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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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부츠는 1909년 러시아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이 세운 자급자족 공동체이다. 사회주의와 시오니즘의 영향을 받아 평등, 협동,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며, 이스라엘 건국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농업을 중심으로 했으나, 이후 산업화와 관광업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80년대 이후 경제 위기와 이념적 갈등을 겪으며 사유화, 차등 임금 도입 등 변화를 겪었고, 현재는 '새로운 키부츠' 모델로 전환하는 추세이다. 키부츠는 이스라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농촌 공동체 모델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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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부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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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유형 | 집단 농장 |
위치 | 이스라엘 |
역사 | |
설립 시기 | 1909년 |
설립 목표 | 시오니스트 이념에 따른 유대인 정착 |
특징 | |
경제 구조 | 집단 소유, 노동 분배, 필요에 따른 분배 |
사회 구조 | 평등주의, 공동체 중심 |
이상 | 사회주의, 공동체주의 |
주요 가치 | 노동, 평등, 공동체 |
관련 인물 | 마르틴 부버 |
변화 | |
사유화 | 2000년대 이후 일부 키부츠에서 진행 |
배경 | 세계화, 개인주의 확산 |
현황 | |
존속 | 여전히 이스라엘 사회의 중요한 부분 |
역할 | 농업, 관광 산업 |
2. 역사
1909년, 제정 러시아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젊은 유대인들이 갈릴리 호수 남쪽에 세운 최초의 공동 마을 데가니아가 키부츠의 시작이다. 이들은 생산적인 자력 노동, 집단 책임, 신분의 평등, 기회 균등이라는 4대 원칙에 기초하여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며 토지를 개척해 나갔다. 이는 사회주의와 시오니즘이 결합된 노동 시오니즘의 실현으로, 이스라엘 특유의 사회 실험이자 역사상 중요한 공동체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초기 키부츠는 개인이 농장을 경영하기 어려운 척박한 환경 속에서 공동체적 필요와 유대교 및 사회주의적 이념에 따라 설립되었다. 전 세계 각지에서 박해를 피해 온 유대인들이 합류하면서 키부츠의 수와 인구는 점차 증가했고, 학교, 도서관, 진료소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원래 농업이 중심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공업, 관광업 등으로 사업 분야를 확장하며 독립된 자치체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키부츠는 이스라엘 건국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콜호스, 인민공사 등 다른 나라의 공동 사회 형태와 비교했을 때, 키부츠는 자발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이스라엘 사회에 더욱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스라엘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높지 않았지만(최대 7% 미만),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 여성 총리 골다 메이어 등 많은 정치 지도자와 군 간부, 지식인을 배출했으며, 한때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의석의 15%를 차지하기도 했다. 키부츠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중요한 존재로 여겨진다.
시대 변화에 따라 키부츠도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는 구성원의 노동은 무보수였고 생활의 모든 것이 무료로 보장되었지만, 점차 급여가 지급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에는 많은 키부츠가 재정 위기를 겪었고, 이후 재산의 사유화 허용, 급여제 도입, 가족 단위 육아 전환 등 변화가 이루어졌다. "키부츠 운동", "키부츠 산업 협회"와 같은 전국 조직이 활동하고 있으며, 2016년 기준 282개의 키부츠에 17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이 중 45개는 여전히 주택과 재산을 공유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59]
오늘날에도 키부츠는 이스라엘 경제, 특히 농업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점적 관개 시스템 분야의 세계적 기업인 네타핌처럼 키부츠에서 시작해 성공한 기업도 있으며, 키부츠와 모샤브(가족 경영 농장 마을)는 이스라엘 농업 생산의 약 80%를 담당하여 90%가 넘는 식량 자급률 달성에 기여하고 있다.[61] 다만, 키부츠와 모샤브가 공동 소유했던 이스라엘 최대 식품 기업 츠누바(Tnuva)는 협동조합에서 유한 회사로 전환된 후 2014년 중국의 광명식품집단(Bright Food)에 인수되는[60] 등 변화의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2. 1. 초기 키부츠 (1909년 ~ 1948년)


키부츠는 빌루 운동 회원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제1차 알리야 (1881-1903) 시기 정착민들처럼, 제2차 알리야 (1904-1914) 시기 이주민 대부분도 농업을 통해 정착하고자 했다. 당시 오스만 제국 통치하 팔레스타인에서는 농업이 거의 유일한 경제 활동 수단이었다.
최초의 키부츠는 1909년 갈릴리 호수 남쪽 끝에 정착한 12명의 남녀가 세운 데가니아 알레프로, 공식 설립 연도는 1910년이다.[6] 이들은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온 젊은이들로, 이전에는 습지 개간이나 석공 일, 기존 유대인 정착촌의 노동자로 일했다. 이들은 스스로 땅을 일구는 꿈을 가지고 "크부차트 데가니아"(히브리어로 '곡물의 공동체'라는 뜻)를 세웠다. 데가니아의 설립자들은 고대 스파르타의 공동체 생활 이상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7][8]
키부츠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요세프 바라츠는 당시 상황에 대해 "우리는 땅에서 일하는 것에 충분히 만족했지만, 옛 정착촌의 방식이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나라를 정착시키기를 바랐던 방식이 아니었다. 즉, 유대인이 위에 있고 아랍인이 그들을 위해 일하는 이 구식 방식은 우리에게 맞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기록했다.[9]
그러나 1909년 당시 개인이 독립적인 농장을 운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유대인 농업 정착을 지원했던 아르투르 루핀은 "문제는 집단 정착이 개인 정착보다 나은가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 정착이냐 아니면 아예 정착하지 않느냐의 문제였다"고 술회했다.[10]
오스만 제국 치하의 팔레스타인은 갈릴리 지역의 늪지, 유대 산맥의 바위투성이 땅, 남부 네게브 사막 등 척박한 환경이었다. 대부분의 정착민은 농업 경험이 부족했고, 말라리아, 티푸스, 콜레라 같은 질병이 만연했다. 베두인의 습격으로 농장과 정착지가 약탈당하고, 관개 시설이 파괴되거나 농작물이 불타는 일도 잦았다. 이러한 환경에서 공동체 생활은 안전을 확보하고 농장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모으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키부츠 설립자들은 전 세계 유대인들이 유대 민족 기금을 통해 모금한 자금으로 구매한 땅에서 공동으로 농장을 일구며 정착의 기반을 다졌다.
데가니아의 초기 생활은 매우 고됐다. 한 개척자의 기록처럼 몸이 고되고 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이들이 병에 걸리거나 힘든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지만, 1914년 데가니아의 회원은 50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갈릴리 호수 주변과 예즈르엘 계곡에도 다른 키부츠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오스만 제국이 물러나고 영국 위임 통치가 시작되면서 키부츠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보다 유대인 이민과 토지 매입에 덜 제약을 가했다. 또한 동유럽에서 반유대주의와 포그롬이 심화되면서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제3차 알리야 (1919-1923) 시기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1920년대에는 시오니즘 유대 청년 운동이 활발해졌다. 우익 성향의 베타르부터 좌익 사회주의 성향의 드로르, 하보님 드로르, 하쇼메르 하자이르 등 다양한 단체들이 등장했다. 이들 청년 단체 회원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팔레스타인으로 오기 전에 농업 훈련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로부터의 이민이 어려워지면서, 전간기에는 독일 등 다른 유럽 국가 출신 유대인들의 이민도 늘어났다.
초기 키부츠의 회의는 주로 실무적인 문제를 다루었지만,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공동체 생활과 이념에 대한 토론이 활발해지며 비공식적인 성격이 강해졌다. 모닥불 주위에 모여 토론하고 호라 춤을 추는 등 공동체적 유대와 열정을 나누는 활동이 이루어졌다.
1920년대에 설립된 키부츠들은 데가니아 같은 초기 키부츠보다 규모가 컸다. 데가니아는 12명으로 시작했지만, 1921년 설립된 에인 하로드는 215명으로 시작했다. 키부츠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1922년 팔레스타인 내 키부츠 인구는 700명이었으나, 1927년에는 2,000명으로 증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무렵에는 79개 키부츠에 24,105명이 거주하며 영국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 유대인 인구의 5%를 차지했다.[11]
키부츠 운동이 성장하면서 이념적 분화도 나타났다. 1927년에는 연합 키부츠 운동이 설립되었고, 여러 하쇼메르 하자이어 키부츠들은 연합하여 키부츠 아르치를 형성했다. 1936년에는 하키부츠 하아르치의 도시 기반 조직으로 팔레스타인 사회주의 연맹이 창설되었고, 이 두 조직은 1946년 합쳐져 하쇼메르 하자이어 팔레스타인 노동자당이 되었다. 이 당은 1948년 아두트 하아보다와 합당하여 좌익 정당인 마팜을 창당했다.
