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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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번성 전투는 219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자 관우가 북쪽으로 진격하여 조조군을 공격한 일련의 전투를 말한다. 관우는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고 우금의 군대를 수몰시키는 등 승리했으나, 손권의 배신으로 형주를 잃고 관우가 사망하면서 촉한 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로 인해 촉한은 이릉 전투에서 패배하고 융중대계가 좌절되었으며, 삼국 정립의 구도가 더욱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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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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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번성 전투 |
일부 | 후한 말의 전쟁 |
시기 | 219년 8월경 – 219년 12월 |
장소 | 번성 (현재의 중국 후베이성 샹양시 판청구) |
결과 | 조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조조 |
교전 2 | 유비 |
지휘관 및 지도자 | |
조조군 지휘관 | 조조 (총괄 전략가, 증원군) 조인 우금 [[파일:White flag icon.svg|14px|항복|link=}]] 방덕 [[파일:Skull and Crossbones.svg|14px|처형|link=}]] 서황 만총 문빙 |
유비군 지휘관 | 관우 관평 요화 조루 |
병력 규모 | |
조조군 병력 | 약 100,000명 |
유비군 병력 | 70,000+명 (항복한 부대 30,000명 + 수천 명의 반군) |
피해 규모 | |
조조군 피해 | 40,000+명 |
유비군 피해 | 40,000+명 |
전투 지도 | |
![]() |
2. 배경
212년~213년 유비는 서촉 공방전에서 익주 자사 유장을 격파하고 익주와 형주를 차지했다. 215년 조조는 한중 공방전을 벌여 한중의 장로를 제압하고 한중을 장악했으나, 219년 유비와의 한중 전투에서 크게 패해 한중을 잃었고, 유비는 한중 왕위에 올랐다. 이에 조조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관우가 지키는 형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조조는 유비가 형주를 선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군대의 피로와 보급 문제로 계획을 보류해야 했다. 한편, 허창과 륙혼현 등 후한 내부에서는 조조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2. 1. 유비의 익주와 형주 점령
유비는 212년~213년에 서촉 공방전에서 익주 자사 유장을 무찌르고 익주와 형주 두 지역을 차지하였다. 219년 5월 한중 전투에서 조조를 물리치고 한중군을 점령한 후, 219년 6월 맹달과 유봉을 파견하여 방릉(房陵; 현재의 후베이성 팡현)과 상용(上庸; 현재 후베이성 주산현 북쪽)을 점령함으로써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1]2. 2. 조조의 한중 점령과 상실
212년부터 213년까지 유비는 서촉 공방전에서 익주 자사 유장을 격파하고 익주와 형주 두 지역을 확보하였다.215년, 조조는 한중 공방전을 일으켜 한중의 장로를 제압하고 한중을 장악했다. 그러나 219년, 유비와의 한중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한중을 상실했고, 유비는 한중 왕위에 올랐다.
2. 3. 조조와 손권의 동맹
212년~213년 유비는 서촉 공방전에서 익주 자사 유장을 무찌르고 익주와 형주 두 지역을 차지한다.215년 조조는 한중 공방전을 벌여 한중의 장로를 토벌하고 한중을 손에 넣지만, 219년 유비와의 한중 전투에서 크게 패해 한중을 잃고 유비는 한중 왕에 오른다. 이에 조조는 손권과 동맹을 맺고 관우가 지키는 형주를 공격한다.
