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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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우치 게이고는 1930년 도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유학했다. 국회의원 가스가 잇코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여, 사회당 우파 정책심의회 사무국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민주사회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책심의회 사무국장과 부회장을 역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방문, 칠레 쿠데타 지지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으며,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정책심의회장과 서기장을 역임했다. 이후, 민주사회당 위원장과 후생대신을 역임하며 호소카와 내각에 참여했으나, 신진당 참여를 반대하고 자유연합을 거쳐 자민당에 입당했다. 1996년과 2000년 총선에서 낙선한 후 정계를 은퇴했으며, 2016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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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게이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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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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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우치 게이고 |
원어 이름 | 大内 啓伍 (おおうち けいご) |
출생일 | 1930년 1월 23일 |
출생지 | 도쿄부 도쿄시 교바시구 |
사망일 | 2016년 3월 9일 |
사망지 | 도쿄도 오타구 |
학력 | 와세다 대학 제1법학부 |
칭호/훈장 | 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법학사(와세다 대학) |
소속 정당 | 사회당 우파 일본사회당 민사당 자유연합 자유민주당 |
정치 경력 | |
전직 | 민사당 직원 |
직책 | 제75-76대 후생대신 |
내각 | 호소카와 내각 하타 내각 |
임기 시작 | 1993년 8월 9일 |
임기 종료 | 1994년 6월 30일 |
직책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구 도쿄 2구 |
당선 횟수 | 6회 |
임기 시작 | 1976년 12월 10일 - 1986년 6월 2일, 1990년 2월 18일 |
임기 종료 | 1996년 9월 27일 |
직책 | [[File:Flag of DSPJ.svg|25px]] 제7대 민사당 중앙집행위원장 |
임기 시작 | 1990년 4월 10일 |
임기 종료 | 1994년 6월 8일 |
2. 생애
1930년 도쿄부 도쿄시 교바시구(현 도쿄도 주오구)에서 료칸(여관)을 운영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2] 와세다 대학 제1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2] 학생 시절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나, 료칸을 찾은 국회의원 가스가 잇코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2]
1953년 사회당 우파 정책심의회 사무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했고,[2] 1960년 민주사회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책심의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이 아님에도 이례적으로 정책심의회 부회장을 맡았다. 1971년에는 민사당의 이론지 『혁신』을 창간하여 편집장을 맡았다.[3]
1972년 민사당 방중단 일원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일국교정상화 지지를 표명했다.[4]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칠레 쿠데타 이후 민사당 조사단의 일원으로 칠레를 방문, 피노체트를 취재하고 쿠데타를 지지했다.
1976년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민사당 공천으로 구 도쿄 2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초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1977년 정책심의회장에 발탁되었고, 1985년 쓰카모토 사부로 위원장 취임 후 서기장이 되었다. 1984년에는 중의원 오키나와 및 북방 문제에 관한 특별위원장을 역임했다.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연사공련 사건에서 수뢰 의혹이 제기되어 민사당을 탈당한 요코테 후미오의 기자 회견에 동석한 영향으로 구 도쿄 2구에서는 입후보자 6명 중 6위로 최하위로 당선된 일본공산당의 오카자키 마스히데에 약 3,500표 미달로 오우치만이 유일하게 낙선했다.[2] 낙선 후에도 서기장직을 유지하다가 1989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쓰카모토가 위원장에서 물러나자 함께 사임했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4년 만에 중의원에 복귀했다. 같은 해 스즈키 나오유키를 비서로 채용했다. 이 선거에서 민사당은 20석에도 못 미치는 참담한 성적을 거두었고, 나가스에 에이이치 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오우치가 후임 위원장이 되었다. 1992년 제1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4석만을 얻어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고,[5]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20석 미만의 의석을 얻었다.
그러나 해당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자, 오자와 이치로의 주도로 8개 야당이 모여 호소카와 내각을 수립, 자민당을 여당에서 끌어내렸다. 민사당도 연립 내각에 참여했고, 오우치는 후생상으로 첫 입각했다.
