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에 노리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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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스에 노리히로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복어 계획'에 관여한 인물이다. 그는 아키타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시베리아 출병에 참여하여 '시온 의정서'를 접했다. 이후 육군성 정보국에서 '시온 의정서'를 번역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 연구를 수행하며 유대 문제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만주에서 유대인 보호를 위해 노력했으나, 나치 독일과의 동맹으로 인해 직위 해임되었고,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롭스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야스에는 반유대주의에서 친유대주의로 사상이 변화했으며, 유대인 보호에 힘쓴 인물로 평가받지만, '시온 의정서' 번역으로 인해 논란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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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스에 노리히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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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정보 | |
| 이름 | 야스에 노리히로 (安江 仙弘) |
| 출생 | 1886년 1월 12일, 아키타현 아키타시 |
| 사망 | 1950년 8월 4일, 하바롭스크, 소련 |
| 군사 경력 | |
| 소속 | [[파일:War 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svg|22x20px|border]] 대일본제국 육군 |
| 복무 기간 | 1906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대좌 |
| 참전 | 시베리아 출병 제2차 세계 대전 |
2. 생애와 경력
1918년 시베리아 출병 이후, 야스에는 러시아 백군을 지원하며 반유대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귀국 후 시온 의정서를 일본어로 번역했고, 육군성 정보국에서 근무하며 유대인 문제 연구를 지속했다. 1926년 팔레스타인으로 파견되어 현지 유대인들과 교류하며 키부츠 운동에 관심을 가졌으나, 유대인들의 세계 지배 음모에 대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1930년대, 야스에는 "만주파"와 협력하여 만주국 개발에 유대인을 활용하는 복어 계획을 구상, 추진했다. 만주 사변 이후 하얼빈 유대인들이 탈출하자, 아브라함 카우프만 박사와 협력하여 유대인 공동체를 안정시키고 지지를 얻고자 했다. 1938년 5개 대신 회의에서 상하이 유대인 정착촌 건설이 승인되었고, 1939년 야스에, 이누즈카, 이시구로 시로는 상하이 근처 자치 유대인 지역 설치를 권고했다.
야스에는 복어 계획 실행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정착촌 부지 선정, 유대인 이송,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과의 협상 등을 주도했다. 미국 유대인 공동체와 관계 구축에도 힘썼으며, 만주 유대인 공동체를 "아시아의 이스라엘"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삼국 동맹 조약 체결 후 나치 독일과 관계 악화로 1940년 군에서 해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야스에는 복어 계획에 관여했지만, 1942년 요제프 마이징거의 상하이 게토 학살 계획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종전 후 소련의 만주 침공 당시 피난을 거부하고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롭스크 노동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아키타현 아키타시에서 마쓰모토 번 사무라이 출신의 아버지 야스에 센세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이후 대만에서 메이지 정부를 섬겼다.[2] 1905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21기 졸업생으로, 동기생으로는 이시하라 간지와 히구치 기이치로 등이 있었다.[2]2. 2. 시베리아 출병과 반유대주의
1918년,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하여 시베리아에서 그리고리 세묘노프 등 백위군 장교와 접촉하면서, 『시온 의정서』라는 반유대주의 고전 서적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일본에 귀국 후 이 책을 번역했다. 1924년, 호코시라는 필명으로 『세계 혁명의 이면』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이 책의 전문을 일본에 소개했다. 러시아 군주제의 단기간 붕괴는 충군애국 정신으로 자란 야스에 등에게는 경악이었고, 이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이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시온 의정서』에 대해서는 위서설이 나왔지만, 이때는 검토를 거쳐 진품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2]2. 3. 유대 문제 전문가로의 변화
1927년 육군의 명령으로 사카이 쇼군을 영어 통역으로 대동하여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등지를 시찰하면서, 반유대주의 문서에 기반한 관념적인 유대인 이해에 오류가 있음을 깨달았다. 사카이 쇼군은 "유대 문제 좌담회"에서 "호코(야스에의 필명)는 팔레스타인을 보고 난 후 사상이 변하여, '세계 혁명의 뒷면'과 같은 서적은 이제 낡아서 쓸모없다고 말하곤 했다"고 증언했다[3]。 애국심이 강했던 야스에는 망국 유대 유민의 참상에 동정하며 급속히 친유대적인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4]。 유대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유대인의 위험성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은 당시 육군의 "유대통"들에게서 널리 나타나는 특징이었다.제국 재향 군인회 본부의 의뢰로 1934년에 저술된 『유태의 사람들』 결론부에는 귀국 후 변화된 야스에의 유대관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유태인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수천만의 유태인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혁명 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 한결같이 대재벌인 것도 아니다. 유태인 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예를 들어 그림에서 보는 그리스도와 같은 옛 복장을 하고, '유태의 통곡의 벽'에 아침저녁으로 모여 구세주의 강림을 기원하며 현대와 동떨어져 유대교에만 몰두하는 종교적 유태인이 있다. 한편으로는 시오니스트로서 팔레스타인의 유태 국가 건설에만 열중하는 유태인이 있는가 하면, 국경을 초월하여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인터내셔널한 유태인도 있다. 시오니즘에 의해 일반적으로 각성되었다고는 하지만, 시온 운동에 무관심하게 자신의 장사에만 열중하는 유태인도 있다. 즉, 유태인이라고 해서 아무나 위험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해로운 인물도 있으면, 해가 없는 선량한 사람도 있다[5]."
