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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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디카스는 고대 마케도니아의 귀족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에 참여하여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그는 섭정으로 제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으나, 권력 다툼과 이집트 원정 실패로 부하들에게 암살되었다. 그는 유능한 군인이었지만, 오만하고 가혹한 통치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페르디카스는 마케도니아 오레스티스 지방에서 독립한 왕자의 후손이었던 마케도니아 귀족 오론테스의 아들이었다.[37] 그의 실제 출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알렉산더 대왕과 비슷한 연배인 것으로 보인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참여하여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중장보병 부대를 지휘했다.[19] 특히 테바이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소그디아나와 인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페르디카스는 임종 직전의 알렉산드로스에게서 인장 반지를 받았다.[38] 바빌론 회의에서 주도권을 잡은 그는 왕의 유복자이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왕비 록사네의 아들(훗날 알렉산더 4세)의 임시 후견인이자 섭정이 되어 제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2. 가문
그는 알케타스[4]라는 형제와 아탈루스와 결혼한 여동생 아탈란테를 두었다. 페르디카스는 먼 친척 관계를 통해 아르게아스 왕가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3.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
기원전 335년 필리포스 2세 암살을 틈타 마케도니아에 무장 봉기한 테바이와의 전투에서, 디오도로스는 여러 전투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지만,[14] 테바이 측의 맹렬한 공격으로 일시적으로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했다. 아리아노스는 진영 경비를 맡고 있을 때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더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적의 방책을 공격해서 다른 부대도 가담하면서 큰 전투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소그디아나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적을 대비해 군을 다섯 개의 부대로 나누어 페르디카스가 세 번째 부대를 지휘했다. 팔레이타카이에서는 레온나토스,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성채 공략을 위한 공사를 감독하였다.
인도 원정에서 페르디카스는 헤파이스티온과 함께 골기아스, 백색 클레이토스, 멜레아그로스 휘하의 각 보병 전 부대, 헤타이로이 기병대의 절반 및 용병 기병대 전부를 맡았다. 탁실레스와 기타 수장들도 동행하여 인더스강으로 향해 페우케라오티스 지방으로 파견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로부터 진군 도중에 있는 거점은 모두 무력으로 제압하거나 조건을 걸어 항복시켜 지배하에 두라는 지시와 인더스 강변에 도착하면 도하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나 필요한 물건을 준비해두라는 지시를 받았다.[21]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 페르디카스는 기병 한 부대를 이끌었다.[23] 카타이오이인과의 전투에서는 페르디카스가 자신의 기병대와 아스테타이로이 부대를 이끌었다. 기원전 325년 마로이인과의 전투에서는 페르디카스가 지휘 하의 기병대와 클레이토스의 기병대 및 아그리아네스인 부대를 붙여 현지의 인도인들이 도망친 또 다른 마로이인 마을로 분견되었다.
기원전 324년 헤파이스티온이 병사하자,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로부터 헤파이스티온의 시신을 넘겨받아 바빌론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이후, 헤타이로이 지휘관 자리를 이어받고 동시에 천인대장 임무를 맡았다.[26]
3. 1. 초기 활약
기원전 335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틈을 타 테베가 마케도니아에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시로 전투가 벌어졌지만 테바이 군의 맹렬한 공격에 일시적으로 후퇴해야 했다. 전투 막바지에 페르디카스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방비가 허술해진 뒷문으로 별동대를 이끌고 시내로 돌입하라는 명령을 받은 페르디카스는 뒷문을 공격하여 시내 돌입에 성공했다.[15][16] 아리아노스에 따르면, 페르디카스는 진영 경비를 맡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적의 방책을 공격했고, 다른 부대도 가세하여 큰 전투가 벌어졌다. 페르디카스는 테바이 군의 전초 부대를 격파했지만, 적의 두 번째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다.[17] 그 후, 테바이는 함락되었다. 아리아노스와 디오도로스의 내용 차이는 후년 페르디카스와 정적이 된 프톨레마이오스가 자신의 저작에서 페르디카스의 명예와 업적을 삭제하거나 변조한 것을 아리아노스가 참고했기 때문이다. 또한 알렉산드로스의 북벌에 페르디카스도 참여하여 왕의 지휘 하에 글라우키아스와 클레이토스를 야습하여 물리쳤다.[18]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 참여하여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주요 회전에서 중장보병 부대를 지휘했다.[19] 클레이타르코스 계열 자료에 따르면, 페르디카스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코이노스, 메니다스와 함께 큰 부상을 입었다.[20]
소그디아나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적을 대비해 군을 다섯 개 부대로 나누었고, 페르디카스는 세 번째 부대를 지휘했다. 팔레이타카이에서는 레온나토스,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성채 공략을 위한 공사를 감독하였다.
