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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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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용은 877년경에 태어났으며, 당나라 말기 성덕군 절도사로, 921년 쿠데타로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 왕경충은 성덕군을 사실상 독립적으로 통치했으며, 왕용은 883년 아버지의 사망 후 어린 나이에 군사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당나라의 혼란 속에서 이웃 절도사들과 동맹을 맺고 경쟁하며 세력을 키웠다. 이후 주전충에게 항복하여 그의 신하가 되었으나, 결국 이존욱과 동맹을 맺고 후량에 대항했다. 921년, 측근들의 반란으로 살해되었고, 그의 양자 장문례(왕덕명)가 그의 지위를 찬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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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왕용
원래 이름왕용(王鎔)
작위조나라 왕
재위907년/910년 ~ 921년
왕용(王鎔)
연호없음(당소종의 연호 천우를 계속 그대로 사용)
출생일874년
출생지진주(鎭州,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
사망일921년
사망지진주
매장지진주 진정현 신시향(新市鄕) 염파리(廉頗里) 수양강(壽陽崗)
(지금의 하북성 석가장시 정정현에 있는 언덕)
왕조조나라
아버지왕경숭
어머니위국태부인(魏國太夫人) 하씨(何氏)
배우자조국부인(趙國夫人) 농서 이씨
자녀아들 왕소조(王昭祚), 왕소회(王昭誨)
인물 정보
왕(王)
통치 정보
통치 시작910년
국가조나라

2. 생애

왕용은 874년경 아버지 왕경숭이 성덕군(成德軍, 본부는 지금의 허베이성 스자좡시) 절도사로 있던 시절 태어났다. 성덕군은 왕경숭의 증조부 왕정주 이후 왕씨 가문이 대대로 다스려온 사실상 독립된 번진(藩鎭)이었다. 왕용의 어머니 하씨(何氏)는 왕경숭의 정실 부인은 아니었지만, 덕이 있었고 왕용을 엄격하게 교육했다고 전해진다.

883년, 왕경숭이 사망하자 성덕군 장병들은 당시 9세였던 왕용을 유후(留後)로 추대했다. 당희종은 왕용을 유후로 임명하고, 연말에는 정식 절도사로 임명했다.

당나라 말기, 여러 절도사들이 서로 영토를 다투는 혼란 속에서 왕용은 사타 출신 이극용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885년, 왕용은 이계주와 동맹을 맺고 이극용과 동맹한 왕처존을 공격했으나, 이극용의 지원군에 밀려 철수했다.[9] 이후 왕용은 이극용에게 패배한 후, 이극용에게 합류하여 이존효를 공격하고 식량을 보냈다. 894년, 이존효는 항복 후 처형되었고, 흥민사는 이극용의 통제하에 들어갔다.[11]

895년, 소종은 왕용에게 명예 재상 직함인 시중(侍中)을 수여했다.[12] 897년, 이극용은 황제를 돕기 위해 왕용과 왕고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왕용의 반응은 기록되지 않았다. 898년, 이극용은 왕용에게 주전충과의 중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해 말, 소종은 왕용에게 명예 재상 직함인 중서령(中書令)을 수여했다.[13]

900년, 주전충의 장군 갈종주가 의창을 공격했을 때, 왕용의 중재와 폭우로 인해 주전충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그러나 주전충은 이극용과의 소통을 이유로 왕용을 공격했다. 왕용은 주식을 보내 주전충에게 평화를 제안했고, 주전충은 이를 수락했다. 주전충은 왕용의 장남 왕조좌를 인질로 삼고 막대한 양의 비단을 바치게 한 후 철수했으며, 딸을 왕조좌와 결혼시켰다. 이후 왕용은 주전충의 봉신이 되었다.[14]

903년, 최인과 주전충이 장안의 환관들을 학살한 후, 왕용은 정덕 지역의 환관 50명을 황실 시종으로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5] 904년, 주전충은 소종 황제를 암살하고,[16][17] 907년에는 애제에게 양위하도록 강요하여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했다.[18] 왕용은 무순절도사(武順節度使)로 개명되었으며,[17] 주전충을 새 황제로 인정했다.[4]

주전충이 황제가 된 후, 왕용은 조왕(趙王)으로 봉해졌고,[5] 임시 태사(太師) 직함도 받았다.[18]

