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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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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상드르 리보는 1842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파드칼레 지역구 하원의원을 거쳐 외무장관, 총리, 재무장관 등을 역임하며 프랑스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외무장관 시절 러시아와의 동맹을 추진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여러 차례 내각에서 요직을 맡아 활약했다. 1909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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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리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렉상드르 리보 1913년 사진
알렉상드르 리보 (1913년)
원어 이름Alexandre Ribot
직책
임기 시작1892년 12월 6일
임기 종료1893년 4월 4일
대통령사디 카르노
이전에밀 루베
다음샤를 뒤퓌
임기 시작1895년 1월 26일
임기 종료1895년 11월 1일
대통령펠릭스 포르
이전샤를 뒤퓌
다음레옹 부르주아
임기 시작1914년 6월 9일
임기 종료1914년 6월 13일
대통령레몽 푸앵카레
이전가스통 두메르그
다음르네 비비아니
임기 시작1917년 3월 20일
임기 종료1917년 9월 12일
대통령레몽 푸앵카레
이전아리스티드 브리앙
다음폴 팽르베
개인 정보
출생일1842년 2월 7일
출생지생토메르, 프랑스 왕국
사망일1923년 1월 13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배우자메리 웰드 버치
정당없음

2. 생애

1890년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으며, 이는 1894년 러불동맹 체결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던 1892년에는 총리직을 겸임했으나, 파나마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1893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895년 다시 총리직에 올라 재무장관을 겸했다. 이 시기 마다가스카르에 보호령을 세우기 위한 원정을 지원했지만, 또 다른 자금 스캔들에 연루되어 다시 한번 사임했다.

1906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09년에는 파드칼레주를 지역구로 하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1923년 사망할 때까지 상원의원직을 유지했다.

1914년 잠시 총리직을 다시 맡았고, 이후 법무장관을 거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17년에는 다시 총리 겸 외무장관을 맡아 전쟁을 이끌었으며, 이 시기에 필리프 페탱을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23년 1월 13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42년 2월 7일 파드칼레주 생토메르에서 태어났다.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뛰어난 학업 성과를 거두어 법학부에서 lauréat|로레아fra를 수상했다. 졸업 후 변호사로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으며, 변호사 협회의 비서를 지냈다. 또한 ''비교법학회''(Société de législation comparée|소시에테 드 레지슬라시옹 콩파레fra)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1875년과 1876년에는 법무부에서 형사 담당 국장과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2. 2. 정치 입문

1877년 그는 정계에 입문하여, 브로이 내각 시절 법적 저항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인 1878년, 그는 고향인 파드칼레불로뉴 지역구에서 온건 공화주의자로 하원 의원에 선출되었다.[1]

그는 열정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웅변으로 영향력을 얻었으며, 불법 단체에 대한 강경 조치를 반대하는 글을 ''파르망''지에 기고하며 입지를 넓혔다. 특히 재정 문제에 집중하여 1882년 예산 보고관이 되었다. 그는 급진당에 맞서는 공화당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부상했으며, 단명한 감베타 내각을 비판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페리 내각의 통킹 원정 예산안에 반대했으며, 1885년 클레망소가 페리 내각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같은 해 총선에서 파드칼레 지역 공화당의 참패로 낙선하여 1887년에야 하원에 복귀할 수 있었다.[1]

3. 정치 경력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의 정치인으로, 여러 차례 총리와 장관직을 역임했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법무부에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1878년 파드칼레주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며 정치에 입문했다. 1885년 총선에서 잠시 낙선했으나, 1887년 다시 당선되어 1909년까지 하원의원직을 유지했다.

1890년 외무장관에 임명되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고, 이는 1894년 러불 동맹 체결로 이어졌다. 1892년에는 외무장관직을 유지하며 총리직을 겸임했으나, 파나마 스캔들의 여파로 1893년 사임했다. 1895년 다시 총리 겸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마다가스카르 원정을 지원했으나, 또 다른 자금 문제로 인해 물러났다.

