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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모리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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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1938년 도쿄에서 태어난 일본의 정치인으로, 아사히 신문 기자, 구마모토현 지사를 거쳐 1993년 일본 총리를 역임했다. 총리 재임 기간 중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과하고, 정치 개혁을 추진했으나, 자금 문제로 사임했다. 이후 정계 은퇴 후 도예가로 활동하며, 2014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탈원전 운동을 펼치며,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협력하여 관련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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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 모리히로
기본 정보
공식 초상, 1993년
이름호소카와 모리히로
출생일1938년 1월 14일
출생지도쿄, 일본 제국
배우자호소카와 가요코 (1971년 10월 23일 결혼)
자녀3명 (호소카와 모리미쓰 포함)
학력소피아 대학교
서명Morihiro Hosokawa signature.svg
로마자 표기Morihiro Hosokawa
정치 경력
직책내각총리대신
임기 시작1993년 8월 9일
임기 종료1994년 4월 28일
국왕아키히토
전임미야자와 기이치
후임하타 쓰토무
정당자유민주당 (1992년까지)
일본신당 (1992년~1994년)
신진당 (1994년~1997년)
프롬 파이브 (1997년~1998년)
민정당 (1998년)
민주당 (1998년~2016년)
다른 직책일본신당 대표 (1992년 5월 22일 ~ 1994년 12월 9일)
구마모토현 지사 (1983년 2월 11일 ~ 1991년 2월 10일)
참의원 의원 (1971년 7월 4일 ~ 1977년 7월 10일, 전국구)
참의원 의원 (1977년 7월 10일 ~ 1983년 2월 11일, 구마모토현 선거구)
참의원 의원 (1992년 7월 26일 ~ 1993년 7월 18일, 전국구)
중의원 의원 (1993년 7월 18일 ~ 1998년 5월 7일, 구마모토현 1구)
프롬 파이브 대표 (1997년 12월 26일 ~ 1998년 1월 23일)
친척고노에 다다테루 (형)
기타 정보
웹사이트湯河原だより|細川護熙 공식 홈페이지
학위법학사 (소피아 대학교, 1963년)
가문히고 호소카와 가문
가족호소카와 모리히사 (증조부)
이케다 아키마사 (증조부)
고노에 아쓰마로 (증조부)
호소카와 모리타쓰 (조부)
고노에 후미마로 (조부)
호소카와 모리나리 (대백부)
고노에 히데마로 (대숙부)
난부 도시히데 (종백부)

2. 생애

구마모토 번 호소카와 가문의 제18대 당주이자 제79대 내각총리대신. 1938년 도쿄부에서 태어났으며, 외할아버지는 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이다.[2] 그리스도교 순교자 호소카와 그라시아의 후손이기도 하다.[4]

조치 대학 법학과 졸업 후 1963년 4월 아사히 신문 기자로 활동하다 1968년 퇴사했다. 1969년 중의원 선거에 낙선했으나, 1971년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 1977년 재선되었다.

1983년부터 1991년까지 구마모토현 지사를 두 차례 역임했다. 재임 중 중앙 정부의 관료주의를 비판하며 지방 분권의 필요성을 느꼈다.[5]

1992년 5월 22일 일본신당을 창당하고 당 대표가 되었다. 1993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하자, 7개 야당 연립 정권의 총리 후보로 추대되어 8월 9일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이는 1955년 이후 38년 만의 정권 교체로 55년 체제를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취임 당시 74%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총리 재임 중 태평양 전쟁을 "침략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인정하고[7], 1993년 11월 대한민국 경주 방문 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식민 지배에 대해 "참기 힘든 고통을 끼쳤다. 우리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과드린다"라고 공식 사과하는[103] 등 과거사 문제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한 정치개혁 4법을 통과시켜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와 정당 보조금 제도를 도입했다.[32] 그러나 사가와 규빈으로부터의 1억 차입 문제[32] 등이 불거지면서 정치적 압박을 받아 1994년 4월 28일, 8개월 만에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사임 직후인 5월 30일에는 과거 침략전쟁 발언에 불만을 품은 우익 인사로부터 저격 위협을 받기도 했으나 무사하였다.[8] 이후 신진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탈당하고 프롬파이브, 민정당을 거쳐 1998년 민주당 창당에 합류했다. 같은 해 5월 7일, 만 60세(환갑)를 맞아 중의원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 도예가로 전향했다.[32]

정계 은퇴 후에는 도예, 서화 등 예술 활동에 전념하며 공익재단법인 에이세이 문고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04년에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산청군을 방문해 도예가 민영기 씨와 교류를 가졌으며,[104] 201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지원을 받아 탈원전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도쿄 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마스조에 요이치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그는 "대한제국 병합은 강제된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105] 2022년 1월 9일 가이후 도시키가 사망함에 따라, 생존하는 총리 경험자 중 최고참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언론인 경력

1938년 1월 14일, 도쿄부 도쿄시(현 도쿄도 치요다구)에서 구 구마모토 번 호소카와 가문의 제17대 당주 호소카와 고테이와 전 내각총리대신 고노에 후미마로의 차녀 아츠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 외할아버지는 고노에 후미마로이며,[2] 구니 아사히코 왕자의 증손자이자 현 천황 나루히토의 삼촌뻘이다.[3] 또한 호소카와 그라시아의 후손이기도 하다.[4] 본적지는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 두었다.

