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쓰 무네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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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쓰 무네미쓰는 1844년 기슈 번에서 태어나 막말 시대에 사카모토 료마 등과 교류하며 존왕양이 사상을 가졌고, 가이엔타이에서 활동했다. 메이지 유신 후 효고현 지사, 가나가와 현령 등을 역임했으며, 1892년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취임하여 영일통상항해조약 체결과 치외법권 철폐에 성공했다. 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삼국 간섭으로 랴오둥반도를 반환해야 했고, 1897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그는 외교관으로서 불평등 조약 개정에 힘썼으며, 저서 《건건록》을 통해 청일 전쟁과 삼국 간섭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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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쓰 무네미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존칭 | 정2위 백작 |
이름 | 무쓰 무네미쓰 |
본명 | 陸奥 宗光 |
로마자 표기 | Mutsu Munemitsu |
출생일 | 1844년 8월 20일 |
출생지 | 기이국 |
사망일 | 1897년 8월 24일 |
사망지 | 도쿄도기타구 다키노가와 |
다른 이름 | 무쓰 요노스케 |
국적 | 일본 제국 |
직업 | 외교관, 각료 |
배우자 | 무쓰 료코 |
관직 | |
외무대신 | 제10대 |
재임 기간 | 1892년 8월 8일 ~ 1896년 5월 30일 |
내각 | 제2차 이토 내각 |
농상무대신 | 제6대 |
재임 기간 | 1890년 5월 17일 ~ 1892년 3월 14일 |
내각 | 제1차 야마가타 내각 제1차 마쓰카타 내각 |
기타 경력 | |
원로원 의관 | 1875년 4월 25일 ~ 1875년 11월 28일 |
중의원 의원 | 1890년 7월 1일 ~ 1891년 12월 25일 |
선거구 | 와카야마현 제1구 |
가나가와현 지사 | 제3대 |
재임 기간 | 1871년 10월 5일 ~ 1872년 8월 17일 |
효고현 지사 | 제4대 |
재임 기간 | 1869년 7월 28일 ~ 1869년 8월 24일 |
학력 | |
출신 학교 | 고베 해군 조련소 |
가계 | |
아버지 | 다테 무네히로 |
자녀 | 무쓰 히로키치 (장남) 후루카와 준키치 (차남) 무쓰 기요코 (장녀) 무쓰 후유코 (차녀) |
친척 | 다테 치히로 (아버지) 무쓰 이안 요노스케 (손자) 오카자키 구니스케 (사촌) 나카지마 노부유키 (처남) |
훈장 및 작위 | |
훈장 | 훈1등 욱일대수장 |
작위 | 백작 |
2. 경력
메이지 유신 이후, 무쓰 무네미쓰는 효고현지사, 가나가와현지사 등 새로운 메이지 정부의 여러 직책을 맡았다. 1873년부터 1881년까지 토지세 개혁을 이끌었고, 원로원에서 활동했다. 1878년부터 1883년까지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지원하려는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다. 투옥 중에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1884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1888년부터 1890년까지는 주미공사가 되어 일본과 멕시코 간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미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부분적으로 개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890년 귀국 후 농상무대신이 되었고, 제1회 총선거에서 와카야마현 제1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단임했다. 189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서 외무대신이 되었다. 1894년에는 영일 통상항해 조약을 체결하여 일본과 영국 간의 불평등 조약 체제를 종식시켰다.
청일 전쟁(1894년~1895년)을 종식시킨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 측 수석 대표였으며, 이홍장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일본 정부는 중국으로부터 받으려던 배상금 규모를 자발적으로 줄였다. 이와 관련하여 무쓰는 "이홍장의 불행은 대청제국의 행운이다."([1])라는 말을 남겼다. 삼국간섭으로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무쓰가 얻어낸 성과가 뒤집히자, 일본 국민은 무쓰를 국가적 굴욕의 원흉으로 비난했다. 1896년 5월 모든 정부 직책에서 사퇴하고 가나가와현 오이소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자신의 견해와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회고록 『蹇々録(けんけんろく)』을 저술했지만, 외교 기밀이 포함되어 있어 1923년까지 출판되지 못했다.