1928년에는 데가니아를 포함한 소규모 키부츠들이 '헤베르 하크부초트'("크부초트 협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공동체 규모를 200명 이하로 유지하여 긴밀한 관계를 중시했다. 반면, 연합 키부츠 운동 소속 키부츠들은 규모 제한 없이 회원을 받아들여 기바트 브레너처럼 1,500명이 넘는 대규모 키부츠도 생겨났다. 아르치 키부츠는 다른 키부츠보다 성 평등을 강조하여, 여성들은 남편을 전통적인 '바알리'(나의 주인) 대신 '이시'(나의 남자)라고 불렀고, 아이들은 공동 육아 시설에서 생활하며 하루 중 일부 시간만 부모와 보냈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키부츠 아르치와 연합 키부츠 운동 소속 키부츠들은 세속주의 혹은 무신론적 성향이 강해 스스로를 "신 없는 수도원"이라 칭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키부츠 구성원들은 부모 세대의 정통 유대교 관습에는 거리를 두었지만, 유대교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안식일에는 특별한 식사를 준비하고 노동을 쉬었으며, 욤 키푸르 같은 명절에는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을 위한 집단 바르 및 바트 미츠바 의식을 열기도 했다. 샤부오트, 수코트, 과월절 등 농업과 관련된 유대교 명절은 춤, 식사, 축제를 통해 기념했으며, 특히 투 비슈밧(나무의 생일)은 키부츠에 의해 중요한 명절로 자리 잡았다.
한편, 종교적인 생활을 중시하는 키부츠들도 생겨나 종교 키부츠 운동을 창설했다. 최초의 종교 키부츠는 1946년에 설립된 아인 츠루림이었다.
사회주의와 시오니즘이 결합된 키부츠는 이스라엘 특유의 사회 실험으로, 공동체적 생활 방식을 통해 초기 유대인 정착과 국가 건설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시기 키부츠는 척박한 환경을 개척하고 농업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기회 균등과 집단 책임을 강조하는 독특한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며 성장해 나갔다. 초기에는 무보수 노동을 원칙으로 했으나, 점차 변화를 겪게 된다.
2. 2. 이스라엘 건국 이후 (1948년 ~ 현재)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도 키부츠는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이어갔다. 1948년에는 좌익 마팜 당이 결성되는 등 정치적 영향력도 유지했다.키부츠 인구는 1950년에 65,000명으로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했으며[11], 1989년에는 129,000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감소하여 2010년에는 약 100,000명 수준이었고, 당시 이스라엘에는 270개의 키부츠가 있었다.[12] 비교적 최근인 2016년 기준으로는 282개의 키부츠에 17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59]
키부츠 구성원은 이스라엘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한때 4% 미만),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의석의 15%를 차지하는 등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는 키부츠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가지는 상징성과 중요성을 보여준다.

경제 및 사회 구조 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초기에는 농업이 중심이었지만 점차 공업, 관광업 등으로 사업 분야를 확장하며 독립적인 자치체의 성격을 강화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키부츠가 사회주의적 이상향으로 여겨지면서 일본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이 키부츠의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기 위해 이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많은 키부츠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90년대 이후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많은 키부츠에서 재산의 사유화를 허용하고, 무보수 노동 원칙 대신 급여제를 도입했으며, 자녀 양육도 공동 육아에서 가족 단위로 전환하는 등 시장 경제 원리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키부츠' 모델이 확산되었다. 물론, 2016년 기준으로 여전히 주택과 재산을 공유하는 전통적인 공동체 방식을 유지하는 키부츠도 45곳 남아있다.[59]
키부츠는 이스라엘 경제, 특히 농업 분야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점적 관개 시스템 분야의 세계적인 기업인 네타핌처럼 키부츠에서 시작하여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기업들도 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식품 기업이었던 트누바는 본래 키부츠와 모샤브(가족 단위 농업 협동조합)가 공동으로 소유한 협동조합이었으나, 유한 회사로 전환된 후 2014년 중국의 광명식품집단(Bright Food)에 인수되었다.[60] 키부츠는 모샤브와 함께 이스라엘 전체 농업 생산량의 약 80%를 담당하며, 국가 식량 자급률을 90% 이상으로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61]
3. 이념 및 가치
키부츠는 사회주의와 시오니즘, 특히 노동 시오니즘 이념이 결합되어 탄생한 이스라엘 특유의 집단 공동체이다. 이는 20세기 초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 청년들이 유대교적, 사회주의적 이념에 따라, 혹은 공동 사회의 필요성에 의해 시작한 사회 실험이었다. 이들은 생산적인 자력 노동, 집단 책임, 신분의 평등, 기회 균등이라는 원칙에 기초하여[6] 토지를 개척하고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다.
키부츠의 핵심 가치는 평등, 협동, 공동체 생활에 있었다. 초기 키부츠는 사유 재산을 최소화하고 생산 수단과 노동력, 그리고 그 결과를 공유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공동체적 생활 방식은 당시 팔레스타인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고 정착지를 개척하기 위한 현실적인 필요와도 맞물려 있었다.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구분이 없는 평등한 노동 공동체를 지향했으며,[9] 이는 전 세계의 관심을 끄는 독특한 생활 방식으로 발전했다.
콜호스, 인민공사 등 다른 나라의 집단 농장과 비교했을 때, 이스라엘 키부츠는 자발성에 기초한 집산주의적 공동체로서 이스라엘 건국과 사회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키부츠는 이스라엘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높지 않았지만, 많은 지도자와 지식인을 배출하며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존재 중 하나로 여겨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키부츠가 변화를 겪었지만, 키부츠가 추구했던 이념과 가치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 1. 사회주의적 가치
키부츠 구성원들은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들의 시스템은 부분적으로 공산주의와 유사한 면모를 보였다. 이는 초기 키부츠가 생산 수단의 공유, 공동 노동, 공동 분배를 추구하며 사유 재산을 최소화하고 공동체 생활을 강조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모든 구성원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졌으며, 개인의 필요에 따라 자원을 분배받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전통적인 국가 개념을 비판했고, 레닌주의자들은 시오니즘에 적대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키부츠 운동 내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분파가 존재했다. 예를 들어, 키부츠 운동의 마르크스주의 분파인 키부츠 아르치(하키부츠 하아르치)는 팔레스타인 분할보다 일국가 해법을 선호하기도 했다.1930년대 후반, 타벤킨과 야아리 같은 일부 키부츠 지도자들은 초기 아나키즘적 사상에서 벗어나 요제프 스탈린의 독재와 개인숭배에 경도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22] 소련은 초기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하며 UN에서 찬성표를 던졌으나, 이스라엘이 명확히 공산주의 노선을 따르지 않자 적대적으로 돌아섰고 아랍 세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키부츠 운동 내부에 큰 이념적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1952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슬란스키 재판에서 다수의 유대인 당 간부들이 처형당하고, 1953년 소련에서 의사 음모 사건이 발생하면서 키부츠 메우차드(하키부츠 하메우하드)와 키부츠 아르치 내에서 큰 충격과 함께 구성원들의 탈퇴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키부츠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 푸림 축제를 취소하며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하쇼메르 하차이르(젊은 경비대)와 같은 극좌 키부츠 운동의 일부는 소련 및 위성국가에서 반유대주의가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을 '평화 진영'의 지도자로 여기는 경향을 보였으며, 이는 당 기관지 알 하미쉬마르(감시) 등을 통해 드러났다.
키부츠는 이스라엘의 부분적인 자유 시장 체제 내에서 집단 기업 형태로 운영되었다. 내부적으로는 활발한 민주주의를 실천하여 키부츠 운영에 관한 직책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고, 구성원들은 전국 선거에도 적극 참여하여 주로 키부츠 운동의 이념적 노선에 따라 투표했다. 공동체 내 평등의 원칙은 중요한 가치였으나, 현실에서는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이스라엘과 서독 간 배상 협정에 따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배상금 문제가 있었다. 개인적인 손실에 대한 보상인 배상금을 공동체에 귀속시키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 끝에, 많은 키부츠는 생존자들이 배상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보유하도록 허용하며 평등 원칙에 대한 예외를 두었다. 공동체에 귀속된 배상금은 건물 확장이나 공동 복지 활동 등에 사용되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제1차 알리야 시기 이민자들과 달리 제2차 알리야 이후 키부츠 구성원들은 대체로 세속적인 경향을 보였다.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보다는 노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윤리가 강조되었으며, 베를 카츠넬슨은 "유대인 노동자가 가는 곳마다 신의 임재가 함께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21] 일부 극좌 성향의 키부츠에서는 유대교 관습이 금지되거나 억제되기도 했다.
