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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섀클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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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어니스트 섀클턴은 아일랜드 출신의 극지 탐험가로, 여러 차례 남극 탐험을 이끌었다. 그는 1874년에 태어나 16세에 상선 해군 장교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후 영국 국립 남극 탐험대(디스커버리 탐험대)에 참여했다. 1907년에는 님로드 탐험대를 이끌고 남극점을 향해 전진하여 최남단 위도를 갱신했고, 1914년에는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를 이끌었으나, 탐험선 엔듀어런스호가 유빙에 갇혀 침몰하는 위기를 겪었다. 그는 험난한 여정 끝에 코끼리 섬에서 구명정 항해를 통해 사우스조지아 섬에 도착, 생존자들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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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섀클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04년의 어니스트 섀클턴
1904년의 섀클턴
직책
왕립 스코틀랜드 지리학회 서기1904년 1월 11일 ~ 1905년 11월 10일
전임프레더릭 마시먼 베일리
후임윌리엄 래클런 포브스
개인 정보
본명어니스트 헨리 섀클턴
출생1874년 2월 15일
출생지킬케아, 킬데어 주, 아일랜드
사망1922년 1월 5일
사망지그리트비켄, 사우스조지아 제도, 포클랜드 제도 보호령
배우자에밀리 도먼(1904년 결혼)
자녀레이먼드
세실리
에드워드
친척캐슬린 섀클턴 (자매)
교육덜위치 칼리지
서명
군 복무
소속
복무 기간1901년~1904년, 1917년~1919년
계급해군 중위(RNR)
육군 소령
참전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훈장
훈장기사 작위(1909년)
로열 빅토리아 훈장(1909년, 4등급 회원: 1907년)
대영 제국 훈장(1918년)
극지 메달 (3개 클라스)
탐험 경력
관련 탐험디스커버리 원정 (1901~1904)
님로드 탐험 (1907~1909)
인듀어런스 탐험 (1914~1917)
섀클턴-로웨트 탐험 (1921~1922)
주요 업적인듀어런스 호 침몰 후 대원 전원 생존 귀환
인듀어런스 호 발견2022년 3월 9일, 수심 에서 발견
기타
소속영국
학력덜위치 칼리지
직업상선 항해사, 남극 탐험가
부모헨리 섀클턴, 헨리에타 개번
어니스트 섀클턴 서명

2. 어린 시절

어니스트 섀클턴은 어린 시절 책을 많이 읽었으며, 이는 모험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4] 11세까지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고, 이후 사우스이스트런던 더리치 웨스트힐에 있는 사립학교인 퍼 로지 예비 학교에 다녔다.[4] 13세 때 더리치 칼리지에 입학했다.[4] 섀클턴은 학문에 "지루함"을 느꼈다고 하며,[4] 훗날 "나는 학교에서 지리학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다... 위대한 시인과 산문 작가의 작품을 분해하고 문법적으로 해석하고 분석하는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교사들은 항상 그것을 과제로 삼아 (학생들의) 시에 대한 취미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4] 그의 마지막 학기 성적은 31명 중 5등이었다.[4]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선원이 된 섀클턴은[4] 아버지의 도움으로 노스 웨스턴 쉬핑 컴퍼니의 사각 돛 범선 "호튼 타워(Hoghton Tower)"에 승선했다.[4] 4년간의 선원 생활 동안 세계 곳곳을 항해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경험을 쌓았다.[4] 1894년 8월, 2등 항해사 시험에 합격하여 웰시 샤이어 라인의 부정기 화물선에서 3등 항해사가 되었다.[4] 2년 후 1등 항해사 자격을, 1898년에는 선장 자격을 얻었다.[4]

1898년, 섀클턴은 사우샘프턴·케이프타운 간 우편 및 여객 수송 정기선을 운항하는 유니언-캐슬 라인에 입사했다. 동료는 섀클턴이 "평범한 젊은 항해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키츠나 브라우닝의 시를 낭독"하며, 감수성과 공격성이 뒤섞여 있었지만, 동료를 배려하기도 했다고 기록했다.[4]

