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천추
1. 개요
전천추는 전한 고조 시대의 인물로, 무고의 난 당시 여태자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려 무제의 신임을 얻어 승상에 오른 인물이다. 고조의 종묘 낭중으로 있던 중 여태자의 무고의 난에 연루되자 무제에게 상소를 올려 여태자를 옹호했다. 무제는 전천추를 대홍려에 임명하고 몇 달 후 승상으로 승진시켜 부민후에 봉했다. 승상 재임 기간 동안 염철의와 연왕 유단의 난을 겪었으며, 12년 후 사망하여 정후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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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한나라의 정치인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한나라의 정치인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
중국에 관한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중국에 관한 -
카자흐인
카자흐인은 15세기 카자흐 칸국 건국 이후 명칭이 사용된 튀르크계 중앙아시아 북부 유목민족으로, "자유로운 자"를 뜻하는 카자흐라는 명칭은 권위에 저항하는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유래했으며, 카자흐 초원을 중심으로 실크로드 무역을 통해 번성했고, 유목 생활과 튀르크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현재 여러 국가에 디아스포라가 거주하고 있다.
2. 생애
고조의 종묘의 낭중(郞中)을 지내던 중, 여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무고의 난). 전천추는 무제에게 여태자를 변호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무제는 전천추를 만나본 후 고조의 영혼이 전천추를 통하여 자신을 일깨운 것이라 생각하고, 바로 대홍려에 임명하였고, 몇 달 후 승상으로 승진시키고 부민후(富民侯)에 봉하였다.
단 한 번의 진언으로 이 정도의 고관에 이른 유례가 없었고, 아무런 공적도 없이 승상이 된 것 또한 전대미문의 일이었기 때문에, 흉노의 선우도 이를 비웃었다. 하지만 전천추는 무고의 죄를 묻는데 열을 올리던 무제를 달랬기 때문에, 종전의 재상보다 낫다는 평을 들었다.
무제는 연로한 전천추를 배려하여, 조회 때 작은 수레를 타고 궁궐을 드나들게 해주었다. 때문에 '차 승상'(車丞相)이라고 불렸다.
후원 2년(기원전 87년), 무제가 죽자 대장군 곽광 등과 함께 무제의 유조를 받들어 소제를 옹립하였다. 국정은 곽광이 오로지하였고, 전천추는 이에 협력하였다.
승상을 12년 역임하고 원봉 4년(기원전 77년)에 사망했다. 정후라는 시호를 받았고, 아들 전순이 부민후를 이었으나, 흉노 토벌 당시 노획품을 부풀렸다는 혐의로 자살하여 부민후는 단절되었다.
3. 주요 사건
장릉으로 이주한 제의 옛 왕족 전씨 출신이다. 유방의 묘의 낭중이었을 때, 여태자 유거의 난(무고의 화)이 있었다. 이때 전천추는 "아들이 아버지의 무기로 놀면, 그 죄는 태형에 해당합니다. 천자의 아들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어떤 죄에 해당할까요? 머리가 하얀 노인이 잠자리에 나타나 이 말을 가르쳐 주었습니다."라고 상소하여, 무제에게 황태자의 무고함을 깨닫게 했다.
무제는 전천추와 만난뒤 "이 일은 고조의 신령이 나에게 가르쳐 주려 한 것이다. 너는 나의 보좌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며 즉시 그를 대홍려에 임명했고, 몇 달 후(정화 4년(기원전 89년))에는 유굴리의 후임 승상에 임명하여 부민후로 봉했다.
무제에게 단 한 번의 진언을 한 것을 바탕으로, 몇 달 동안 대홍려를 역임한 시기에도 특별히 언급할 만한 업적도 없고, 다른 공적이나 능력도 없이 승상이 된 것은 전대미문이었으며, 흉노선우도 그 일에 대해 "한나라 승상은 현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가 함부로 상소를 올린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비꼬았다. 그러나 전천추는 무고의 조사를 강화하는 무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하는 등, 이전의 재상보다 뛰어났다고 평가받았다.
후원 2년(기원전 87년)에 무제가 죽자, 대장군곽광 등과 함께 무제의 유조를 받아 소제를 옹립했다. 국정은 곽광에 의해 결정되었고, 전천추는 이에 전면적으로 협력하는 자세를 보였다.
전천추는 승상을 12년 역임하고, 원봉 4년(기원전 77년)에 사망했다. 시호는 정후이며, 아들 전순이 부민후를 이었으나, 흉노 토벌 당시 노획품을 부풀렸다는 혐의로 자살하여 부민후는 단절되었다.
3.1. 무고의 난 변호
고조의 종묘의 낭중(郞中)을 지내던 중, 여태자가 반란을 일으켰다(무고의 난). 전천추는 무제에게 여태자를 변호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子弄父兵,罪當笞;天子之子過誤殺人,當何罪耶?臣嘗夢見一白頭翁教臣言。」중국어
전천추와 만난 무제는 고조의 영혼이 전천추를 통하여 자신을 일깨운 것이라 생각하고, 바로 전천추를 대홍려에 임명하였고, 몇 달 후 승상으로 승진시키고 부민후(富民侯)에 봉하였다.
단 한 번의 진언으로 이 정도의 고관에 이른 유례가 없었고, 또 아무런 공적도 없이 승상이 된 것 또한 전대미문의 일이었기 때문에, 흉노의 선우도 이를 비웃었다. 하지만 전천추는 무고의 치죄에 열을 올리던 무제를 달랬기 때문에, 종전의 재상보다 낫다는 평을 들었다.
3.2. 연왕 유단의 난 진압
전한 무제가 승상으로 재임할 때, 염철회의(시원 6년(기원전 81년))와 유단의 난(원봉 원년(기원전 80년))이 일어났다. 연왕 유단의 난 당시 전천추는 병석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난이 발각되자 승상의 명령으로 반란자인 상관걸 등을 체포했다.
4. 평가
무고의 난 때 여태자의 무고함을 주장하여 무제의 마음을 돌린 일로 대홍려를 거쳐 승상에까지 오른 전천추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 유굴리의 후임으로 승상이 된 것은 전대미문의 일로, 흉노 선우는 "한나라 승상은 현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한 남자가 함부로 상소를 올린 것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비꼬았다.
* 그러나 전천추는 무고의 조사를 강화하려는 무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하는 등, 이전의 재상들보다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원 2년(기원전 87년) 무제가 죽고 소제가 즉위한 후, 곽광이 국정을 주도하였고 전천추는 이에 전면적으로 협력하였다.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연왕 유단의 난이 발각되었을 때, 병석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상의 명령으로 반란자인 상관걸 등을 체포하도록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