2. 4. 후한 내부의 반란
218년, 허창에서 어의(御醫) 기본은 소경(少府) 경기(耿紀), 승상(丞相) 위황(韋晃)과 함께 조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어 처형되었다.[1] 같은 해 11월, 조조는 관우를 공격하기 위해 장군 조인을 완(宛; 현재의 허난성 뤄양시 넌양현)으로 보냈다. 그러나 조인의 무분별한 징병과 강제 노역으로 인해, 조조 휘하의 무관 후음(侯音)은 부관 위개(衛開)와 완의 시민 수천 명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관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2][3] 219년 2월, 조인은 반란을 진압하고 후음과 위개를 죽였으며, 완의 시민들을 학살했다.[4]한편, 강제 징병과 노동에 지치고 분노한 농민들은 반란 지도자 손랑(孫狼)이 이끄는 륙혼현(陸渾, 현재 허난성 숭현 동남쪽에 위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손랑은 현의 등록관을 죽이고 관우에게 귀순하여 관우를 위해 약탈자로 활동하는 군사 지휘권을 받았다.[5][6]
3. 전투의 전개
219년 7월,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며 북진을 시작했다. 이 시기는 유비가 한중 전투에서 승리하여 조조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노린 절묘한 선택이었다.[1] 조인은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219년 봄, 조조는 우금에게 조인을 도와 관우를 공격하게 하였다.[1]
하지만, 관우는 장마철에 미리 대비하여 수공을 이용, 우금이 이끄는 조조 군대를 격파했다. 우금은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고, 방덕은 처형되었다.[1] 관우는 번성과 양양을 포위했고, 곤경에 처한 조인은 만총의 만류로 필사적으로 버텼다.[1] 우금의 항복과 군사들의 수몰은 조조 세력에 큰 충격을 주었고, 중원 일대의 반란 세력들이 관우에 호응할 정도로 중국 전체가 진동했다. 조조는 수도를 옮기는 것까지 의논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꼈다.[1]
관우의 세력이 확장되자, 손권은 이를 경계하여 조조와 밀약을 맺고 형주를 기습 공격했다. 215년 형주 쟁탈전 등으로 손권과 관우의 사이는 이미 험악해진 상태였다.[18]
徐晃중국어이 도착하기 전, 조조는 증원군을 이끌고 서황에게 합류하도록 명령하면서, 모든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서황은 번성 북쪽의 양릉에 진격하여 주둔했다. 서황의 군대는 대부분 신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격을 자제하라는 조조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관우는 서황의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서황은 관우군 선봉대의 취약한 연결 고리를 노려 기회를 잡았다.[15]
서황은 사총을 공격 목표로 삼고, 위두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흘려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지휘하여 야전을 걸었지만, 서황의 군대는 이미 대군이었고, 관우군은 손권의 배신을 알고 사기가 저하되어 패배했다. 관우는 퇴각했지만 서황은 추격하여 포위망을 돌파했다.
결국 관우는 번성에서 철수했지만, 면수에 머물렀다. 그러나 강릉과 공안을 손권에게 빼앗긴 것을 알고 퇴각했다.[20]
3. 1. 관우의 북진과 초기 승리
는 219년 7월, 번성을 공격하며 북진을 시작했다. 이 시기는 유비가 한중 전투에서 승리하여 조조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노린 절묘한 선택이었다.[1]조인은 218년 9월 완에서 일어난 후음의 반란을 진압하고 번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219년 봄, 조조는 우금에게 조인을 도와 관우를 공격하게 하였다.[1]
하지만, 관우는 장마철에 미리 대비하여 수공을 이용, 우금이 이끄는 조조 군대를 격파했다. 우금은 항복하여 포로가 되었고, 방덕은 처형되었다.[1] 관우는 번성과 양양을 포위했고, 곤경에 처한 조인은 만총의 만류로 필사적으로 버텼다.[1]
우금의 항복과 군사들의 수몰은 조조 세력에 큰 충격을 주었고, 중원 일대의 반란 세력들이 관우에 호응할 정도로 중국 전체가 진동했다. 조조는 수도를 옮기는 것까지 의논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꼈다.[1]
관우는 정군산 전투에서 유비가 조조에게 승리하고 한중을 빼앗자 전장군으로 임명되었고, 형주에서의 군권을 받았다. 그리고 조조령의 사건을 보고, 이 해 7월에 아들 관평과 부하인 조루 등과 함께 진군하여, 양양과 번성을 포위했다.[6]
당시 번성은 조인이, 양양은 여상이 지키고 있었지만, 조조는 관우의 진군을 알고 우금을 대장으로 한 칠군을 원군으로 파견했고, 조인도 방덕을 유격군으로 성 밖에 내보내 관우와 싸우게 했다. 하지만 때마침 긴 장마로 한수가 범람하여, 칠군은 수몰되고 말았다. 우금 자신은 난을 피했지만, 관우가 큰 배를 타고 공격해 오자 항복했다. 방덕은 끝까지 저항을 계속했지만 붙잡혀 참수되었다.[6]
3. 2. 조조의 위기감과 수도 이전 논의
219년, 관우가 번성 전투에서 승리하자 조조는 큰 위협을 느꼈다. 당시 조조는 유비에게 한중을 빼앗긴 상황이었고, 형주 북부의 번성마저 위태로워졌다. 후음 등의 반란과 백성들의 동요는 조조의 지배력을 더욱 약화시켰다.[10][11]이에 조조는 수도를 옮기는 방안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사마의와 장집은 이에 반대하며, 손권과의 동맹을 통해 관우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유비와 손권의 동맹이 불안정하며, 손권이 관우의 세력 확장을 경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12] 결국 조조는 수도 이전을 철회하고 손권과의 협력을 모색하게 된다.