2. 1. 탄생과 가족 배경

런던 루이셤 구 시든햄 웨스트우드 힐 12번지에 있는 어니스트 섀클턴의 집을 표시하는 푸른 명판


어니스트 섀클턴은 1874년 2월 15일 아일랜드 킬데어 주 킬키아에서 태어났다.[4] 그의 아버지 헨리 섀클턴은 영국 육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포기하고 킬키아에서 농부가 되었다. 섀클턴 가문은 잉글랜드 요크셔 출신으로,[6] 1726년 아일랜드로 이주하여 볼리토어에 학교를 세운 퀘이커 교도인 아브라함 섀클턴의 후손이었다.[5] 섀클턴의 어머니 헨리에타 레티시아 소피아 가반은 피츠모리스 가문의 후손이었다.[6] 어니스트는 열 명의 자녀 중 둘째였으며, 두 아들 중 장남이었다.[4] 남동생 프랭크는 1907년 아일랜드 왕관 보석 도난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가 나중에 무혐의 처리되었다.

2. 2. 런던으로 이주

1880년, 어니스트가 여섯 살 때, 그의 아버지 헨리 섀클턴은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지주 생활을 포기하고 가족을 더블린으로 이주시켰다.[7] 4년 후, 가족은 아일랜드를 떠나 런던 교외의 시든햄으로 이사했다.[7] 이는 새로 자격을 취득한 의사에게 더 나은 직업 전망을 찾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요인으로는 1882년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이 아일랜드 담당 영국 국무 장관인 프레데릭 캐번디시 경을 암살한 후 가족의 앵글로-아일랜드 혈통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을 수 있다.[7] 그러나 섀클턴은 평생 동안 자신의 아일랜드 뿌리에 자부심을 느꼈고, 스스로를 "아일랜드인"이라고 자주 선언했다.[7]

2. 3. 교육

어린 시절부터 섀클턴은 책을 많이 읽는 아이였으며, 이는 모험에 대한 열정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4] 11세까지는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고, 이후 런던 남동부 덜위치의 퍼 로지 예비 학교에 입학했다.[4] 13세에는 덜위치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지루함"을 느꼈다고 전해진다.[4] 그는 학자로서 특별히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4]

섀클턴은 훗날 "나는 학교에서 지리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다... 문학 또한 우리의 위대한 시인과 산문 작가들의 특정 구절을 해부하고, 분석하고, 또 분석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시에 대한 취향을 과제와 부담으로 만들어 영원히 망치지 않도록 매우 신중해야 한다"라고 회상했다.[4] 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에 그는 31명의 학생 중 5등을 차지했다.[4]

3. 상선 해군 장교 시절

섀클턴은 학창 시절에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으나,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선원이 되었다. 섀클턴 가문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HMS 브리타니아"의 해군 사관 후보생이 되거나 상선 훈련선인 "워스터" 또는 "컨웨이"를 타는 대신, 범선의 "선원(before the mast)" 견습생이 되는 길을 택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노스 웨스턴 해운 회사(North Western Shipping Company)에 취직하여 사각 돛 범선 "호튼 타워(Hoghton Tower)"의 선원이 되었다.

이후 4년간 섀클턴은 세계 곳곳을 항해하며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교류하고, 모든 종류의 인간에 대해 배우며 항해 기술을 익혔다. 1894년 8월, 2등 항해사 시험에 합격한 후 웨일스 샤이어 라인(Welsh Shire Line)의 부정기 화물선에서 3등 항해사로 일했다. 2년 뒤 1등 항해사 자격을 얻었으며, 1898년에는 전 세계 어디에서든 영국 선박을 지휘할 수 있는 선장 자격을 획득했다.

