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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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86년 7월 6일에 실시되었으며,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 시기에 치러졌다. 선거 결과, 자유민주당이 300석을 얻어 압승을 거두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재는 당 총재 임기가 연장되었다. 반면, 일본사회당은 의석수가 크게 감소하며 참패했고, 신자유클럽은 해산했다. 투표율은 71.40%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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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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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정보 | |
국가 | 일본 |
선거 종류 | 의회 선거 |
이전 선거 | 1983년 일본 총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83 |
선거일 | 1986년 7월 6일 |
다음 선거 | 1990년 일본 총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90 |
선출 의석 수 | 512석 |
과반 의석 수 | 257석 |
투표율 | 71.40% (3.46%p) |
해산명 | 죽은 척 해산 |
주요 정당 및 지도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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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당 대표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제1당 대표 취임일 | 1982년 11월 |
제1당 | 자유민주당 |
제1당 색 | 자유민주당 |
제1당 이전 선거 의석 | 250석 |
제1당 선거 전 의석 | 250석 |
제1당 획득 의석 | 300석 |
제1당 득표수 | 29,875,501표 |
제1당 득표율 | 49.42% |
제1당 득표율 증감 | 3.66%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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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당 대표 | 이시바시 마사시 |
제2당 대표 취임일 | 1983년 9월 |
제2당 | 일본사회당 |
제2당 색 | 일본사회당 |
제2당 이전 선거 의석 | 112석 |
제2당 선거 전 의석 | 109석 |
제2당 획득 의석 | 85석 |
제2당 득표수 | 10,412,584표 |
제2당 득표율 | 17.23% |
제2당 득표율 증감 | 2.26%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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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당 대표 | 다케이리 요시카쓰 |
제3당 대표 취임일 | 1967년 2월 |
제3당 | 공명당 |
제3당 색 | 공명당 |
제3당 이전 선거 의석 | 58석 |
제3당 선거 전 의석 | 58석 |
제3당 획득 의석 | 56석 |
제3당 득표수 | 5,701,278표 |
제3당 득표율 | 9.43% |
제3당 득표율 증감 | 0.69%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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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당 대표 | 후와 테츠조 |
제4당 대표 취임일 | 1982년 7월 |
제4당 | 일본공산당 |
제4당 색 | 일본공산당 |
제4당 이전 선거 의석 | 26석 |
제4당 선거 전 의석 | 26석 |
제4당 획득 의석 | 26석 |
제4당 득표수 | 5,313,246표 |
제4당 득표율 | 8.79% |
제4당 득표율 증감 | 0.55%p |
제5당 대표 | 쓰카모토 사부로 |
제5당 대표 취임일 | 1985년 4월 |
제5당 | 민사당 |
제5당 색 | 민사당 |
제5당 이전 선거 의석 | 38석 |
제5당 선거 전 의석 | 37석 |
제5당 획득 의석 | 26석 |
제5당 득표수 | 3,895,859표 |
제5당 득표율 | 6.44% |
제5당 득표율 증감 | 0.83%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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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당 대표 | 고노 요헤이 |
제6당 대표 취임일 | 1984년 6월 |
제6당 | 신자유클럽 |
제6당 색 | 신자유클럽 |
제6당 이전 선거 의석 | 8석 |
제6당 선거 전 의석 | 8석 |
제6당 획득 의석 | 6석 |
제6당 득표수 | 1,114,800표 |
제6당 득표율 | 1.64% |
제6당 득표율 증감 | 0.72%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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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당 대표 | 에다 사쓰키 |
제7당 대표 취임일 | 1985년 2월 |
제7당 | 사회민주연합 |
제7당 색 | 사회민주연합 |
제7당 이전 선거 의석 | 3석 |
제7당 선거 전 의석 | 3석 |
제7당 획득 의석 | 4석 |
제7당 득표수 | 499,671표 |
제7당 득표율 | 0.83% |
제7당 득표율 증감 | 0.16%p |
총리 정보 | |
직책 | 내각총리대신 |
선거 전 총리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선거 전 총리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선거 후 총리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선거 후 총리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2. 선거 데이터
1986년(쇼와 61년) 7월 6일에 실시된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이다. 중의원 의원 512명을 선출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제14회 참의원 통상선거도 함께 치러졌다. 1980년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6년 만에 두 번째로 실시된 중의원·참의원 동시 선거였다.