무쓰는 현재의 구후루카와 정원에 살았으며, 1897년 도쿄부 다키노가와(현재의 기타 구)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청일 전쟁이 끝날 무렵 화족 제도에서 백작 작위를 받았다.
무쓰가 받은 계급, 훈장 등은 다음과 같다.
연도 | 계급, 훈장 등 |
---|---|
메이지 5년(구력) | |
1875년 11월 28일 | 종사위[17] |
1878년 8월 19일 | 위기 박탈[17] |
1887년 3월 25일 | 종사위[17][18] |
1890년 | |
1897년 8월 21일 | 정이위[20] |
1888년 5월 8일 | 훈삼등[17] |
1889년 9월 11일 | 훈이등 훈장[17][21] |
1890년 10월 21일 | 은패 하나·칠보 백로도 꽃병 한 상자[17] |
1893년 10월 30일 | 훈일등 훈장[22] |
1894년 8월 29일 | 자작[23] |
1895년 8월 20일 | 백작[24]·욱일대수장[24] |
또한, 다음과 같은 외국 훈장을 수여받았다.
연도 | 국가 | 훈장 |
---|---|---|
1893년 8월 24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철관 제1등 훈장[25] |
1894년 | 오스만 제국 | 메지 자혜 제1등 훈장[26] |
태국 | 백상 제1등 훈장[27] | |
프랑스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트피시에[28] | |
1895년 | 바이에른 왕국 | 성 미카엘 훈장 그로스크로이츠(독일어)[29] |
세르비아 왕국 | 타코보 십자 제1등 훈장(영어)[30] | |
1896년 | 이탈리아 왕국 | 성 마우리치오 라자로 제1등 훈장[31] |
러시아 제국 | 백수 대수장[32] | |
스페인 | 카를로스 3세 제1등 훈장[33] | |
1897년 4월 27일 | 덴마크 | 단네브로그 훈장 그랑크로와[34] |
2. 1. 성장 과정
1844년 8월 20일, 기슈 번사 다테 지히로의 6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우시마로'''(牛麿)이며, '''다테 고지로'''(伊達小次郎), '''무쓰 요노스케'''(陸奥陽之助) 등으로도 불렸다. 존황양이 사상을 가진 국학자이자 역사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3]
생가는 다테 마사무네의 막내아들 무네카쓰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오래전에 무쓰 다테 가(陸奥伊達家)에서 분가한 스루가 다테 가(駿河伊達家)의 자손이다.
1852년, 무쓰 무네미쓰가 8살 때 번 내부의 정치 다툼으로 인해 아버지가 실각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4]
2. 2. 막말
1858년(안세이 5년) 에도로 나와 야스이 솟켄, 미즈모토 세이비에게 배우며,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 조슈번의 가쓰라 고고로, 이토 슌스케 등과 교류했다.1863년(분큐 3년) 가쓰 가이슈의 고베 해군 조련소에 들어가, 1867년(게이오 3년)에는 사카모토 료마의 가이엔타이에 참가하는 등 사카모토와 함께 행동했다. 가쓰 가이슈와 사카모토에게서 인정받은 무쓰는, 사카모토로부터 “(칼을) 두 자루 차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무쓰뿐이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료마 암살 후, 기슈 번사 미우라 큐타로를 암살 배후로 생각하여, 가이엔타이 동지 15명과 함께 그의 체류처인 덴마야를 습격하는 사건(덴마야 사건)을 일으켰다.[5][6]
2. 3. 유신 후
메이지 유신 이후, 무쓰 무네미쓰는 외국 사무국 어용계(1868년), 효고현 지사(1869년), 가나가와현령(1871년), 지세 개정 국장(1872년) 등을 역임했다.[61] 그러나 삿초 파벌 정부에 반발하여 사직했다. 1875년 오사카 회의 이후 정부와 민권파가 타협하면서 설치된 원로원 의관으로 복귀했다.이 기간 동안, 1872년 첫 부인이 사망하고, 다음 해인 1873년에 료코와 재혼했다.