가쿠슈인 유치원과 세이센 소학교를 거쳐 에이고가쿠엔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쿠슈인 고등과를 졸업했다. 교토 대학 입시에 두 차례 실패한 후, 1963년 3월 조치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1963년 4월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했다. 가고시마 지국 근무를 거쳐 본사 사회부 기자로 일하며 경찰 담당 유격 기자로서 도쿄대학 혼란과 김희로 사건 등을 취재했다.[34] 1968년 11월 아사히 신문을 퇴사하였다.

2. 2. 정계 입문

조치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4월 아사히 신문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하다 1968년 11월에 퇴사하였다. 평소 정계 진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마쓰마에 시게요시(일본 사회당)로부터 권유를 받아 1969년 12월 제3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 구마모토 1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호소카와 호테이는 아들의 정계 입문을 강하게 반대하며 집안과의 의절을 선언했고, 이로 인해 집안의 지원 없이 선거를 치러야 했다. 당시 내각총리대신 사토 에이사쿠를 만났을 때 다나카 가쿠에이를 소개받았고, 다나카로부터 "당선되려면 6만 표가 필요하니, 선거 전까지 3만 가구를 직접 방문하라"는 조언을 듣고 이른바 도부이타 선거(どぶ板選挙, 밑바닥 훑기식 선거)라 불리는 가가호호 방문 유세를 펼쳤으나, 유권자들에게는 무명에 가까웠고 결국 38,632표를 얻어 낙선하였다.[34]

2년 뒤인 1971년 6월 22일, 제9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자유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전국구로 출마하였다. 이시하라 신타로 등의 지원을 받아 당선되어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의 파벌인 칠일회(다나카파) 창립에 참여하였다. 1977년 7월 10일에는 제1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구마모토현 선거구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다시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참의원 시절 대장성 정무차관과 자유민주당 참의원 부간사장을 역임했다.[35]

2. 3. 구마모토현 지사

참의원 2선 임기 중이던 1983년, 구마모토현 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현직 지사였던 사와다 카즈키와 자민당 공천을 두고 경쟁했으나, 당내 조정을 통해 호소카와가 공천 후보로 결정되었다. 1983년 1월 12일 참의원 의원직을 사퇴했는데, 임기 만료까지 6개월이 채 남지 않았기 때문에 보궐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 같은 해 2월에 치러진 지사 선거에서 83.44%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전국 최연소 지사였다. 참고로, 전임 지사 사와다 카즈키는 같은 해 6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공천으로 당선되어, 사실상 호소카와와 자리를 맞바꾼 셈이 되었다.

1987년 지사 선거에서도 자민당 공천을 받아 재선에 성공했으며, 1991년 2월까지 총 8년간 구마모토현 지사직을 수행했다. 재임 기간 동안 "일본 제일 만들기 운동"과 도시 디자인 프로젝트인 구마모토 아트 폴리스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또한 NHK의 유명 아나운서였던 스즈키 켄지를 구마모토현립극장 관장으로 영입하고, 지역 민영 방송국인 구마모토 아사히 방송의 개국에도 힘을 보탰다.

호소카와는 지사로 재직하면서 중앙 정부에 권한이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현실을 절감하고 지방 분권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는 "버스 정류장 위치를 불과 몇 미터 옮기는 사소한 일에도 중앙 부처인 운수성(현 국토교통성)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절차가 매우 번거롭다"는 사례를 자주 언급하며 경직된 관료주의를 비판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이후 일본신당을 창당하고 중앙 정치 무대에서 개혁을 추진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2. 4. 일본신당 창당과 총리 취임

구마모토현 지사를 2기 8년간 역임한 후, "권력은 10년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1991년 2월 퇴임하였다. 이후 활동 거점을 도쿄로 옮겼다.

1992년, 문예춘추를 통해 '자유사회연합' 결성을 선언하였다. 이는 냉전 종식이라는 국제 정세 변화와 리쿠르트 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정치 부패,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 정치 및 행정 개혁 지연 등을 배경으로 했다. 호소카와는 정권 교체가 거의 불가능했던 자유민주당(자민당)과 일본사회당 중심의 양당제(1.5당 체제)를 극복하고, 정권 교체가 가능한 보수 양당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공모를 통해 당명을 일본신당으로 정하고, 10년 내 정권 획득을 목표로 내걸었다. 같은 해 7월 26일 제16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 비례대표로 출마하여 국정에 복귀했으며, 일본신당은 호소카와를 포함해 4석을 획득하며 신생 정당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1993년,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정치 개혁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자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이 자민당 내 개혁파(하타파)의 찬성으로 가결되었고, 미야자와 총리는 중의원을 해산했다(거짓말 해산). 이 과정에서 자민당을 탈당한 의원들이 신생당(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 등)과 신당 사키가케(타케무라 마사요시, 하토야마 유키오 등)를 창당했다.