키부츠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일한 공동체 형태는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에 발전한 ''모샤브''는 농산물 마케팅이나 주요 농자재 구매 등은 공동으로 진행했지만, 생산 활동이나 일상생활의 다른 측면들은 사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키부츠와 차이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키부츠의 정치적 성향도 변화를 겪었지만, 공동체주의와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좌파적 성향은 상당 기간 유지되었다. 2009년 총선 당시 키부츠의 표는 주로 카디마, 노동당, 메레츠와 같은 중도 및 좌파 정당으로 향하는 경향을 보였다.[23]
3. 2. 시오니즘과의 관계
키부츠는 시오니즘 운동, 특히 노동 시오니즘 이념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시작되었다. 빌루 운동 회원들을 포함한 제2차 알리야 (1904-1914) 시기 이주민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농업을 통해 유대 민족의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자 했다. 최초의 키부츠는 1910년 갈릴리 호수 남쪽에 세워진 데가니아 알레프였다.[6]초기 키부츠 운동가들은 유대인이 아랍인을 고용하는 기존 정착촌 방식 대신, 스스로 땅을 경작하는 '자력 노동'을 통해 사회주의와 시오니즘이 결합된 이상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다. 선구자 중 한 명인 요세프 바라츠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우리는 땅에서 일하는 것에 충분히 만족했지만, 옛 정착촌의 방식이 우리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나라를 정착시키기를 바랐던 방식이 아니었다. 즉, 유대인이 위에 있고 아랍인이 그들을 위해 일하는 이 구식 방식은 우리에게 맞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방법이 있어야 한다."[9] 당시 오스만 제국 치하 팔레스타인의 열악한 환경(늪지대, 바위투성이 산지, 사막,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 베두인의 습격 등)과 정착민들의 농업 경험 부족은 개인 정착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아르투르 루핀은 이러한 상황에서 집단 정착이 유대인 농업 식민지화를 위한 거의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라고 보았다.[10] 키부츠 설립 자금은 유대 민족 기금 등을 통해 전 세계 유대인들의 기부로 마련되기도 했다.
키부츠는 단순한 농업 공동체를 넘어, 유대인 공동체의 정착과 방어, 나아가 미래 이스라엘 국가의 경계 설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이가엘 알론은 키부츠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개척 시오니즘의 계획과 발전은 처음부터 적어도 부분적으로 정치 전략적 요구에 의해 결정되었다. 예를 들어, 정착지의 위치 선택은 경제적 생존 가능성뿐만 아니라 지역 방위, 전반적인 정착 전략, 그리고 그러한 정착지 구역이 미래의 결정적인 전면전에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토지는 구매되었거나, 더 자주 개간되었는데, 이는 그 나라의 외딴 지역에서 이루어졌다."[13] 키부츠는 외곽 지역이나 전략적 요충지에 설립되어 유대인 정착 지역을 확장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1948년 독립 전쟁 당시 키부츠 구성원들은 이스라엘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데가니아 알레프 키부츠 구성원들은 시리아 군대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마간 미카엘 키부츠는 전쟁에 필요한 스텐 총의 탄약을 비밀리에 생산하여 이스라엘 군수산업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키부츠는 시오니즘의 목표, 특히 노동 시오니즘의 이념을 실현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스라엘 건국과 초기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키부츠는 이스라엘 인구 비율에 비해 많은 군 지도자, 지식인, 정치가를 배출했는데, 대표적으로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 여성 총리 골다 메이어 등이 있다. 한때 키부츠 출신들이 이스라엘 의회 의석의 15%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는 키부츠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차지했던 정치적, 상징적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 개척 시대의 시오니즘적 열정과 집단주의 가치가 약화되고[16][18], 이스라엘 사회 전체의 변화와 세계화의 영향 등으로 키부츠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지만[19], 시오니즘 역사에서 키부츠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여전히 크다고 할 수 있다.
3. 3. 평등과 공동체
키부츠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평등이었다. 1970년대까지 이 원칙은 매우 엄격하게 지켜져,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 도구나 의류조차 소유하지 않았고 외부로부터 받은 선물이나 소득은 공동 금고에 귀속되었다. 만약 구성원이 개인적인 선물을 받게 되면, 이를 수령하는 것이 공동체 원칙에 맞는지 구성원 회의에서 논의될 정도였다.[24] 다만,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독일로부터 받은 배상금의 경우, 많은 키부츠에서 평등 원칙에 대한 예외를 두어 전부 또는 일부를 개인이 보유하도록 허용하기도 했다. 공동체에 귀속된 배상금은 건물 확장이나 공동 활동에 사용되었다.공동체 생활은 키부츠의 근간을 이루었다. 초기 정착민들은 오스만 제국 시대 팔레스타인의 혹독한 환경, 즉 늪지대와 사막, 말라리아와 같은 질병, 베두인의 습격 등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농장을 건설하기 위한 자본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 생활을 선택했다. 이는 단순한 이념적 선택을 넘어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방안이기도 했다. 요세프 바라츠와 같은 초기 개척자들은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없는 평등한 노동 공동체를 꿈꿨다.[9]
구성원들은 공동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을 공동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겼다.[24] 또한 키부츠는 단순한 농업 공동체를 넘어, 외부의 위협에 맞서 스스로를 지키는 방어 공동체 역할도 수행했다. 1936-1939년 팔레스타인 아랍 봉기와 같은 갈등 시기에는 소총을 구입하거나 제조하고 사격 훈련을 실시했으며, 이가엘 알론의 언급처럼 정착지의 위치 선정에도 지역 방어와 같은 전략적 고려가 포함되었다.[13] 나할과 같은 이스라엘 방위군 부대는 많은 키부츠를 설립하는 데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키부츠는 내부적으로 적극적인 민주주의를 실천했다. 키부츠 운영에 관한 직책은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고, 구성원들은 이스라엘의 전국 선거에도 활발히 참여하여 주로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에 맞는 정당에 투표했다. 2009년 조사에 따르면 키부츠 구성원들의 투표는 주로 카디마, 노동당, 메레츠와 같은 중도 및 좌파 성향의 정당으로 향했다.[23]
키부츠는 육체 노동을 중시하면서도 지적, 문화적 가치를 추구하는 "합성 인격"을 이상으로 삼았다. 이는 토지에 대한 애착과 노동의 즐거움, 그리고 예술, 과학, 문학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조화롭게 결합한 인간상을 의미했다. 비록 초기에는 농업 중심의 노동으로 인해 고등 교육의 필요성이 낮게 여겨졌지만, 키부츠가 제조업과 산업으로 다각화되면서 대학 진학률이 점차 증가했다.[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키부츠 구성원들의 지적 활동이 주로 소비적인 성격에 머무르며, 독창적인 학문이나 예술 창조보다는 기존의 것을 감상하는 데 치우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33]
이념적으로 키부츠는 마르크스주의와 유사한 측면을 가졌으나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 공동체는 아니었다. 일부 극좌 성향의 키부츠 운동, 특히 하쇼메르 하차이르 등에서는 요제프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으나, 슬란스키 재판이나 의사 음모 사건과 같이 소련 및 동구권에서 벌어진 반유대주의적 사건들은 키부츠 운동 내부에 심각한 이념적 갈등과 분열을 야기했다.[14] 이러한 이념적 차이는 결국 마파이, 아후트 하아보다, 마팜 등 각기 다른 이스라엘 노동당 계열 정당과 연계된 세 개의 키부츠 연맹(이후드, 메우하드, 아르치)으로 나뉘는 결과를 낳았다.[14]
4. 생활 방식
키부츠의 생활 방식은 사회주의와 시오니즘이 결합된 노동 시오니즘 이념에 기반하여 공동체적 가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1909년 갈릴리 호수 남쪽에 최초의 키부츠인 데가니아가 설립된 이래, 키부츠는 생산적인 자력 노동, 집단 책임, 신분의 평등, 기회 균등이라는 4대 원칙을 바탕으로 운영되었다. 초기 키부츠에서는 평등의 원칙이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어 개인 소유가 거의 허용되지 않았으며, 모든 생산과 소득은 공동체에 귀속되었다.[24] 공동체 생활은 키부츠 운영의 핵심적인 가치로 여겨졌다.
키부츠는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콜호스나 인민공사와 같은 다른 나라의 집단 농장과 달리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운영되었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키부츠는 인구 비율에 비해 많은 군 지도자, 지식인, 정치가를 배출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과 여성 총리 골다 메이어 등이 대표적인 키부츠 출신 인물이다. 한때 키부츠 구성원은 전체 인구의 4% 미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의회 의석의 15%를 차지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키부츠의 생활 방식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1980년대 많은 키부츠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1990년대 이후에는 재산의 사유화, 급여제 도입, 전통적인 가족 단위의 육아 방식으로 전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농업 중심이었던 경제 구조도 공업, 관광업 등으로 다변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점적 관개 시스템 기업 네타핌과 같이 키부츠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도 등장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키부츠는 초기 이상과는 달리 일반적인 기업이나 마을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지만, 여전히 주택과 재산을 공유하는 전통적인 방식을 유지하는 키부츠도 존재한다.[59]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부츠는 이스라엘의 식량 자급률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농업 생산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61]
4. 1. 공동 육아와 교육

키부츠에서 아이들이 태어나자, 공동체는 육아와 관련된 여러 윤리적 문제에 직면했다. 키부츠는 성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추구했으며, 여성이 출산으로 인해 가정 영역에만 묶이는 것을 경계했다. 여성들이 육아 부담에서 벗어나 농업이나 산업 분야에서 계속 활동할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공동 육아 시스템을 도입했다.[25] 키부츠 운동가 차유타 부셀은 "공동체 교육은 여성 해방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25]
또한, 키부츠 설립자들은 부모가 자녀를 개인 소유물처럼 여기고 통제하려는 경향이 공동체 생활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가부장제를 극복하는 데 공동 육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이들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존하지 않도록 하여 아버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자 했다.[26]
이에 따라 아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공동 어린이집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함께 배우고 놀며 잠을 잤다. 부모와는 보통 일이 끝난 후 저녁 식사 전까지 하루 서너 시간 정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24] 어린이집에서는 훈련된 간호사와 교사가 아이들의 양육을 책임졌다.[26] 이를 통해 부모가 직접적인 훈육자가 되지 않아도 되므로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했다.[26] 아이들은 공동체 환경 속에서 같은 해에 태어난 또래들과 함께 성장했으며, 아이들에 대한 재정적 책임 역시 공동체가 분담했다.
