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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워싱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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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사 워싱턴은 1731년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의 초대 영부인이다. 1750년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와 결혼하여 네 자녀를 낳았으나, 남편의 사망 후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1759년 조지 워싱턴과 재혼하여 마운트 버넌에서 생활하며 농장 관리를 도왔으며, 미국 독립 전쟁 기간 동안 남편을 지원했다. 영부인으로서 사교 행사를 주최하고, 영부인의 역할을 확립했으며, 미국 지폐와 우표에 등장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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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워싱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길버트 스튜어트가 그린 마사 워싱턴의 초상화
길버트 스튜어트가 그린 마사 워싱턴의 초상화
직함미국의 대통령 배우자
재임 기간1789년 4월 30일 ~ 1797년 3월 4일
출생 이름마사 댄드리지
출생일1731년 6월 2일
출생지체스넛 그로브, 버지니아 식민지
사망일1802년 5월 22일
사망지마운트 버넌, 미국 버지니아주
안장 장소마운트 버넌, 미국 버지니아주
배우자대니얼 파크 커스티스 (1750년 결혼, 1757년 사망)
조지 워싱턴 (1759년 결혼, 1799년 사망)
자녀대니얼
프랜시스

마사
부모존 댄드리지
프랜시스 댄드리지
마사 워싱턴 서명
서명

2. 초기 생애 (1731–1748)

8세의 단드리지


1757년의 마사 단드리지 커스티스: 메조틴트 기법의 존 폴웰(1863)이 존 울라스턴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제작


마사 단드리지는 1731년 6월 2일 버지니아 식민지의 뉴켄트 군에 위치한 부모님의 담배 농장인 체스넛 그로브에서 태어났다.[2][47] 그녀는 농장주이자 군 서기였던 아버지 존 단드리지와 프랜시스 존스 사이의 8남매 중 장녀로,[4] 어린 시절부터 가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성장했다.[2] 당시 여성으로서는 비교적 좋은 교육을 받았다.[7][8]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2. 1. 출생과 가족



마사 단드리지(Martha Dandridge)는 1731년 6월 2일 버지니아 식민지의 뉴켄트 군에 위치한 부모님의 담배 농장인 체스넛 그로브에서 태어났다.[2][47] 그녀의 아버지는 잉글랜드에서 이주해 온 잉글랜드계 미국인 존 단드리지(John Dandridge, 1700–1756)로, 농장주이자[3] 군 서기였다.[2] 어머니 프랜시스 존스(Frances Jones, 1710–1785)는 성공회 교구 목사의 손녀였다.[3]

마사는 8명의 자녀 중 장녀였으며,[2] 세 명의 남동생 존(1733–1749), 윌리엄(1734–1776), 바솔로뮤(1737–1785)와 네 명의 여동생 안나 마리아 "패니" 배셋(1739–1777), 프랜시스 단드리지(1744–1757), 엘리자베스 아일렛 헨리(1749–1800), 메리 단드리지(1756–1763)가 있었다.[4] 어린 나이부터 집안일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2] 또한 노예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생아 이복 여동생 앤 단드리지 코스틴[5]과 사생아 백인 이복 형제 랄프 단드리지[6]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단드리지의 아버지는 비교적 부유하지 않았지만 버지니아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마사는 상류층 여성처럼 행동하도록 교육받았다.[7] 오빠들보다는 덜했지만, 당시 농장주의 딸로서는 비교적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8] 가정교사에게 자수, 악기 연주 등을 배웠으며,[48] 승마에도 능숙했다. 젊은 시절에는 삼촌 집 계단을 말을 타고 오르내리는 장난을 쳤는데, 아버지가 그 솜씨에 감탄하여 징계를 면했다는 일화가 있다.[9][48]

2. 2. 교육

단드리지의 아버지는 비교적 부유하지 않았으나 버지니아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마사는 상류층 여성으로서 필요한 소양을 교육받았다.[7] 그녀는 오빠들보다는 낮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지만, 당시 농장주의 딸로서는 비교적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8] 명문가 딸들의 관례에 따라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자수, 악기 연주, 승마 등을 배웠다.[48] 특히 승마에 능숙하여 젊은 시절 말을 타고 계단을 오르내려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48][9]

3. 첫 번째 결혼과 상속 (1749-1757)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 서술을 피하기 위해 본 섹션은 비워둡니다.)

3. 1.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와의 결혼

젊은 시절의 마사 워싱턴


1749년, 마사 댄드리지는 버지니아 주의 부유한 농장주 아들인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를 만났다.[7] 두 사람은 결혼을 원했으나, 다니엘의 아버지 존 커스티스는 아들의 신붓감과 집안의 재산 문제에 대해 신중한 입장이었다. 마사는 결국 그의 승인을 얻어 1750년 5월 15일, 자신보다 20살 많은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와 결혼했다.[3] 당시 마사의 나이는 18세였다.[47]

결혼 후 마사는 남편과 함께 파문키 강 유역에 있는 남편의 사유지인 화이트 하우스 플랜테이션으로 이주했다. 부부는 이곳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째 다니엘(1751년 출생), 둘째 프란시스(1753년 출생), 셋째 존(1754년 출생), 넷째 마사(1756년 출생)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첫째 다니엘은 1754년에, 둘째 프란시스는 1757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10][47]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는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으며, 약 300명의 노예를 소유한 대규모 노예 소유주 중 한 명이기도 했다.[11]

1757년, 남편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가 아마도 심각한 인후 감염으로 인해 사망하면서 마사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12][47] 남편의 죽음으로 마사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7] 당시 법에 따라 마사는 남편 유산의 1/3을 도우어(미망인 상속분)로 직접 받았고, 나머지 2/3는 살아남은 두 자녀 존과 마사에게 돌아갔다. 전체 유산은 당시 가치로 약 33000USD에 달하는 금액과 17,000 에이커의 토지, 그리고 수백 명의 노예로 구성되었다.[3]

남편과 두 자녀, 그리고 아버지의 연이은 죽음을 슬퍼하는 동시에 어린 두 자녀를 양육하고 복잡한 상속 재산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마사에게 큰 부담이었다.[10] 그녀는 또한 여러 농장을 관리하고 노예들의 생활을 감독해야 하는 책임까지 떠맡게 되었다.[3] 하지만 마사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뛰어난 경영 능력을 발휘했다. 그녀의 전기에 따르면, "그녀는 첫 남편이 남긴 다섯 개의 농장을 능숙하게 운영하며 런던 상인들과 담배 최고 가격을 놓고 협상했다"고 한다.[13] 부유하고 젊은 미망인이 된 마사는 당시 버지니아에서 가장 결혼하고 싶은 여성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다.[47][48]

3. 2. 남편의 죽음과 상속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는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으며, 약 300명의 노예를 소유한 최대 노예 소유주 중 한 명이기도 했다.[11] 마사 워싱턴은 첫 남편인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와 1750년 5월 15일에 결혼하여[3] 파문키 강(Pamunkey River) 인근의 화이트 하우스 플랜테이션(White House Plantation)에서 네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다니엘(1751년~1754년)과 프란시스(1753년~1757년)는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10]

