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가 잇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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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스가 잇코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10년 기후현에서 태어나 1989년 사망했다. 그는 나고야 중앙전화국에서 근무하다가 시인이 되려 했으나 실패하고, 사업가로 변신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계에 입문하여 일본 사회당 소속으로 아이치현 의회 의원을 지냈고, 1952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사회당(민사당) 창당에 참여하여 국회대책위원장, 서기장,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위원장을 지냈다.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실리 외교를 중시했으며, 중소기업 육성과 자공민 노선을 추구했다. 말년에는 일본·이스라엘 우호의원연맹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가스가 악기 제조라는 기타 제조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가스가 잇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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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경
인물 정보
이름가스가 잇코
출생일1910년 3월 25일
출생지기후현가이즈시
사망일1989년 5월 2일
사망지아이치현나고야시미즈호구 나고야 시립 대학 병원
출신 학교구제 나고야 체신 강습소(현 일본우편 중앙우정연수센터)
직업체신성 직원, 가스가 악기 제조 사장
정당(일본사회당→사회당 우파→일본사회당→)민주사회당
칭호와 훈장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정치 경력
소속 정당민주사회당
이전 소속 정당일본사회당 (1947-1952) (1955-1960), 우파 사회당 (1952-1955)
중의원아이치현 제1구
당선 횟수14회
임기 시작1952년 10월 2일
임기 종료1989년 5월 2일
민주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제3대
위원장 임기 시작1971년 4월 27일
위원장 임기 종료1977년 11월 28일
이전 위원장니시무라 에이이치
다음 위원장사사키 료사쿠
아이치현 의회 의원나고야시나카무라구 선거구
아이치현 의회 의원 당선 횟수2회
아이치현 의회 의원 임기 시작1947년 4월 30일
아이치현 의회 의원 임기 종료1952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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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10년 기후현 가이즈군 히가시에촌(현 가이즈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나고야체신강습소를 졸업하고 나고야중앙전화국(현 NTT 서일본 나고야지점)에서 근무했다. 프롤레타리아 문학다다이즘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이후 반공주의자로 전향했다.

하야시 후미코의 소개로 이쿠타 슌게쓰에게 자신의 를 보여줄 기회를 얻었으나, 시인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가쿠오잔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근처에 살던 농민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후 매형의 가게에서 일을 돕다가 1934년 실업가가 되어 무역 회사와 악기 제조 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아카마쓰 이사무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1947년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아이치현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1년 재선에 성공했다. 1949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대한 시위를 규제하는 공안 조례가 발의되자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그해 7월 1일 현의회 본회의에서 3시간에 걸쳐 반대 연설을 하여 조례안을 폐안시키는 데 성공했다.

1952년 총선사회당 우파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사회당 좌우파 통합 후 가와카미 조타로 파벌에 속했다. 1959년 니시오 스에히로가 사회당을 탈당하고 이듬해 1월 24일 민주사회당(민사당)을 창당했을 때 가스가도 함께했다. 1965년 국회대책위원장이 되어 자민당 다나카 가쿠에이 간사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이는 훗날 자공민 노선 실현에 기여했다.

반공주의를 내세워 일본공산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란 증거다", "인간을 경시하는 악마의 사상인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 인간의 책무다"라며 공산주의를 혐오했다. 대한민국과도 인맥이 있었으며, 실리 외교를 중시하여 중일국교정상화에 찬성했다. 공명당과 협력하여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던 자민당의 다나카를 지지했으며,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는 공동 성명에 민사당 방중단장으로서 서명했다. 일중 협회 간부로도 활동했다.

1971년 니시무라 에이이치 위원장 사망 후, 위원장 선거에서 소네 에키를 꺾고 민사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1977년 위원장에서 물러났으나, 상임고문으로서 당내 영향력을 유지했다.

1984년 12월 일본·이스라엘 우호의원연맹이 발족하자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89년 2월 리크루트 사건으로 쓰카모토 사부로가 위원장에서 사실상 쫓겨나고 반(反)가스가파인 나가스에 에이이치가 위원장이 되면서 가스가의 당내 영향력도 크게 줄었다. 그러다 1989년 5월 2일 나고야 시립 대학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2.1. 정계 입문 전

1910년 기후현 가이즈군 히가시에촌(현 가이즈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나고야체신강습소를 졸업하고 나고야중앙전화국(현 NTT 서일본 나고야지점)에서 근무했다. 프롤레타리아 문학다다이즘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이후 반공주의자로 전향했다.

하야시 후미코의 소개로 이쿠타 슌게쓰에게 자신의 를 보여줄 기회를 얻었으나, 시인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가쿠오잔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근처에 살던 농민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 이후 매형의 가게에서 일을 돕다가 1934년 실업가가 되어 무역 회사와 악기 제조 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했다.

2.2. 정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아카마쓰 이사무의 연설에 감명을 받은 가스가 잇코는 정치에 입문했다. 1947년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아이치현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1년 재선에 성공했다. 1949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대한 시위를 규제하는 공안 조례가 발의되자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다. 그해 7월 1일 현의회 본회의에서 3시간에 걸쳐 반대 연설을 하여 조례안을 폐안시키는 데 성공했다.

