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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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리키는 가마쿠라 시대에는 단순히 도움을 주는 사람을 의미했지만, 센고쿠 시대에는 다이묘를 보좌하는 하급 무사 또는 토호, 지방 부자를 지칭했다. 에도 시대에는 도신과 함께 마치부교를 보좌하며 행정, 사법, 경찰 역할을 담당하는 직책으로, 마치부교 개인에게서 봉록을 받는 우치요리키와 쇼군 직속의 일반 요리키로 구분되었다. 요리키는 도신을 지휘, 감독하며 경찰서장과 같은 권한과 사법권도 가졌으며, 특권과 부유함으로 인해 에도의 세 멋쟁이 중 하나로 불리기도 했다. 오사카에서도 에도와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동정·서정 봉행소에 각 30명의 요리키가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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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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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키 | |
요리키(與力) | 일본 에도 시대의 하급 무사 계급 |
역할 및 임무 | |
소속 | 반 정 |
직책 | 반 정의 동심 통솔 소샤인의 감독 가부키 단속 고찰장 경비 |
임무 수행 | 에도마치부교, 교토쇼시다이, 오사카 마치부교 등의 지휘 감독 하에 임무 수행 |
봉록 | 100~200석 |
상세 정보 | |
인원 구성 | 에도마치부교: 25명 교토쇼시다이: 10명 오사카 마치부교: 18명 |
선발 | 세습제 |
특징 | 동심보다 높은 계급 소샤인 감독 도신의 비리를 감찰하는 역할 수행 범죄자 체포 |
기타 역할 | 에도마치부교의 재판에 참여 교토쇼시다이의 교토 시정 업무 지원 오사카 마치부교의 오사카 시정 업무 지원 |
2. 중세
가마쿠라 시대에 요리키(与力)·요리(寄騎)는 단순히 가세하는 사람을 가리켰지만, 이후 점차 다이묘 또는 유력 무장을 따르는 하급 무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아졌다. 전국 시대에는 요리코(寄子)(요리코=유력 무장(요리친(寄親))에 대한 재지 토호)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들은 하급 무사가 아니라 재지의 영주(在地토호)였다. 수천 관문의 토지를 소유한 예도 드물지 않았다.
전국 다이묘들은 재지 토호인 요리키·요리코를 요리친의 가신단에 편입시키면 요리친의 힘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모반을 방지하는 데 힘썼다. 그래서 요리친을 통솔하는 전국 다이묘는 요리코인 재지 토호들을 배신 (가신의 가신)으로 삼지 않고 직접적으로 신종하게 하는 한편, 중신이나 유력 무장(요리친)에게 부속시켜 재지 토호의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이용했다. 특히 고호조 씨, 이마가와 씨, 우에스기 씨, 다케다 씨 등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가로로 붙인 자는 쓰케가로(付家老), 고후케가로(御附家老)라고 불렸다.
센고쿠 시대에는 전쟁 규모가 커지면서 센고쿠 다이묘가 지휘하는 군대 조직이 세분화되었다. 다이묘는 최고 사령관으로서 전체 군대를 지휘했고, 그 밑에서 사무라이 다이쇼는 주력 기병대를, 아시가루 다이쇼는 보병 (아시가루)을 지휘했다.[3] 지자무라이 출신인 요리키는 말 위에서 사무라이 다이쇼와 아시가루 다이쇼를 보좌했다.[4]
2. 1. 요리키 다이묘
가마쿠라 시대에 요리키는 단순히 도움을 주는 사람을 의미했지만, 이후 다이묘나 유력한 무장을 따르는 하급 무사를 지칭하게 되었다. 센고쿠 시대에는 무장(寄親)을 지원하는 지방 부자인 요리코(寄子) 대신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하급 무사가 아닌 토호(在地土豪)였다. 수천 관문(貫文)의 토지를 가진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전국시대 다이묘들은 요리키, 요리코들을 가신단에 포함하면 무장(寄親)의 힘이 커져 모반의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다이묘에 따라 직접 관리하면서 무장에게 동시에 소속시켜 토호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고호조 씨, 이마가와 씨, 우에스기 씨, 다케다 씨 등에게서 보인다. 가로 역할도 하는 경우는 쓰키가로라고 했다.