3. 3. 손권의 배신과 형주 기습
關羽|관우중국어의 세력이 확장되자, 손권은 이를 경계하여 조조와 밀약을 맺고 형주를 기습 공격했다. 215년 형주 쟁탈전 등으로 손권과 관우의 사이는 이미 험악해진 상태였다.[18] 217년에는 대 유비 친화파였던 노숙이 사망하고, 대 유비 강경파였던 여몽이 그 뒤를 이었다. 여몽은 "장강을 넘어 조조와 서주를 다투어도 얻는 것은 없다. 관우를 제거하고 장강에 근거하는 것이 손권을 위하는 길이다"라고 진언했고, 손권도 이에 동의했다.[19]관우가 오나라와 촉나라 국경에 설치된 상관의 식량을 마음대로 가져갔다는 소식을 듣자,[19] 손권은 마침내 여몽을 선봉으로 삼아 형주를 공격했다. 여몽과 육손 등은 비밀리에 진군했다. 이 과정에서 관우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남군 태수 미방과 공안의 수장 사인은 배신하고 손권에게 항복했다. 이들의 배신으로, 관우가 지배하던 형주 남군은 단기간에 손권에게 정복되었다.
3. 4. 서황의 반격과 관우의 패배
徐晃중국어이 도착하기 전, 조조는 서상(徐商중국어)과 여건()에게 증원군을 이끌고 서황에게 합류하도록 명령하면서, 모든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서황은 번성 북쪽의 양릉([陽陵중국어])에 진격하여 주둔했다. 서황의 군대는 대부분 신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격을 자제하라는 조조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관우는 서황의 위협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서황은 관우군 선봉대의 취약한 연결 고리를 노려 기회를 잡았다. 서황은 긴 참호를 파서 관우의 선봉대를 차단하는 척하며 거짓 인상을 주었고, 관우는 이 계략에 속아 후퇴했다.[15] 그 결과 서황의 군대는 연(偃중국어)의 버려진 요새를 점령하고 관우의 주력 부대를 향해 진격했다. 이때 은서(殷署중국어)와 주개(朱蓋중국어)가 이끄는 10,000명의 노련한 병사들이 서황에게 합류하여 서황군은 더욱 강화되었다.서황은 사총을 공격 목표로 삼고, 위두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흘려 사총을 공격했다. 관우는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지휘하여 야전을 걸었지만, 서황의 군대는 이미 대군이었고, 관우군은 손권의 배신을 알고 사기가 저하되어 패배했다. 관우는 퇴각했지만 서황은 추격하여 포위망을 돌파했다.