190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09년에는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1914년 잠시 총리직을 맡았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는 재무장관으로 활동했다. 1917년 다시 총리 겸 외무장관에 임명되어 필리프 페탱을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전쟁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3. 1. 하원의원 시절

1877년 정계에 입문하여, 브로이 내각 시기 법적 저항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인 1878년, 고향인 파드칼레주불로뉴 지역구에서 온건 공화주의자 후보로 출마하여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1]

리보는 열정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웅변으로 의회 내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파르망''지에 불법적인 단체에 대한 폭력적인 조치를 반대하는 글을 기고하며 자신의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 특히 재정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 1882년에는 예산 보고관을 맡기도 했다. 그는 급진당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감베타의 단명 내각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또한 페리 내각이 추진한 통킹 원정 관련 예산안에 반대했으며, 1885년에는 클레망소와 함께 페리 내각을 무너뜨리는 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총선에서는 파드칼레 지역 공화당의 전반적인 부진 속에서 낙선하였고, 1887년에 다시 하원에 진입할 수 있었다.[1]

3. 2. 장관 및 총리 재임

1890년 프레시네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 그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으며, 이는 1891년 프랑스 함대의 크론슈타트 방문과 이후 1894년 러불 동맹 체결로 이어지는 중요한 정책 변화였다.[1] 그는 영국 제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 법률에 관한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1]

1892년 2월, 에밀 루베 내각이 출범하면서 외무장관직을 유지한 채 총리직을 겸임하게 되었다.[1] 그러나 정부는 상원이 예산 수정안 수락을 거부하면서 1893년 3월 사임했다.[1]

아래는 1892년 12월부터 1893년 4월까지의 내각 구성이다.[3]

직책성명
총리외무부 장관알렉상드르 리보
육군부 장관샤를 드 프레시네
내무부 장관에밀 루베
재무부 장관모리스 루비에 (1892년 12월 13일까지)
피에르 티라르 (1892년 12월 13일부터)
법무부 장관레옹 부르주아
해군부 장관 겸 식민부 장관오귀스트 뷔르도
공공 교육부, 미술부 및 종교부 장관샤를 뒤퓌
농업부 장관쥘 드벨
공공 사업부 장관쥘 비에트
상공부 장관쥘 지그프리드



1895년 1월 펠릭스 포르 대통령 당선 후, 리보는 다시 총리로 임명되어 재무장관직을 겸임했다.[1] 이 시기 그는 6월 10일 러불 동맹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1] 그의 정부는 제2차 마다가스카르 원정을 후원했으나, 이 원정의 실패와 카르모 파업 등으로 나타난 심각한 국내 사회 상황이 그의 몰락 원인이 되었다.[1] 결국 정부는 ''수드 철도'' 문제로 패배하여 10월 30일 사임했다.[1]

아래는 1895년 1월부터 10월까지의 내각 구성이다.[3]

직책성명
총리 겸 재무부 장관알렉상드르 리보
외무부 장관가브리엘 아노토
육군부 장관에밀 쥐를랭댕
내무부 장관조르주 레그
법무부 장관뤼도비크 트라리에
해군부 장관아르망 루이 샤를 귀스타브 베스나르
공공 교육부, 미술부 및 종교부 장관레몽 푸앵카레
농업부 장관앙투안 가도
식민지부 장관에밀 쇼탕
공공 사업부 장관뤼도비크 뒤피-뒤탕
우체국 및 전신부 장관 겸 상공부 장관앙드레 르봉



이후 쥘 멜린 내각 붕괴 시(1898년) "화해" 내각 구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 그는 에밀 콩브 내각의 정교분리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장 조레스와의 동맹을 비난했으며, 특히 반성직자 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1801년 정교 조약을 대체할 새로운 체제 수립의 필요성은 인정했다.[1] 1902년에는 이집트 자원 접근을 대가로 이집트 부채를 취소하는 협상에 참여했는데, 이는 그의 개인적인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경제적 조작이라는 평가도 있다.[2] 1906년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1] 1909년에는 파드칼레 지역구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3]

1914년 6월 9일, 리보는 총리 겸 법무부 장관으로 다시 정부를 구성했으나, 급진사회당을 비롯한 여러 단체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아 단 하루 만에 붕괴되었다.[3]

아래는 1914년 6월의 단명 내각 구성이다.[3]