910년, 왕용의 어머니 하씨가 사망하자 후량 태조는 조문 사절을 보내고 왕용에게 복귀를 명했다. 이존욱은 후량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후량 사신은 진(晉) 사신을 보고 왕용과 왕처직이 진과 연합했을 수 있다고 의심했다. 태조는 위보, 무순, 이무를 장악하고자 910년 겨울, 두정은(杜廷隱)과 정연휘(丁延徽)를 보내 무순의 심주(深州)와 기주(冀州)를 점령했다. 왕용은 유수광이존욱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존욱은 주덕위를 보내 왕용을 도왔다. 이때부터 무순(성덕으로 개명)과 이무는 후량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당나라 연호 천우(天祐)를 다시 사용하며 사실상 독립했다.[19]

911년 봄, 진/조 연합군은 박향(현 싱타이)에서 후량 군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이사원의 활약으로 후량 군대는 큰 혼란에 빠졌고, 진/조 연합군은 후량 군대의 대부분을 격파하고 학살했다.[19] 이후 이존욱과 왕용은 서로 존칭을 사용하며 만났고, 이존욱은 자신의 딸을 왕용의 아들 왕조회(王昭誨|왕자오후이중국어)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했다.[20] 또한 왕용은 자신의 양자인 왕덕명을 조나라 군대와 함께 이존욱의 원정에 동행시켰다.[19]

이후 유수광은 황제를 칭하려 했고, 왕용과 왕처직에게 자신을 "상부"(尚父)로 존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왕용이 이 사실을 이존욱에게 알리자, 이존욱은 왕용, 왕처직, 그리고 다른 세 명의 절도사들과 함께 공동 선언을 발표하여 유수광을 "상부"로 존경했다. 이에 후량 황제는 유수광을 신하로 유지하기 위해 "채방사" 칭호를 제안했지만, 유수광은 스스로 연나라 황제를 선포했다.[20]

912년, 주덕위 휘하의 진나라 군대, 왕덕명 휘하의 조나라 군대, 정암(程巖|청옌중국어) 휘하의 의무 군대는 유수광의 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역수(현 보정시를 흐르는)에서 만났다. 이들은 유주로 진격하여 포위했다. 유수광은 후량에 도움을 요청했고, 후량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조나라의 조강(현 헝수이)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후량 태조는 진나라 군대의 매복에 걸려 도망쳐 유수광을 돕는 것을 포기했다.[20]

912년 겨울, 주덕위는 유주를 포위하고 있었고, 왕덕명은 조나라 영토로 돌아와 후량의 위보 지역을 공격했다. 이 시기에 후량 태조는 아들 주우규에게 암살당했고, 주우규는 황제를 칭했다가 다시 그의 형제 주우정에게 살해된 후 주우정이 황제가 되었다. 왕덕명은 후량의 장수 양사후에게 패배했고, 913년 봄 양사후는 조나라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하박(현 스자좡)을 포위했다. 왕용은 주덕위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주덕위는 이소형(李紹衡|리사오헝중국어)을 보내 왕덕명과 합류하여 후량 군대에 저항하게 했으며, 이후 후량 군대는 조나라 영토를 떠났다.[20] 그해 말, 이존욱이 직접 유주를 공격하여 유수광을 사로잡은 후, 왕처직과 왕용의 요청에 따라 의무와 정덕을 거쳐 승리 행진을 한 뒤 진나라 수도 태원으로 돌아가 유수광과 유인공을 처형했다. 이존욱이 정주를 방문하는 동안 왕용의 요청에 따라 이존욱은 유수광과 유인공을 잠시 풀어 왕용이 연회를 열도록 허락했다. 왕용의 고문들은 후량이 왕용에게 수여한 칭호 중 하나인 "상서령"(尚書令)이 태종이 사용한 칭호이므로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고문들의 제안에 따라 왕용은 이 칭호를 이존욱에게 제공했고, 이존욱은 이를 받아들여 임시 황실 정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21]

914년 여름, 왕용과 주덕위는 형주를 공격했지만, 양사후에게 좌절을 겪고 물러났다.[21]

시간이 흐르면서 왕용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그는 정사에는 소홀하고 측근들에게 위임했으며, 불교도교 신앙에 빠져 지출이 크게 증가했다.[8]

