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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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순 대학살은 1894년 청일전쟁 중 일본군이 뤼순을 점령한 후 자행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뤼순은 청나라 북양 함대의 기지였으며, 일본은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랴오둥반도에서 일련의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1894년 11월 21일 뤼순을 함락한 후 며칠 동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학살의 규모에 대해서는 2,600명에서 최대 6만 명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으며, 당시 서방 언론의 보도와 일본 정부의 대응, 그리고 역사적 평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이 사건은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고, 20세기 초 북미에서 반일 감정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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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11월 - 여순 전투
여순 전투는 1894년 청일 전쟁 중 일본군이 랴오둥반도의 전략적 요충지인 여순을 점령하기 위해 벌인 전투로, 일본군의 함락으로 청나라의 위신이 실추되고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 다롄시의 역사 - 여순항 봉쇄 작전
러일 전쟁 중 일본 해군이 러시아 해군의 여순 함대를 봉쇄하기 위해 노후 선박을 이용해 여순항 입구를 봉쇄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 작전은 해상전에서 육상전으로 전환되어 여순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 다롄시의 역사 - 남산 전투
남산 전투는 1904년 러일 전쟁 중 일본군이 랴오둥 반도 남산 언덕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전투이며, 9차례의 공격 끝에 일본군이 남산 언덕을 점령하고 뤼순 포위의 발판을 마련했다.
여순 대학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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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894년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제국 간에 청일전쟁이 발발했다.[5] 이 전쟁은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한 파병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5]
일본은 전시 전략의 일환으로 대한민국을 통과하여 진격했으며, 1894년 9월 서울 인근의 아산과 평양에서 중국군과 교전하여 두 번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2] 평양에서의 승리 이후, 오야마 이와오 원수(1842–1916) 휘하의 일본 제2군은 만주 북쪽으로 진격했는데, 그 계획은 중국의 베이양 함대 본부이자 대한민국에서 중국 북동부로 가는 해상 통로를 지배하는 요새 도시인 뤼순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9월, 일본 해군은 압록강 해전에서 베이양 함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12]
9월 16일에 모항 웨이하이웨이에서 출항한 전함 14척과 어뢰정 4척의 북양함대는 육병 4,000명이 분승한 수송선 5척을 호위하기 위해 다롄만을 떠났다. 다후산에서 육병 상륙을 지원한 북양함대는 다음날 17일 오전부터 다후산 해상에서 훈련을 했다.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는 단종진을 취하고 있었고 12시 50분경 횡진의 대형을 갖춘 북양함대의 기함 딩위안과 6,000m 떨어진 일본 연합함대와 전투가 시작되었다.[11]해전 결과, "차오융", "즈위안", "징위안" 등 5척이 침몰하고, 6척이 대·중파, "양웨이", "광자오"가 좌초되었다.[12]
이후 북양함대의 잔존 함정이 전력 보존을 위해 웨이하이웨이에 갇히면서 일본은 랴오둥반도 부근의 제해권을 거의 장악했다.[12] 9월 21일, 해전 승리 소식을 접한 대본영은 제2군의 편성에 착수했다. 10월 8일, "제1군과 서로 기맥을 통하고, 연합함대와 협력하여 뤼순반도를 점령할 것"을 제2군에 명했다. 21일, 제2군은 해군과 조정한 결과, 상륙 지점을 진저우 성의 동쪽 약 100km의 화원구로 결정했다. 제1군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영토에 들어간 24일, 제2군은 제1사단의 제1파를 화원구에 상륙시켰다. 11월 6일에 제1사단이 진저우 성 공략에 성공했다. 14일에는 제2군은 진저우 성의 서남쪽 50km 뤼순을 목표로 전진, 18일에 정찰 부대 등이 조우전을 벌였다.[11]
랴오둥반도에서 일련의 전투를 거친 후, 야마지 장군이 이끄는 제2군의 제1사단은 11월 말에 뤼순 주변에 집결했다. 1894년 11월 18일, 일본의 반도 진격은 일시적으로 좌절되었고, 군대는 돌아와 버려진 부상병들이 손과 발이 잘리는 등 심하게 훼손된 것을 발견했다.[3] 다른 사람들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4] 청 정부는 전쟁 포로, 그들의 머리 또는 기타 신체 부위에 현상금을 걸었는데, 중일 전쟁 동안 현상금은 50 냥이었다. 일부 중국 군인들은 여러 일본 군인의 시신을 훼손하여 도시 입구에 전시했고, 이는 일본인들을 격분시켰다.[5] 난부 키지로 중위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복수를 맹세했다.
랴오둥반도 끝에 위치한 뤼순은 청나라 북양 함대의 기지이자 해상 운송의 요충지였다.[2] 9월 압록강 해전에서 북양함대가 패배하면서 일본 해군은 뤼순을 포위하기 시작했고,[2] 제해권을 거의 장악했다.[12] 제1차 중일 전쟁 당시 일본은 뤼순 점령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다.[2] 뤼순은 '동양의 지브롤터'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
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 제2군은 뤼순 공략을 담당했다.[11] 일본군은 대한민국을 통과하여 진격, 1894년 9월 평양에서 중국군을 격파하고 만주 북쪽으로 진격하여 베이양 함대의 본부인 뤼순 점령을 목표로 했다.[2] 9월 압록강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베이양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고,[2] 뤼순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일본 제2군은 만주를 통해 뤼순으로 진격했고, 일본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육상 진격을 시작했다.[2] 랴오둥반도에서 일련의 전투 후, 11월 말 뤼순 주변에 집결한 야마지 장군의 제2군 제1사단은[3] 11월 18일, 일본군의 진격은 일시적으로 좌절되었는데, 버려진 부상병들이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3] 일부는 산 채로 불태워졌다.[4] 청 정부는 일본군 포로나 그들의 신체 일부에 현상금을 걸었고, 중일 전쟁 동안 현상금은 50냥이었다. 일본군은 복수를 맹세했고, 11월 21일, 약간의 저항만 받은 후 뤼순을 함락시켰다.[5]
2. 1. 청일전쟁 발발
1894년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제국 간에 청일전쟁이 발발했다.[5] 이 전쟁은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한 파병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5]일본은 전시 전략의 일환으로 대한민국을 통과하여 진격했으며, 1894년 9월 서울 인근의 아산과 평양에서 중국군과 교전하여 두 번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2] 평양에서의 승리 이후, 오야마 이와오 원수(1842–1916) 휘하의 일본 제2군은 만주 북쪽으로 진격했는데, 그 계획은 중국의 베이양 함대 본부이자 대한민국에서 중국 북동부로 가는 해상 통로를 지배하는 요새 도시인 뤼순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9월, 일본 해군은 압록강 해전에서 베이양 함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12]
9월 16일에 모항 웨이하이웨이에서 출항한 전함 14척과 어뢰정 4척의 북양함대는 육병 4,000명이 분승한 수송선 5척을 호위하기 위해 다롄만을 떠났다. 다후산에서 육병 상륙을 지원한 북양함대는 다음날 17일 오전부터 다후산 해상에서 훈련을 했다. 일본 해군의 연합함대는 단종진을 취하고 있었고 12시 50분경 횡진의 대형을 갖춘 북양함대의 기함 딩위안과 6,000m 떨어진 일본 연합함대와 전투가 시작되었다.[11]해전 결과, "차오융", "즈위안", "징위안" 등 5척이 침몰하고, 6척이 대·중파, "양웨이", "광자오"가 좌초되었다.[12]
이후 북양함대의 잔존 함정이 전력 보존을 위해 웨이하이웨이에 갇히면서 일본은 랴오둥반도 부근의 제해권을 거의 장악했다.[12] 9월 21일, 해전 승리 소식을 접한 대본영은 제2군의 편성에 착수했다. 10월 8일, "제1군과 서로 기맥을 통하고, 연합함대와 협력하여 뤼순반도를 점령할 것"을 제2군에 명했다. 21일, 제2군은 해군과 조정한 결과, 상륙 지점을 진저우 성의 동쪽 약 100km의 화원구로 결정했다. 제1군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영토에 들어간 24일, 제2군은 제1사단의 제1파를 화원구에 상륙시켰다. 11월 6일에 제1사단이 진저우 성 공략에 성공했다. 14일에는 제2군은 진저우 성의 서남쪽 50km 뤼순을 목표로 전진, 18일에 정찰 부대 등이 조우전을 벌였다.[11]
랴오둥반도에서 일련의 전투를 거친 후, 야마지 장군이 이끄는 제2군의 제1사단은 11월 말에 뤼순 주변에 집결했다. 1894년 11월 18일, 일본의 반도 진격은 일시적으로 좌절되었고, 군대는 돌아와 버려진 부상병들이 손과 발이 잘리는 등 심하게 훼손된 것을 발견했다.[3] 다른 사람들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4] 청 정부는 전쟁 포로, 그들의 머리 또는 기타 신체 부위에 현상금을 걸었는데, 중일 전쟁 동안 현상금은 50 냥이었다. 일부 중국 군인들은 여러 일본 군인의 시신을 훼손하여 도시 입구에 전시했고, 이는 일본인들을 격분시켰다.[5] 난부 키지로 중위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복수를 맹세했다.
