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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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자주의는 두 국가 간의 관계를 의미하며, 다자주의와 비교하여 유연성과 용이성을 갖는 특징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양자 조약의 문제점이 제기되며 다자주의가 부상했지만, 외교는 여전히 양자 수준에서 많이 이루어진다. 양자 관계는 외교, 경제, 군사/안보, 문화/사회 등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며, 호주-캐나다, 인도-네팔, 미국-동아시아 국가 관계 등이 주요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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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주의는 여러 국가가 특정 원칙에 따라 협력하는 것으로, 강대국을 구속하고 소국에게 영향력을 부여하며 국제연합과 세계무역기구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지만, 최근 일방주의와 포퓰리즘 강화로 도전에 직면해 있다. - 국제관계론 - 마르크스주의 국제 관계 이론
마르크스주의 국제 관계 이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기반으로 자본주의적 세계화가 국제 체제 불안정을 심화시킨다고 보며, 유물사관을 통해 국제 체제의 구조와 경제 역할을 강조하고, 다양한 갈래로 발전하여 주류 이론을 비판하며 불평등과 권력 구조 분석 및 사회 정의 실현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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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쌍무주의와 다자주의 중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랜 논쟁이 있어왔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많은 정치인들은 전쟁 전의 양자 조약에 따른 복잡한 이해관계 대립으로 인해 전쟁이 불가피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는 국제 연맹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나, 26년 만에 해체되었다.
대공황 이후, 양자 무역이 경기 후퇴를 심화시키는 세율 상승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방 국가들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과 같은 다자간 무역 협정을 맺었다.
국제 연합이나 세계 무역 기구와 같은 현대적인 다자간 협정이 주목받고 있지만, 대부분의 외교 관계는 양자 간에 맺어진다. 양자주의는 다자간 협정에는 없는 유연성과 운영의 용이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영향력, 자원, 경제력, 군사력, 기술 등의 불균형은 양자 간 외교에서 더 큰 힘을 가진 국가가 이용하기 쉽다. 영향력이 큰 국가는 각국이 1표의 투표권을 가지는 다자 외교보다 양자주의를 더 선호한다.[8]
2. 1. 제1차 세계 대전과 다자주의의 대두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많은 정치인들은 전쟁 전의 복잡한 쌍무 조약 시스템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는 다자주의의 대두를 촉진하여 국제 연맹의 설립으로 이어졌다.[8]2. 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방 국가들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과 같은 다자간 협정으로 전환했다.국제 연합이나 세계 무역 기구와 같은 현대적인 다자간 협정이 주목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외교는 여전히 양자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쌍무주의는 다자간 시스템에 부족한 유연성과 용이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권력, 자원, 돈, 무기 또는 기술의 격차는 쌍무 외교에서 더 강력한 측에서 더 쉽게 활용될 수 있으며, 강력한 국가는 하나의 국가에 한 표를 행사하는 규칙이 적용되는 합의 기반의 다자간 외교 형태에 비해 이를 긍정적인 측면으로 간주할 수 있다.
2017년 연구에 따르면, "이중 과세를 피하고 국제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국가 간의 정책을 조정"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쌍무 조세 조약조차도 "다국적 기업이 조약 쇼핑을 할 수 있게 하고, 국가의 재정적 자율성을 제한하며, 정부가 더 낮은 세율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8]
2. 3. 현대의 양자 관계
호주와 캐나다는 비슷한 정부 형태와 가치를 공유하며, 동일한 국가 원수를 모시는 양자 관계를 맺고 있다. 1895년 캐나다는 무역 위원회 설립을 위해 존 라케를 시드니로 보냈고, 1935년 찰스 버첼을 호주 최초의 캐나다 고등 판무관으로 파견하여 양국 관계를 공식화했다.[2] 양국은 전시 동맹국이었으며, 무역 및 경제 관계가 튼튼하다.인도와 네팔은 부처 탄생 이전인 고대 시대부터 양자 관계를 맺어 왔다. 현대에는 1950년 인도-네팔 우호 조약 체결 등으로 이러한 전통적인 관계가 문서화되었다. 2011년에는 양자 투자 증진 및 보호 협정을 체결했다. 양국 시민은 여권이나 비자 없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으며, 어느 국가에서든 거주, 사업, 재산 소유가 가능하다. 구르카는 인도 육군의 일부를 구성하며, 수백만 명의 네팔인이 인도에서 오랫동안 거주하고 있다.[3]