1898년, 섀클턴은 사우샘프턴·케이프타운 간 우편 및 여객 수송 정기선을 운항하는 유니언-캐슬 라인에 합류했다. 동료 선원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범한 젊은 항해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꼭 잘 어울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회사에 만족했으며, "키츠나 브라우닝의 시를 낭독"하며 감수성과 공격성이 뒤섞인 모습을 보였지만 동료를 배려하기도 했다. 1899년 제2차 보어 전쟁 발발 후, 섀클턴은 병력 수송선 "틴타젤 캐슬(Tintagel Castle)"호로 옮겨갔다. 1900년 3월, 그 배에서 섀클턴은 런던에서 조직 중이던 디스커버리 탐험대의 주요 후원자인 루엘린 W. 롱스타프의 아들 세드릭 롱스타프(Cedric Longstaff) 육군 중위를 만났다. 섀클턴은 탐험대에 합류하기 위해 롱스타프 중위와의 친분을 이용, 롱스타프에게 면접을 요청했다. 섀클턴의 열정에 감동한 롱스타프는 탐험대 책임자인 클레멘츠 마컴에게 섀클턴을 추천했고, 마컴은 섀클턴의 합격을 바랐다. 1901년 2월 17일, 섀클턴은 탐험선 "디스커버리호"의 3등 항해사로 임명되었고, 7월 4일에는 해군 예비역 소위로 임관했다.[77]。 공식적으로는 유니언-캐슬사에서 휴가를 받은 형태였으나, 사실상 섀클턴의 상선 경력은 여기서 끝났다.

4. 디스커버리 탐험대 (1901-1903)

영국 국립 남극 탐험대는 선박 '디스커버리' 호의 이름을 따서 '디스커버리 탐험대'로 알려졌으며, 영국 왕립 지리학회 회장인 클레멘츠 마컴의 아이디어로 수년 동안 준비되었다. 로버트 팰컨 스콧이 이끌었으며, 탐험대의 목표에는 과학적, 지리적 발견이 포함되었다. '디스커버리' 호는 왕립 해군 소속은 아니었지만, 스콧은 승무원, 장교 및 과학자들에게 해군 징계법의 조건을 준수하도록 요구했다. 섀클턴은 자신의 배경과 본능이 다르고 더 격식 없는 리더십 스타일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접근 방식을 받아들였다. 그의 특별한 임무는 "해수 분석 담당. 함내 식사 담당. 선창, 물품 및 식량 담당 [...] 또한 오락을 마련한다."였다.[77]

1901년 7월 31일 런던의 이스트 인디아 독스를 출발, 마데이라, 케이프타운, 뉴질랜드를 거쳐 1902년 1월 9일 남극 해안에 도착했다. 1902년 2월 4일, 섀클턴은 실험적인 기구 비행에 참여했다.[77] 에드워드 A. 윌슨, 하틀리 페라와 함께 맥머도 해협에 있는 탐험대의 겨울 주둔지에서 첫 번째 썰매 여행에 참여, 거대한 빙벽으로 가는 안전한 경로를 구축했다. 1902년 남극 겨울 동안 얼음 속에 갇힌 '디스커버리' 호에 머물면서 탐험대의 잡지인 ''사우스 폴라 타임스''를 편집했다.

스콧은 섀클턴을 윌슨과 함께 남극 탐험대의 남쪽 여정에 동행하도록 선택했는데, 이는 남극점을 향해 가능한 한 가장 높은 위도를 달성하기 위한 남쪽으로의 행군이었다. 1902년 11월 2일에 출발,[77] 82°17′ S의 기록적인 최남단 위도에 도달하여, 1900년에 카르스텐 보르크그레빈크가 세운 이전 기록을 깼다. 이 여행은 개들의 부진한 활약으로 인해 망가졌는데, 그들의 음식이 오염된 후 급격히 병들었다. 22마리의 개가 모두 행군 중에 죽었다. 세 명 모두 때때로 설맹, 동상과 궁극적으로 괴혈병으로 고통받았다. 귀환 여정에서 섀클턴은 스스로 인정했듯이 "무너져" 더 이상 자신의 몫을 다할 수 없었다.

1903년 2월 3일, 일행은 배로 돌아왔다.[77] 결정적이지 않은 신체검사를 거친 후, 스콧은 1월에 맥머도 해협에 도착한 구원선에 섀클턴을 귀환시키기로 결정했다.