2. 2. 뤼순의 전략적 중요성
랴오둥반도 끝에 위치한 뤼순은 청나라 북양 함대의 기지이자 해상 운송의 요충지였다.[2] 9월 압록강 해전에서 북양함대가 패배하면서 일본 해군은 뤼순을 포위하기 시작했고,[2] 제해권을 거의 장악했다.[12] 제1차 중일 전쟁 당시 일본은 뤼순 점령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다.[2] 뤼순은 '동양의 지브롤터'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군사적 거점이었다.2. 3. 일본군의 뤼순 공략
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 제2군은 뤼순 공략을 담당했다.[11] 일본군은 대한민국을 통과하여 진격, 1894년 9월 평양에서 중국군을 격파하고 만주 북쪽으로 진격하여 베이양 함대의 본부인 뤼순 점령을 목표로 했다.[2] 9월 압록강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베이양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고,[2] 뤼순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일본 제2군은 만주를 통해 뤼순으로 진격했고, 일본 제1군은 압록강을 건너 육상 진격을 시작했다.[2] 랴오둥반도에서 일련의 전투 후, 11월 말 뤼순 주변에 집결한 야마지 장군의 제2군 제1사단은[3] 11월 18일, 일본군의 진격은 일시적으로 좌절되었는데, 버려진 부상병들이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3] 일부는 산 채로 불태워졌다.[4] 청 정부는 일본군 포로나 그들의 신체 일부에 현상금을 걸었고, 중일 전쟁 동안 현상금은 50냥이었다. 일본군은 복수를 맹세했고, 11월 21일, 약간의 저항만 받은 후 뤼순을 함락시켰다.[5]3. 학살의 전개
일본군은 11월 21일 오후 2시경 뤼순에 진입했다. 야마지 모토하루 중장은 보병 제2연대장 이세치 요시나리 대좌에게 시가지 소탕을 명령했다. 이세치 요시나리는 보병 제2연대와 제15연대 제3대대를 이끌고 뤼순 시가지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12]
일본군 제1사단의 한 병사는 일기에 "우리가 뤼순에 진입했을 때, 나무 말뚝에 꽂힌 일본군 병사의 머리를 보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중국 군인을 모두 없애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피가 흘렀고 냄새는 끔찍했다... 총을 쏘고 칼로 베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일본군의 학살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으며, 프레데릭 빌리어스, 제임스 크릴먼, 토마스 코완 등 서방 관찰자들도 이를 목격했다. ''더 타임스'' 특파원 토마스 코완은 개인 서한에서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은 병사들이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살인과 약탈, 시체 훼손,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끔찍한 만행으로 보냈다... 나는 거리에서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를 보았고, 물 속에도 시체가 있었다...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라고 참상을 묘사했다.
일본 측은 군복을 벗은 청나라 군인들의 게릴라전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주장하며[11], 시가지에서도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고 한다. 투청자 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에 대한 청나라군의 능욕 행위가 일본군의 복수심을 자극했다는 주장도 있다.[14] 그러나, 전시 국제법 위반 여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13]
2단계 학살은 11월 22일부터 수일간 뤼순 시내 및 근교에서 발생했다. 청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보병 제14연대 및 제24연대가 소탕 임무를 맡았으며,[11] 시내에는 청국군 병사들이 퇴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인에게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제2군 사령부는 각 개인과 집에 안전 보장 문구를 적은 종이나 천을 주어 민간인 보호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11] 이러한 조치는 11월 24일 이후에 이루어져 늦었다는 비판을 받았다.[13] 이러한 안전 보장 문구가 없으면 청국군 잔당으로 의심받아 즉시 살해될 위험이 있었다. 22일 일본군이 여순 요새를 점령했을 때, 일본군은 전사 40명, 부상 241명, 행방불명 7명의 피해를 입었으나, 청군은 약 12,000명 중 4,500명이 전사하고 600명이 포로가 되었다.[11]
3. 1. 1단계 (11월 21일 오후~저녁)
일본군은 11월 21일 오후 2시경 뤼순에 진입했다. 야마지 모토하루 중장은 보병 제2연대장 이세치 요시나리 대좌에게 시가지 소탕을 명령했다. 이세치 요시나리는 보병 제2연대와 제15연대 제3대대를 이끌고 뤼순 시가지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12]일본군 제1사단의 한 병사는 일기에 "우리가 뤼순에 진입했을 때, 나무 말뚝에 꽂힌 일본군 병사의 머리를 보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중국 군인을 모두 없애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다... 피가 흘렀고 냄새는 끔찍했다... 총을 쏘고 칼로 베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일본군의 학살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으며, 프레데릭 빌리어스, 제임스 크릴먼, 토마스 코완 등 서방 관찰자들도 이를 목격했다. ''더 타임스'' 특파원 토마스 코완은 개인 서한에서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은 병사들이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살인과 약탈, 시체 훼손,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끔찍한 만행으로 보냈다... 나는 거리에서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를 보았고, 물 속에도 시체가 있었다...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라고 참상을 묘사했다.