1994년 2월,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세율 3%의 소비세를 폐지하고 세율 7%의 국민복지세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담당 대신인 오우치는 사전에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오우치는 다케무라 마사요시 내각관방장관,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와 함께 국민복지세에 반대했고, 호소카와는 이를 철회했다. 이는 오자와 이치로가 자신의 최측근들과만 정책을 논의하고 다른 당에는 통보만 하는 권위주의적 방식을 보여준 사례로, 연립 정권 내 갈등이 작지 않음을 시사했다.
4월에 호소카와가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고 5월에 하타 쓰토무가 총리대신이 되자, 오우치는 후생상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오자와와 사회당의 갈등이 심화되어 사회당이 연립에서 이탈한 뒤 자민당과 손을 잡으면서, 6월에 연립 내각은 붕괴되었다. 하타 내각은 64일 만에 총사직했고, 오우치는 후생상과 민사당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이후 오자와는 신진당 창당을 구상했고, 민사당은 이에 합류하기 위해 당 해산을 논의했다. 그러나 창가학회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공명당이 신진당에 참여하자, 오우치와 쓰카모토 사부로는 종교 단체 간 갈등을 이유로 반대했다. 결국 민사당은 해산하고 대부분의 의원들이 신진당으로 옮겨갔지만, 오우치는 자유연합을 거쳐 자민당에 입당했다.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민당 공천으로 도쿄 4구에 출마했지만, 무소속 아라이 쇼케이에게 3만 표 이상의 차이로 패배하여 낙선했다. 아라이가 사망하자 1998년 보궐선거에 입후보하겠단 뜻을 표명했지만, 가토 고이치 간사장이 다음 총선에서 비례대표 명부 순위에서 우대해주겠다고 약속하자 입후보를 포기했다.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도쿄 비례대표 선거구에 자민당 공천으로 명부 5위에 이름을 올렸지만 4위까지만 당선되는 데 그쳐 또 낙선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2016년 3월 9일, 오타구의 한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6][7][8] 향년 86세. 사후 정3위가 추서되었다.[9]
2. 1. 초기 생애 및 정계 입문
오우치 게이고는 1930년 도쿄부 도쿄시 교바시구(현 도쿄도 주오구)에서 료칸(여관)을 운영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2] 와세다 대학 제1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2] 학생 시절 사법시험을 준비했으나, 료칸을 찾은 국회의원 가스가 잇코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2]1953년 사회당 우파 정책심의회 사무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했고,[2] 1960년 민사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책심의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이 아님에도 이례적으로 정책심의회 부회장을 맡았다. 1971년에는 민사당의 이론지 『혁신』을 창간하여 편집장을 맡았다.[3]
1972년 민사당 방중단 일원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일국교정상화 지지를 표명했다.[4]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칠레 쿠데타 이후 민사당 조사단의 일원으로 칠레를 방문, 피노체트를 취재하고 쿠데타를 지지했다.
1976년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민사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초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1977년 정책심의회장에 발탁되었고, 1985년 쓰카모토 사부로 위원장 취임 후 서기장이 되었다. 1984년에는 중의원 오키나와 및 북방 문제에 관한 특별위원장을 역임했다.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뇌물 수수 의혹과 민사당 탈당파 요코테 후미오의 기자 회견 동석 여파로 낙선했다. 낙선 후에도 서기장직을 유지하다가 1989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쓰카모토가 위원장에서 물러나자 함께 사임했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4년 만에 중의원에 복귀했다. 같은 해 스즈키 나오유키를 비서로 채용했다.