1757년, 남편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가 아마도 심각한 인후 감염으로 사망하면서 마사는 26세의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12] 남편의 사망으로 그녀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7] 당시 도우어(Dower) 권리에 따라, 마사는 남편 재산의 3분의 1을 직접 상속받았고, 나머지 3분의 2는 살아남은 두 자녀 존(1754년 출생)과 마사(1756년 출생)에게 돌아갔다. 총 상속 재산은 당시 가치로 약 33000USD, 17000acre의 토지, 그리고 수백 명의 노예에 달했다.[3]

남편과 두 자녀, 그리고 아버지의 연이은 죽음을 슬퍼하는 동시에, 마사는 두 어린 자녀를 양육하고 상속과 관련된 복잡한 법적 및 재정적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되었다.[10] 또한 그녀는 광대한 농지를 관리하고 노예들의 생활을 감독하는 책임까지 맡게 되었다.[3] 그녀의 전기 작가에 따르면, 마사는 "첫 남편이 남긴 다섯 개의 농장을 능숙하게 운영하며 런던 상인들과 최고의 담배 가격을 흥정했다"고 한다.[13]

4. 조지 워싱턴과의 결혼 (1758-1774)

1757년 첫 남편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와 사별한 마사는 두 자녀와 함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당시 13개 식민지에서 가장 부유한 미망인 중 한 명이 되었다.[47][14]

1758년 조지 워싱턴을 만났으며,[10][9] 1759년 1월 6일 화이트 하우스 농장에서 재혼하였다.[10] 결혼 후 두 사람은 신혼여행을 거쳐 워싱턴의 마운트 버논 저택에 정착했다.[6][3] 이 결혼은 워싱턴의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9][50]

두 사람은 비슷한 가치관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10][2] 마사가 첫 결혼에서 낳은 두 자녀 존 파크 커스티스와 마사 파크 커스티스를 함께 길렀다. 1774년까지 마사는 주로 마운트 버논에서 가정을 돌보고 농장을 관리하며 지냈다.[3][10]

4. 1. 만남과 재혼

주니어스 브루투스 스티어스(1849)의 ''조지 워싱턴과 마사 커스티스의 결혼''


마사는 1750년 18세의 나이에 20살 연상의 부유한 농장주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 (Daniel Parke Custis, 1711-1757)와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첫째 아들 대니얼(1751-1754)과 둘째 딸 프랜시스(1753-1757)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1757년 남편마저 사망하면서 마사는 두 자녀(존 파크 커스티스 (John Parke Custis, 1754-1781), 마사 파크 커스티스 (Martha Parke Custis, 1756-1773))와 함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부유한 미망인이 되었다.[47][48] 당시 13개 식민지에서 가장 부유한 미망인 중 한 명이었던[14] 그녀는 많은 독신 남성들의 주목을 받았다.[48]

조지 워싱턴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진다. 하나는 마사가 윌리엄스버그 사교계에서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조지 워싱턴을 만났고, 그가 몇 달에 걸쳐 구애했다는 것이다.[10] 다른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1758년 5월, 서로 아는 사이였던 챔벌레인 대령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면서 처음 소개받았다고 한다.[9] 워싱턴은 마사에게 두 번 청혼한 끝에 승낙을 얻었고,[50] 두 사람은 1759년 1월 6일 마사의 친정인 화이트 하우스 농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10][47]

결혼 후 두 사람은 화이트 하우스 농장에서 신혼 생활을 보냈고,[6] 이후 남편 워싱턴이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버제시스 하우스) 의원으로 활동하던 윌리엄스버그에 잠시 머물다가 마운트 버논의 저택에 최종적으로 정착했다.[3] 당시 버지니아 민병대 대령이었던 워싱턴은 이복형 로렌스 워싱턴으로부터 마운트 버논 농장을 상속받은 상태였는데,[49] 마사와의 결혼으로 그녀가 커스티스로부터 상속받은 10만달러 상당의 재산, 17000acre의 토지, 그리고 300명에 가까운 노예까지 모두 소유하게 되면서 자산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50][49]

마사와 조지 워싱턴의 결혼 생활은 비슷한 가치관과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40년간 행복하게 유지되었다.[10] 두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비슷한 습관을 공유했으며, 흥분이나 악습보다는 가족과 사회적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2] 워싱턴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태어나지 않았지만, 마사가 첫 결혼에서 낳은 두 자녀인 존 파크 커스티스와 마사 파크 커스티스를 함께 키웠다. 아들 존이 1781년 요크타운 전투장티푸스로 추정되는 병으로 사망하자, 워싱턴 부부는 존의 남겨진 두 자녀, 즉 마사의 손주인 엘레노어 파크 커스티스 (Eleanor Parke Custis, 1779-1852)와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 (George Washington Parke Custis, 1781-1857)를 입양하여 양육했다. 또한, 두 사람은 댄드리지 가문이나 워싱턴 가문의 여러 조카와 친척들에게도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4. 2. 마운트 버넌에서의 생활

1759년 1월 6일, 마사는 두 자녀를 데리고 조지 워싱턴과 재혼했다.[47] 당시 조지 워싱턴은 이복형 Lawrence Washington (1718–1752)|로렌스 워싱턴영어으로부터 마운트 버논 농장을 상속받았고, 버지니아 민병대의 대령이었다. 마사는 전 남편 Daniel Parke Custis|다니엘 파크 커스티스영어가 남긴 10만달러 상당의 재산, 17000acre의 토지와 300명 가까운 노예를 소유한 부유한 미망인이었다.[47][50] 이 결혼을 통해 조지 워싱턴은 자산을 크게 늘려 이후 활동의 기반을 마련했다.[49][50]

1759년부터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775년까지 워싱턴 부부는 마운트 버논에서 함께 살며 농장을 관리했다.[7] 마사는 가정을 운영하며 정기적으로 손님을 접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옷 제작을 감독하고 직접 뜨개질을 했으며, 특히 훈제육을 만드는 데 능숙했다.[3] 조지 워싱턴은 버지니아의 정치 및 사회계에서 가족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거의 매일 손님을 맞이했으며, 마사는 저녁 식사나 장기간 머무는 방문객들을 접대했다.[10] 조지 워싱턴은 마사의 재산을 이용하여 마운트 버논 저택을 확장하고 수익성 있는 대농장으로 발전시켰다.[3]

워싱턴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지만, 마사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두 자녀인 John Parke Custis|존 파크 커스티스영어(1754-1781)와 마사 파크 커스티스(1756-1773)를 함께 길렀다. 마사는 이전의 두 자녀를 어린 나이에 잃었고, 딸 패티가 간질 진단을 받자 자녀들을 매우 아끼고 보호하는 모습을 보였다.[3] 그러나 1773년, 패티는 17세의 나이에 간질 발작으로 사망했다.[15][16] 같은 해 가을, 마사의 마지막 남은 자녀인 존은 킹스 칼리지를 떠나 1774년 2월 Eleanor Calvert|엘리너 캘버트영어와 결혼했다.[16] 워싱턴 부부는 결혼 생활 동안 더 많은 자녀를 원했지만, 임신하지 못했다.[3]

5. 미국 독립 혁명 (1775-1789)

