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영수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영수궁은 자금성 내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영락 18년(1420년)에 장락궁으로 처음 건립되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후궁들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만력제, 숭정제, 순치제의 황귀비 등이 영수궁에서 생활했다. 1772년과 1789년에는 공주들의 혼례 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도광제 말기에는 창고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광서제 이후에는 전전과 후전이 어용품 보관 장소로 쓰였다. 현재는 고궁박물관의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청대 비빈 생활전' 등의 상설 전시가 진행되었다. 영수궁은 영수문, 정전, 동배전, 서배전, 후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명나라 효목황후, 청나라 건륭제의 후궁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6궁 - 태극전
    태극전은 자금성 내에 위치한 건물로, 명나라 때 미앙궁으로 지어져 황후와 후궁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청나라 시대에는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서태후가 경극 관람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 서6궁 - 함복궁
    함복궁은 자금성 내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때 수안궁으로 건립되어 가정제 때 함복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청나라 시기에는 후궁들의 거처로 사용되고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 등이 머물렀던 주요 건축물이다.
  • 자금성 - 태극전
    태극전은 자금성 내에 위치한 건물로, 명나라 때 미앙궁으로 지어져 황후와 후궁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청나라 시대에는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서태후가 경극 관람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 자금성 - 함복궁
    함복궁은 자금성 내 서6궁 중 하나로, 명나라 때 수안궁으로 건립되어 가정제 때 함복궁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청나라 시기에는 후궁들의 거처로 사용되고 건륭제, 가경제, 도광제, 함풍제 등이 머물렀던 주요 건축물이다.
영수궁
궁궐 정보
전칭영수궁
간체자永寿宫
정체자永壽宮
병음Yǒngshòu Gōng
위치자금성 서6궁
용도황제의 후궁 거주지
역사
건설 시작명나라
건설 완료청나라

2. 역사

명나라 영락 18년 (1420년)에 건립되었고, 당시 이름은 '''장락궁(長樂宮)'''이었다. 명 가정 14년 (1535년) '''육덕궁(毓德宫)'''으로 개칭하고, 만력 44년 (1616년)에 현재의 이름인 '''영수궁(永壽宮)'''으로 개칭하였다. 청 순치 12년 (1655년), 강희 36년 (1697년), 광서 23년 (1897년)에 중수 또는 대수가 있었지만, 명나라 때 처음 세워졌을 때의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1]

영수궁은 명나라·청나라 후궁들의 거처였다. 명 만력 18년 (1590년), 만력제 때 대학사 신시행 등을 영수궁에 초치했고, 숭정 11년 (1638년)에는 국내에서 재해가 잇따르자 영수궁에서 기거했다. 청 순치제의 황귀비 동악씨, 각비, 가경제여비는 일찌기 영수궁에 거처했다. 옹정 13년 (1735년), 옹정제가 붕어하자, 효성헌황태후는 영수궁에, 건륭제는 건청궁 남랑에 이엉을 짓고 영수궁을 찾아 문안드렸다.

건륭 37년 (1772년), 화석화각공주가 하가(下嫁)하고,[2] 건륭 54년 (1789년)에는 고륜화효공주화신의 아들 풍신은덕에게 하가(下嫁)하게 되어 영수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3] 도광 말기에 내환과 외환이 성행하자, 조정 내부에서는 이를 감추고 여러 강리의 밀주를 영수궁에 숨겼다. 광서 이후에는 영수궁의 전전(前殿), 후전(后殿)을 모두 큰 창고로 만들어 어용품을 저장하였다.

영수궁 정전 앞 처마에는 '영수궁'이라는 가파른 현판이 걸려있다. 건륭 6년 (1741년), 건륭제는 영수궁의 가파른 현팡 양식에 따라 11면 현판을 만들고, 직접 써서 동6궁, 서6궁 중 영수궁을 제외한 11궁의 정전에 각각 걸도록 했다. 건륭제는 또 "자계한 후, 천만년이 되어도 함부로 움직이지 말것, 즉 비빈이 다른 궁으로 옮겨가더라도 바꿀 수 없다.(自挂之后,至千万年,不可擅动,即或妃嫔移住别宫,亦不可带往更换)"는 유지를 내렸다.

