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케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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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케타스는 오레스티스의 아들이자 마케도니아의 귀족으로, 알렉산더 3세의 동방 원정에 참여했다. 알렉산더 사후에는 페르디카스와 함께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자매 키나네를 살해했다. 이후 페르디카스 사후, 반 페르디카스 동맹에 대항하다가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하여 테르멧소스에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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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319년 사망 - 안티파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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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케타스 | |
---|---|
알케타스 (오론테스의 아들) | |
출생 | 기원전 4세기 |
사망 | 기원전 320년경 |
활동 시기 | 기원전 4세기 |
직업 | 장군 |
소속 | 마케도니아 왕국 |
생애 | |
가문 | 오론테스의 아들 |
형제 | 페르디카스 |
경력 |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페르디카스를 지지.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가 이집트 원정 중 사망하자, 왕국 섭정으로 임명됨. 기원전 320년, 안티파트로스에게 패배 후 자살. |
기타 | |
관련 인물 | 알렉산드로스 대왕 페르디카스 안티파트로스 |
2. 동방 원정
알케타스는 오레스티스의 오론테스의 아들이며, 마케도니아의 유력 귀족이었던 페르디카스의 동생이다. 알케타스는 알렉산더 3세의 동방원정에 따라 나섰으며, 인도 원정에서 처음으로 역사의 무대에 섰다. 알케타스는 마사가 포위전에서 부상자를 수용했고, 그 직후 오라라는 마을에 파견되어 그 마을을 봉쇄하라는 왕의 명령을 수행했다.[1]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갑작스럽게 죽자, 알케타스는 페르디카스와 함께 대왕의 이복자매 키나네를 살해했다.[12][13]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와 여러 장군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자, 알케타스는 에우메네스 휘하에서 크라테로스와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여러 이유로 합류하지 않았다.[14][15] 결국 에우메네스가 크라테로스를 죽였으나, 페르디카스 역시 살해당하면서 알케타스 등은 지도자를 잃었다.
3. 알렉산드로스 사후
이후 트리파라디소스 분할 회의에서 알케타스 등은 마케도니아의 적으로 선언되었고, 안티고노스가 토벌 책임을 맡았다.[16] 알케타스는 아탈로스와 합류하여 아산드로스를 격파했으나,[3] 기원전 319년 크레토폴리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에게 패배했다.[9] 테르멧소스로 도망친 알케타스는 장로들이 자신을 넘기려 하자 자살했고, 그의 시신은 3일간 방치되었다가 한 젊은이에 의해 매장되었다.
3. 1. 디아도코이 전쟁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알케타스는 페르디카스와 함께 대왕의 이복자매인 키나네를 살해했다.[12][13] 키나네는 자신의 딸 에우리디케 2세를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동생인 필리포스 3세와 결혼시키려 했는데, 이는 알렉산더 대왕과 록사네의 어린 아들의 보호자가 되어 권력을 잡으려 했던 페르디카스에게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와 그에게 불만을 품은 여러 장군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알케타스는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와 파플라고니아 태수 에우메네스의 지휘 아래, 반(反) 페르디카스 동맹의 일원이었던 크라테로스 장군과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군 내부에서 압도적인 덕망을 가진 크라테로스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큰 부담이었고, 적이 크라테로스라는 것을 알게 되면 아군 병사들이 배신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꺼려했다. 또한 문관 출신이자 외국인(그리스인)이었던 에우메네스의 밑에 들어가는 것도 싫어하여 합류하지 않았다.[14][15] 결국 에우메네스는 혼자 크라테로스를 상대해야 했고, 헬레스폰투스 전투에서 그를 죽였다. 그러나 그 전후에 페르디카스가 이집트에서 부하 장군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알케타스를 포함한 페르디카스 파는 지도자를 잃게 되었다.
그 무렵, 다른 장군들에 의해 개최된 트리파라디소스의 분할 회의에서 알케타스와 에우메네스를 포함한 페르디카스 파는 마케도니아인의 적으로 선언되었다. 이들에 대한 토벌이 결정되었고, 그 책임은 프리기아의 태수 안티고노스가 맡게 되었다.[16]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격파하고 카파도키아의 요새 노라에 봉쇄한 후, 알케타스에게 화살을 돌렸다.
