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게일 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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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비게일 애덤스(1744–1818)는 미국의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아내이자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18세기 여성으로서의 어려움과 여성의 권리, 특히 교육의 중요성을 옹호했다. 남편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영부인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여성의 권리 신장과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 그녀는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영부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남편과 주고받은 서신은 미국 역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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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비게일 애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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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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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애비게일 스미스 |
출생일 | 1744년 11월 22일 |
출생지 | 웨이머스, 매사추세츠 만, 영국령 아메리카 |
사망일 | 1818년 10월 28일 (향년 73세) |
사망지 | 퀸시, 미국 |
안장지 | 유나이티드 퍼스트 패리시 교회 퀸시, 매사추세츠 |
배우자 | 존 애덤스 (1764년 10월 25일 결혼) |
자녀 | 애비게일 존 수잔나 찰스 토머스 엘리자베스 |
부모 | 윌리엄 스미스 (아버지) 엘리자베스 퀸시 (어머니) |
친척 | 애덤스 정치 가족 퀸시 정치 가족 |
공직 | |
직함 | 미국의 영부인 |
대통령 | 존 애덤스 |
임기 시작 | 1797년 3월 4일 |
임기 종료 | 1801년 3월 4일 |
이전 | 마사 워싱턴 |
이후 | 마사 랜돌프 (대행) |
직함 | 미국의 제2영부인 |
부통령 | 존 애덤스 |
임기 시작 | 1789년 4월 21일 |
임기 종료 | 1797년 3월 4일 |
이전 | 직책 신설 |
이후 | 앤 게리 |
2. 어린 시절과 가족 (1744-1759)
애비게일 애덤스는 1744년 11월 22일 매사추세츠주 웨이머스의 노스 패리시 회중 교회에서 윌리엄 스미스와 엘리자베스(née 퀸시) 스미스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녀는 어머니 쪽으로 퀸시 가문의 후손이었으며, 퀸시 가문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서 유명한 정치 가문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통해 존 핸콕과 결혼한 도로시 퀸시의 사촌이었다. 또한 애덤스는 매사추세츠주 힝엄에 있는 올드 쉽 교회의 설립 목사인 존 노턴의 증손녀였으며, 올드 쉽 교회는 매사추세츠에 남아있는 유일한 17세기 회관이다.[3] 스미스는 1740년에 엘리자베스 퀸시와 결혼하여 세 딸과 아들 한 명을 두었고, 애비게일은 둘째였다.[3] 애덤스의 아버지도 여러 조상과 마찬가지로 진보적인 미국 회중 교회 목사였으며, 그는 목사를 존경하는 뉴잉글랜드 사회의 지도자였다. 스미스는 예정설이나 원죄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고, 대신 이성과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4] 1775년 7월,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35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해 왔으나 천연두로 사망했다. 1784년, 77세의 나이로 스미스는 사망했다.
스미스 가문은 노예 소유주였으며, 적어도 4명의 노예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비라는 노예는 애비게일과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그녀가 자유의 몸이 된 후 애비게일의 유급 하녀로 일했다. 애비게일은 성인이 되어서 노예제 폐지에 대한 믿음을 표명하게 된다.[5]
애비게일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어릴 때 자주 아팠고, 이것이 교육을 받지 못한 요인 중 하나였을 수 있다.[6] 나중에 애덤스는 여성에게는 그런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육을 박탈당했다고 생각했다.[6] 비록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그녀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읽기, 쓰기, 계산하는 법을 가르쳤고, 아버지, 삼촌, 할아버지의 방대한 서재를 통해 자매들은 영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31][4] 그녀의 할머니 엘리자베스 퀸시도 애덤스의 교육에 기여했다.[6] 성장하면서 애덤스는 친구들과 함께 독서를 하면서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6] 그녀는 역대 영부인 중 가장 박식한 여성 중 한 명이 되었다.[7]
2. 1. 출생과 가문
애비게일 애덤스는 1744년 11월 22일 매사추세츠주 웨이머스의 노스 패리시 회중 교회에서 윌리엄 스미스와 엘리자베스(née 퀸시) 스미스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녀는 어머니 쪽으로 퀸시 가문의 후손이었으며, 퀸시 가문은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서 유명한 정치 가문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를 통해 존 핸콕과 결혼한 도로시 퀸시의 사촌이었다. 또한 애덤스는 매사추세츠주 힝엄에 있는 올드 쉽 교회의 설립 목사인 존 노턴의 증손녀였으며, 올드 쉽 교회는 매사추세츠에 남아있는 유일한 17세기 회관이다.[3] 애덤스의 아버지 윌리엄 스미스는 진보적인 미국 회중 교회 목사였으며, 그는 목사를 존경하는 뉴잉글랜드 사회의 지도자였다. 스미스는 예정설이나 원죄에 대한 설교를 하지 않고, 대신 이성과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4]스미스 가문은 노예 소유주였으며, 적어도 4명의 노예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비라는 노예는 애비게일과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했고, 나중에는 그녀가 자유의 몸이 된 후 애비게일의 유급 하녀로 일했다. 애비게일은 성인이 되어서 노예제 폐지에 대한 믿음을 표명하게 된다.[5]
애비게일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어릴 때 자주 아팠고, 이것이 교육을 받지 못한 요인 중 하나였을 수 있다.[6] 비록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그녀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읽기, 쓰기, 계산하는 법을 가르쳤고, 아버지, 삼촌, 할아버지의 방대한 서재를 통해 자매들은 영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31][4] 그녀의 할머니 엘리자베스 퀸시도 애덤스의 교육에 기여했다.[6] 성장하면서 애덤스는 친구들과 함께 독서를 하면서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6]
2. 2. 어린 시절
애비게일 애덤스는 1744년 11월 22일 매사추세츠주 웨이머스의 노스 패리시 회중 교회에서 윌리엄 스미스와 엘리자베스 퀸시 스미스 사이에서 태어났다.[2] 그녀의 어머니는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서 유명한 정치 가문인 퀸시 가문 출신이었다.[2] 애덤스는 어머니를 통해 존 핸콕과 결혼한 도로시 퀸시의 사촌이었다. 또한, 매사추세츠주 힝엄에 있는 올드 쉽 교회 설립 목사인 존 노턴의 증손녀였다.[2]애덤스의 아버지 윌리엄 스미스는 진보적인 미국 회중 교회 목사였으며, 이성과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4] 1775년,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천연두로 사망했고, 1784년에는 윌리엄 스미스도 사망했다.[4]
스미스 가문은 노예 소유주였으며, 적어도 4명의 노예를 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피비라는 노예는 애비게일과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했고, 나중에 자유의 몸이 된 후 애비게일의 유급 하녀로 일했다. 애비게일은 성인이 되어서 노예제 폐지에 대한 믿음을 표명하게 된다.[5]
애비게일은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어릴 때 자주 아팠던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6] 어머니는 그녀와 자매들에게 읽기, 쓰기, 계산하는 법을 가르쳤고, 아버지, 삼촌, 할아버지의 방대한 서재를 통해 영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31][4] 그녀의 할머니 엘리자베스 퀸시도 애덤스의 교육에 기여했다.[6] 성장하면서 애덤스는 친구들과 함께 독서를 하면서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6]
2. 3. 노예 소유와 노예제에 대한 관점