렘브란트 필의 마사 워싱턴, 1856년경, 그의 아버지 찰스 윌슨 필의 초상화를 바탕으로 함


1770년대 미국 독립 전쟁이 격화되면서 워싱턴 부부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했다.[3] 마사가 왕당파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달랐으며 그녀는 남편 조지 워싱턴의 정치적 신념을 공유하고[9] 그의 애국자 운동 참여와 활동을 강력하게 지지했다.[9] 1775년 남편이 대륙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그녀는 마운트 버논에 머물며 집 관리를 했으나 전쟁 중 표적이 될 위험 때문에 잠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3]

독립 전쟁은 부부가 처음으로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게 된 시기였다. 1775년 가을, 마사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매사추세츠주로 향하며 처음으로 유명 장군의 아내로서 대중의 관심을 경험했다.[10] 그녀는 남편이 주둔하던 케임브리지에서 안주인 역할을 하며 장교들을 접대했고,[3] 병사들을 위해 옷을 꿰매고 다른 장교 아내들과 바느질 모임을 조직하는 등 전쟁 노력을 지원했다.[9] 그러나 보스턴 포위전의 총소리에 개인적인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3] 이후 남편을 따라 뉴욕으로 갔다가 영국군 접근으로 필라델피아로 보내졌으며, 매년 봄 전투가 재개되면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갔다.[10]

미국 독립 선언 이후 전쟁이 격화되면서 마사의 스트레스는 커져갔다.[3] 매 겨울 전투가 소강상태일 때 남편의 야영지를 방문했으며, 그 환경은 때로 열악했다.[3] 라파예트 장군은 그녀가 "남편을 맹렬히 사랑했다"고 기록했다.[17] 마사는 남편에게 전쟁 상황을 전해 듣고 때로는 사무를 돕거나 군사 기밀을 공유받기도 했으며,[2] 군인들을 돌보는 모습으로 남편과 함께 전쟁 노력의 상징이 되었다.[10] 그녀는 혹독했던 밸리 포지의 겨울을 포함하여 여러 겨울 야영지에서 남편과 함께 지냈다.[18][47]

1781년 요크타운 포위전 중 아들 존 파크 커스티스가 '야영 열'(아마도 유행성 발진티푸스)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16] 이후 워싱턴 부부는 존의 어린 두 자녀, 엘리너(넬리)와 조지 워싱턴 파크(와시)를 입양하여 길렀다.[10] 또한 여러 친척과 친구들의 자녀들에게도 재정적, 개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21]

전쟁이 끝난 후 1783년, 워싱턴 부부는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왔다.[10] 연합 규약 시대 동안 그들은 손주들과 함께 은퇴 생활을 보냈으나,[3] 마사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다.[3] 그녀는 자녀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손주들의 건강을 염려하며 시간을 보냈고, 마운트 버논을 찾는 수많은 방문객을 맞이하기 위해 조카딸들의 도움을 받았다.[10] 평온했던 은퇴 생활은 1787년 남편이 제헌 의회에 참여하고 1789년 초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다시 중단되었다.[3]

5. 1. 전쟁 발발과 지원

1770년대 미국 독립 전쟁이 격화되면서 워싱턴 부부의 삶은 큰 변화를 맞았다.[3] 마사가 왕당파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그녀는 남편 조지 워싱턴의 정치적 신념을 공유했으며,[9] 남편의 애국자 운동 참여와 활동을 강력하게 지지했다.[9] 1775년 남편이 대륙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자, 마사는 마운트 버논에 머물며 집 증축 공사를 감독했다. 그러나 전쟁 중 적의 표적이 될 위험 때문에 시동생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3]

독립 전쟁은 부부가 처음으로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1775년 가을, 마사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매사추세츠주로 향했다.[10] 북쪽으로 가는 여정에서 그녀는 유명한 장군의 아내로서 처음으로 대중의 관심을 경험했다.[10] 그녀는 남편과 다른 대륙군 장교들이 작전을 수행하던 케임브리지에 합류하여, 장교들의 손님들을 접대하는 안주인 역할을 수행했다.[3] 또한, 야영지에서 병사들을 위해 옷을 꿰매고 양말을 짜서 나눠주었으며, 부상병들을 간호하고 다른 장교 아내들에게도 동참을 권유하며 전쟁 지원을 위한 바느질 모임 등을 조직했다.[9][50] 겉으로는 의연했지만, 마사는 근처 보스턴 포위전에서 들려오는 총소리에 속으로 두려움을 느꼈다.[3] 이후 작전이 뉴욕으로 옮겨지자 남편과 동행했으나, 영국군이 가까워지자 안전을 위해 필라델피아로 보내졌다.[3] 전쟁 기간 동안 마사는 매년 겨울 남편이 있는 진지를 방문하여 병사들을 격려하고 지원했으며, 특히 혹독했던 밸리 포지의 겨울에도 남편과 함께 머물며 장병들의 사기를 북돋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7][50] 매년 봄 전투가 재개되면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했다.[10]

5. 2. 밸리 포지

미국 독립 선언 서명 이후, 조지 워싱턴이 전장에서 위험에 직면하면서 미국 독립 혁명은 마사에게 점점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3] 매 겨울, 전투가 소강 상태일 때 마사는 남편이 있는 야영지에 합류했다. 이 방문 동안 그녀의 숙소는 편안함과 안전 모두에서 다양했다.[3] 라파예트 장군은 그녀가 "남편을 맹렬히 사랑했다"고 말했다.[17] 마사는 남편으로부터 전쟁의 전개 상황을 계속 전달받았고, 때로는 그를 위해 사무적인 일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군사 기밀을 알 수 있도록 허락받기도 했다.[2] 그녀는 군인들을 돌보는 할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조지 워싱턴과 함께 전쟁 노력의 상징이 되었다.[10]

대륙군은 1777년 12월 19일, 혁명의 8번의 겨울 야영지 중 세 번째인 밸리 포지에 정착했다. 마사는 10일 동안 수백 마일을 여행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남편과 합류했고[18], 혹독하기로 유명했던 밸리 포지의 겨울 동안에도 남편과 함께 지내며 장병들의 사기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7]

1778년 4월 6일, 엘리자베스 드링커와 세 명의 친구가 밸리 포지에 도착하여 장군에게 남편들을 감옥에서 풀어줄 것을 간청했다. 그들은 모두 퀘이커 교도였으며, 미국 혁명가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했었다. 사령관이 처음에는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마사를 만났다.[19] 드링커는 나중에 자신의 일기에 그녀를 "사교적이고 예쁜 친절한 여성"이라고 묘사했다.[20]

5. 3. 요크타운 전투와 아들의 죽음

미국 독립 선언 서명 이후, 조지 워싱턴이 전장에서 위험에 직면하면서 마사에게 미국 독립 혁명은 점점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3] 매 겨울, 워싱턴은 전투가 소강 상태일 때 남편이 있는 야영지에 합류했다. 이 방문 동안 그녀의 숙소는 편안함과 안전 모두에서 다양했다.[3] 라파예트 장군은 그녀가 "남편을 맹렬히 사랑했다"고 말했다.[17] 워싱턴은 남편으로부터 전쟁의 전개 상황을 계속 전달받았고, 때로는 그를 위해 사무적인 일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군사 기밀을 알 수 있도록 허락받기도 했다.[2] 그녀는 군인들을 돌보는 할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조지 워싱턴과 함께 전쟁 노력의 상징이 되었다.[10]