2. 4. 투옥과 유럽 유학
1877년 세이난 전쟁 당시, 도사(土佐) 릿시 사의 하야시 유조, 오에 다쿠 등이 정부 전복[62]을 꾀했고, 무쓰는 도사파와 연락[63]을 하고 있었다. 이듬해 이 일이 발각되어 금고 5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야마가타 감옥에 수용된 무쓰는 영국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의 저작 번역에 몰두하였다. 1883년 제러미 벤담의 《도덕 및 입법의 여러 원리》(''Principles of Moral and Legislation'')는 리가쿠 마사무네(利学正宗)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야마가타 감옥 화재 당시 무쓰가 사망했다는 오보가 있었으나, 1878년 이토 히로부미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당시 시설이 더 잘 갖춰진 미야기 감옥으로 이동시켰다.
1883년 특사로 출옥한 뒤, 이토 히로부미의 권유로 유럽 유학을 떠났다. 1884년 런던에 도착한 무쓰는 서양 근대 사회 구조를 알기 위해 맹렬히 공부하였다. 런던에서 무쓰가 쓴 노트가 지금도 7권 남아있다. 내각 제도의 구조, 의회 운영 방식 등 민주 정치 선진국 영국이 오랜 세월에 걸쳐 창출해낸 여러 지식과 지혜를 흡수하였다. 또한 빈에서는 로렌츠 폰 슈타인의 국가학을 배웠다.
2. 5. 정계 복귀
1886년 2월 귀국하여 10월에는 일본 외무성에 근무하였다. 1888년 주미 공사가 되었으며, 같은 해 주미 공사 겸 주멕시코합중국 공사로서 멕시코와 최초의 평등 조약인 일·멕시코 수호통상조약 체결에 성공하였다. 귀국 후 제1차 야마가타 내각의 농상무대신에 취임하였다.1890년, 대신 재임 중에 제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와카야마현 제1구에서 출마하여 초선[11]을 달성하고 1기를 역임하였다. 각료 중 유일한 중의원 의원이었으며, 또한 일본 의회 사상 최초의 중의원 의원 각료가 되었다. 무쓰의 입각에는 농상무대신으로서보다는 오히려 제1회 제국의회의 원활한 진행(현재의 국회 대책)에 대한 기대가 컸다. 실제로 초대 중의원 의장인 나카지마 노부유키는 해원대 시절부터의 절친이었고, 또한 과거 부하였던 자유당의 실력자 호시 겐과는 평생 친분이 두터웠는데, 이러한 관계가 의회 대책에 도움이 되었다.[64] 당시 농상무대신 비서가 심복 하라 다카시였다.
1891년 아시오 광독 사건을 둘러싸고 제국의회에서 다나카 쇼조로부터 질문주이서를 받았으나, 질문의 취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같은 해 5월에 성립된 제1차 마쓰카타 내각에 유임하여 내각 규약을 제안하고 스스로 정무 장관이 되었으나, 사쓰마파와의 충돌로 사임하였다. 11월, 고토 쇼지로와 오에 다쿠, 오카자키 구니스케의 협력을 얻어 일간 신문 ‘손테쓰’를 발간하여 스스로도 참여하여 마쓰가타 내각을 비판하였고, 1892년 3월 사직하여 추밀고문관이 되었다.