920년 겨울, 왕용이 진주(鎭州) 서쪽 산의 저택에 머물면서 본부로 돌아오지 않자, 환관 이홍규(李弘規)는 반란의 위험과 전쟁 노력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했다. 왕용은 돌아가기로 했으나, 다른 환관 석희몽(石希蒙)이 이홍규를 비난하자 왕용은 저택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이홍규는 병사들을 시켜 왕용에게 불만을 진술하게 했고, 왕용이 듣지 않자 병사들은 석희몽을 죽였다. 왕용은 즉시 진주로 돌아가 왕조좌와 왕덕명에게 이홍규와 이애(李藹), 그리고 그들의 일족을 살해하도록 했다. 이홍규와 이애의 동료 수십 가족도 살해되었고, 군대는 공포에 휩싸였다.[8]

이홍규와 이애가 죽은 후, 왕용은 왕조좌에게 정사를 위임했지만, 왕조좌는 오만하고 가혹한 태도로 병사들을 소외시켰다. 왕덕명은 왕용이 경비병들을 학살할 계획이라고 거짓으로 알렸고, 이에 분노한 경비병들은 921년 봄 어느 날 밤, 왕용을 살해했다. 왕덕명은 장문리로 이름을 바꾸고 왕조좌의 아내를 제외한 왕용의 일족을 학살한 후, 이존욱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존욱은 장문리를 성덕 절도사 대행으로 임명했지만, 장문리는 거란에게도 구애했고, 이존욱은 장문리를 상대로 군사 작전을 선포했다. 장문리는 두려움 속에 죽었고, 아들 장출근이 뒤를 이었지만, 922년 가을 진주가 함락되면서 장문리의 가족은 학살되었다. 왕용의 시신은 불타버린 저택에 방치되었다가 전 부하들에게 발견되어 매장되었다.[8]

2. 1. 배경

왕용은 아마도 874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 왕경숭은 성덕군(成德軍, 본부는 지금의 허베이성 스자좡시에 있었다) 절도사였다. 성덕군은 왕경숭의 증조부 왕정주 이후로 왕씨 가문이 대대로 사실상 독립된 상태로 유지해 왔던 번진(藩鎭)이었다. 왕용의 어머니 하씨(何氏)는 왕경숭의 아내인지 측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부녀자로서의 덕을 지니고 있었고, 왕용을 양육하는 데 있어서 엄하게 훈육시켰다고 기술되어 있다.

중화 3년(883년), 왕경숭이 사망하였다. 성덕군 장병들은 당시 겨우 9세였지만 절도부사(節度副使) 직함을 갖고 있던 왕용을 유후(留後)로 추대하였다. 그 후, 당시의 황제였던 당희종은 그를 유후로 공식 임명하였고, 그 해 연말에는 완전한 절도사로 공식 임명하였다.

2. 2. 당나라의 성덕군 절도사로서

당나라 말기, 여러 절도사들이 서로의 영토를 빼앗으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중 가장 강력한 절도사는 사타 출신의 이극용이었다. 왕용은 이극용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이극용과 동맹을 맺은 왕처존을 공격하려 했다. 885년, 왕용은 이계주와 동맹을 맺고 왕처존을 공격했으나, 이극용의 지원군에 의해 철수했다.[9]

이후 왕용은 이극용에게 패배한 후, 이극용에게 합류하여 이존효를 공격하고 식량을 보냈다. 894년, 이존효는 항복 후 처형되었고 흥민사는 이극용의 통제하에 들어갔다.[11]

895년, 소종은 왕용에게 명예 재상 직함인 시중(侍中)을 수여했다.[12]

897년, 이극용은 황제를 돕기 위해 왕용과 왕고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왕용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898년, 이극용은 왕용에게 주전충과의 중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해 말, 소종은 왕용에게 명예 재상 직함인 중서령(中書令)을 수여했다.[13]

900년, 주전충의 장군 갈종주가 의창을 공격했을 때, 왕용의 중재와 폭우로 인해 주전충은 군대를 소환했다. 그러나 주전충은 이극용과의 소통을 이유로 왕용을 공격했다. 왕용은 주식을 보내 주전충에게 간청하며 평화를 제안했고, 주전충은 이를 수락했다. 주전충은 왕용의 장남 왕조좌를 인질로 삼고 막대한 양의 비단을 바치게 한 후 철수했으며, 딸을 왕조좌와 결혼시켰다. 이후 왕용은 주전충의 봉신이 되었다.[14]