1986년 5월, 8석 증가 7석 감소로 개정된 공직 선거법이 시행되면서, 개선수(改選数)는 512명(
중선거구제로, 1인 선거구 1곳, 2인 선거구 4곳, 3인 선거구 42곳, 4인 선거구 39곳, 5인 선거구 43곳, 6인 선거구 1곳에서 비밀 투표가 실시되었다. 선거권은 만 20세 이상의 일본 국민에게 주어졌다.[1]
선거 결과, 자유민주당이 50석을 얻어 중의원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었다. 자유민주당의 300석은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308석을 얻기 전까지 최고 기록이었다.
대부분의 야당은 의석을 잃었지만, 일본 공산당(26석 유지)과 사회민주연합(1석 증가)은 예외였다. 일본사회당은 27석을 잃어 가장 큰 손실을 보았다. 민주사회당은 12석, 공명당은 3석, 신자유클럽은 2석을 잃었다.
정당 | 득표수 | 의석수 | 의석 변동 |
---|---|---|---|
자유민주당 | 29,875,501 | 300 | +50 |
일본사회당 | 10,412,584 | 85 | -27 |
일본공산당 | 5,313,246 | 26 | 0 |
공명당 | 5,701,277 | 56 | -2 |
민주사회당 | 3,895,858 | 26 | -12 |
신자유클럽 | 1,114,800 | 6 | -2 |
사회민주연맹 | 499,670 | 4 | +1 |
기타 정당 | 120,627 | 0 | - |
무소속 | 3,515,043 | 9 | -7 |
총 의석 변동 | +1 | ||
무효표 | 1,259,044 | ||
유권자 수 | 86,426,845 |
각 현별 획득 의석 수는 다음과 같다.
현(Prefecture) | 총 의석 수 (Total seats) | 획득 의석 수 (Seats won) | |||||||
---|---|---|---|---|---|---|---|---|---|
자유민주당 | 일본사회당 | 공명당 | 일본공산당 | 민주사회당 | 신자유클럽 | 사회민주연맹 | 무소속 | ||
아이치 현 | 22 | 11 | 2 | 2 | 1 | 4 | 2 | ||
아키타 현 | 7 | 5 | 2 | ||||||
아오모리 현 | 7 | 7 | |||||||
지바 현 | 18 | 12 | 2 | 3 | 1 | ||||
에히메 현 | 9 | 7 | 1 | 1 | |||||
후쿠이 현 | 4 | 3 | 1 | ||||||
후쿠오카 현 | 19 | 9 | 4 | 4 | 1 | 1 | |||
후쿠시마 현 | 12 | 8 | 3 | 1 | |||||
기후 현 | 9 | 6 | 1 | 1 | 1 | ||||
군마 현 | 10 | 8 | 2 | ||||||
히로시마 현 | 12 | 9 | 1 | 1 | 1 | ||||
홋카이도 | 23 | 13 | 7 | 1 | 1 | 1 | |||
효고 현 | 19 | 10 | 4 | 3 | 1 | 1 | |||
이바라키 현 | 12 | 8 | 2 | 1 | 1 | ||||
이시카와 현 | 5 | 4 | 1 | ||||||
이와테 현 | 8 | 6 | 2 | ||||||
가가와 현 | 6 | 5 | 1 | ||||||
가고시마 현 | 10 | 7 | 3 | ||||||
가나가와 현 | 20 | 5 | 4 | 4 | 1 | 2 | 4 | ||
고치 현 | 5 | 2 | 1 | 1 | 1 | ||||
구마모토 현 | 10 | 6 | 1 | 1 | 2 | ||||
교토 부 | 10 | 4 | 2 | 2 | 2 | ||||
미에 현 | 9 | 6 | 2 | 1 | |||||
미야기 현 | 9 | 7 | 1 | 1 | |||||
미야자키 현 | 6 | 5 | 1 | ||||||
