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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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조(南朝, 일본어: 南朝 난초)는 14세기 일본에서 발생한 남북조 시대에 존재했던 천황가의 분파를 의미한다. 1336년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로 탈출하여 세운 남조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에 세운 북조와 대립했다. 남북조 시대는 고다이고 천황의 친정에 반발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북조를 세우면서 시작되었으며, 1392년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중재로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북조에 삼종신기를 양도하고 퇴위하면서 종결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남조가 정통으로 인정받았으며, 북조는 정통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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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 (일본)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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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
공식 명칭 | 남조 |
다른 표기 | 다이카쿠지 계통 요시노 조정 |
존속 기간 | |
시작 | 1338년 |
종료 | 1392년 |
수도 | |
수도 | 요시노 |
정치 | |
정부 형태 | 전제군주제 |
지도자 칭호 | 천황 |
초대 천황 | 고다이고 천황 |
초대 천황 재위 기간 | 1336년–1339년 |
2대 천황 | 고무라카미 천황 |
2대 천황 재위 기간 | 1339년–1368년 |
3대 천황 | 조케이 천황 |
3대 천황 재위 기간 | 1368년–1383년 |
말대 천황 | 고카메야마 천황 |
말대 천황 재위 기간 | 1383년–1392년 |
종교 | |
종교 | 신불습합 |
언어 | |
공용어 | 중세 일본어 |
역사 | |
건립 | 겐무 신정 몰락 후 |
해체 | 남북조의 재통일 |
군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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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의 문장 | |
이전 정부 | |
이전 정부 | 겐무 신정 |
이후 정부 | |
이후 정부 | 무로마치 막부 |
2. 역사
나라현 남부 요시노를 거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교토에 있던 북조에 대응하여 남조라고 불린다. 이는 후세에 만들어진 명칭이 아니며 당시 기록에도 "남조", "남방"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19] 고다이고 천황 재위 중 행궁은 기소 행궁에 있었지만, 이후 남조의 흥망에 따라 야마토, 카와치, 셋쓰, 야마시로 등 여러 국에 행궁이 존재했다.[20]
가마쿠라 시대 황통은 고후카쿠사 천황 계통의 지묘인통(持明院統)과 가메야마 천황 계통의 다이가쿠지통(大覚寺統)으로 분열되어 양통질립(両統迭立)이 일어났다. 1318년 다이가쿠지통의 고다이고 천황이 즉위하여 친정을 시작하고 막부 타도 계획을 꾸몄다. 1331년 삼종신기를 가지고 가사오키 산에 들어가 봉기하자, 막부의 청으로 지묘인통의 고곤 천황이 즉위한다.
1333년 반막 세력의 결집으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자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로 돌아와 겐무 신정을 시작한다. 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이 일어나자 고다이고 천황은 토벌에 나선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묵인하지만, 난을 평정한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 머물며 겐무 정권으로부터 이반한다. 1336년 규슈로 갔던 다카우지는 지묘인통의 고곤 상황으로부터 원선(院宣)을 받고 다시 동상한다.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등을 격파하고 입경한다.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 산으로 도망쳐 저항하지만, 고묘 천황이 즉위하여 북조가 성립하고,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삼종신기를 접수한 다카우지는 교토에 무로마치 막부를 성립시키고, 고다이고를 중심으로 하는 겐무 정권은 와해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로 피신하여 조정을 열고, 고묘 천황에게 전해진 삼종신기는 위조품이라고 주장하며 남북조 시대가 성립한다. 닛타 요시사다 등은 차례로 패배하여 전사하고, 1339년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하고 고무라카미 천황이 즉위한다. 1348년 구스노키 마사쓰라 등이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아시카가 측 다카시 나오타다에게 패배하고, 요시노마저 빼앗긴 남조는 가나나오(賀名生)로 이동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아시카가 나오요시의 대립으로 간노의 소란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남조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다. 1351년 정평일통(正平一統)이 성립하여 연호가 통일되었다.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서 나오요시를 추격하여 모살하였으나, 남조는 교토와 가마쿠라를 동시에 탈환하는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여, 북조 신기 접수, 북조의 고코곤 천황·고묘 천황·스ക്കോ 천황 세 상황과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 납치를 감행하여 일통은 결렬되었다.