애비게일 애덤스는 미국 노예제의 존재에 반대했으며, 이를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4] 1776년 3월 31일에 쓴 편지에서 애덤스는 버지니아주 백인 다수가 자유를 주장하지만, "동료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자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4][46]1791년 필라델피아에서 한 자유 흑인 청년이 애덤스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애덤스는 이웃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을 지역 야간 학교에 보냈다. 애덤스는 그 소년이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인이며, 단지 얼굴이 검다는 이유로 교육을 거부해야 하는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자격을 얻을 수 있겠는가? ... 그를 응접실로 데려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전혀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29][46]
애덤스는 폐지론적 견해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생애 동안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적 견해를 유지했다. 1785년 런던에서 오셀로 공연을 관람한 후, 애덤스는 편지에서 흑인 남자인 극의 주인공이 백인 여성인 데스데모나를 만지는 것을 보고 "역겨움과 공포"를 느꼈다고 썼다. 역사가 아네트 고든-리드는 애덤스의 인종에 대한 견해가 "18세기 전형적인 백인"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말했다.[30]
3. 결혼과 자녀 (1759-1783)
애비게일 스미스는 1759년 15세에 존 애덤스를 처음 만났다. 존은 친구 리처드 크랜치를 통해 스미스 가에 방문했는데, 크랜치는 애비게일의 언니 메리 스미스와 약혼한 사이였으며, 훗날 이들은 연방 판사 윌리엄 크랜치의 부모가 된다.[8] 애덤스는 스미스 자매들이 "상냥하지도, 솔직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고 평가했다.[46]
1762년에 애비게일과 만나, 두 사람은 익살스럽고 솔직하게 애정을 표현하는 연애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46] 26세의 애덤스는 17세의 총명하고 활발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는 후년에 애덤스에게 지적이고 믿음직한 조수가 되었다.[47] 애비게일의 아버지는 결혼을 승인했지만, 어머니는 딸이 농장 냄새가 나는 지방 변호사와 결혼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결국 어머니도 승낙했고, 1764년 10월 25일 두 사람은 웨이머스에 있는 스미스 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애비게일의 아버지 윌리엄 스미스가 직접 결혼식을 주관했다.[8]
피로연 후, 부부는 말을 타고 존이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 (현재 매사추세츠주 퀸시의 일부)의 소금집과 농장으로 향했다.[31] 부부는 결혼 9개월 만에 첫 아이를 맞이했다.[31] 두 사람은 사상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고, 애비게일도 애덤스와 마찬가지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며, 그를 위한 투쟁을 지지했다.[48]
12년 동안 애비게일 애덤스는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45][49]
- 애비게일 ("내비"; 1765–1813)
- 존 퀸시 (1767–1848)
- 수재나 (별명 "수키")[9] (1768–1770)
- 찰스 (1770–1800)
- 토마스 (1772–1832)
- 엘리자베스 (1777년 사산)[10]
그녀의 육아 방식에는 아이들이 미덕과 애덤스 가문에 빚진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지속적인 상기가 포함되었다.[11]
결혼 초부터 정치 활동으로 바빴던 남편은 집을 자주 비웠으며, 이들의 별거 생활은 평생 계속되었다. 애비게일은 결혼 생활의 대부분이 "미망인 생활"과 같았다고 회고했다.[47] 애덤스는 남편이 먼 여행을 떠났을 때 가족과 농장을 책임졌다. "아아!", 그녀는 1773년 12월에 썼다, "얼마나 많은 눈 언덕이 당신과 나를 갈라놓고 있습니까." 애비게일과 존의 결혼은 그들의 서신과 다른 저술을 통해 잘 기록되어 있다.[12] 존의 정치적 의무를 통해 주고받은 편지들은 애비게일의 지식에 대한 그의 신뢰가 진심이었음을 나타낸다. 남편처럼, 애비게일은 종종 편지에서 문학을 인용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맥컬러프는 그녀가 남편보다 "더 쉽게" 그렇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서신은 그들의 상호적인 정서적, 지적 존경심을 밝혀주었다. 존은 종종 그녀의 인정을 받을 필요성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자신의 "허영심"에 대해 변명했다.
존 애덤스는 1768년 4월에 가족을 보스턴으로 이사시켰고, 현지에서 "화이트 하우스"로 알려진 브래틀 스트리트에 있는 판자집을 임대했다. 그와 애비게일, 아이들은 그곳에서 1년 동안 살았고, 그 다음 콜드 레인으로 이사했고, 그 후 시내 중심가에 있는 브래틀 스퀘어에 있는 더 큰 집으로 다시 이사했다.[13] 1771년, 존의 사업 확장은 가족의 변화를 필요로 했다. 그는 애비게일과 아이들을 다시 브레인트리로 이사시켰지만, 그는 보스턴에 사무실을 유지하여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에서 얼마 동안 보낸 후 그는 시골적이고 "속된" 브레인트리를 가족의 집으로 여기는 것에 환멸을 느꼈고, 따라서 1772년 8월, 애덤스는 가족을 보스턴으로 다시 이사시켰다. 그는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퀸 스트리트에 있는 큰 벽돌집을 구입했다.[14] 1774년, 애비게일과 존은 보스턴의 상황이 불안정해지면서 가족을 농장으로 돌려보냈고, 브레인트리는 그들의 영구적인 매사추세츠 집으로 남았다.[15]
애비게일은 투자를 포함한 가족의 재정 문제에 대한 책임을 졌다. 그녀가 삼촌 코튼 터프츠를 통해 혁명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된 채무 증권에 투자한 것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공공 신용에 관한 첫 번째 보고서가 정부 증권 소지자에게 액면가로 전액 연방 지불을 보증한 후에 보상을 받았다.[16]
3. 1. 존 애덤스와의 만남과 결혼
애비게일 스미스는 1759년 15세에 존 애덤스를 처음 만났다. 존은 친구 리처드 크랜치를 통해 스미스 가에 방문했는데, 크랜치는 애비게일의 언니 메리 스미스와 약혼한 사이였으며, 훗날 이들은 연방 판사 윌리엄 크랜치의 부모가 된다.[8] 애덤스는 스미스 자매들이 "상냥하지도, 솔직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고 평가했다.[46]1762년에 애비게일과 만나, 두 사람은 익살스럽고 솔직하게 애정을 표현하는 연애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46] 26세의 애덤스는 17세의 총명하고 활발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는 후년에 애덤스에게 지적이고 믿음직한 조수가 되었다.[47] 애비게일의 아버지는 결혼을 승인했지만, 어머니는 딸이 농장 냄새가 나는 지방 변호사와 결혼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결국 어머니도 승낙했고, 1764년 10월 25일 두 사람은 웨이머스에 있는 스미스 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애비게일의 아버지 윌리엄 스미스가 직접 결혼식을 주관했다.[8]
피로연 후, 부부는 말을 타고 존이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 (현재 매사추세츠주 퀸시의 일부)의 소금집과 농장으로 향했다.[31] 부부는 결혼 9개월 만에 첫 아이를 맞이했다.[31] 두 사람은 사상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고, 애비게일도 애덤스와 마찬가지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며, 그를 위한 투쟁을 지지했다.[48]
12년 동안 애비게일 애덤스는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45][49]
- 애비게일 ("내비"; 1765–1813)
- 존 퀸시 (1767–1848)
- 수재나 (별명 "수키")[9] (1768–1770)
- 찰스 (1770–1800)
- 토마스 (1772–1832)
- 엘리자베스 (1777년 사산)[10]
그녀의 육아 방식에는 아이들이 미덕과 애덤스 가문에 빚진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지속적인 상기가 포함되었다.[11]
결혼 초부터 정치 활동으로 바빴던 남편은 집을 자주 비웠으며, 이들의 별거 생활은 평생 계속되었다. 애비게일은 결혼 생활의 대부분이 "미망인 생활"과 같았다고 회고했다.[47] 애덤스는 남편이 먼 여행을 떠났을 때 가족과 농장을 책임졌다. "아아!", 그녀는 1773년 12월에 썼다, "얼마나 많은 눈 언덕이 당신과 나를 갈라놓고 있습니까." 애비게일과 존의 결혼은 그들의 서신과 다른 저술을 통해 잘 기록되어 있다.[12] 존의 정치적 의무를 통해 주고받은 편지들은 애비게일의 지식에 대한 그의 신뢰가 진심이었음을 나타낸다. 남편처럼, 애비게일은 종종 편지에서 문학을 인용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맥컬러프는 그녀가 남편보다 "더 쉽게" 그렇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서신은 그들의 상호적인 정서적, 지적 존경심을 밝혀주었다. 존은 종종 그녀의 인정을 받을 필요성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자신의 "허영심"에 대해 변명했다.