기원전 324년 헤파이스티온이 병사하자,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로부터 헤파이스티온의 시신을 넘겨받아 바빌론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이후, 헤타이로이 지휘관 자리를 이어받고 동시에 천인대장 임무를 맡았다.[26]
3. 2. 주요 전투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3세의 동방 원정에 참여하여 그라니코스 전투, 이수스 전투, 가우가멜라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중장 보병) 부대를 지휘했다.[19] 클레이타르코스 계열 자료에 따르면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코이노스, 메니다스와 함께 큰 부상을 입었다.[20]
기원전 335년 필리포스 2세가 암살된 틈을 타 마케도니아에 무장봉기를 일으킨 테바이와의 전투에서, 디오도로스는 여러 전투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었지만,[14] 테바이 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일시적으로 후퇴해야 했다고 기록했다. 전투 막바지에 페르디카스는 방비가 허술해진 뒷문으로 별동대를 이끌고 시내로 돌입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고,[15] 뒷문을 공격하여 시내 돌입에 성공했다.[16] 아리아노스는 페르디카스가 진영 경비를 맡고 있을 때 알렉산드로스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적의 방책을 공격했고, 다른 부대도 이에 가세하여 큰 전투가 벌어졌다고 기록했다. 페르디카스는 테바이 군의 전초 부대를 격파했지만, 적의 두 번째 공격 중에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되었다.[17] 그 후, 테바이는 함락되었다. (아리아노스와 클레이타르코스 계열 또는 디오도로스의 기록 차이는, 후년에 페르디카스와 정적으로 대립한 프톨레마이오스가 저작물에서 가능한 한 페르디카스의 명예나 공적을 삭제하거나 변조한 결과를 아리아노스가 참고 자료로 삼았기 때문이다.) 또한 알렉산드로스의 북벌에도 페르디카스는 참가하여 왕의 지휘 하에 글라우키아스와 클레이토스를 야습하여 격파했다.[18]
소그디아나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적에 대비하여 군을 다섯 부대로 나누었고, 페르디카스는 제3부대의 지휘를 맡았다. 팔레이타카이에서는 요새 공략을 위해 페르디카스가 레온나토스, 프톨레마이오스와 함께 감독했다.
인도에서는 페르디카스가 헤파이스티온과 함께 골기아스, 백색 클레이토스, 멜레아그로스 휘하의 각 보병 전 부대, 헤타이로이 기병대의 절반 및 용병 기병대 전부를 맡았으며, 탁실레스와 기타 수장들도 동행하여 인더스강으로 향해 페우케라오티스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알렉산드로스로부터 진군 도중에 있는 거점은 모두 무력으로 제압하거나 조건을 걸어 항복시켜 지배하에 두라는 지시와 인더스 강변에 도착하면 도하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나 필요한 물건을 준비해두라는 지시를 받고, 인더스강 부근에 도착하자 페르디카스와 헤파이스티온은 오로바티스라는 마을을 점령 후, 수비대를 남겨두고 인더스강으로 향했다. 강변에 도착하자마자 인더스강을 부교로 연결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지시를 수행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알렉산드로스와 합류하기 전에 페르디카스, 헤파이스티온 부대는 소형 선박 다수와 30인 노선 2척을 준비하고, 탁실레스의 옴피스로부터 식량을 받았다.[21] 페르디카스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중신 중 한 명이었다.[22]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 페르디카스는 기병 한 부대를 이끌었다.[23] 카타이오이인과의 전투에서는 페르디카스가 자신의 기병대와 아스테타이로이 부대를 이끌었다. 상갈라 공략 후에는 그 일대를 약탈하고 저항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페르디카스에게 경장 부대를 붙여 파견하고, 동시에 에우메네스에게도 병력을 붙여 저항 세력으로 향하게 했다.[24] (아리아노스에서는 상갈라 제압 시 페르디카스 부대의 움직임은 적혀 있지 않다.)