2. 4. 만주국과 유대인 정책
1935년 2월, 야스에는 하얼빈에서 극동 유대인 회의 의장 카우프만 박사 등과 협의하여 일본과 유대 민족 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세계 민족 문화 협회"를 창립했다. 그는 이소베 겐조 박사를 고문으로 추대하고 스스로 회장을 맡아 재만 유대인 보호에 힘썼으며, 회교도와 백계 러시아인에게도 원조를 제공했다.1938년 1월 21일, 관동군사령부는 "현하에 있어서 유대 민족 대책 요령"을 책정했다. 이 요강은 만주국 개발 시 외자 도입과 관련하여 유대 자본 투자를 경계하면서도, 경제계에는 투자의 이점을, 군부에는 미국 자본 투입을 통한 대미 관계 개선 가능성을 암시했다. 또한, "팔굉일우의 우리 대정신"이라는 미명 하에 "요령"을 포장하여 정부를 설득했다.
야스에는 1938년 오상 회의에서 유대인 대책 요강이 책정되도록 육군 대신 이타가키 세이시로에게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2. 4. 1. 복어 계획
이누즈카 고레시게와 함께 복어 계획을 구상한 야스에 노리히로는, 이누즈카와 동일하게 평가되기도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하타 이쿠히코는 이누즈카의 유대인론 역시 야스에와 비슷하게 변화했다고 평가하지만,[2] 이누즈카는 1938년 10월 강연에서 "유대인의 목을 조여 철저히 그들을 압복해야 한다. 즉, 일본 측이 확고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오늘, 확고한 자신과 강렬한 의지로 그들을 견제하고 압박하여 우리나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이해시키고, 한편 그 순치 공작을 실시하는 것이 적절하다"라고 발언하는 등,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일방적인 유대인 이용론자의 입장을 견지했다.[6]전전 일본 정부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이었던 오상 회의에서 "유대인 대책 요강"이 책정된 배경에는 야스에가 당시 육군 대신 이타가키 세이시로에게 공을 들인 노력이 있었다. 이 요강 성립 과정에서 야스에의 역할은 장남 히로오의 증언만으로 알려져 왔으나, 세키네 마호가 교토 대학에 제출한 학위 청구 논문 공개 『일본 점령하의 상하이 유대인 게토』(2010)에서 "만철 외교 경제 조사계에 부과하는 연구 문제"(1938년 10월 27일)라는 자료를 통해 "본 건은 야스에 씨의 사안임"이라는 만철 측의 메모를 발견하면서 야스에 히로오 증언의 신빙성이 입증되었다.[7] 이 자료에는 "유대인 대책 요강"의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누즈카와 야스에 등의 노력으로 결정된 "유대인 대책 요강"은 "유대인을 적극적으로 일본, 만주, 중국에 초치하는 것은 피한다. 단, 자본가, 기술가와 같이 특히 이용 가치가 있는 자는 예외로 한다"라고 명시하여 공리주의적인 측면만을 강조했다. 역사가 하타 이쿠히코는 이누즈카가 이용론의 이유를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평가한다.[2] 독일-이탈리아-일본 삼국 동맹 체결 이후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면서 유대인을 이용한 만주 자본 도입이나 대미 여론 개선책은 논외가 되었고, 군부 내에서 야스에의 존재는 점차 눈엣가시가 되어 헌병대의 미행을 받게 되었다.[8] 일본 정부는 1938년 10월 7일 외무 대신 훈령 『유대 난민의 입국에 관한 건』(미 삼기밀합 1447호)을 통해 유대 난민 수용을 제한하는 정책을 গোপনে 시행하고 있었다.
2. 5. 예비역 편입과 말년
1940년 12월, 육군 대좌였던 야스에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9] 도조 히데키 육군 대신과의 의견 충돌로 인해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무천조" 출신이었던 야스에가 육군 대좌로 예비역에 편입된 것은 일반적인 인사였다. 야스에와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던 이시하라 간지와 히구치 기이치로는 이 시기에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육군에서 퇴임한 후, 야스에는 남만주철도로 자리를 옮겨 1941년 1월부터 1945년 8월 만주국과 남만주철도가 소멸될 때까지 만철 야스에 기관장으로 근무했다.[9]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야스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강화 협상에 마지막으로 힘썼다. 같은 날, 국민당 정부 고위 관료로부터 "협상에 응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야스에는 장남 히로오에게 "내가 이만큼의 일을 했다는 것을 너라도 기억해다오"라고 말하며,[10] "일본을 이렇게 만든 것은 우리 노년층의 책임이다. 나는 그 책임을 지겠다. 소련이 들어오면 구금될 것이다. 나는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겠다"[11] [12]라는 유언을 남겼다.