존 애덤스는 1768년 4월에 가족을 보스턴으로 이사시켰고, 현지에서 "화이트 하우스"로 알려진 브래틀 스트리트에 있는 판자집을 임대했다. 그와 애비게일, 아이들은 그곳에서 1년 동안 살았고, 그 다음 콜드 레인으로 이사했고, 그 후 시내 중심가에 있는 브래틀 스퀘어에 있는 더 큰 집으로 다시 이사했다.[13] 1771년, 존의 사업 확장은 가족의 변화를 필요로 했다. 그는 애비게일과 아이들을 다시 브레인트리로 이사시켰지만, 그는 보스턴에 사무실을 유지하여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업무에 집중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에서 얼마 동안 보낸 후 그는 시골적이고 "속된" 브레인트리를 가족의 집으로 여기는 것에 환멸을 느꼈고, 따라서 1772년 8월, 애덤스는 가족을 보스턴으로 다시 이사시켰다. 그는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퀸 스트리트에 있는 큰 벽돌집을 구입했다.[14] 1774년, 애비게일과 존은 보스턴의 상황이 불안정해지면서 가족을 농장으로 돌려보냈고, 브레인트리는 그들의 영구적인 매사추세츠 집으로 남았다.[15]
애비게일은 투자를 포함한 가족의 재정 문제에 대한 책임을 졌다. 그녀가 삼촌 코튼 터프츠를 통해 혁명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된 채무 증권에 투자한 것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공공 신용에 관한 첫 번째 보고서가 정부 증권 소지자에게 액면가로 전액 연방 지불을 보증한 후에 보상을 받았다.[16]
3. 2. 자녀
애비게일 스미스는 1759년 15세에 존 애덤스를 처음 만났다.[8] 존 애덤스는 1762년에 애비게일을 만나, 17세의 총명하고 활발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46] 애비게일의 아버지는 그 결혼을 승인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아직 농장의 냄새가 나는 지방 변호사와 결혼할 것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다.[8] 결국 그녀는 굴복했고, 그 부부는 1764년 10월 25일 웨이머스에 있는 스미스 집에서 결혼했다.[8][45] 피로연 후, 부부는 말을 한 필에 타고 새집으로 향했는데, 그곳은 존이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소금집과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의 농장이었다[31] (현재 매사추세츠주 퀸시의 일부인 위치).[31]12년 동안, 애비게일 애덤스는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8]
- 애비게일 ("내비"; 1765–1813)[8] - 유방암 진단을 받고, 1811년에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 후 악성 종양이 전신으로 전이되어 오랫동안 고통받다가 48세에 사망했다[50]。
- 존 퀸시 (1767–1848)[8] - 제6대 미국 대통령[51]。
- 수재나 (별명 "수키")[9] (1768–1770)[8]
- 찰스 (1770–1800)[8] - 뉴욕의 변호사.[52] 인간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술에 의존했고, 아버지와 소원해져 절망 속에서 30세에 사망했다[52]。
- 토마스 (1772–1832)[8] - 매사추세츠 주의 의원, 판사.[53] 6명의 자녀 중 두 번째로 오래 살았지만, 끊임없는 병, 술에 대한 탐닉, 막대한 빚에 시달렸다[53]。
- 엘리자베스 (1777년 사산)[10][49]
그녀의 육아 방식에는 아이들이 미덕과 애덤스 가문에 빚진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지속적인 상기가 포함되었다.[11]
3. 3. 결혼 생활과 서신 교환
애비게일 스미스는 1759년 15세에 존 애덤스를 처음 만났고, 1762년부터 연애 편지를 주고받았다.[46] 존 애덤스는 1766년 벤자민 블라이스가 그린 초상화에서 짙은 회색 옷을 입고 검은 머리를 한 남성으로 묘사되었다. 같은 해 애비게일 애덤스의 초상화에서 그녀는 짙은 흑발과 어두운 눈을 가진 여성으로 파란색과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애덤스는 스미스 자매들이 "상냥하지도, 솔직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고 보고했다.[46][47] 하지만 26세의 애덤스는 17세의 총명하고 활발한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그녀는 훗날 애덤스에게 지적이고 믿음직한 조수가 되었다.[47] 두 사람은 사상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고, 애비게일도 애덤스와 마찬가지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며, 그를 위한 투쟁을 지지했다.[48]애비게일의 아버지는 결혼을 승인했지만, 어머니는 딸이 농장의 냄새가 나는 지방 변호사와 결혼하는 것에 경악했다. 결국 그녀는 굴복했고, 1764년 10월 25일 웨이머스에 있는 스미스 집에서 부부는 결혼했다.[8] 애비게일의 아버지 윌리엄 스미스가 결혼을 주관했다.[45] 피로연 후, 부부는 말을 한 필에 타고 새집으로 향했는데, 그곳은 존이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소금집과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의 농장이었다[31] (현재 매사추세츠주 퀸시의 일부인 위치).[45] 부부는 결혼 9개월 만에 첫 아이를 맞이했다.[31]
12년 동안, 애비게일 애덤스는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45][49]
- 애비게일 ("내비"; 1765–1813)
- 존 퀸시 (1767–1848)
- 수재나 (별명 "수키")[9] (1768–1770)
- 찰스 (1770–1800)
- 토마스 (1772–1832)
- 엘리자베스 (1777년 사산)[10]
그녀의 육아 방식에는 아이들이 미덕과 애덤스 가문에 빚진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지속적인 상기가 포함되었다.[11] 애덤스는 남편이 먼 여행을 떠났을 때 가족과 농장을 책임졌다. 애비게일과 존의 결혼은 그들의 서신과 다른 저술을 통해 잘 기록되어 있다.[12] 존의 정치적 의무를 통해 주고받은 편지들은 애비게일의 지식에 대한 그의 신뢰가 진심이었음을 나타낸다. 남편처럼, 애비게일은 종종 편지에서 문학을 인용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맥컬러프는 그녀가 남편보다 "더 쉽게" 그렇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서신은 그들의 상호적인 정서적, 지적 존경심을 밝혀주었다. 존은 종종 그녀의 인정을 받을 필요성을 드러내며, 그녀에게 자신의 "허영심"에 대해 변명했다.[47]
존 애덤스는 1768년 4월에 가족을 보스턴으로 이사시켰고, 현지에서 "화이트 하우스"로 알려진 브래틀 스트리트에 있는 판자집을 임대했다. 1774년, 애비게일과 존은 보스턴의 상황이 불안정해지면서 가족을 농장으로 돌려보냈고, 브레인트리는 그들의 영구적인 매사추세츠 집으로 남았다.[15]
애비게일은 또한 투자를 포함한 가족의 재정 문제에 대한 책임을 졌다. 그녀가 삼촌 코튼 터프츠를 통해 혁명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된 채무 증권에 투자한 것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공공 신용에 관한 첫 번째 보고서가 정부 증권 소지자에게 액면가로 전액 연방 지불을 보증한 후에 보상을 받았다.[16]
4. 정치적 견해와 활동
전기 작가 린 위티는 애비게일 애덤스의 보수주의에 대해 "그녀는 혁명을 두려워했고, 안정을 중시했으며, 가족과 종교가 사회 질서의 필수적인 버팀목이라고 믿었고, 불평등을 사회적 필수 요소로 여겼다."라고 주장한다.[25] 그녀의 18세기 사고방식은 "여성의 법적, 사회적 지위 향상이 본질적으로 가정적인 역할과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26]
여성의 권리 옹호애비게일 애덤스는 18세기 여성으로서 겪었던 어려움과 걱정에 대해 글을 썼다.[27] 그녀는 기혼 여성의 재산권과 여성의 더 많은 기회, 특히 교육 분야에서의 기회를 옹호했다. 그녀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법에 복종해서는 안 되며, 남편의 단순한 동반자 역할에 만족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여성들은 스스로 교육을 받아 지적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며, 이를 통해 자녀와 남편의 삶을 인도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했다.