직책성명
총리 겸 법무부 장관알렉상드르 리보
외무부 장관레옹 부르주아
육군부 장관테오필 델카세
내무부 장관폴 페이트랄
재무부 장관에티엔 클레망텔
노동사회보장부 장관장-바티스트 아벨
해군부 장관에밀 쇼탕
공공 교육 및 미술부 장관아르튀르 데소이에
농업부 장관아드리앙 다리아크
식민지부 장관모리스 모누리
공공 사업부 장관장 뒤퓌
우체전신부 장관 겸 상공부 장관마르크 레빌



1917년, 리보는 다시 한번 총리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이 시기 그는 필리프 페탱을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아래는 1917년 3월부터 9월까지의 내각 구성이다.[3]

직책성명
총리외무부 장관알렉상드르 리보
육군부 장관폴 팽르베
내무부 장관루이 말비 (1917년 9월 1일까지)
테오도르 스테그 (1917년 9월 1일부터)
재무부 장관조제프 티에리
군수 및 전쟁 물자부 장관알베르 토마
노동 및 사회 보장부 장관레옹 부르주아
법무부 장관르네 비비아니
해군부 장관뤼시앙 라카즈 (1917년 8월 10일까지)
샤를 쇼메 (1917년 8월 10일부터)
공공 교육 및 미술부 장관테오도르 스테그
농업부 장관페르낭 다비드
총공급 및 해상 운송부 장관
(1917년 7월 4일 해상 운송 폐지, 총공급부 장관으로 유지)
모리스 비올레트
식민지부 장관앙드레 마지노
공공 사업 및 운송부 장관조르주 데플라
우편 및 전신부 장관 겸 상업 및 산업부 장관에티엔 클레망텔


3. 3.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재정과 외교 문제에 정통했던 알렉상드르 리보의 경험은 그가 다시 한번 프랑스 정치의 중심 무대에 서는 계기가 되었다. 1914년 8월 27일, 그는 르네 비비아니가 이끄는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915년 10월 28일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비비아니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리보는 재무장관직을 계속 수행했다.[3]

1916년 2월 7일, 리보는 런던을 방문하여 영국 재무부 장관과 회담을 가졌으며, 같은 해 12월 브리앙 총리가 내각을 개편했을 때도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

브리앙 내각이 붕괴된 후, 푸앵카레 대통령은 리보에게 다시 내각 구성을 요청했다. 리보는 이를 수락하여 1917년 3월 19일 총리직과 함께 외무부 장관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총리 취임 직후인 3월 21일, 그는 하원에서 정책 방향을 발표하며 "과거에 우리에게서 빼앗긴 영토(알자스-로렌)를 되찾고, 프랑스가 마땅히 받아야 할 배상과 안보 보장을 확보하며, 민족의 권리와 자유 존중에 기반한 지속 가능한 평화를 준비하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이 시기 리보는 필리프 페탱을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1917년 7월 31일, 리보는 독일 제국의 총리 게오르크 미하엘리스에게 보낸 공식 답변에서, 같은 해 초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와 라인 강 좌안의 독일 영토를 자치 국가로 만드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해당 지역을 프랑스 영토로 병합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분명히 밝혔다.[3]

3. 4. 상원의원 및 사망

1906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위촉되었고, 1909년에는 파드칼레주를 지역구로 하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4년에 짧은 기간 동안 총리직을 다시 역임한 후 법무장관에 지명되었으며,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재무장관에 지명되었다.

1917년에 다시 총리 겸 외무장관에 올랐는데, 이 시기 동안 필리프 페탱을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리보의 마지막 내각은 제1차 세계 대전의 가장 암울한 시기였으며, 니벨 공세의 실패와 그에 따른 프랑스 군인들의 반란을 겪었다. 루이 말비 내무 장관 해임 결정 이후, 그의 정부는 9월 2일에 사임했으나, 6일 뒤 구성된 폴 팽르베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독일의 평화 제안을 "함정"으로 간주하고 거부한 것에 대한 격렬한 비판으로 인해 10월 16일에 최종적으로 사임했다.[3]

