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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노 아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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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브노 아제프는 1869년 현재 벨라루스 지역에서 태어난 러시아 제국의 혁명가로, 러시아 비밀 경찰인 오흐라나의 이중 간첩으로 활동했다. 그는 혁명 조직에 가담하여 테러를 주도하는 한편, 오흐라나에 정보를 제공하여 동료 혁명가들을 밀고했다. 1900년대 초반, 그는 사회주의 혁명당의 전투 조직을 이끌며 요인 암살을 기획했지만, 동시에 오흐라나의 정보원으로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독일로 도피했다. 이후 독일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18년 베를린에서 신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이중적인 삶은 여러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러시아 혁명에 미친 영향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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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노 아제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예브노 피셀레비치 아제프
러시아어 표기Е́вно Фи́шелевич А́зеф
다른 이름예브게니 필리포비치 아제프
러시아어 표기 (다른 이름)Евгений Филиппович Азеф
출생1869년
출생지러시아 제국 리스카바 (현재의 벨라루스 브레스트 주)
사망1918년 4월 24일
사망지독일 제국 베를린
직업
직업혁명가, 테러리스트, 스파이
소속
소속 정당사회혁명당
소속 조직사회혁명당 전투단
활동
활동테러

2. 초기 생애와 혁명 가담

1868년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현(현재 벨라루스)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874년 로스토프나도누로 이주했다. 로스토프 중학교 졸업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유대인 혁명 서클에 가담했으며, 문서 배포 혐의로 수배되자 1892년 국외로 도피하여 독일 카를스루에 공업대학에 입학했다.

1893년 대학 재학 중, 아제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경보국장 알렉세이 로푸힌에게 익명의 편지를 보내 정보 제공자가 되겠다고 제안했다. 당국의 필적 감정으로 제안자가 아제프임이 밝혀졌고, 그는 보안부(오흐라나)의 스파이가 되어 망명자나 유학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898년 대학을 졸업하고 전기 기술자 자격을 취득한 아제프는 이중생활을 이어갔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사회혁명 동맹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용 조합을 통해 노동 운동을 통제하려던 보안부 장관 세르게이 주바토프의 지도를 받으며 혁명 동지들의 신뢰를 얻었다. 1901년에는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베를린에서 아제프는 마리야 세류크 등과 함께 사회혁명당(에스엘) 결성에 참여했다. 1903년 당 지도자 그리고리 게르슈니가 체포된 후, 그는 보리스 사빈코프와 함께 요인 암살 조직인 '''사회혁명당 전투단'''을 결성하고 지도자가 되었으며, 당 중앙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실제 작전은 주로 사빈코프가 지휘했지만, 아제프는 조직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의 지휘 아래 전투단은 1904년 내무장관 뱌체슬라프 플레베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이자 모스크바 총독인 세르게이 대공을 성공적으로 암살했다. 이처럼 제정 러시아 비밀 경찰의 스파이이면서 동시에 사회혁명당의 핵심 테러리스트로 활동한 아제프는 '''러시아 혁명에서 가장 혁명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암살 활동은 비밀 경찰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다는 의혹이 있으며, 비밀 경찰 내부에서도 그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비판이 있었다.

2. 1. 출생과 가정 환경

예브노 피셸레비치 아제프는 1869년[1]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현 리스카바(현재 벨라루스 브레스트 주 프루자니 현)에서 가난한 유대인 재봉사의 일곱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아제프가 다섯 살 때인 1874년 가족과 함께 로스토프나도누로 이주하여 옷감을 판매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어려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도 힘들었다.[1] 그럼에도 아제프는 6명의 형제자매와 함께 로스토프 중학교에 진학했다.