1952년 총선사회당 우파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5년 사회당 좌우파 통합 후 가와카미 조타로 파벌에 속했다. 1959년 니시오 스에히로가 사회당을 탈당하고 이듬해 1월 24일 민주사회당(민사당)을 창당했을 때 가스가도 함께했다. 1965년 국회대책위원장이 되어 자민당 다나카 가쿠에이 간사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이는 훗날 자공민 노선 실현에 기여했다.

반공주의를 내세워 일본공산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란 증거다", "인간을 경시하는 악마의 사상인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 인간의 책무다"라며 공산주의를 혐오했다. 대한민국과도 인맥이 있었으며, 실리 외교를 중시하여 중일국교정상화에 찬성했다. 공명당과 협력하여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던 자민당의 다나카를 지지했으며,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는 공동 성명에 민사당 방중단장으로서 서명했다. 일중 협회 간부로도 활동했다.

2.2.1. 현의원과 중의원 의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카마쓰 이사무의 연설에 감명을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1947년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아이치현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재선에 성공했다. 1949년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시위 규제 공안 조례에 반대하여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해 7월 1일 현의회 본회의에서 3시간에 걸쳐 반대 연설을 하여 조례안을 폐안시키는 데 성공했다.

1952년 총선사회당 우파 공천으로 구 아이치 1구에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5년 사회당 좌우파 통합 이후 우파 성향의 가와카미 조타로 파벌에 속했다.

2.2.2. 민주사회당 창당과 위원장

1960년 니시오 스에히로 등과 함께 민주사회당(민사당)을 창당하고, 국회대책위원장이 되었다. 1965년 자민당 다나카 가쿠에이 간사장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여 자공민 노선의 기반을 마련했다. 일본공산당을 강하게 비판하며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란 증거다", "인간을 경시하는 악마의 사상인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 인간의 책무다"라며 반공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실리 외교를 중시하여 중일국교정상화에 찬성하고,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는 공동 성명에 민사당 방중단장으로서 서명했다. 일중 협회 간부로도 활동했다.

1967년 민사당 서기장, 1969년 부위원장 겸 선거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1969년~1970년 공명당창가학회정교분리 문제와 미야자와 겐지의 과거 간첩 의혹 사건을 제기하며 공명당과 공산당을 강하게 공격했다.

1971년 니시무라 에이이치 위원장 사망 후, 위원장 선거에서 소네 에키를 꺾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사사키 료사쿠 서기장과 다케모토 마고이치 정책심의회장을 유임시켰고, 쓰카모토 사부로를 국회대책위원장에 지명했다.

1972년 총선에서 민사당은 20석 미만의 참패를 당했다. 1973년 나고야시장 선거에서 민사당은 자민당 후보를 지지했지만, 사회당과 공산당이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었다.

1974년 사사키 료사쿠를 부위원장으로, 쓰카모토 사부로를 서기장으로 승격시켰다. 1977년 위원장에서 물러났으나, 상임고문으로서 당내 영향력을 유지했다.

2.2.3. 퇴임 이후

1984년 12월 일본·이스라엘 우호의원연맹이 발족하자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89년 2월 리크루트 사건으로 쓰카모토 사부로가 위원장에서 사실상 쫓겨나고 반(反)가스가파인 나가스에 에이이치가 위원장이 되면서 가스가의 당내 영향력도 크게 줄었다. 그러다 1989년 5월 2일 나고야 시립 대학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3. 정책 및 정치 노선

가스가는 중소기업 육성에 힘쓴 정치인이었다. 「중소기업기본법」 제정에 기여하고, 민사중소기업정치연합을 결성하는 등 관련 정책 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실업자 출신이었던 그는 아이치현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두터운 지지를 받아, 아이치현을 민사당 텃밭으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65년 한일 국회에서 자민당 간사장 다나카 가쿠에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를 바탕으로 자공민 노선을 추진하여 자민당, 공명당과의 협력을 통해 안정적인 정국 운영을 추구했다.

가스가는 반공주의를 내세워 일본공산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공산주의를 "인간을 경시하는 악마의 사상"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실리적인 외교 노선을 추구하여 중일국교정상화에 찬성했고, 공명당과 협력하여 국교정상화를 추진하던 다나카를 지지했으며,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는 공동 성명에 민사당 방중단장으로서 서명했다. 일중 협회 간부로도 활동했다.

3.1. 대한민국과의 관계

가스가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란 증거다", "인간을 경시하는 악마의 사상인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 인간의 책무다"라며 공산주의를 몹시 혐오했다. 이러한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과도 인맥을 형성하고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권위주의 정부가 통치하고 있었지만, 가스가는 반공이라는 공통점을 중시했다.

4. 평가

가스가 잇코는 "가스가절"이라는 별명을 가진 연설의 달인이었다. 일본 사회당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1949년 점령군의 공안 조례 제안에 맞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7월 1일 현 의회 본회의에서 3시간 동안 의사 방해 연설을 하여 조례안을 폐안시켰다.