나가노 현 | 13 | 9 | 3 | 1 | |||||
나가사키 현 | 9 | 6 | 2 | 1 | |||||
나라 현 | 5 | 2 | 1 | 1 | 1 | ||||
니가타 현 | 13 | 10 | 2 | 1 | |||||
오이타 현 | 7 | 4 | 2 | 1 | |||||
오카야마 현 | 10 | 5 | 1 | 2 | 1 | 1 | |||
오키나와 현 | 5 | 2 | 1 | 1 | 1 | ||||
오사카 부 | 27 | 7 | 4 | 7 | 6 | 3 | |||
사가 현 | 5 | 3 | 1 | 1 | |||||
사이타마 현 | 17 | 9 | 2 | 3 | 1 | 1 | 1 | ||
시가 현 | 5 | 3 | 1 | 1 | |||||
시마네 현 | 5 | 3 | 2 | ||||||
시즈오카 현 | 14 | 10 | 2 | 1 | 1 | ||||
도치기 현 | 10 | 5 | 3 | 1 | 1 | ||||
도쿠시마 현 | 5 | 3 | 1 | 1 | |||||
도쿄 도 | 44 | 19 | 5 | 10 | 8 | 1 | 1 | ||
돗토리 현 | 4 | 3 | 1 | ||||||
도야마 현 | 6 | 4 | 2 | ||||||
와카야마 현 | 6 | 4 | 1 | 1 | |||||
야마가타 현 | 7 | 6 | 1 | ||||||
야마구치 현 | 9 | 6 | 2 | 1 | |||||
야마나시 현 | 5 | 4 | 1 | ||||||
합계 (Total) | 512 | 300 | 85 | 56 | 26 | 26 | 6 | 4 | 9 |
2. 1. 내각
선거 당시 내각은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내각(제72대)이었다.[1] 나카소네 야스히로 (자유민주당 총재)가 내각총리대신이었으며,[1] 자유민주당과 신자유클럽이 여당이었다.[1]선거 이후에는 제3차 나카소네 내각(제73대)이 구성되었다.[1]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계속해서 내각총리대신 (자유민주당 총재)을 맡았으며,[1] 자유민주당이 단독 여당이 되었다.[1]
2. 2. 해산일
1986年일본어 6월 2일2. 2. 1. 해산명
- 죽은 척 해산
- 잠자는 척 해산
2. 3. 투표일
1986년(쇼와 61년) 7월 6일에 실시되었다. 이날 중의원 의원 512명을 선출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제14회 참의원 통상선거도 함께 치러졌다.2. 4. 개선수
改選数일본어 512명 (): 1986년 5월, 8석 증가 7석 감소로 개정된 공직 선거법이 시행되었다.
2. 5. 선거 제도
중선거구제로, 1인 선거구 1곳, 2인 선거구 4곳, 3인 선거구 42곳, 4인 선거구 39곳, 5인 선거구 43곳, 6인 선거구 1곳에서 비밀 투표가 실시되었다. 선거권은 만 20세 이상의 일본 국민에게 주어졌다.[1]
1986년 7월 6일에 실시된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자민당은 공인 후보만으로 300석을 획득하여 창당 이래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추가 공인을 포함하면 304석에 달했다. 이는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308석을 얻을 때까지 단일 정당 최다 의석 기록으로 남았다.[5]
3. 선거 결과
일본사회당은 27석을 잃는 가장 큰 손실을 보았고, 민주사회당은 12석, 공명당은 3석, 신자유클럽은 2석을 잃었다. 일본공산당(26석 유지)과 사회민주연합(1석 증가)은 의석수에 큰 변화가 없었다.