1890년경 학교를 졸업한 후, 아제프는 저널리스트, 여행 판매원, 연예인 극단 단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1] 이 시기 그는 유대인 혁명 서클에 가담하여 혁명 활동을 시작했고, 여러 혁명 조직과 교류했다. 1892년, 경찰이 그를 혁명 문서 배포 혐의로 수사하자, 체포를 피하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여 독일로 도피했다. 자금 마련 경위에 대해서는 800RUB을 횡령했다는 설[1]과 상인에게 버터를 판매하여 마련했다는 설이 있다. 그는 먼저 카를스루에로 갔다가 이후 다름슈타트로 옮겨 전기 기술자가 되기 위해 공부했으며[1], 1892년에는 카를스루에 공업대학에 입학했다. 독일에서 그는 러시아 사회 민주당 그룹에 합류했다.[1]

2. 2. 혁명 서클 참여와 국외 도피

예브노 피셸레비치 아제프는 1869년, 당시 러시아 제국 그로드노현 리스카바(현재 벨라루스 브레스트 주 프루자니 현)의 가난한 유대인 재봉사 가정에서 일곱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1] 그의 아버지는 예브노가 다섯 살 때인 1874년 가족과 함께 로스토프나도누로 이주하여 옷감을 판매했지만, 생계는 여전히 어려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에도 벅찼다.[1] 아제프는 로스토프 중학교에 진학했고, 1890년경 학교를 졸업한 후 저널리스트, 여행 판매원, 연예인 극단원, 사무원 등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이 시기 아제프는 유대인 혁명 서클에 참여했으며,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다른 혁명 조직과 관계를 맺었다. 1892년, 경찰은 그가 혁명 문서를 배포하고 있다는 혐의를 두었다.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그는 800RUB을 횡령했거나 혹은 어떤 상인에게 버터를 판매하여 마련했다는 설도 있는 자금으로 국외로 도피했다.[1] 그는 먼저 오스트리아 독일 뮌헨을 거쳐 카를스루에에 정착했고, 이후 다름슈타트로 옮겨갔다. 독일에서 그는 전기 기술자가 되기 위해 카를스루에 공업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한편, 러시아 사회 민주당 그룹에 합류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3. 이중간첩 활동

예브노 아제프는 러시아 제국 말기, 가장 악명 높은 이중간첩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그는 1893년 독일 유학 중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인 오흐라나에 자발적으로 정보 제공을 제안하며 스파이 활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사회주의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혁명 운동에도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1899년 러시아로 돌아온 아제프는 오흐라나의 지령과 혁명가로서의 활동을 병행하며 사회주의 혁명당(SR) 내에서 빠르게 입지를 다졌다. 그는 뛰어난 조직 운영 능력을 인정받아 1903년에는 당의 무장 투쟁 조직인 '''사회혁명당 전투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로써 아제프는 한편으로는 제정 러시아 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수를 받는 최고위급 정보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 고위 관료들에 대한 테러를 직접 조직하고 지휘하는 혁명 조직의 수장이 되는 극단적인 이중생활을 이어갔다.

그의 지휘 아래 전투단은 1904년 내무장관 뱌체슬라프 플레베와 1905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인 세르게이 대공을 암살하는 등 충격적인 테러 공격을 성공시켰다. 이러한 성공은 아제프에게 당내에서 영웅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암살 대상 중 일부는 그를 고용한 오흐라나의 고위 인사이거나 관련 인물들이었다.

아제프는 이처럼 혁명가로서 명성을 쌓는 동시에, 오흐라나의 스파이로서 수많은 동료 혁명가들을 밀고하여 체포되거나 처형되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당내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조직 내 정보를 오흐라나에 넘겼으며, 때로는 사회주의 혁명당의 테러 계획을 의도적으로 실패하게 만들기도 했다. 1905년 한 해에만 17명의 전투단원을 밀고했다는 기록도 있다.[2]

그러나 이러한 아슬아슬한 이중생활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다. 오흐라나 내부의 권력 다툼과 정보 유출, 그리고 혁명가 블라디미르 부르체프의 끈질긴 추적으로 인해 아제프의 정체에 대한 의혹이 점차 커져갔다. 결국 1908년, 아제프를 스파이로 고용했던 전직 오흐라나 국장 알렉세이 로푸힌의 증언으로 그의 배신 행위가 결정적으로 폭로되었다. 사회주의 혁명당 중앙위원회가 그에 대한 사문을 결정하자 아제프는 심야에 도주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그의 배신은 러시아 혁명 운동에 큰 충격과 불신을 안겨주었다.