5. 1903-1907년: 디스커버리 탐험과 님로드 탐험 사이

탐험 중의 섀클턴 (1908년)


뉴질랜드에서 요양을 마친 섀클턴은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거쳐 영국으로 돌아왔다. 남극에서 돌아온 최초의 주요 인물로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78] 특히 해군성은 ''디스커버리''호의 구조에 대한 추가 제안에 대해 그와 상의하기를 원했다.[78] 클레멘츠 마컴 경의 지원을 받아, 그는 두 번째 ''디스커버리''호 구출 작전을 위해 ''테라 노바''호의 장비를 지원하는 임시직을 수락했지만, 수석 장교로 함께 항해하라는 제안은 거절했다.[78] 그는 또한 표류된 스웨덴 남극 탐험대를 구출하기 위해 장비를 갖추고 있던 아르헨티나의 ARA 우루과이|ARA 우루과이es호의 장비에도 도움을 주었다.[78] 1903년 섀클턴은 더 영구적인 고용을 찾기 위해 보충 명단이라는 뒷문을 통해 해군 정규 위탁을 신청했지만 실패했다.[78] 대신 그는 저널리스트가 되어 ''로열 매거진''에서 일했지만, 이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8] 그는 왕립 스코틀랜드 지리학회(RSGS)의 비서직을 제안받고 수락했으며, 1904년 1월 11일에 이 직책을 맡았다.[78] 1904년 4월 9일, 그는 에밀리 도먼과 결혼했고, 슬하에 레이먼드, 세실리, 에드워드라는 세 자녀를 두었다.[78]

1905년, 섀클턴은 극동에서 러시아 군대를 본국으로 수송하여 돈을 벌려는 투기적인 회사에 주주가 되었지만,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78] 그는 또한 정치에 진출하여 아일랜드 자치 통치에 반대하는 자유 연합당의 던디 선거구 후보로 1906년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78] 그동안 그는 부유한 클라이드사이드의 실업가 윌리엄 비어드모어의 순회 특사로 일자리를 얻었는데, 이는 잠재 고객을 인터뷰하고 비어드모어의 사업 친구들을 접대하는 것이었다.[78] 이 무렵 그는 자신의 탐험대를 이끌고 남극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78]

6. 님로드 탐험 (1907-1909)

님로드 탐험은 어니스트 섀클턴이 이끈 두 번째 남극 탐험으로, 지리적 남극점과 남극 자기극을 정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비어드모어는 섀클턴에게 깊은 인상을 받아 재정적 지원을 제안했지만, 다른 기부는 얻기 힘들었다.[80] 1907년 2월, 섀클턴은 왕립 지리학회에 영국 남극 탐험이라는 이름으로 남극 탐험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 세부 사항은 RGS 뉴스레터인 ''지리학 저널''에 게재되었다.[80] 그는 탐험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2,000파운드를 기부한 필립 리 브록클허스트 경, 작가 캠벨 맥켈러, 그리고 탐험선 ''님로드''호가 출발하기 2주도 채 안 되어 기부를 확보한 기네스 남작 로드 이베 경을 포함하여 부유한 친구와 지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80] 1907년 8월 4일, 섀클턴은 로열 빅토리아 훈장 4급(MVO; 현재의 중위 등급) 회원으로 임명되었다.[80]

1908년 1월 1일, 님로드에서 남극을 향해 출발했다. 섀클턴은 원래 남극점과 남자기극에 대한 시도를 시작하기 위해 맥머도 해협에 있는 옛 ''디스커버리'' 기지를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영국을 떠나기 전에 그는 로버트 팰컨 스콧에게 맥머도 지역에 기지를 건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섀클턴은 마지못해 1902년 ''디스커버리''호에서 잠시 방문했던 장벽 입구 또는 에드워드 7세 섬 중 한 곳에서 겨울 기지를 찾기로 동의했다.

석탄을 절약하기 위해 섀클턴이 뉴질랜드 정부와 유니언 증기선 회사에 비용 분담을 설득한 후, 증기선 ''쿠냐''호가 약 2655.41km를 남극 얼음까지 견인했다. 스콧과의 약속에 따라, 배는 거대한 얼음 장벽의 동쪽 지역으로 향했고, 1908년 1월 21일에 그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장벽 입구가 확장되어 수백 마리의 고래가 있는 넓은 만을 형성한 것을 발견했고, 즉시 "고래만"이라고 명명했다. 얼음 상태가 불안정하여 장벽 입구에 안전한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에드워드 7세 섬에서 닻을 내릴 곳을 찾기 위한 오랜 탐색도 마찬가지로 헛수고였다. 섀클턴은 스콧에게 한 약속을 깨야만 했고, ''님로드''호는 맥머도 해협으로 향했다. 배는 1월 29일에 맥머도 해협에 도착했지만, 헛 포인트에 있는 ''디스커버리''호의 옛 기지에서 약 25.75km 북쪽에서 얼음에 막혔다. 상당한 기상 지연 후에, 결국 헛 포인트에서 북쪽으로 약 약 38.62km 떨어진 로이즈 곶에 기지가 건설되었다.