결국 관우는 번성에서 철수했지만, 면수에 머물렀다. 그러나 강릉과 공안을 손권에게 빼앗긴 것을 알고 퇴각했다.[20]
4. 전투의 결과
서황은 위터우(圍頭)에 대한 공격 소문을 퍼뜨렸지만, 실제로는 쓰중(四冢)을 기습 공격했다. 관우는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지만, 매복에 걸려 패배했다. 서황은 관우의 본진까지 쳐들어가 배신자 호휴와 부방을 죽였다. 관우는 번성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후퇴했다.[18]
조조 휘하 지휘관들은 관우를 추격하려 했으나, 조엄은 손권과 싸우게 함으로써 조조의 적들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인은 조엄의 의견에 동의하여 추격하지 않았고, 조조 역시 같은 이유로 추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4. 1. 관우의 죽음
관우가 남쪽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배후 기지인 강릉현과 공안현이 모두 손권의 서쪽 군대 사령관인 여몽에게 항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7] 여몽은 관우 부하들의 처자식을 인질로 잡았지만, 그들과 형주의 시민들을 극진히 대했다. 관우의 병사들은 형주가 손권에게 함락되었고 가족들이 안전하다는 소식을 듣고 싸울 의지를 잃고 탈영했다.관우는 남은 병사 몇 명과 함께 현재의 후베이성당양시 동남쪽에 위치한 맥성 (麥城)에 고립되었고, 손권의 군대는 삼면에서, 조조의 군대는 북쪽에서 압박해왔다. 관우가 탈출을 시도했을 때, 그와 그의 생존자들, 그의 아들 관평과 부하 조루(趙累)는 주연과 반장이 이끄는 손권의 장수들에게 장향 (漳鄉) 근처에서 매복에 포획되었다.[17] 이후 손권의 군대는 관우, 관평, 조루를 임저 (臨沮)에서 처형했다.[17]
손권은 전투 후 관우의 머리를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는 그를 귀족의 장례로 처리하기로 결정하고 그의 머리를 정중하게 예우하여 매장했다.[17]
4. 2. 형주의 상실
關羽|관우중국어가 위두와 쓰중에 병력을 분산 배치한 상황에서, 서황은 위두 공격 소문을 퍼뜨린 후 쓰중을 기습했다. 관우는 구원병을 이끌었으나 매복에 걸려 패했고, 서황은 관우의 본진까지 쳐들어가 배신자 호휴와 부방을 처단했다. 결국 관우는 번성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후퇴했다.[18]조조 측 지휘관들은 관우 추격을 주장했으나, 조엄은 손권과의 싸움을 유도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조인은 조엄의 의견에 따라 추격하지 않았고, 조조도 추격 금지령을 내렸다.
215년 형주 쟁탈전 이후 손권과 관우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217년 노숙 사후 강경파 여몽이 도독이 되었다. 여몽은 관우 제거와 장강 확보를 주장했고, 손권도 동의했다.
관우가 오나라와의 국경 식량을 무단으로 사용하자,[19] 손권은 여몽을 선봉으로 보냈다. 여몽과 육손은 은밀히 진군했고, 관우에게 불만을 품은 남군 태수 미방과 사인이 배반하여 항복하면서, 관우가 지배하던 형주 남군은 단기간에 손권에게 넘어갔다.
4. 3. 이릉 대전의 발발
유비는 관우의 죽음에 분노하여 동오를 공격하였고, 이는 이릉 대전으로 이어졌다.[1]5. 《삼국지연의》에서의 번성 전투
《삼국지연의》에서 번성 전투는 관우의 북진과 함께 더욱 극적으로 묘사된다.