키부츠 교육은 기존의 공식 교육에서 벗어나 삶과 연결된 지식 및 육체 노동의 가치를 강조했다. 데가니아 알레프 창립자들은 "맹목적인 복종에 기반한 훈련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활동과 창조의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27] 어린이집은 아이들의 필요에 맞게 세심하게 꾸며졌다.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초기 발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아이의 개성, 창의성, 기본적인 신뢰감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두었다.[28]
하지만 이러한 공동 육아와 교육 방식은 가족의 전통이나 견해 대신 키부츠와 키부츠 운동의 이념을 주입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개성보다 획일성이 강조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는 전통적인 유대교 생활의 기반인 핵가족과의 의식적인 단절을 의미하기도 했다.[28] 공동체 생활과 교육을 통해 이기적인 성향이 사라지리라는 초기 기대와 달리, 아이들이 서로 다투거나 장난감을 독차지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창립자들은 초기 사회 개념의 유토피아적 이상이 점차 깨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29]
키부츠는 육체 노동을 중시하면서도 지적, 예술적 가치와의 통합을 추구하며 '합성 인격'이라는 이상을 내세웠다. 이는 토지에 대한 애착, 노동의 즐거움과 더불어 예술, 과학, 문학에 대한 이해와 감상을 조화롭게 갖춘 인간상을 의미했다.[32] 이로 인해 키부츠 구성원의 평균적인 지적 수준은 일반적인 도시나 농촌 공동체보다 높게 평가되기도 했지만,[32] 때로는 자기 교육적 학습의 한계로 독단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지식의 생산자보다 소비자 역할에 머무른다는 비판도 있었다.[33]
고등 교육에 대한 인식도 변화했다. 초기에는 농업 중심의 노동 구조로 인해 고등 교육의 필요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으나, 키부츠가 제조업과 산업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대학 진학을 포함한 고등 교육의 중요성이 커졌다. 실제로 대학에서 공부하는 키부츠 구성원의 비율은 1978년 38%에서 1990년 54%로 증가했다.[34] 초기에는 키부츠가 대학 등록금을 전액 지원했지만, 1980년대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서 일부 키부츠에서는 구성원이 등록금의 일부를 부담하기 시작했다.
4. 2. 성 평등 문제


키부츠에서 성 평등의 역할은 복잡하며, 초기 키부츠 설립 이후 여러 변화를 겪었다. 키부츠의 종류가 다양했기 때문에 여성들의 경험도 각기 달랐다. 어떤 이들은 키부츠에서 여성이 남성과 완전히 동등했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불평등이 항상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키부츠 운동 초기에는 남성 구성원이 훨씬 많아 남성 중심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남성과 동일하게 밭에서 일하고, 경비를 서는 등 힘든 노동에 참여했다.[27] 하지만 요리, 바느질, 청소와 같은 전통적인 여성 역할은 주로 여성들이 담당했다.
초기 수십 년 동안 키부츠에는 전통적인 의미의 결혼이 없었다. 남녀가 부부가 되기를 원하면 주택 사무실에 가서 함께 살 방을 요청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가부장제를 해체하고 여성이 남성에게 경제적 또는 사회적으로 의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졌다. 또한 공동체 생활이 핵심이었던 키부츠 전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키부츠 설립자들은 남편을 뜻하는 전통적인 히브리어 단어 '바알'(בעל|바알he) 사용을 피했는데, 이 단어가 "주인" 또는 "소유자"를 의미하며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었다.[25] 대신 '이시'(“나의 남자”)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키부츠에서 첫 아이들이 태어나자, 설립자들은 여성들이 출산과 육아로 인해 가사 노동에만 얽매이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의 유일한 생물학적 차이는 여성이 출산한다는 점이며, 이로 인해 여성이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가사에 묶인다고 생각했다. 여성들이 전통적인 모성 의무에서 벗어나 농업, 산업 등 다른 분야에서 계속 일할 기회를 주기 위해 공동 육아 시스템이 고안되었다.[25] 차유타 부셀은 "공동체 교육은 여성 해방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공동 식당과 공동 세탁실 역시 공동체 생활을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여성을 가사 노동 부담에서 해방시키려는 목적도 있었다.
공동 육아는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사는 대신, '베이트 옐라딤'(בית ילדים|베이트 옐라딤he, 어린이의 집)이라는 공동 시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훈련된 간호사와 교사의 보살핌 아래 배우고, 놀고, 잠을 잤다. 부모는 보통 일을 마친 후 저녁 식사 전에 하루 서너 시간 정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24] 이는 여성 해방뿐만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개인 소유물처럼 여기고 통제하려는 경향을 막고, 아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독립적인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돕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25] 또한 자녀가 아버지에게 경제적, 사회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가부장제를 뿌리 뽑는 방법으로 여겨졌다.[26] 부모가 유일한 훈육자가 아니므로 아이들과의 관계가 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공동 육아 시스템은 논란의 대상이기도 했다. 일부 공동 육아 경험자들은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이 정서적으로 힘들었다고 증언한다. 2007년 영화 《태양의 아이들》은 공동 육아를 경험한 성인들의 복잡한 감정을 담아내며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연구 결과도 엇갈린다. 폭스의 1977년 연구에 따르면, 키부츠 아이들은 어머니와 보호자(히브리어로 '메타펠레트') 모두와 분리될 때 불안을 보였지만, 재회 시 어머니에게 훨씬 강한 애착을 보였다. 이는 매일 부모와 보내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기숙 학교 아이들보다 부모와의 유대감이 높았음을 시사한다. 반면 샤르프의 연구는 공동체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가족과 함께 자란 아이들보다 상상된 분리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30] 공동 육아는 아이들의 최선의 이익보다는 성인들의 필요, 특히 성 평등 달성이라는 이념적 목표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는 비판도 있다.[31]
시간이 지나면서 키부츠에서 태어난 여성들은 전통적인 여성 역할을 수행하는 데 이전 세대보다 덜 거리꼈다. 1960년대 이후, 서구 사회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던 시기와 맞물려, 키부츠의 2세대 여성들은 오히려 전통적인 성 역할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공동 육아 시스템 폐지를 요구했고, 자신의 아이들을 집에서 직접 키우기를 원했다.[25] 다큐멘터리 '풀 서클'은 이러한 변화를 조명하며, 많은 여성들이 여성성과 모성의 "자연스러운 필요"를 이유로 가사 및 육아 중심으로 돌아갔다고 지적한다.[31] 오늘날 대부분의 키부츠에서는 공동 육아 시스템이 사라지고 가족 중심의 양육 방식이 자리 잡았다.