리보는 이후 정계를 떠났고, 1923년 1월 13일 파리에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생토메르의 주요 학교인 리세 알렉상드르 리보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4. 정책 및 업적

알렉상드르 리보는 여러 차례 총리직과 장관직을 역임하며 프랑스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에는 부랑주의 운동에 대한 우려 속에서 "공화국 집중" 정책을 지지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1] 그는 특히 재정 분야에서 전문성을 보였으며, 1895년 총리직과 재무 장관을 겸임했고[1],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가 방위 내각(1914년 8월)과 아리스티드 브리앙 내각(1915년 10월)에서 재무부 장관을 맡아 전쟁 재정을 관리하는 중책을 수행했다.[3] 또한, 러시아와의 동맹을 추진하고 공식화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1]

그러나 그의 정치 여정에는 어려움도 있었다. 1895년 그의 내각은 제2차 마다가스카르 원정의 예상치 못한 인명 및 비용 손실과 국내 사회 불안정 문제로 인해 총사퇴했다.[1] 또한 1902년 이집트 자원 접근권을 얻기 위해 이집트 부채를 탕감한 결정은 개인적인 정치적 동기가 작용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2]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17년 3월에는 다시 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의 전쟁 목표로 영토 회복, 배상, 그리고 지속 가능한 평화 구축을 제시하며 국가를 이끌었다.[3]

4. 1. 외교 정책

1889년 이후 생토메르(Saint-Omer)를 대표했으며, 부랑주의 운동에 대한 우려로 "공화국 집중" 정책으로 선회했다. 1890년 프레시네 내각에 외무부 장관으로 합류했다. 그는 영국 제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저술 중 두 권은 영국 법률을 다루고 있다. 그는 1891년 프랑스 함대의 크론슈타트 방문을 계기로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으며, 이는 프랑스 외교 정책에 중요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고 이후 공식적인 동맹 조약으로 발전했다. 그는 에밀 루베 내각(1892년 2월~11월)에서도 외무장관직을 유지했으며, 내각이 무너진 후에는 총리직을 맡으면서도 외무를 계속 담당했다.[1]

1895년 1월 펠릭스 포르 대통령 선출 후 다시 총리가 되어 재무 장관을 겸임했다. 같은 해 6월 10일, 그는 러시아와의 확정적인 동맹 체결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내각은 제2차 마다가스카르 원정의 예상치 못한 인명 및 비용 손실과 국내 사회 불안정 등의 이유로 10월 30일에 사임했다.[1]

1902년, 리보는 이집트 자원 접근권을 얻는 대가로 이집트 부채를 탕감하는 데 동의했는데, 이는 그의 개인적인 정치적 동기에 따른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2]

1909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10년에는 외무장관직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1912년 레몽 푸앵카레 정부에서는 프랑스-독일 조약 처리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조약 비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1913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낙선했다.[3]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재정과 외교 분야에서의 명성으로 다시 정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14년 8월 27일, 비비아니의 국가 방위 내각에서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15년 10월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총리가 된 후에도 자리를 지켰다.[3] 1916년 2월에는 런던을 방문하여 영국 재무부 장관과 회담을 가졌고, 같은 해 12월 브리앙 내각 개편 시에도 재무장관직을 유지했다. 브리앙 내각이 붕괴하자 푸앵카레 대통령의 요청으로 1917년 3월 19일 총리 겸 외무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3월 21일, 그는 하원에서 프랑스의 전쟁 목표로 "과거에 우리에게서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프랑스에 마땅히 돌아와야 할 배상과 보장을 획득하며, 민족의 권리와 자유 존중에 기초한 지속 가능한 평화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같은 해 7월 31일, 독일 총리 게오르크 미하엘리스에게 보낸 답변에서, 1917년 니콜라이 2세와 라인 강 좌안의 독일 영토를 자치 국가로 만드는 데 동의했음을 인정하면서도, 해당 지역을 프랑스에 병합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밝혔다.[3]

5. 평가

(작성할 내용 없음)

참조

[1] 간행물 Ribot, Alexandre Félix Joseph
[2] 뉴스 France. https://go.gale.com/[...] The Times, London 1902-03-05
[3] 간행물 Ribot, Alexandre Félix Jose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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