903년, 최인과 주전충이 장안의 환관들을 학살한 후, 왕용은 정덕 지역의 환관 50명을 황실 시종으로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5]

904년, 주전충은 소종 황제를 암살하고,[16][17] 907년에는 애제에게 양위하도록 강요하여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했다.[18] 왕용은 무순절도사(武順節度使)로 개명되었으며,[17] 주전충을 새 황제로 인정했다.[4]

2. 2. 1. 노룡군 번진과의 첫 동맹

당시 당 제국은 혼란에 빠져 여러 절도사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영토를 빼앗는 상황이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절도사 중 한 명은 사타 출신의 이극용으로, 하동 절도사(河東, 본부는 현재의 산서성태원)였다. 왕용의 이웃인 왕처존은 의무 절도사(義武, 본부는 현재의 허베이성바오딩)였는데, 이극용과 동맹을 맺고 그의 조카 왕엽(王鄴중국어)을 이극용의 딸 중 한 명과 결혼시켰다. 왕용과 이계주는 모두 이극용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따라서 이극용과 동맹을 맺은 왕처존을 경멸했다. 그들은 왕처존을 파멸시키고 의무의 두 주(수도인 정주(定州)와 의주(易州, 현재의 바오딩에 위치))를 나누어 갖기 위해 그를 공격하기로 동맹을 맺었다. 885년에 대동 절도사(섬서성다퉁)의 절도사 흘련탁을 설득하여 이극용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하여 그가 왕처존을 도울 수 없도록 한 후, 이계주의 부하 이전충이 의주를 공격하고 왕용의 군대가 무극(無極, 현재의 스자좡)을 공격하면서 공격을 시작했다. 이후 이극용은 그의 부하 강준립을 왕처존을 돕기 위해 파견했고, 왕용은 철수했다. 이전충은 처음에는 의주를 점령했지만, 왕처존의 반격으로 다시 의주를 잃었다. 이전충은 이계주의 처벌을 두려워하여 대신 굴룡의 수도인 유주(幽州)로 돌아와 이를 공격했다. 패배에 직면한 이계주는 자결했고, 이전충이 절도사를 장악하게 되었다.[9]

2. 2. 2. 독자적인 길을 걷다

이광위가 죽은 직후, 왕용은 다시 이존효를 도우려 하였다. 당시 이존효는 이극용에 의해 흥민사(邢民祠)의 수도인 형주(邢州)에서 포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극용에게 패배한 왕용은 두려움에 휩싸여 이극용에게 합류하여 이존효를 공격했고, 이극용 군대에 식량을 보냈다. 894년, 이존효는 항복을 강요받았고, 이극용은 이어서 그를 처형하고 흥민사를 다시 통제하에 두었다.[11]

895년, 소종은 왕용에게 시중(侍中)이라는 명예 재상 직함을 수여했다.[12]

897년, 이무정의 공격으로 인해 소종이 장안에서 곽국(匡國, 현대 웨이난, 산시성)으로 피신하게 되자, 이극용은 황제를 돕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하려 했다. 이에 왕용과 왕처촌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왕고에게 이 작전에 기여해 줄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왕용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이 없다.) 이후 이극용은 자신의 봉신인 유인공이 그에게 반기를 들고 독립하면서 군사 작전을 포기해야 했다. 유인공은 이극용이 이광수를 물리친 후 노룡(盧龍)의 절도사로 임명했었다. 그 후, 898년, 이극용은 최근의 좌절을 고려하여 주전충과 화해를 모색하면서, 왕용에게 그와 주전충 사이의 중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주전충은 이극용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해 말, 소종은 왕용에게 중서령(中書令)이라는 명예 재상 직함을 수여했다.[13]

900년, 주전충이 그의 장군 갈종주를 보내 유인공이 점령하여 아들 유수문에게 통치하게 한 의창(義昌, 현대 창저우, 허베이성)을 공격했을 때, 갈종주는 유수문을 상대로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왕용이 중재를 위해 사자를 보내고 갈종주가 폭우를 만나자, 주전충은 갈종주와 그의 군대를 소환했다.[14]