통계 자료는 키부츠 내 성별 직업 분리가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1979년까지 농업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은 9%에 불과했으며, 여성 노동력의 12%만이 생산 부서에 배치되었다 (1920년에는 50%였다). 반면 여성은 서비스 및 교육 종사자의 84%를 차지했다. 초기에는 여성들이 남성적인 일(밭일, 경비 등)을 수행하는 "여성의 남성화" 현상이 있었지만, 남성들이 보육 등 전통적인 여성의 일을 맡는 상응하는 "남성의 여성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학자 아놀드 W. 그린은 이러한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여성의 특정 직업군 집중 현상과 유사하다고 분석하며, 성 평등 이념을 가졌던 키부츠에서도 결국 전통적인 성 역할 분리가 나타났다고 지적했다.[36]
4. 3. 사회생활

키부츠의 사회생활은 공동체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등의 원칙은 1970년대까지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구성원들은 개인적으로 도구나 의류조차 소유하지 않았고, 외부로부터 받은 선물이나 소득은 공동 금고에 귀속되었다. 만약 구성원이 친척 방문이나 해외여행과 같은 서비스 형태의 선물을 받으면, 공동체 회의에서 이를 받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24]
재산뿐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이 공유되었다. 공동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은 공동 생활의 중요한 측면으로 여겨졌으며,[24] 비용이나 편의성 때문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가치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초기 일부 키부츠에서는 부부가 식당에서 함께 앉는 것조차 권장되지 않았는데, 결혼이 배타적인 관계를 드러낸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키부츠 식당에서는 벤치를 사용했는데, 이 역시 공동체 가치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개인 물품 소유는 엄격히 제한되었다. 예를 들어, 1950년대 키부츠 하르에서는 회원들에게 개인 주전자를 사주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는 비용 문제가 아니라 주전자를 소유하면 부부가 공동 식당 대신 개인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공동 소유였지만, 1950년대와 1960년대부터는 주전자, 책, 라디오 등 일부 개인 재산 소유가 허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동차와 같이 값비싼 물품은 여전히 공동 소유로 남아 필요시 신청을 통해 사용해야 했다.[27]
공동체 생활은 일부 구성원들에게 어려움을 주기도 했다. 개인 은행 계좌가 없었기 때문에 키부츠 매점에서 구매할 수 없는 물품은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이는 번거롭고 때로는 굴욕적인 경험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작고 고립된 공동체 특성상 사생활 부족 문제가 있었고, 규율적인 생활 방식으로 인해 소문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열심히 일하지 않거나 공동 재산을 남용하는 "기생충" 같은 구성원에 대한 불만도 항상 존재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공동체에 기여했으며, 무임승차자에 대한 주요 통제 수단은 여론이었다. 공동체에 기여하지 않는 사람은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고, 그들의 의견은 존중받지 못했으며 책임 있는 역할도 맡기 어려웠다.[27]
키부츠의 주요 결정은 합의나 투표로 이루어졌지만, 일상적인 작업 배치는 선출된 지도자들이 결정했다. 구성원들은 보통 식당에 게시된 근무표를 통해 자신의 임무를 확인했다. 초기 키부츠 회의는 활발한 토론의 장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업무 중심으로 바뀌고 참석률도 낮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키부츠는 구성원들이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도록 순환 근무를 시도했지만, 이는 전문성 확보에는 어려움을 주었다.[37]
키부츠에서 아이가 태어나면서 새로운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었다. 키부츠는 성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기에, 여성이 출산으로 인해 가정 영역에만 묶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여성들이 농업이나 산업 분야에서 계속 일할 기회를 주기 위해 공동 육아 시스템이 도입되었다.[25] 차유타 부셀은 "공동체 교육은 여성 해방을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또한, 부모가 자녀를 개인 소유물처럼 여기고 통제하려는 경향을 공동체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아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동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배우고, 놀고, 잠을 잤으며, 부모는 일을 마친 후 저녁 식사 전 하루 서너 시간 정도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24] 공동 육아는 아이들이 아버지의 경제적, 사회적 권위에 의존하지 않게 함으로써 가부장제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26] 어린이집에서는 훈련된 간호사와 교사가 양육을 담당했으며, 이를 통해 부모가 유일한 훈육자가 되지 않아 부모-자녀 관계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했다. 아이들은 공동체 환경 속에서 동년배 아이들과 함께 성장했고, 재정적 책임은 공동체가 분담했다.
키부츠 창립자들은 아이들을 위한 역동적인 교육을 추구했다. 키부츠 데가니아 창립자들은 "공식 교육에서 삶에서 얻은 지식으로, 책에서 육체적인 노동으로. 맹목적인 복종에 기반한 훈련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활동과 창조의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27] 어른들은 어린이집을 아이들의 진정한 집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연령대에 맞는 가구와 놀이 공간을 갖추었다.[24]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초기 발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아이의 개성, 창의성, 신뢰감 형성에 힘썼다.[28]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가족의 전통 대신 키부츠의 이념을 주입하여 개성보다는 획일성을 낳기도 했으며, 유대교 생활의 기반인 가족, 특히 핵가족과의 의식적인 단절을 의미하기도 했다. 공동 육아의 현실은 때로 이상과 달랐다. 창립자들은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다투고 장난감을 독차지하려는 모습을 보며 공동체 교육만으로는 이기적인 성향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29]
키부츠는 육체 노동과 지적 활동의 조화를 추구하며 "합성 인격"이라는 이상을 내세웠다. 이는 토지에 대한 애착, 노동의 즐거움, 예술과 과학, 문학에 대한 감상을 결합한 인간상을 의미했다.[32] 이로 인해 키부츠 구성원들의 평균적인 정규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적 수준은 일반적인 농촌 공동체보다 훨씬 높았으며, 밭에서의 대화에도 문학, 정치, 과학 등 지적인 주제가 오갔다.[32] 그러나 멜포드 스피로는 키부츠의 지성주의가 주로 소비적인 성격에 머물렀으며, 학문적 연구보다는 기존 지식의 소비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33] 초기에는 농업 중심이었기에 고등 교육의 중요성이 낮았지만, 제조업과 산업으로 전환하면서 대학 진학률이 높아졌다 (1978년 38%에서 1990년 54%로 증가).[34]
성에 대한 혐오감은 키부츠 이념의 일부가 아니었으나, 실제로는 보수적인 경향을 보였다. 브루노 베텔하임은 키부츠 소녀들이 신체 노출을 꺼리는 등 보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기록했다. 키부츠의 이혼율은 매우 낮았지만,[38] 공동 육아 환경에서 함께 자란 아이들 사이의 결혼율 역시 낮았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아이들이 서로를 잠재적 파트너로 인식하지 않는 베스터마르크 효과 때문으로 설명된다. 어린이 집에서 함께 자란 아이들은 서로를 형제자매처럼 여기며 밀접하고 지속적인 유대 관계를 맺었다.
키부츠는 처음부터 문화를 장려하고 예술을 육성하는 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많은 키부츠 구성원들이 작가, 배우, 예술가로 활동했으며, 키부츠 내에는 극단, 합창단, 오케스트라, 운동 리그 등이 운영되었다. 1953년 기바트 브레너 키부츠는 마카베오 반란에 관한 연극 '나의 영광스러운 형제들'을 공연하기 위해 언덕 위에 실제 마을과 같은 세트를 짓고 나무를 심었으며, 4만 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당시 키부츠의 관행에 따라 모든 배우는 키부츠 구성원이었고, 연기 활동은 그들의 노동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2009년 선거에서는 키부츠 구성원들의 표 대부분이 카디마, 노동당, 메레츠와 같은 중도 및 좌파 정당으로 향했다.[23]
5. 경제
키부츠는 사회주의와 시오니즘이 결합된 노동 시오니즘의 형태로 탄생한 이스라엘 특유의 사회 실험이자,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자발적 공동체 운동 중 하나이다.[59] 1909년 갈릴리 호수 남쪽에 최초의 키부츠인 데가니아가 설립된 이래, 키부츠는 생산적인 자력 노동, 집단 책임, 평등, 기회 균등이라는 원칙 아래 운영되었다. 초기에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농업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유지했으나, 점차 제조업, 관광업 등으로 경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전통적으로 키부츠는 구성원의 필요를 공동으로 충족하고 노동은 무보수로 이루어지는 공동체 경제를 지향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많은 키부츠가 심각한 재정 위기를 겪으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1990년대 이후 시장 경제 원리가 도입되면서, 많은 키부츠에서 재산의 일부 사유화, 차등 임금제 도입, 가족 단위 육아로의 전환 등이 이루어졌다.[59] 이러한 변화는 키부츠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 과정 속에서 키부츠는 운영 방식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44][45]
- '''키부츠 시투피''' (קיבוץ שיתופי|키부츠 시투피he): 전통적인 공동 생산 및 소비의 협동 시스템을 유지하는 키부츠. 예전 방식을 고수하는 키부츠는 약 45개 정도 남아있다.[59]
- '''키부츠 미트차데쉬''' (קיבוץ מתחדש|키부츠 미트차데쉬he): 생산 수단과 토지 등 핵심 자산은 공유하지만, 급여 차등화, 개인 예산 허용 등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하여 '갱신'된 키부츠.
- '''도시 키부츠''' (קיבוץ עירוני|키부츠 이루니he): 도시 내에 위치하며, 구성원들은 외부에서 각자 직업을 가지고 일하며 공동체 생활만 영위하는 형태.
현재 "키부츠 운동", "키부츠 산업 협회"와 같은 전국 조직이 활동하고 있으며, 2016년 기준 282개의 키부츠에 17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59]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키부츠는 여전히 이스라엘 경제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이스라엘 전체 농업 생산량의 약 40%(17억달러)와 제조업 생산량의 약 9%(80억달러)를 차지하며[4], 특히 점적 관개 기술을 개발한 네타핌처럼 세계적인 기업을 배출하기도 했다.[5] 또한, 키부츠와 모샤브는 이스라엘의 높은 식량 자급률(90% 이상)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61] 한때 키부츠와 모샤브가 소유했던 식품 대기업 츠누바가 외국 자본에 매각된 사례[60]는 키부츠 경제의 변화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키부츠는 콜호스나 인민공사와 같은 다른 나라의 집단 농장과 달리 자발성에 기반하여 시작되었으며, 이스라엘 건국과 사회 발전에 기여한 독특한 공동체 모델로 평가받는다.
