당시 콜롬비아의 불법 도박 신디케이트 조직원인 갈론 형제의 운전사였으며, 이들은 월드컵 경기 결과에 거액의 돈을 걸었다가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24] 카스트로는 1995년 6월 유죄 판결을 받고 4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001년 형사 규정에 따라 형량이 26년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카스트로는 2005년 수감 중 모범적인 행동을 이유로 추가 감형을 받아 복역 11년 만에 석방되었다.[25] 그의 조기 석방은 콜롬비아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다.
갈론 형제가 카스트로를 범인으로 내세우기 위해 검찰에 뇌물을 주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검찰은 카스트로가 갈론 형제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형제를 기소하지 못했다. 에스코바르의 당시 여자친구였던 파멜라 카스카르도는 카스트로가 유명 인사를 살해하고도 11년 만에 석방된 사실 자체가 갈론 형제의 뇌물 의혹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에스코바르의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프란시스코 마투라나는 2013년 인터뷰에서 에스코바르의 죽음이 축구나 월드컵과는 관련이 없으며, 당시 콜롬비아의 폭력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26] 범행의 정확한 동기가 개인적인 원한인지, 아니면 거액의 돈을 잃은 도박 조직의 개입인지는 여전히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4. 3. 사건의 여파
1994년 FIFA 월드컵 조별 리그가 끝난 후 콜롬비아 대표팀은 미국 현지에서 해산되었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국민들의 비난이나 보복을 두려워하며 귀국을 거부하고 미국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에스코바르는 "나는 그 자책골에 대해 팬들과 언론에 설명할 의무가 있다"며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귀국을 결정했다.[41]그러나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94년 7월 2일 새벽 3시 30분경, 에스코바르는 메데인 교외의 한 술집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오던 중 괴한의 총격을 받아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여자친구와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범인 움베르토 무뇨스 카스트로는 총을 쏘기 전 "Gracias por el autogol|그라시아스 포르 엘 아우토골spa(자책골 고마워)"이라고 비아냥거렸으며[42], 12발의 총탄을 발사하면서 한 발씩 쏠 때마다 축구 해설자가 외치듯 "Gol|골spa!"이라고 외쳤다고 한다.[43][42]
아직 월드컵 대회 기간 중에 일어난 이 충격적인 사건은 전 세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 직후 열린 독일과 벨기에, 스페인과 스위스의 16강전에서는 경기 시작 전에 에스코바르를 추모하는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훗날 '에스코바르의 비극'으로 불리며 축구 역사에 기록되었다.
사건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다. 범인이 에스코바르 개인에게 원한을 품고 저지른 단독 범행인지, 아니면 월드컵 결과에 거액의 돈을 걸었다가 손해를 본 불법 도박 신디케이트가 배후에 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43][42] 도박 신디케이트의 보디가드로 알려진 범인 카스트로는 1995년 6월 살해 혐의로 체포되어 콜롬비아 법원에서 징역 43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모범수라는 이유로 감형되어 2006년에 출소했다.
에스코바르를 기리기 위한 움직임도 이어졌다.
5. 에스코바르의 유산
안드레스 에스코바르의 비극적인 죽음은 콜롬비아의 국제적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4] 생전에 콜롬비아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그는 자국 내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의 사후,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그가 사용했던 등번호 2번을 4년 동안 결번으로 지정하며 추모했다. 이 사건은 콜롬비아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많은 선수들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표팀 은퇴나 프로 선수 은퇴를 선택하는 등 혼란을 겪었다.
에스코바르를 기리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그의 가족은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프로젝트'를 설립했으며[29], 메데인 시는 2001년 코파 아메리카 개최 전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30] 또한, 2006년 독일에서 열린 첫 FIFA 공인 길거리 축구 대회의 우승컵은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컵'으로 명명되었다.
이 사건은 축구 용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own goal'의 번역어를 기존의 '자살골'(自殺골)에서 선수의 책임을 강조하는 '자책골'(自責골)로 변경하였다. 일본 역시 비슷한 이유로 '자살점'(自殺点)이라는 표현 대신 '오운골'(オウンゴール, 자책골)을 사용하게 되었다.