대륙군은 1777년 12월 19일, 혁명의 8번의 겨울 야영지 중 세 번째인 밸리 포지에 정착했다. 워싱턴은 10일 동안 수백 마일을 여행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남편과 합류했다.[18] 1778년 4월 6일, 엘리자베스 드링커와 세 명의 친구가 밸리 포지에 도착하여 장군에게 남편들을 감옥에서 풀어줄 것을 간청했다. 그들은 모두 퀘이커 교도였으며, 미국 혁명가에게 충성 서약을 거부했었다. 사령관이 처음에는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마사를 만났다.[19] 드링커는 나중에 자신의 일기에 그녀를 "사교적이고 예쁜 친절한 여성"이라고 묘사했다.[20]

워싱턴의 아들 존 파크 커스티스(John Parke Custis)는 1781년 요크타운 포위전 동안 아버지의 민간 보좌관으로 복무하다가 "야영 열"로 사망했는데, 이는 유행성 발진티푸스의 진단명이었다.[16] 그의 죽음 이후, 그녀와 조지는 존의 네 자녀 중 막내 두 명인 엘리너 (넬리) 파크 커스티스와 조지 워싱턴 파크 (와시) 커스티스를 돌보았다.[10] 워싱턴 부부는 또한 많은 친척과 친구들의 자녀에게 개인적,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21]

6. 미국의 초대 영부인 (1789-1797)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마사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미국 영부인이 되었다. 당시에는 '영부인'(First Lady)이라는 칭호 대신 "워싱턴 여사"(Lady Washington)로 불렸다.[24] 그녀는 1789년부터 1797년까지 남편의 임기 동안 당시 임시 수도였던 뉴욕필라델피아에서 영부인으로서 활동했다.[7][9] 이 기간 동안 그녀는 국빈 행사 주최, 정기적인 응접실 운영 등을 통해 후대 영부인들의 역할 모델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7][23] 공적인 역할 수행에 따르는 여러 제약 속에서도 영부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했으며, 남편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나는 1797년에 영부인직에서 물러났다.[3][27]

6. 1. 영부인으로서의 역할

다니엘 헌팅턴의 ''공화정 법정, 또는 워싱턴 여사의 리셉션 날'' (1861년경)


미국 독립 전쟁 후, 마사 워싱턴은 남편 조지 워싱턴이 새로 건국된 미국의 대통령직을 수락하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22] 그녀는 1789년 5월이 되어서야 당시 수도였던 뉴욕에 합류했다.[7] 그녀의 여정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여성의 행보에 대한 전례 없는 관심이었으며, 그녀의 수행원들은 지나가는 마을마다 환대와 환호를 받았다. 이 여행 중 그녀는 자신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영부인으로서 유일한 공개 연설을 하기도 했다.[2] 그녀가 대통령 전용 보트에 도착하여 남편의 영접을 받으면서, 대통령 부인은 즉시 공적인 인물이 되었다.[23] 수도에 도착한 후 워싱턴은 초대 미국 영부인이 되었지만, 이 용어는 나중에야 사용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워싱턴 여사"(Lady Washington)라고 불렀다.[24]

초대 영부인으로서 워싱턴의 여러 관행은 후대 영부인들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으로 새해에 대통령 관저를 대중에게 개방하는 관행은 후버 행정부까지 이어졌다.[7] 그녀는 임시 수도였던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 많은 국빈 행사를 주최했다.[9] 또한 대통령 관저를 방문하는 모든 여성들의 공식 방문에 응대하며, 방문객들이 3일 이내에 대통령과 만날 수 있도록 조치했다.[23]

워싱턴은 남편으로부터 금요일 저녁에 여성들이 참석하는 응접실 행사를 주최하는 책임을 맡았다.[23] 이러한 행사에서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있고, 대통령이 손님들을 맞이했다.[10] 초기에 손님들은 주인이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왕실 관습을 따라야 할지 혼란스러워했지만, 워싱턴은 남편이 항상 밤 9시에 자리를 뜬다고 공표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23] 그녀는 이러한 사교 행사에서 정치적인 대화는 피하려 했으며, 만약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다른 주제로 전환하도록 유도했다.[9] 이 시기 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 형성된 사교계를 공화정 법정(Republican Court)이라고 부르게 되었다.[25]

찰스 윌슨 필의 ''레이디 워싱턴''(날짜 미상)


행정부 수반이자 국가 원수의 아내로서 워싱턴은 미국을 대표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녀는 신생 국가인 미국이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신뢰를 얻기 위해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했지만, 동시에 군주처럼 행동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민주주의 정신을 존중해야 했다.[3] 그녀는 자신이 세운 선례가 미래의 대통령 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24] 워싱턴은 대통령 관련 행사에서 사교계 안주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러한 책임들을 조율했고, 이는 영부인의 주요 기능으로 자리 잡았다. 결과적으로 영부인의 역할은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중요한 소통 창구가 되었다.[14]

워싱턴은 대외적으로는 친근한 아내의 이미지를 보여주었지만, 사적으로는 자신의 삶에 가해진 제약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27] 그녀는 대통령직에 따르는 화려함을 지루하고 인위적인 것으로 여겼다.[2] 워싱턴은 남편 행정부에 비판적인 야당 소유 신문의 정치적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사교 활동은 남편 지지자들에게는 칭찬받았지만, 반연방주의자들은 그녀가 왕족을 모방하고 귀족 정치를 조장한다고 비판했다.[14] 반면, 다른 비평가들은 그녀의 사교 활동이 지나치게 격식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24] 그녀는 끊임없이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을 불편해했으며, 매일 머리 모양과 옷차림에 신경 써야 하는 상황에 부담을 느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공화국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소박한 홈스펀(homespun, 손으로 짠 옷감) 옷을 즐겨 입었다.[24]

6. 2. 공화정 법정



전쟁 후 마사 워싱턴은 남편 조지 워싱턴이 신생 미국대통령직을 수락하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22] 1789년 5월이 되어서야 당시 수도였던 뉴욕에 합류했다.[7] 이 여정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여성의 행보에 대한 전례 없는 관심이었다. 그녀와 수행원들은 지나가는 마을마다 환영을 받았다. 이 여행 중 그녀는 미국 영부인으로서 유일하게 공개 연설을 하여 환영 인파에게 감사를 표했다.[2] 대통령 전용선에 도착한 그녀는 남편의 영접을 받으며 공식적인 대통령 부인이 되었다.[23] 수도 도착 후 마사 워싱턴은 초대 미국 영부인이 되었지만, '영부인(First Lady)'이라는 용어는 후대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그녀는 주로 '워싱턴 여사(Lady Washington)'로 불렸다.[24]

초대 영부인으로서 마사 워싱턴이 만든 여러 관행은 후대 영부인들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대표적으로 새해백악관을 대중에게 개방하는 관행이 있으며, 이는 후버 행정부 때까지 이어졌다.[7] 그녀는 임시 수도였던 뉴욕필라델피아에서 많은 국빈 행사를 주관했다.[9] 마사 워싱턴은 대통령 관저를 방문하는 모든 여성들의 공식 방문 요청에 응했으며, 방문객들이 3일 이내에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조율했다.[23]

