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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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표는 후한 시대의 인물로, 양진의 증손자이다. 그는 효렴으로 천거되어 의랑, 시중, 경조윤 등을 역임했으며, 동탁의 전횡 시기에는 사공과 사도를 지냈다. 이각과 곽사가 장안에서 다투자 곽사를 비판하여 참수당할 뻔했으나, 헌제를 따라 조조에게 의탁했다. 조조에게 경계받았으며, 아들 양수가 조조에게 처형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조비가 위나라 황제가 된 후 태위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광록대부로 임명되었으며, 225년에 84세로 사망했다.
양표는 대대로 태위를 배출한 명문가 출신으로, 젊어서부터 학문에 능통했다. 여러 요직을 거쳤으며, 동탁의 전횡에 맞서 장안 천도를 반대하고, 이각과 곽사의 권력 다툼 속에서도 헌제를 곁에서 보필하는 등 강직한 면모를 보였다.
[1]
서적
後漢書
https://zh.wikisourc[...]
2. 가계

후한의 명문가인 홍농 양씨(弘農 楊氏)는 전한 초기의 적천후 양희나 소제 시기의 승상이었던 안평후 양창(사마천의 사위)을 선조로 여기기도 하지만, 《한서》에는 양창이 양희의 후손이라는 언급이 없어, 실질적으로는 양진을 시조로 본다(가노 나오타다의 설).
3. 생애
조조 집권 후에는 원술과의 인척 관계로 인해 견제를 받았으나, 공융 등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했다. 아들 양수가 조조에게 처형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후한의 멸망 이후 조비에게 특별 대우를 받으며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4]
3. 1. 초기 생애
양진의 차남이 양표의 조부였지만, 삼공까지 올랐고, 아버지 양사 또한 중책을 역임하여 삼공이 되었다. 이로 인해 양표 가문은 대대로 태위를 배출하여 '사세 태위(四世太尉)'라 불렸다.[1]
양표는 처음에 효렴으로 천거되고, 무재로 추천되었다. 또한 삼공의 부름을 받았으나, 처음에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희평 연간(172년 ~ 178년)에 수레로 맞이하여 의랑이 되었고, 시중, 경조윤을 역임했다.
3. 2. 중앙 관직 활동
광화 2년(179년), 사례교위 양구에게 환관 왕보가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을 고발했고, 양구가 왕보의 일족을 체포하여 처형하자 천하로부터 칭찬을 받았다.[1] 시중, 오관중랑장을 거쳐 영천 태수, 남양 태수를 역임했다.[1]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시중에 재임명되었고, 영락소부, 태복 등을 역임했다.[1] 가학(家學)인 "구양상서"를 습득하고 가르쳤다.[1] 조정 내 동관(한나라의 국사 편찬실)에서 마일제, 노식, 채옹 등과 동료였다.[1]
3. 3. 동탁 집권기
중평 6년, 동탁이 전횡을 시작하자 사공, 사도가 되었다. 관동의 제후들이 동탁에 대항하여 거병하자, 동탁은 장안으로 천도하려 했다. 양표는 반경의 악정을 예로 들며 철저히 반대했다. 동탁은 분노하여 천후의 불순을 이유로 사례교위 선파(宣罙)에게 명하여 양표 등 반대자를 모두 파면시켰다. 양표는 등성하여 사죄하고 다시 광록대부에 임명되었으며, 대홍려, 소부, 태상으로 전임했지만, 병으로 사직했다. 복직하여 다시 경조윤, 광록훈, 광록대부를 역임했다.
3. 4. 이각, 곽사 집권기
초평 3년(192년) 9월, 양표는 사공(司空) 및 록상서사가 되었으나, 초평 4년(193년) 10월에 지진을 이유로 면직되었다.[1] 이후 다시 태상(太常)을 거쳐 흥평 원년(194년) 7월에 태위(太尉) 및 록상서사에 올랐다.
흥평 2년(195년), 이각과 곽사가 장안에서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각은 양표를 포함한 공경(公卿)들을 곽사에게 보내 강화를 요청했으나, 곽사는 이들을 인질로 붙잡았다. 이에 양표는 "군신(君臣)들이 서로 다투며, 한 사람(이각)은 천자(헌제)를 위협하고, 한 사람(곽사)은 공경들을 인질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를 해도 괜찮은 것입니까?"라고 곽사를 비판했다.[2] 곽사는 분노하여 양표를 죽이려 했으나, 중랑장 양밀(楊密) 등 측근들의 만류로 풀어주었다. 같은 해, 헌제가 장안을 탈출할 때 양표도 함께했다.
3. 5. 조조 집권기
건안 원년(196년) 7월, 헌제와 함께 낙양으로 들어가 상서령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헌제가 조조에게 옹립되어 허로 천도했다.[3] 동승을 비롯한 헌제의 측근 세력은 조조의 헌제 옹립과 허 천도를 반대했기에, 양표는 조조에게 경계받았다. 조조가 헌제에게 배례할 때 양표가 안색을 굳히자, 조조는 암살을 두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조조는 원술과의 인척 관계를 이유로 양표를 처형하려 했으나, 공융 등의 변호로 용서받았다.
왕침의 『위서』에 따르면, 원소가 양표와 공융을 처형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림집』의 격문에서처럼, 그 이전부터 양표는 조조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건안 4년(199년), 태상으로 복귀했으나, 건안 10년(205년)에 사직했다. 건안 11년(206년), 조조의 명령으로 은택후 제도가 폐지되어, 아버지 대에 얻은 임진후 작위를 잃었다.
이후 양표는 후한의 운명이 다했다고 판단하여, 다리가 굽혀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3. 6. 아들 양수의 죽음
아들 양수는 조조를 섬기고 있었지만, 어느 날 조조의 미움을 사 처형되었다. 그 후, 조조는 양표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조조가 양표에게 야윈 이유를 묻자, 양표는 "김일제와 같은 통찰력이 제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심정을 설명했다.[4] 조조는 이 말을 듣고 무심코 태도를 고쳤다고 한다.
3. 7. 위나라 건국 이후
조비가 선양을 통해 위나라 문제로 즉위하자, 양표를 태위로 임명하려 했다. 하지만 양표는 과거 삼공을 역임했을 때 세상의 혼란을 바로잡지 못했던 것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이 때문에 "덕망 높은 노인"으로서 표창을 받은 후 광록대부로 임명되었고, 의장(儀仗)을 하사받는 등 특별 대우를 받았다.
황초 6년(225년), 84세의 고령으로 사망했다.[4]
참조
[2]
서적
資治通鑑
https://zh.wikisourc[...]
[3]
서적
資治通鑑
https://zh.wikisourc[...]
[4]
서적
後漢書
[5]
문서
楊震 열전
[6]
서적
후한서
https://zh.wikisourc[...]
[7]
서적
후한서
https://zh.wikisou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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