1993년 7월 18일 치러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신당은 약진했고, 호소카와 자신도 구 구마모토현 제1구에서 높은 득표율로 중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선거 결과, 자민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기존 야당만으로도 과반수를 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신생당과 일본신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당초 자민당과의 연립을 모색하던 움직임도 있었으나, 신생당 대표 간사 오자와 이치로가 비밀리에 '호소카와 총리' 카드를 제시하며 비자민 연립 정권 구성을 추진했다. 일본신당과 신당 사키가케는 '정치 개혁 정권' 수립을 제창하며 비자민 연립 노선에 힘을 실었고[36][37], 결국 호소카와는 비자민·비공산 7당 1회파 연립 정권의 총리 후보직을 수락했다.

1993년 8월 9일, 호소카와는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여 호소카와 내각을 발족시켰다. 이는 1955년 자민당 창당 이후 38년 만에 이루어진 정권 교체였으며, 이른바 55년 체제의 붕괴를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공선 지사 출신으로는 최초이자 유일한 총리였으며, 중의원 당선 1회 만의 총리 취임이라는 이례적인 기록도 세웠다. 내각 출범 직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70%를 넘어서는 등 국민적 기대가 매우 높았다. 이는 당시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결과로 평가된다. 연립 정권은 일본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일본신당, 민사당, 신당 사키가케, 사회민주연합 등 다양한 성향의 7개 정당과 참의원 교섭단체 민주개혁연합으로 구성되어 '8당 연립', '유리 세공 연립' 등으로 불리며 정책 조율의 어려움이 예상되기도 했다.

1993년 9월 27일 유엔 총회에서의 호소카와

2. 5. 총리 재임 기간

1993년 7월 18일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신당은 약진했고, 호소카와는 고이케 유리코와 함께 중의원으로 자리를 옮겨 구 구마모토현 제1구에서 당선되었다. 이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자민당)은 하타파의 탈당으로 과반수를 잃었고, 선거 후에도 과반수를 회복하지 못했다. 기존 야당만으로도 과반수 확보가 어려워지자, 하타파가 만든 신생당과 호소카와의 일본신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신당 사키가케 대표 다케무라 마사요시는 자민당과의 연립을 모색했지만, 신생당 대표 간사 오자와 이치로는 비밀리에 '호소카와 총리' 카드를 제시하며 비자민 연립 정권 구성을 추진했다.[36][37] 결국 호소카와는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의 총리직 제안을 수락했다.

1993년 8월 9일, 정치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건 호소카와 연립 정권이 출범했다. 이는 1955년 이후 38년 만에 자민당으로부터 정권을 교체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55년 체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공선 지사 출신으로는 최초이자 유일한 총리였으며, 중의원 당선 1회 만의 총리 취임은 요시다 시게루 이후 45년 만이었다. 일본신당,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등 7개 당과 참의원 원내 교섭단체 민주개혁연합까지 총 8개 세력이 참여한 연립 정권은 '8두 마차', '유리 세공 연립' 등으로 불리며 불안정하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출범 직후 여론조사에서 70%가 넘는 전례 없이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국민적 기대를 모았다. 당시 주일 미국 대사였던 월터 먼데일은 호소카와가 이상에 집중하는 "케네디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하기도 했다.[6]

호소카와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과거사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1993년 8월 15일, 전국전몰자추도식 연설과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태평양 전쟁이 "침략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인정하며 일본의 과거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가해 책임을 명확히 했다.[7] 이는 역대 총리 중 처음으로 '침략'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발언이었다. 그는 "상식적으로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초래했는데, 침략자가 아니라고 양심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부연했다.[7] 1993년 11월 6일, 대한민국 경주를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한반도 식민 지배에 대해 "참기 힘든 고통을 끼쳤다. 우리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과드린다"라고 공식적으로 사과했다.[103][7] 이는 한국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또한 그는 한일 병합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하며, 한국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고 한국에 이익이 되었다는 일본 내 우익의 주장을 반박했다.[7][105] 이러한 과거사 인식은 1994년 3월 중국 방문으로 이어져 환경 보호 협력 협정을 체결하는 등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 노력으로 나타났다. 그의 행보는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시베리아 일본군 포로 억류 문제에 대해 사과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7]