그러나 주전충은 이극용과 소통한 죄로 왕용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진주(鎮州)에 접근하여 공격했고, 남문을 불태웠다. 왕용은 두려움에 휩싸여 그의 조수 주식(周式)을 보내 주전충에게 간청하면서, 왕용이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이극용과 협상했으며, 정덕(成德) 백성들은 대대로 왕씨 가문에 충성해왔고 왕용을 위해 열렬히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주전충은 평화에 동의했지만, 왕용에게 그의 장남 왕조좌(王昭祚)와 많은 정덕 장교의 아들들을 현무(玄武)로 보내 인질로 삼게 했고, 왕용에게 막대한 양의 비단을 바치게 했다. 그 후 그는 철수했고, 딸을 왕조좌에게 시집보냈다. 왕용은 그 후 주전충의 봉신이 되었다.[14]

2. 2. 3. 주전충에게 항복하다

이광위가 사망한 직후, 왕용은 이존효를 지원하려 했으나 이극용에게 패배한 후 이극용에게 합류하여 이존효를 공격하고 식량을 보냈다. 894년, 이존효는 항복 후 처형되었고 흥민사는 이극용의 통제하에 들어갔다.[11]

895년, 소종은 왕용에게 명예 재상 직함인 시중(侍中)을 수여했다.[12]

897년, 이극용은 황제를 돕기 위해 왕용과 왕고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왕용의 반응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후 이극용은 유인공의 배신으로 군사 작전을 포기했다. 898년, 이극용은 왕용에게 주전충과의 중재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해 말, 소종은 왕용에게 명예 재상 직함인 중서령(中書令)을 수여했다.[13]

900년, 주전충의 장군 갈종주가 의창을 공격했을 때, 왕용의 중재와 폭우로 인해 주전충은 군대를 소환했다.[14]

그러나 주전충은 이극용과의 소통을 이유로 왕용을 공격했다. 왕용은 주식(周式)을 보내 주전충에게 간청하며 평화를 제안했고, 주전충은 이를 수락했다. 주전충은 왕용의 장남 왕조좌를 인질로 삼고 막대한 양의 비단을 바치게 한 후 철수했으며, 딸을 왕조좌와 결혼시켰다. 이후 왕용은 주전충의 봉신이 되었다.[14]

왕용이 주전충의 신하가 된 후, 왕용의 보좌관 장택(張澤)은 주전충에게 이우와 노룡을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주전충은 장존경을 보내 노룡과 이창을 공격하여 영주(瀛州), 경주(景州), 막주(莫州)를 점령했다. 그러나 홍수로 인해 장존경은 이우를 공격했고, 이우 군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왕고는 도망쳤고, 남은 병사들은 왕처직의 형제를 지지했다. 왕처직은 주전충에게 신하가 되기로 동의하여 군대를 철수시켰다.[14]

903년, 최인과 주전충이 장안의 환관들을 학살한 후, 왕용은 정덕 지역의 환관 50명을 황실 시종으로 제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5]

904년, 주전충은 소종 황제를 암살하고,[16][17] 907년에는 애제에게 양위하도록 강요하여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후량을 건국했다.[18] 왕용은 무순절도사(武順節度使)로 개명되었으며,[17] 주전충을 새 황제로 인정했다.[4]

2. 3. 후량(後梁)의 가신으로서

태조가 황위에 오른 후 왕용을 조왕(趙王)으로 봉했다.[5] 그는 또한 왕용에게 명예직인 임시 태사(太師)를 하사했다.[18] 당나라 중·후기 시대의 전통에 따라, 무순(武順)과 이무(義武)는 후량(後梁) 황실 정부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거부했지만, 왕용과 왕처직은 종종 조공을 바쳤다.[19]

910년, 왕용의 어머니 하씨 부인이 사망했다. 태조는 황실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왕용에게 조문 기간을 마치고 공식적으로 복귀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인근 순찰구에서도 모두 조문객을 보냈는데, 그중에는 하동(河東)도 있었으며, 이곳의 절도사는 이존욱 진왕(晉王)이었다. 이존욱은 후량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지역 통치자 중 한 명이었다. 후량 사신은 우연히 진(晉) 사신을 보고 놀랐다. 그는 후량의 수도 개봉으로 돌아가 태조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왕용과 왕처직이 비밀리에 진(晉)과 연합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뤄사위 예왕(鄴王)이 최근 위보(魏博)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태조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위보, 무순, 이무를 효과적으로 장악하고자 했다.