2. 1. 남북조 시대의 성립 배경
13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가 쇠퇴하면서 황실은 지묘인통(持明院統)과 다이가쿠지통(大覚寺統)으로 분열되어 황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고사가 천황[3]은 그의 두 아들인 고후카쿠사 천황[4]과 가메야마 천황[5]에게 왕위를 번갈아 물려주도록 하였으나,[6] 이는 왕위 다툼을 야기했다.다이가쿠지통의 고다이고 천황은 막부 타도를 계획하고, 1331년 가사오키 산에서 봉기했으나 실패했고, 막부의 청으로 지묘인통의 고곤 천황이 즉위했다.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후,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 신정을 시작했지만,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발로 무너졌다.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과 화의를 맺고 삼종신기를 건네받아 지묘인통 계열의 고묘 천황을 옹립한 직후, 겐무시키모쿠를 제정하여 정책 방침을 정하고 정식으로 무로마치 막부를 열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로 달아나 “북조에 넘긴 신기는 가짜이며 고묘 천황의 왕위는 정통성이 없다.”라고 주장하며 요시노에 남조를 열었다. 이로써 일본 역사에서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메이지 시대인 1911년 4월 3일 칙령에 따라, 요시노에 망명하여 남조를 세운 고무라카미 천황을 통해 고다이고 천황의 직계 후손이 정통한 재위 군주로 규정되었다.[7] 따라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에 세운 북조는 정통성이 없다고 여겨진다.[7]
2. 2. 남북조의 대립과 전개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과 화의를 맺고 삼종신기를 건네받아 지묘인 계통의 고묘 천황을 옹립한 후, 건무식목을 제정하여 정책 방침을 정하고 정식으로 막부를 열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로 달아나 “북조에 넘긴 신기는 가짜이며 고묘 천황의 왕위는 정통성이 없다.”라고 주장하며 요시노에 남조를 열었다.[21] 이후 60여 년간 북조와 남조는 정통성을 주장하며 대립했다.고다이고 천황은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 유력 무장들의 활약으로 한때 세력을 떨치기도 하였으나, 이들은 차례로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1339년에는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하고 고무라카미 천황이 즉위하였다. 남조는 점차 쇠퇴하였으나, 1348년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아시카가 측의 다카시 나오타다에게 패배하고, 요시노마저 빼앗기자 가나나오(賀名生)로 이동하는 등 계속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북조를 추대한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내부 분열이 심화되었다. 관응의 난을 계기로 남조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1351년에 화약을 맺었다.[21] 그러나 남조 군대가 교토를 공격하면서 화약은 곧 깨지고 말았다.