영수궁 청대비빈전에서 전시된 가마


영수문


훗날 고궁박물관의 유물 진열실로 사용되었다. 2006년 11월 20일부터 2007년까지 "코뿔소가 곤륜을 비추다. '장역대 동경전'" 전시회가 열려 전국시대부터 청나라 말기까지의 동경 102점을 전시하였다. 2007년 10월에는 영수궁에서 '청대비빈 생활전'이 열렸으며, 이후 고궁박물관의 상설 전시 중 하나로 바뀌었다. '청대비빈 생활전'은 수녀 선발, 책봉 제도, 일상 생활, 보양 보건, 여가생활, 주취화복, 근비 생활 원상전 등으로 나눠 비빈의 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과 사진자료를 전시한다. 2011년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현재 영수궁은 각종 임시 전시를 비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3. 용도 변화

명나라청나라 후궁들의 거처였던 영수궁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명 만력 18년(1590년)에는 만력제가 대학사 신시행 등을 영수궁에 불렀고, 숭정 11년(1638년)에는 국내 재해가 잇따르자 숭정제가 영수궁에서 기거했다. 청 순치제의 황귀비 동악씨, 각비, 가경제여비 등이 영수궁에 거처했다. 옹정제 사후, 효성헌황태후는 영수궁에, 건륭제는 건청궁 남쪽에 초막을 짓고 영수궁을 찾아 문안을 드리기도 했다.[1]

건륭 37년(1772년) 화석화각공주가, 건륭 54년(1789년) 고륜화효공주화신의 아들 풍신은덕에게 시집갈 때 영수궁에서 연회를 열었다.[1] 도광 말기에는 내우외환이 심해지자 조정에서 이를 숨기기 위해 여러 강리의 밀주를 영수궁에 숨겼다. 광서 이후에는 영수궁의 전전(前殿)과 후전(后殿)을 모두 큰 창고로 만들어 어용품을 보관했다.[1]

영수궁은 훗날 고궁박물관 유물 진열실로 사용되었다. 2006년 11월 20일부터 2007년까지 "코뿔소가 곤륜을 비추다. '장역대 동경전'" 전시가 열려 전국시대부터 청나라 말기까지의 동경 102점을 전시했다. 2007년 10월 19일부터는 '청나라 비빈 생활전'으로 바뀌어 수녀 선발, 책봉 제도, 일상생활, 보양 보건, 여가생활, 주취화복, 근비 생활 원상전 등 비빈의 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과 사진 자료를 전시했다. 2011년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며, 현재는 각종 임시 전시를 비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다.[1]

4. 주요 건축물


  • '''영수문(永壽門)''' : 영수궁의 정문으로, 남향이며 문 앞에 석영벽이 하나 있다.
  • '''영수궁(永壽宮)''' : 앞뜰의 정전이다. 면적은 5칸이고, 황유리와헐의 정상 양식이다. 처마와 앞뒤 처마의 명간에는 쌍교사 능꽃 장지문이 설치되어 있다. 차간과 끝간은 함벽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는 쌍끌이 마름꽃 장지창이 설치되어 있다. 내전 안 바로 위에는 건륭제의 어필인 '영덕숙의(令德淑儀)' 현판이 걸려 있다. 과거 매년 설날 때마다 동쪽 벽에는 건륭제의 《성제반희사련찬》이 걸려 있었고, 서쪽 벽에는 건륭제 연간의 반희사련도가 걸려 있었다. 1741년(건륭 6년), 건륭제는 내정은 동서 11궁의 현판을 모두 영수궁 양식으로 걸고 함부로 움직이거나 바꾸지 말라고 명하였다.
  • '''동배전(東配殿)⋅서배전(西配殿)''' : 정전 앞에 위치하며, 면적은 각각 3칸이다.
  • '''후전(後殿)''' : 정전 뒤에 있으며, 면적은 5칸이고, 동서로 이방(耳房)이 있다.
  • '''동배전(東配殿)⋅서배전(西配殿)''' : 후전 앞에 위치하며, 면적은 각각 3칸이다.
  • '''정정(井亭)''' : 후전 앞마당 동남쪽 모퉁이에 있다.