섀클턴이 대원들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능력이 그들을 행복하고 집중하게 유지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파티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1908년 10월 29일, 섀클턴과 세 명의 동료인 프랭크 와일드, 에릭 마셜, 제임슨 애덤스는 와일드가 부른 "위대한 남쪽 여정"을 시작했다. 1909년 1월 9일, 그들은 남위 88°23′ S에 도달하여 새로운 최남단 위도를 기록했고, 남극점에서 약 180.25km 떨어진 지점에 도달했다. 가는 길에 남극점 탐험대는 섀클턴의 후원자의 이름을 딴 비어드모어 빙하를 발견했고, 네 사람은 남극 고원을 보고 여행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맥머도 해협으로의 귀환 여정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한 경쟁이었고, 그들은 상당 기간 동안 반 식량 배급을 받아야 했다. 일행은 배를 타기 직전에 헛 포인트로 돌아왔다.

영국 남극 탐험의 또 다른 주요 업적은 에레부스 산의 첫 번째 등정과 에지워스 데이비드, 더글러스 모슨, 알리스테어 매케이가 1909년 1월 16일에 달성한 남자기극의 대략적인 위치 발견이었다. 섀클턴은 영웅으로 영국으로 돌아왔고, 곧 탐험에 대한 그의 기록인 ''남극의 심장''을 출판했다.

7. 1909-1914년: 두 탐험 사이

아일랜드 킬데어주에서 태어난 섀클턴은 10세 때 가족과 함께 런던 남부 교외의 시드넘으로 이주했다. 그의 첫 극지 체험은 로버트 팰컨 스콧이 이끄는 디스커버리 탐험대(1901-04년)에 3등 항해사로 참가한 것이었다. 그는 스콧, 에드워드 에이드리언 윌슨과 함께 남위 82도의 최남단 도달 신기록을 세웠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조기 귀국했다.[82]

님로드 탐험(1907-09년)에서 섀클턴과 세 명의 대원들은 남위 88도, 남극점에서 불과 97해리(180km) 지점에 도달하여 최남단 도달 신기록을 세웠다. 또한, 다른 대원들은 남극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인 에레버스 산 등반에 성공했다. 이러한 공로로 섀클턴은 귀국 후 에드워드 7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83]

1911년 12월,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하면서 남극점 경쟁은 막을 내렸다. 섀클턴은 이제 남극점을 경유하는 남극 대륙 횡단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이를 위해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1914-17년)를 준비했다. 그러나 탐험은 엔듀어런스 호가 유빙에 갇혀 파괴되는 재난을 겪었다. 대원들은 해빙 위에서 야영을 하고, 구명정을 타고 코끼리 섬에 도착했으며, 마지막으로 섀클턴이 사우스조지아 섬까지 720해리를 항해하여 탈출에 성공했다.

탐험 외의 섀클턴의 삶은 불안정하고 불만족스러웠다. 그는 일확천금을 좇아 투기적인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하고 막대한 부채를 안고 죽었다. 죽었을 때는 언론에서 크게 칭찬받았지만, 이후 라이벌 스콧에게 명성이 가려져 잊혀졌다. 20세기 후반에 섀클턴은 "재발견"되었고, 극한 상황에서 팀을 유지하는 리더십의 역할 모델로 부상했다.

섀클턴은 귀국 직후 공식 행사 참석, 강연, 사교 활동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그리고 명성을 활용해 사업으로 재산을 쌓으려 했으나, 담배 회사, 우표 판매 계획, 광산 개발 등은 모두 실패했다. 주요 수입원은 강연 여행의 보수였다. 1910년 9월 가족과 함께 노퍽의 셰링엄으로 이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남극으로 향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섀클턴의 남극 탐험 재개 여부는 테라노바 원정의 결과에 달려 있었다. 1912년 봄,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했고, 섀클턴은 윌리엄 스페어스 브루스가 발표한 웨델 해 횡단 계획에 관심을 보였다. 브루스는 자금 조달에 실패했고, 섀클턴이 그의 계획을 채택하는 것을 기뻐했다. 빌헬름 필히너도 유사한 계획을 세웠지만, 1912년 12월 그의 원정이 실패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섀클턴은 남극 대륙 횡단을 실행에 옮겼다.