기원전 325년 마로이인과의 전투에서는 페르디카스가 지휘 하의 기병대와 클레이토스의 기병대 및 아그리아네스인 부대를 붙여 현지의 인도인들이 도망친 또 다른 마로이인 마을로 분견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디카스에게 시내 사람들을 감시하도록 지시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곁에 다가왔다는 것을 마을에서 탈출한 주민 일부가 다른 원주민에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페르디카스가 마을에 도착하자 주민들이 모두 도망친 것을 알게 되었지만, 주민들이 아직 마을에서 그렇게 멀리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도망가는 주민들을 뒤쫓아 도망칠 수 없었던 상대를 섬멸했다.[25] 마을에 틀어박힌 마로이인과의 최대 전투에서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두 부대로 나눈 군세의 한쪽을 맡았고, 페르디카스가 지휘하는 부대의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를 가져오지 못했으므로, 마을을 둘러싼 벽을 무너뜨리는 등 시내로 돌입을 시도했다. 그리고 먼저 시내로 돌입한 알렉산드로스가 적의 화살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을 때, 일설에는 페르디카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체내에 들어간 화살촉을 빼내기 위해 자신의 칼로 상처를 절개했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드로스가 부상당한 후, 페르디카스는 아바스타이인을 거느리기 위해 파견되었고, 아케네시스, 히드라오르테스 두 강의 합류점 부근에 설치된 함대가 배치된 기지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디카스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할 때까지 기다렸다.
3. 3. 인도 원정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에서 중요한 지휘권을 맡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장 가까운 동료인 헤파이스티온과 페르디카스는 일반적으로 잘 맞았고,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인더스 강을 건너는 임무에 함께 선택되어 아무 문제 없이 임무를 완수했다.[21] 기원전 326년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페르디카스는 기병 한 부대를 이끌었고,[23] 알렉산드로스의 지휘 하에 있던 기병대의 일부로서 그와 함께 강을 건넜다. 페르디카스는 나중에 상갈라 주변을 약탈했고, 말리안 도시들을 공격하고 약탈했다.[24] 알렉산드로스는 이 원정에서 가슴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고, 어떤 전승에 따르면 페르디카스가 칼로 화살을 빼내 왕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25]
인도에서는 페르디카스가 헤파이스티온과 함께 골기아스, 백색 클레이토스, 멜레아그로스 휘하의 각 보병 전 부대, 헤타이로이 기병대의 절반 및 용병 기병대 전부를 맡았다. 탁실레스와 기타 수장들도 동행하여 인더스강으로 향해 페우케라오티스 지방으로 파견되었으며, 알렉산드로스로부터 진군 도중에 있는 거점은 모두 무력으로 제압하거나 조건을 걸어 항복시켜 지배하에 두라는 지시와 인더스 강변에 도착하면 도하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나 필요한 물건을 준비해두라는 지시를 받았다. 인더스강 부근에 도착하자 페르디카스와 헤파이스티온은 오로바티스라는 마을을 굳건히 한 후, 수비대를 남겨두고 인더스강으로 향했다. 강변에 도착하자마자 인더스강을 부교로 연결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지시를 수행하는 작업에 착수했으며, 알렉산드로스와 합류하기 전에 페르디카스, 헤파이스티온 부대는 소형 선박 다수와 30인 노선 2척을 준비하고, 탁실레스의 옴피스로부터 식량을 받았다.[21]
카타이오이인과의 전투에서는 페르디카스가 자신의 기병대와 아스테타이로이 부대를 이끌었다. 상갈라 공략 후에는 그 일대를 약탈하고 저항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페르디카스에게 경장 부대를 붙여 파견하고, 동시에 에우메네스에게도 병력을 붙여 저항 세력으로 향하게 했다.[24]
기원전 325년의 마로이인과의 전투에서는 페르디카스가 지휘 하의 기병대와 클레이토스의 기병대 및 아그리아네스인 부대를 붙여 현지의 인도인들이 도망친 또 다른 마로이인 마을로 분견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페르디카스에게 시내 사람들을 감시하도록 지시했지만, 알렉산드로스가 곁에 다가왔다는 것을 마을에서 탈출한 주민 일부가 다른 원주민에게 전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페르디카스가 마을에 도착하자 주민들이 모두 도망친 것을 알게 되었지만, 주민들이 아직 마을에서 그렇게 멀리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도망가는 주민들을 뒤쫓아 도망칠 수 없었던 상대를 섬멸했다.[25]
3. 4. 헤파이스티온 사후
기원전 324년, 헤파이스티온이 병으로 사망하자 알렉산드로스는 헤파이스티온의 시신을 페르디카스에게 맡겨 바빌론에서 장례식을 치르게 했다.[26] 이후 페르디카스는 헤파이스티온의 뒤를 이어 헤타이로이 지휘관 자리를 계승하고, 동시에 천인대장의 임무를 맡았다.[27] 같은 해 수사에서 열린 집단 결혼식에서 페르디카스는 메디아 태수이자 페르시아 귀족 아트로파테스의 딸과 결혼했다.[27] 알렉산드로스는 임종 직전 자신의 인장 반지를 페르디카스에게 건네주었다.[6][7]
4. 알렉산더 대왕 사후