또한 남편의 요청으로 매주 금요일 저녁, 여성들이 참석하는 응접실 행사를 주최하는 책임을 맡았다.[23] 이 행사에서 그녀는 주로 앉아 있었고, 대통령이 직접 손님들을 맞이했다.[10] 초기 손님들은 유럽 왕실 관습처럼 주인이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했다. 마사는 남편이 항상 밤 9시에 자리를 뜬다고 공지하여 이러한 혼란을 정리했다.[23] 그녀는 이 행사에서 정치적인 대화는 피하려 했으며,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다른 주제로 전환하도록 유도했다.[9] 이 시기 미국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교계를 공화정 법정(Republican Court)이라고 부르게 되었다.[25]

마사 워싱턴은 행정부 수반이자 국가 원수인 대통령의 아내로서, 신생 국가 미국을 대표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유럽 국가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 국가의 위엄을 보여주어야 했지만, 동시에 군주처럼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공화국의 민주주의 정신을 지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3] 그녀는 자신이 만드는 선례가 미래의 영부인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24] 마사 워싱턴은 대통령 관련 행사에서 사교계 안주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러한 책임들을 조율했다. 이는 이후 영부인의 주요 역할 중 하나로 자리 잡았으며, 영부인이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중요한 소통 창구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14]

겉으로는 다정한 아내의 모습을 보였지만, 사적으로는 영부인으로서 겪는 여러 제약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27] 그녀는 대통령직과 관련된 화려한 생활을 지루하고 부자연스럽다고 여겼다.[2] 마사 워싱턴 역시 남편 행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의 정치 공세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의 사교 활동은 남편 지지자들에게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지만, 반연방주의자들은 그녀가 유럽 왕족을 모방하며 귀족주의를 조장한다고 비판했다.[14] 반면, 다른 비판가들은 그녀의 사교 활동이 지나치게 격식이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24] 그녀는 끊임없이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는 것을 불편해했으며, 매일 머리 모양과 옷차림에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을 부담스러워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공화국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소박한 홈스펀 옷을 즐겨 입었다.[24]

6. 3. 개인적인 삶



1731년 6월 2일 새벽, 버지니아 식민지 뉴켄트 군의 체스넛 그로브(Chestnut Grove) 플랜테이션에서 부유한 농장주 존 댄드리지(John Dandridge, 1700-1756)와 프랜시스 존스(Frances Jones, 1710-1785) 부부의 장녀로 태어났다.[47] 그녀에게는 3명의 남동생과 5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당시 명문가 딸들처럼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으며, 자수, 악기 연주, 승마 등을 배웠다. 특히 승마 실력은 젊은 시절 계단을 말을 타고 달려 올라갈 정도로 뛰어났다고 전해진다.[48]

1750년, 18세의 나이에 20살 연상의 부유한 독신 남성인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Daniel Parke Custis, 1711-1757)와 결혼했다.[47] 두 사람은 파문키 강변에 위치한 '화이트 하우스'라 불리는 농장 대저택에서 살았다. 커스티스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두 명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자녀 이름출생 - 사망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 주니어1751년 – 1754년
프랜시스 커스티스1753년 – 1757년
존 파크 커스티스1754년 – 1781년
마사 파크 커스티스1756년 – 1773년



1757년 남편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가 사망하면서 마사는 막대한 재산과 300명에 가까운 노예를 상속받아 부유한 미망인이 되었다.[47][50] 당시 법에 따라 결혼하면 아내의 재산은 남편 소유가 되었기에, 그녀는 많은 독신 남성들의 주목을 받았다.[48]

1759년 1월 6일, 마사는 두 자녀를 데리고 조지 워싱턴과 재혼했다.[47] 당시 워싱턴은 이복형 로렌스 워싱턴으로부터 마운트 버논 농장을 상속받았고, 버지니아 민병대의 대령이었다. 워싱턴은 마사와의 결혼으로 그녀가 첫 남편으로부터 상속받은 막대한 자산(당시 가치로 10만달러 상당의 재산, 17000acre의 토지, 약 300명의 노예)을 관리하게 되면서 경제적 기반을 크게 늘릴 수 있었다.[49][50] 부부는 마운트 버논에서 풍족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린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지만, 마사가 데려온 두 자녀 존 파크 커스티스와 마사 파크 커스티스를 함께 키웠다.

딸 마사 파크 커스티스는 1773년에 사망했고, 아들 존 파크 커스티스는 미국 독립 전쟁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워싱턴의 부관으로 복무하다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병으로 사망했다. 아들의 사망 후, 워싱턴 부부는 존의 어린 두 자녀, 즉 마사의 손주들을 입양하여 마운트 버논에서 직접 양육했다.

손주 이름출생 - 사망
엘레노어 파크 커스티스 (넬리)1779년 – 1852년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 (워시)1781년 – 1857년



워싱턴 부부는 댄드리지 가문과 워싱턴 가문의 여러 조카와 친척들에게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마사는 둥근 얼굴에 아담한 체구를 가졌으며, 가정적인 성격으로 마운트 버논에서의 생활에 만족감을 느꼈다. 그녀는 "더 쾌활한 여성이라면 이 역할을 아주 즐겼을 테지만, 저는 집에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50] 그러나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고 남편이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자, 1775년 보스턴 근교에서 남편과 합류한 이후 전쟁 기간 내내 남편 곁을 지켰다. 그녀는 겨울 숙영지에서 병사들과 함께 지내며 다른 장교 부인들을 격려하고, 바느질 모임을 조직하여 병사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제공했으며, 부상당한 병사들을 간호하는 등 군대의 사기 진작에 기여했다.[50] 특히 혹독했던 밸리 포지의 겨울에도 남편과 함께 머물며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47]

전쟁 후, 마사는 남편이 신생 미국의 초대 대통령직을 수락하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으며[22], 1789년 4월 30일의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47] 그녀는 1789년 5월이 되어서야 당시 수도였던 뉴욕으로 향했다.[7] 이 여정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여성의 행보에 대한 전례 없는 관심이었으며, 그녀의 수행단은 지나가는 마을마다 환영과 환호를 받았다. 이 여행 중 그녀는 자신을 보러 나온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영부인으로서의 유일한 공개 연설을 하기도 했다.[2] 그녀가 대통령 전용선에 도착하자 남편이 직접 맞이했으며, 이로써 그녀는 대통령 부인으로서 공인이 되었다.[23] 수도에 도착한 후 마사는 초대 미국 영부인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영부인(First Lady)'이라는 칭호 대신 "워싱턴 여사(Lady Washington)"로 불렸다.[24]

초대 영부인으로서 마사 워싱턴의 여러 관행은 후대 영부인들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새해 첫날 대통령 관저를 대중에게 개방하는 관례는 후버 행정부 때까지 이어졌다.[7] 그녀는 임시 수도였던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 많은 국빈 행사를 주최했다.[9] 또한 대통령 관저를 찾는 모든 여성들의 공식적인 방문에 응하며, 방문객들이 3일 이내에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조율했다.[23]