1993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APEC) 정상회의에서 빌 클린턴과 함께


정권의 최대 과제였던 정치 개혁은 선거 제도 개혁과 정치 자금 규제 강화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 도입과 기업의 정치 자금 기부 금지 등을 목표로 했으나, 자민당의 반대와 연립 여당 내 이견으로 난항을 겪었다.[9] 특히 사회당 일부 의원들은 소선거구제 도입에 반대하며 법안 처리를 막기도 했다. 결국 호소카와는 1994년 1월, 자민당 총재 고노 요헤이와의 담판을 통해 자민당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한 수정안(소선거구 300석, 비례대표 200석)에 합의함으로써 정치 개혁 4법을 통과시켰다.[10] 이로써 다케시타 내각 이후 5년간 지속된 정치 개혁 논의를 마무리 지었으나, 타협 과정에서 개혁의 취지가 후퇴했다는 비판과 함께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10] 도입된 소선거구제와 정당 교부금 제도는 이후에도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32]

경제 분야에서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타결에 따라 시장 부분 개방을 단행했다.[39] 이는 자민당 정권 시절부터 이어져 온 난제였으나, 연립 여당 내 사회당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호소카와는 개방을 결정했다. 자민당은 이를 비판했지만, 당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40] 일본공산당 등은 호소카와 정권이 자민당의 농업 정책 노선을 그대로 따랐다고 비판했다.[41] 또한, 1993년 12월에는 장애인의 사회 참여 확대를 위한 장애인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었고,[11] 1994년 4월 1일부터는 주 40시간 근무제가 도입되었다.[12]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호소카와는 1994년 2월 3일 새벽, 소비세를 현행 3%에서 7%로 인상하는 '국민복지세' 구상을 기습적으로 발표했다.[42] 이는 재무성과의 협의를 거친 것이었으나, 연립 여당 내부는 물론 내각관방장관 다케무라 마사요시조차 사전에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결정이었다. 세율 인상의 근거를 묻는 질문에 "허리에 힘을 준 숫자"라고 답하는 등[44] 준비 부족을 드러냈고, 여론의 거센 반발과 사회당, 민사당 등 연립 파트너들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했다.[44] 결국 호소카와는 발표 다음 날인 2월 4일 구상을 전면 백지화해야 했고, 이는 정권의 구심력 약화와 붕괴를 앞당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3][14][15]

1994년 2월 미국 방문 중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는 미일 무역 마찰 해소를 위한 수치 목표 설정에 합의하지 못해 '결렬'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실제 회담에서는 북한 핵 문제가 주요 의제였으며, 미국 측은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언급하며 일본의 지원을 요구하고 연립 정권 내 친북 성향 인사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45][47]

국민복지세 파동 이후 연립 정권 내 오자와 이치로와 다케무라 마사요시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호소카와는 내각 개편을 통해 다케무라를 경질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기에 야당이 된 자민당이 호소카와 총리가 사가와 급편으로부터 1억을 차입하고 미상환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공세를 폈다. 호소카와는 자택 수리비 명목의 차입금이며 이미 상환했다고 해명했지만[48],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국회는 공전했고 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결국 1994년 4월 8일, 호소카와는 총리직 사퇴를 표명했다. 예산 심의 시작 전에 총리가 사임하는 이례적인 상황 속에, 국민적 기대를 모았던 호소카와 내각은 8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그의 사퇴는 연립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사퇴 직후인 5월 30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린 일본신당 총회 참석 후, 과거 침략전쟁 발언에 불만을 품은 우익 극단주의자 노조에 마사카츠로부터 저격 위협을 받았으나 무사했다.[8]

2. 6. 총리직 사임과 이후 정치 활동

1994년 4월 28일, 총리 재임 중 불거진 사가와 규빈 사건 등 정치자금 문제가 계속되자[32] 결국 총리직 사퇴를 선언했다. 사임 한 달 뒤인 5월 30일, 도쿄 니시 신주쿠 게이오 플라자 호텔에서 열린 일본신당 총회 참석 후, 그의 '침략전쟁' 발언에 불만을 품은 노조에 마사카쓰라는 인물로부터 저격 위협을 받기도 했으나 다행히 무사하였다.

호소카와 사임 후 하타 쓰토무를 총리로 하는 내각이 출범했지만, 연립 여당 내 통일 교섭 단체 '개신(改新)' 결성에 일본사회당이 반발하며 연립 정권에서 이탈했다. 이로 인해 하타 내각은 소수 여당으로 전락했고, 호소카와는 차관 미상환 문제로 국회 증인 신문까지 받게 되었다. 결국 사회당의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비자민 연립정권은 출범 10개월 만인 1994년 6월 하타 내각 총사퇴로 붕괴되었다.