7. 1. 대중적 영웅

섀클턴이 귀국하자 대중으로부터 명예가 쏟아졌다. 1909년 7월 10일 에드워드 7세를 알현했고, 로열 빅토리아 훈장 사령관으로 서임되었다. 11월에는 국왕의 생일 축하 명단에서 기사 작위를 받아 '어니스트 섀클턴 경'이 되었다.[80] 영국 왕립 지리학회(RGS)는 그에게 금메달을 수여했다. 스콧 선장에게 주어졌던 것보다 작은 메달을 수여하자는 제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11월 23일, ''님로드'' 탐험대 해안 파견대원들은 은색 극지 훈장을 받았고, 섀클턴은 이전에 받은 메달에 부착할 수 있는 메달 고리를 받았다.[79] 그는 또한 영국 선원에게 중요한 영예인 트리니티 하우스의 젊은 형제로 임명되었다.

섀클턴에게 수여된 공식적인 명예 외에도, 그의 남극 탐험은 영국에서 큰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아일랜드에서도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더블린 ''이브닝 텔레그래프''는 "아일랜드인이 남극에 거의 도달했다"라는 헤드라인을 달았고, ''더블린 익스프레스''는 "아일랜드인으로서 그의 유산인 자질"을 언급했다.

섀클턴의 동료 극지 탐험가들도 존경심을 표했다. 로알 아문센은 RGS 비서 존 스콧 켈티에게 보낸 편지에서 "섀클턴의 이 업적으로 영국은 [...] 결코 능가할 수 없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라고 썼다. 프리드쇼프 난센은 섀클턴의 아내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 "모든 면에서 완전한 성공을 거둔 독특한 원정"을 칭찬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탐험으로 인해 섀클턴은 채권자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다.

7. 2. 1910-1914년

귀환 직후 섀클턴은 강도 높은 공개 활동, 강연, 사교 활동 일정을 소화했다. 그는 이후 사업계에서 거액을 벌어들여 자신의 명성을 활용하려 했다. 그가 홍보하고자 했던 사업들 중에는 담배 회사, 뉴질랜드 당국으로부터 남극 우체국장으로 임명된 것을 바탕으로 "에드워드 7세 국왕 영토"가 오버프린트된 수집가용 특별 우표 판매 계획, 현재 루마니아의 일부인 나지바냐 시 근처에서 획득한 헝가리 광산 채굴권 개발 등이 있었다. 이러한 사업들이 모두 성공하지 못하면서 섀클턴의 주요 수입원은 강연 투어에서 얻는 수익이었다. 그는 1910년 9월, 가족과 함께 노퍽의 셔링엄으로 이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쪽으로 돌아갈 생각을 품고 있었다. 에밀리에게 "나는 다시는 남쪽으로 가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것을 생각해 봤으며, 이제 내 자리는 집이다."라고 썼다.[79] 그는 케이프 아데어와 가우스 산 사이의 남극 해안으로의 과학 탐험에 대해 더글러스 모슨과 논의했으며, 1910년 2월 RGS에 이와 관련하여 편지를 썼다.

섀클턴이 남극점 탐험을 재개할 수 있을지는 1910년 6월 15일 카디프에서 출항한 스콧의 ''테라 노바'' 원정의 결과에 달려 있었다. 1912년 초, 세계는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스콧 원정대의 운명은 당시 알려지지 않았다. 섀클턴은 영국 탐험가 윌리엄 스피어스 브루스가 발표했다가 포기한 프로젝트, 즉 웨델 해의 상륙 지점에서 시작하여 맥머도 해협에서 끝나는 남극 대륙 횡단에 관심을 돌렸다. 브루스는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고, 섀클턴이 자신의 계획을 채택하는 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이는 1911년 5월 브레머하벤을 출발한 독일 탐험가 빌헬름 필히너가 따르고 있던 계획과 유사했다. 1912년 12월, 필히너의 탐험이 실패했다는 소식이 사우스조지아에서 도착했다. 섀클턴은 자신의 말로, 대륙 횡단 여행은 남아 있는 "남극 여행의 가장 큰 주요 목표"였고, 이제 그에게 열려 있었다.