당시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제인 아리다이오스를 지지하는 보병과 그에 영합한 무장 멜레아그로스와의 갈등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기병과 다른 여러 장군의 지지를 얻었던 페르디카스는 보병들을 연설로 설득하고 화해했다. 우선 아리다이오스를 왕으로 삼고, 록사네가 아들을 낳으면 공동 통치자로 삼아 그 아들의 후견인이 되기로 멜레아그로스와도 타협을 했다. 그러나 그 직후에 신전으로 도망친 멜레아그로스를 살해했다.
이후 페르디카스는 바빌론 회의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카파도키아를 할당받은 에우메네스를 돕기 위해 카파도키아로 원정을 갔다.
자신의 세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중신 안티파트로스와 제휴를 꾀하며 그의 딸 니케아와의 결혼을 제의했으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자신의 딸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혼을 권했다. 페르디카스는 일단 안티파트로스의 딸과 결혼하고, 바로 이혼하여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려고 했다. 이에 안티파트로스는 분노했고, 크라테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등 그를 경계하던 여러 장군과 함께 반(反) 페르디카스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켰다.[34]
페르디카스는 소아시아에 자신의 사람으로 여러 장군을 배치하고, 그곳의 전투는 에우메네스에게 맡긴 채, 자신은 프톨레마이오스를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다. 그러나 나일강을 건너지 못하고, 낙심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페이톤, 안티게네스, 셀레우코스 등에 의해 암살되었다.[35]
4. 1. 바빌론 회의
알렉산드로스가 죽기 직전, 페르디카스는 그에게서 인장 반지를 받았다.[28] 유스티누스는 이것이 '암묵적' 후계자 지명이었다고 기록했지만,[29] 아리아노스는 이 부분을 누락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열린 바빌론 회의에서 페르디카스는 주도권을 잡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왕비 록사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의 임시 후견인이자 섭정이 되어 제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30][31]
이때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제 아리다이오스를 지지하는 보병 부대와 그들에게 영합한 장군 멜레아그로스와의 갈등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32] 그러나 기병과 다른 장군들의 지지를 받은 페르디카스는 보병들을 연설로 설득하여 화해시켰다. 그는 아리다이오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록사네가 아들을 낳으면 공동 통치자로 삼아 그 아들의 후견인이 되기로 멜레아그로스와 타협하여 위기를 넘겼다.[33] 하지만 그 직후 신전으로 도망친 멜레아그로스를 살해했다.
이후 페르디카스는 바빌론 회의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카파도키아를 할당받은 동료 에우메네스를 돕기 위해 카파도키아로 원정을 떠나 그곳의 왕 아리아라테스 1세를 격파했다. 또한 자신의 세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중신 안티파트로스와 제휴를 꾀하며 그의 딸 니카이아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그러나 페르디카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한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자신의 딸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혼을 권했다. 페르디카스는 일단 안티파트로스의 딸과 결혼한 후 바로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려 했다. 이에 분노한 안티파트로스는 페르디카스를 경계하던 크라테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등 여러 장군과 함께 반(反) 페르디카스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켰다.[34] 페르디카스는 소아시아에 자신의 세력을 배치하고, 그곳의 전투를 에우메네스에게 맡긴 채 자신은 프톨레마이오스를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다. 그러나 나일강 도하에 실패하고, 실망한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페르디카스는 부하 페이톤, 안티게네스, 셀레우코스 등에게 암살당했다.[35]
4. 2. 권력 투쟁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서 임종 직전 인장 반지를 받았다.[28] 바빌론 회의에서 주도권을 잡은 그는, 왕의 유복자이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왕비 록사네의 아들(훗날 알렉산더 4세)의 임시 후견인이자 섭정이 되어 제국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30][31]
당시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제 아리다이오스를 지지하는 보병, 그리고 그에게 영합한 장군 멜레아그로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죽을 뻔했다.[32] 기병과 다른 장군들의 지지를 받은 페르디카스는 보병들을 설득하여 화해하고, 아리다이오스를 왕위에 올렸다. 또한 록사네가 아들을 낳으면 공동 통치자로 삼고, 그 아들의 후견인이 되기로 멜레아그로스와 타협했다.[33] 그러나 직후 신전으로 피신한 멜레아그로스를 살해했다.