3. 1. 오흐라나 정보원 활동 시작

1892년 카를스루에 공업대학에 입학한 아제프는 1893년 재학 중, 상트페테르부르크 경보국장 알렉세이 로푸힌에게 익명의 편지를 보내 정보 제공자가 되겠다고 제안했다. 오흐라나(러시아 제국 비밀경찰)는 필적 감정을 통해 편지를 보낸 이가 아제프임을 확인하고 그를 정보원으로 고용했다. 이때부터 아제프는 망명 중인 러시아인이나 유학생에 대한 정보를 오흐라나에 제공하며 돈을 받기 시작했다.

같은 해 말, 아제프는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했고, 1894년에는 존경받는 나로드니크 부부였던 하임 지틀롭스키와 베라 로코바가 조직한 해외 사회주의 혁명가 연합에 가입하며 혁명가로서의 활동도 병행했다.

1898년 대학을 졸업하고 전기 기술자 자격을 얻은 아제프는 1899년, 오흐라나의 지시에 따라 러시아로 돌아와 안드레이 아르구노프가 이끄는 북부 사회주의 혁명가 연합에 가입했다. 그는 지하 인쇄 작업 설립과 같은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여주며 아르구노프의 신임을 얻어 사실상 그의 오른팔이 되었다. 아르구노프는 아제프가 비밀 경찰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제프는 혁명 조직 내에서 테러 전술의 재개를 주장했지만, 아르구노프는 폭력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동시에 아제프는 어용 조합 조직화를 통해 노동 운동을 통제하려 했던 보안부 장관 세르게이 주바토프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1901년 11월, 아르구노프는 분열된 사회주의 혁명가 조직들(북부, 남부, 해외 연합)을 단일 조직으로 통합하는 임무를 맡겨 아제프를 유럽으로 보냈다. 그러나 아제프가 러시아를 떠나자마자 아르구노프는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이는 아제프의 밀고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902년 스위스에서 아제프는 사회주의 혁명당(SR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당의 테러 활동을 담당하는 전투 조직의 지도자 그리 고리 게르슈니 밑에서 부대표가 되었다. 게르슈니는 아제프를 매우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1903년 봄, 게르슈니가 또 다른 이중간첩의 밀고로 체포되자, 아제프는 보리스 사빈코프를 부관으로 삼아 전투 조직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로써 아제프는 러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테러리스트이자 동시에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 오흐라나 정보원이라는 모순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3. 2. 사회혁명당(에스엘) 가입과 전투단 지도

1894년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하여 존경받는 나로드니크 부부 하임 지틀롭스키와 베라 로코바가 조직한 해외 사회주의 혁명가 연합에 가입했다.

1899년 대학 졸업 후 오흐라나의 명령으로 러시아로 돌아와, 안드레이 아르구노프가 이끄는 북부 사회주의 혁명가 연합에 가입하여 사실상 그의 오른팔이 되었다. 아제프는 혁명가들이 테러 전술을 재개하기를 원했지만, 아르구노프는 폭력을 지지하지 않았다. 아르구노프는 지하 인쇄소 설립 등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아제프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지만, 그가 오흐라나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1901년 11월, 아르구노프는 여러 사회주의 혁명가 연합을 단일 조직으로 통합하는 것을 돕기 위해 아제프를 유럽으로 보냈으나, 아제프가 러시아를 떠나자마자 체포되었다. 같은 해 아제프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사회 혁명 동맹의 대표였던 마리야 세류크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당(SR, 에스엘) 결성에 참여했다.

1902년 스위스에서 아제프는 사회주의 혁명당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테러 행위를 담당하는 그리 고리 게르슈니가 이끄는 전투 조직의 부대표를 맡았다. 그는 어용 조합 조직화를 통해 노동자를 회유하려던 보안부 장관 세르게이 주바토프의 지도를 받으면서도, 혁명가 동지들의 신뢰를 얻어갔다. 게르슈니는 아제프를 매우 신임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1903년 봄, 또 다른 이중 간첩의 배신으로 게르슈니가 체포되자, 아제프는 보리스 사빈코프를 부하로 두고 전투 조직의 수장이 되었다. 이로써 아제프는 러시아 최고의 테러리스트이자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경찰 정보원이 되었다.