그녀는 1776년 3월 존 애덤스와 대륙 회의에 보낸 편지로 유명한데, 그 편지에서 "여성들을 기억하고, 조상들보다 더 관대하고 호의적으로 대하십시오. 남편의 손에 무제한의 권력을 주지 마십시오. 모든 남자는 그럴 수 있다면 폭군이 될 것입니다. 여성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으며, 우리가 발언권이나 대표권이 없는 법에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요청했다.[4]
존 애덤스는 애비게일의 "특별한 법전"을 거절했지만, 애비게일에게 "우리는 단지 주인의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이며, 이것을 포기하는 대신, 그것은 우리를 여성의 전제주의에 완전히 종속시킬 것이기에, 나는 조지 워싱턴과 우리의 모든 용감한 영웅들이 싸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인정했다.[28]
애비게일은 1776년에 남편인 애덤스에게 보낸 제2차 대륙회의 서한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 여성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녀들에게 관대하고 호의적으로 대해 주십시오. 남편의 수중에 너무나 막대한 권력을 부여하지 마십시오. 모든 남자들이 폭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만약 여성들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란을 선동하기로 결심할 것이며,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은 어떤 법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요구했다[46]。애비게일의 "별난 법"에 대한 요구는 애덤스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이 편지는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45]。
노예제 반대애덤스는 미국 노예제의 존재에 반대했으며, 이를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1776년 3월 31일에 쓴 편지에서 애덤스는 버지니아주 백인 다수가 자유를 주장하지만, "동료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자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4][46]
1791년 필라델피아에서 한 자유 흑인 청년이 애덤스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있었다. 애덤스는 이웃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을 지역 야간 학교에 보냈다. 애덤스는 그 소년이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인이며, 단지 얼굴이 검다는 이유로 교육을 거부해야 하는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자격을 얻을 수 있겠는가? ... 그를 응접실로 데려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전혀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29][46]
애덤스는 폐지론적 견해를 가졌지만, 1785년 런던에서 오셀로 공연을 관람한 후, 흑인 남자인 극의 주인공이 백인 여성인 데스데모나를 만지는 것을 보고 "역겨움과 공포"를 느꼈다고 썼다. 역사학자 아네트 고든-리드는 애덤스의 인종에 대한 견해가 "18세기 전형적인 백인"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말했다.[30]
인종에 대한 관점애덤스는 미국 노예제의 존재에 반대했으며, 이를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4] 1776년 3월 31일 편지에서 애덤스는 버지니아주 백인 다수가 자유를 주장하지만, "동료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자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4][46]
1791년 필라델피아에서 한 자유 흑인 청년이 애덤스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있었다. 애덤스는 이웃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을 지역 야간 학교에 보냈다. 애덤스는 그 소년이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인이며, 단지 얼굴이 검다는 이유로 교육을 거부해야 하는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자격을 얻을 수 있겠는가? ... 그를 응접실로 데려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전혀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29][46]
애덤스는 폐지론적 견해를 가졌지만, 1785년 런던에서 오셀로 공연을 관람한 후, 흑인 남자인 오셀로가 백인 여성인 데스데모나를 만지는 것을 보고 "역겨움과 공포"를 느꼈다고 썼다.[30] 역사학자 아네트 고든-리드는 애덤스의 인종에 대한 견해가 "18세기 전형적인 백인"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말했다.[30]
4. 1. 여성의 권리 옹호
애비게일 애덤스는 18세기 여성으로서 겪었던 어려움과 걱정에 대해 글을 썼다.[27] 그녀는 기혼 여성의 재산권과 여성의 더 많은 기회, 특히 교육 분야에서의 기회를 옹호했다. 그녀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법에 복종해서는 안 되며, 남편의 단순한 동반자 역할에 만족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여성들은 스스로 교육을 받아 지적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며, 이를 통해 자녀와 남편의 삶을 인도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했다.그녀는 1776년 3월 존과 대륙 회의에 보낸 편지로 유명한데, 그 편지에서 "여성들을 기억하고, 조상들보다 더 관대하고 호의적으로 대하십시오. 남편의 손에 무제한의 권력을 주지 마십시오. 모든 남자는 그럴 수 있다면 폭군이 될 것입니다. 여성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으며, 우리가 발언권이나 대표권이 없는 법에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요청했다.[4]
존은 애비게일의 "특별한 법전"을 거절했지만, 애비게일에게 "우리는 단지 주인의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이며, 이것을 포기하는 대신, 그것은 우리를 여성의 전제주의에 완전히 종속시킬 것이기에, 나는 조지 워싱턴 장군과 우리의 모든 용감한 영웅들이 싸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인정했다.[28]
애비게일은 1776년에 남편인 애덤스에게 보낸 제2차 대륙회의 서한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그들에게 "… 여성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녀들에게 관대하고 호의적으로 대해 주십시오. 남편의 수중에 너무나 막대한 권력을 부여하지 마십시오. 모든 남자들이 폭군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만약 여성들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란을 선동하기로 결심할 것이며,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은 어떤 법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요구했다[46]。애비게일의 "별난 법"에 대한 요구는 애덤스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이 편지는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45]。
4. 2. 노예제 반대
애덤스는 미국 노예제의 존재에 반대했으며, 이를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1776년 3월 31일에 쓴 편지에서 애덤스는 버지니아주 백인 다수가 자유를 주장하지만, "동료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자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4][46]1791년 필라델피아에서 한 자유 흑인 청년이 애덤스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있었다. 애덤스는 이웃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을 지역 야간 학교에 보냈다. 애덤스는 그 소년이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인이며, 단지 얼굴이 검다는 이유로 교육을 거부해야 하는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자격을 얻을 수 있겠는가? ... 그를 응접실로 데려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전혀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29][46]