한편, 알케타스는 처남인 아탈로스와 피시디아에서 합류하여 아산드로스를 격파했지만,[3] 기원전 319년 크레토폴리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9] 이 전투에서 아탈로스를 비롯한 주요 장군들은 안티고노스에게 붙잡혔다. 페르디카스 파벌의 잔당들은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알케타스는 가까스로 테르멧소스로 도망쳤다.
테르멧소스의 장로들은 젊은이들이 알케타스를 지지하여 전쟁에 휘말릴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알케타스를 붙잡아 안티고노스에게 넘기려 했다. 그러나 알케타스는 살아서 적의 손에 넘어가느니 차라리 자살하는 길을 택했다. 안티고노스에게 인도된 알케타스의 시신은 3일 동안 방치되었고, 안티고노스가 떠난 후 알케타스의 죽음을 슬퍼한 테르메소스의 한 젊은이가 알케타스의 시신을 매장하고 무덤을 세웠다.
3. 2. 몰락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갑작스럽게 죽은 후, 알케타스는 페르디카스와 함께 대왕의 이복자매인 키나네를 살해했다.[12][13] 키나네는 자신의 딸 에우리디케 2세를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동생인 필리포스 3세와 결혼시키려 했는데, 이는 알렉산더 대왕과 록사네의 어린 아들의 보호자가 되어 권력을 잡으려 했던 페르디카스에게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321년, 페르디카스와 그에게 불만을 가진 여러 장군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알케타스는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와 Paphlagonia|파플라고니아영어 태수 에우메네스의 지휘 아래, 반(反) 페르디카스 동맹의 일원이었던 크라테로스 장군과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군 내부에서 압도적인 덕망을 가진 크라테로스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큰 부담이었고, 적이 크라테로스임을 알게 되면 아군 병사들이 배신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문관 출신이자 그리스인이었던 에우메네스의 밑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합류하지 않았다.[14][15] 결국 에우메네스는 혼자 크라테로스를 상대해야 했고, 헬레스폰투스 전투에서 크라테로스를 죽였다. 그러나 그 전후에 페르디카스가 이집트에서 부하 장군들에게 살해당하면서, 알케타스를 포함한 페르디카스 파는 지도자를 잃게 되었다.
그 무렵 다른 장군들에 의해 개최된 트리파라디소스의 분할 회의에서 알케타스와 에우메네스를 포함한 페르디카스 파는 마케도니아인의 적으로 선언되었다. 이들에 대한 토벌이 결정되었고, 그 책임은 프리기아의 태수 안티고노스에게 맡겨졌다.[16]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격파하고 카파도키아의 요새 노라에 봉쇄한 후, 알케타스에게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한편, 알케타스는 처남인 아탈로스와 피시디아에서 합류하여 아산드로스를 격파했지만,[3] 기원전 319년 크레토폴리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9] 이 전투에서 아탈로스를 비롯한 주요 장군들은 안티고노스에게 사로잡혔다. 페르디카스 파벌의 잔당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알케타스는 가까스로 테르멧소스로 도망쳤다.
테르멧소스의 장로들은 젊은이들이 알케타스를 지지하여 전쟁에 휘말릴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알케타스를 붙잡아 안티고노스에게 넘기려 했다. 그러나 알케타스는 살아서 적의 손에 넘어가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했다. 안티고노스에게 인도된 알케타스의 시신은 3일 동안 방치되었고, 안티고노스가 떠난 후 알케타스의 죽음을 슬퍼한 테르메소스의 한 젊은이가 알케타스의 시신을 매장하고 무덤을 세웠다.[10]
참조
[1]
문서
アッリアノス, IV. 27
[2]
문서
ディオドロス, XIX. 52
[3]
문서
フォティオス, cod. 92
[4]
문서
ユスティヌス, XIII. 6
[5]
문서
プルタルコス, 「エウメネス」, 5
[6]
문서
ディオドロス, XVIII. 37, 39
[7]
문서
ユスティヌス, XIII. 8
[8]
문서
ディオドロス, XVIII. 41
[9]
문서
ディオドロス, XVIII. 44, 45
[10]
문서
ibid, XVIII. 46, 47
[11]
문서
아리아노스, IV. 27
[12]
문서
디오도로스, XIX 52
[13]
문서
포티오스, cod 92
[14]
문서
유스티누스, XIII 6
[15]
문서
플루타르코스, 《에우메네스》, 5
[16]
문서
디오도로스, XVIII 37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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