8.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 (1914-1917)

1913년 12월, 섀클턴은 "제국 남극 횡단 탐험대"라는 새로운 탐험 계획을 발표했다. 이 탐험은 엔듀어런스 호와 오로라 호, 두 척의 배를 이용할 예정이었다. 섀클턴이 이끄는 주 탐험대는 ''엔듀어런스'' 호를 타고 바델 해의 바셀 만을 목표로 항해하여, 그곳에서 6명의 대원이 남극 대륙 횡단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한편, ''오로라'' 호는 애니어스 맥킨토시 선장이 이끄는 지원 부대를 대륙 반대편 맥머도 해협으로 수송하여, 비어드모어 빙하까지 보급 기지를 설치하는 임무를 맡았다.[20]

섀클턴은 탐험대 지원을 위해 상당한 자금 모금 능력을 발휘했다. 영국 정부가 1만 파운드를 지원했지만, 주로 개인 기부금을 통해 재정을 마련했다. 황마 재벌 제임스 케어드 경은 2만 4천 파운드를, 미들랜즈의 사업가 프랭크 더들리 도커는 1만 파운드를, 담배 상속녀 자넷 스탠콤-윌스는 "넉넉한" 액수를 기부했다.[20] 대중의 관심이 높아 섀클턴은 5,000명 이상의 탐험대 지원서를 받았다.[20]

섀클턴은 기술적 능력만큼이나 인성과 기질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면접 및 선발 방식은 때때로 독특했다.[20] 그는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완화하여 장교, 과학자, 선원들 간에 배의 잡일을 동등하게 분배하도록 했고, 저녁 식사 후에는 매일 저녁 선원들과 어울려 노래, 농담, 게임을 함께 즐겼다.[20] 최종적으로 56명의 선원이 선발되었고, 각 배에 28명씩 배치되었다.[20]

1914년 8월 3일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지만, ''엔듀어런스'' 호는 윈스턴 처칠 해군 제1경의 지시에 따라 "출항"하여 8월 8일 영국 해역을 떠났다. 섀클턴은 9월 27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배에 합류했고, 10월 말 사우스조지아로 출항하면서 데일리 크로니클에 전보를 보내 "우리는 작은 방식으로나마 과학과 발견에서 승리를 더하고, 우리 국가가 명예와 자유를 위해 달성할 확실한 승리에 기여하기를 희망합니다."라는 애국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20]

8. 1. 승무원

프랭크 워슬리 선장이 인듀어런스 호를, 애니어스 맥킨토시 선장이 오로라 호를 지휘했다.[21] 프랭크 와일드는 ''인듀어런스'' 호의 부선장이었으며,[21] 일등 항해사는 라이오넬 그린스트리트였다.[21] 기상학자는 밴조 연주에 능숙했던 레너드 허시였다.[21] 과학진 책임자는 외과 의사 제임스 맥길로이였고, 지질학자 제임스 워디가 포함되었다.[21] 알렉산더 맥클린은 두 명의 외과 의사 중 한 명이었고,[21] 70마리의 개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톰 크린은 개 관리 책임을 맡았다. 항해사 휴버트 허드슨,[21] 물리학자 레지날드 제임스,[21] 목수 해리 맥니시, 생물학자 로버트 클라크도 승선했다.[21] 탐험대 공식 사진가 프랭크 헐리는 위험한 사진 촬영으로 유명해졌다.[51] 퍼스 블랙보로는 승무원 지원에 거절당한 후 배에 몰래 숨어든 19세 웨일스인 선원이었는데, 섀클턴은 그를 발견하고 화를 냈지만 상황이 너무 늦었음을 깨닫고 배의 갤리에 배정했다.[22] 해리 맥니시가 기르던 미세스 치피라는 이름의 수컷 고양이가 배에 있었는데, ''인듀어런스'' 호가 침몰했을 때 이후의 고난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사살되었다.[23]