미국은 여러 동아시아 국가, 특히 한국, 일본, 대만과 양자 관계를 맺고 있다. 미일 안보 조약을 통해 일본과, 미국-대한민국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한국과, 중미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중화민국과 양자 동맹을 맺었다.[4] 북대서양 조약 기구 중심의 다자주의 동맹을 맺는 유럽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각 동아시아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선호하는데, 이는 동아시아 국가 간의 역사적,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다자 동맹 구축이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은 "허브 앤 스포크" 모델처럼, 각 국가와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형태를 선호한다.[5]
미국이 동아시아 국가와 양자 관계를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미국은 유럽 국가들과 이미 오래 지속된 관계를 맺고 있어 다자주의적 유대를 구축하기 쉬웠다. 빅터 차는 "애치슨은 NATO가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과정의 산물이며, 서유럽 열강들이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집단 방어를 위한 계획을 신중하게 개발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NATO를 상호 집단 방위 협정으로 간주했다는 점을 주장했다."[5]라고 말한다. 둘째, 동아시아는 넓은 공간에 국가가 분열되어 있고, 넓은 수역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다자적 유대 형성에 불리하다. 셋째, 동아시아에는 다양한 정권이 존재하여 민주주의 국가로 구성된 NATO 국가들과 비교할 때 다자 관계 형성이 어렵다. 넷째, NATO 국가들은 소련이라는 동일한 위협을 인식했지만, 동아시아의 경우 통일된 위협이 없었다. 중화민국은 중국, 한국은 북한을 위협으로 여겼다. 일부 사회 역사가들은 미국 의사 결정자들이 "열등한" 아시아인들은 복잡한 다자 안보 체제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정교함과 책임을 갖지 못했다고 확신했다고 덧붙였다. 크리스토퍼 헴머와 피터 J. 카젠스타인은 "신뢰가 부재했고, 종교와 국내 가치는 소수의 경우에만 공유되었으며, 인종은 미국과 아시아를 분리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고 결론지었다.[6]
빅터 차는 파워플레이 이론을 제시하여 미국의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양자 동맹 결정 배경을 설명했다. 파워플레이 이론에 따르면, 동맹은 잠재적인 반동 국가(rogue state)의 공격적인 행동을 억제하고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반동 동맹국에는 대만의 장제스, 한국의 이승만이 포함된다. 미국은 또한 일본이 아시아에서 지역 강국을 회복할 것을 우려했다. 차는 전후 미국의 계획자들이 동아시아 친 서방 독재자들의 침략을 막고 미국의 경제에 대한 지렛대와 국가의 의존도를 높이기 위해 이러한 유형의 안보 구조를 선택했다고 결론짓는다.
미일 동맹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과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양자 안보 질서였다. 미국은 일본과 다른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에게 외교, 경제, 물류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안보 보호와 미국 시장, 기술, 공급품에 대한 접근을 제공했다. 존 아이켄베리에 따르면, 이는 "더 넓은 미국 중심의 반공주의 전후 질서"로 이어질 것이다.[7]
미국은 파나마와의 양자 협정 역사도 가지고 있으며, 헤이-부노바리야 조약(1903년)에서 시작되었다. 이 조약은 파나마 운하의 영구 중립 및 운영에 관한 조약과 파나마 운하 조약(1977년 서명)으로 대체되었다. 양자 투자 조약 개정안은 2000년에 양국에 의해 서명되었으며, 두 국가의 다양한 법 집행 및 금융 기관 간에 몇 개의 더 제한적인 협정이 서명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많은 정치인들이 복잡한 전쟁 전 양자 조약 시스템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결론지으면서 양자주의에 대한 거부가 일어났다. 이는 국제 연맹 창설로 이어졌지만, 26년 만에 실패로 해체되었다. 대공황 이후, 양자 무역 협정이 경제 침체를 심화시키는 관세 인상 주기를 낳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방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과 같은 다자간 협정으로 전환했다.
국제 연합과 세계 무역 기구와 같은 현대 다자간 시스템이 주목받고 있지만, 대부분의 외교는 여전히 양자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양자주의는 다자간 시스템에 부족한 유연성과 용이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권력, 자원, 돈, 무기 또는 기술의 격차는 양자 외교에서 더 강력한 측에서 더 쉽게 활용될 수 있으며, 강력한 국가는 다자 외교에 비해 이를 긍정적인 측면으로 간주할 수 있다.
2017년 연구에 따르면, "이중 과세를 피하고 국제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국가 간의 정책을 조정"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쌍무 조세 조약조차도 "다국적 기업이 조약 쇼핑을 할 수 있게 하고, 국가의 재정적 자율성을 제한하며, 정부가 더 낮은 세율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8]
3. 양자 관계의 유형
양자 관계는 외교, 경제, 군사/안보, 문화/사회 등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난다.