910년 겨울, 당시 후량의 명목상 봉신이기도 한 유수광 연왕(燕王)이 이무를 공격하려 하자, 태조는 시종 두정은(杜廷隱)과 정연휘(丁延徽)를 보내 두 개의 위보 군단을 북쪽으로 무순의 심주(深州)와 기주(冀州)(모두 현대 허베이 형수이) 현으로 보냈다. 이는 유수광의 공격에 맞서 무순과 이무를 돕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왕용의 장군 석공립(石公立)은 심주 방어사였는데, 후량군의 의도를 의심하여 왕에게 제안을 거절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왕은 자신의 군대와 후량 황실 군대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석공립에게 심주에서 병력을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곧 두정과 정연휘는 각각 심주와 기주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그곳에 남아있는 무순 군인들을 학살한 후, 왕경인 장군이 지휘하는 후량 황실 주력군의 도착을 기다리기 위해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왕은 석공립에게 후량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두 현을 신속하게 탈환할 수 없었다. 그는 이후 유수광(거절함)과 이존욱(동의함)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이존욱은 왕처직의 행동 촉구에 따라, 즉시 군대를 출동시켰으며, 그의 장군 주덕위가 선봉에 서고 그 자신도 뒤따라 진주로 향해 왕용을 도왔다. 이 시점부터 무순(이후 다시 성덕으로 개명)과 이무는 후량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진(晉)뿐만 아니라 후량 황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다른 두 국가(제와 )에서도 사용했던 당나라 연호 천우(天祐)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고, 사실상 완전히 독립적인 정권이 되었다.[19]

2. 4. 진(晉)나라의 동맹으로서

911년 봄, 진/조 연합군과 후량 군대는 박향(현 싱타이, 허베이)에서 전투를 벌였다. 초기에는 뚜렷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왕경인이 군대 일부를 후방으로 이동시키자 이사원은 후량 군대를 속여 왕경인이 도망쳤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후량 군대에 큰 혼란이 발생했고, 진/조 연합군은 후량 군대의 대부분, 특히 정예 부대인 용양군과 신첩군을 격파하고 학살했다.[19] 왕경인의 패배 소식을 들은 두정은과 정언휘는 신주와 기주를 버리고 주민들을 데려갔으며, 남은 주민들은 학살되었다. 이존욱은 위보의 수도인 위주(魏州|웨이저우중국어)를 잠시 포위했지만, 유수광의 배후 공격을 우려하여 조주로 돌아갔다.[19] 이후 이존욱과 왕용은 서로 존칭을 사용하며 만났고, 이존욱은 자신의 딸을 왕용의 아들 왕조회(王昭誨|왕자오후이중국어)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했다.[20] 또한 왕용은 자신의 양자인 왕덕명을 조나라 군대와 함께 이존욱의 원정에 동행시켰다.[19]

이후 유수광은 후량의 패배 소식을 듣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 그는 왕용과 왕처직에게 사신을 보내 자신을 "상부"(尚父, 황제의 아버지)로 존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왕용이 이 사실을 이존욱에게 알리자, 이존욱은 유수광의 오만함을 부추겨 스스로 파멸하게 만들려는 계책에 따라 왕용, 왕처직, 그리고 다른 세 명의 절도사들과 함께 공동 선언을 발표하여 유수광을 "상부"로 존경했다. 이에 후량 황제는 유수광을 신하로 유지하기 위해 "채방사" 칭호를 제안했지만, 유수광은 스스로 연나라 황제를 선포했다.[20]

912년, 주덕위 휘하의 진나라 군대, 왕덕명 휘하의 조나라 군대, 정암(程巖|청옌중국어) 휘하의 의무 군대는 유수광의 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역수(현 보정시를 흐르는)에서 만났다. 이들은 유주로 진격하여 포위했다. 유수광은 후량에 도움을 요청했고, 후량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조나라의 조강(현 헝수이)을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후량 태조는 진나라 군대의 매복에 걸려 주요 공격이 임박했다고 오인하고 도망쳐 유수광을 돕는 것을 포기했다.[20]