1392년,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조에 평화적 통일 방안을 제의했다.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교토로 상경해 삼종신기를 양도하고 퇴위하는 대신, 고카메야마 천황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황통을 북조와 남조가 번갈아 가면서 계승하자는 의미였다. 이에 북조와의 대결에서 수세에 몰리면서 쇠퇴하고 있었던 남조는 제안을 수락하였다. 고카메야마 천황이 상경해 삼종신기를 건네줌으로써 60년에 이르는 남북조 내란은 종결되었으며, 북조가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조 측에서는 곧 남조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고코마쓰 천황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카메야마 천황은 요시노에서 다시 남조를 부활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2. 3. 남북조의 통일
1392년,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조에 평화적 통일 방안을 제의했다.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교토로 상경해 삼종신기를 양도하고 퇴위하는 대신, 고카메야마 천황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황통을 북조와 남조가 번갈아가면서 계승하자는 의미였다. 북조와의 대결에서 수세에 몰리면서 쇠퇴하고 있었던 남조는 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고카메야마 천황이 상경해 삼종신기를 건네줌으로써 60년에 이르는 남북조 내란은 종결되었으며, 북조가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그러나 북조 측에서는 곧 남조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고코마쓰 천황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카메야마 천황은 요시노에서 다시 남조를 부활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고카메야마 천황은 고코마쓰 천황과 10년 계획에 따라 예전처럼 번갈아 즉위하는 방식으로 돌아가기로 합의했으나, 고코마쓰 천황은 이 약속을 어기고 20년 동안이나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전 남조 출신이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했다.[1][2]
이후 1412년에는 고코마쓰 천황의 아들인 칭광 천황이 즉위하였고, 양통협립(번갈아 즉위하는 방식)의 조건은 폐기되었다. 이에 반발한 남조의 후손과 유신들은 조정과 막부에 대한 반항을 15세기 중반까지 계속하였으며, 이들을 후남조라고 부른다.[3]
3. 남북조 시대의 주요 인물
1353년 구스노키 마사노리, 야마나 도키우지 등이 교토를 일시 탈환했으나, 곧 축출되었다. 1354년에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사망하고, 고무라카미 천황은 가와치의 금강사로 이동했다. 1355년에도 야마나 도키우지 등이 교토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1358년 북조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사망하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2대 쇼군이 되어 남조 소탕을 본격화했다. 1361년 호소카와 기요우지가 남조에 가담, 구스노키 마사노리 등과 함께 교토를 일시 점령했다. 고무라카미 천황은 셋쓰의 스미요시 대사를 행궁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했으나, 1363년 야마나 씨, 오우치 씨 등이 북조에 귀순하면서 쇠퇴했다.
1368년 고무라카미 천황이 사망하고 초케이 천황이 즉위했다. 1369년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북조에 투항했다.
1392년 명덕의 난 이후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오우치 요시히로를 통해 남조와 협상을 시작했다. 구스노키 마사카쓰가 지하야 성을 잃는 등 불리한 상황에서, 남조는 북조에 신기를 넘기고 황위는 양통 교대로 한다는 조건으로 화의에 응했다. 고카메야마 천황이 고코마쓰 천황에게 신기를 넘겨 남북조가 통일되었다(명덕의 화약).
3. 1. 남조
1336년 고다이고 천황이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화의 후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에 남조를 열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북조에 넘긴 삼종신기가 가짜이며 고묘 천황의 왕위는 정통성이 없다고 주장했다.[19] 고다이고 천황은 호쿠리쿠, 규슈 등 각 지방에 자신의 황자를 파견해 후위를 도모했다.1339년 고다이고 천황이 사망하고 고무라카미 천황이 즉위했다. 1392년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평화 통일 제안으로, 고카메야마 천황이 교토로 상경해 삼종신기를 양도하고 퇴위함으로써 60년에 이르는 남북조 내란은 종결되었고, 북조가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조 측은 약속을 파기하고 고코마쓰 천황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카메야마 천황은 요시노에서 다시 남조를 부활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남조의 천황은 다음과 같다.