5. 1. 농업
키부츠 운동 초기, 빌루 운동 회원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농업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는 앞서 제1차 알리야 (1881-1903) 시기에 정착하여 농업 마을을 세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제2차 알리야 (1904-1914) 이민자들 대부분이 농부가 되기를 계획했던 것과 같다. 당시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농업은 거의 유일하게 가능한 직업이었다.
최초의 키부츠는 1910년에 갈릴리 호수 남쪽에 세워진 데가니아 알레프였다.[6] 초기 정착민들은 혹독한 환경에 직면했다. 갈릴리 지역은 늪지대였고, 유대 산맥은 바위투성이였으며, 남쪽의 네게브는 사막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농사 경험이 부족했고, 말라리아, 티푸스, 콜레라와 같은 질병이 만연하여 위생 상태도 열악했다. 베두인들의 습격으로 농장과 정착지가 약탈당하고 관개 시설이 파괴되거나 작물이 불타는 일도 잦았다. 이러한 척박하고 위험한 환경에서 안전을 확보하고 자본이 많이 드는 농장을 설립하기 위해, 공동으로 생활하고 일하는 방식은 필수적이었다. 키부츠 설립자들은 유대 민족 기금을 통해 전 세계 유대인들의 기부로 마련된 자금으로 토지를 구매하여 공동체를 일구었다.
데가니아의 설립자들은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다. 한 선구자는 "몸은 짓눌리고, 다리는 풀리고, 머리가 아프고, 태양이 타서 약해진다"고 기록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키부츠는 점차 자리를 잡았고, 1914년 데가니아의 회원은 50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갈릴리 호수 주변과 예즈르엘 계곡 등지에 다른 키부츠들이 설립되었다. 제3차 알리야 (1919-1923) 시기에는 러시아 혁명 이후 동유럽 등지에서 온, 출발 전에 농업 훈련을 받은 청년들이 합류하면서 키부츠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
초기 키부츠는 달걀, 유제품, 과일, 육류 등 모든 농산물을 자급자족하려 했으나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점차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키부츠는 농업 외에 제조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데가니아 알레프 키부츠는 다이아몬드 절단 도구 공장을 세웠고, 하체림 키부츠는 점적 관수 장비 공장을 설립하여 세계적인 기업 네타핌으로 성장시켰다. 네타핌은 연간 3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다국적 기업이 되었다. 1960년대에는 키부츠 산업화가 본격화되었고, 2012년 기준으로 키부츠 구성원 중 농업 종사자는 15%에 불과할 정도로 산업 구조가 변화했다.[41]
수확철 등 일손이 부족할 때는 외부 노동자를 고용했는데, 이는 유대인의 노동을 중시했던 초기 이념과 충돌하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10년대 데가니아 키부츠는 집을 짓기 위해 유대인 석공을 찾지 못해 아랍인을 고용한 사례도 있었다. 1970년대에는 아랍인 노동자를, 1990년대 이후로는 태국, 중국 등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오늘날 키부츠는 이스라엘 농업 생산량의 약 40% (17억달러 이상)를 담당하며[4], 이스라엘의 높은 식량 자급률 (90% 이상)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61] 특히 점적 관개와 같은 첨단 농업 기술 개발과 보급을 통해 이스라엘 농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농업 외에도 제조업, 관광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스라엘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약 200명의 회원이 있는 사사 키부츠는 군수용 플라스틱 산업으로 2010년 연간 8.5억달러의 수익을 창출했다.[5] 또한 로탄 키부츠나 크파르 루핀처럼 조류 관찰이나 생태 관광 상품을 개발하여 관광업으로 영역을 넓힌 키부츠도 있다. 케투라 키부츠는 이스라엘의 태양광 기술 개발을 선도하고 있다.[43]
5. 2. 산업화
초기 키부츠는 달걀, 유제품, 과일, 육류 등 모든 농산물에 대해 자급자족하려 했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토지는 주로 유대 민족 기금에서 제공받았으며, 이후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게 되었다.이스라엘 국가가 설립되기 전부터 키부츠는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데가니아 알레프 키부츠는 연간 수백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다이아몬드 절단 도구 공장을 열었다. 하체림 키부츠는 점적 관수 장비 공장을 운영하는데, 여기서 시작된 네타핌은 연간 3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마간 미카엘 키부츠는 총알 제조에서 시작하여 플라스틱 및 의료 도구 제조, 울판(히브리어 교육 기관) 운영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으며, 이 기업들은 연간 1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린다.
1960년대에는 키부츠 산업화의 큰 물결이 일어났고, 2012년 기준으로 키부츠 구성원의 15%만이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41]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계절 근로자 고용 문제가 발생했다. 초기 키부츠 운동은 유대인의 육체 노동을 강조했기에 외부 노동력 고용은 논란의 대상이었으나,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아랍인 노동자를 고용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부터는 태국, 중국 등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팀이 투입되기도 했다.
오늘날 키부츠는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키부츠의 공장과 농장은 이스라엘 전체 산업 생산량의 9% (80억달러), 농업 생산량의 40% (17억달러 이상)를 차지한다.[4] 예를 들어, 약 200명의 구성원이 있는 사사 키부츠는 군사 플라스틱 산업에서 2010년 기준 연간 8.5억달러의 수익을 창출했다.[5] 케투라 키부츠는 이스라엘의 태양광 기술 개발을 선도하며 인기 있는 에코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43]
관광업 역시 키부츠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키르얏 아나빔, 라비, 나흐숄림 등을 포함한 많은 키부츠가 주택을 임대하거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다. 로탄 키부츠와 크파르 루핀과 같은 일부 키부츠는 조류 관찰 휴가나 에코 투어를 운영하며, 진흙집이나 퇴비화 화장실 같은 지속 가능한 기술을 선보이기도 한다.
한편, 키부츠에서 시작된 기업이 외부 자본에 인수되는 사례도 나타났다. 이스라엘 최대 식품 기업 중 하나였던 츠누바(Tnuva)는 원래 키부츠와 모샤브가 소유한 협동조합이었으나, 유한 회사로 전환된 후 2014년 중국의 광명식품집단(Bright Food)에 인수되었다.[60]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부츠와 모샤브는 여전히 이스라엘 농업 생산의 약 80%를 담당하며 90%가 넘는 식량 자급률 달성에 기여하고 있다.[61]
5. 3. 관광업 및 기타 사업
이스라엘 국가 수립 이전부터 키부츠는 전통적인 농업 중심에서 벗어나 제조업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데가니아 알레프 키부츠는 연간 수백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다이아몬드 절단 도구 공장을 운영했으며, 하체림 키부츠는 세계적인 점적 관수 기업인 네타핌의 모태가 되었다. 네타핌은 연간 3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는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또한 마간 미카엘 키부츠는 플라스틱, 의료 도구 제조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여 연간 1억달러 이상의 수익을 창출했다. 1960년대에는 키부츠 산업화가 본격화되었으며, 2012년 기준으로 농업 종사자는 키부츠 전체 구성원의 15% 수준으로 감소했다.[41]제조업 외에도 키부츠는 관광업을 새로운 수입원으로 개발했다. 키르얏 아나빔, 라비, 나흐숄림 등의 키부츠가 관광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많은 키부츠가 숙박 시설 운영을 위해 주택을 임대하거나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로탄 키부츠나 크파르 루핀과 같은 곳에서는 조류 관찰 휴가나 생태 관광(에코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진흙집 건설이나 퇴비화 화장실 같은 지속 가능한 기술을 선보이기도 한다. 케투라 키부츠는 이스라엘의 태양광 기술 개발을 선도하는 동시에 인기 있는 생태 관광 명소로도 자리 잡았다.[43]
오늘날 일부 키부츠는 주요 산업 벤처를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이스라엘 전체 산업 생산량의 9% (약 80억달러), 농업 생산량의 40% (약 17억달러 이상)를 담당하고 있다.[4] 예를 들어, 약 200명의 회원을 보유한 사사 키부츠는 2010년 군수용 플라스틱 산업 분야에서 연간 8.5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다.[5]
점적 관개 시스템 분야의 세계적 기업인 네타핌처럼 키부츠에서 시작하여 크게 성장한 기업들이 많다. 한때 키부츠와 모샤브가 공동 소유했던 이스라엘 최대 식품 기업 츠누바(Tnuva)는 유한 회사로 전환된 후 2014년 중국의 광명식품집단에 인수되기도 했다.[60] 팔레스타인 문제 등으로 주변 이슬람 국가들과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90%가 넘는 식량 자급률을 유지하는 데에는, 농업 생산의 약 80%를 담당하는 키부츠와 모샤브의 역할이 크다.[61]