관우는 조조의 동생 조인이 지키는 양양성으로 진군했다. 조인은 만총에게 번성을 맡기고, 부장 적원과 효장 하후존과 함께 관우에 맞섰으나, 하후존이 죽고 조조군은 양쯔 강에 빠져 죽는 등 대패했다.[1] 조인은 번성으로 후퇴하여 방어에 집중했고, 관우는 왕보에게 강가에 봉화대를 설치하여 동오의 공격에 대비하게 했다.[1]
번성에서 조인은 부장 여상에게 군사 2000명을 주어 관우와 싸우게 했으나 패배했고, 조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조조는 우금을 정남장군, 방덕을 정서도선봉으로 삼아 관우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관우는 큰물을 내어 우금의 진지를 쓸어버리는 계략을 성공시켰다. 우금은 사로잡혀 목숨을 구걸했고, 방덕은 끝까지 저항하다 주창에게 사로잡혀 처형되었다.[1]
조조는 허창 천도를 고려했으나, 사마의와 장제의 건의로 서황을 보내 조인을 구원하게 했다. 또한, 손권에게 사자를 보내 관우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요청했다.[1] 손권은 여몽을 대도독으로 삼아 형주 정벌에 나섰고, 여몽은 육손의 계책으로 봉화대를 점령하고 형주성을 함락시켰다.[1]
관우는 서황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양양성으로 후퇴했지만, 이미 형주성이 여몽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관우는 마량과 이적을 성도로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1]
조인은 번성의 포위가 풀리자 조조와 합류했고, 여몽은 장흠을 앞세워 관우를 공격했다. 정봉과 서성의 협공으로 관우는 맥성으로 후퇴했다. 요화가 유봉과 맹달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관우는 관평, 조루와 함께 서북쪽으로 도주를 시도했다.[1]
그러나 주연과 반장의 공격으로 조루가 전사하고, 관우와 관평은 마충에게 사로잡혔다. 손권은 관우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관우가 거절하자 결국 관우와 관평 부자를 처형했다.[1] 관우가 죽은 후, 적토마는 굶어 죽었고, 청룡언월도는 이릉 대전에서 관흥이 반장을 죽이면서 다시 서촉으로 돌아가게 되었다.[1]
5. 1. 부사인, 미방의 실수와 처벌
관우는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부사인과 미방을 선봉으로 삼았다. 그러나 부사인과 미방은 술을 마시다 실수로 불을 내어 군량과 마초를 모두 태워버렸다.[1]이에 관우는 부사인과 미방을 처벌하고 요화를 선봉장으로, 아들 관평을 부장으로 삼았다. 마량, 이적, 호반 등을 참모로 삼아 출정하였고, 왕보는 관우에게 미방과 부사인을 주의하라고 간언했지만, 관우는 반준을 보내 지키게 하고 더 이상 대비하지 않았다.[1]
5. 2. 화타의 치료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던 도중 팔에 활을 맞아 부상을 당했으나, 명의 화타의 치료로 목숨을 구했다.[1]5. 3. 수공(水攻)의 극적 묘사
關羽水淹七軍|관우 수엄칠군중국어은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된 극적인 장면이다. 관우는 큰물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는 계략을 사용했다. 댐을 건설하여 물을 모아두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댐을 터뜨려 조조 군을 물에 잠기게 하는 방식으로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17]5. 4. 여몽의 계략과 형주 함락
關羽|관우중국어는 즉시 군사를 일으킬 채비를 해 부하 부사인과 미방을 선봉으로 삼았다. 그러나 부사인과 미방이 실수로 술을 마시다 불을 내어 군량과 마초가 모두 타 버리는 사고를 냈다.[18]이에 관우는 부사인과 미방을 처벌하고 부하 요화를 선봉장으로 세운 뒤 아들 관평을 부장으로 삼고 스스로 중군을 통솔하며 마량, 이적, 호반 등을 참모로 삼아 출정길에 올랐다. 이때 호반은 비시와 함께 한중왕 유비를 뵙기 위해 서천으로 떠났다.
관우가 양양성으로 나가자 조조의 동생 조인은 만총에게 번성을 지키게 한 다음 부장 적원, 효장 하후존과 함께 나갔지만 관우의 계략에 빠져 하후존이 관우에게 죽고 관평이 승세를 몰아 조조군을 추격하면서 조조군의 태반이 양쯔 강에 빠져 죽고 말았다.
결국 조인은 번성으로 후퇴해 꼼짝하지 않고 성을 지켰고 관우는 수군사마 왕보를 시켜 강기슭에 연이어 20~30리(8~12km)마다 봉화대를 세워 동오의 공격에 대비하게 했다. 왕보는 관우에게 미방과 부사인을 주의하라고 간언했지만 관우는 치중 반준을 보내 지키게 하고는 더 이상 그것에 대해서는 대비를 하지 않았다.