일본 측은 군복을 벗은 청나라 군인들의 게릴라전을 소탕하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주장하며[11], 시가지에서도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고 한다. 투청자 전투에서 일본군 사상자에 대한 청나라군의 능욕 행위가 일본군의 복수심을 자극했다는 주장도 있다.[14] 그러나, 전시 국제법 위반 여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13]
3. 2. 2단계 (11월 22일~25일)
일본군은 11월 22일 오후 2시경 뤼순에 진입했다. 일본군 제1사단의 한 병사는 나무 말뚝에 꽂힌 일본군 병사의 머리를 보고 분노하여 도시의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고 기록했다. 거리는 시체로 가득했고, 피 냄새가 끔찍했으며, 일본군은 보이는 사람들을 쏘거나 칼로 찔렀다고 한다. 이러한 학살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으며, 프레데릭 빌리어스, 제임스 크릴먼, 토마스 코완 등 서방 관찰자들도 이를 목격했다. 코완은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를 포함하여 팔다리가 잘리고 내장이 드러난 시신들이 거리에 흩어져 있었고, 손이 묶인 포로들이 총알 세례를 받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했다.2단계 학살은 11월 22일부터 수일간 뤼순 시내 및 근교에서 발생했다. 보병 제14연대 및 제24연대가 소탕 임무를 맡았으며,[11] 시내에는 청국군 병사들이 퇴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인에게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제2군 사령부는 각 개인과 집에 안전 보장 문구를 적은 종이나 천을 주어 민간인 보호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11] 이러한 조치는 11월 24일 이후에 이루어져 늦었다는 비판을 받았다.[13] 이러한 안전 보장 문구가 없으면 청국군 잔당으로 의심받아 즉시 살해될 위험이 있었다. 22일 일본군이 여순 요새를 점령했을 때, 일본군은 전사 40명, 부상 241명, 행방불명 7명의 피해를 입었으나, 청군은 약 12,000명 중 4,500명이 전사하고 600명이 포로가 되었다.[11]
4. 사망자 수 논란
여순 대학살의 사망자 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학살 직후 현지 관리 류한팡(劉含芳)이 리훙장 총독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2,600~2,700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 그러나 도시 주변 언덕에서 학살된 사람들과 군인들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아 실제 사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중국 공산당은 "만충묘"(万忠墓)를 건설하고 총 사망자를 20,000명으로 표시했는데, 여기에는 전투 중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으로 위장한 도주 군인도 포함되었다.[1] 이 숫자는 중국 공산당 자료에서 정통적인 수치가 되었다.[1] 일본군의 랴오둥 반도 철수 시에 청나라 측 접수 위원인 구위안쉰이 만충묘를 건설했을 당시 비석에는 "1만 8백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중국 측 자료에서는 이를 "1만 8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948년에 비석이 개수되었을 때 피해자를 2만 명으로 기록하였다.[22]
반면, 당시 타임스는 200명, 뉴욕 월드는 2,000명(불법 살해자 수에 한정)으로 보도하는 등 서방 측의 보도는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를 제시했다.[11] 뉴욕 월드의 크릴만은 사망자 총수를 6만 명으로 주장하기도 했다.[11] 프랑스인 소바주 대위는 1,500명,[15] 일본 점령 후 청나라인 여순 행정 장관은 1,500~1,600명(변의병을 포함한 시체의 수)으로 추정했다.[11] 아리가 나가오는 500명으로 보았다.[11]
목격자였던 코완은 "수백, 어쩌면 수천 명의 시체가 거리에 널려 있었고, 우리는 셀 수 없었다"고 증언하며, "물 속에 더 많았다"고 덧붙였다.[6]
이처럼 사망자 수에 대한 주장이 크게 엇갈리는 이유는 여순 함락 후 일본군에 의한 잔학 행위가 국제적인 문제로 부각되면서, 불법 살해자 수만을 다루는지, 아니면 전쟁 희생자 전체를 포함하는지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11] 또한, 여순 전투의 사망자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 사망 시점이나 원인이 불분명한 경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등에서도 차이가 발생한다.[11]
다카하시 사쿠에와 같은 일본 제국 해군의 법률 고문은 이러한 혐의를 반박하려 했다.[6]
오타니 타다시는 여순 전투를 5가지 국면으로 구분하여 폭넓게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①21일 새벽 여순 공격 개시부터 정오 무렵 청나라군의 진저우 도망, ②21일 이른 아침 청나라군의 진저우 탈환 작전 개시부터 그 좌절, ③여순 함락 후 시가지 전투와 소탕전, ④22일 이후 25일 무렵까지 이어진 시가지와 주변 소탕, ⑤진저우 구원을 명령받고 북상하는 일본군 부대에 의한 소탕이 그것이다.[16]
현대 중국에서는 당시 여순 시가지 인구를 약 6천 명~1만 명으로 추정하고, 시가지 내 민간인 사망자 수를 2,600~2,700명으로 보고 있다.[1]
4. 1. 중국 측 주장
만충묘 비석에는 당초 "1만 8백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나, 1948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비석이 개수되면서 2만 명으로 수정되었다.[22] 중국 측 자료는 대체로 이 2만 명을 정설로 받아들인다.[1] 여기에는 전투에서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으로 위장한 도주 군인도 포함되었다.[1]4. 2. 일본 측 및 서방 측 주장
여순 대학살의 규모와 성격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6] 사망자 추정치는 적게는 200명에서 많게는 6만 명까지 다양하다.[6]일본 측 참가자들은 시체 산더미를 보고했지만, 사망자 수는 공식적으로 계산되지 않았다.[6] 목격자였던 코완은 "수백, 어쩌면 수천 명의 시체가 거리에 널려 있었고, 우리는 셀 수 없었다"고 보고했으며, "물 속에 더 많았다"고 말했다.[6] 또 다른 목격자인 크리먼은 6만 명까지 살해되었으며, 단 36명만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6]
사건 발생 당시로부터 그다지 시간이 지나지 않은 기간의 증언들을 살펴보면, 아리가 나가오는 500명,[11] 타임스는 200명,[11] 뉴욕 월드는 2,000명(불법 살해자 수) 또는 6만 명(총 사망자 수) 등으로 추정했다.[11] 프랑스인 소바주 대위는 1,500명으로 추정했다.[15] 일본 점령 후 청나라인의 여순 행정 장관은 오야마 이와오 제2군 사령관에게 1,500~1,600명(변의병을 포함한 시체의 수)이라고 보고했다.[11] 이처럼 피해자 수에 대한 인식은 큰 차이를 보인다.[11]
이러한 차이는 여순 함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에 의한 잔학 행위가 국제적인 문제가 되면서, 처음부터 불법 살해자 수만을 다루고 있는지(아리가), 아니면 장병·민간인을 불문하고 전쟁의 참화의 결과로서 희생자를 다루고 있는지(구)에 따른 차이가 크다.[11] 또한 여순 전투의 사망자로서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대상으로 할 것인가, 언제 사망했는지 불명인 자나 누구에게 살상당했는지 불명확한 자, 더 나아가 증거 없는 증언에서의 인원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 각각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11]
다카하시 사쿠에[6]와 같은 일본 제국 해군의 법률 고문은 혐의를 반박하려 했다. 1994년, 스튜어트 론은 크리먼의 주장을 반박하며 "포트 아서의 거리가 일본 점령 후 다시 채워진 속도로 미루어 볼 때, 도시 전체의 인구가 학살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민간인 인구가 문자 그대로 10분의 1로 줄거나 파괴되었다면, 다른 사람들이 일본 점령 하에서 무역하고 일하려 했을 것 같지 않다."라고 말했다.
4. 3. 현대 중국의 연구
학살의 규모와 성격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추정치는 2,600명에서 60,000명 사망까지 다양하다.
현대 중국에서는 당시 뤼순 시가지 인구를 고려하여, 시가지 내 민간인 사망자 수를 2,600~2,7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1] 1948년, 중국 공산당은 "만충묘"(万忠墓) 묘지를 건설하고 총 사망자를 20,000명으로 표시했는데, 여기에는 전투에서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으로 위장한 도주 군인도 포함되었다.[1] 20,000명이라는 숫자는 중국 공산당 자료에서 정통적인 수치가 되었다.[1]
일본 측 참가자들은 시체 산더미를 보고했지만, 사망자 수는 공식적으로 계산되지 않았다. 목격자였던 코완은 "수백, 어쩌면 수천 명의 시체가 거리에 널려 있었고, 우리는 셀 수 없었다"고 보고했으며, "물 속에 더 많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목격자인 크리먼은 60,000명까지 살해되었으며, 단 36명만 살아남았다고 주장했다.