6. 현대 키부츠의 변화와 유형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키부츠의 번영기였다. 구성원들은 농업 등 육체노동에 종사하면서도 중산층 수준의 생활을 누렸고[15], 당시 이스라엘 전체 인구보다 생활 수준 향상 속도가 더 빨랐다. 사회적 영향력도 커서, 인구의 4%에 불과했지만 크네세트 의석의 15%를 차지하기도 했다.[15] 이 시기 키부츠는 사회주의적 이상향으로 여겨져 해외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59]
그러나 1980년대에 많은 키부츠가 심각한 재정 위기에 직면하며 변화의 필요성이 커졌다.[59] 이는 이스라엘 경제 전반의 침체와 더불어 키부츠 내부의 구조적 문제, 냉전 시기부터 이어진 이념 갈등[14], 사회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배상금 처리 문제처럼 공동체 내 평등 원칙에 대한 도전도 있었다. 또한 키부츠 경제가 제조업 등으로 다각화되면서 고등 교육의 중요성이 커졌으나, 경제난으로 기존의 복지 시스템 유지가 어려워진[34] 현실적 문제도 변화를 재촉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키부츠는 생존을 위해 다양한 변화를 모색했다. 1990년대 이후 많은 키부츠가 시장 경제 원리를 받아들이고 운영 방식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59] 농업 외에 공업, 관광업 등으로 사업 분야를 확장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59], 점적 관개 시스템 기업 네타핌처럼 키부츠에서 출발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도 나왔다. 과거 키부츠와 모샤브가 공동 소유했던 식품 대기업 츠누바는 민영화 후 2014년 중국 기업인 광명식품집단에 인수되기도 했다.[60]
그 결과 오늘날 키부츠는 과거와 달리 다양한 형태로 운영된다. 상당수는 일반 기업이나 마을과 유사한 모습을 띠지만, 전통적인 공동체 방식을 유지하는 곳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2016년 기준 이스라엘 전역에는 약 282개의 키부츠가 있으며, 17만 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59] 이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농업 생산의 약 80%를 담당하며[61]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6. 1. '새로운 키부츠' 모델
1980년대에 많은 키부츠가 재정적인 위기에 직면하면서 변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59] 1990년대부터 많은 키부츠가 '새로운 키부츠' 모델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 모델은 시장 경제 원리를 일부 받아들여 사유 재산의 범위를 넓히고, 구성원의 노동 기여도에 따라 차등적인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전통적인 공동 육아에서 벗어나 가족 단위의 육아 방식으로 전환하는 곳이 늘어났으며, 농업 중심에서 벗어나 공업이나 관광업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경향을 보였다.[59]이러한 변화를 거치면서 오늘날 대부분의 키부츠는 설립 초기의 이상향적인 공동체 모습과는 달리 일반적인 기업이나 마을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택과 재산을 공유하는 전통적인 공동체 방식을 고수하는 키부츠도 일부 존재한다.[59]
6. 2. 협동 모델 (키부츠 시투피)
협동 모델은 키부츠의 전통적인 운영 방식으로, 공동체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다. 1909년 갈릴리 호수 남쪽에 최초의 공동 마을 데가니아가 설립되면서 시작된 초기 키부츠의 형태를 따른다. 구성원들은 생산적인 자력 노동, 집단 책임, 신분의 평등, 기회 균등이라는 4대 원칙에 기초하여 공동체 생활을 영위한다.초기 키부츠에서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공동체에 의해 무료로 보장되었으며, 구성원의 노동은 보수 없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모델은 사회주의와 시오니즘이 결합된 노동 시오니즘 이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발적인 참여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콜호스나 인민공사와 같은 다른 형태의 집단 공동체와 구별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키부츠가 재산의 사유화, 급여제 도입, 가족 단위 육아 등으로 변화하였고, 농업 외 분야에서의 창업도 확대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택과 재산을 공유하며 공동 소유, 공동 노동, 공동 분배 원칙을 따르는 전통적인 방식의 키부츠들이 존재한다. 2016년 기준으로 약 45개의 키부츠가 이러한 예전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59]
6. 3. 도시 키부츠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도시 키부츠'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7. 한국과의 관련성 및 시사점
키부츠는 이스라엘 특유의 집단 농업 공동체로, 1909년 갈릴리 호수 남쪽에 세워진 데가니아에서 시작되었다. 초기 키부츠는 제정 러시아 등지에서의 박해를 피해 온 젊은 유대인들이 시오니즘 이념 아래 생산적인 자력 노동, 집단 책임, 신분의 평등, 기회 균등이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건설한 공동체였다.[21][23] 이들은 단순한 정착촌 건설을 넘어, 사회주의와 시오니즘이 결합된 노동 시오니즘을 실현하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키부츠는 이스라엘 건국과 사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인구 비율은 높지 않았지만, 많은 군 지도자, 지식인, 정치가를 배출했으며,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 여성 총리 골다 메이어 등이 키부츠 출신이다. 한때 키부츠 구성원은 이스라엘 의회 의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모샤브와 함께 이스라엘 농업 생산의 약 80%를 담당하며 높은 식량 자급률 달성에 크게 기여했다.[61] 점적 관개 기술을 개발한 네타핌처럼 키부츠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도 있다.[41]
초기 키부츠는 공동 소유와 공동 노동, 무보수 노동, 공동 육아 등 철저한 공동체주의를 추구했으나, 시대 변화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많은 키부츠가 변화를 겪었다. 1980년대 재정 위기 이후 재산의 사유화, 급여제 도입, 가족 단위 육아 전환 등이 이루어졌으며[59], 농업 외에 공업, 관광업 등으로 사업 분야를 다각화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키부츠는 '공동 키부츠'(Kibbutz Shitufi)와 '갱신 키부츠'(Kibbutz Mitchadesh) 등 다양한 형태로 분화하며[46][47][48] 공동체 모델의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키부츠의 경험은 공동체적 가치를 바탕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 여러 시사점을 제공한다. 자발적인 참여에 기반한 공동체 운영 방식, 협동조합 모델을 통한 경제 활동, 농업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향상 등은 다른 사회에서도 참고할 만한 사례이다. 특히, 키부츠가 보여준 공동체 정신과 사회적 연대는 한국 사회가 농촌 문제 해결, 사회적 경제 활성화, 공동체 회복 등 다양한 과제를 모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영감을 줄 수 있다. 키부츠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변화 과정 모두는 새로운 공동체 모델을 고민하는 데 귀중한 교훈을 제공한다.
7. 1. 농촌 공동체 모델로서의 가능성
일부 키부츠는 기존의 운영 방식과 법적 지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변화를 겪기도 했다. 예를 들어, 헤르츨리야 인근의 길릴 얌 키부츠는 사유화 문제로 법적 절차를 밟았으며, 1999년 베이트 오렌 키부츠의 일부 구성원들은 키부츠가 차등 임금제 도입, 공동 식당 폐쇄, 교육 및 기타 서비스 사유화 등 생활 방식에 큰 변화를 겪었다고 주장하며, 이를 키부츠가 아닌 다른 형태의 협동조합으로 재분류해 달라고 이스라엘 대법원에 청원했다. 이들은 이러한 변화가 소비의 평등이라는 키부츠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해당 키부츠 측은 재정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변화가 불가피했지만, 키부츠의 기본 원칙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고 반박했다.[46][47]이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 정부는 텔아비브 대학교 교수 엘리에제르 벤-라파엘을 위원장으로 하는 "벤-라파엘 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키부츠의 변화하는 현실에 맞는 새로운 법적 정의를 마련하고, 키부츠 구성원에게 아파트 분배 방식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위원회는 보고서를 통해 기존 키부츠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법적 분류를 제안했다.
- '''공동 키부츠''' (Kibbutz Shitufi): 전통적인 키부츠의 정의를 따르는 형태로, 소유권의 공동 관리, 자급자족, 생산, 소비, 교육에서의 평등과 협동을 기반으로 조직된 정착 사회를 의미한다.
- '''갱신 키부츠''' (Kibbutz Mitchadesh): '공동 키부츠'의 기본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구성원 간 상호 보증을 유지한다는 전제 하에 생활 방식의 변화와 발전을 포용한 형태이다. 정관에 따라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다.