전투단 지도자로서 아제프는 여러 요인 암살을 성공시켰다. 1904년에는 내무장관 뱌체슬라프 플레베 암살을 조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플레베는 아제프의 명목상 고용주이자 사회주의 혁명당 침투를 최종 승인한 인물이었다. 또한 플레베가 게르슈니 체포를 경찰의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이 결과적으로 아제프의 부상을 도왔다. 1905년에는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이자 모스크바 총독이었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암살을 조직하여 성공시켰다.

이 두 차례의 성공적인 암살은 아제프에게 사회주의 혁명당 내에서 막대한 명성과 신뢰를 안겨주었다. 그는 이 신뢰를 이용하여 당내 경쟁자들의 명단을 오흐라나에 넘겨 체포되도록 했다. 그가 밀고한 인물 중에는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베테랑 혁명가 안나 야키모바(24년간 복역)와 1906년 8월 차르 경호대장을 암살하고 교수형당한 지나이다 코폴랴니코바 등이 포함되었다. 1917년 혁명 이후 경찰 기록에 접근한 연구원들에 따르면, 아제프는 1905년 한 해에만 SR 전투 조직 내 부하 17명을 고발했다.[2]

내무장관과 차르 숙부의 암살은 또한 오흐라나 내부에 위기를 촉발했다. 경찰 국장 알렉세이 로푸힌은 사임했고, 그의 경쟁자였던 표트르 라치코프스키가 후임이 되었는데, 그는 로푸힌을 혐오했다. 라치코프스키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아제프의 관리인으로 활동했던 레오니드 라타예프를 해고하고 그를 직접 감독하는 것이었다. 아제프의 이중 거래는 또한 오흐라나의 장기 근속 간부들의 반감을 샀고, 그들 중 한 명이 익명으로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오흐라나가 아제프와 타타로프라는 두 명의 정보원을 그들의 반열에 채용했다고 알려주었다. 보리스 사빈코프는 타타로프를 살해하라고 명령했고, 그는 1906년 4월 4일에 칼에 찔려 죽었지만,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아제프도 스파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1905년의 제1차 혁명에서는, 반란에 사용할 무기 밀수를 조직했지만, 이 계획의 배후에는 러일 전쟁에서 유럽을 무대로 첩보·모략 활동을 펼친 아카시 모토지로 육군 대좌(후, 대장)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아카시가 육군 참모본부에 제출한 복명서에는, 아제프(이때의 코드네임, 데칸스키의 명칭으로 표기)에게 4만(현재 가치 약 3억)의 운동 자금을 주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아카시는 아제프가 1905년 6월에 일어난 전함 포템킨의 반란에 관여했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아제프는 이 사건에 무관여했다.

1906년 2월, 아제프는 헬싱키에 있었는데, 핀커스 루텐베르크라는 중개인으로부터 1905년 혁명의 인기 영웅인 게오르기 가폰 신부도 경찰 정보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제프는 가폰이 "뱀처럼" 살해되어야 한다고 명령했지만,[4] 자신의 급여 담당자 라치코프스키도 살해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계속되는 정보 유출 가능성을 두려워한 아제프는 1906년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했다.[3] 1906년에는 전투단은 활동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다. 아제프 자신은, 당 자금 2만러시아 루블을 빌려 외국으로 도망쳤다. 1907년 귀국하여, 탈주에 성공한 게르슈니와 전투단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내통자로서 아제프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3. 3. 주요 암살 사건 주도

1903년 사회주의 혁명당의 테러 조직인 전투단 지도자 그리 고리 게르슈니가 다른 이중 간첩의 밀고로 체포되자, 아제프는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보리스 사빈코프를 부관으로 두고 전투단의 수장이 되었다. 이로써 아제프는 러시아 최고의 테러리스트이자 최고액 연봉을 받는 오흐라나 정보원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전투단 수장으로서 아제프는 여러 주요 암살 사건을 조직했다.