5. 영수궁에 거처했던 주요 인물

명나라 성화제의 후궁 기씨숭정제, 청나라 옹정제의 후궁 효성헌황후, 건륭제의 후궁 서비, 순귀인, 방비 등이 영수궁에 거처했다.

연도황제황실 후궁비고
순치제경비황후에서 폐위된 후 교태전에서 이곳으로 이사했다.
1657–1667각비비의 지위로 승진하기 전에 이곳에 살았다.
1675–1711강희제양비
1682–1694온희귀비
경민황귀비
건륭제혜현황귀비
1742–1777숙비빈의 지위로 승진한 후 이곳으로 이사했다.
1757–1784성빈
1796–1800영귀비건륭제가 퇴위한 후 이곳으로 이사했다.
1801–1821가경제공순황귀비


5. 1. 명나라

성화 6년(1470년) 7월, 기씨는 서내안락당에서 황제의 3남 주우탱(훗날의 명 효종)을 낳았다.[4] 당시 만귀비는 총애와 시기심이 강해 후궁의 임신한 여자들을 모두 박해했다.[4] 기씨는 환관과 함께 비밀리에 주우탱을 키웠고, 명 헌종과 만귀비는 몰랐다.[4] 명 헌종은 성화 11년(1475년)에 이 사실을 알고 아들을 데려와 기씨를 영수궁으로 이주시켜 여러 차례 초치하였다.[4] 그 해 6월, 기비가 훙거하였다.[4]

숭정 11년(1638년), 숭정제는 국내에서 자연현상 피해가 속출하자 영수궁에 기거했다.

연도황제황후비고
1466년 ~ 1475년성화효목황후
1638년 ~ 1643년숭정그는 자연 재해를 피하는 은신처로 사용했다


5. 2. 청나라

건륭제의 생모인 효성헌황후는 1735년에 옹정제가 승하하자 영수궁에 거처하였고, 건륭제는 건청궁 남랑 이엉에 거처하며 영수궁을 찾아 문안하였다.[1]

서비는 건륭 41년 기록에 따르면, 영수궁 타탄제 2곳에서 일꾼을 고용하여 요리사 7명을 부렸다. 영수궁에는 한 명의 비와 한 명의 빈이 거처하는데, 빈(嬪) 자리에는 고용공 요리사 4명, 후궁 자리에는 고용공 요리사 3명이 있었는데, 항상 없었기 때문에 일꾼을 고용하여 부엌일을 하게 했다. 《添減底檔》에도 서비가 여러 비의 으뜸이라 서비가 영수궁의 으뜸으로 등장한다.[1]

순귀인과 방비 관련 내용은 건륭 44년 2월 1일, 태감에게 상녕을 내려보낸 기록에 나타난다. "양심전 순비의 처소는 돈빈에게 주고, 돈빈의 처소는 순비에게 주었다. 명상재는 순비의 차간에 기거하게 한다. 원명원 용비의 처소는 돈빈에게, 돈빈의 처소는 용비에게 기거하게 한다. 순비가 명상재를 데리고 영수궁에 기거하도록 한다"라는 내용이다. 건륭 59년 11월 20일에 방빈 진씨는 영화궁으로 이주하였다.[1]

참조

[1] 웹사이트 永寿宫 - 故宫博物院 https://www.dpm.org.[...] 2020-08-15
[2] 서적 "清會典"
[3] 서적 "Continued Records of the Roaring Pavilion"
[4] 서적 "History of Ming. Biographies of imperial consorts". Book 113
[5] 서적 "永平府志"
[6] 서적 "乾隆至嘉慶年添減底檔"/"Archives of Qianlong and Jiaqing eras".
[7] 웹사이트 Palace of Eternal Longevity (Yongshou gong){{!}}The Palace Museum https://en.dpm.org.c[...] 2020-08-1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