호주와 캐나다는 양자 관계를 맺고 있으며, 비슷한 정부 형태와 가치를 공유한다.[2] 인도와 네팔은 부처 탄생 이전부터 양자 관계를 맺어 왔으며, 1950년 인도-네팔 우호 조약으로 관계를 공고히 했다.[3]
미국은 한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들과 미일 안보 조약, 미국-대한민국 상호 방위 조약, 중미 상호 방위 조약 등 양자 관계를 맺고 있다. 유럽 국가들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 중심의 다자주의 동맹을 맺는 것과 달리, 미국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개별적인 관계를 선호한다.[4][5]
빅터 차는 파워플레이 이론을 통해 미국의 이러한 결정을 설명하는데, 잠재적 반동 국가의 공격적 행동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다. 반동 동맹국에는 장제스, 이승만 등이 포함된다.[7]
미국은 파나마와도 양자 협정 역사를 가지고 있다.
3. 1. 외교 관계
호주와 캐나다는 양자 관계를 맺고 있으며, 비슷한 정부 형태와 가치를 공유하고 동일한 국가 원수를 두고 있다. 1895년 캐나다 정부는 무역 위원회를 설립하기 위해 존 라케를 시드니로 보냈고, 1935년 캐나다는 찰스 버첼(호주 최초의 캐나다 고등 판무관)을 파견하여 양국 간의 관계를 공식화했다.[2] 양국은 전시 동맹국이었으며, 무역 및 경제 관계가 강력하다.인도와 네팔은 부처의 탄생 이전인 고대 시대부터 양자 관계를 맺어 왔다. 현대에는 이러한 전통적인 관계가 문서화된 조약으로 확인되었다. 1950년 인도-네팔 우호 조약은 1950년 7월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양국에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011년, 양국은 새로운 양자 투자 증진 및 보호 협정을 체결했다. 이러한 양자 조약은 국제 투자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양국 시민은 여권이나 비자 없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으며, 어느 국가에서든 거주하고 일할 수 있으며, 어느 국가에서든 재산과 사업을 소유할 수 있다. 구르카는 인도 육군의 일부를 구성한다. 수백만 명의 네팔인이 오랫동안 인도에서 살고 있다.[3]
미국은 여러 동아시아 국가, 특히 한국, 일본, 대만과 양자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은 미일 안보 조약을 통해 일본과 양자 동맹을 맺었다. 미국은 또한 1953년 미국-대한민국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한국과 양자 동맹을 맺었고, 1954년 중미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중화민국과도 동맹을 맺었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중심으로 한 다자주의 동맹을 맺는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와 달리, 미국은 각 동아시아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선호한다. 미국은 안보 동맹을 체결하거나 정상 회담을 개최하기보다는 각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동아시아 지역의 모든 국가는 다른 국가에게 적대적이거나 표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상호 의존에 기반한 다자 동맹을 구축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다. 미국이 양자 조약을 선택한 주요 이유는 다자 조약과 같은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미국이 "허브"이고 동아시아 국가가 "바퀴살"인 "허브 앤 스포크" 모델을 들 수 있다. 즉, 각 국가는 미국과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4][5]
미국이 특히 동아시아 국가와 양자 관계를 맺기로 선택한 이유를 다자 관계와 비교하여 논의할 때 고유한 여러 요소가 있다. 첫째, 미국은 유럽 국가들과 이미 오래 지속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다자주의적 유대를 구축하고 형성하기가 더 쉬웠다. 빅터 차는 "애치슨은 NATO가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과정의 산물이며, 서유럽 열강들이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집단 방어를 위한 계획을 신중하게 개발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NATO를 상호 집단 방위 협정으로 간주했다는 점을 주장했다."라고 말한다.[5] 또 다른 요인은 유럽에 비해 동아시아의 지리적 특성이다. 유럽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안보와 경제에 더 유리하다. 반면 동아시아는 넓은 공간에 걸쳐 국가가 분열되어 있고, 넓은 수역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미국이 다자적 유대를 형성하기에 덜 바람직한 조건이다. 동아시아에는 공산주의,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주의 정권 등 다양한 정권이 존재한다. 민주주의 국가로 구성된 NATO 국가들과 비교할 때, 이는 다자 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야기한다. 또 다른 요인은 NATO 국가들이 소련이라는 동일한 위협의 근원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러한 NATO 국가들 간의 다자 관계 형성에 대한 합의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경우 통일된 위협이 없었다. 중화민국(대만이라고도 함)의 경우 중국이 위협으로 여겨졌다. 대한민국(한국이라고도 함)의 경우 북한(북한이라고도 함)이 위협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위협이 달랐기 때문에 동아시아와 동맹을 맺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양자 동맹에 개입하기로 한 결정에 대한 많은 설명 중 일부 사회 역사가들은 미국 의사 결정자들이 유럽과 달리 "열등한" 아시아인들은 복잡한 다자 안보 체제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정교함과 책임을 갖지 못했다고 확신했다고 덧붙였다. 크리스토퍼 헴머와 피터 J. 카젠스타인은 "신뢰가 부재했고, 종교와 국내 가치는 소수의 경우에만 공유되었으며, 인종은 미국과 아시아를 분리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고 결론지었다.[6]
빅터 차는 그의 논문 "Powerplay: Origins of the U.S. Alliance System in Asia"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국가들과 일련의 양자 동맹을 맺기로 한 결정의 배경을 설명하는 파워플레이 이론을 제시했다. 파워플레이는 자신이 가진 상황적 이점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사용하는 모든 정치적 또는 사회적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파워플레이 이론에 따르면, 동맹은 잠재적인 반동 국가(rogue state)가 더 큰 군사적 갈등과 개입을 유발할 수 있는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억제하고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반동 동맹국에는 중국 본토를 되찾기 위해 공개적으로 계획하고 기대했던 대만의 장제스, 한국의 이승만이 포함된다. 미국은 또한 일본이 아시아에서 지역 강국을 회복할 것을 우려했다. 차는 전후 미국의 계획자들이 동아시아 친 서방 독재자들의 침략을 막고 미국의 경제에 대한 지렛대와 국가의 의존도를 높이기 위해 이러한 유형의 안보 구조를 선택했다고 결론짓는다.