일본군의 랴오둥 반도 철수 시에 청나라 측 접수 위원인 구위안쉰이 만충묘를 건설, 그 비석에는 "1만 8백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 측 자료에서는 이를 "1만 8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948년에 비석이 개수되었을 때 피해자를 2만 명으로 기록하였다.[22]
사건 발생 당시로부터 그다지 연수가 경과하지 않은 기간의 증언은 200명 미만에서 최대 6만 명이라는 식으로 상당히 인원에 차이가 있으며, 피해자 수의 인정에 큰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이것은 여순 함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에 의한 잔학 행위가 국제적인 문제가 됨으로써, 처음부터 불법 살해자 수만을 취급하고 있는지(아리가), 장병·민간인을 불문하고 전쟁의 참화의 결과로서 희생자를 취급하고 있는지(구)에 따른 차이가 크다. 그러나 여순 전투의 사망자로서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대상으로 할 것인가, 언제 사망했는지 불명의 자나 누구에게 살상당했는지 불명확한 자, 더 나아가 증거 없는 증언에서의 인원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해 각각 큰 차이가 존재한다.[11]
오타니 타다시는, 앞서 언급한 2단계의 구분은 주로 학살 보도를 한 구미인들의 시각으로, 여순 전투 자체에는 다음과 같은 5가지 국면이 있으며, 그것들을 폭넓게 파악하는 생각도 있다고 한다. ①21일 새벽 여순 공격 개시부터 정오 무렵의 청나라군의 진저우 도망, ②21일 이른 아침 청나라군의 진저우 탈환 작전 개시부터 그 좌절에 의한 저녁의 여순 패잔병의 수용과 철수, ③여순 함락 후, 오후 3시 30분 이후의 여순 시가지 전투와 소탕전, ④22일 이후 25일 무렵까지 이어진 시가지와 주변의 소탕, ⑤진저우 구원을 명령받고 북상하는 일본군 부대에 의한 여순·진저우 간의 소탕[16]。
5. 당시의 보도와 반응
뤼순 전투 당시 일본 제2군에는 많은 서방 기자들이 종군했다. 이들 중 뉴욕 월드의 제임스 크리먼(James Creelman)과 런던 블랙 앤 화이트의 프레데릭 빌리에는 대규모 학살을 보도했고, 뉴욕 헤럴드의 아메데 바요 드 게르빌은 그러한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7] 더 타임스 특파원 토마스 코웬(Thomas Cowan)도 학살을 인정하는 기사를 타임스에 보냈다. 10년 후, 드 게르빌은 12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지만 학살은 아니라고 수정했다.[8]
외국 기자들은 기사를 전송하기 위해 해당 지역을 떠나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일본 검열관들이 기사를 막았을 것이다. 11월 26일, ''더 타임스''는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고 보고되었다"고 짧게 보도했다. 크리먼은 12월 12일 뉴욕 월드에 학살에 대한 첫 기사를 1면에 게재하며, "일본군은 11월 21일 뤼순에 입성하여 거의 모든 주민을 냉혹하게 학살했다. ... 무방비의 비무장 주민들은 집에서 학살당했으며, 시신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3일 동안 살인이 억제되지 않고 자행되었다."라고 썼다. 다른 신문들도 상세한 보도를 이어갔다. 이러한 보도는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고, 불평등 조약을 종식하기 위한 미국과의 협상 진행을 위협했다.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조사를 발표하고, 외국 특파원들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2월 16일, 외무성은 만행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언론은 학살 보도를 피하거나 일축했다. 지유 신문/自由新聞일본어은 주장을 "일본군의 영광을 훼손하려는 불쾌한 욕망"이라고 불렀고, 조야 신문/朝野新聞일본어은 서구인들이 동양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위선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더 재팬 위클리 메일''은 여러 기사에서 일본군을 비난했다. 조사는 은폐하려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일본과 영국과의 관계를 훼손했고, 미국과의 조약 재협상을 위태롭게 했다. 이러한 인식은 20세기 초 북미에서 반일 감정에 기여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졌다.
한편, 뉴욕 헤럴드 특파원 아메데 바이요 드 게르빌은 크릴만이 보도한 것과 같은 학살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학살은 조작된 것이라고 논했다. 그러나 게르빌은 뉴욕 헤럴드 소속으로, 옐로 저널리즘 경쟁 관계에 있던 뉴욕 월드와 대립했다. 후에 게르빌은 약 120명 정도 사망은 인정했지만, 여전히 대학살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서구 언론사 연구에 따르면, 뤼순의 "대학살"을 보도한 제임스 크리먼과 뉴욕 월드지, 그리고 이를 부정한 게르빌과 뉴욕 헤럴드 등은 옐로 저널리즘이라 불리는 선정주의 보도 경쟁을 벌였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운영한 뉴욕 저널(뉴욕 모닝 저널)은 조지프 퓰리처의 뉴욕 월드지와 선정주의 보도 경쟁을 벌였으며, 특히 일본에 대한 전쟁 히스테리를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크릴만의 뤼순 보도는 미서 전쟁에서 스페인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선정주의 보도의 선구였다.
메이지 정부 수뇌부의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는 당시 진행 중이던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학살 사실을 부인하고 변명에 주력했다. 미국에서 난관에 부딪히면 다른 국가와의 조약 협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 보도 후, 미국과 러시아의 주일 공사가 무쓰를 찾아 선처를 물었고, 미국의 상원에서는 조인된 미일 신 조약의 비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메이지 정부는 청나라를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때 일어날 일본에 비판적인 국제 여론 대책을 전쟁 초기부터 상정하고 있었으며, 무쓰 무네미쓰와 각국 공사도 외국 신문의 보도를 보고했다.
일본 정부는 정보 수집에 힘쓰면서 보도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고 반론에 힘썼다. 11월 29일자 『센트럴 뉴스』(Central News)는 정당한 전투 이외의 살상은 없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무쓰의 의지를 받은 우치다 야스야(주영 임시 대리 공사)가 공작한 결과였다고 추측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정부로서 정식 변명을 하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변명서를 작성했다.
# 청군은 군복을 벗고 도망
# 뤼순에서 살해된 자는, 대부분 상기의 군복을 벗은 병사였다
# 주민은 교전 전에 도망했다.
# 도망가지 않은 자는, 청나라로부터 교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일본군 병사는 포로가 된 후, 잔혹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것을 본 자가 격분했다.
# 일본 측은 군기를 지켰다.
# 크릴만 이외의 외국인 기자들은, 그의 보도 내용에 놀라고 있다.
# 뤼순이 함락되었을 때 사로잡은 청군 포로 355명은 정중하게 대우받았으며, 이삼일 안에 도쿄로 데려올 예정이다.
이 변명서는 일곱 번째 항목을 제외하고 12월 17일과 18일 양일에 미국의 각 신문에 게재되었다. 무쓰가 직접 미국의 신문에 변명하는 방식은 미국 측으로부터 호감을 얻었다.
제2군에 대한 처분에 대해서는 이토 미요지가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보낸 서한에 "전승 후라 해도 어쩐지 주저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라고 적혀 있듯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뤼순을 함락하고 의기양양한 군대를 이 사건으로 처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정부 수뇌는 판단했다. 이토 히로부미도 "조사하는 것은 위험이 많아 불가피하니 이대로 묻지 않고 오로지 변호하는 방법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구미 제국은 자국의 과거 의혹과 비교하여 비난을 계속하는 것은 자국에 역으로 돌아올 위험이 있으며, 예상을 뒤엎고 청나라를 압도하는 등 착실하게 국력을 높여가고 있는 일본 비판에는 국익이 없다고 하여 소동은 잠잠해졌다.
일본 언론은 대체로 학살 보도를 피하거나 이를 일축했는데, lt=''Jiyū Shinbun''/自由新聞일본어은 주장을 "일본군의 영광을 훼손하려는 불쾌한 욕망"이라고 불렀다. lt=''Shin Chōya''/朝野新聞일본어는 서구인들이 동양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잔학 행위의 정도를 과장하고 위선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기독교 서구인과 접촉한 야만 민족의 역사는 거의 피로 쓰여졌다"고 말했다.