1945년 8월 23일, 야스에는 다롄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되었고, 1950년 8월 14일 하바롭스크 수용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9]
3. 사상과 이념
야스에 노리히로는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시온 의정서 번역과 팔레스타인 방문 등의 경험을 통해 점차 친유대주의적 입장으로 변화하였다.
시베리아 출병 당시, 야스에는 그리고리 세묘노프 장군의 참모로 일하면서 ''시온 의정서''를 접하고 그 내용에 영향을 받았다.[1] 1922년 일본으로 돌아온 후에는 육군성 정보국에서 ''시온 의정서''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유대인 문제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였다.
1926년, 야스에는 일본 외무성의 명으로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어 하임 바이츠만, 다비드 벤구리온 등 저명한 유대인 지도자들을 만나고 키부츠 운동을 관찰하였다. 그는 처음에 키부츠 운동이 유대인의 세계 식민지화 계획의 일환이라고 의심했지만, 현지 유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음모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야스에는 만주국 개발에 유대인을 활용하려는 아이카와 기스케와 협력하여 "복어 계획"을 구상하게 된다. 1939년, 야스에는 상하이 근처에 자치 유대인 지역 설치를 권고했다. 이는 더 많은 유대인들이 일본을 선호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야스에는 삼국 동맹 조약 체결 이후 군에서 해임되었지만, 복어 계획에 계속 관여하며 유대인들의 안전과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했다.[1] 제국 재향 군인회 본부의 의뢰로 쓰인 『유태의 사람들』(1934)에서 "유태인이라고 해서, 아무나 위험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해로운 인물도 있으면, 해가 없는 선량한 사람도 있다"고 언급하며 변화된 유대관을 드러냈다.[5]
1927년 육군의 명령으로 팔레스타인이나 이집트에서 유럽을 시찰했을 때, 반유대주의 문서에 의한 관념적인 유대인 이해의 오류를 깨달았다고 한다.[3] 원래 애국심이 강했던 야스에는, 망국 유대 유민의 참상에 동정하여, 급속히 친유대적인 경향이 강해졌다.[4]
4. 평가
야스에 노리히로는 시온 의정서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복어 계획에 관여한 인물로, 그의 활동은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백계 러시아인의 영향을 받아 시온 의정서를 번역한 초기에는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나,[1] 점차 유대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옹호자로 변화했다. 특히 상하이의 유대인 공동체와 긴밀히 협력하며 그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1]
전쟁 전 만주에 거주했던 러시아계 유대인 미하엘 코간은 야스에에게 깊은 은혜를 느껴, 그가 사망한 후 장례 비용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13]
시온 의정서 번역으로 야스에를 싫어했던 유대 학자 아브라함 코츠지는 그의 회고록 『도쿄에서 예루살렘으로』(1975)에서 "야스에가 많은 면에서 유대인을 도운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라고 인정했다.[14]
야스에의 장례에는 이스라엘 공사와 유대인 협회 회장이 참석하여, 만주 시대의 유대인 보호에 대한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만주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였던 아브라함 카우프만 박사는 야스에에게 신뢰를 보냈으며, 그의 회고록 『캠프의 의사』(1973)에는 일본인에 대한 원망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15]
5. 대중문화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무지개색 트로츠키와 오오츠카 에이지 원작, 모리 미카 그림의 키지마 일기에 야스에 노리히로가 등장한다.
5. 1. 만화
-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무지개색 트로츠키
- 오오츠카 에이지 원작, 모리 미카 그림의 키지마 일기
참조
[1]
간행물
Rekishi Dokuhon
2013-08
[2]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文藝春秋
1999-12-10
[3]
서적
ユダヤ禍の妄想
1929
[4]
서적
大連特務機関と幻のユダヤ国家
[5]
서적
猶太の人々
[6]
서적
太平洋戦争と上海のユダヤ難民
[7]
서적
日本占領下の上海ユダヤ人ゲットー
[8]
서적
自由への逃走
[9]
서적
2005
[10]
서적
大連特務機関と幻のユダヤ国家
[11]
서적
大連特務機関と幻のユダヤ国家
[12]
문서
[13]
서적
大連特務機関と幻のユダヤ国家
[14]
서적
From Tokyo to Jerusalem
[15]
서적
Camp Doctor
[16]
간행물
官報
191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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