마사는 남편의 요청에 따라 매주 금요일 저녁, 여성들이 참석하는 응접실 행사를 주관했다.[23] 행사 동안 그녀는 앉아 있고 대통령이 손님들을 맞이하는 방식이었다.[10] 초기에는 손님들이 언제 자리를 떠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자, 마사는 남편이 항상 밤 9시에 자리를 뜬다고 공지하여 문제를 해결했다.[23] 그녀는 이러한 행사에서 정치적인 대화는 피하려 했으며,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다른 주제로 전환하도록 유도했다.[9] 이 시기 미국 정치인들 사이에서 형성된 사교계를 공화정 법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5]

에드워드 새비지의 ''워싱턴 가족''


초대 대통령 관저는 뉴욕의 체리 스트리트에 있었고, 이후 브로드웨이로 옮겼다. 1790년 수도가 필라델피아로 이전하면서 대통령 관저도 하이 스트리트(현재의 마켓 스트리트)에 있는 집으로 다시 옮겨졌다.[23][10] 마사는 사회생활이 더 활발하고 마운트 버논과 더 가깝다는 이유로 필라델피아 관저를 훨씬 선호했다.[3] 영부인 초기에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에 외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10] 워싱턴 부부는 필라델피아로 이사한 후 스스로 부과한 개인적 활동 제한을 완화했다.[10] 영부인으로 재임하는 동안 워싱턴은 남편의 비서인 토바이어스 리어의 아내인 폴리 리어와 친해졌다.[3] 그녀는 또한 전쟁 장관인 헨리 녹스의 아내인 루시 플러커 녹스와 애비게일 애덤스, 당시 부통령 부인과도 교류했다.[10] 손주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워싱턴에게 또 다른 즐거움이었는데, 때로는 그들을 데리고 쇼와 박물관에 가기도 했다.[24] 그녀는 또한 확고한 성공회 신념에 따라 자주 교회에 참석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2]

마사는 남편이 대통령직을 시작한 직후, 그가 종양 제거 수술을 받는 동안 손님들의 출입을 금지하면서 대통령 관저를 통제해야 했다.[24] 1790년 7월, 예술가 존 트럼불은 워싱턴에게 그녀의 남편의 전신 초상화를 선물했다. 이 초상화는 마운트 버논의 새 방에 전시되었다.[26] 마사는 남편이 대통령으로 두 번째 임기를 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평소와는 다르게 이 결정에 반대했다. 그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1793년에 재선되었고, 그녀는 마지못해 대통령 부인으로서 4년을 더 받아들였다.[3] 젊은 조르주 워싱턴 드 라 라파예트는 1795년 아버지 라파예트 후작이 프랑스에서 정치범으로 수감되었을 때 워싱턴 가족과 합류했다. 그는 1797년 가을까지 워싱턴과 함께 살았다.[10] 1796년, 워싱턴의 노예이자 개인 하녀였던 오니 저지가 탈출하여 뉴햄프셔로 도망갔다. 워싱턴은 남편에게 저지를 돌려보내 다시 워싱턴의 노예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통령은 저지를 추적하려 하지 않았다.[8] 마사의 영부인 임기는 1797년에 끝났다.[3]

1878년의 초상


남편이 세 번째 임기를 거부하면서, 1797년에 오랜만에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가는 날이 왔다. 마사는 "장군과 저는 마치 학교에서 해방된 아이처럼 기뻐하고 있습니다."라고 친구에게 썼다.[51] 은퇴 후의 생활은 부인이 원했던 목가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반 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온 요인들이 수백 명이나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마운트 버논에 있는 워싱턴을 방문하게 되었다.[47] 워싱턴은 1798년프랑스와의 관계 악화로 인해 후임 존 애덤스 대통령에 의해 임시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쟁은 피했지만, 그 다음 해인 1799년12월 14일 그는 비 오는 날 승마를 하다 감기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67세로 사망했다. 남편의 임종 앞에서 "저도 곧 곁으로 갈게요"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51]

연방 의회가 남편의 관을 마운트 버논에서 새로운 수도 워싱턴 D.C.에 완성될 국회의사당 내로 옮기기로 결정한 것은 마사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지만, 그녀는 공공의 의무를 최우선으로 하여 이에 따랐다. 그러나 결국, 의회도 이 계획을 포기했다.[52]

워싱턴 대통령 부부의 관


마사는 "심각한 발열"로 인해 1802년5월 22일에 사망했다. 향년 70세. 부부는 함께 마운트 버논에 묻혔다.[53]

7. 은퇴 이후의 삶과 죽음 (1797-1802)

1797년 조지 워싱턴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부부는 필라델피아를 떠나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와 은퇴 생활을 시작했다.[10] 은퇴 후에도 마운트 버논에는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으며, 늘어나는 방문객 응대를 위해 조카인 로렌스 루이스를 고용하기도 했다.[10]

마사는 남편이 프랑스와의 전쟁 가능성 때문에 다시 군을 지휘하게 될 것을 염려했으나,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799년 12월 14일, 남편 조지 워싱턴이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28] 남편 사후 마사는 주로 다락방에서 지내며 뜨개질, 바느질, 편지 답장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3] 그녀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노예들을 관리하고 일부를 해방하는 등의 일을 처리해야 했다.[11] 또한 영부인 시절 이후에도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으며, 특히 토머스 제퍼슨 행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10][9]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마사는 남편 사망 후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29] 1802년 봄, 병세가 심해지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남편과의 편지를 불태우는 등 신변을 정리했다.[9] 결국 남편이 사망한 지 약 2년 반 후인 1802년 5월 22일, 마사 워싱턴은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9] 그녀의 유해는 남편과 함께 마운트 버논의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30]

7. 1. 마운트 버넌으로의 귀환

워싱턴 부부는 존 애덤스의 취임 직후 수도를 떠나, 당시 낡아가기 시작한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1797년에 시작했다.[10] 그들은 다시 은퇴 생활을 시작했고, 집을 위한 몇 가지 개조 공사를 진행했다.[3] 대통령 임기 이후 워싱턴 부부는 친구와 낯선 사람을 가리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방문객을 맞이했다. 방문객이 너무 많아지자, 그들은 전 대통령의 조카 중 한 명인 로렌스 루이스를 비서로 고용했고, 그는 결국 워싱턴의 손녀 넬리 커스티스와 결혼했다.[10]

마사 워싱턴은 남편이 다시 프랑스에 맞서 임시 육군을 이끌도록 소환될까 염려했지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 조지 워싱턴은 1799년 12월 14일, 67세의 나이로 심한 목 감염으로 인해 사망했다.[28]

조지 워싱턴(오른쪽)과 마사 워싱턴(왼쪽)의 묘


남편 사후 과부가 된 마사 워싱턴은 마지막 몇 년을 주로 다락방에서 뜨개질, 바느질, 편지 답장을 하며 보냈다. 그녀는 법적으로 남편 재산의 소유자였지만, 사업 관련 업무는 친척들에게 맡겼다.[3] 또한 남편의 노예들을 물려받았는데, 그녀가 사망하면 해방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이 노예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우려한 마사는 그들을 미리 해방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결혼할 때 가져온 지참금 노예들을 해방할 권한은 없었으며, 개인적으로 소유했던 노예 한 명인 엘리쉬는 해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11]

