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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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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상(양양)은 조조 휘하의 인물로, 219년 관우의 북벌 당시 양양성을 끝까지 지켜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남양군 박망현 출신으로, 무맹도위, 여절중랑장, 비장군을 거쳐 관내후에 봉해졌으며, 양양 태수로 13년간 재임하며 선정을 베풀어 평적장군으로 승진하고 노정후에 봉해졌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인의 부장으로 등장하며, 관우에게 패하여 생사가 불분명하게 묘사된다. 촉한의 여예와 아버지 여상의 관계가 언급되지만, 양양태수 여상과 동일 인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2. 생애

219년(건안 24년), 관우북벌하여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였다. 여상은 많은 가 쏟아져 한수가 범람하는 와중에도 양양성을 끝까지 지켜냈다.

2. 1.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208년 조조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남정하자, 여상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남정에 가담하여 전공을 세워 음덕정후에 봉해졌고, 양양 태수를 영했다.[2] 양양태수로서 13년 동안 영내의 불량배들을 흩어지게하고 백성을 잘 규율로 다스렸으며, 삼효를 백성들에게 가르쳤다.[2] 이로인해 평적장군으로 승진했으며, 노정후로 개봉되었다.[2] 219년, 관우가 북벌해오자, 여상은 양양성에서 포위되었으나, 성내를 법률로 잘 지켜 병사들의 반란을 막았기 때문에, 관우가 양양성을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2] 관우가 패사한 후, 220년 정월,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가 위왕을 계승하자, 여상은 횡해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서악도향후에 봉해졌고, 식읍 700호를 영했다.[2]

2. 2. 양양 태수 시절

여상은 남양군 박망현 사람으로, 주 내에서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꿩과 같은 높은 성벽을 만들고 창을 들어 잘 싸웠으며, 신중하게 지켜 적으로 하여금 적국 내에 봉쇄되게 하여 사방의 인접한 곳의 침략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평가받았다. 이러한 공적으로 무맹도위, 여절중랑장, 비장군을 제수받았고, 관내후에 봉해졌다. 208년 (건안 13년), 조조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남정하자, 여상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남정에 가담하여 전공을 세워 음덕정후에 봉해졌고, 양양태수를 역임했다.[2]

13년 동안 양양태수로 재직하면서, 영내의 불량배들을 흩어지게 하고 백성을 규율로 잘 다스렸으며, 삼효[2]를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이 공로로 평적장군으로 승진했으며, 노정후로 개봉되었다. 219년 (건안 24년), 관우가 북벌해오자, 여상은 양양성에서 포위되었으나, 성내를 법률로 잘 지켜 병사들의 반란을 막았기 때문에, 관우가 양양성을 공격해도 함락시킬 수 없었다. 관우가 패사한 후, 220년 (건안 25년) 정월, 조조가 사망하고 조비가 위왕을 계승하자, 여상은 횡해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서악도향후에 봉해졌고, 식읍 700호를 받았다.

2. 3. 관우의 북벌과 양양성 방어

219년(건안 24년), 관우북벌하여 번성과 양양성을 포위하였다. 여상은 많은 가 쏟아져 한수가 범람하는 와중에도 양양성을 끝까지 지켜냈다.[1] 여상은 성내를 법률로 잘 다스려 병사들의 반란을 막았기 때문에, 관우는 양양성을 함락할 수 없었다.[1]

2. 4. 최후

『횡해장군려군비명』에 따르면, 여상은 남양군 박망현 사람으로, 주 내에서 용명을 떨쳤고, 꿩과 같은 높은 성벽을 만들고 창을 들어 잘 싸웠으며, 신중하게 지켜 적으로 하여금 적국 내에 봉쇄되게 하여 사방의 인접한 곳의 침략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평가받았다. 무맹도위, 여절중랑장, 비장군을 각각 제수받았고, 관내후에 봉해졌다.[2] 황초 2년(221년) 정월, 61세로 사망했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삼국지연의》에서 여상은 번성을 수비하던 조인의 부장으로 등장한다. 조인은 만총이 농성을 주장했음에도 하후존과 적원의 의견을 따라 출성했다가 관우의 유인책에 빠져 전력만 잃는다. 관우가 양양을 점령하고 한수를 건너오자, 만총은 굳게 지키기만 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상은 강가로 출격해 수천 명의 병력을 달라고 요청한다. 만총이 안된다고 하자, 여상은 "그대들 문관의 만 듣고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적을 격퇴하겠소? ‘적이 반쯤 강을 건넜을 때 공격하라’는 병법도 듣지 못했단 말이오? 관우군이 을 건너고 있는데 공격도 안 해보겠소? 적이 성 밑 해자까지 오면 막기 더 어려울 것이오."라며 맞받아친다.

조인은 여상에게 2,000명의 병력을 주어 강가로 내보낸다. 그러나 병사들은 관우의 과 같은 위엄을 보고 싸우기도 전에 도망간다. 여상이 아무리 소리쳐도 막을 수 없었다. 관우가 그대로 공격해오자 여상의 군대는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번성으로 후퇴한다. 이후 여상의 생사는 알 수 없으며,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4. 여예와의 관계

촉한의 여예는 남양군 사람이며, 그의 아버지 여상은 유언익주로 들어가는 것을 도왔지만, 그 후 장로의 책략으로 길이 막혀 여예와 생이별하게 되었다고 한다.[3] 또한, 여예의 아버지 여상이 양양 태수 여상과 동일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다.

참조

[1] 서적 三国志 徐晃伝
[2] 서적 礼記 祭義
[3] 서적 三国志 呂乂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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