미일 동맹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과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양자 안보 질서였다. 미국은 일본과 다른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에게 외교, 경제, 물류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안보 보호와 미국 시장, 기술, 공급품에 대한 접근을 제공했다. 존 아이켄베리에 따르면, 이는 "더 넓은 미국 중심의 반공주의 전후 질서"로 이어질 것이다.[7]
미국은 또한 파나마와의 양자 협정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파나마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고 운하를 건설하고 소유할 수 있는 미국의 권리를 규정한 헤이-부노바리야 조약(1903년)에서 시작되었다. 이 조약은 파나마 운하의 영구 중립 및 운영에 관한 조약과 파나마 운하 조약(1977년 서명)으로 대체되었다. 양자 투자 조약 개정안은 2000년에 양국에 의해 서명되었으며, 두 국가의 다양한 법 집행 및 금융 기관 간에 몇 개의 더 제한적인 협정이 서명되었다.
쌍무주의와 다자주의의 장점에 대한 오랜 논쟁이 있어왔다. 쌍무주의에 대한 최초의 거부는 많은 정치인들이 복잡한 전쟁 전 쌍무 조약 시스템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결론지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 일어났다. 이는 다자간 국제 연맹(26년 만에 실패로 해체됨)의 창설로 이어졌다.
대공황 이후, 그러한 협정이 경제 침체를 심화시키는 관세 인상 주기를 낳는 데 일조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쌍무 무역 협정에 대한 유사한 반발이 일어났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방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과 같은 다자간 협정으로 전환했다.
국제 연합과 세계 무역 기구와 같은 현대 다자간 시스템이 주목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외교는 여전히 양자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쌍무주의는 대부분의 타협에 의존적인 다자간 시스템에 부족한 유연성과 용이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권력, 자원, 돈, 무기 또는 기술의 격차는 쌍무 외교에서 더 강력한 측에서 더 쉽게 활용될 수 있으며, 강력한 국가는 하나의 국가에 한 표를 행사하는 규칙이 적용되는 더 합의 기반의 다자간 외교 형태에 비해 이를 긍정적인 측면으로 간주할 수 있다.
2017년 연구에 따르면, "이중 과세를 피하고 국제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국가 간의 정책을 조정"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쌍무 조세 조약조차도 "다국적 기업이 조약 쇼핑을 할 수 있게 하고, 국가의 재정적 자율성을 제한하며, 정부가 더 낮은 세율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8]
3. 2. 경제 관계
- 호주와 캐나다는 양자 관계를 맺고 있으며, 비슷한 정부 형태와 가치를 공유하고 동일한 국가 원수를 두고 있다. 1895년 캐나다 정부는 무역 위원회를 설립하기 위해 존 라케를 시드니로 보냈고, 1935년 캐나다는 찰스 버첼(호주 최초의 캐나다 고등 판무관)을 파견하여 양국 간의 관계를 공식화했다.[2] 양국은 전시 동맹국이었으며, 무역 및 경제 관계가 강력하다.