이후 페르디카스는 바빌론 회의에서 카파도키아를 할당받은 동료 에우메네스를 돕기 위해 카파도키아 원정을 감행, 그곳의 왕 아리아라테스 1세를 격파했다.
또한 자신의 세력 안정을 위해 안티파트로스와 협력하고자 그의 딸 니카이아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3세의 어머니 올림피아스는 페르디카스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딸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혼을 권유했다. 페르디카스는 우선 안티파트로스의 딸과 결혼한 뒤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재혼하려 했다. 이에 분노한 안티파트로스는 크라테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등 그를 경계하던 장군들과 함께 반(反) 페르디카스 동맹을 결성, 전쟁이 시작되었다.[34] 페르디카스는 소아시아에 아군 장군들을 배치하고, 그곳 전투는 에우메네스에게 맡긴 채, 자신은 프톨레마이오스를 제거하기 위해 이집트로 진군했다. 그러나 나일강 도하에 실패하고, 실망한 병사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부하 페이톤, 안티게네스, 셀레우코스 등에게 암살당했다.[38][35]
4. 3. 카파도키아 원정
그 후, 페르디카스는 바빌론 회의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카파도키아를 할당받은 동지 에우메네스를 돕기 위해 카파도키아로 원정을 갔다. 그곳의 왕 아리아라테스 1세를 무너뜨렸다.[38]
페르디카스는 한 번의 원정 기간 동안 아리아라테스 1세와 그의 대규모 군대(보병 3만, 기병 1만 5천)를 두 번의 결정적인 야전 전투에서 격파하고 5,000명 이상의 병사를 포획하고 4,000명을 죽여 그의 지지자 에우메네스가 자신의 사트라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페르디카스의 명성에 크게 기여했다. 페르디카스는 아리아라테스를 사로잡아 고문하고 죽였으며, 그의 가족 대부분을 말뚝형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38]
4. 4. 반란과 암살
페르디카스는 임종을 맞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서 인장 반지를 받았다.[28] 왕의 사후 열린 바빌론 회의에서 주도권을 잡고, 왕의 유복자이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왕비 록사네의 아들(후의 알렉산더 4세)의 임시 후견인이자 섭정이 되어 제국의 실질적인 최고 자리에 올랐다.[30][31]
그때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제인 아리다이오스를 지지하는 보병과 그에 영합한 무장 멜레아그로스와의 갈등으로 하마터면 살해당할 뻔했다.[32] 기병과 다른 여러 장군의 지지를 얻었던 페르디카스는 보병들을 연설로 설득하고 화해했다. 우선 아리다이오스를 왕으로 삼고, 왕비 록사네가 낳은 자식이 남자 아이라면 공동 통치자로 삼아 그 아이의 후견인이 되기로 멜레아그로스와도 타협을 했다.[33] 그러나 그 직후에 신전으로 도망친 멜레아그로스를 살해했다.
그 후, 페르디카스는 바빌론 회의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카파도키아를 할당받은 동지 에우메네스를 돕기 위해 카파도키아로 원정을 가서 그곳의 왕 아리아라테스 1세를 무너뜨렸다.