2. 6. 외무대신 시대
1892년 제2차 이토 내각의 외무대신으로 취임했다.[65] 1894년 영국과 영일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여 막말 이래의 불평등 조약인 치외법권 철폐에 성공했다.[66] 이후 미국과도 같은 조약에 조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도 유사한 조약을 개정하였다. 무쓰가 외무대신으로 있던 시대에,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던 15개국 모두와의 조약 개정(치외법권 철폐)을 이루었다.한편, 같은 해 5월에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시작되자 청나라의 출병에 대한 대항으로 파병, 7월 23일 조선의 궁을 점거하여 친일정권을 수립, 25일에는 풍도 해전으로 청일 전쟁이 개시되었고, 영국, 러시아의 중립화에도 성공하였다. 이 개전 외교는 영국과의 협조를 유지한 채, 청에 대해 강경 노선을 진행시킨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 차장의 전략과, 서로 공모한 점에서 ‘무쓰 외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전승 후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67]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조인, 전쟁을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종결지었다. 하지만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인해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전부터 무쓰는 폐결핵을 앓고 있어, 삼국 간섭이 도래할 때, 이 난제를 둘러싸고 각의가 행해진 때, 무쓰는 병상에 있었다. 1896년, 외무대신을 사퇴, 오이소 별저[68], 하와이에서 요양생활을 보냈다.
3. 저서 및 서한
- 1892년부터 집필한 《'''건건록'''》(蹇蹇録)은 청일전쟁과 삼국 간섭의 과정을 기록한 책으로, 외무성의 기밀문서를 인용하여 오랫동안 비공개되었다가 1929년에 공개되었다. 메이지 외교사상 일급 사료이다.
- 1952년 무쓰가는 국립국회도서관에 서한과 서류를 기증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산조 사네토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 주요 정치가 60명 이상의 서한과 외교 관계 서류가 대부분이다.[1]

4. 가족
무네미쓰의 네 자녀 중 히로키치를 제외한 세 명은 미혼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히로키치의 아들인 요스케가 무네미쓰의 직계 후손이다. 가마쿠라(鎌倉)의 주후쿠지(寿福寺)에 무쓰가의 묘소가 있다.
5. 평가
가쓰 가이슈는 무쓰가 사람을 거느리는 데는 적합하지만 참모장으로서는 부적합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무쓰가 통솔할 사람을 얻으면 재능을 발휘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불평하며 아랫사람을 짓밟는 인물이라고 보았다. 가쓰 가이슈는 무쓰가 오쿠보 도시미치 휘하에 있었다면 재능을 충분히 발휘했을 것이라고 말했다.[42]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무쓰가 히라오카 엔시로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으로, 두뇌 회전이 빠르지만 사교성이 좋아 비명횡사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43] 그는 무쓰가 돈과 권력에 쉽게 움직이는 경향이 있고, 자기 이익을 위해 형세를 살피는 면모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또한,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무쓰가 다른 사람을 능가하려는 경향이 있었지만, 사교성은 뛰어났다고 덧붙였다.[43] 무쓰가 인물 판단 능력은 부족하여 주변에 착하고 성실한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평가했다.[44]
세키 나오히코는 사카모토 료마의 가르침을 받은 무쓰가 료마에게 대단한 재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았다고 전했다. 세키 나오히코에 따르면, 료마는 무쓰가 능숙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45] 또한 세키 나오히코는 무쓰가 계략과 웅변에 능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며, 침을 흘리는 버릇이 있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45]
나카에 조민은 무쓰가 기지가 풍부하고 기세가 활발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국회의원 중에서 무쓰와 기지를 겨룰 만한 인물이 없다고 말했다.[46]