- 인도와 네팔은 부처의 탄생 이전인 고대 시대부터 양자 관계를 맺어 왔다. 현대에는 1950년 인도-네팔 우호 조약이 체결되어 양국 관계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011년에는 새로운 양자 투자 증진 및 보호 협정을 체결했다. 양국 시민은 여권이나 비자 없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으며, 어느 국가에서든 거주하고 일할 수 있고, 재산과 사업을 소유할 수 있다. 구르카는 인도 육군의 일부를 구성하며, 수백만 명의 네팔인이 오랫동안 인도에서 살고 있다.[3]
- 미국은 여러 동아시아 국가, 특히 한국, 일본, 대만과 양자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은 미일 안보 조약을 통해 일본과, 미국-대한민국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한국과, 중미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중화민국과 양자 동맹을 맺었다. 미국은 각 동아시아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선호하며, 이는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중심으로 한 다자주의 동맹을 맺는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와는 다르다.[4][5]
- 미국은 파나마와의 양자 협정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헤이-부노바리야 조약(1903년)에서 시작되었다. 이 조약은 파나마 운하의 영구 중립 및 운영에 관한 조약과 파나마 운하 조약(1977년 서명)으로 대체되었다. 양자 투자 조약 개정안은 2000년에 양국에 의해 서명되었다.
3. 3. 군사/안보 관계
미국은 여러 동아시아 국가, 특히 한국, 일본, 대만과 양자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은 미일 안보 조약을 통해 일본과 양자 동맹을 맺었고, 1953년 미국-대한민국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한국과도 양자 동맹을 맺었으며, 1954년 중미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중화민국(대만)과도 동맹을 맺었다.[4]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를 중심으로 한 다자주의 동맹을 맺는 유럽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각 동아시아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선호한다.[4]미국이 동아시아 국가와 양자 관계를 맺기로 선택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 첫째, 미국은 유럽 국가들과 이미 오래 지속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다자주의적 유대를 구축하기가 더 쉬웠다.
- 둘째, 유럽은 "연결"되어 있어 안보와 경제에 유리하지만, 동아시아는 넓은 공간에 걸쳐 국가가 분열되어 있고, 넓은 수역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다자적 유대를 형성하기에 덜 바람직하다.
- 셋째, 동아시아에는 공산주의,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주의 정권 등 다양한 정권이 존재하여 다자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야기한다.
- 넷째, NATO 국가들은 소련이라는 동일한 위협을 인식했지만, 동아시아의 경우 중화민국은 중국, 한국은 북한을 위협으로 여겨 통일된 위협이 없었다.[6]
빅터 차는 파워플레이 이론을 제시하여 미국의 동아시아 국가들과의 양자 동맹 결정 배경을 설명했다. 파워플레이 이론에 따르면, 동맹은 잠재적인 반동 국가(rogue state)의 공격적인 행동을 억제하고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반동 동맹국에는 중국 본토를 되찾기 위해 공개적으로 계획했던 대만의 장제스, 한국의 이승만이 포함된다. 미국은 또한 일본이 아시아에서 지역 강국을 회복할 것을 우려했다.[7]
미일 동맹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과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양자 안보 질서였다. 미국은 일본과 다른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에게 외교, 경제, 물류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안보 보호와 미국 시장, 기술, 공급품에 대한 접근을 제공했다.[7]
3. 4. 문화/사회 관계
호주와 캐나다는 양자 관계를 맺고 있으며, 비슷한 정부 형태와 가치를 공유하고 동일한 국가 원수를 두고 있다. 1895년 캐나다 정부는 무역 위원회를 설립하기 위해 존 라케를 시드니로 보냈고, 1935년 캐나다는 찰스 버첼(호주 최초의 캐나다 고등 판무관)을 파견하여 양국 간의 관계를 공식화했다.[2] 양국은 전시 동맹국이었으며, 무역 및 경제 관계가 강력하다.인도와 네팔은 부처의 탄생 이전부터 고대 시대부터 양자 관계를 맺어 왔다. 현대에는 이러한 전통적인 관계가 문서화된 조약으로 확인되었다. 1950년 인도-네팔 우호 조약은 1950년 7월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양국에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011년, 양국은 새로운 양자 투자 증진 및 보호 협정을 체결했다. 양국 시민은 여권이나 비자 없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으며, 어느 국가에서든 거주하고 일할 수 있으며, 어느 국가에서든 재산과 사업을 소유할 수 있다. 구르카는 인도 육군의 일부를 구성한다. 수백만 명의 네팔인이 오랫동안 인도에서 살고 있다.[3]