해외 논조는 점차 이 여순에서의 사건과 같은 일은 전쟁에서 흔히 있는 일이며, 서방에서도 예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방향으로 변화해 갔다고, 대응에 나섰던 이토 미요지는 보고하고 있다. 메이지 정부는 재외 공관과 고용 외국인을 통해 미국의 통신사, 월드지에 변명서를 보내 진정시키려 했다. 미국에서의 보도는 사라져 갔다. 최대 현안이었던 미국과의 조약 개정은, 1895년 2월 5일 미국 상원에서 비준되었다. 이는 동시에 메이지 정부 수뇌에게 있어 여순 사건 소동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월 17일에는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자 아리가 나가오는 프랑스로 날아가 저서 'La Guerre Sino-Japonaise au point de vue du droit international.1886,Paris' (일본명 『일청전쟁 국제법론』)을 간행하여, 청일 전쟁 및 이 사건이 정당한 것이라고 논했다.
청나라 정부는 국내 불안정으로 인해 뤼순 대학살에 대한 비난보다는 패배를 은폐하는 데 더 집중했다. ''차이나 가제트''는 이러한 은폐 시도에 대해 보도했는데, 관리들이 제국 전역에 "적군이 뤼순을 점령했다는 악의적인 보고서를 퍼뜨렸지만, 이는 완전히 거짓이며, 그곳은 일본군에게 절대 항복하지 않을 3만 명의 용감한 중국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전보를 보냈다고 전했다. 한 달 후, ''차이나 가제트''는 패배가 많은 정부 관리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캐나다 출신 기자 제임스 크리먼은 뉴욕 월드에 뤼순 대학살에 관한 첫 기사를 기고하면서, 일본군이 3일 동안 뤼순에서 무방비의 비무장 주민들을 학살하고 시신을 훼손했다고 폭로했다. 이는 일본 문명에 대한 최초의 오점으로, 일본이 야만 상태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신문들도 상세한 보도를 따랐고, 이는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타격을 입혔으며, 불평등 조약을 종식하기 위한 미국과의 협상 진행을 위협했다.
무쓰 무네미쓰 일본 외무대신은 조사를 발표하고, 외국 특파원들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2월 16일, 외무성은 만행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희생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시민들의 옷을 훔쳐 입은 병사들이었다고 해명했다.
일본 언론은 학살 보도를 피하거나 일축했다. 은 주장을 "일본군의 영광을 훼손하려는 불쾌한 욕망"이라고 비난했다. 은 서구인들이 동양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잔학 행위의 정도를 과장하고 위선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반면에 ''더 재팬 위클리 메일''은 여러 기사에서 일본군을 비난했다. 조사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국내 불안정으로 인해 패배를 은폐해야 했다. ''차이나 가제트''는 은폐 시도에 대해 보도했고, 친일본 성향의 ''노스-차이나 헤럴드''는 학살 가해자를 옹호하려 했다.
이 사건은 일본과 영국과의 관계를 훼손했고, 미국과의 조약 재협상을 해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서구의 일본에 대한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20세기 초 북미에서 반일 감정에 기여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졌다.
사건 이후 러시아 제국은 뤼순에 식민지 및 해군 주둔지를 설립했다. 러시아 해군 기지는 10년 후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의 공격 대상이었다.
5. 1. 서구 언론의 보도
뤼순 전투 당시 일본 제2군에는 많은 서방 기자들이 종군했다. 이들 중 뉴욕 월드의 제임스 크리먼(James Creelman)과 런던 블랙 앤 화이트의 프레데릭 빌리에는 대규모 학살을 보도했고, 뉴욕 헤럴드의 아메데 바요 드 게르빌은 그러한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7] 더 타임스 특파원 토마스 코웬(Thomas Cowan)도 학살을 인정하는 기사를 타임스에 보냈다. 10년 후, 드 게르빌은 12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지만 학살은 아니라고 수정했다.[8]
외국 기자들은 기사를 전송하기 위해 해당 지역을 떠나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일본 검열관들이 기사를 막았을 것이다. 11월 26일, ''더 타임스''는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고 보고되었다"고 짧게 보도했다. 크리먼은 12월 12일 뉴욕 월드에 학살에 대한 첫 기사를 1면에 게재하며, "일본군은 11월 21일 뤼순에 입성하여 거의 모든 주민을 냉혹하게 학살했다. ... 무방비의 비무장 주민들은 집에서 학살당했으며, 시신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 3일 동안 살인이 억제되지 않고 자행되었다."라고 썼다. 다른 신문들도 상세한 보도를 이어갔다. 이러한 보도는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타격을 주었고, 불평등 조약을 종식하기 위한 미국과의 협상 진행을 위협했다.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조사를 발표하고, 외국 특파원들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2월 16일, 외무성은 만행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언론은 학살 보도를 피하거나 일축했다. 지유 신문/自由新聞일본어은 주장을 "일본군의 영광을 훼손하려는 불쾌한 욕망"이라고 불렀고, 조야 신문/朝野新聞일본어은 서구인들이 동양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위선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더 재팬 위클리 메일''은 여러 기사에서 일본군을 비난했다. 조사는 은폐하려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일본과 영국과의 관계를 훼손했고, 미국과의 조약 재협상을 위태롭게 했다. 이러한 인식은 20세기 초 북미에서 반일 감정에 기여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졌다.
한편, 뉴욕 헤럴드 특파원 아메데 바이요 드 게르빌은 크릴만이 보도한 것과 같은 학살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9] 그는 학살은 조작된 것이라고 논했다.[41] 그러나 게르빌은 뉴욕 헤럴드 소속으로, 옐로 저널리즘 경쟁 관계에 있던 뉴욕 월드와 대립했다. 후에 게르빌은 약 120명 정도 사망은 인정했지만, 여전히 대학살은 아니라고 주장했다.[21]
서구 언론사 연구에 따르면, 뤼순의 "대학살"을 보도한 제임스 크리먼과 뉴욕 월드지, 그리고 이를 부정한 게르빌과 뉴욕 헤럴드 등은 옐로 저널리즘이라 불리는 선정주의 보도 경쟁을 벌였다.[36][37][40]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운영한 뉴욕 저널(뉴욕 모닝 저널)은 조지프 퓰리처의 뉴욕 월드지와 선정주의 보도 경쟁을 벌였으며, 특히 일본에 대한 전쟁 히스테리를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39][40] 크릴만의 뤼순 보도는 미서 전쟁에서 스페인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선정주의 보도의 선구였다.[40][41]
5. 2. 일본 정부의 대응
메이지 정부 수뇌부의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는 당시 진행 중이던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학살 사실을 부인하고 변명에 주력했다.[26] 미국에서 난관에 부딪히면 다른 국가와의 조약 협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26]
사건 보도 후, 미국과 러시아의 주일 공사가 무쓰를 찾아 선처를 물었고, 미국의 상원에서는 조인된 미일 신 조약의 비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메이지 정부는 청나라를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때 일어날 일본에 비판적인 국제 여론 대책을 전쟁 초기부터 상정하고 있었으며, 무쓰 무네미쓰와 각국 공사도 외국 신문의 보도를 보고했다.[11]
일본 정부는 정보 수집에 힘쓰면서 보도에 대해 일일이 반박하고 반론에 힘썼다. 11월 29일자 『센트럴 뉴스』(Central News)는 정당한 전투 이외의 살상은 없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무쓰의 의지를 받은 우치다 야스야(주영 임시 대리 공사)가 공작한 결과였다고 추측된다.[28]
이토 히로부미는 정부로서 정식 변명을 하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변명서를 작성했다.[13]
# 청군은 군복을 벗고 도망
# 뤼순에서 살해된 자는, 대부분 상기의 군복을 벗은 병사였다
# 주민은 교전 전에 도망했다.
# 도망가지 않은 자는, 청나라로부터 교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 일본군 병사는 포로가 된 후, 잔혹한 대우를 받았으며, 그것을 본 자가 격분했다.