애덤스는 폐지론적 견해를 가졌지만, 1785년 런던에서 오셀로 공연을 관람한 후, 흑인 남자인 극의 주인공이 백인 여성인 데스데모나를 만지는 것을 보고 "역겨움과 공포"를 느꼈다고 썼다. 역사학자 아네트 고든-리드는 애덤스의 인종에 대한 견해가 "18세기 전형적인 백인"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말했다.[30]
4. 3. 인종에 대한 관점
애덤스는 미국 노예제의 존재에 반대했으며, 이를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4] 1776년 3월 31일 편지에서 애덤스는 버지니아주 백인 다수가 자유를 주장하지만, "동료 인간"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점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자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4][46]1791년 필라델피아에서 한 자유 흑인 청년이 애덤스에게 글을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있었다. 애덤스는 이웃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소년을 지역 야간 학교에 보냈다. 애덤스는 그 소년이 "다른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유인이며, 단지 얼굴이 검다는 이유로 교육을 거부해야 하는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자격을 얻을 수 있겠는가? ... 그를 응접실로 데려가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에게 전혀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29][46]
애덤스는 폐지론적 견해를 가졌지만, 1785년 런던에서 오셀로 공연을 관람한 후, 흑인 남자인 오셀로가 백인 여성인 데스데모나를 만지는 것을 보고 "역겨움과 공포"를 느꼈다고 썼다.[30] 역사학자 아네트 고든-리드는 애덤스의 인종에 대한 견해가 "18세기 전형적인 백인"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말했다.[30]
5. 영부인 시절 (1797-1801)
존 애덤스는 1797년 3월 4일, 61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의 두 번째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31] 애비게일은 남편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남편의 89세 된 어머니의 병간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31] 존이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애비게일은 공식적인 접대 방식을 이어갔다.[18] 그녀는 매주 대규모 만찬을 열고, 빈번하게 공개 석상에 나타났으며, 매 미국 독립 기념일마다 필라델피아 시민들을 위한 오락거리를 제공했다.[19][20]
마사 워싱턴과는 달리 정치와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31] 애비게일은 정치적으로 매우 활동적이어서, 그녀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그녀를 "대통령 부인"이라고 칭했다.[31] 1798년에 프랑스와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애비게일은 대(對) 프랑스 강경론자로서 애덤스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선포하도록 촉구했지만[46], 최종적으로 평화 유지를 우선시하는 남편에게 그녀도 납득했다.[55] 는 그녀를 "부인 대통령(Mrs. President)"이라고 비꼬았다.[45] 존의 측근으로서, 애비게일은 남편의 행정부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종종 잘 알고 있었고, 때로는 여동생 메리와 아들 존 퀸시에게 보낸 편지에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시사적인 세부 사항을 포함하기도 했다.[19] 어떤 사람들은 애비게일을 통해 대통령에게 연락을 취했다.[19] 때때로 애비게일은 남편에게 유리한 기사를 언론에 흘리기도 했다.[19] 애비게일은 남편의 정치 경력을 굳건히 지지하며, 외국인 및 반역 행위 통과와 같은 그의 정책을 지지했다.[19]
1800년 수도가 워싱턴 D.C.로 이전되면서, 그녀는 당시 대통령 관저로 알려진 백악관에 거주한 최초의 영부인이 되었다.[22] 애덤스는 1800년 11월 백악관으로 이사하여 남편의 임기 마지막 4개월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31] 당시 워싱턴 D.C.는 황무지였고, 대통령 관저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45][54] 그녀는 워싱턴의 미완성 저택을 "살 만하다"고, 그 위치를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근처에 울창한 숲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부인을 위해 장작을 베어 운반할 사람을 찾을 수 없다고 불평했다. 애비게일은 백악관 동쪽 응접실을 세탁물을 말리는 데 사용했다.[23] 당시 백악관은 2층으로 올라가는 대계단이 완성되지 않았으며 침실도 완성되지 않았다. 물은 800m 떨어진 옆집에서 길어 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벽난로에서 태울 땔감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땔감을 운반해 줄 인력도 부족했다. 방 내부는 차가웠고, 애비게일은 류머티즘으로 고생했다.[55] 애덤스의 건강은, 원래부터 튼튼하지 않았는데, 워싱턴에서 악화되었다.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애덤스가 패배하자, 이듬해 1801년에 가족은 퀸시로 물러났다. 부부는 대선 패배에 큰 충격을 받았고, 애덤스는 후임 토머스 제퍼슨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것을 꺼려 고향으로 돌아갔다.[56] 당시 썼던 편지를 보면, 애비게일은 아들의 정치적 경력을 진지하게 지원했다.[46] 훗날, 애비게일은 남편의 정적이자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제퍼슨과 서신 왕래를 재개했다.[45]
5. 1. 영부인으로서의 활동
존 애덤스는 1797년 3월 4일, 61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의 두 번째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31] 애비게일은 남편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남편의 89세 된 어머니의 병간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31] 존이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애비게일은 공식적인 접대 방식을 이어갔다.[18] 그녀는 매주 대규모 만찬을 열고, 빈번하게 공개 석상에 나타났으며, 매 미국 독립 기념일마다 필라델피아 시민들을 위한 오락거리를 제공했다.[19][20]마사 워싱턴과는 달리 정치와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31] 애비게일은 정치적으로 매우 활동적이어서, 그녀의 정치적 반대자들은 그녀를 "대통령 부인"이라고 칭했다.[31] 1798년에 프랑스와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애비게일은 대(對) 프랑스 강경론자로서 애덤스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선포하도록 촉구했지만[46], 최종적으로 평화 유지를 우선시하는 남편에게 그녀도 납득했다.[55] 존의 측근으로서, 애비게일은 남편의 행정부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종종 잘 알고 있었고, 때로는 여동생 메리와 아들 존 퀸시에게 보낸 편지에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시사적인 세부 사항을 포함하기도 했다.[19] 어떤 사람들은 애비게일을 통해 대통령에게 연락을 취했다.[19] 때때로 애비게일은 남편에게 유리한 기사를 언론에 흘리기도 했다.[19] 애비게일은 남편의 정치 경력을 굳건히 지지하며, 외국인 및 반역 행위 통과와 같은 그의 정책을 지지했다.[19]
1800년 수도가 워싱턴 D.C.로 이전되면서, 그녀는 당시 대통령 관저로 알려진 백악관에 거주한 최초의 영부인이 되었다.[22] 애덤스는 1800년 11월 백악관으로 이사하여 남편의 임기 마지막 4개월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31] 당시 워싱턴 D.C.는 황무지였고, 대통령 관저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그녀는 워싱턴의 미완성 저택을 "살 만하다"고, 그 위치를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근처에 울창한 숲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부인을 위해 장작을 베어 운반할 사람을 찾을 수 없다고 불평했다. 애비게일은 백악관 동쪽 응접실을 세탁물을 말리는 데 사용했다.[23] 애덤스의 건강은, 원래부터 튼튼하지 않았는데, 워싱턴에서 악화되었다.