미국은 여러 동아시아 국가, 특히 한국, 일본, 대만과 양자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은 미일 안보 조약을 통해 일본과 양자 동맹을 맺었다. 미국은 또한 1953년 미국-대한민국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한국과 양자 동맹을 맺었고, 1954년 중미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중화민국과도 동맹을 맺었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중심으로 한 다자주의 동맹을 맺는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와 달리, 미국은 각 동아시아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선호한다. 미국은 안보 동맹을 체결하거나 정상 회담을 개최하기보다는 각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동아시아 지역의 모든 국가는 다른 국가에게 적대적이거나 표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상호 의존에 기반한 다자 동맹을 구축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다. 미국이 양자 조약을 선택한 주요 이유는 다자 조약(예: 다자 조약의 결함 위험)과 같은 분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미국이 "허브"이고 동아시아 국가가 "바퀴살"인 "허브 앤 스포크" 모델을 들 수 있다. 즉, 각 국가는 미국과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4][5]
미국이 특히 동아시아 국가와 양자 관계를 맺기로 선택한 이유를 다자 관계(예: NATO)와 비교하여 논의할 때 고유한 여러 요소가 있다. 첫째, 미국은 유럽 국가들과 이미 오래 지속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다자주의적 유대를 구축하고 형성하기가 더 쉬웠다. 빅터 차는 "애치슨은 NATO가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과정의 산물이며, 서유럽 열강들이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집단 방어를 위한 계획을 신중하게 개발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NATO를 상호 집단 방위 협정으로 간주했다는 점을 주장했다."라고 말한다.[5]
또 다른 요인은 유럽에 비해 동아시아의 지리적 특성이다. 유럽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안보와 경제에 더 유리하다. 반면 동아시아는 넓은 공간에 걸쳐 국가가 분열되어 있고, 넓은 수역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미국이 다자적 유대를 형성하기에 덜 바람직한 조건이다. 동아시아에는 공산주의,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주의 정권 등 다양한 정권이 존재한다. 민주주의 국가로 구성된 NATO 국가들과 비교할 때, 이는 다자 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야기한다.
또 다른 요인은 NATO 국가들이 소련이라는 동일한 위협의 근원을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러한 NATO 국가들 간의 다자 관계 형성에 대한 합의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경우 통일된 위협이 없었다. 중화민국(대만이라고도 함)의 경우 중국이 위협으로 여겨졌다. 대한민국(한국이라고도 함)의 경우 북한(북한이라고도 함)이 위협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위협이 달랐기 때문에 동아시아와 동맹을 맺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양자 동맹에 개입하기로 한 결정에 대한 많은 설명 중 일부 사회 역사가들은 미국 의사 결정자들이 유럽과 달리 "열등한" 아시아인들은 복잡한 다자 안보 체제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정교함과 책임을 갖지 못했다고 확신했다고 덧붙였다. 크리스토퍼 헴머와 피터 J. 카젠스타인은 "신뢰가 부재했고, 종교와 국내 가치는 소수의 경우에만 공유되었으며, 인종은 미국과 아시아를 분리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고 결론지었다.[6]
빅터 차는 그의 논문 "Powerplay: Origins of the U.S. Alliance System in Asia"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국가들과 일련의 양자 동맹을 맺기로 한 결정의 배경을 설명하는 파워플레이 이론을 제시했다. 파워플레이는 자신이 가진 상황적 이점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사용하는 모든 정치적 또는 사회적 상황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파워플레이 이론에 따르면, 동맹은 잠재적인 반동 국가(rogue state)가 더 큰 군사적 갈등과 개입을 유발할 수 있는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억제하고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반동 동맹국(반동 국가)에는 중국 본토를 되찾기 위해 공개적으로 계획하고 기대했던 대만의 장제스, 한국의 이승만이 포함된다. 미국은 또한 일본이 아시아에서 지역 강국을 회복할 것을 우려했다. 차는 전후 미국의 계획자들이 동아시아 친 서방 독재자들의 침략을 막고 미국의 경제에 대한 지렛대와 국가의 의존도를 높이기 위해 이러한 유형의 안보 구조를 선택했다고 결론짓는다.
미일 동맹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과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양자 안보 질서였다. 미국은 일본과 다른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에게 외교, 경제, 물류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안보 보호와 미국 시장, 기술, 공급품에 대한 접근을 제공했다. 존 아이켄베리에 따르면, 이는 "더 넓은 미국 중심의 반공주의 전후 질서"로 이어질 것이다.[7]
미국은 또한 파나마와의 양자 협정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파나마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고 운하를 건설하고 소유할 수 있는 미국의 권리를 규정한 헤이-부노바리야 조약(1903년)에서 시작되었다. 이 조약은 파나마 운하의 영구 중립 및 운영에 관한 조약과 파나마 운하 조약(1977년 서명)으로 대체되었다. 양자 투자 조약 개정안은 2000년에 양국에 의해 서명되었으며, 두 국가의 다양한 법 집행 및 금융 기관 간에 몇 개의 더 제한적인 협정이 서명되었다.
4. 주요 사례
양자주의의 주요 사례는 다음과 같다.