# 일본 측은 군기를 지켰다.
# 크릴만 이외의 외국인 기자들은, 그의 보도 내용에 놀라고 있다.
# 뤼순이 함락되었을 때 사로잡은 청군 포로 355명은 정중하게 대우받았으며, 이삼일 안에 도쿄로 데려올 예정이다.
이 변명서는 일곱 번째 항목을 제외하고 12월 17일과 18일 양일에 미국의 각 신문에 게재되었다. 무쓰가 직접 미국의 신문에 변명하는 방식은 미국 측으로부터 호감을 얻었다.[13]
제2군에 대한 처분에 대해서는 이토 미요지가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보낸 서한에 "전승 후라 해도 어쩐지 주저하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라고 적혀 있듯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졌던 뤼순을 함락하고 의기양양한 군대를 이 사건으로 처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정부 수뇌는 판단했다. 이토 히로부미도 "조사하는 것은 위험이 많아 불가피하니 이대로 묻지 않고 오로지 변호하는 방법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13]
결과적으로 구미 제국은 자국의 과거 의혹과 비교하여 비난을 계속하는 것은 자국에 역으로 돌아올 위험이 있으며, 예상을 뒤엎고 청나라를 압도하는 등 착실하게 국력을 높여가고 있는 일본 비판에는 국익이 없다고 하여 소동은 잠잠해졌다.[13]
일본 언론은 대체로 학살 보도를 피하거나 이를 일축했는데, lt=''Jiyū Shinbun''/自由新聞일본어은 주장을 "일본군의 영광을 훼손하려는 불쾌한 욕망"이라고 불렀다. lt=''Shin Chōya''/朝野新聞일본어는 서구인들이 동양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잔학 행위의 정도를 과장하고 위선을 저질렀다고 비난하며 "기독교 서구인과 접촉한 야만 민족의 역사는 거의 피로 쓰여졌다"고 말했다.
해외 논조는 점차 이 여순에서의 사건과 같은 일은 전쟁에서 흔히 있는 일이며, 서방에서도 예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방향으로 변화해 갔다고, 대응에 나섰던 이토 미요지는 보고하고 있다. 메이지 정부는 재외 공관과 고용 외국인을 통해 미국의 통신사, 월드지에 변명서를 보내 진정시키려 했다.[22] 미국에서의 보도는 사라져 갔다.[13][29] 최대 현안이었던 미국과의 조약 개정은, 1895년 2월 5일 미국 상원에서 비준되었다. 이는 동시에 메이지 정부 수뇌에게 있어 여순 사건 소동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월 17일에는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자 아리가 나가오는 프랑스로 날아가 저서 'La Guerre Sino-Japonaise au point de vue du droit international.1886,Paris' (일본명 『일청전쟁 국제법론』)을 간행하여, 청일 전쟁 및 이 사건이 정당한 것이라고 논했다.[13]
5. 3. 청나라의 반응
청나라 정부는 국내 불안정으로 인해 뤼순 대학살에 대한 비난보다는 패배를 은폐하는 데 더 집중했다. ''차이나 가제트''는 이러한 은폐 시도에 대해 보도했는데, 관리들이 제국 전역에 "적군이 뤼순을 점령했다는 악의적인 보고서를 퍼뜨렸지만, 이는 완전히 거짓이며, 그곳은 일본군에게 절대 항복하지 않을 3만 명의 용감한 중국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전보를 보냈다고 전했다. 한 달 후, ''차이나 가제트''는 패배가 많은 정부 관리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다고 보도했다.5. 4. 국제사회의 반응
캐나다 출신 기자 제임스 크리먼은 뉴욕 월드에 뤼순 대학살에 관한 첫 기사를 기고하면서, 일본군이 3일 동안 뤼순에서 무방비의 비무장 주민들을 학살하고 시신을 훼손했다고 폭로했다. 이는 일본 문명에 대한 최초의 오점으로, 일본이 야만 상태로 돌아갔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신문들도 상세한 보도를 따랐고, 이는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타격을 입혔으며, 불평등 조약을 종식하기 위한 미국과의 협상 진행을 위협했다.무쓰 무네미쓰 일본 외무대신은 조사를 발표하고, 외국 특파원들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2월 16일, 외무성은 만행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희생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시민들의 옷을 훔쳐 입은 병사들이었다고 해명했다.
일본 언론은 학살 보도를 피하거나 일축했다. 은 주장을 "일본군의 영광을 훼손하려는 불쾌한 욕망"이라고 비난했다. 은 서구인들이 동양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잔학 행위의 정도를 과장하고 위선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반면에 ''더 재팬 위클리 메일''은 여러 기사에서 일본군을 비난했다. 조사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중국 정부는 국내 불안정으로 인해 패배를 은폐해야 했다. ''차이나 가제트''는 은폐 시도에 대해 보도했고, 친일본 성향의 ''노스-차이나 헤럴드''는 학살 가해자를 옹호하려 했다.
이 사건은 일본과 영국과의 관계를 훼손했고, 미국과의 조약 재협상을 해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서구의 일본에 대한 인식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20세기 초 북미에서 반일 감정에 기여했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졌다.
사건 이후 러시아 제국은 뤼순에 식민지 및 해군 주둔지를 설립했다.[9] 러시아 해군 기지는 10년 후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의 공격 대상이었다.[9]
6. 역사적 평가와 연구
압록강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서방 기자들은 뤼순 전투 당시 일본 제2군에 배속되어 학살에 대한 보도를 시작했다. 캐나다 출신 기자 제임스 크리먼은 뉴욕 월드에 기고하여 대규모의 냉혹한 학살을 묘사했다.[7] 반면, 아메데 바요 드 게르빌은 ''뉴욕 헤럴드'' 지면에 그런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7] 그러나 10년 후 드 게르빌은 이 견해를 수정하여 12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지만 여전히 학살은 아니라고 주장했다.[8]
외국 기자들은 일본 검열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해당 지역을 떠나 기사를 제출해야 했다. 처음에는 이 사건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으나, 제임스 크리먼은 학살에 대해 보도한 첫 기사를 1면에 게재하면서, 일본 문명에 대한 최초의 오점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신문들도 상세한 보도를 따랐고, 이는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타격을 입혔으며, 불평등 조약을 종식하기 위한 미국과의 협상 진행을 위협했다.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조사를 발표하고, 이러한 의도를 ''뉴욕 월드''에 게재했으며, 외국 특파원들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외무성은 만행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은 일반적으로 학살 보도를 피하거나 일축했다. Jiyū Shinbun/自由新聞일본어은 주장을 "일본군의 영광을 훼손하려는 불쾌한 욕망"이라고 불렀다. Shin Chōya/朝野新聞일본어는 서구인들이 동양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잔학 행위의 정도를 과장하고 위선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반면에 ''더 재팬 위클리 메일''은 여러 기사에서 일본군을 비난했다. 조사를 시작하려는 시도는 은폐하려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국내 불안정으로 인해 중국 정부는 일본의 잔학 행위에 대해 비난하기보다는 패배를 은폐해야 했다. 친일본 ''노스-차이나 헤럴드''는 학살 가해자를 옹호하려 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처리해 온 미묘한 외교 관계를 긴장시켰고, 미국과의 조약 재협상을 해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서방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야만인으로 색칠하여, 20세기 초 북미에서 반일 감정에 기여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졌다.