  • '''뱌체슬라프 플레베 암살 (1904년):''' 아제프는 1904년 러시아 제국의 내무장관이었던 뱌체슬라프 플레베 암살을 성공적으로 조직했다. 암살 실행은 부관인 사빈코프가 지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플레베는 아제프를 고용한 오흐라나의 책임자였으며, 게르슈니 체포를 지시하여 결과적으로 아제프가 전투단 수장이 되는 데 영향을 미친 인물이기도 했다.
  • '''세르게이 대공 암살 (1905년):''' 1905년에는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이자 모스크바 총독이었던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암살을 조직하여 성공시켰다. 이 암살 역시 사빈코프가 현장에서 지휘했다.


이 두 차례의 성공적인 요인 암살은 사회주의 혁명당 내에서 아제프의 명성과 신뢰를 크게 높였다. 그는 이 신뢰를 악용하여 당내 경쟁자들의 명단을 오흐라나에 넘겨 체포되도록 만들었다. 1905년 한 해에만 전투 조직원 17명을 밀고했다는 기록도 있다.[2] 그러나 내무장관과 황족의 암살은 오흐라나 내부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경찰 국장 알렉세이 로푸킨이 사임하는 등 혼란을 야기했다. 후임 국장 표트르 라치코프스키는 아제프를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으며, 오흐라나 내부에서는 아제프의 이중 행위에 대한 반감이 커져갔다. 이로 인해 아제프의 정체가 노출될 위험 또한 높아졌다.

  • '''게오르기 가폰 암살 지시 (1906년):''' 1906년 2월, 아제프는 헬싱키에서 핀커스 루텐베르크로부터 1905년 혁명의 주역이었던 게오르기 가폰 신부 역시 경찰 정보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제프는 가폰을 "뱀처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4] 가폰은 이후 살해되었지만, 아제프는 자신의 고용주인 라치코프스키의 안전은 확보하려 했다.
  • '''니콜라이 2세 암살 시도 (1908년):''' 1908년 아제프는 황제 니콜라이 2세 암살을 계획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 시기부터 혁명가 블라디미르 부르체프 등이 아제프가 스파이라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3. 4. 동료 혁명가 밀고

1893년 4월, 카를스루에 공업대학 재학 중이던 아제프는 러시아 제국의 비밀경찰인 오흐라나에 편지를 보내 돈을 받고 동료 유학생들을 밀고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당국의 필적 감정으로 제안자가 아제프임이 밝혀졌고, 그는 보안부의 정보원이 되어 망명 중인 혁명가나 유학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894년에는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하여, 존경받는 나로드니크 부부 하임 지틀롭스키와 베라 로코바가 조직한 해외 사회주의 혁명가 연합에 가입했다.

1899년 대학 졸업 후 오흐라나의 지령에 따라 러시아로 돌아온 아제프는 안드레이 아르구노프가 이끄는 북부 사회주의 혁명가 연합에 가입하여 그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아르구노프는 폭력 혁명에 회의적이었지만, 아제프의 조직 운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물론 아르구노프는 아제프가 오흐라나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1901년 11월, 아르구노프는 여러 사회주의 혁명가 연합을 단일 조직으로 통합하는 임무를 맡겨 아제프를 유럽으로 보냈으나, 아제프가 러시아를 떠나자마자 체포되었다. 이는 아제프의 밀고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902년 스위스에서 아제프는 사회주의 혁명당(SR) 창당에 참여했으며, 테러 활동을 담당하는 전투 조직의 수장 그리고리 게르슈니 밑에서 부대표를 맡았다. 게르슈니는 아제프를 매우 신임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1903년 봄, 또 다른 이중간첩의 밀고로 게르슈니가 체포되자 아제프는 보리스 사빈코프를 부하로 두고 전투 조직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이로써 아제프는 러시아 최고의 테러리스트이자 동시에 가장 많은 보수를 받는 경찰 정보원이라는 모순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아제프는 어용 노조 결성을 통해 노동 운동을 통제하려 했던 보안부 책임자 세르게이 주바토프의 지도를 받으면서도, 혁명가 동지들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전투 조직의 지도자로서 그는 1904년 내무장관 뱌체슬라프 플레베 암살과 1905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숙부이자 모스크바 총독인 세르게이 대공 암살을 성공적으로 조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플레베는 아제프를 SR에 침투시킨 최종 책임자였으며, 게르슈니 체포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 결과적으로 아제프의 부상을 도운 인물이었다.