자민당의 압승으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재의 임기가 1년 연장되었고, 신자유클럽은 해산 후 대부분 자민당에 합류했다. 사회당은 이시바시 마사쓰구 위원장이 사퇴하고, 도이 타카코가 일본 최초의 여성 당수로 취임하여 당 재건에 나섰다. 민사당은 오우치 케이고 서기장이 낙선하는 등 참패를 겪었다.
이 선거는 1980년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 6년 만에 실시된 중의원·참의원 동시 선거였으며, 쇼와 시대 마지막 중의원 선거이자 일본국 헌법 하에서 유일하게 호랑이띠 해에 실시된 선거였다. 훗날 민주당 소속으로 홋카이도 출신 최초의 수상이 된 하토야마 유키오[1]가 처음 당선된 선거이기도 하다.
3. 1. 투표율
전국의 투표율은 남성 70.21%, 여성 72.52%, 합계 71.40%였으며, 유효 투표율은 97.97%였다.[1]
성별 | 투표율 |
---|---|
남성 | 70.21% |
여성 | 72.52% |
합계 | 71.40% |
3. 2. 정당별 획득 의석
당파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수 | ||
---|---|---|---|---|---|
후보 | 당선 | 의석율 | |||
자유민주당 | 29,875,501 | 49.42 | 322 | 300 | 58.6 |
일본사회당 | 10,412,584 | 17.23 | 138 | 85 | 16.6 |
공명당 | 5,701,277 | 9.43 | 61 | 56 | 10.9 |
일본공산당 | 5,313,246 | 8.79 | 129 | 26 | 5.1 |
민사당 | 3,895,858 | 6.44 | 56 | 26 | 5.1 |
신자유클럽 | 1,114,800 | 1.84 | 12 | 6 | 1.2 |
사회민주연합 | 499,670 | 0.83 | 5 | 4 | 0.8 |
제파 | 120,627 | 0.20 | 15 | 0 | 0.0 |
무소속 | 3,515,043 | 5.81 | 100 | 9 | 1.8 |
이 선거는 자유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공인 후보만으로 300석을 획득한 것은 창당 이래 최고 기록이며, 추가 공인을 포함하면 304석이었다. 이 기록은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단독으로 308석을 획득할 때까지 하나의 정당이 보유하는 의석수로는 전후 최고였다.[5] 신자유클럽은 선거 직후 해산하고 당선자 6명 중 4명은 자민당에 입당했으며, 자민당은 사후 공인으로 추가 4석을 획득했다.[2]
3. 3. 분석
이 선거는 자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공인 후보만으로 300석을 획득한 것은 창당 이래 최고 기록이며, 추가 공인을 포함하면 304석이 되었다. 이는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단독으로 308석을 획득할 때까지, 하나의 정당이 보유하는 의석수로는 전후 최고 기록이었다.[5]당파 | 득표수 | 득표율 | 후보 | 당선 | 의석율 |
---|---|---|---|---|---|
자유민주당 | 29,875,501 | 49.42 | 322 | 300 | 58.6 |
일본사회당 | 10,412,584 | 17.23 | 138 | 85 | 16.6 |
공명당 | 5,701,277 | 9.43 | 61 | 56 | 10.9 |
일본공산당 | 5,313,246 | 8.79 | 129 | 26 | 5.1 |
민사당 | 3,895,858 | 6.44 | 56 | 26 | 5.1 |
신자유클럽 | 1,114,800 | 1.84 | 12 | 6 | 1.2 |
사회민주연합 | 499,670 | 0.83 | 5 | 4 | 0.8 |
기타 정파 | 120,627 | 0.20 | 15 | 0 | 0.0 |
무소속 | 3,515,043 | 5.81 | 100 | 9 | 1.8 |
자민당은 압도적인 승리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재의 지도력과 경제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인받았다. 반면, 일본사회당은 제1야당 지위를 유지했지만, 의석수가 크게 감소하며 참패했다. 이는 사회당의 정책 노선과 리더십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만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공명당, 일본공산당, 민사당 등 다른 야당들도 의석수 감소를 겪으며 고전했다. 신자유클럽은 선거 직후 해산하고, 대부분 의원이 자민당에 합류하여 사실상 자민당에 흡수되었다.