5. 2. 정치적 영향력
존 애덤스는 1797년 3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했다.[31] 애비게일은 남편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시어머니의 병간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31] 존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애비게일은 영부인으로서 매주 대규모 만찬을 열고, 빈번하게 공개 석상에 나타나는 등 공식적인 접대 방식을 이어갔다.[18][19][20]애비게일은 마사 워싱턴과는 달리 정치와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정치적 반대자들은 그녀를 "대통령 부인"이라고 칭할 정도였다.[31][45] 그녀는 남편의 행정부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때로는 여동생과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부 사항을 포함하기도 했다.[19] 어떤 사람들은 애비게일을 통해 대통령에게 연락을 취했으며, 때때로 애비게일은 남편에게 유리한 기사를 언론에 흘리기도 했다.[19] 애비게일은 남편의 정치 경력을 굳건히 지지하며, 외국인 및 반역 행위 통과와 같은 그의 정책을 지지했다.[19] 1798년 프랑스와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애비게일은 대(對) 프랑스 강경론자로서 애덤스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선포하도록 촉구했지만,[46] 최종적으로 평화 유지를 우선시하는 남편에게 그녀도 납득했다.[55]
1789년 애덤스가 워싱턴 행정부에서 최초의 미국 부통령이 되자, 애비게일은 처음 4년간 세컨드 레이디로서 다양한 공식 행사를 수행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애덤스는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직무"라는 부통령직에 실망하게 되었고, 두 번째 임기에 접어들면서 애비게일도 의문을 품게 되어 매사추세츠로 돌아갔다.[48]
1800년 수도가 워싱턴 D.C.로 이전되면서, 그녀는 백악관에 거주한 최초의 영부인이 되었다.[22] 애덤스는 1800년 11월 백악관으로 이사하여 남편의 임기 마지막 4개월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31] 당시 워싱턴 D.C.는 황무지였고, 대통령 관저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그녀는 워싱턴의 미완성 저택을 "살 만하다"고, 그 위치를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근처에 울창한 숲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부인을 위해 장작을 베어 운반할 사람을 찾을 수 없다고 불평했다. 애비게일은 백악관 동쪽 응접실을 세탁물을 말리는 데 사용했다.[23] 당시 백악관은 2층으로 올라가는 대계단이 완성되지 않았으며 침실도 완성되지 않았다. 물은 800m 떨어진 옆집에서 길어 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벽난로에서 태울 땔감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땔감을 운반해 줄 인력도 부족했다. 방 내부는 차가웠고, 애비게일은 류머티즘으로 고생했다.[55] 애덤스의 건강은, 원래부터 튼튼하지 않았는데, 워싱턴에서 악화되었다.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애덤스가 패배하자, 이듬해 1801년에 가족은 퀸시로 물러났다. 부부는 대선 패배에 큰 충격을 받았고, 애덤스는 후임 토머스 제퍼슨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것을 꺼려 고향으로 돌아갔다.[56] 당시 썼던 편지를 보면, 애비게일은 아들의 정치적 경력을 진지하게 지원했다.[46] 훗날, 애비게일은 남편의 정적이자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준 제퍼슨과 서신 왕래를 재개했다.[45]
5. 3. 백악관 생활
존 애덤스는 1797년 3월 4일 필라델피아에서 미국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했다.[31] 애비게일은 남편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시어머니의 병간호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31] 존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애비게일은 영부인으로서 매주 대규모 만찬을 열고, 빈번하게 공개 석상에 나타났으며, 매 미국 독립 기념일마다 필라델피아 시민들을 위한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등 공식적인 접대 방식을 이어갔다.[19][20]마사 워싱턴과는 달리 정치와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애비게일은 정치적 반대자들로부터 "대통령 부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치적으로 매우 활동적이었다.[31] 그녀는 남편의 행정부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때로는 여동생 메리와 아들 존 퀸시에게 보낸 편지에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세부 사항을 포함하기도 했다.[19] 어떤 사람들은 애비게일을 통해 대통령에게 연락을 취했으며,[19] 때때로 애비게일은 남편에게 유리한 기사를 언론에 흘리기도 했다.[19] 애비게일은 외국인 및 반역 행위 통과와 같은 남편의 정책을 지지하며 그의 정치 경력을 굳건히 지지했다.[19] 1798년 프랑스와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애비게일은 대(對) 프랑스 강경론자로서 애덤스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선포하도록 촉구했지만,[46] 최종적으로 평화 유지를 우선시하는 남편에게 그녀도 납득했다.[55]
1800년 수도가 워싱턴 D.C.로 이전되면서, 애비게일은 백악관에 거주한 최초의 영부인이 되었다.[22] 1800년 11월 백악관으로 이사하여 남편의 임기 마지막 4개월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31] 당시 워싱턴 D.C.는 황무지였고, 대통령 관저는 아직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애비게일은 워싱턴의 미완성 저택을 "살 만하다"고, 그 위치를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근처에 울창한 숲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부인을 위해 장작을 베어 운반할 사람을 찾을 수 없다고 불평했다. 애비게일은 백악관 동쪽 응접실을 세탁물을 말리는 데 사용했다.[23] 당시 백악관은 2층으로 올라가는 대계단과 침실이 완성되지 않았고, 물은 800m 떨어진 옆집에서 길어 와야 했으며, 벽난로 땔감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땔감을 운반해 줄 인력도 부족했다. 방 내부는 차가웠고, 애비게일은 류머티즘으로 고생했다.[55]
6. 유럽에서의 생활 (1784-1788)
1784년, 애비게일은 딸 내비와 함께 남편, 그리고 장남 존 퀸시 애덤스와 합류하여 남편의 외교 임무가 있는 파리로 갔다.[17] 애비게일은 긴 항해를 두려워했지만, 실제로는 항해를 흥미롭게 여겼다.[17] 처음에는 파리에서의 생활이 힘들다고 느꼈고, 많은 하인을 거느린 큰 집을 운영하는 것에 압도되기도 했다.[17]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수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연극과 오페라를 즐겼으며, 파리 여성들의 패션에 매료되었지만, 자신은 "결코 유행을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씁쓸하게 인정했다.[17]
1785년 이후, 그녀는 세인트 제임스 궁정 (영국) 주재 미국 최초의 전권 공사의 아내 역할을 수행했다.[17] 파리와는 대조적으로, 애비게일은 런던을 싫어했는데, 그곳에서는 친구가 거의 없었고, 일반적으로 사교계에서 냉대를 받았다.[17] 한 가지 즐거운 경험은 토머스 제퍼슨의 어린 딸 메리(폴리)를 임시로 돌본 일이었는데, 애비게일은 폴리에 대해 깊고 평생 지속될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17]
그녀와 존은 1788년 평화의 언덕(Peacefield)(일명 "올드 하우스")로 퀸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고, 그곳을 힘차게 확장하고 개조했다.[17] 그 집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애덤스 국립 역사 공원의 일부로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17]
6. 1. 파리에서의 생활
1784년, 애비게일은 딸 내비와 함께 남편, 그리고 장남 존 퀸시 애덤스와 합류하여 남편의 외교 임무가 있는 파리로 갔다.[17] 애비게일은 긴 항해를 두려워했지만, 실제로는 항해를 흥미롭게 여겼다.[17] 처음에는 파리에서의 생활이 힘들다고 느꼈고, 많은 하인을 거느린 큰 집을 운영하는 것에 압도되기도 했다.[17]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즐거움을 찾기 시작했다. 수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연극과 오페라를 즐겼으며, 파리 여성들의 패션에 매료되었지만, 자신은 "결코 유행을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씁쓸하게 인정했다.[17]6. 2. 런던에서의 생활
1784년, 애비게일과 그녀의 딸 나비는 남편과 장남 존 퀸시와 합류하여 남편의 외교 직무가 있는 파리로 갔다. 애비게일은 긴 항해를 두려워했지만, 사실 여행을 흥미롭게 여겼다.[17] 처음에는 파리에서의 생활이 힘들다고 느꼈고, 많은 하인들을 거느린 큰 집을 운영하는 새로운 경험에 다소 압도되었다.[17] 그러나 몇 달이 지나면서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17] 수많은 친구를 사귀었고, 연극과 오페라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파리 여성들의 패션에 매료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유행을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씁쓸하게 인정했다.[17]1785년 이후, 그녀는 세인트 제임스 궁정 (영국) 주재 미국 최초의 전권 공사의 아내 역할을 수행했다.[17] 파리와는 대조적으로, 애비게일은 런던을 싫어했는데, 그곳에서는 친구가 거의 없었고, 일반적으로 사교계에서 냉대를 받았다.[17] 한 가지 즐거운 경험은 토머스 제퍼슨의 어린 딸 메리(폴리)를 임시로 돌본 일이었는데, 애비게일은 폴리에 대해 깊고 평생 지속될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17]
그녀와 존은 1788년 평화의 언덕(Peacefield)(일명 "올드 하우스")로 퀸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고, 그곳을 힘차게 확장하고 개조했다.[17] 그 집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애덤스 국립 역사 공원의 일부로 일반에 공개되어 있다.[17]
7. 만년과 죽음 (1801-1818)
1800년 존 애덤스가 대통령 재선에서 토머스 제퍼슨에게 패배한 후, 존과 애비게일 애덤스 부부는 퀸시에 있는 피스필드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애비게일은 아들 존 퀸시 애덤스의 정치 경력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이는 그녀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잘 드러난다. 만년에 애비게일은 토머스 제퍼슨과 다시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이는 제퍼슨의 딸 마리아 제퍼슨 엡스(폴리)가 사망했을 때 애비게일이 위로의 편지를 보낸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애비게일은 과거 런던에서 어린 폴리를 돌보며 각별한 정을 느꼈지만, 남편 존 애덤스의 정적이었던 제퍼슨에게는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31] 애비게일은 손녀 수잔나를 계속해서 양육했다.[31] 또한, 아들 존 퀸시 애덤스가 러시아 대사로 임명되어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조지 워싱턴 애덤스를 포함한 여러 손주들과 어린 존 애덤스를 돌보았다. 1813년, 애비게일의 딸 나비 애덤스는 3년간의 투병 끝에 48세의 나이로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24]
애비게일은 1818년10월 28일 장티푸스로 인해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56] 죽기 직전, 남편 존 애덤스는 아들 존 퀸시 애덤스에게 "아내의 사랑에 가득 찬 참여와 긍정적인 격려가 자신에게 끊임없는 지주가 되었다. 그녀가 곁에 없었다면 자신이 성공했을지 의심스럽다"라고 회고했으며, 아들 존 퀸시 애덤스 또한 "어머니는 지상의 천사였다"라고 말했다.[56] 애비게일의 마지막 말은 "친구여, 사랑하는 친구여, 부디 슬퍼하지 마세요. 저는 이미 준비가 되었어요. 존, 이제 오래 남지 않았어요"였다.