912년 겨울, 주덕위는 유주를 포위하고 있었고, 왕덕명은 조나라 영토로 돌아와 후량의 위보 지역을 공격했다. 이 시기에 후량 태조는 아들 주우규에게 암살당했고, 주우규는 황제를 칭했다가 다시 그의 형제 주우정에게 살해된 후 주우정이 황제가 되었다. 왕덕명은 후량의 장수 양사후에게 패배했고, 913년 봄 양사후는 조나라 영토 깊숙이 진격하여 하박(현 스자좡)을 포위했다. 왕용은 주덕위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주덕위는 이소형(李紹衡|리사오헝중국어)을 보내 왕덕명과 합류하여 후량 군대에 저항하게 했으며, 이후 후량 군대는 조나라 영토를 떠났다.[20] 그해 말, 이존욱이 직접 유주를 공격하여 유수광을 사로잡은 후, 왕처직과 왕용의 요청에 따라 의무와 정덕을 거쳐 승리 행진을 한 뒤 진나라 수도 태원으로 돌아가 유수광과 유인공을 처형했다. 이존욱이 정주를 방문하는 동안 왕용의 요청에 따라 이존욱은 유수광과 유인공을 잠시 풀어 왕용이 연회를 열도록 허락했다. 왕용의 고문들은 후량이 왕용에게 수여한 칭호 중 하나인 "상서령"(尚書令)이 태종이 사용한 칭호이므로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고문들의 제안에 따라 왕용은 이 칭호를 이존욱에게 제공했고, 이존욱은 이를 받아들여 임시 황실 정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21]

914년 여름, 왕용과 주덕위는 형주를 공격했지만, 양사후에게 좌절을 겪고 물러났다.[21]

2. 5. 몰락과 최후

시간이 흐르면서 왕용은 조나라 백성들의 충성을 당연하게 여기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즐거움을 위해 많은 저택과 정원을 지었다.[8] 그의 어머니 하 부인이 살아있을 때는 그의 낭비벽을 억제했지만, 그녀가 죽은 후에는 그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3] 그는 자신의 주를 통치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 문제를 그의 측근, 특히 군 사령관 이애(李藹)와 환관 이홍규(李弘規)에게 위임했다. 그는 또한 불교도교 신, 그리고 연금술을 숭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출이 크게 증가했고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 부담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진주(鎭州)의 주요 도시 서쪽에 있는 산에 있는 자신의 저택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방문할 때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약 10,000명의 병사를 데려가 지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군대를 지치게 했다. 한편 왕덕명(王德明)이 그의 친위대 사령관을 맡기를 원하여, 후량에 대항한 이존욱 휘하에서 복무하던 왕덕명을 소환하고, 왕을 부습(符習)으로 교체했다.[8]

920년 겨울, 왕용이 다시 산을 방문했을 때, 이홍규는 그가 본부를 자주 떠나면 반란의 위험에 노출될 뿐만 아니라 이존욱이 직접 이끌고 있는 후량에 대한 그의 전쟁 노력에 충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왕은 처음에는 진주로 돌아갈 것을 동의했지만, 또 다른 환관 석희몽(石希蒙)이 이홍규가 왕을 거짓으로 경계했다고 비난했다. 왕은 이에 동의했고, 따라서 진주로 언제 돌아갈지 밝히지 않고 저택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이후 이홍규는 장교 소한형(蘇漢衡)에게 왕용의 경비병을 저택으로 데려가 그들의 불만을 진술하도록 했다. 왕용이 말을 듣지 않자 병사들은 석희몽을 죽였다.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인 왕은 즉시 진주에 있는 본부로 돌아갔다. 그날 밤, 그는 왕조좌(王昭祚)와 왕덕명에게 이홍규와 이애, 그리고 그들의 일족을 살해하도록 했다. 또한 소씨를 포함하여 이홍규와 이애의 동료 수십 가족도 살해되었다. 소씨의 많은 동료들이 체포되었고, 군대는 공포에 휩싸였다.[8]

이홍규와 이애가 죽은 후, 왕용은 국가의 사무를 왕조좌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왕조좌는 오만하고 가혹한 태도로, 이홍규의 동료들을 많이 죽이는 등 병사들을 소외시켰다. 이홍규가 지휘하던 500명의 병사들은 탈영을 고려했지만, 그렇게 할 결심을 하지 못했다. 그 당시, 왕용이 군 병사들에게 현금을 지급하고 있었지만, 왕용은 석희몽을 죽인 경비병들을 경멸하여 경비병들에게는 보상을 지급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이로 인해 경비병들은 더욱 공포에 떨었다. 이 시점에서 양아버지에게 반기를 들 것을 고려하고 있던 왕덕명은 왕용이 그들을 모두 학살할 계획이라고 거짓으로 경비병들에게 알렸고, 이로 인해 그들의 분노와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8]