에스코바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콜롬비아 팬들, 특히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팬들에게 깊은 애도와 존경의 대상이다. 그는 사망 직전 신문 칼럼을 통해 "가장 놀랍고 드문 경험이었습니다.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에 곧 다시 만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27][28]
5. 1. 추모와 기념
에스코바르의 살해는 국제적으로 콜롬비아의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키는 결과를 낳았다.[4] 생전 에스코바르는 콜롬비아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자국 내에서 많은 찬사를 받았다.그의 사후,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에스코바르가 사용했던 등번호 2번을 4년 동안 결번으로 지정하여 그를 추모했다. 또한 이 사건은 콜롬비아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어 혼란에 빠뜨렸으며, 많은 선수들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국가대표팀에서 물러나거나 프로 축구계를 떠나는 일이 이어졌다.
에스코바르가 사망한 후, 그의 가족은 어려운 환경의 어린이들이 축구를 배울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프로젝트'를 설립했다.[29] 2001년 코파 아메리카 개최 전, 메데인 시는 에스코바르를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30]
사망 12주기인 2006년 7월 2일, 독일에서는 최초의 FIFA 공인 길거리 축구 대회인 '스트리트 풋볼 월드 페스티벌 2006'(street football world festival 2006영어)이 개막했다. 이 대회의 우승컵은 FIFA의 페어플레이 정신과 비폭력의 상징으로서 에스코바르를 기리기 위해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컵'''(Copa Andrés Escobares)으로 명명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축구 용어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전까지 'own goal'을 '자살골'(自殺골)로 번역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선수의 책임이라는 의미를 담은 '자책골'(自責골)로 용어를 변경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살점'(自殺点)이라는 표현 대신 '오운골'(オウンゴール, 자책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에스코바르는 오늘날에도 콜롬비아 축구 팬들, 특히 그가 몸담았던 아틀레티코 나시오날 팬들에게 깊은 애도와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살해되기 직전 신문 칼럼을 통해 1994년 FIFA 월드컵에서의 경험에 대해 "가장 놀랍고 드문 경험이었습니다.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기 때문에 곧 다시 만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27][28]
5. 2.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프로젝트
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사망한 후, 그의 가족은 불우한 아이들이 축구를 배울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프로젝트'를 설립했다.[29] 이는 생전에 콜롬비아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에스코바르의 뜻을 잇는 활동이다.5. 3.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컵
2006년 7월 2일, 안드레스 에스코바르의 사망 12주기를 맞아 독일에서 최초의 FIFA 공인 길거리 축구 대회인 'street football world festival 2006'이 개최되었다. 이 대회의 우승 트로피는 FIFA의 이념인 페어 플레이 정신과 비폭력의 상징으로서 에스코바르를 기리기 위해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컵'''(Copa Andrés Escobar|코파 안드레스 에스코바르es)으로 명명되었다.6. 기타
- 콜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등번호 2번을 사용했다. 그의 사망 이후 4년 동안 콜롬비아 대표팀은 2번을 결번으로 지정했다.
- 이 사건으로 인해 콜롬비아 국내 축구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 또한, 많은 선수들이 에스코바르와 같은 비극을 겪을 것을 두려워하여 국가대표 선수직을 사퇴하거나 프로 축구계에서 은퇴하는 경우가 끊이지 않았다.
- 2006년, 최초의 FIFA 공인 스트리트 축구 대회인 'street football world festival 2006'이 에스코바르의 기일인 7월 2일을 개막일로 하여 독일에서 개최되었다. 해당 대회의 우승 트로피는 FIFA의 이념인 페어 플레이 정신과 비폭력의 상징으로서 '안드레스 에스코바르 컵(Copa Andrés Escobar)'이라고 명명되었다.
- 일본에서는 1994년까지 자책골을 '자살점(自殺点)'이라고 불렀으나, 에스코바르가 살해된 사건을 계기로, 부정적인 의미의 '자살점'이라는 명칭을 폐지하고 '오운골(Own goal)'로 변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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