더 큰 다이묘에게 종속된 무장의 경우 요리키다이묘라 부르기도 했다. 오다 정권에서 오다 노부타다 소속이던 河尻秀隆나 모리 나가요시가 그랬고 시바타 가쓰이에 소속이던 마에다 도시이에와 사사 나리마사, 아케치 미쓰히데 소속이던 호소카와 후지타카와 쓰쓰이 준케이 등이 그런 경우였다. 이런 요리키다이묘는 함께 군사행동을 취할 때 상위 다이묘의 지시를 받을 뿐이고 기본적으로는 대등한 다이묘였다. 아케치, 호소카와, 쓰쓰이 등은 혼인관계가 있는 친구들이기도 했다.[2]
3. 근세
가마쿠라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의 군사 작전에서 요리키는 다이묘(봉건 영주) 또는 그들이 지명한 지휘관을 보좌했다.[2]
센고쿠 시대에는 전쟁 규모가 커지면서 다이묘가 지휘하는 군대 조직이 세분화되었다. 다이묘는 최고 사령관으로서 전체 군대를 지휘했고, 그 밑에서 侍大将|사무라이 다이쇼일본어는 주력 기병대를, 足軽大将|아시가루 다이쇼일본어는 보병인 足軽|아시가루일본어를 지휘했다.[3] 地侍|지자무라이일본어 출신인 요리키는 말 위에서 사무라이 다이쇼와 아시가루 다이쇼를 보좌했다.[4]
에도 시대에 요리키는 정부 사무실에서 행정 지원을 제공했다. 여러 요리키 중 마치부교 지휘하에 경찰을 담당하는 마치카타 요리키가 있었다. 요리키 아래에는 도신이 있었다. 에도 시에는 두 개의 마치 부교 사무실에 각 25명 정도의 요리키가 근무했다. 이들은 고케닌 신분이라 원래는 徒士|가치일본어와 동등하여 말을 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특별히 예외로 말을 타는 것이 허용되었다.[4]
3. 1. 에도 막부의 요리키
에도의 요리키는 도신 (일본사)과 함께 배속되어 상사를 보좌하는 직책이었다. 가장 유명한 경우는 마치부교에 배속된 町方与力로, 마치부교를 보좌하며 에도의 행정, 사법, 경찰 역할을 했다. 남쪽 부교소와 북쪽 부교소에 25기씩 배치되었으며, 말을 타고 움직였기 때문에 기(騎)라고 표현했다.[4]요리키는 마치부교 개인에게서 봉록을 받으며 움직일 때도 항상 따라다니는 우치요리키(内与力)와 쇼군 직속 관리인 보통의 요리키 두 부류가 있었다. 우치요리키는 보통의 요리키보다 하급이었지만 부교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실권이 큰 경우가 많았다.
요리키는 부하인 도신을 지휘, 감독하는 관리자였으며, 오늘날로 치면 경찰서장 정도의 권한이 있었다. 사법권도 있어서 민형사 재판에 관여했기 때문에 법관, 검사와 유사한 면도 있었다.
요리키에게는 핫초보리에 300평 정도의 집이 주어졌다.[6] 또한, 여러 곳에서 청탁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부유한 경우도 많았다.[7] 특권으로 센토 (목욕탕)의 여탕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핫초보리의 여탕은 아침엔 비어있었고 남탕과 연결되어 있어서 도청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핫초보리의 여탕에 칼걸이가 있는 것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말도 있었다.[8][9] 요리키는 특유의 마게를 틀고 다녀 멋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리키시, 소방관과 함께 에도의 세 멋쟁이(江戸の三男)로 불리기도 했다.
마치요리키의 조장급에겐 2백 석 이상의 봉록이 지급되어 하급 하타모토의 지위였다. 죄인을 다루는 것은 정갈하지 못한 일로 간주되어 쇼군을 알현하거나 에도성 등성은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신분은 상급 고케닌이었다.
3. 2. 오사카의 요리키
오사카에서는 동쪽과 서쪽의 마치부교소에 각 30기의 요리키가 있었다. 에도처럼 지샤부교와 火付盗賊改方등이 나뉘어있지 않고 마치부교 혼자서 맡아했다. 盗賊方요리키가 6인, 定町廻요리키가 4인이었다. 요리키나 도신의 거처는 동쪽 마치부교소의 북쪽 요도강의 텐마바시 건너 1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 텐마요리키, 텐마도신이라고도 불렀다.[12]오사카 정봉행에는 동정·서정 봉행소에 각 30명의 요리키가 배치되어 있었다. 에도처럼 사사 봉행, 화부 도적 개방의 직책이 없고 정봉행소가 일괄적으로 담당했다. 도적 방면의 요리키가 6명, 정정 순찰 요리키가 4명이었다. 요리키와 도신의 역택은 동정 봉행소의 북쪽, 요도가와의 덴마바시를 건너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덴마 요리키, 덴마 도신이라고 불렸다.[10]
참조
[1]
서적
Taiho-jutsu: law and order in the age of the samurai
https://books.google[...]
Tuttle Publishing
2004
[2]
서적
Taiho-jutsu: law and order in the age of the samurai
https://books.google[...]
Tuttle Publishing
2004
[3]
웹사이트
https://www.touken-w[...]
The Nagoya Japanese Sword Museum Nagoya Touken World
2024-07-25
[4]
웹사이트
https://kotobank.jp/[...]
Kotobank
2024-07-25
[5]
문서
同心
[6]
간행물
新作『八丁堀組屋敷図 1600分の1 嘉永6年』解説]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
[7]
웹사이트
与力は賄賂で大儲け?江戸時代の「不正」驚く実態: 都市行政に練達しているからこそ便宜を図られた
https://toyokeizai.n[...]
東洋経済新報社
2024-03-03
[8]
CRD
江戸時代の湯屋の描写で「女湯に刀掛けがある。」と書いてあった、本当か。
練馬区立練馬図書館
2022-10-01
[9]
imidas
時代劇用語指南 与力の朝風呂
https://imidas.jp/ji[...]
imidas
2008-09-18
[10]
서적
江戸の二十四時間
河出書房新社
[11]
저널
新作『八丁堀組屋敷図 1600분의1 嘉永6年』解説]
http://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
[12]
서적
江戸の二十四時間
河出書房新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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