921년 봄 어느 날 밤, 경비병들이 연회를 열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왕덕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으며,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병사들도 동의했고, 그들은 본부로 들어갔다. 그 당시 왕용은 도교 의식을 치르고 있었고, 두 명의 병사가 들이닥쳐 그의 머리를 잘랐다. 장교 장우순(張友順)은 왕덕명의 저택으로 가서 그에게 순절을 장악하도록 권했다. 왕덕명은 동의했다. 그는 이름을 원래 이름인 장문리(張文禮)로 바꾸고, 왕조좌의 아내(후량 황제 주우진의 여동생으로, 부녕공주라는 칭호를 받았다)를 제외한 왕용의 일족을 학살했지만, 이존욱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청원을 제출했다. 이존욱은 처음에는 장을 공격하려 했지만, 그의 측근들은 두 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지 않도록 장에게 성덕 절도사(成德節度使) 대행직을 제수하도록 설득했고, 이존욱은 처음에는 그렇게 했다. 그러나 장은 이존욱의 의도를 스스로 걱정하여 주우진뿐만 아니라 거란 요 태조에게도 구애를 했고, 이존욱은 또한 부의 권고에 따라 장을 상대로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선포했다. 장은 이존욱의 선포를 듣고 두려움에 떨며 죽었고, 그의 아들 장출근이 뒤를 이었다. 장출근은 처음에는 진(晉) 군대에 대항하여 버틸 수 있었지만, 922년 가을에 진주가 함락되었다. 장문리의 가족은 학살되었다. 한편, 불타버린 저택에 매장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었던 왕용의 시신은 왕용의 전 부하들에게 발견되어 제대로 매장되었다.[8] 왕조회(王昭暉)는 왕용에게 충성하는 일부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학살을 피했지만, 이사원의 통치 기간 동안 수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고, 부의 딸과 결혼하여 최소한 후주 시대까지 지속된 관료 생활을 했다.[4]

3. 가계

wikitext

항목내용
아버지왕경숭 (847년 ~ 883년)
(상산, 성덕군 절도사)
어머니위국태부인 하씨(? ~ 910년)
본인왕용(王鎔)
배우자조국부인 이씨(? ~ 921년)
(농서 이씨 이전의(李全義)의 딸, 남편이 쿠데타로 살해된 지 10일 후에 살해, 이후 남편과 합장)
아들 (생모 미상)
양자왕덕명(? ~ 921년) (본명 장문례, 왕용의 총애를 받아 양자가 되었으나, 921년 쿠데타를 일으켜 양아버지를 죽이고 지위와 영토 차지)


참조

[1] 역사 The 910 date is used here as that was the date when Wang Rong broke away from [[Later Liang (Five Dynasties)|Later Liang]]'s [[Zhu Wen|Emperor Taizu]] (Zhu Quanzhong). Alternatively, the date of 907 (when Emperor Taizu created Wang the Prince of Zhao) can be used.
[2] 서적 Old Book of Tang
[3] 서적 New Book of Tang
[4]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5]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6] 서적 Zizhi Tongjian
[7] 역사 All traditional historical sources for Wang Rong indicated that he was nine when he succeeded his father [[Wang Jingchong (Tang dynasty)|Wang Jingchong]] in 883, making him born in 874. However, the ''Zizhi Tongjian'' also, when discussing his age when surviving [[Li Kuangwei]]'s coup attempt in 893, said that he was 16, which would make him born in 877 if correct there.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Zizhi Tongjian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Zizhi Tongjian
[13] 서적 Zizhi Tongjian
[14] 서적 Zizhi Tongjian
[15] 서적 Zizhi Tongjian
[16] 서적 Zizhi Tongjian
[17] 서적 Zizhi Tongjian
[18] 서적 Zizhi Tongjian
[19] 서적 Zizhi Tongjian
[20] 서적 Zizhi Tongjian
[21] 서적 Zizhi Tongj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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