한편, 손권은 조조의 서신을 받고 형주 정벌에 나서 여몽을 대도독으로 삼고, 손교는 군량과 양초를 담당하게 하였고 군사 3만 명과 쾌선 80척을 거느리게 하였다.[18]
이어 한당, 장흠, 주연, 반장, 주태, 서성, 정봉 등 7장수로 하여금 잇따라 출병케 하고 나머지는 모두 오후를 따라 뒤에서 후원하게 하였다. 먼저 여몽의 부하 육손이 계책을 내어 첫 봉화대의 군사들을 사로잡고 이어 다른 봉화대의 군사들까지 항복하게 만들어 봉화대를 점령했다.[18]
그리고 여몽은 사로잡은 형주군으로 하여금 형주성의 성문을 열게 하여 형주성은 여몽의 손에 넘어갔다. 여몽은 성 일대의 민심을 정비하고 반준을 치중으로 삼아 형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옥에 갇혀 있던 우금은 석방해 조조에게 돌려보내고 우번을 보내 공안의 부사인을 항복시켰다.[18]
그리고 부사인은 남군으로 가 미방도 항복시켰다. 번성을 포위하던 관우는 서황과 대치하게 되었는데, 서황은 부장 서상과 여건을 먼저 내보내 싸우고 기습 공격을 하여 관우를 패퇴시켰다. 이에 관우는 양양성으로 후퇴했지만 이미 형주성이 여몽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관량도독 조루의 건의로 마량과 이적을 성도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게 했다.[18]
5. 5. 관우와 관평의 최후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와 관평의 최후가 더욱 비극적으로 묘사된다. 관우는 맥성에서 거짓 항복 후 도주를 시도했으나, 반장과 주연에게 퇴로가 차단당하고 임저에서 아들 관평과 함께 사로잡혔다.[21] 손권은 관우를 회유하려 했으나, 늑대의 새끼를 기를 수 없다는 주변의 간언에 따라 관우와 관평을 참수했다.[22]6. 영향
219년 관우가 번성을 공격하여 조조를 압박했으나, 손권의 배신으로 형주를 잃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삼국시대의 세력 균형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형주 함락으로 촉한은 영토, 병력, 인민, 물자를 잃었고, 많은 인사가 사망하거나 오나라에 항복했다. 유비는 관우의 복수와 형주 탈환을 위해 222년 이릉 대전을 일으켰지만, 육손에게 대패하여 촉한은 형주를 완전히 상실하고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좌절되었다.
동오는 형주를 점령하고 백성들의 조세를 없애 민심을 얻었다. 육손은 촉한의 여러 장수들을 격파하고 수만 명의 병력을 흡수하는 등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조조는 손권을 형주 목으로 임명하고 형주 남부의 지배를 인정했다.
위나라에서는 관우에게 사로잡혔던 우금이 동오에 의해 위나라로 돌아왔지만, 조비에게 치욕을 당하고 분사했다. 관우에게 참수된 방덕의 아들 방회는 훗날 촉한 멸망 후 관우의 자손들을 몰살하여 복수했다.[25]
6. 1. 촉한의 약화
219년 관우의 죽음으로 유비는 동오 정벌을 일으켰으나, 222년 이릉 대전에서 크게 패했다. 이 전투에서 황충 등 유비가 아끼는 많은 장수와 군사들이 전사했고, 223년 유비는 병으로 눕고 숨을 거두었다.[25]형주 함락으로 유비는 영토, 병력, 인민, 물자를 잃었고, 많은 인재가 사망하거나 오나라에 항복했다. 222년 유비는 관우의 복수와 형주 탈환을 명분으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로 진군했지만, 육손의 계략에 빠져 역사적인 대패를 당했다(이릉 전투). 이 패배로 촉나라는 형주를 완전히 잃게 되었고,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시했던 천하삼분지계는 좌절되었다. 유비는 이듬해 223년 백제성에서 사망하고, 촉나라의 국사는 모두 제갈량에게 맡겨졌다.[25]
6. 2. 동오의 성장