1965년 한일 국회에서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자민당 다나카 가쿠에이 간사장과 협력하여 자공민 노선의 기반을 다졌다. 자민당 주장을 "이유는 나중에 화물차로 따라온다"라고 평가했다.

일본 공산당에 대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인간인 것의 증명", "인간을 경시하는 악마의 사상,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 인간의 책무"라고 비판했다.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해서는 다나카 가쿠에이, 공명당과 함께 중일 관계 정상화를 지지하는 공동 성명에 서명하고, 일중 협회 임원도 맡았다.

1969년~1970년 공명당·창가학회 정교분리 문제(언론 출판 방해 사건)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증인 소환, 공산당 미야모토 스파이 사건에서 미야모토 겐지 증인 환문을 요구했다.

1973년 나고야 시장 선거에서 민사당은 스기토 키요시를 지지했으나, 사회당과 공산당 지지를 받은 모토야마 마사오가 당선되었다.

1984년 일·이스라엘 우호 의원 연맹 초대 회장을 맡았다.

츠카모토 사부로, 가와무라 타카시, 미토 마사시, 아오키 히로유키 등이 가스가의 비서 출신이다. 나카가와 이치로와 친분이 있었고, 그를 높이 평가했다.

4.1. 긍정적 평가

春日 一幸일본어는 중소기업기본법 제정에 관여하고 민사 중소기업 정치 연합을 결성하는 등 중소기업 정책에 힘을 쏟았다. 실업자 출신이었던 가스가는 아이치현의 중소기업 경영자들로부터 두터운 지지를 받았으며, 아이치현을 전국에서 손꼽히는 민사당의 텃밭으로 만들었다.

사사키 료사쿠는 가스가와 오랜 맹우이자 라이벌 관계였다. 가스가는 자공민 노선을 선호했지만, 사사키는 사회당 우파와의 연계를 중요시해 사공민 노선을 주장했다. 하지만 사사키가 위원장이 되었을 때 가스가는 사사키를 지원했다.

1985년 사사키가 위원장에서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가스가의 복심인 쓰카모토 사부로를 내정하자 부위원장으로 내정된 나가스에 에이이치가 이의를 제기했다. 상임고문이던 가스가는 화가 나서 나가스에에게 윽박질렀고, 사사키가 재떨이를 쥐어잡고 가스가를 노려보면서 주먹다툼 일보 직전까지 갔다. 나중에 쓰카모토가 리크루트 사건으로 사임에 내몰렸을 때도 가스가는 쓰카모토를 옹호하고 사사키는 쓰카모토의 사임을 요구해서 대립했는데, 쓰카모토는 결국 사임해야 했다.

4.2. 부정적 평가

가스가 잇코는 여러 여성들과의 스캔들로 인해 '여색가'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 도덕성 논란에 휩싸였다. 또한, 그의 측근이었던 쓰카모토 사부로리크루트 사건에 연루되어 가스가 잇코는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5. 일화

가스가는 연설의 달인으로 알려져 "가스가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사키 료사쿠와는 오랫동안 맹우이자 라이벌 관계였다. 가스가는 자공민 노선을 선호했지만 사사키는 사회당 우파와의 연계를 중요시하는 사공민 노선을 주장하여 정치 노선에서 차이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키가 위원장이 되었을 때 가스가는 사사키를 지원했다.

사사키가 위원장에서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가스가의 복심인 쓰카모토 사부로를 내정하자, 부위원장으로 내정된 나가스에 에이이치가 이에 이의를 제기했다. 상임고문이던 가스가는 화가 나서 나가스에에게 윽박질렀고, 사사키는 재떨이를 쥐어잡고 가스가를 노려보면서 주먹다툼 일보직전까지 갔다. 이후 쓰카모토가 리크루트 사건으로 사임에 내몰렸을 때도 가스가는 쓰카모토를 옹호하고 사사키는 쓰카모토의 사임을 요구하며 대립했지만, 쓰카모토는 결국 사임해야 했다.

이후 가스가가 병상에 눕자 사사키가 병문안을 가서 소바를 먹여주면서 두 사람은 화해했다.

한편, 가스가는 염복이 있어 많은 애인을 뒀는데, 관련 스캔들이 언론에 보도돼도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6.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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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회차지역구소속 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현의회의원 선거1회아이치현의원 (나고야시 나카무라구)일본사회당당선중선거구제
현의회의원 선거2회아이치현의원 (나고야시 나카무라구)일본사회당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25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우파사회당31,4028.34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26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우파사회당40,14210.64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27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우파사회당43,38610.24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28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일본사회당94,60116.42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29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민사당80,82714.64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30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민사당118,50518.61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31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민사당84,61821.91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32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민사당90,56423.02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33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민사당109,04727.71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34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민사당105,01726.51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35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민사당87,21920.71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36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민사당93,04019.61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37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민사당75,99818.01위당선중선거구제
총선거38회중의원 의원 (아이치현 제1구)민사당72,34616.43위당선중선거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