이 두 차례의 성공적인 암살은 사회주의 혁명당 내에서 아제프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그는 막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당내 경쟁자들의 명단을 오흐라나에 넘겨 체포되도록 만들었다. 밀고 대상에는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시도에 가담했던 베테랑 혁명가 안나 야키모바(24년간 투옥 후 석방)와 1906년 차르 경호대장을 암살하고 교수형당한 지나이다 코폴랴니코바 등 중요 인물들이 포함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공개된 경찰 기록에 따르면, 아제프는 1905년 한 해에만 SR 전투 조직 내 부하 17명을 밀고했다.[2]

내무장관과 황족의 암살은 오흐라나 내부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경찰 국장 알렉세이 로푸힌이 사임하고 그의 경쟁자였던 표트르 라치코프스키가 후임이 되었다. 라치코프스키는 아제프의 기존 관리인이었던 레오니드 라타예프를 해고하고 아제프를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제프의 이중 행각은 오흐라나 내부에서도 반감을 샀고, 결국 익명의 내부자가 SR 측에 오흐라나가 아제프와 타타로프라는 두 명의 정보원을 조직 내에 심어두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보리스 사빈코프는 타타로프의 암살을 지시했고, 그는 1906년 4월 4일 살해되었다. 하지만 SR 지도부는 여전히 아제프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제프는 추가적인 정보 유출을 우려하여 스위스 제네바로 거처를 옮겼다.[3]

1906년 2월 헬싱키에서 아제프는 중개인 핀커스 루텐베르크로부터 1905년 혁명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게오르기 가폰 신부 역시 경찰 정보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제프는 가폰을 "뱀처럼" 처리하라고 지시했지만,[4] 자신의 상관인 라치코프스키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신중을 기했다. 그는 테러 활동과 함께 스파이로서의 임무도 충실히 수행하여, 동료들을 계속 밀고하고 SR이 계획한 암살 계획들을 실패로 유도했다. 1906년에는 전투단 활동이 거의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고, 아제프는 당 자금 2만러시아 루블를 빌린 채 외국으로 도주했다.

1907년 아제프는 러시아로 돌아와 탈옥에 성공한 게르슈니와 함께 전투단을 재건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당 내부에서 아제프가 내통자일 수 있다는 의혹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1908년 아제프가 주도한 황제 니콜라이 2세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혁명가 출신 역사가 블라디미르 부르체프는 아제프를 스파이로 공개 고발했다. 결정적으로 아제프를 처음 스파이로 고용했던 전 경찰 국장 로푸힌이 부르체프에게 아제프의 정체를 확인해주면서 그의 이중생활이 폭로되었다.

SR 중앙위원회는 아제프에 대한 재판 없는 처형에는 반대했지만, 당 간부인 빅토르 체르노프 등이 그의 아파트에서 직접 사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제프는 사문 직전인 심야에 도주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체르노프는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중앙위원직을 사임했다. 아제프의 배신은 사회주의 혁명당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혁명 운동 내부의 불신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 정체 폭로와 도피

1908년 무렵, 혁명가 블라디미르 부르체프의 끈질긴 추적과 전직 경찰국장 알렉세이 로푸킨의 결정적인 증언으로 아제프의 이중 스파이 행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5]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는 진상 조사를 위한 심문 법정을 열었으나, 아제프는 조사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1909년 1월, 독일로 급히 도피하였다.[5] 이후 그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어 암살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살았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당국에 의해 적성국 국민으로 분류되어 억류되기도 했다.[5] 결국 1918년 베를린에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5] 그의 배신은 러시아 혁명 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의 정체를 폭로한 로푸킨은 아제프의 공작으로 인해 시베리아로 유배되는 비극을 겪었다.[5]

4. 1. 폭로 과정

1906년 말, 좌익 잡지 편집인 블라디미르 부르체프는 정부에 반기를 든 오흐라나 장교로부터 사회혁명당 지도부에 스파이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 장교는 스파이의 정확한 신원은 몰랐지만, 부르체프는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픈 택시를 타고 가는 아제프를 목격하고 그를 스파이로 의심하게 되었다.[5]