도리야베 슌테이는 무쓰가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믿었지만, 취미는 귀족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무쓰가 평범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천재와 평범한 사람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47]
사িয়ন지 긴모치는 무쓰가 재능이 뛰어나고 너무 예민해서 한때 실각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세이난 전쟁 때 무쓰가 혹시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길 경우에 대비해 준비하려 했다고 말했다.[48] 사사키 유이치는 무쓰가 대규모 무장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이 아니라, 불우한 감정 속에서 기회를 엿보려 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49]
하기와라 엔쥬는 무쓰를 자유민권 이념과 범벌 세력의 권력 사이에서 "분열된 영혼의 소유자"로 규정했지만, 사사키 유이치는 무쓰가 의회 정치나 민주주의를 이념이 아닌 현실로 보고, 정부가 이에 대응하는 기술이 필요하며 자신의 힘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한다.[50]
잡지 「세계의 일본」은 무쓰를 프랑스의 탈레랑에 비유하며, "프랑스 지력의 절정은 나에게 있다. 누가 정권을 잡든, 결국 나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라는 무쓰 자신의 주장이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했다.[51]
6. 기타
젊은 시절 무쓰는 아사쿠사에서 인파 속에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연습을 하여 매와 같이 재빠르게 빠져나가는 경지에 이르렀다.[52] 친구가 그런 짓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자, “나는 약해서 싸움을 하면 반드시 질 것이다. 목숨을 보전하려면 어떻게든 빨리 도망치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그런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나와 싸워 보지 않겠나, 훌륭하게 도망쳐 보이겠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52]
젊은 시절에는 배짱을 중시하는 젊은 사무라이들로부터 경솔한 말재주꾼으로 여겨져 “거짓말쟁이 고지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등 동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53] 가쓰 가이슈도 “영리한 소인배”라고 평했고, 사카모토 료마도 “말재주가 너무 날카로워서 낭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불의의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53]
무쓰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으며, 가나가와현령 시절 마리아 루스호 사건과 같은 인도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신은 이 건에 관여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현 참사였던 오에 다쿠에게 대응을 맡기고 현령을 사임하여 지조개정 문제에 전념했다.[57]
호시 도오루와의 관계에서 무쓰는 호시를 발탁한 은인이며, 무쓰와의 관계 없이는 호시의 행동을 말할 수 없다. 호시는 하라 다카시와 달리 무쓰에게 충복하지 않았지만, 은혜는 느끼고 비교적 우직하게 따랐으며, 현실주의자 무쓰에게 이용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56]
참조
[1]
서적
Cambridge History of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陸奥宗光
https://kotobank.jp/[...]
[3]
웹사이트
『陸奥宗光伯の略年譜』
https://munemitsu-ho[...]
[4]
문서
母方の渥美勝都も治宝派排斥により失脚している。
[5]
논문
変革期の知識人としての陸奥宗光
https://doi.org/10.5[...]
英学史研究
[6]
웹사이트
陸奥宗光(むつ・むねみつ 1844-1897)
https://www.db1.csac[...]
2020-06-17
[7]
문서
このとき、同時にこの職に任命されたのは長州出身の[[伊藤博文]]、[[井上馨]]、[[薩摩藩|薩摩]]出身の[[五代友厚]]、[[寺島宗則]]、[[中井弘]]の5人であった。ここで陸奥は[[イギリス]]公使[[ハリー・パークス|パークス]]の暗殺未遂事件などの対外事件を処理している。
[8]
웹사이트
『大日本維新史料稿本』第四部 コマ856
https://wwwap.hi.u-t[...]
[9]
문서
のちに陸奥はこのことを「粗豪にして身を誤ること三十年」(『山形繋獄』)と詩に詠んでいる。
[10]
문서
『[[日本及日本人]]』所載「雲間寸観」によれば、林・大江は暗殺すべき人物として秘簿をつくった。そのなかには[[大隈重信]]の名もあったが、陸奥はこれを一見して、一人重要な人間が抜けていると言い、自ら筆をとって伊藤博文の名を加えた。林は大江は、陸奥は平生より伊藤と親しいから、志成った場合は伊藤を推してもよいだろうと考えていたので、陸奥が伊藤の名を加えたのを見て、ひそかに驚いたという。
[11]
웹사이트
衆議院議員之証(陸奥宗光関係文書108-66)
https://dl.ndl.go.jp[...]