4. 주요 정당 및 정치인
정당 | 대표 | 의석수 | 주요 직책 |
---|---|---|---|
자민당 | 나카소네 야스히로 | 300석 | 총재: 나카소네 야스히로, 부총재: 니카이도 스스무, 간사장: 가네마루 신, 총무회장: 미야자와 기이치, 정무조사회장: 후지오 마사유키, 국회대책위원장: 후지나미 다카오, 참의원 의원회장: 후지타 마사아키 |
사회당 | 이시바시 마사시 | 85석 | 위원장: 이시바시 마사시, 부위원장: 오노 아키라, 도이 다카코, 바바 노보루, 무토 산지, 야마모토 마사히로, 서기장: 다나베 마코토, 정책심의회장: 시마자키 유즈루, 국회대책위원장: 야마구치 쓰루오, 참의원 의원회장: 세야 히데유키 |
공명당 | 다케이리 요시카쓰 | 56석 | 위원장: 다케이리 요시카쓰, 부위원장: 아사이 미유키, 스즈키 가즈히로, 다다 쇼고, 니노미야 분조, 서기장: 야노 준야, 정책심의회장: 마사키 요시아키, 국회대책위원장: 곤도 쓰네오, 참의원 의원단장: 스즈키 가즈히로(겸임) |
공산당 | 미야모토 겐지 | 26석 | 의장: 미야모토 겐지, 위원장: 후와 데쓰조, 부위원장: 이치카와 쇼이치, 에비스다니 하루마쓰, 세나가 가메지로, 니시자와 토미오, 무라카미 히로시, 서기국장: 가네코 미쓰히로, 정책위원회 책임자: 무라카미 히로시, 국회대책위원장: 데라마에 겐, 참의원 의원단장: 우에다 코이치로 |
민사당 | 쓰카모토 사부로 | 26석 | 위원장: 쓰카모토 사부로, 부위원장: 나가스에 에이이치, 서기장: 오우치 게이고, 정책심의회장: 요네자와 다카시, 국회대책위원장: 오자와 사다타카, 참의원 의원회장: 산지 시게노부, 상임고문: 가스가 잇코, 고다이라 다다시, 나카무라 마사오 |
신자유클럽 | 고노 요헤이 | 6석 | 대표: 고노 요헤이, 간사장: 야마구치 도시오, 정책위원회 책임자: 가키자와 고지, 국회대책위원장: 다지마 마모루 |
사민련 | 에다 사쓰키 | 4석 | 대표: 에다 사쓰키, 부대표: 안도 니헤이, 오시바 시게오, 서기장: 나라사키 야노스케, 정책위원회 책임자: 간 나오토, 국회대책위원장: 아베 쇼고 |
이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압승을 거두었으며, 일본사회당은 의석수가 크게 줄었다.[1] 훗날 민주당 소속으로 홋카이도 출신 최초의 수상이 된 하토야마 유키오가 처음 당선된 선거이기도 하다.[1]
4. 1. 자유민주당
이 선거는 자유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공인 후보만으로 300석을 획득한 것은 창당 이래 최고 기록이며, 추가 공인을 포함하면 304석이 되었다.[1] 덧붙여 이 기록은 2009년의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단독으로 308석을 획득할 때까지, 하나의 정당이 보유하는 의석수로는 전후 최고였다.