부르체프는 자신의 의심을 확신하거나 당내 유력 인사들에게 이를 납득시키기 어려웠으나, 기차에서 만난 알렉세이 로푸킨(과거 아제프를 스파이로 고용한 인물)에게 아제프가 스파이임을 확인받았다. 부르체프는 이 사실을 정리하여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했고, 중앙위원회는 베라 피그네르, 게르만 로파틴, 표트르 크로포트킨 등 세 명의 원로 혁명가로 구성된 심문 법정을 설치하여 부르체프의 주장을 심리했다.[5]

아제프는 부르체프의 정보 출처를 알게 되자 비밀리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로푸킨에게 증언을 부인하도록 압력을 가하려 했다. 그러나 로푸킨은 오히려 아제프의 옛 멘토였던 안드레이 아르구노프를 찾아가 부르체프의 증언이 사실임을 확인해주었고, 이후 런던으로 가서 당 대표 세 명에게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5]

1908년, 아제프가 중심이 되어 황제 니콜라이 2세 암살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 무렵 부르체프의 고발과 로푸킨의 정보 유출로 아제프의 정체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는 아제프에 대한 재판 없는 처형에는 반대했으며, 심지어 전투단 단원들은 아제프를 끝까지 믿으며 그를 처형할 경우 중앙위원 전원을 사살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5]

결국 당 중앙위원회는 아제프를 비난하고, 빅토르 체르노프 등 당 간부들이 그의 아파트에서 직접 사문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제프는 사문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1909년 1월 밤, 몰래 도주하여 독일로 달아났다.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체르노프는 중앙위원직을 사임했다. 중앙위원회는 도주한 아제프에 대한 암살을 명령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5]

아제프의 이중생활은 그의 아내 류바 만킨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녀는 남편의 실체가 밝혀진 후 그와 이혼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한편, 아제프의 정체를 폭로한 로푸킨은 아제프의 마지막 공작으로 인해 비난받고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5]

4. 2. 도피와 국외 생활

1906년 말, 좌익 잡지 편집인 블라디미르 부르체프는 전직 오흐라나 장교로부터 사회혁명당 지도부 내에 스파이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부르체프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아제프를 의심했지만, 확증을 잡거나 당 지도부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이후 부르체프는 우연히 만난 전직 경찰국장 알렉세이 로푸킨으로부터 아제프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부르체프는 이 사실을 정리하여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에 보냈고, 위원회는 베라 피그네르, 게르만 로파틴, 표트르 크로포트킨으로 구성된 심문 법정을 열어 부르체프의 주장이 신빙성 있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아제프는 비밀리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 로푸킨에게 증언 번복을 압박했다. 그러나 로푸킨은 오히려 아제프의 옛 동료인 안드레이 아르구노프와 런던의 당 대표들에게 아제프의 배신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1909년 1월, 중앙위원회는 아제프 암살을 결정하고 그를 유인하려 했으나, 아제프는 이를 눈치채고 독일로 도피했다.

그의 아내 류바 만킨은 남편의 이중생활을 전혀 몰랐으며, 사건 이후 그와 이혼하고 미국으로 이민했다. 한편 아제프는 자신의 정체를 폭로한 로푸킨에게 보복하여 그가 시베리아로 유배되도록 만들었다.

독일에서 아제프는 한 가수와 동거하며, 스파이 활동으로 축적한 자금으로 코르셋 판매원 및 주식 투기꾼으로 활동했다. 그는 주식 중개인으로 잠시 성공하기도 했으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파산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어 암살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살았다. 전쟁 중인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적성국 국민이라는 이유로 독일 당국에 의해 억류되었다.[5] 수감 생활 중 신장 질환을 앓게 되었다.