-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두 나라는 양자 관계를 맺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관계 참조)
- '''인도와 네팔''': 두 나라는 부처 탄생 이전부터 양자 관계를 맺어 왔다. (자세한 내용은 인도-네팔 관계 참조)
- '''미국과 동아시아 국가''': 미국은 여러 동아시아 국가와 양자 관계를 맺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미국-동아시아 관계 참조)
- '''미국과 파나마''': 미국은 헤이-부노바리야 조약(1903년)을 시작으로 파나마와 양자 협정을 맺어왔다. 이 조약은 토리호스-카터 조약(1977년)으로 대체되었다. 2000년에는 양국 간 양자 투자 조약 개정안이 서명되었고, 이 외에도 여러 협정이 체결되었다.[4]
4. 1.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 관계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는 양자 관계를 맺고 있으며, 비슷한 정부 형태와 가치를 공유하고 동일한 국가 원수를 두고 있다. 1895년 캐나다 정부는 무역 위원회를 설립하기 위해 존 라케를 시드니로 보냈고, 1935년 캐나다는 찰스 버첼(호주 최초의 캐나다 고등 판무관)을 파견하여 양국 간의 관계를 공식화했다.[2] 양국은 전시 동맹국이었으며, 무역 및 경제 관계가 강력하다.4. 2. 인도-네팔 관계
인도와 네팔은 부처 탄생 이전인 고대 시대부터 양자 관계를 맺어 왔다. 현대에는 이러한 전통적인 관계가 문서화된 조약으로 확인되었다. 1950년 인도-네팔 우호 조약은 1950년 7월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양국에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011년, 양국은 새로운 양자 투자 증진 및 보호 협정을 체결했다. 이러한 양자 조약은 국제 투자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양국 시민은 여권이나 비자 없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으며, 어느 국가에서든 거주하고 일할 수 있으며, 어느 국가에서든 재산과 사업을 소유할 수 있다. 구르카족은 인도 육군의 일부를 구성한다. 수백만 명의 네팔인이 오랫동안 인도에서 살고 있다.[3]4. 3. 미국-동아시아 국가 관계
미국은 여러 동아시아 국가, 특히 한국, 일본, 대만과 양자 관계를 맺고 있다. 미국은 미일 안보 조약을 통해 일본과 양자 동맹을 맺었고, 1953년 미국-대한민국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한국과도 양자 동맹을 맺었으며, 1954년 중미 상호 방위 조약을 통해 중화민국(대만)과도 동맹을 맺었다.[4]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를 중심으로 다자주의 동맹을 맺는 유럽 국가들과 달리, 미국은 각 동아시아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선호한다. 미국은 안보 동맹을 체결하거나 정상 회담을 개최하기보다는 각 국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동아시아 지역의 모든 국가는 다른 국가에게 적대적이거나 표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상호 의존에 기반한 다자 동맹을 구축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렵다. 미국이 양자 조약을 선택한 주요 이유는 다자 조약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분쟁(예: 다자 조약의 결함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어, 미국이 "허브"이고 동아시아 국가가 "바퀴살"인 "허브 앤 스포크" 모델을 들 수 있다. 즉, 각 국가는 미국과 연결되어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4][5]
미국이 특히 동아시아 국가와 양자 관계를 맺기로 선택한 이유에는 여러 요소가 있다. 첫째, 미국은 유럽 국가들과 이미 오래 지속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다자주의적 유대를 구축하고 형성하기가 더 쉬웠다. 빅터 차는 "애치슨은 NATO가 오랫동안 심사숙고한 과정의 산물이며, 서유럽 열강들이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집단 방어를 위한 계획을 신중하게 개발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NATO를 상호 집단 방위 협정으로 간주했다는 점을 주장했다."라고 말한다.[5]
또 다른 요인은 유럽에 비해 동아시아의 지리적 특성이다. 유럽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안보와 경제에 더 유리하다. 반면 동아시아는 넓은 공간에 걸쳐 국가가 분열되어 있고, 넓은 수역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미국이 다자적 유대를 형성하기에 덜 바람직한 조건이다. 동아시아에는 공산주의, 권위주의 정권과 민주주의 정권 등 다양한 정권이 존재한다. 민주주의 국가로 구성된 NATO 국가들과 비교할 때, 이는 다자 관계를 형성하는 데 어려움을 야기한다.