; 파벌
파벌명 | 의석수 |
---|---|
목요일 클럽 (다나카 가쿠에이파) | 87석 |
정책과학연구소 (나카소네 야스히로파) | 60석 |
굉지회 (스즈키 젠코파) | 59석 |
청화회 (후쿠다 다케오파) | 56석 |
반초정책연구소 (가와모토 토시오파) | 28석 |
무소속 | 31석 |
4. 2. 일본사회당
日本社会党일본어의 중앙집행위원장은 이시바시 마사시였다. 중앙집행부위원장은 오노 아키라, 도이 다카코, 바바 노보루, 무토 산지, 야마모토 마사히로였다. 집행부 서기장은 다나베 마코토였고, 정책심의회장은 시마자키 유즈루, 국회대책위원장은 야마구치 쓰루오, 참의원 의원회장은 세야 히데유키였다.[1]4. 3. 공명당
公明党|공명당일본어 중앙집행위원장은 다케이리 요시카쓰였다. 중앙집행부위원장은 아사이 미유키, 스즈키 가즈히로, 다다 쇼고, 니노미야 분조가 맡았다. 서기장은 야노 준야, 정책심의회장은 마사키 요시아키, 국회대책위원장은 곤도 쓰네오였다. 참의원 의원단장은 스즈키 가즈히로가 겸임했다.[1]4. 4. 일본공산당
- 중앙위원회 의장: 미야모토 겐지
- 간부회 위원장: 후와 데쓰조
- 간부회 부위원장: 이치카와 쇼이치, 에비스다니 하루마쓰, 세나가 가메지로, 니시자와 토미오, 무라카미 히로시
- 서기국장: 가네코 미쓰히로
- 정책위원회 책임자: 무라카미 히로시
- 국회대책위원장: 데라마에 겐
- 참의원 의원단장: 우에다 코이치로
4. 5. 민사당
- 중앙집행위원장: 쓰카모토 사부로
- 중앙집행부위원장: 나가스에 에이이치
- 서기장: 오우치 게이고
- 정책심의회장: 요네자와 다카시
- 국회대책위원장: 오자와 사다타카
- 참의원 의원회장: 산지 시게노부
- 상임 고문: 가스가 잇코, 고다이라 다다시, 나카무라 마사오
4. 6. 신자유클럽
고노 요헤이는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후 신자유클럽 해산 후 자유민주당에 복귀했다.[1]- 간사장: 야마구치 도시오
- 정책위원회 책임자: 가키자와 고지
- 국회대책위원장: 다지마 마모루
4. 7. 사회민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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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거 이후
자유민주당은 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공인 후보만으로 300석을 획득하여 당 창립 이래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추가 공인을 포함하면 304석에 달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재는 중의원·참의원 동시 선거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당 규약이 개정되어 총재 임기가 1년 연장되었다.[1]
연립 여당이었던 신자유클럽은 자민당의 압승에 묻혀 현직 의원 3명이 낙선하는 등 6석에 그쳤다. 이 결과로 신자유클럽은 약 2개월 후 해산하고, 대부분의 의원이 자민당에 합류했다. 다만, 다가와 세이이치 전 대표는 자민당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진보당을 창당했다.[1]
사회당은 공시 전보다 24석 감소한 85석으로 참패했다. 이시바시 마사쓰구 위원장은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후임으로 도이 다카코 부위원장이 승격하여 일본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되었다.[1] 공명당은 2석 감소에 그쳤지만, 민사당은 현직 서기장이었던 오우치 케이고가 낙선하는 등 26석으로 줄어들어 공산당과 같은 의석수를 기록하는 참패를 당했다. 사민련은 현 의석을 유지했다.[1]
참조
[1]
웹사이트 # 위키피디아 항목으로 추정
鳩山由紀夫의 당선과 정당 이동 경력
[2]
서적
福祉政治
有斐閣Insight
2008
[3]
간행물
『官報号外』昭和63年11月8日 第113回国会 衆議院会議録第14号
https://kokkai.ndl.g[...]
[4]
간행물
『官報号外』平成元年6月2日 第114回国会 衆議院会議録第16号
https://kokkai.ndl.g[...]
[5]
서적
복지 정치
유비각 Insight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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