1994년 12월, 신진당 결성에 참여했다. 1995년 7월 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당수 가이후 도시키, 하타 쓰토무와 함께 '삼총리 작전'(총리 경험자 3인을 전면에 내세운 선거 전략)을 펼치며 정권 교체 가능한 야당 이미지를 부각시켜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선거 후 신진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도모베 다쓰오가 오렌지 공제조합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그의 비례 명부 순위 결정에 관여했다는 의혹으로 추궁을 받게 되었다. 또한, 1996년 말 당 대표가 된 오자와 이치로의 강압적인 당 운영 방식에 대한 불만이 커지면서[32] 1997년 6월 신진당을 탈당했다.

신진당 탈당 후, 같은 해 12월 신당 '프롬파이브'를 잠시 결성했다가 1998년 1월 하타 쓰토무 등과 함께 민정당을 창당했다. 이후 구 민주당, 신당 우애 등과 야권 통합을 추진하여 1998년 4월 새로운 민주당 창당에 합류했다.

민주당 창당 직후인 1998년 5월 7일, 만 60세(환갑)가 된 것을 계기로 중의원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도예가로 활동했으며, 2014년 1월 14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지지를 받아 도쿄 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마스조에 요이치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다. 2004년 여름에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산청군을 방문하여 도예가 민영기 씨와 교류하기도 했다.[104]

2. 7. 정계 은퇴 이후

1998년 5월 7일, 만 60세(환갑)를 맞이하여 중의원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32]

정계 은퇴 후에는 주로 도예가 및 다인(茶人)으로 활동하며, 가나가와현 유가와라정에 있는 조모 고노에 지요코(近衛千代子)가 살던 저택에 공방과 다실 '불동암(不東庵)'을 마련했다. 다실 설계는 건축사학자 후지모리 데루노부가 맡았으며, 도예는 츠지무라 시로에게 18개월간 집중적으로 배웠다.[20][50] 그의 도자기는 일본 국내와 유럽 등지에서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었다.[21] 또한 다도를 위해 마련된 다실에서 직접 만든 다기를 사용하기도 한다.[22] 2004년 여름에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산청군을 방문하여 도예가 민영기 씨와 함께 도자기를 만들기도 했다.[104]

도예 외에도 그림에 능숙하여, 2013년부터 2024년까지 교토의 겐닌지 쇼덴에이겐인(正伝永源院), 나라야쿠시지 자온전(慈恩殿), 교토 료안지, 교토 난젠지 텐주안(天授庵), 고야산 소지인(總持院) 등 여러 사찰에 붙박이 그림(襖絵) 총 162면을 제작하여 봉납하였다. 2001년부터는 봄과 가을을 중심으로 다기, 서예, 그림 등을 전시하는 개인전을 꾸준히 열고 있다.

창작 활동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1999년 10월부터 2002년 9월까지 TBS 라디오에서 '호소카와 모리히로·이 사람을 만나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101][102] 1998년 7월부터는 ''재팬타임즈''의 특별고문을 맡고 있다. 2005년 부친 사망 후에는 호소카와 가문의 18대 당주 자리를 계승하여 공익재단법인 에이세이 문고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또한 2011년에는 도호쿠 예술공과대학과 교토 조형예술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고,[54][55][56] 2012년에는 동일본 대지진 당시 발생한 잔해(瓦礫)를 활용하여 방조림을 조성하는 '와레키오이카스모리노나가마키 프로젝트'(瓦礫を活かす森の長城プロジェクト)를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제6회 고토 신페이상을 수상했다. 2017년에는 일본미술도검보존협회의 명예고문으로 취임하였다.

정계 은퇴 후에도 정치 현안에 대해 간간이 목소리를 냈다. 간 나오토 내각의 정권 운영을 비판했으며,[52] 2010년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는 오자와 이치로 지지를 표명하기도 했다.[51]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선거운동 (2014년 2월 7일 다카다노바바 역에서)


2014년에는 75세의 나이로 2014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출마하며 잠시 정계에 복귀했다. 당초 민주당의 출마 제안을 거절했으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아베 신조 정권의 원전 재가동 정책에 반대하는 여론을 모으기 위해 출마를 강력히 권유하자 이를 수락했다.[23] 그의 출마는 탈원전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으며, 고이즈미 전 총리와 함께 선거 운동을 펼쳤다.[25]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그는 아베 정권의 원전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며 "도쿄는 다른 지역에 원전과 핵폐기물을 떠넘기면서 전기의 편리함만 누리고 있다"고 지적했고,[27] 2020년 하계 올림픽을 앞둔 아베 총리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27] 선거 결과 마스조에 요이치 후보에게 패배하여 낙선했지만,[29] 이후에도 탈원전 운동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29]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자신의 작품을 전람회나 경매에 출품하여 얻은 수익금을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해 기부하고 있다.[58] 현재도 현역 국회의원들이 자문을 구하기 위해 그를 찾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58]

3. 가족 관계

선조 호소카와 유사이


호소카와씨아시카가씨의 분가로, 본성겐지(河内源氏)이다. 진수부장군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후손인 호소카와 요시스에를 시조로 한다. 다만, 에도 시대구마모토번주가 된 호소카와 가문은 우다 겐지 사사키씨의 서류인 오하라씨 출신으로, 무로마치 막부 봉공중이었던 호소카와 마사타다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명으로 아와지 슈고 호소카와씨의 양자가 되어 호소카와 성을 쓰기 시작한 데서 유래한다.