남편 존 애덤스는 그로부터 8년 뒤인 1826년 7월 4일, 아들 존 퀸시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중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46] 애비게일과 존 애덤스는 퀸시의 유나이티드 퍼스트 교구 교회에 나란히 안장되었다.[54]
7. 1. 은퇴 후의 삶
존 애덤스의 대통령 재선 실패 이후, 애비게일과 존 애덤스는 피스필드로 돌아왔다.[31] 1800년 존이 대통령 재선에 실패한 후, 가족은 퀸시에 있는 피스필드로 은퇴했다. 애비게일은 동시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이 아들의 정치 경력에 열정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만년에 그녀는 토머스 제퍼슨과 서신 교환을 재개했는데, 이는 제퍼슨의 딸 마리아 제퍼슨 엡스(폴리)가 사망했을 때 그녀가 위로의 편지를 보낸 이후였다. 애비게일은 런던에서 폴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 그녀를 돌보며 사랑하게 되었지만, 제퍼슨이 남편에게 정치적으로 반대했던 것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31] 그녀는 손녀 수잔나를 계속해서 키웠다.[31] 또한, 그녀는 아들 존 퀸시 애덤스가 러시아 대사로 있는 동안 조지 워싱턴 애덤스를 포함한 손주들과 어린 존 애덤스를 키웠다. 애덤스의 48세 된 딸 나비는 3년간 심한 고통을 겪은 후 1813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24]7. 2. 토머스 제퍼슨과의 관계 회복
존 애덤스가 대통령 재선에 실패한 후, 애비게일과 존 애덤스는 피스필드로 돌아왔다.[31] 애비게일은 토머스 제퍼슨의 딸 마리아 제퍼슨 엡스가 사망했을 때 위로 편지를 보냈고, 이를 계기로 제퍼슨과의 서신 교환을 재개했다.[31] 애비게일은 런던에서 어린 시절 폴리를 돌보며 사랑하게 되었으나, 제퍼슨이 남편에게 정치적으로 반대했던 것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31]7. 3. 죽음
애비게일 애덤스는 말년에 병을 앓았다. 그녀는 1818년 10월 28일 자신의 집에서 장티푸스 열로 사망했다.[2][56] 향년 73세로, 74번째 생일을 2주 앞두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슬퍼하지 마세요, 제 친구, 가장 소중한 친구. 저는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존,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였다. 남편 존 애덤스는 아들에게 "아내의 사랑에 가득 찬 참여와 긍정적인 격려가 자신에게 끊임없는 지주가 되었다. 그녀가 곁에 없었다면 자신이 성공했을지 의심스럽다"라고 회고했다. 아들 존 퀸시 애덤스 또한 "어머니는 지상의 천사였다"라고 말했다.[56]
애비게일은 가족 묘소가 될 곳에 묻혔으며, 현재 이곳에는 남편 존, 아들 존 퀸시 애덤스, 그리고 존 퀸시의 아내인 루이자도 함께 묻혀 있다. 묘소는 매사추세츠 퀸시 소재 유나이티드 퍼스트 패리쉬 교회(일명 "대통령 교회")에 위치해 있다.[54] 남편 애덤스는 8년 후인 1826년, 아들 존 퀸시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사망했다.[46] 부부는 퀸시의 유나이티드 퍼스트 교구 교회 옆에 함께 묻혔다.
8. 유산과 평가
역사학자 조지프 엘리스는 존과 애비게일 사이의 1,200통의 편지가 "미국 역사상 저명한 미국인 부부 사이의 다른 어떤 서신보다 더 많은 친밀함과 솔직함을 보여주는 보물 창고였다"고 밝혔다.[33] 엘리스(2011)는 애비게일이 독학으로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존이 당시 최고의 서간 작가 중 한 명이었음에도, 존보다 더 훌륭하고 다채로운 서간 작가였다고 말한다. 엘리스는 애비게일이 두 사람 중 더 회복력 있고 감정적으로 균형 잡힌 사람이었으며, 그녀를 미국 역사상 가장 특별한 여성 중 한 명이라고 부른다.[33]
시에나 칼리지 연구소는 1982년부터 역사학자들에게 미국의 영부인들을 평가하도록 요청하는 설문 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해 왔다.[41] 평가 기준은 배경, 국가에 대한 가치, 지성, 용기, 업적, 청렴성, 리더십,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면모, 대중적 이미지, 대통령에 대한 가치 등이었다. 애비게일 아담스는 이러한 설문 조사에서 일관되게 가장 존경받는 영부인 3위 안에 들었다.[41]
애덤스는 누적 평가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받았다.[41]
2008년 시에나 연구소 설문 조사에서 아담스는 모든 기준에서 상위 4위 안에 들었으며, 특히 지성, 청렴성, 리더십, 대통령에 대한 가치 부문에서 2위를 기록했다.[42] 2014년 설문 조사에서 아담스와 그의 남편 존 애덤스는 '파워 커플'이라는 측면에서 39쌍의 영부부 중 5위를 기록했다.[43]
애비게일 애덤스 케언은 거친 돌무더기로, 그녀와 아들 존 퀸시 애덤스가 벙커힐 전투와 찰스타운의 화재를 지켜본 인근 펜 힐을 장식한다. 당시 그녀는 전투에서 사망한 매사추세츠 주 의회 의장이었던 조셉 워렌 박사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35]
뉴햄프셔 애덤스 산의 하위 봉우리 중 하나는 그녀의 명예를 기려 이름 지어졌다.[36]
2003년, 애덤스는 보스턴 커먼웰스 애비뉴 몰에 있는 보스턴 여성 기념관의 청동 조각품에서 3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2022년, 애덤스의 7피트 높이의 청동 조각상이 매사추세츠주 퀸시의 핸콕 애덤스 커먼에 공개되었다.[37]
워싱턴 D.C.에는 애덤스, 그녀의 남편, 그녀의 아들 및 가족 구성원을 기리는 애덤스 기념관이 제안되었다.
