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지 모토하루
1. 개요
야마지 모토하루는 도사번 출신의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육군 중장까지 진급했다. 그는 도바·후시미 전투와 보신 전쟁에 참여했으며, 정한론 분쟁 이후 자유 민권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다. 이후 육군에 복귀하여 세이난 전쟁에 참전하고, 여러 사단장을 거쳐 청일 전쟁에서 활약했다. 그는 1895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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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충대 -
이타가키 다이스케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정치가이자 자유민권 운동가로, 자유당을 창당하여 일본 입헌정치 발전에 기여했으며,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을 보였으나 제국주의적 팽창과의 연관성 등 비판도 있다. -
신충대 -
고슈·가시오 전투
고슈·가시오 전투는 1868년 보신 전쟁 중 신정부군과 구 막부군이 혼슈 중부에서 벌인 전투로,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나 에도 막부 지지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에도성의 무혈 항복에 영향을 미쳤다. -
막말 도사번 사람 -
존 만지로
존 만지로는 14세에 조난당해 미국에서 10년간 생활하며 서양 문물을 습득하고 일본의 개국과 근대화에 기여한 일본 고치현 출신의 어부이다. -
막말 도사번 사람 -
이타가키 다이스케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정치가이자 자유민권 운동가로, 자유당을 창당하여 일본 입헌정치 발전에 기여했으며,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을 보였으나 제국주의적 팽창과의 연관성 등 비판도 있다. -
공3급 금치훈장 수훈자 -
의민태자
의민태자는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로, 영친왕 책봉 후 황태자가 되었으나 일본 유학 및 군 복무, 일본 황족과의 정략결혼, 광복 후 국적 미인정으로 일본에서 생활하다 귀국 후 영원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의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공3급 금치훈장 수훈자 -
데라우치 마사타케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활동한 일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서 육군대신, 한국통감, 조선총독,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한국 병합을 주도하고 무단통치를 실시했으며, 시베리아 출병 등 외교 정책을 펼친 일본 제국주의 핵심 인물이다.
2. 생애
도사번 번사 야마지 모토츠네의 장남으로 고치성 아래 마을에서 태어났다. 번주의 코쇼(시종)와 아시가루 대장을 거쳐 1867년 보병 소대 사령관을 맡았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독단적으로 신정부 측에 가담하여 막부군을 공격했으며, 이후 진충대와 코쵸대(호첩대)의 지휘관으로 도호쿠 지방 전투에 참여했다. 1868년 대대장으로 승진하고, 이듬해 전공으로 상전록 150석을 받았다.
1871년, 어친병으로 상경하여 육군 중좌로 임관했다. 정한론 논쟁이 벌어지자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등 동향 출신들과 함께 사직했다. 고향에서 잠시 자유 민권 운동에 참여했으나, 이타가키와의 의견 대립 후 다시 육군에 복귀했다.
근위 대대장 등을 거쳐 1875년 보병 제4연대장에 임명되었고, 1877년 세이난 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이후 보병 제3연대장, 보병 제12연대장 등을 역임하고 1881년 2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구마모토 진대 사령관을 맡았다. 오사카 진대 사령관, 보병 제2여단장 등을 거쳐 1886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887년 5월에는 화족 남작 작위를 받았다.
제6사단장, 제1사단장을 역임하고, 청일 전쟁에는 제1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진저우와 뤼순, 톈좡타이 등을 공략했다. 1895년 8월, 전공으로 자작으로 승작되었다. 이후 서부 도독을 지내다가 1897년 야마구치현 호후시 미타지리에서 사망했다.
2.1. 출생과 가계
야마지는 현재의 고치현 고치시에 해당하는 도사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야마우치 씨를 섬기는 상급 사무라이이자 도사번의 번사(마와리역・150곡)인 야마지 모토츠네였다. 야마지는 고치성 아래 마을인 小高坂 越前町일본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번주의 고쇼를 지냈으며, 13세 때 사고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2.2. 초기 경력
도사번의 번사 야마지 모토츠네(마와리역・150석)의 장남으로, 현재의 고치현 고치시에 해당하는 고치성하 코다카자카 엣젠 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도사번을 다스리던 야마우치 씨를 섬기는 상급 사무라이였다. 13세에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번주의 코쇼(小姓, 시종)를 거쳐 아시가루 대장으로 활동했다. 게이오 3년(1867년)에는 보병 소대 사령관을 맡았다.