구마모토번 호소카와 가문에서는 근세 초기의 문화인이자 무장으로 알려진 호소카와 유사이를 초대 조상으로 여기며,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그의 18대 당주에 해당한다. 유사이의 아들인 호소카와 다다오키세키가하라 전투의 공으로 초대 고쿠라 번주가 되었다. 다다오키의 아내는 호소카와 가라샤로 유명하지만, 모리히로는 계보상 손자뻘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후에 다다오키의 측실 자손이 번주 자리를 양자 상속했기 때문에 가라샤의 직계 후손은 아니다.[4] 구마모토 번주 가문은 메이지 시대화족이 되어 후작위를 받았다.

모리히로의 아버지는 제17대 당주 호소카와 모리사다이며, 어머니 호소카와 아쓰코는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의 차녀이다. 외조부 고노에 후미마로는 쇼와 시대 초기에 귀족원 의장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인물이다.[2] 이 외가와의 인연으로 남동생 고노에 다다테루는 고셋케의 필두인 고노에가를 상속받았다. 또한 어머니 아쓰코의 외할아버지인 자작 모리 다카노리는 구마모토 번의 분가인 우토번 호소카와 가문 출신의 양자(마지막 번주 호소카와 유키마사의 차남)이다.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주요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호소카와 모리히사히고 구마모토번 제12대 번주, 히고 호소카와가 제14대 당주 (백작)
조부호소카와 모리타쓰히고 호소카와가 제16대 당주 (후작)[2], 귀족원 의원
외조부고노에 후미마로제34·38·39대 내각총리대신, 귀족원 의장 (공작)
아버지호소카와 모리사다히고 호소카와가 제17대 당주,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어머니호소카와 아쓰코고노에 후미마로의 차녀
부인호소카와 가요코스페셜 올림픽 일본 명예회장 등 역임[30]
장남호소카와 모리미쓰도예가
며느리호소카와 아이요리 연구가[92]
장녀미쓰이 사토코[94][95][96]1974년 5월 12일생[95][96]
차녀호소카와 샬마 유코[97][95][96]1975년 10월 30일생[95][96]
남동생고노에 다다테루고노에가 제32대 당주, 국제 적십자·적신월사 연맹 회장, 일본적십자사 사장 역임
제수고노에 야스코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녀, 일본적십자사 명예 부총재
조카고노에 다다히로영상 작가



호소카와 모리히로는 1971년 10월 23일 호소카와 가요코와 결혼했다.[30] 부인 가요코는 자원봉사 활동으로 알려져 있으며, 비영리 단체인 세계의 아이들에게 백신을 일본 위원회 대표와 스페셜 올림픽 일본 이사장을 역임했다.[30] 슬하에는 장남 호소카와 모리미쓰(도예가), 장녀 사토코, 차녀 유우코 세 자녀를 두었다.[31] 장남 모리미쓰는 아버지와 비슷한 시기에 도예에 입문하여 후쿠모리 마사타케에게 사사했으며, 현재는 구마모토현 미나미아소촌에서 활동하고 있다. 2009년 요리 연구가 호소카와 아이와 결혼했다.[92]

남동생 고노에 다다테루고노에가를 계승하여 국제 적십자·적신월사 연맹(IFRC) 회장과 일본적십자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제수 고노에 야스코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장녀이다. 이복 여동생 메이코는 오모테센케 이에모토인 제14대 센 소시쓰 지묘사이에게 시집갔다.

또한 현 천황 나루히토는 외가인 고노에 가문을 통해 삼촌뻘이 된다.[3]

4. 평가 및 주장

1993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의 수반이 되어 자유민주당의 38년 장기 집권을 종식시키고 정권 교체를 실현하며 55년 체제를 붕괴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구마모토현 출신으로는 기요우라 케이고 이후 69년 만의 총리 대신이었다.

총리 재임 기간은 사가와 급편으로부터 1억 엔 차입 문제로 인해 8개월 만에 총사퇴하여 단명으로 끝났지만, 당시 주요 과제였던 정치개혁을 완수하여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와 정당 보조금 제도를 도입하는 성과를 남겼다.[32] 또한, 총리 취임 시 "요정 정치" 폐지를 선언하고, 역대 내각 최초로 수상 관저 마당에서 기념 촬영을 하거나 서서 기자회견을 하는 등 기존의 권위적인 관행을 깨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었다.