또한 자신의 세력 안정을 위해 중신 안티파트로스와의 제휴를 꾀하며 그의 딸 니케아와의 결혼을 제의했다. 그러나 페르디카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생각했던 알렉산더 3세의 어머니 태황후 올림피아스는 자신의 딸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혼을 권했다. 그래서 페르디카스는 일단 안티파트로스의 딸과 결혼하고, 바로 이혼을 하여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려고 했다. 안티파트로스는 그러한 처사에 분노했고, 그를 경계하던 크라테로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등의 여러 장군과 함께 대 페르디카스 동맹을 맺고 전쟁의 단계가 되었다.[34]
페르디카스는 자신의 사람으로 소아시아에 여러 장군을 배치하고, 그곳의 전투를 에우메네스에게 맡기고, 자신은 프톨레마이오스를 멸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했다. 그러나 나일강을 건너지 못하고, 낙심한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페이톤, 안티게네스, 셀레우코스 등에 의해 암살되었다.[35]
5. 디아도코이 전쟁
페르디카스의 전략은 자신의 지지자들이 안티파테르와 크라테루스에 맞서 소아시아를 지키는 동안, 그가 왕실 군대와 왕들(필리포스 3세, 알렉산드로스 4세)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프톨레마이오스를 제거하는 것이었다.[16] 페르디카스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물리친 다음 안티파테르와 크라테루스와의 전투로 전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17]
그는 결혼을 통해 권위를 얻고자 클레오파트라에게 다시 한번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다가올 전쟁에서 누가 이길지 몰랐기 때문에 거절했다.[18] 페르디카스는 먼저 킬리키아로 진군하여 크라테로스와의 친분 때문에 필로타스를 태수(사트라프)에서 해임하고 필록세누스로 교체했다.[8]
그는 도키무스를 바빌론으로 보내 프톨레마이오스와의 공모 혐의로 아르콘을 대체하도록 했다.[8] 또한 로도스의 소시게네스와 아리스토노우스가 이끄는 함대를 준비하여 키프로스와 그 왕들을 정복하도록 했다.[19] 페르디카스의 매제인 아탈루스가 이끄는 세 번째 함대는 페르디카스 군대의 남쪽 행군을 따랐다.[20] 도키무스는 바빌론을 정복하고 전투에서 아르콘을 죽였으며, 페르디카스는 다마스쿠스에 도착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지지 때문에 시리아의 태수(사트라프)인 라오메돈을 해임시켰다.[21]
프톨레마이오스는 페르디카스와의 전쟁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믿고 2년 동안 자신의 영지(사트라피)를 요새화했는데, 이는 페르디카스의 어려움과 최종 패배에 크게 기여했다.[22] 페르디카스는 펠루시움 근처 나일강의 가장 동쪽에 있는 지류에 도달했고, 반대편이 주둔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댐을 건설하게 했지만, 강의 흐름에 의해 댐이 무너졌다.[23] 댐의 파괴는 페르디카스 진영의 일부 장교들이 탈영하게 만들었고, 이에 페르디카스는 선물과 칭호를 통해 군대에 성공적으로 사기를 북돋아 전쟁을 계속하게 했다.[24]
페르디카스는 그 후, 병사들에게 어디로 행군할지 알리지 않은 채 야영지를 철수했다. 그는 건너가기 적합한 지점을 찾기 위해 빠르게 상류로 이동했고, 곧 나일강 반대편에 있는 타니스와 아바리스로 이어지는 여울을 발견했다. 그러나 '낙타의 요새'(''Kamelon Teichos'')로 알려진 프톨레마이오스 군대가 방어하는 요새가 그의 진격을 방해했다. 페르디카스는 즉시 부대에 공격을 명령하여 새벽에 요새에 대한 공격을 이끌었다.[25]
페르디카스는 먼저 전투 코끼리를 배치한 다음, 히파스피스트와 은 방패병을 배치하고, 프톨레마이오스가 도착할 경우에 대비하여 기병대를 후방에 배치했다.[26]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휘하의 대규모 군대가 요새를 지원하기 위해 도착하여 페르디카스에게 손쉬운 승리를 허락하지 않자, 페르디카스는 굴하지 않고 공격을 재개했다. 그의 보병은 사다리로 성벽을 기어오르려 시도했고, 그의 코끼리는 프톨레마이오스 군의 방어 시설을 파괴했다.[27]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히면서 전투는 상당한 시간 동안 결론 없이 계속되었고, 결국 페르디카스는 포위를 풀고 자신의 야영지로 돌아갔다.[28]
같은 날 밤, 페르디카스는 다시 야영지를 철수하고 멤피스 근처의 또 다른 여울로 행군했다. 여기서 페르디카스는 이 새로운 건너는 지점의 상류에 코끼리를 배치하여 그렇지 않으면 병사들을 휩쓸어 갈 물살을 막고, 하류에 기병대를 배치하여 코끼리가 만든 임시 댐에도 불구하고 휩쓸려 갈 불운한 병사들을 붙잡도록 했다.