뤼순 학살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지만,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뤼순 학살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일본군의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고 평가한다.[30][31][32] 오에 시노부는 사망자의 과반수인 약 6,000명 이상이 전투와 관계없는 무고한 주민이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33] 이치노세 토시야와 하라다 케이이치는 『정청 종군 일기』의 "산지 장군으로부터 아래의 명령이 있었다. ... 지금부터는 토민이라도 아군에 방해하는 자는 남김없이 죽여야 한다는 명령이 있었다"라는 증언을 인용하여 학살이었다고 주장한다.[34] 키쿠치 히데아키는 일본군이 다수의 시민을 "학살"했다고 평가한다.[35]
오카베 마키오가 소개하는 쿠보타 나카조의 『정청 종군 일기』에서는 청군의 일본군 유해에 대한 능욕 행위를 보고 복수하려 했다는 내용과, 여순 시내에서 민간인으로 보이는 자를 쳐 죽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22] 야마지 제1사단장은 투청자 사건의 보복을 부추겼다고 당시의 신문·전쟁 실기에 쓰여 있으며, 가네코 겐타로의 자서전에는, 가네코가 야마지에게 학살이 사실이냐고 묻자, 자신은 학살을 하지 않도록 훈시했지만 병사들이 기세에 밀려 한 것이라고 변명한 것이 적혀 있다.[22]
캐나다 출신 기자 제임스 크리먼은 뉴욕 월드에 기고하면서 일본군이 뤼순에 입성하여 거의 모든 주민을 냉혹하게 학살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일본 문명에 대한 최초의 오점이라고 비판했다.[7] 다른 신문들도 상세한 보도를 따랐고, 이는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타격을 입혔다.[7]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조사를 발표하고, 이러한 의도를 ''뉴욕 월드''에 게재했으며, 외국 특파원들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7] 12월 16일, 일본 외무성은 만행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희생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시민들의 옷을 훔쳐 입은 병사들이었다고 발표했다.
일본 언론은 일반적으로 학살 보도를 피하거나 일축했다. Jiyū Shinbun/自由新聞일본어은 학살 주장을 "일본군의 영광을 훼손하려는 불쾌한 욕망"이라고 불렀고, Shin Chōya/朝野新聞일본어은 서구인들이 동양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잔학 행위의 정도를 과장하고 위선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일부는 크리먼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반면에 ''더 재팬 위클리 메일''은 여러 기사에서 일본군을 비난했다. 조사를 시작하려는 시도는 은폐하려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친일본 성향의 ''노스-차이나 헤럴드''는 "상황은 침략군의 통제를 시험했을 수도 있다"고 제안하며 학살 가해자를 옹호하려 했다.
벨기에 공사 알베르 다네탄(Albert d'Anethan)은 본국에 보고한 조사에서, 사건은 "뉴욕 월드지의 기자에 의해 다소 과장된 것"이며, 프랑스 무관 라브리 자작은 살해된 자들은 군복을 벗은 중국 병사(변의병)였고, 부녀자는 살해되지 않았으며, 뤼순항 점령 며칠 전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피난했으며, 마을에는 병사와 공창의 직공들 뿐이었다고 진술했다.[23][24][25]
서구 언론사 연구에 따르면, 뤼순의 "대학살"을 보도한 크릴만과 뉴욕 월드지, 그리고 반대로 부정론을 펼친 게르빌과 그의 주장이 게재된 뉴욕 헤럴드 등 경쟁 신문들이 서로 옐로 저널리즘이라 불리는 선정주의 보도를 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36][37][40]
뉴욕 월드지는 조지프 퓰리처가 경영했으며,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뉴욕 저널(뉴욕 모닝 저널)지와 선정주의 보도로 경쟁했고, 양 신문은 옐로 저널리즘이라고 불렸다.[36][37][38][40] 뉴욕 모닝 저널과 뉴욕 월드의 전쟁 특파원은 그리스, 동남아시아, 쿠바,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어 선정적인 보도를 서로 경쟁했다.[40] 또한 허스트는 특히 일본에 대한 전쟁 히스테리(War Histeria)를 조장하는 데 정력을 쏟아, 파시즘과 인종적 증오를 배양하고, 살인, 부녀자 유괴, 술 취한 싸움, 모든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병적인 호기심을 격려했다는 비난을 받았다.[39]
크릴만의, 매일같이 중국인 남자, 여자, 아이의 인육이 토막 나고, 대부분의 주민이 학살되었다는 센세이셔널한 보도는, 게르빌로부터 자신이 본 바로는 믿을 수 없다는 반론을 받았다.[41] 게르빌은 뉴욕 타임스에서 "나는 현장에 있었지만, 여성과 아이의 시신은 전혀 보지 못했다. 따라서 크릴만 등이 말하는 대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41] 한편, 게르빌은 당시 역시 같은 옐로 저널리즘으로 뉴욕 월드지와 경쟁하던 뉴욕 헤럴드의 특파원이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후에 게르빌 자신도 약 120명 정도로 대학살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21] 또한 크릴만의 보도를 들은 벨기에 공사는 현지에 있던 프랑스 무관에게 묻자 "여자아이의 사상자는 없다. 주민들은 거의 피난했고, 군복을 벗은 병사들이 있었다"고 부정했다. 벨기에 공사의 그 후의 "대학살" 부인으로 일본에 대한 비판에 반론하고 있는 점에서, 선동 보도였다는 주장이 있다.[42]
6. 1. 학살 부정론
캐나다 출신 기자 제임스 크리먼은 뉴욕 월드에 기고하면서 일본군이 뤼순에 입성하여 거의 모든 주민을 냉혹하게 학살했다고 주장하며, 이는 일본 문명에 대한 최초의 오점이라고 비판했다.[7] 다른 신문들도 상세한 보도를 따랐고, 이는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타격을 입혔다.[7]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조사를 발표하고, 이러한 의도를 ''뉴욕 월드''에 게재했으며, 외국 특파원들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7] 12월 16일, 일본 외무성은 만행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희생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시민들의 옷을 훔쳐 입은 병사들이었다고 발표했다.
일본 언론은 일반적으로 학살 보도를 피하거나 일축했다. Jiyū Shinbun/自由新聞일본어은 학살 주장을 "일본군의 영광을 훼손하려는 불쾌한 욕망"이라고 불렀고, Shin Chōya/朝野新聞일본어은 서구인들이 동양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잔학 행위의 정도를 과장하고 위선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일부는 크리먼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반면에 ''더 재팬 위클리 메일''은 여러 기사에서 일본군을 비난했다. 조사를 시작하려는 시도는 은폐하려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친일본 성향의 ''노스-차이나 헤럴드''는 "상황은 침략군의 통제를 시험했을 수도 있다"고 제안하며 학살 가해자를 옹호하려 했다.