마사 워싱턴은 영부인 임기를 마친 후에도 대통령직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며, 후임자들에게 조언하는 전통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워싱턴 가문은 토머스 제퍼슨과 제퍼슨 민주주의 정치에 대해 오랫동안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제퍼슨이 워싱턴 행정부를 비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10] 마사 워싱턴은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가 대통령직에 대해 적절한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불쾌감을 느꼈다.[9]

마사 워싱턴의 건강은 평소에도 다소 불안정했는데, 남편의 사망 이후 더욱 악화되었다.[29] 그녀는 남편의 죽음 이후 자신의 죽음을 예상했다. 1802년 열병에 걸리자, 그녀는 남편이 자신에게 보낸 모든 편지를 불태우고, 성직자를 불러 마지막 성찬례를 받았으며, 자신의 장례복을 직접 골랐다.[9] 남편이 사망한 지 2년 반 후인 1802년 5월 22일, 마사 워싱턴은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9] 그녀의 시신은 마운트 버논에 있는 워싱턴 가문의 원래 묘지 금고에 안치되었다.[30] 1831년, 조지 워싱턴 유산의 생존한 집행인들은 워싱턴 부부의 유해를 오래된 금고에서 마운트 버논 부지 내에 있는 현재의 묘지로 옮겼다.[30]

7. 2. 남편의 죽음

남편 사망 후 워싱턴의 침실


남편 조지 워싱턴프랑스와의 전쟁 가능성 때문에 임시 미국 육군 사령관으로 다시 소환될 뻔했으나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1799년 12월 14일, 67세의 나이로 심한 목 감염 때문에 사망했다.[28] 남편의 임종을 지켜본 마사는 "저도 곧 곁으로 갈게요"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51]

과부가 된 마사는 마지막 몇 년을 마운트 버논의 다락방에서 뜨개질, 바느질, 편지 답장을 하며 보냈다.[3] 남편 재산의 법적 소유자였지만, 사업 관련 업무는 친척들에게 맡겼다.[3] 그녀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죽으면 남편 소유였던 노예들을 해방해야 했으나, 이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우려하여 미리 해방했다. 하지만 자신의 지참금으로 데려온 노예나 개인적으로 소유한 노예 엘리쉬는 해방할 권한이 없었다.[11]

마사는 영부인 시절 이후에도 정치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며 후임자들에게 조언하는 전통을 시작했다.[24] 워싱턴 가문은 토머스 제퍼슨이 워싱턴 행정부를 비판했던 전력 때문에 그와 그의 정치 노선에 대해 오랫동안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10] 마사는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자 그가 대통령직에 걸맞은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9]

원래 건강이 좋지 않았던 마사는 남편 사망 후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29] 1802년 열병에 걸리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남편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모두 불태웠으며, 성직자를 불러 마지막 성찬례를 받고 자신의 장례복을 직접 골랐다.[9]

남편이 사망한 지 2년 반 후인 1802년 5월 22일, 마사 워싱턴은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9] 사망 후 그녀의 시신은 마운트 버논에 있는 워싱턴 가문의 원래 묘지 금고에 안치되었다.[30] 미국 의회는 조지 워싱턴의 관을 워싱턴 D.C.미국 국회의사당으로 옮기려 했으나, 마사는 실망하면서도 공공의 의무를 위해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다.[52] 1831년, 조지 워싱턴 유산의 집행인들은 워싱턴 부부의 시신을 마운트 버논 내의 새로운 묘지로 옮겼다.[30]

7. 3. 죽음과 유산



남편 조지 워싱턴은 1799년 12월 14일 67세의 나이로 심한 목 감염으로 사망했다.[28] 남편이 사망한 후 과부가 된 마사 워싱턴은 마지막 몇 년을 마운트 버논의 다락방에서 뜨개질과 바느질을 하고 편지에 답하며 보냈다. 그녀는 남편 재산의 법적 소유자였지만, 사업 관련 업무의 통제권은 친척들에게 넘겨주었다.[3]

마사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사망하면 남편 소유의 노예들을 해방해야 했다. 그러나 이 노예들이 자신을 해칠 것을 우려하여 생전에 그들을 해방했다. 다만, 자신의 지참금으로 데려온 노예들은 법적으로 해방할 권한이 없었고, 개인적으로 소유했던 노예 엘리쉬(Elish)는 해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11]

마사 워싱턴은 영부인 임기를 마친 후에도 대통령직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며, 후임자들에게 조언하는 전통을 시작했다.[24] 워싱턴 가문은 토머스 제퍼슨과 그의 정치 노선에 대해 오랫동안 반감을 가졌는데, 이는 제퍼슨이 조지 워싱턴 행정부를 비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10] 마사는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자 그가 대통령직에 대해 적절한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불쾌감을 느꼈다.[9]

마사의 건강은 남편 사망 이후 눈에 띄게 악화되었다.[29] 그녀는 남편의 죽음 이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1802년 열병에 걸리자, 그녀는 남편이 자신에게 보낸 모든 편지를 불태우고, 성직자를 불러 마지막 성찬례를 받았으며, 자신의 장례복을 직접 골랐다.[9] 남편이 사망한 지 2년 반 후인 1802년 5월 22일, 마사 워싱턴은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9]

사망 후 그녀의 시신은 마운트 버논에 있는 워싱턴 가문의 원래 묘지 금고에 안치되었다.[30] 연방 의회는 조지 워싱턴의 관을 워싱턴 D.C.국회의사당 내로 옮기려 했으나, 마사는 이에 실망감을 표하면서도 공공의 의무를 존중해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52] 1831년, 조지 워싱턴 유산의 집행인들은 조지와 마사 부부의 시신을 원래의 금고에서 마운트 버논 내 현재 위치의 묘지로 옮겼다.[30]

8. 노예 제도에 대한 관점

마사 워싱턴은 남부 버지니아의 부유한 플랜테이션 소유주 가문에서 태어나 노예제가 당연시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이러한 '남부의 구조'가 가진 윤리적, 도덕적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47] 첫 남편 다니엘 파크 커스티스가 사망하면서 마사는 많은 토지와 함께 약 300명의 노예를 상속받았다.[50] 영국 보통법에 따라 커스티스 유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입으로 생활했지만, 이 재산의 기반은 플랜테이션 농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노예들이었다.

조지 워싱턴과 재혼하면서 커스티스의 유산은 법적으로 워싱턴의 관리하에 놓였으나, 농장 기록에 따르면 마사는 여전히 노예 관리 등 많은 결정에 관여했다.[47] 워싱턴은 관리적인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농장 수입을 얻었다. 마사는 아들 존의 상속 지분인 토지와 노예는 매각하지 않았다.

마사의 노예 제도에 대한 관점은 그녀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녀의 메이드이자 커스티스 농장 노예였던 오니 저지(Oney Judge)가 대통령 임기 중 필라델피아에서 탈출했을 때, 마사는 크게 동요했다.[54] 전기 작가 패트리샤 브래디는 마사 워싱턴의 전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55]

> ''그녀는 자신이 돌보던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에 대한 책임을 느꼈다. 특히 소녀의 어머니와 자매가 마운트 버논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마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오니 재지가 단순하게 자유를 원했다는 것이었다. 오나(이렇게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는 즐거운 곳에서 생활하고 즐거운 일을 하며 읽고 쓰는 것을 배우고 싶었다. 오나는 마사를 존경했고, 그 대우에도 불만이 없었지만, 자신이,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이 앞으로도 노예인 것을 견딜 수 없다고 고백했다.''