2. 2. 민사당 활동 및 국회의원 당선
오우치 게이고는 1930년 도쿄부 도쿄시 교바시구(현 도쿄도 주오구)에서 태어났다.[2] 와세다 대학 제1법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이후 가스가 잇코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하여 1953년 사회당 우파 정책심의회 사무국에서 근무하기 시작했고, 1960년 민주사회당 창당에 참여했다.[2] 1971년에는 민사당의 이론지 '혁신'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았다.[3]1972년 민사당 방중단에 참여해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 중일국교정상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4]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칠레 쿠데타 이후, 민사당 조사단의 일원으로 칠레를 방문하여 피노체트에게 쿠데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976년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민사당 공천으로 구 도쿄 2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 1977년 정책심의회장에 취임했으며, 1985년에는 쓰카모토 사부로의 위원장 승격에 따라 후임 서기장이 되었다. 1984년에는 중의원 오키나와 및 북방 문제에 관한 특별위원장에 취임했다.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연사공련 사건으로 민사당을 탈당한 요코테 후미오의 기자 회견에 동석한 여파로 낙선했다. 1989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쓰카모토 위원장이 사임하자, 오우치도 서기장에서 사임했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중의원에 복귀했다. 선거 참패 후 나가스에 에이이치의 사임으로 오우치는 민사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1992년 제1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사당은 4석을 얻는 데 그쳐 원내 교섭단체 자격을 상실했다.[5]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사당은 15석을 획득했다. 호소카와 내각이 수립되자 오우치는 후생상으로 첫 입각했다.
1994년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국민복지세 구상'을 발표했을 때, 담당 대신인 오우치는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다. 오우치는 다케무라 마사요시 내각관방장관,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위원장과 함께 반대했고, 호소카와 총리는 결국 철회했다. 하타 쓰토무 내각에서도 후생상에 유임되었으나, 하타 내각은 64일 만에 총사퇴했다. 오우치는 같은 해 6월 민사당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2. 3. 민사당 위원장 및 후생대신 역임
오우치 게이고는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어 4년 만에 중의원에 복귀했다.[4] 이 선거에서 민사당은 20석에도 못 미치는 참담한 성적을 거두었고, 나가스에 에이이치 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오우치가 후임 위원장이 되었다.[4] 1992년 제1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4석만을 얻어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고,[5]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20석 미만의 의석을 얻었다.[4]그러나 해당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자, 오자와 이치로의 주도로 8개 야당이 모여 호소카와 내각을 수립, 자민당을 여당에서 끌어내렸다.[4] 민사당도 연립 내각에 참여했고, 오우치는 후생상으로 첫 입각했다.[4]
1994년 2월,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세율 3%의 소비세를 폐지하고 세율 7%의 국민복지세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으나, 담당 대신인 오우치는 사전에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4] 오우치는 다케무라 마사요시 내각관방장관,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와 함께 국민복지세에 반대했고, 호소카와는 이를 철회했다.[4] 이는 오자와 이치로가 자신의 최측근들과만 정책을 논의하고 다른 당에는 통보만 하는 권위주의적 방식을 보여준 사례로, 연립 정권 내 갈등이 작지 않음을 시사했다.[4]
4월에 호소카와가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고 5월에 하타 쓰토무가 총리대신이 되자, 오우치는 후생상에 유임되었다.[4] 그러나 오자와와 사회당의 갈등이 심화되어 사회당이 연립에서 이탈한 뒤 자민당과 손을 잡으면서, 6월에 연립 내각은 붕괴되었다.[4] 하타 내각은 64일 만에 총사직했고, 오우치는 후생상과 민사당 위원장에서 물러났다.[4]