NATO 국가들은 소련이라는 동일한 위협을 인식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경우 통일된 위협이 없었다. 중화민국(대만)의 경우 중국이 위협으로 여겨졌고, 대한민국(한국)의 경우 북한(북한)이 위협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위협이 달랐기 때문에 동아시아와 동맹을 맺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일부 사회 역사가들은 미국 의사 결정자들이 유럽과 달리 "열등한" 아시아인들은 복잡한 다자 안보 체제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수준의 정교함과 책임을 갖지 못했다고 확신했다고 덧붙였다. 크리스토퍼 헴머와 피터 J. 카젠스타인은 "신뢰가 부재했고, 종교와 국내 가치는 소수의 경우에만 공유되었으며, 인종은 미국과 아시아를 분리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했다"고 결론지었다.[6]
빅터 차는 그의 논문 "Powerplay: Origins of the U.S. Alliance System in Asia"에서 파워플레이 이론을 제시했다. 파워플레이 이론에 따르면, 동맹은 잠재적인 반동 국가(rogue state)가 더 큰 군사적 갈등과 개입을 유발할 수 있는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억제하고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반동 동맹국(반동 국가)에는 중국 본토를 되찾기 위해 공개적으로 계획하고 기대했던 대만의 장제스, 한국의 이승만이 포함된다. 미국은 또한 일본이 아시아에서 지역 강국을 회복할 것을 우려했다. 차는 전후 미국의 계획자들이 동아시아 친 서방 독재자들의 침략을 막고 미국의 경제에 대한 지렛대와 국가의 의존도를 높이기 위해 이러한 유형의 안보 구조를 선택했다고 결론짓는다.
미일 동맹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소련의 팽창과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양자 안보 질서였다. 미국은 일본과 다른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에게 외교, 경제, 물류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안보 보호와 미국 시장, 기술, 공급품에 대한 접근을 제공했다. 존 아이켄베리에 따르면, 이는 "더 넓은 미국 중심의 반공주의 전후 질서"로 이어질 것이다.[7]
4. 4. 미국-파나마 관계
헤이-부노바리야 조약(1903년)은 미국이 파나마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고 운하를 건설하고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규정했다. 이 조약은 파나마 운하의 영구 중립 및 운영에 관한 조약과 파나마 운하 조약(1977년 서명)으로 대체되었다. 2000년에는 양국이 양자 투자 조약 개정안에 서명했으며, 두 국가의 다양한 법 집행 및 금융 기관 간에 몇 개의 더 제한적인 협정이 체결되었다.[4]5. 양자주의 vs. 다자주의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많은 정치인들은 전쟁 전의 복잡한 양자 조약 시스템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는 다자주의를 표방한 국제 연맹의 설립으로 이어졌으나, 국제 연맹은 26년 만에 실패로 해체되었다.[8]
대공황 이후, 양자 무역 협정이 경제 침체를 심화시키는 관세 인상 주기를 낳는 데 일조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양자 무역 협정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서방 국가들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과 같은 다자간 협정으로 전환했다.
국제 연합과 세계 무역 기구와 같은 현대 다자간 시스템이 주목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외교는 여전히 양자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양자주의는 대부분 타협에 의존적인 다자간 시스템에 부족한 유연성과 용이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권력, 자원, 돈, 무기 또는 기술의 격차는 양자 외교에서 더 강력한 측에서 더 쉽게 활용될 수 있으며, 강력한 국가는 하나의 국가에 한 표를 행사하는 규칙이 적용되는 더 합의 기반의 다자간 외교 형태에 비해 이를 긍정적인 측면으로 간주할 수 있다.
2017년 연구에 따르면, "이중 과세를 피하고 국제 투자를 장려하기 위해 국가 간의 정책을 조정"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양자 조세 조약조차도 "다국적 기업이 조약 쇼핑을 할 수 있게 하고, 국가의 재정적 자율성을 제한하며, 정부가 더 낮은 세율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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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tilateralism, Bilateralism and Regime Design
http://politicalsc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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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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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fat.gov[...]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and Trade
2023-12-12
[3]
학술지
India's New Bilateral Investment Promotion and Protection Treaty with Nepal: A New Trend in State Practice
https://d1wqtxts1xzl[...]
Oxford University Press
2013-09
[4]
보고서
Bilateralism, Multilateralism, and Institutional Change in Northeast Asia's Regional Security Architecture
http://www.eai.or.kr[...]
East Asia Institute
2023-12-12
[5]
학술지
Powerplay: Origins of the U.S. Alliance System in Asia
The MIT Press
2010-01-09
[6]
학술지
Why Is There No NATO in Asia? Collective Identity, Regionalism, and the Origins of Multilateralism
https://www.ucg.ac.m[...]
The MIT Press
2023-12-12
[7]
학술지
American hegemony and East Asian order
https://www.research[...]
2023-12-12
[8]
학술지
The Unintended Consequences of Bilateralism: Treaty Shopping and International Tax Policy
http://osf.io/kg8rw/
2023-12-12
[9]
웹사이트
Canada country brief - September 2010
http://www.dfat.gov.[...]
2013-05-21
[10]
웹인용
Multilateralism, Bilateralism and Regime Design
http://politicalscie[...]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Ohio State University
2013-09-23
[11]
저널
The Unintended Consequences of Bilateralism: Treaty Shopping and International Tax Policy
http://osf.io/kg8rw/
2017-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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