219년 말부터 220년에 걸쳐 육손의 명을 받은 이이와 사정은 촉한의 부장인 점안·진봉을 격파하고 진봉을 생포했다.[25] 방릉 태수 등보와 남향 태수 곽목에게도 공격을 가해 이들을 격파했다.[25] 자귀의 호족인 문포·등개는 오에 반항했지만 육손이 사정을 이끌고 쳐부쉈다.[25] 유비군의 잔당을 토벌하거나 포로로 잡거나 귀순시킨 자의 합계는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25] 반준 등 주군 간부와 주민, 이민족들은 오에 귀순했고, 공안으로 옮겨졌던 익주의 옛 주인 유장도 신병을 오에 위임했다.[25] 형주의 평정은 육손에게 맡겨졌고, 육손은 의도에 들어가 의도 태수 번우를 몰아내고 그 직무를 수행했다.[25] 항복한 미방 등은 오를 따랐고, 반준은 『삼국지』의 『오지(오서)』에 육개와 함께 입전될 정도로 활약했다.[25] 그러나 모든 자가 오에 순종했던 것은 아니었고, 요화는 위장 공작을 벌여 촉으로 도망했다.[25] 습진·번추는 후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를 따랐던 반준에게 평정되었다.[25]조조는 번성·양양의 위기가 해제되자 상표하여 손권을 형주 목으로 삼고 형주 남부의 지배를 인정했다. 형주를 점령한 손권은 백성의 조세를 모두 없애 형주의 민심을 얻었다.
6. 3. 삼국 정립의 가속화
관우의 죽음으로 유비는 이릉 대전을 일으켰으나 크게 패하고, 황충 등 많은 장수와 군사들이 전사했다. 223년 유비는 사망한다.[25] 형주 함락으로 유비는 영토, 병력, 인민, 물자를 잃었고, 많은 인사가 사망하거나 오나라에 항복했다. 222년 유비는 "관우의 조문"과 "형주 탈환"을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로 진군했지만, 육손의 계략으로 역사적인 대패를 당했다(이릉 전투).[25] 이 패배로 촉나라는 형주를 완전히 잃었고, 제갈량이 유비에게 제시한 "천하삼분지계"는 좌절되었다.[25] 223년 유비는 백제성에서 사망하고, 촉나라의 국사는 모두 제갈량에게 위임된다.[25]7. 역사적 평가 및 현대적 의의
번성 전투는 군사 전략, 외교 관계, 리더십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역사적 교훈을 제시한다.
7. 1. 군사 전략적 측면
번성 전투는 다양한 군사 전략과 전술이 활용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관우는 정군산 전투에서 유비가 조조에게 승리하여 한중을 빼앗은 직후인 219년 7월, 조루 등과 함께 진군하여 양양과 번성을 포위하였다. 이때 우금을 대장으로 한 조조의 원군이 파견되었으나, 때마침 한수가 범람하여 칠군이 수몰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관우는 이 기회를 틈타 큰 배를 타고 공격하여 우금을 항복시켰고, 끝까지 저항하던 방덕을 참수하였다.[25]이처럼 번성 전투에서는 수공(水攻)이 중요한 전술로 활용되었다. 또한, 관우는 위나라에 따르지 않는 반란자나 도적들에게 인수를 주고 칭호를 내려 위나라에 저항하게 하는 등 기습적인 전략을 사용했다.
하지만, 번성 전투는 동맹의 중요성과 배신의 위험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관우의 위세에 중원이 크게 흔들렸지만, 결국 손권의 배신으로 형주를 잃고 패배하게 되었다.
7. 2. 리더십과 인재 관리
관우는 뛰어난 용장이었지만, 오만한 성격으로 인해 부하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25] 이러한 관우의 리더십은 유비, 조조, 손권 등 다른 군주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유비는 인재를 소중히 여기고 관대한 리더십을 보였으며, 조조는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과 냉철한 판단력을 보여주었다. 손권은 가신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8. 한국에서의 번성 전투
번성 전투는 한국에서 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이 전투는 소설, 만화, 게임,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다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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