또한, 필라델피아의 대통령 관저에서 요리사로 일하던 노예 헤라클레스 역시 1797년 조지 워싱턴의 생일인 2월 22일에 탈출했다.[56] 마운트 버논에 남겨진 헤라클레스의 여섯 살 난 딸은 아버지가 자유를 찾은 것을 기뻐했다고 전해진다.[57]

8. 1. 앤 댄드리지

역사학자 헨리 빈섹은 2004년 저서 '전능하지 않은 신: 조지 워싱턴, 그의 노예, 그리고 미국의 창조'에서 마운트 버논과 버지니아 역사 협회에 남겨진 자료를 바탕으로 마사 워싱턴에게 앤 댄드리지라는 이름의 혼혈 이복 여동생이자 노예가 있었다고 주장했다.[58] 빈섹에 따르면, 앤 댄드리지는 마사의 아버지 존 댄드리지와 신원 미상의 노예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마사의 아들인 존 파크 커스티스(앤 댄드리지에게는 조카)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58]

빈섹은 이 사건이 조지 워싱턴으로 하여금 노예제를 '불쾌한 일'로 여기게 만들었고, 훗날 워싱턴이 자신의 노예들을 모두 해방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58] 앤 댄드리지의 존재에 대한 또 다른 언급은 헬렌 브라이언의 2001년 저서 '마사 워싱턴: 자유의 퍼스트 레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브라이언은 빈섹의 연구를 인용하며, 이 '그림자 여동생'이 마사와 나이가 비슷했고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랐다고 서술했다.[58]

그러나 마사 워싱턴의 전기를 쓴 패트리샤 브래디는 2005년 저서에서 이러한 주장을 '가정 내 신화'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치부하며 앤 댄드리지의 존재를 부정했다.[55][58] 이에 대해 빈섹은 이전의 역사학자들이 앤 댄드리지의 존재를 보여주는 증거 문서를 의도적으로 무시했으며, 커스티스 농장 기록과 마운트 버논 농장의 노예 기록에서 앤 댄드리지에 관한 기록이 삭제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플랜테이션 농장주와 노예 사이의 가족 관계는 종종 비밀에 부쳐졌다고 지적하며, 이러한 복잡한 관계가 당시 사회의 이면에 존재했음을 시사했다.[58]

9. 유산

남편 조지 워싱턴이 대통령직의 선례를 세웠듯, 마사 워싱턴은 영부인의 역할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그녀는 국가 원수로서 남편을 보좌하며 대통령의 의례적인 활동에 집중했고,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역할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이는 이후 미국 대통령 부인들의 역할 모델이 되었다.[23] 마사 워싱턴은 겸손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알려졌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직접 만났을 때 이러한 모습에 놀라곤 했다.[9]

마사 워싱턴의 개인 기록은 첫 남편 대니얼 파크 커스티스가 사망하기 전의 것은 남아있지 않으며, 그 이후에 쓴 편지 중 상당수도 직접 파기했다. 하지만 그녀가 보낸 편지를 받은 이들이 이를 보관하여, 현재 마운트 버논이나 버지니아 역사 협회 등의 기록 보관소에 일부가 남아 있다. 이 편지들은 여러 차례 책으로 엮여 출판되었다.[10]

첫 남편 대니얼 파크 커스티스가 남긴 부동산 일부는 손자 조지 워싱턴 파크 커스티스의 사위이자 양자인 로버트 E. 리에게 상속되었으나, 남북 전쟁 중 연방 정부에 의해 몰수되었다. 이 땅은 훗날 알링턴 국립묘지가 되었다. 1882년, 수년간의 하급 법원 재판 끝에 알링턴 국립묘지 소유권 소송은 미국 연방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대법원은 해당 토지가 리 가문의 소유라고 판결했고, 이후 미국 의회는 리 가문에게 15만달러를 지불하고 토지를 매입했다.

마사 워싱턴을 기리는 여러 기념물이 있다.


  • 1902년 미국 우표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 그녀의 이름을 딴 갤리선 USS 레이디 워싱턴(USS Lady Washington)이 건조되기도 했다. 이 배는 미국 해군 군함 중 처음으로 여성의 이름이 붙여졌고, 생존 인물의 이름이 붙여진 첫 사례이기도 하다.
  • 1787년부터 미국 태평양 북서부를 탐험한 브리그선 레이디 워싱턴(Lady Washington)호 역시 그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배는 1791년 일본에 기항한 최초의 미국 선박이기도 하다.
  • 미국 조폐국은 대통령 1달러 주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07년 5월 13일 마사 워싱턴을 기념하는 10달러 금화를 발행했다.[59]
  • 멸종된 나그네비둘기의 마지막 개체였던 마사의 이름도 그녀에게서 따온 것이다.


'''기념 우표, 지폐, 주화'''

1886년 발행된 마사 워싱턴 도안의 1달러 은 증권


1896년 발행된 마사 워싱턴 도안의 1달러 은 증권

10. 평가

1982년부터 시에나 칼리지 연구소(Siena College Research Institute)는 정기적으로 미국의 역사가들을 대상으로 역대 영부인들을 평가하는 설문 조사를 실시해 왔다. 이 조사는 배경, 국가에 대한 기여도, 지성, 용기, 업적, 청렴성, 리더십, 개성, 대중적 이미지, 대통령에 대한 기여도 등 다양한 기준을 바탕으로 점수를 매긴다.[42] 마사 워싱턴은 이 설문 조사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역대 설문 조사에서의 누적 평가 순위는 다음과 같다.

연도전체 영부인 수마사 워싱턴 순위
1982년42명9위[44]
1993년37명12위[44]
2003년38명13위[44]
2008년38명9위[44]
2014년39명9위[43]



특히 2008년 시에나 칼리지 연구소 설문 조사에서는 대중적 이미지 부문에서 3위를 기록했으며,[44] 2014년 조사에서는 남편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의 관계를 평가하는 "파워 커플" 부문에서 39쌍 중 2위에 올랐다.[45]

마사 워싱턴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기념물과 명칭이 존재한다.


  • 우표 및 화폐:
  • * 1902년 미국 우표 도안에 등장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 * 미국 조폐국은 대통령 1달러 주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2007년 5월 13일에 마사 워싱턴을 기념하는 10USD 금화를 발행했다.[59]

  • 선박:
  • * 그녀의 이름을 딴 갤리선 USS 레이디 워싱턴은 미국 군함 중 처음으로 여성의 이름이 붙여졌고, 또한 생존 인물의 이름이 붙은 첫 사례이기도 하다.
  • * 1787년부터 미국 태평양 북서부를 탐험한 브리그선 레이디 워싱턴 역시 그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배는 1791년 일본에 기항한 최초의 미국 선박이기도 하다.

  • 기타:
  • * 멸종된 나그네비둘기의 마지막 생존 개체에게 붙여진 애칭 '마사'는 마사 워싱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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