과거 태평양 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하는 등 역사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인식을 보여주었으며(역사 인식 참조), 한일 병합이 강제적이었다고 주장하고 재일 외국인 참정권 부여를 지지하는 등(한일 관계, 재일 외국인 참정권 참조) 진보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이러한 발언은 일본 내 우익 세력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82][83]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에는 탈원전을 강력히 주장하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함께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탈원전 참조).[85][86] 정계 은퇴 후에는 주로 도예가로 활동하며 작품 활동과 전시회를 열고 있으며,[50] 춘화전의 일본 내 개최를 지원하는 등[76] 문화 예술 분야에도 기여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자신의 작품 판매 수익을 우크라이나 지원에 기부하기도 했다.[58]

4. 1. 역사 인식

1993년 8월 10일 총리 취임 직후 기자회견에서 호소카와는 과거 일본의 전쟁에 대해 "일중전쟁에서 시작된 이전의 전쟁은 저 자신은 침략전쟁이었다,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발언했다.[81]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행위를 침략 전쟁으로 인정한 전례 없는 발언이었다.[7] 같은 해 8월 23일 소신표명 연설에서도 "과거 우리나라의 침략 행위와 식민지 지배 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 준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은 반성과 사과의 뜻을 표한다"고 언급하며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명확히 했다.[81] 또한 8월 15일 전몰자 추도식에서는 총리로서 처음으로 연설에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가해 책임"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다.

호소카와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1993년 11월 6일, 대한민국 경주를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한반도 식민 통치에 대해 "참기 힘든 고통을 끼쳤다. 우리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과드린다"라고 분명하게 사과했다.[103] 이는 한국 사회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7] 그는 또한 "한일 병합은 강제된 것"이라고 발언했으며[105], 병합이 한국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고 한국에 이익이 되었다는 일본 내 일부 우익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7]

자신의 역사 인식에 대해 호소카와는 "맥락에 따라 '침략'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일본이 실제로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초래했는데, 일본이 침략자가 아니라고 양심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 의견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부연 설명하기도 했다.[7]

그러나 이러한 역사 인식 표명은 일본 내 우익 세력의 강한 반발을 샀다. 1994년 5월 30일, 호소카와가 도쿄의 한 호텔에서 열린 일본신당 총회에 참석했을 때, 우익 극단주의자 노조에 마사카츠(野副正勝일본어)가 그의 침략전쟁 발언에 불만을 품고 권총을 발사하는 위협 사건이 발생했다.[8][82][83] 다행히 호소카와는 무사했으나, 이는 그의 역사 인식이 일본 사회 내에서 얼마나 민감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4. 2. 한일 관계

호소카와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이전과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그는 1993년 8월 10일 취임 직후 기자회견에서 "태평양 전쟁은 침략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었다"라고 발언하며 일본의 과거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침략 행위를 인정했다.[7] 같은 해 8월 23일 소신표명 연설에서는 "과거 우리나라의 침략 행위와 식민지 지배 등이 많은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안겨 준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은 반성과 사과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81]

1993년 11월 6일에는 대한민국 경주를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호소카와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 통치에 대해 "참기 힘든 고통을 끼쳤다. 우리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며 마음으로부터 사과드린다"라고 말하며 분명한 사과와 유감을 표명했다.[103][7] 이는 한국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또한 호소카와는 대한제국 병합이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고 주장하며[105], 한국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고 한국에 이익이 되었다는 일본 우익의 관점을 거부했다.[7][84] 그는 천황이 미국, 유럽, 중국, 동남아시아를 방문했음에도 한국을 방문하지 않은 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라며, 신속하게 방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84]

총리 퇴임 후인 2004년 여름에는 대한민국의 경상남도 산청군을 방문하여 도예가 민영기씨와 함께 도자기를 만들기도 했다.[104]

4. 3. 탈원전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탈원전을 주장하고 있다. 마이니치 신문의 키시이 시게카쓰와의 대담에서는 당시 아베 신조 총리의 원전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오염수 방류 문제에 대해 정부 대응이 임기응변에 불과하며 도쿄전력은 이미 국유화된 상태인데 무엇을 이제 와서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지적하며, "이것은 이미 범죄다. 올림픽은 고사하고"라고 말했다. 또한 아베 총리가 '톱 세일즈'로 외국에 원전을 판매하는 것에 대해서도 "엄청나다고 생각한다"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86]

2014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지지를 받아 '탈원전'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했다.[23][59][69]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그는 "도쿄는 다른 지역에 원전과 핵폐기물을 떠넘기면서 대규모 소비자로서 전기의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며 아베 정부의 원전 정책을 비판했다.[27] -- 선거 결과는 마스조에 요이치 후보에게 밀려 3위로 낙선했지만,[73] 선거 이후에도 고이즈미와 함께 탈원전 운동을 위한 법인인 “일반사단법인자연에너지추진회의”를 설립하며 활동을 이어갔다.[85]