애덤스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 구절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1776의 노래에 크게 등장했다.[4] 버지니아 베스토프는 1969년 초연된 브로드웨이 공연 ''1776''에서 애덤스 역을 맡았으며, 1972년 영화 버전에서도 같은 역할을 재현했다. 텔레비전에서는 1976년 PBS 미니시리즈 ''애덤스 연대기''에서 캐서린 워커와 레오라 다나가 애덤스를 연기했다. 2008년 3월 HBO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존 애덤스''에서 그녀는 로라 리니가 연기했다. 리니는 애덤스를 연기하는 것을 즐겼으며, "그녀는 열정과 원칙을 모두 가진 여성"이라고 말했다.[11] 1781년경 혁명 시대의 애비게일은 텔레비전 시리즈 ''슬리피 할로우'' 시즌 2 에피소드 "Pittura Infamante"(2015년 1월 19일)에서 미셸 트라첸버그가 연기했으며, 이 기간 동안 설명할 수 없는 일련의 살인을 종식시키는 데 그녀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애덤스는 주디 시카고의 설치 작품 ''디너 파티''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며, ''헤리티지 플로어''에 있는 999개의 이름 중 하나로 표현된다.[38] 소설가 바바라 햄블리는 바바라 해밀턴이라는 필명으로 애비게일 애덤스의 시점에서 177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세 편의 역사 미스터리 소설을 썼으며, 애비게일을 탐정으로 등장시켰다. 작품으로는 ''아홉 번째 딸'' (2009), ''낙인 찍힌 남자'' (2010), ''악마와 함께 식사'' (2011)가 있다.
대통령 1달러 주화 프로그램에 따른 영부인 프로그램은 미국 조폐국이 미국의 영부인들을 기리기 위해 0.5 트로이 온스짜리 10달러 금화와 청동 메달 복제품을 발행하도록 승인한다.[39] 애비게일 애덤스 주화는 2007년 6월 19일에 출시되었으며 몇 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그녀는 주화 뒷면에 존 애덤스에게 가장 유명한 편지를 쓰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57]
2009년 2월 ''코인 월드''는 2007년 애비게일 애덤스 메달 중 일부가 실수로 2008년 루이자 애덤스 메달의 뒷면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다고 보도했다.[40] 이러한 주화들은 뮬이라고 불리며, 2007년 영부인 메달 세트에 포함되었다.[40] 미국 조폐국은 얼마나 많은 뮬이 제작되었는지 추정치를 발표하지 않았다.
8. 1. 역사적 평가
시에나 칼리지 연구소는 1982년부터 역사학자들에게 미국의 영부인들을 평가하도록 요청하는 설문 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해 왔다.[41] 평가 기준은 배경, 국가에 대한 가치, 지성, 용기, 업적, 청렴성, 리더십,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면모, 대중적 이미지, 대통령에 대한 가치 등이었다. 애비게일 아담스는 이러한 설문 조사에서 일관되게 가장 존경받는 영부인 3위 안에 들었다.[41]애덤스는 누적 평가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받았다.[41]
2008년 시에나 연구소 설문 조사에서 아담스는 모든 기준에서 상위 4위 안에 들었으며, 특히 지성, 청렴성, 리더십, 대통령에 대한 가치 부문에서 2위를 기록했다.[42] 2014년 설문 조사에서 아담스와 그의 남편 존 애덤스는 '파워 커플'이라는 측면에서 39쌍의 영부부 중 5위를 기록했다.[43]
8. 2. 기념물
애비게일 애덤스 케언은 거친 돌무더기로, 그녀와 아들 존 퀸시 애덤스가 벙커힐 전투와 찰스타운의 화재를 지켜본 인근 펜 힐을 장식한다. 당시 그녀는 전투에서 사망한 매사추세츠 주 의회 의장이었던 조셉 워렌 박사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35]
뉴햄프셔 애덤스 산의 하위 봉우리 중 하나는 그녀의 명예를 기려 이름 지어졌다.[36]
2003년, 애덤스는 보스턴 커먼웰스 애비뉴 몰에 있는 보스턴 여성 기념관의 청동 조각품에서 3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2022년, 애덤스의 7피트 높이의 청동 조각상이 매사추세츠주 퀸시의 핸콕 애덤스 커먼에 공개되었다.[37]
워싱턴 D.C.에는 애덤스, 그녀의 남편, 그녀의 아들 및 가족 구성원을 기리는 애덤스 기념관이 제안되었다.
8. 3. 대중문화
애덤스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 구절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1776의 노래에 크게 등장했다.[4] 버지니아 베스토프는 1969년 초연된 브로드웨이 공연 ''1776''에서 애덤스 역을 맡았으며, 1972년 영화 버전에서도 같은 역할을 재현했다. 텔레비전에서는 1976년 PBS 미니시리즈 ''애덤스 연대기''에서 캐서린 워커와 레오라 다나가 애덤스를 연기했다. 2008년 3월 HBO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존 애덤스''에서 그녀는 로라 리니가 연기했다. 리니는 애덤스를 연기하는 것을 즐겼으며, "그녀는 열정과 원칙을 모두 가진 여성"이라고 말했다.[11] 1781년경 혁명 시대의 애비게일은 텔레비전 시리즈 ''슬리피 할로우'' 시즌 2 에피소드 "Pittura Infamante"(2015년 1월 19일)에서 미셸 트라첸버그가 연기했으며, 이 기간 동안 설명할 수 없는 일련의 살인을 종식시키는 데 그녀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애덤스는 주디 시카고의 설치 작품 ''디너 파티''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며, ''헤리티지 플로어''에 있는 999개의 이름 중 하나로 표현된다.[38] 소설가 바바라 햄블리는 바바라 해밀턴이라는 필명으로 애비게일 애덤스의 시점에서 177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세 편의 역사 미스터리 소설을 썼으며, 애비게일을 탐정으로 등장시켰다. 작품으로는 ''아홉 번째 딸'' (2009), ''낙인 찍힌 남자'' (2010), ''악마와 함께 식사'' (2011)가 있다.8. 4. 화폐 도안
대통령 1달러 주화 프로그램에 따른 영부인 프로그램은 미국 조폐국이 미국의 영부인들을 기리기 위해 0.5 트로이 온스짜리 10달러 금화와 청동 메달 복제품을 발행하도록 승인한다.[39] 애비게일 애덤스 주화는 2007년 6월 19일에 출시되었으며 몇 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그녀는 주화 뒷면에 존 애덤스에게 가장 유명한 편지를 쓰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57] 2009년 2월 ''코인 월드''는 2007년 애비게일 애덤스 메달 중 일부가 실수로 2008년 루이자 애덤스 메달의 뒷면을 사용하여 제작되었다고 보도했다.[40] 이러한 주화들은 뮬이라고 불리며, 2007년 영부인 메달 세트에 포함되었다.[40] 미국 조폐국은 얼마나 많은 뮬이 제작되었는지 추정치를 발표하지 않았다.9. 종교적 신념
애덤스는 유니테리언으로 바뀐 퀸시의 퍼스트 패리시 교회의 활발한 교인이었다.[31] 그녀의 신학적 견해는 평생에 걸쳐 발전했다. 1816년 5월 5일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스스로를 유니테리언이라고 인정합니다. 오직 아버지만이 최고의 신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그의 존재와 모든 권능과 영예를 받았다고 믿습니다... 셋이 하나이고 하나가 셋이라는 것을 내 감각에 반하여 나를 납득시킬 수 있는 어떠한 추론도 없습니다."라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밝혔다.[4]
루이자 애덤스에게 1818년 1월 3일 보낸 편지에서는 "인류가 진정한 종교는 인간과 창조주 사이의 마음에서 비롯되며, 인간이나 신조, 시험의 강요가 아니라는 것을 언제 깨달을 것인가?"라고 질문했다.[32] 1753년에 유니테리언주의로 개종한 이후, 남편 존과 마찬가지로 퀸시의 유나이티드 퍼스트 교구 교회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46]
10. 가계도
애덤스 가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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