8. 2. 인듀어런스 호의 상실

인듀어런스는 1914년 12월 5일 사우스조지아 섬을 떠나 웨델 해로 향했고, 바셸 만을 목표로 했다. 배가 남쪽으로 얼음 속을 항해하면서 전진 속도를 늦추는 1년생 빙과 마주쳤다. 웨델 해 깊숙이 들어서자 상황은 점차 악화되었고, 마침내 1915년 1월 19일 "인듀어런스"호는 유빙에 갇히게 되었다.[24]

인듀어런스호 손실 이후의 섀클턴


2월 24일, 다음 해 봄까지 갇히게 될 것을 깨달은 섀클턴은 배의 일상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겨울 기지로 개조하라고 명령했다. "인듀어런스"호는 이후 몇 달 동안 얼음과 함께 천천히 북쪽으로 표류했다. 9월에 봄이 오자 얼음이 깨지고 움직이면서 배의 선체에 극심한 압력이 가해졌다.

섀클턴은 얼음에서 풀려난 배가 바셸 만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10월 24일 물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그의 희망은 무너졌다. 며칠 후, 남위 69°5′, 서경 51°30′ 지점에서 그는 "침몰한다!"라고 외치며 배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사람, 식량 및 장비는 얼음 위의 캠프로 옮겨졌다. 1915년 11월 21일, "인듀어런스"호의 잔해는 마침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섀클턴과 일행은 거의 두 달 동안 크고 평평한 유빙 위에서 캠프를 치고 약 떨어진 곳에 비축품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포울레트 섬으로 표류하기를 희망했다. 이 섬까지 얼음 위를 걸어가는 데 실패한 후, 섀클턴은 다른 유빙에 또 다른 영구적인 캠프(패션스 캠프)를 세우고, 얼음의 흐름에 의존하여 안전한 상륙 지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3월 17일까지 그들의 얼음 캠프는 포울레트 섬에서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통과할 수 없는 얼음으로 분리되어 그곳에 도달할 수 없었다. 4월 9일, 그들의 유빙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자, 섀클턴은 승무원들에게 구명정에 올라 가장 가까운 육지로 향하라고 명령했다.

5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지친 그들은 "인듀어런스"호가 침몰한 곳에서 떨어진 코끼리 섬에 세 척의 구명정을 정박했다. 그들이 497일 만에 처음으로 굳건한 땅을 밟은 순간이었다. 섀클턴은 대원들을 매우 걱정한 나머지, 보트 여행 중에 자신의 장갑을 잃어버린 사진작가 프랭크 헐리에게 자신의 벙어리장갑을 주었다. 그 결과 섀클턴은 손가락에 동상을 입었다.

8. 3. 구명정 항해

코끼리 섬은 어떤 해상 항로와도 멀리 떨어진,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이었다. 우연히 발견되어 구조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기에, 섀클턴은 사우스조지아 섬의 포경 기지로 작은 배를 타고 가는 위험한 항해를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탐험대의 주요 후원자의 이름을 딴, 가장 튼튼한 약 6.10m의 구명정 가 이 항해에 선택되었다. 배의 목수인 해리 맥니시는 배의 측면을 높이고, 용골을 강화하고, 나무와 캔버스로 임시 갑판을 만들고, 유성 페인트와 물개 피로 작업을 밀봉하는 등 다양한 개선을 했다.

섀클턴은 항해를 함께 할 5명의 동료를 선택했다. 항해를 책임질 배의 선장 프랭크 워슬리, "함께 가고 싶다"고 간청한 톰 크린, 강력한 선원 존 빈센트와 티모시 맥카시, 그리고 맥니시였다. 섀클턴은 사우스조지아에 그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보트와 승무원 모두 잃게 될 것을 알았기에, 4주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충분한 물품만 챙기라고 고집했다. ''제임스 케이드''는 1916년 4월 24일에 출항했고, 그 후 15일 동안 폭풍우 치는 바다에 몸을 맡긴 채 전복의 위험 속에서 남극해를 항해했다. 워슬리의 항해 기술 덕분에 5월 8일 사우스조지아의 절벽이 시야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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