한동안 이 전략은 효과가 있었고, 페르디카스 자신이 이끄는 페르디카스 군대의 상당한 병력이 강을 건너 강 중앙에 있는 섬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29]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시도 중에 익사했고, 곧 코끼리들이 강바닥의 진흙에 빠지기 시작했고, 물살은 빠르게 높아졌다. 이것은 페르디카스에게 재앙으로 판명되었는데, 그는 건너기를 포기하고 많은 보병들을 섬에 남겨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페르디카스는 자신의 병사들과 함께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 병력의 대부분은 동쪽 둑으로 돌아가려다 익사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악어에게 잡아먹혔다. 페르디카스의 손실은 저명한 장교들을 포함하여 2,000명에 달했다.[30]
5. 1. 페르디카스 사후의 권력 구도

기원전 321년 말과 320년 초, 페르디카스는 왕이 되려는 야망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신을 아이가이의 마케도니아로 보내려 했다. 이곳은 마케도니아 아르게아드 왕가의 전통적인 매장지였다.[2] 아르디다이오스 장군이 정교한 장례 마차를 제작하여 시신을 마케도니아로 호송하도록 선택되었다.[3] 페르디카스는 아르디다이오스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렸지만, 아르디다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마케도니아 대신 이집트로 옮겼고, 그 과정에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4]
안티파테르와 크라테루스와 이미 이해 관계를 맺고 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아르디다이오스와 바빌론의 사트라프인 아르콘과 공모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이집트로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5] 이 소식에 분노한 페르디카스는 시신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군대를 격파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유해를 이집트로 가져오는 데 성공했고, 유해는 멤피스에 안치되었다.[6]
바빌론 분할 이후, 프톨레마이오스는 페르디카스의 승인 없이 키레나이카를 정복했고,[7] 사트라피를 얻은 지 1년 만에 페르디카스가 배치한 장교 클레오메네스를 불법적으로 처형했다.[8] 이미 프톨레마이오스를 불신했던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가로챈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도발, 즉 "전쟁 행위"로 간주하고 장교들을 소집한 후 이집트 침공을 결정했다.[9]
이집트 원정은 실패로 이어졌고, 페르디카스가 진전을 보이지 못하자 그의 병사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다.[10] 그의 무능함에 분노하고, 아마도 프톨레마이오스와 공모한 것으로 보이는[11] 페르디카스는 기원전 320년 여름경, 섭정을 맡은 지 약 3년 만에 그의 장교들(페이톤, 안티게네스, 셀레우코스)에 의해 살해되었다.[12] 페르디카스의 장교들과 나머지 군대는 프톨레마이오스에게 투항했다.
크라테루스와 네오프톨레모스가 죽은 기원전 320년 헬레스폰트 전투에서 에우메네스가 승리했다는 소식은 페르디카스의 권위를 즉시 회복시켰을 것이지만, 이 소식은 페르디카스가 암살된 다음 날 이집트에 도착했다.[13] 앤슨은 "만약 에우메네스가 크라테루스를 이겼다는 소식이 더 빨리 도착했다면, 알렉산드로스 사후 시대의 전체 역사가 극적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이자 광대한 마케도니아 제국의 지배자로서 새로운 왕족의 시대를 열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라고 언급했다.[14] 페르디카스가 지니고 다녔던 알렉산드로스의 인장 반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심지어 그가 그것을 이집트로 가져왔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15]
5. 2. 에우메네스의 활약
페르디카스는 카르디아의 에우메네스에게 헬레스폰토스를 지키도록 최고 사령관(''아우토크라토르'')의 권한을 부여했고, 알케타스와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에우메네스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했다.[1] 에우메네스는 페르디카스에 대한 충성심, 전투 기술, 카파도키아와 아르메니아에서의 승리 덕분에 이 명령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에우메네스의 영지(사트라피)는 안티고노스의 옛 지방을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2] 클레이토스는 해상에서 에우메네스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 페르디카스는 남쪽으로 향하면서, 알케타스와 네오프톨레모스가 에우메네스 휘하에서 일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복종하라고 명령했다.[4] 이집트에 도착한 직후, 페르디카스는 안티파테르와 크라테로스에게로 전향한 네오프톨레모스에 대한 에우메네스의 승리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5]6. 평가
고대 기록들은 페르디카스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을 보인다. "전장에서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만하고, 거만하며, 횡포했다고 주장한다.[10]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그를 '포니코스'(φονικος), 즉 "살인자"라고 부른다.[11] 이는 페르디카스가 프톨레마이오스와 가졌던 "비할 데 없는 경쟁"과 적대감 때문일 수 있으며, 프톨레마이오스의 현재는 유실된 기록이 페르디카스의 경력을 다루는 현존하는 자료(주로 아리아노스)의 토대가 되었다.[12]
페르디카스가 유능한 지도자이자 효과적인 군인이었지만, "군인"으로서 섭정의 직책에 필요한 자질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통치는 권위적이고 가혹하여 병사들의 호감을 거의 얻지 못했으며, 처벌은 종종 잔혹했다. 앤슨은 페르디카스가 "거스르기 힘든 인물"이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분노를 사는 것보다 그의 앞에서 그의 요구에 따랐다"고 평가한다. 반대로 롬은 지도자가 실패했을 때, 그를 지도자로 만들었던 자질들이 갑자기 결점으로 나타나며, 페르디카스의 오만함과 피에 대한 집착은 알렉산드로스의 그것보다 더 심하지 않았지만, 불행한 페르디카스와 달리 알렉산드로스는 실패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고 썼다.