메이지 유신의 계기가 된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도바·후시미 전투에서는 독단적으로 신정부 측에 가담하여 막부 군을 공격했다. 이후 도사번의 충격 부대인 [[진쇼타이]](신충대)의 7번 대장(중대장) 및 호첩대장(코쵸대장)으로서, 친 막부 세력인 오우에츠 열번 동맹에 대항하여 도호쿠(東北) 지방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메이지 원년(1868년)에는 대대장으로 승진했으며, 이듬해인 1869년에는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상전록 150곡의 녹봉을 받았다.
2.3. 메이지 정부
1871년(메이지 4년), 어친병으로 상경하여 육군 중좌로 임관하였다. 그러나 정한론 논쟁이 벌어지자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등 도사 번 출신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서 물러났다. 고향으로 돌아간 후, 야마지는 이타가키 등과 함께 자유 민권 운동에 헌신하기로 뜻을 모았으나, 운동의 향후 방침을 놓고 이타가키와 의견 대립을 겪었다. 결국 그는 다시 육군에 복귀하는 길을 선택했다.
2.4. 세이난 전쟁과 진대 사령관
1875년 보병 제4연대장에 취임한 야마지는 1877년 3월 말,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보병 제4연대장으로서 별동 제3여단(4월 5일 별동 제4여단으로 개칭)의 참모로 임명되어 전쟁에 출정했다. 4월 3일 부대와 함께 고베를 출발하여 나가사키에 도착한 후, 10월까지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세이난 전쟁 이후에는 보병 제3연대장 겸 도쿄 진대 다카사키 영소 사령관, 보병 제12연대장 등을 역임했다. 1881년 2월에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구마모토 진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오사카 진대 사령관, 보병 제2여단장, 그리고 다시 구마모토 진대 사령관을 차례로 역임했다. 1886년 12월에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2.5. 육군 중장 진급과 청일 전쟁
1886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이듬해인 1887년 5월 24일에는 화족 남작 작위를 받았다. 1888년 5월, 프로이센 출신 외국인 고문(O-yatoi gaikokujin) 야코프 메켈의 조언에 따라 일본 제국 육군이 사단 체제로 개편되면서 신설된 제6사단 사령관을 맡았고, 이후 제1사단 사령관을 역임했다.
청일 전쟁에는 제1사단장으로 참전하여 진저우와 뤼순, 톈좡타이 등을 공략했다. 그러나 뤼순 함락 후, 그의 지휘 하에 있던 병사들이 뤼순 학살에 연루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전쟁 중 발생한 민간인 학살 행위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편, 야마지는 뤼순에서 낙타 두 마리를 전리품으로 가져와 한 마리는 당시 황태자(훗날 다이쇼 천황)에게, 다른 한 마리는 도쿄 우에노 동물원에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1895년 8월, 청일 전쟁에서의 공적으로 야마지의 작위는 자작으로 승격되었다.
2.6. 사망
청일 전쟁 후 서부 도독을 지냈으나, 1897년 야마구치현 호후시 미타지리에서 사망했다. 사후 종이위(從二位)의 영예로운 작위를 받았다.
그의 묘소는 한때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1971년 8월 11일 자 고치 신문 석간 보도에 따르면, 야마지의 묘비가 고슈 가도를 따라 국립 천문대와 조후 비행장 근처 삼거리 코너(현재 아지노모토 스타디움 부지)에서 산책하던 한 남성에 의해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치 시민들이 기념비를 구입하여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데 실패했다. 현재 그 기념비는 도쿄에 있는 세이카도(Seikadō) 회사의 본사 일본 정원에서 장식용 돌다리로 사용되고 있다. 묘비가 어떻게 버려지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현재 야마지의 묘소 위치는 불명확하다.
3. 일화
13세 때 한쪽 눈을 실명하여 '애꾸눈 장군'(또는 '독안룡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용장이었다. 청일 전쟁 당시 뤼순을 함락시킨 후, 그곳에서 사육되던 쌍봉낙타 두 마리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한 마리는 당시 황태자에게 헌상했고, 다른 한 마리는 우에노 동물원에 기증하여 사육되었다.