벨기에 공사 알베르 다네탄(Albert d'Anethan)은 본국에 보고한 조사에서, 사건은 "뉴욕 월드지의 기자에 의해 다소 과장된 것"이며, 프랑스 무관 라브리 자작은 살해된 자들은 군복을 벗은 중국 병사(변의병)였고, 부녀자는 살해되지 않았으며, 뤼순항 점령 며칠 전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피난했으며, 마을에는 병사와 공창의 직공들 뿐이었다고 진술했다.[23][24][25]
6. 2. 학살 긍정론
뤼순 학살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지만,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뤼순 학살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일본군의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고 평가한다.[30][31][32] 오에 시노부는 사망자의 과반수인 약 6,000명 이상이 전투와 관계없는 무고한 주민이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33] 이치노세 토시야와 하라다 케이이치는 『정청 종군 일기』의 "산지 장군으로부터 아래의 명령이 있었다. ... 지금부터는 토민이라도 아군에 방해하는 자는 남김없이 죽여야 한다는 명령이 있었다"라는 증언을 인용하여 학살이었다고 주장한다.[34] 키쿠치 히데아키는 일본군이 다수의 시민을 "학살"했다고 평가한다.[35]압록강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서방 기자들은 뤼순 전투 당시 일본 제2군에 배속되어 학살에 대한 보도를 시작했다. 캐나다 출신 기자 제임스 크리먼은 뉴욕 월드에 기고하여 대규모의 냉혹한 학살을 묘사했다.[7] 반면, 아메데 바요 드 게르빌은 ''뉴욕 헤럴드'' 지면에 그런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7] 그러나 10년 후 드 게르빌은 이 견해를 수정하여 12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지만 여전히 학살은 아니라고 주장했다.[8]
외국 기자들은 일본 검열관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해당 지역을 떠나 기사를 제출해야 했다. 처음에는 이 사건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으나, 제임스 크리먼은 학살에 대해 보도한 첫 기사를 1면에 게재하면서, 일본 문명에 대한 최초의 오점이라고 비판했다. 다른 신문들도 상세한 보도를 따랐고, 이는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타격을 입혔으며, 불평등 조약을 종식하기 위한 미국과의 협상 진행을 위협했다.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조사를 발표하고, 이러한 의도를 ''뉴욕 월드''에 게재했으며, 외국 특파원들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외무성은 만행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은 일반적으로 학살 보도를 피하거나 일축했다. Jiyū Shinbun/自由新聞일본어은 주장을 "일본군의 영광을 훼손하려는 불쾌한 욕망"이라고 불렀다. Shin Chōya/朝野新聞일본어는 서구인들이 동양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잔학 행위의 정도를 과장하고 위선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반면에 ''더 재팬 위클리 메일''은 여러 기사에서 일본군을 비난했다. 조사를 시작하려는 시도는 은폐하려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국내 불안정으로 인해 중국 정부는 일본의 잔학 행위에 대해 비난하기보다는 패배를 은폐해야 했다. 친일본 ''노스-차이나 헤럴드''는 학살 가해자를 옹호하려 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처리해 온 미묘한 외교 관계를 긴장시켰고, 미국과의 조약 재협상을 해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서방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야만인으로 색칠하여, 20세기 초 북미에서 반일 감정에 기여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졌다.
오카베 마키오가 소개하는 쿠보타 나카조의 『정청 종군 일기』에서는 청군의 일본군 유해에 대한 능욕 행위를 보고 복수하려 했다는 내용과, 여순 시내에서 민간인으로 보이는 자를 쳐 죽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22] 야마지 제1사단장은 투청자 사건의 보복을 부추겼다고 당시의 신문·전쟁 실기에 쓰여 있으며, 가네코 겐타로의 자서전에는, 가네코가 야마지에게 학살이 사실이냐고 묻자, 자신은 학살을 하지 않도록 훈시했지만 병사들이 기세에 밀려 한 것이라고 변명한 것이 적혀 있다.[22]
6. 3. 옐로 저널리즘과 선정주의 보도 논란
압록강 전투 이후 뤼순 전투에 대한 서방 언론의 보도는 논란이 많았다. 캐나다 출신 제임스 크리먼은 뉴욕 월드에 기고하여 대규모의 냉혹한 학살을 묘사했으나, 아메데 바요 드 게르빌은 뉴욕 헤럴드 지면에 그런 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했다.[7] 10년 후 드 게르빌은 12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지만 여전히 학살은 아니라고 자신의 주장을 수정했다.[8]
외국 기자들은 기사 제출을 위해 해당 지역을 떠나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일본 검열관들이 기사를 억압했을 것이다. 초기에는 이 사건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지만, 11월 26일 ''더 타임스''는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고 보고되었다"고 보도했다. 제임스 크리먼은 1894년 12월 12일 ''뉴욕 월드'' 1면에 학살에 대한 첫 기사를 게재하며, 일본군이 11월 21일 뤼순에 입성하여 거의 모든 주민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곧 다른 신문들도 상세한 보도를 따랐다. 이 보도는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에 타격을 입혔고, 불평등 조약을 종식하기 위한 미국과의 협상 진행을 위협했다.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조사를 발표하고, 이러한 의도를 ''뉴욕 월드''에 게재했으며, 외국 특파원들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2월 16일, 외무성은 언론에 성명을 발표하여 만행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은 일반적으로 학살 보도를 피하거나 일축했다. 은 주장을 "일본군의 영광을 훼손하려는 불쾌한 욕망"이라고 불렀고, 은 서구인들이 동양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잔학 행위의 정도를 과장하고 위선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일부는 크리먼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그가 중국 정부를 위해 일하기 위해 상하이로 떠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반면에 ''더 재팬 위클리 메일''은 여러 기사에서 일본군을 비난했다. 조사를 시작하려는 시도는 은폐하려는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국내 불안정으로 인해 중국 정부는 일본의 잔학 행위를 비난하기보다는 패배를 은폐해야 했다. ''차이나 가제트''는 은폐 시도에 대해 보도했고, 친일본 ''노스-차이나 헤럴드''는 학살 가해자를 옹호하려 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처리해 온 미묘한 외교 관계를 긴장시켰고, 얇은 문명의 베일 아래 야만인으로서 서방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색칠했다. 이러한 인식은 20세기 초 북미에서 반일 감정에 기여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이어졌다.
서구 언론사 연구에 따르면, 뤼순의 "대학살"을 보도한 크릴만과 뉴욕 월드지, 그리고 반대로 부정론을 펼친 게르빌과 그의 주장이 게재된 뉴욕 헤럴드 등 경쟁 신문들이 서로 옐로 저널리즘이라 불리는 선정주의 보도를 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36][37][40]
뉴욕 월드지는 조지프 퓰리처가 경영했으며,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뉴욕 저널(뉴욕 모닝 저널)지와 선정주의 보도로 경쟁했고, 양 신문은 옐로 저널리즘이라고 불렸다.[36][37][38][40] 뉴욕 모닝 저널과 뉴욕 월드의 전쟁 특파원은 그리스, 동남아시아, 쿠바,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어 선정적인 보도를 서로 경쟁했다.[40] 또한 허스트는 특히 일본에 대한 전쟁 히스테리(War Histeria)를 조장하는 데 정력을 쏟아, 파시즘과 인종적 증오를 배양하고, 살인, 부녀자 유괴, 술 취한 싸움, 모든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병적인 호기심을 격려했다는 비난을 받았다.[39]
크릴만의, 매일같이 중국인 남자, 여자, 아이의 인육이 토막 나고, 대부분의 주민이 학살되었다는 센세이셔널한 보도는, 게르빌로부터 자신이 본 바로는 믿을 수 없다는 반론을 받았다.[41] 게르빌은 뉴욕 타임스에서 "나는 현장에 있었지만, 여성과 아이의 시신은 전혀 보지 못했다. 따라서 크릴만 등이 말하는 대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41] 한편, 게르빌은 당시 역시 같은 옐로 저널리즘으로 뉴욕 월드지와 경쟁하던 뉴욕 헤럴드의 특파원이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후에 게르빌 자신도 약 120명 정도로 대학살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학살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21] 또한 크릴만의 보도를 들은 벨기에 공사는 현지에 있던 프랑스 무관에게 묻자 "여자아이의 사상자는 없다. 주민들은 거의 피난했고, 군복을 벗은 병사들이 있었다"고 부정했다. 벨기에 공사의 그 후의 "대학살" 부인으로 일본에 대한 비판에 반론하고 있는 점에서, 선동 보도였다는 주장이 있다.[42]
7. 한국과의 관련성
7. 1. 청일전쟁과 조선
7. 2. 한국의 관점과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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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蹇蹇録』ではこの事件に触れた冒頭に「日清交戦中に起こりたる一事件が、復(また)如何に日米条約改正の問題に対し防障を及ぼしたるかを略述すべし」と述べ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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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谷正前掲論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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