페르디카스의 죽음과 섭정의 안티파트로로의 이양은 알렉산드로스가 구상했던 제국의 종말을 의미한다.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와 매우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처럼 제국의 중심지를 바빌론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워터필드는 페르디카스가 알렉산드로스 본인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승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의 암살은 "중대한 단계"였다고 평가한다.
페르디카스의 동기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일반적으로 야망 때문에 행동했다고 여겨진다. 롬과 같은 일부 학자들은 그가 알렉산드로스 4세를 보호하고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행동했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앤슨은 페르디카스가 안티파테르에 대항하여 아이톨리아 동맹과 기만적인 소통을 했다는 점을 들어 이를 믿지 않는다. 야망을 위해서든 충성을 위해서든, 페르디카스가 "알렉산더의 유산을 그대로 유지"하려 했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턴은 페르디카스는 용감하고 훌륭한 군인이었고, 아마도 알렉산더의 가문에 충성했고 제국을 함께 유지하려고 했지만, 누군가가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람이 자신이 되기를 바랐다고 썼다. 트리파라디수스의 분할 이후 페르디카스를 계승한 정권은 페르디카스의 섭정 기간보다 짧은 몇 년 동안만 지속되었다.
해켈은 "페르디카스의 경력은 지나친 야망과 정치적 근시안이 결합된 고상한 이상에 대한 불운한 이야기"이지만, 페르디카스가 알렉산더 제국을 유지하려는 시도는 "존경받을 만하다"고 "그가 알렉산더의 정책을 이해했음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그는 "위대하지만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성공과 다른 사람들의 질투의 희생자"였다.
아리아노스는 『알렉산드로스 원정기』에서 "마케도니아인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헌신한 장군이었는데, 매우 용감하여 어떤 때는 암사자가 둥지를 틀고 있는 동굴에 혼자 들어갔다. 그는 사자를 눈치채지 못했는데, 사자는 새끼를 데리고 나왔다. 페르디카스는 이 일로 인해 모두에게 그의 용맹함을 칭찬받은 것 같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조
[1]
문서
Head of Heracles left, wearing lion skin headdress / [BASILEWS FILIPPOU]. Zeus Aëtophoros seated right; wheel and monogram in left field, monogram below thr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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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comes from Plutarch's Life of Alexander,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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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ing Curtius Rufus' History of Alexander the Great of Macedonia, 10.6.5-9, as per Livius.org (url:https://www.livius.org/sources/content/curtius-rufus/the-election-of-arrhida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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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d.,ibid..アッリアノス,I,8.1
[17]
문서
ibid, I.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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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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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d, I. 24, II. 8, III.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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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t.,Ⅳ.16.32.cf.Diod.,ⅩⅦ.61.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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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t.,idid.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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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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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d, V.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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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rt.,Ⅸ.1.19.cf.Plut.,Eum.,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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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ibid, VI.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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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d.,ⅩⅦ.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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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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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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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in.,Ⅶ.15.13
[30]
문서
ディオドロス, XVIII.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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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id, XIII.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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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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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ibid, XIII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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