[12]
문서
試験採用による職業外交官の制度が確立したのは陸奥の外相時代である。
[13]
문서
不平等条約改正に最も反対していたイギリスが態度を軟化させた背景には[[ロシア]]の極東進出に対する懸念があった。イギリスの条約改正交渉には「改正後も[[函館港|函館]]の貿易港としての使用を認めること」という交渉条件が付けられていた。陸奥は、函館の条件さえ呑めば条約改正に応じるに違いないと判断し、[[ロンドン]]の[[青木周蔵|青木公使]]宛に「必要あらば、条約改正後も、函館を貿易港と定めても苦しからず」と打電する。返電はイギリスが条約改正交渉に応じるというものだった。
[14]
문서
[[高田早苗]]によれば、陸奥の伊藤に対する態度がいかにも恭しく、あたかも属僚が長官に対して意見を申し述べる風だったという(『半峯昔ばなし』)。また、[[李鴻章]]との談判のとき、陸奥の娘が大病で危篤状態だったが陸奥は「談判の済むまでは家のことはいってよこすな」と言い置いて来たが、陸奥の顔色の冴えないのを伊藤が怪しんで問いただしたので事実を語った。伊藤は驚いて、「あとは俺が引き受けたから君は帰り給え」といった。それで陸奥は帰ったが幸いにして娘は命を取りとめた。しかし、それから間もなく亡くなったという(『平沼騏一郎回顧録』)。
[15]
문서
宗光の死後、二男[[古河潤吉|潤吉]]が養子入りした古河家の所有となり、現在は[[古河電気工業]]が管理している。
[16]
문서
陸奥の最後の枕頭を見舞った親友[[中島信行]]に「僕は妻子に別るるもあえて悲しまず、家事また念頭になし、ただ政治より脱することを遺憾とす」と述べた。心底からの政治好きだったのである。
[17]
웹사이트
陸奥宗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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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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叙任及辞令
官報
1894-08-11
[2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4-03-31
[2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03-01
[3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10-07
[3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6-03-07
[3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6-03-21
[3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6-11-02
[3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7-05-03
[35]
서적
陸奥宗光. 正編
https://dl.ndl.go.jp[...]
東亜堂
[36]
서적
明治大臣の夫人
大学館
1903
[37]
뉴스
陸奥宗光未亡人没す
林泉社
1936-1940
[38]
간행물
官報
1897-09-14
[39]
서적
純愛 エセルと陸奥廣吉
講談社
[40]
서적
純愛
講談社
[41]
간행물
文藝春秋
[42]
서적
海舟全集
[43]
웹사이트
3. 陸奥伯に丈夫の志無し
https://eiichi.shibu[...]
[44]
웹사이트
7.井上侯の人物鑑別眼
https://eiichi.shibu[...]
[45]
서적
七十七年の回顧
三省堂
1933
[46]
서적
兆民文集
[47]
서적
春汀全集
[48]
서적
西園寺公望自伝
[49]
서적
陸奥宗光
[50]
서적
陸奥宗光
[51]
서적
陸奥宗光
[52]
서적
陸奥宗光
[53]
서적
陸奥宗光
[54]
서적
陸奥宗光
[55]
서적
陸奥宗光
[56]
서적
星亨
[57]
서적
陸奥宗光
[58]
서적
陸奥宗光
[59]
뉴스
旧陸奥宗光邸の歴史 案内板/根岸祷民ら設置 建物の特徴や写真掲載
読売新聞
2017-03-30
[60]
웹사이트
【11位】旧陸奥宗光邸(鶯谷)
https://www.tv-tokyo[...]
テレビ東京
2017-04-09
[61]
문서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고다이 도모아쓰, 데라시마 무네노리, 나카이 히로시 관련 내용
[62]
문서
무쓰의 시 '거칠게 신세를 망친 30년'
[63]
문서
오쿠바 시게노부, 이토 히로부미 관련 내용
[64]
문서
무쓰의 2남 준키치와 후루카와 이치베 관련 내용
[65]
문서
시험 채용에 의한 직업 외교관 제도 관련 내용
[66]
문서
러시아, 하코다테, 아오키 슈조 관련 내용
[67]
문서
다카다 사나에, 이토 히로부미, 이홍장 관련 내용
[68]
문서
후루카와 전기 공업 관련 내용
[69]
문서
나카지마 노부유키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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