2022년 1월 27일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등 다른 전직 총리 4명과 함께 유럽 연합(EU) 유럽 위원회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에게 EU 내 원전 건설에 반대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87] 하지만 서한 내용 중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영향으로 아이들이 갑상선암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부분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고 편견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87][88][89][90] 이에 대해 호소카와 등은 반박하며 관련 기관에 질문서를 보내는 등 대응했다.[91]

4. 4. 재일 외국인 참정권

납세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전전·전쟁 중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의 자손에게는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4]

4. 5. 고이즈미 준이치로와의 관계

1998년 정계 은퇴 후 도예가로 활동하며 정치와 거리를 두었던 호소카와는 201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권유로 도쿄도지사 선거 출마를 결심하게 된다.[23] 당시 아베 신조 총리의 원전 재가동 정책에 반대하던 고이즈미는 탈원전 여론을 결집시키기 위해 호소카와의 출마를 설득했다.[23] 이는 자민당의 지지를 받는 마스조에 요이치 후보에게 맞서는 구도를 형성했으며, 언론에서는 이를 아베와 고이즈미의 '대리전'으로 평가하기도 했다.[24]

호소카와는 2014년 1월 14일, 고이즈미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25] 그의 선거 운동에는 민주당 대표 카이에다 반리, 국민생활당 대표 오자와 이치로 등 과거 호소카와 연립 정권의 주요 인물들이 지지를 표명하며 참여했다.[26] 호소카와는 선거 기간 동안 아베 정부의 원전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며 "도쿄는 다른 지역에 원전과 핵폐기물 부담을 떠넘기면서 전기의 편리함만 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27] 또한 2020년 하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아베 총리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도 "호전적인 외교가 평화의 제전을 순조롭게 개최하는 데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27]

그러나 여론조사에서 마스조에 후보에게 계속 뒤처졌고[28], 2월 9일 치러진 선거에서 결국 패배했다. 호소카와는 선거 결과 발표 직후, 앞으로도 탈원전 운동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혔다.[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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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웹사이트 北朝鮮危機、16年後の真相 石原信雄氏死去 https://www.nikkei.c[...] 2023-02-02
[46] 웹사이트 政治空白襲った94年北朝鮮核危機(証言いま振り返る) https://www.nikkei.c[...] 2010-05-27
[47] 웹사이트 細川首相日記(4)迫る外圧、経済協議と北朝鮮危機(写真=共同) https://www.nikkei.c[...] 201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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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간행물 細川首相退陣の引き金は「北朝鮮有事」だった https://www.yuriko.o[...] 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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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학술지 『菅抜き連立』主役たちの同床異夢――小沢は森・大島に秋波を送り、前原は安倍と気脈を通じる。ポスト菅を巡る蠢動 2011-06-01
[53] 뉴스 野田、小沢会談を仲介 細川元首相 産経新聞社 2011-09-03
[54] 웹사이트 12日の理事会で本学学園長に元首相 細川護熙氏の選任を決定 http://www.tuad.ac.j[...]
[55] 뉴스 細川元首相、東北芸工大と京都造形大の学園長に就任 http://www.asahi.com[...] 2011-01-13
[56] 뉴스 元首相の細川氏、学園長ポストに 東北芸工大が新設、学内外へ提言 http://yamagata-np.j[...] 2011-01-08
[57] 웹사이트 学校法人東北芸術工科大学の統合について――両法人の統合契約書を両理事会で承認し、7月下旬までに文部科学大臣に申請へ http://www.tuad.ac.j[...] 2011-06-16
[58] 웹사이트 細川連立政権誕生から30年 “政権交代” その意味は https://www.nhk.or.j[...] NHK政治マガジン 2023-08-09
[59] 뉴스 都知事選 細川元首相、出馬へ 来週、正式表明、小泉氏とも会談 http://news.livedoor[...] 2014-01-10
[60] 뉴스 細川氏を「勝手連」支援=民主都連が方針-都知事選 http://www.jiji.com/[...] 2014-01-11
[61] 뉴스 細川元首相を支援する迷惑な「トロイカ」自民は“期待感” http://www.asahi.com[...] 2014-01-11
[62] 블로그 細川護煕元首相が、東京都知事選挙出馬、小沢一郎代表が「潤沢な軍資金」でタップリ支援し当選させる http://blogos.com/ar[...] 2014-01-11
[63] 뉴스 維新、都知事選対応バラバラ 松野幹事長は細川氏支援 https://www.asahi.co[...] 2014-01-21
[64] 웹사이트 細川護熙氏支持を表明した「脱原発都知事を実現する会」記者会見 -「これは宇都宮氏との戦いではない」 http://iwj.co.jp/wj/[...] IWJ Independent Web Journal 201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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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뉴스 【社会】都民調査「投票行く」93% 都知事選 舛添氏、細川氏、宇都宮氏に支持 http://www.tokyo-np.[...] 201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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