이후 오자와는 신진당 창당을 구상했고, 민사당은 이에 합류하기 위해 당 해산을 논의했다.[4] 그러나 창가학회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공명당이 신진당에 참여하자, 오우치와 쓰카모토 사부로는 종교 단체 간 갈등을 이유로 반대했다.[4] 결국 민사당은 해산하고 대부분의 의원들이 신진당으로 옮겨갔지만, 오우치는 자유연합을 거쳐 자민당에 입당했다.[4]
2. 4. 신진당 합류 반대 및 자민당 입당
오우치 게이고는 신진당 창당 과정에서 공명당의 참여에 반대했다. 이는 창가학회를 지지 기반으로 하는 공명당과 달리, 오우치가 입정교성회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사당 해산 후 대부분의 의원들이 신진당으로 옮겨갔으나, 오우치는 자유연합을 거쳐 1995년 자민당에 입당했다.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민당 공천으로 도쿄 4구에 출마했지만, 무소속 아라이 쇼케이에게 패배했다. 1998년 보궐선거 출마를 포기하고,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도쿄 비례대표 선거구에 자민당 비례대표 명부 5위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2. 5. 낙선 및 정계 은퇴
1986년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뇌물 수수 의혹과 민사당을 탈당한 요코테 후미오의 기자 회견에 동석한 여파로 도쿄도 제2구에서 최하위로 낙선했다. 낙선 후에도 서기장 자리를 지키다가 1989년 쓰카모토 사부로가 리크루트 사건의 여파로 위원장에서 물러나자 집행부도 총사퇴하면서 오우치도 서기장에서 사임했다.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민당 공천으로 도쿄 4구에 출마했지만, 무소속 아라이 쇼케이에게 3만 표 이상의 차이로 패배하여 낙선했다. 아라이가 사망하자 1998년 보궐선거에 입후보하겠단 뜻을 표명했지만, 가토 고이치 간사장이 다음 총선에서 비례대표 명부 순위에서 우대해주겠다고 약속하자 입후보를 포기했다. 2000년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도쿄 비례대표 선거구에 자민당 공천으로 명부 5위에 이름을 올렸지만 4위까지만 당선되는 데 그쳐 또 낙선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3. 정치 성향 및 평가
4.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회차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1976년 총선거 | 34회 | 도쿄도 제2구 | 민사당 | 77,645표 | 15.3%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79년 총선거 | 35회 | 도쿄도 제2구 | 민사당 | 57,358표 | 13.9%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0년 총선거 | 36회 | 도쿄도 제2구 | 민사당 | 85,323표 | 17.2%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3년 총선거 | 37회 | 도쿄도 제2구 | 민사당 | 64,407표 | 14.0%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86년 총선거 | 38회 | 도쿄도 제2구 | 민사당 | 61,710표 | 12.7% | 6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1990년 총선거 | 39회 | 도쿄도 제2구 | 민사당 | 80,882표 | 15.3% | 4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93년 총선거 | 40회 | 도쿄도 제2구 | 민사당 | 73,314표 | 15.1%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96년 총선거 | 41회 | 도쿄도 제4구 | 자유민주당 | 46,840표 | 22.7% | 2위 | 낙선 | 소선거구제 |
2000년 총선거 | 42회 | 비례대표(도쿄) | 자유민주당 | 5위 | 낙선 | 비례대표제 |
참조
[1]
웹사이트
旧民社党委員長の大内啓伍氏が死去 元厚相、86歳(写真=共同)
https://www.nikkei.c[...]
2016-03-10
[2]
뉴스
元民社党委員長の大内啓伍さん死去 細川内閣では厚生相
https://www.asahi.co[...]
朝日新聞デジタル
2020-02-09
[3]
웹사이트
連載「裏方物語」2
http://atlantic2.gss[...]
[4]
웹사이트
民社党訪中代表団と中日友好協会代表団の共同声明
https://worldjpn.net[...]
東京大学東洋文化研究所
2016-11-04
[5]
문서
[6]
뉴스
大内啓伍・元民社党委員長が死去
https://web.archive.[...]
2016-03-13
[7]
뉴스
旧民社党委員長の大内啓伍氏が死去 元厚相、86歳
https://www.nikkei.c[...]
2016-03-13
[8]
뉴스
訃報:大内啓伍さん86歳=元民社党委員長、元厚相
http://mainichi.jp/a[...]
2016-03-13
[9]
웹사이트
故大内啓伍氏に正三位
http://www.jiji.com/[...]
時事ドットコム
2016-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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