4. 영전
; 위계
* 1886년(메이지 19년) 10월 28일 - 종4위
* 1895년(메이지 28년) 12월 20일 - 정3위
* 1897년(메이지 30년) 10월 4일 - 종2위
; 훈장 등
* 1887년(메이지 20년) 11월 25일 - 훈2등 욱일중광장
* 1889년(메이지 22년) 11월 25일 - 대일본제국 헌법 발포 기념장
* 1895년(메이지 28년)
8월 20일 - 자작・공3급 금계훈장・훈1등 욱일대수장
11월 18일 - 메이지 27·28년 종군기장
5. 가족
* 장남 야마지 모토히코 (육군 대위)
6. 둘러보기 상자
| 진대 | 구분 | 역대 인물 |
|---|---|---|
| 1. 동경 | 사령장관 | 1. 미우라 고로 2. 야마다 아키요시 3. 다네다 마사아키 4. 노즈 시즈오 5. 노즈 미치쓰라 |
| 1. 동경 | 사령관 | 1. 노즈 미치쓰라 대리.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 친왕 2. 미우라 고로 3. 미요시 시게오미 |
| 1. 동경 | 참모장 | 1. 오카자와 구와시 2. 노기 마레스케 3. 야마구치 모토오미 4. 니시 간지로 5. 오시마 요시마사 |
| 2. 센다이 | 사령장관 | 1. 미요시 시게오미 대리. 시오야 하루요시 대리. 후쿠하라 미노루 2. 후쿠하라 미노루 [결원] |
| 2. 센다이 | 사령관 | 1. 시조 다카우타 2. 사쿠마 사마타 3. 소가 스케노리 4. 사쿠마 사마타 |
| 2. 센다이 | 참모장 | 1. 시오야 하루요시 2. 후쿠하라 미노루 3. 나가야 시게나 4. 가와카미 소로쿠 5. 오누마 와타루 심득. 오시마 요시마사 6. 다카시마 노부시게 |
| 3. 나고야 | 사령장관 | 어용취계. 노자키 사다즈미 심득. 이비 아키라 1. 시조 다카우타 |
| 3. 나고야 | 사령관 | 1. 시조 다카우타 2. 이비 아키라 [결원] 3. 시게노 키요히코 4. 구로카와 미치노리 |
| 3. 나고야 | 참모장 | 1. 이비 아키라 2. 나가야 시게나 3. 야마카와 히로시 4. 니시 간지로 5. 사카모토 스미히로 |
| 4. 오사카 | 사령장관 | [결원] 1. 시조 다카우타 2. 도리오 고야타 3. 미요시 시게오미 대리. 시조 다카우타 |
| 4. 오사카 | 사령관 | 1. 미요시 시게오미 2. 소가 스케노리 3.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4. 야마지 모토하루 5.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
| 4. 오사카 | 참모장 | 1. 이비 아키라 2. 다카시마 노부시게 3. 쓰치야 요시나리 4. 오가와 마타지 5. 하세가와 요시미치 6. 이바라키 고레아키 7. 야마네 노부나리 |
| 5. 히로시마 | 사령장관 | 어용취계. 시나가와 우지아키 심득. 다카하시 가쓰마사 1. 이다 유즈루 심득. 다카하시 가쓰마사 2. 미우라 고로 3. 이다 유즈루 |
| 5. 히로시마 | 사령관 | 1. 이다 유즈루 2. 구로사와 미치노리 3. 노자키 사다즈미 4. 노즈 미치쓰라 |
| 5. 히로시마 | 참모장 | 1. 다카하시 가쓰마사 [결원] 2. 나카무라 시게토오 3. 쓰치야 요시나리 4. 구니시 요리마사 5. 하세가와 요시미치 6. 오가와 마타지 심득. 아오야마 아키라 6. 시오야 카타쿠니 |
| 6. 구마모토 | 사령장관 | 1. 기리노 도시아키 2. 다니 다테키 대리. 노즈 시즈오 3. 노즈 시즈오 4. 다네다 마사아키 겸무. 오야마 이와오 5. 다니 다테키 6. 소가 스케노리 |
| 6. 구마모토 | 사령관 | 1. 소가 스케노리 2. 다카시마 도모노스케 3. 야마지 모토하루 4. 구니시 요시마사 5. 미요시 시게오미 6. 미우라 고로 7. 야마지 모토하루 |
| 6. 구마모토 | 참모장 | 심득. 나카무라 신이치로 1. 사쿠마 사마타 2. 와타나베 오우 3. 다카시마 시게노리 4. 가바야마 스케노리 5. 노자키 사다즈미 6. 구니시 요리마사 7. 야마구치 모토오미 심득. 가와무라 가게아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