- 개인의 기여도나 근속 연수를 반영한 상대적 임금
- 토지와 물을 제외한 생산 수단의 구성원 할당
- 생산 할당량 배분 (단, 협동조합이 생산 수단을 통제하고 할당된 수단의 거래 가능성을 제한해야 함)
이러한 위원회의 권고안은 2004년 이스라엘 내각에서 받아들여졌다.[48] 이는 키부츠가 시대적 변화와 내부 요구에 따라 유연하게 형태를 조정하며 공동체 모델로서 지속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7. 2. 식량 자급률 향상에의 기여
이스라엘은 주변 이슬람 국가들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상황에서도 90%가 넘는 높은 식량 자급률을 유지하고 있다.[61] 이러한 높은 식량 자급률 달성에 키부츠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키부츠의 농장은 이스라엘 전체 농업 생산량의 40% (17억달러 이상)를 차지하며[4], 모샤브와 함께 이스라엘 농업 생산의 약 80%를 담당하고 있다.[61]초창기 키부츠는 모든 농산물에 대해 자급자족을 시도했으나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점적 관수 기술을 개발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네타핌(Netafim)의 사례처럼[41], 키부츠는 농업 기술 혁신을 통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해왔다. 현재 키부츠는 농업 외에도 제조업, 관광업 등으로 사업 분야를 확장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의 식량 생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7. 3.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 가치

1909년, 제정 러시아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젊은 유대인들은 갈릴리 호수 남쪽에 최초의 공동 마을인 데가니아를 세우며 키부츠의 역사를 시작했다. 이들은 생산적인 자력 노동, 집단 책임, 신분의 평등, 기회 균등이라는 4대 원칙을 바탕으로 공동체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는 단순한 정착촌 건설을 넘어, 시오니즘 이념을 실현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키부츠는 사회주의와 시오니즘이 결합된 노동 시오니즘의 산물로, 이스라엘 특유의 사회 실험이자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동체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초기 키부츠 구성원들은 유대교적, 사회주의적 이념에 따라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으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들의 노동 윤리는 종교적 관습을 대체할 정도였으며, 베를 카츠넬슨은 "유대인 노동자가 가는 곳마다 신의 임재가 함께한다"고 말하기도 했다.[21] 키부츠는 내부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고, 구성원들은 키부츠 운영과 관련된 선거에 참여했으며, 이스라엘 전국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3]
키부츠는 단순한 농업 공동체를 넘어 이스라엘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인구 비율에 비해 많은 수의 군 지도자, 지식인, 정치가를 배출했다.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과 여성 총리 골다 메이어 등이 키부츠 출신이다. 한때 키부츠 구성원은 전체 인구의 4% 미만이었지만 이스라엘 의회 의석의 15%를 차지하기도 했다. 비록 키부츠 인구가 전체의 7%를 넘은 적은 없지만,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동체로 자리 잡았다. 또한, 모샤브와 함께 이스라엘 농업 생산의 약 80%를 담당하며 식량 자급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61]
시간이 흐르면서 키부츠는 변화를 겪었다. 1980년대 재정 위기를 겪으며 많은 키부츠가 재산의 사유화, 급여제 도입, 가족 단위 육아로 전환하는 등 변화를 모색했다.[59] 이로 인해 '갱신 키부츠'라는 새로운 형태가 등장했으며, 이는 구성원 간의 상호 보장과 평등이라는 기본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생활 방식의 변화를 수용한 모델이다.[46][47][48] 물론, 주택과 재산을 공유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공동 키부츠'도 여전히 존재한다.[59]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키부츠는 여전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중요한 공동체 모델로 기능하며, 협동과 연대의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
8. 비판과 논란
키부츠 운동은 이스라엘 외 지역에서도 시도되었으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프랑스 쥐갈-나자레 마을에는 프랑스 유일의 유대인 키부츠였던 Macar|마카르프랑스어가 존재했다.[52] 로버트 드 로스차일드 남작의 지원으로 설립된 이 키부츠는, 당시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지정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프랑스 젊은 유대인들에게 농업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독일 출신 유대인 난민이 다수였지만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 헝가리, 네덜란드, 체코, 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유대인 약 500명에서 800명이 모여 75ha의 땅을 경작했다.[53]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반유대주의가 확산되고, 지역 부현감이었던 Roger Dutruch|로제 뒤트루슈프랑스어의 외국인 혐오적 태도로 인해 결국 마카르는 문을 닫아야 했다. 이는 키부츠 공동체가 외부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후 대부분의 주민들은 아옐레트 하샤하르 키부츠로 이주했다.[54]
또한, 1960년부터 1963년까지 프랑스 파르다이얀에서는 이스라엘 키부츠에서 영감을 받은 얀센주의 가톨릭 공동체인 La Famille|라 파미유프랑스어가 뱅상 티보에 의해 설립되기도 했다.[55] 그는 이후 말레베르에도 키부츠 모델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다.
8. 1. 경제적 어려움과 사유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사회주의적인 이상향으로 여겨졌던 키부츠는 1980년대에 들어 많은 곳이 재정적인 위기에 직면했다.[59]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1990년대부터 키부츠의 운영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재산의 사유화가 진행되었고, 구성원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급여를 지급하는 제도가 도입되었다. 또한, 전통적인 공동 육아 방식에서 벗어나 가족 단위의 육아가 일반화되었으며, 농업 외 다른 산업 분야에서의 창업도 활발해졌다.[59]이러한 변화 과정에서 일부 키부츠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초기의 사회주의 원칙에서 벗어나 자본주의적 경영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키부츠 샤미르는 광학 제품 회사를 소유하여 미국 NASDAQ 증권 거래소에 상장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많은 키부츠가 기존의 농업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상업 및 산업 활동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키부츠 소유의 부지에 쇼핑몰이나 공장을 건설하여 키부츠 회원이 아닌 외부인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고용하고, 토지 임대나 판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이러한 시장 경제 원리 도입에 소극적이거나 참여하지 않은 키부츠들은 생존을 위해 정부의 보조금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많은 키부츠가 자급자족이라는 이상을 완전히 실현하지 못하고 농업이나 공장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외부에서 고용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특히 키부츠 회원이 아닌 아랍인 노동자를 고용하면서도 그들에게 정식 회원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문제는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 다수의 키부츠는 설립 초기에 추구했던 공동체적 이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일반적인 자본주의 기업이나 마을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45개의 키부츠는 주택과 재산을 공유하는 등 전통적인 공동체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2016년 기준).[59]
한편, 키부츠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사례도 존재한다. 점적 관개 시스템 분야의 선두 기업인 네타핌이 대표적이다. 반면, 키부츠와 모샤브가 공동으로 소유했던 이스라엘의 주요 식품 협동조합인 츠누바(Tnuva)는 유한 회사로 전환된 후, 2014년 중국의 국영 기업인 광명식품집단(Bright Food)에 인수되기도 했다.[60]
8. 2. 외부 노동력 고용 문제
키부츠는 설립 초기부터 공동체적 이상을 추구했지만, 현실적인 운영 과정에서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외부 노동력 고용 문제는 키부츠의 평등주의 원칙과 충돌하는 지점으로 지적되었다.[57] 대부분의 키부츠는 완전한 자급자족을 이루기 어려웠고, 농업이나 공장 운영을 위해 키부츠 회원이 아닌 외부 인력을 고용해야 했다.[57] 이러한 외부 노동력 고용 자체도 공동체 원칙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지만, 특히 아랍인 노동자를 고용하면서 그들에게 정식 회원 자격을 부여하지 않은 점은 심각한 차별 문제로 비판받았다.[57] 이는 모든 구성원의 평등을 강조하는 키부츠의 근본 이념에 배치되는 행태였기 때문이다.[57]8. 3. 순응주의와 개성 부족
키부츠 생활에서 집단 순응 압력은 특히 강하다는 비판이 있다.[39][40]키부츠의 심리적 생활에 대해 연구한 멜포드 E. 스피로(1958), 브루노 베텔하임(1969), 마이클 베이저먼(1963) 등은 키부츠에서 자란 사람들이 이후 사랑에 빠지는 것이나 지속적인 우정을 형성하는 것과 같은 강한 정서적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반면, 이들은 덜 깊이 관여하는 다수의 우정을 맺고 더 활발한 사교 생활을 하는 것을 더 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밀접한 공동체에서 함께 자란 아이들이 서로를 얼서츠 형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으며, 이로 인해 성인이 되면 공동체 밖에서 배우자를 찾기를 선호한다고 결론지었다. 어릴 때부터 매일 함께 생활하는 것이 베스터마르크 효과의 극단적인 형태로 작용하여, 십대 키부츠 구성원들 사이의 성적 매력을 감소시킨다는 이론도 제기되었다. 키부츠 내부에서 배우자를 찾지 못하는 경향은 젊은이들이 성인이 되어 키부츠를 떠나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한다.
키부츠 교육이 재능 있는 아이들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돕는지에 대한 논쟁이 키부츠 운동 내부에서 있었다. 일부 키부츠에서 자란 아이들은 공동체 시스템이 개인의 야망을 억눌렀다고 회상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똑한 아이들이 격려를 받았다고 말한다. 브루노 베텔하임은 그의 저서 ''꿈의 아이들''(1969)에서 키부츠 교육이 창의성이나 뛰어난 성취보다는 평범함을 낳을 것이라고 예측하며, "[키부츠 아이들은] 지도자나 철학자가 되지 못할 것이고, 과학이나 예술 분야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베텔하임의 예측과는 달리, 키부츠가 이스라엘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낮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키부츠 출신들이 교사, 변호사, 의사, 그리고 정치 지도자가 되었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1990년대에 한 저널리스트가 베텔하임이 1960년대에 "키부츠 아티드"(현재 라마트 요하난 키부츠)에서 인터뷰했던 특정 학급의 아이들을 추적했다. 그 저널리스트는 그 아이들이 학문, 사업, 음악, 그리고 군대에서 매우 성공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베텔하임은 완전히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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