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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흔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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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흔은 전한 무제, 소제 시대의 인물로, 군현의 관리에서 시작하여 우부풍, 어사대부를 거쳐 승상에 오른 인물이다. 무제 말기에 포승지에게 발탁되어 우부풍에 임명되었으며, 소제 원봉 원년(기원전 80년)에 어사대부가 되었다. 원봉 4년(기원전 77년)에는 승상이 되었으나, 이듬해 자살을 시도하고 실패하여 사망했다. 시호는 경(敬)이며, 아들 왕담이 작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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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흔 (전한)
왕흔
가계
아버지왕흡
어머니불명
배우자불명
자녀왕망
관직
작위원향후
직위위위
시중
기장

2. 생애

왕흔은 본래 군현의 관리였으나, 능력을 인정받아 피양령(被陽令)으로 승진하였다. 무제 말기, 각지에서 도적이 들끓자 수의어사(繡衣御史) 폭승지가 황제의 명을 받아 도적 소탕에 소홀한 지방관들을 처벌하고 다녔다. 왕흔 또한 주살될 위기에 처했으나, 기지를 발휘하여 폭승지의 용서를 받고 오히려 그와 친분을 맺게 되었다.

이후 폭승지의 추천으로 왕흔은 우보도위(右輔都尉)에 임명되어 우부풍의 직무를 잠시 맡게 되었다. 무제가 우부풍 관할 지역을 지나갈 때 길과 숙박 시설 등이 잘 정비된 것을 보고 만족하여, 왕흔을 정식 우부풍으로 임명하였다.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왕흔은 실각한 상홍양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가 되며 중앙 정계의 고위직에 올랐다. 원봉 4년(기원전 77년) 2월에는 전천추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고, 의춘(宜春侯)에 봉해졌다.

원봉 5년(기원전 76년) 12월에 사망하였다.[2][1] 시호는 (敬)이며, 아들 왕담이 작위를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포승지와의 만남

왕흔은 본래 군현의 관리였으나, 능력을 인정받아 피양령(被陽令)으로 승진하였다.

무제 말기에는 각지에서 도적이 들끓어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이에 무제는 수의어사(繡衣御史) 포승지에게 특별 임무를 맡겨 각지를 순방하며 도적 소탕에 소홀하거나 무능한 지방관들을 찾아내 처벌하도록 하였다. 포승지는 황제의 명에 따라 여러 지방관을 주살하며 위세를 떨쳤다.

포승지가 피양현에 도착했을 때, 왕흔 역시 직무 태만을 이유로 주살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왕흔은 죽음을 앞두고도 침착하게 포승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을 살리고 죽일 권한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치시는 사군(使君)께서 저 같은 미미한 관리를 죽이신다 한들 위신이 더 높아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제가 목숨을 다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포승지는 왕흔의 당당하고 설득력 있는 말에 감탄하여 그의 주장을 옳게 여겼다. 포승지는 왕흔을 죽이는 대신 그를 용서하고 오히려 그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다. 이후 포승지는 수도 장안으로 돌아가 조정에 왕흔을 유능한 인재로 천거하였다.

포승지의 추천 덕분에 왕흔은 우보도위(右輔都尉)에 임명되어, 수도 인근 지역인 우부풍의 행정 업무를 잠시 맡아보게 되었다. 얼마 후 무제가 우부풍 관할 지역을 지나게 되었는데, 왕흔이 도로와 숙박 시설 등을 매우 잘 정비해 놓은 것을 보고 크게 만족하였다. 이에 무제는 왕흔의 행정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정식 우부풍으로 임명하였다.

2. 2. 우부풍 승진과 중앙 정계 진출

원래 군현의 관리였던 왕흔은 승진하여 피양령(被陽令)이 되었다.

무제 말기에는 각지에서 도적이 들끓었는데, 수의어사 폭승지가 무제의 명을 받아 도적 소탕에 소홀한 지방관들을 처벌하고 다녔다. 왕흔 역시 처형될 위기에 놓였으나, 죽기 직전 폭승지에게 "생살여탈의 권한으로 전국에 이름을 떨치시는 사군께서 저 같은 사람을 죽인다 한들 위신이 더 커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제가 최선을 다하게끔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기지를 발휘했다. 폭승지는 왕흔의 말을 옳게 여겨 그를 용서하고 친분을 맺었다.

이후 폭승지는 조정으로 돌아가 왕흔을 천거했고, 왕흔은 우보도위(右輔都尉)에 임명되어 우부풍의 직무를 잠시 맡게 되었다(견습). 무제가 우부풍 관할 지역을 지나갈 때 길과 숙박 시설이 잘 정비된 것을 보고 감탄하여, 왕흔을 정식 우부풍으로 임명했다.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왕흔은 실각한 상홍양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가 되며 중앙 정계의 고위직에 올랐다.

원봉 4년(기원전 77년) 2월에는 전천추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고, 의춘(宜春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원봉 5년(기원전 76년) 누군가의 고발을 받아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그 해 12월에 사망하였다.[2][1] 시호는 (敬)이고, 아들 왕담이 작위를 이었다.

2. 3. 승상 취임과 죽음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실각한 상홍양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원봉 4년(기원전 77년) 2월, 전임 승상 전천추가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되었고, 의춘(宜春侯)에 봉해졌다. 원봉 5년(기원전 76년)에는 누군가의 고발을 받아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그 해 12월에 사망하였다.[2][1] 시호는 (敬)이라 하였고, 아들 왕담이 작위를 이었다.

2. 4. 가계

아들 왕담이 후작위를 이었고, 왕담이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왕함이 뒤를 이었다. 왕망의 아내가 왕함의 딸이었기 때문에, 의춘후 왕씨 일족은 왕망신나라를 세운 후 외척으로서 총애를 받았다.[1]

3. 출전


  • 사마천, 《사기
  • * 권20 건원이래후자연표
  • 반고, 《한서
  • * 권18 외척은택후표
  • * 권66 공손유전왕양채진정전

참조

[1] 서적 史記 建元以来侯者年表 宜春侯 漢書 王訢伝
[2] 문서 자살 시도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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