1917년 석방된 후에는 소비에트 러시아로 인도되지 않고 잠시 독일 외무성에서 근무했으나, 1918년 베를린에서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5. 몰락과 죽음

1907년 귀국한 아제프는 탈주에 성공한 그리고리 게르슈니와 함께 사회혁명당 전투단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당 내부에서 아제프가 내통자라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908년 아제프는 황제 니콜라이 2세 암살 계획을 주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혁명가 블라디미르 부르체프는 아제프가 비밀경찰의 스파이라고 공개적으로 고발했다. 부르체프는 당의 조사를 받았으나, 과거 아제프를 스파이로 고용했던 전직 경찰국장 알렉세이 로푸힌으로부터 아제프의 정체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오면서 의혹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당시 에스엘 중앙위원회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아제프의 즉결 처형에 반대했다. 심지어 일부 전투단원들은 여전히 아제프를 굳게 믿으며, 만약 아제프가 처형될 경우 중앙위원 전원을 사살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극심한 내부 혼란을 겪었다.

결국 당 중앙위원회는 아제프를 비난하며 빅토르 체르노프 등 당 간부들이 직접 아제프의 아파트에서 사문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사문 직전, 아제프는 심야에 기습적으로 도주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체르노프는 중앙위원직을 사임했다.

5. 1. 제1차 세계 대전 중 체포와 투옥

아제프는 서유럽을 떠돌다 베를린에 정착했다. 이후 베를린, 런던, 뉴욕 등지에서 주식 매매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주식 중개인으로 성공하여 여름에는 주로 프랑스 남부에서 도박을 하며 지냈으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파산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 제국 당국은 그를 러시아로 송환해야 할 혁명가이자 테러리스트로 여겨 체포하여 투옥했다.

1917년 석방되었으나, 소비에트 러시아로 인도되지 않고 독일 외무성에서 근무했다. 1918년 신장병으로 사망했다.

5. 2. 사망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파산했으며, 독일 제국 당국에 혁명가이자 테러리스트로 간주되어 체포 및 투옥되었다. 1917년 석방되었으나, 소비에트 러시아로 인도되지 않았고 독일 외무성에서 근무했다.

1918년 4월 24일 베를린에서 신부전으로 사망했으며, 빌머스도르프 묘지에 이름 없는 무덤으로 묻혔다.

6. 유산과 평가


  • 니콜라예프스키, B. ''스파이 아제프: 러시아 테러리스트이자 경찰 스툴.'' 가든 시티, NY, 1934.
  • 페브스너, G. ''에브노 아제프(1869-1918)의 이중 생활.'' 밀라노: 몬다도리, 1936. 315쪽.
  • 안나 가이프만 ''테러에 얽매이다: 아제프 사건과 러시아 혁명''. 학술 자원, 1999.
  • 리처드 E. 루벤스타인 ''발렌타인 동지: 스파이 아제프의 진실된 이야기—마지막 차르 시대 러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하코트 브레이스 앤 컴퍼니, 1994.
  • 슈크만, H. (편집) ''블랙웰 러시아 혁명 백과사전.'' 옥스퍼드, 1988.
  • 힐데마이어, M. ''러시아 사회 혁명당.'' 쾰른, 1978.
  • 레베카 웨스트의 소설 《새들은 떨어진다》(1966)는 아제프의 행적을 바탕으로 한 스파이 스릴러이다.[6]
  • 로만 굴의 소설 《아제프》(원제: 《B.O. 장군》, 1929; 후속판 OCLC 3229274)는 앨런 덜레스에 따르면 사실에 매우 충실하다.[6]
  •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서구의 눈으로》(1911, OCLC 608066)는 아제프의 이야기를 일부 차용했다.[6]
  • 보리스 니콜라예프스키 저, 『혁명의 유다 아제프』, 아라하타 칸손 역, 현대사조사, 1970년
  • 로만 구리 저, 『아제프』, 칸자키 노보루 역, 카와이데 서방 신사, 1970년

참조

[1] 서적 Aseff: the Russian Judas Hurst & Blackett 1934
[2] 서적 Большая совтск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volume 1 1926
[3] 서적 Aseff the Spy
[4] 웹사이트 Notes on Georgii Appolonovich Gapon (1870-1906) http://novaonline.nv[...]
[5] 간행물 Yevno Azeff: The Story of a Scoundrel 1972-11
[6] 서적 Great Spy Stories from Fiction https://archive.org/[...] Harper & 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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