대 | 천황명 | 재위 기간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향년 | 관계 | ||
---|---|---|---|---|---|---|
시호 추시호 | 읽기 | 휘 | ||||
96 | 고다이고 천황 | 고다이고 | 존치 | 문보 2년 2월 26일 (율력) - 연원 4년 8월 15일 (율력) | 1288년11월 26일 - 1339년9월 19일 52세 | 제91대 고우다 천황 제2황자 |
97 | 고무라카미 천황 | 고무라카미 | 헌량 의량 | 연원 4년 8월 15일 (율력) - 정평 23년 3월 11일 (율력) | 1328년 - 1368년3월 29일 41세 | 고다이고 천황 제7황자 |
98 | 초케이 천황 | 초케이 (챠우케이) | 관성 | 정평 23년 3월 11일 (율력) - 홍화 3년 10월 (율력) | 1343년 - 1394년8월 27일 52세 | 고무라카미 천황 제1황자 |
99 | 고카메야마 천황 (고귀산 천황) | 고카메야마 | 희성 | 홍화 3년 10월 (율력) - 겐츄 9년 윤10월 5일 | 1350년? - 1424년5월 10일 75세? | 고무라카미 천황 제2황자 |
메이지 시대의 1911년 4월 3일자 칙령은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을 통해 고다이고 천황의 직계 후손이 정통한 재위 군주라고 규정했다.[7] 따라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에 세운 북조는 정통성이 없다고 여겨진다.[7]
3. 2. 북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과 화의를 맺고 삼종신기를 건네받아 지묘인 계통의 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건무식목을 제정하여 정책방침을 정하고 정식으로 막부를 열었다.[7]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로 달아나 남조를 열었다.[7]1370년, 고코곤 천황이 황태자에게 양위하려는 의사를 표시하면서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우여곡절 끝에 막부의 지지를 얻은 고엔유 천황이 즉위했지만, 스코 천황 역시 황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하고 대신 궁가 후시미노미야 가문을 창설하게 하는 등, 천황가 및 조정에서는 내부 분열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392년,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조에 대해 평화적 통일 방안을 제의했다.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교토로 상경해 삼종신기를 양도하고 퇴위하는 대신, 고카메야마 천황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황통을 북조와 남조가 번갈아가면서 계승하자는 의미였다. 북조와의 대결에서 수세에 몰리면서 쇠퇴하고 있었던 남조는 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고카메야마 천황이 상경해 삼종신기를 건네줌으로써, 60년에 이르는 남북조 내란은 종결되었으며, 북조가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7]
그러나 북조 측에서는 곧 남조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고코마쓰 천황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카메야마 천황은 요시노에서 다시 남조를 부활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고다이고 천황이 겐무 신정을 일으켜 가마쿠라 막부에 반기를 들자, 막부는 고후시미 천황의 아들인 광곤 천황을 새로운 천황으로 선포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후 광곤 천황은 천황의 지위를 잃었지만, 그의 동생인 고묘 천황과 두 아들은 아시카가 쇼군에 의해 정통한 천황으로 지지받았다. 이로써 광곤 천황의 가계는 교토에 대립하는 궁정을 형성하게 되었고, 경쟁 궁정보다 북쪽에 위치했기에 북조라고 불리게 되었다.
메이지 시대인 1911년 4월 3일 칙령에 따르면, 이 시대의 정통한 재위 군주는 요시노에 망명하여 남조를 세운 고무라카미 천황을 통해 고다이고 천황의 직계 후손이라고 규정했다.[7] 따라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에 세운 북조는 정통성이 없다고 여겨진다.[7]
북조(北朝) 천황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위 기간 | |
---|---|---|
1 | 광곤 천황 | 1332년–1333년[8] |
– | ||
2 | 고묘 천황 | 1336년–1348년[9] |
3 | 스코 천황 | 1348년–1351년[10] |
– | ||
4 | 고코곤 천황 | 1352년–1371년[11] |
5 | 고엔유 천황 | 1371년–1382년[12] |
6 | 고코마쓰 천황 | 1382년–1392년 (이후 1392년–1412년 정통 천황으로 재위)[13] |
아시카가 쇼군의 지원을 받은 북조는 고다이고 천황과 그의 후손들이 세운 남조와 대립하였다. 1392년,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이 고코마쓰 천황에게 퇴위하면서 남북조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북조는 아시카가 쇼군의 권력 아래 있었고 실질적인 독립성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19세기 이후부터 남조 천황들이 일본의 정통 천황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게다가 남조는 일본의 황실 삼종신기를 지배하였다. 북조 천황들은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자로 불린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남조의 한 후손인 구마자와 히로미치는 자신이 일본의 정통 천황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히로히토 천황이 사기꾼이며, 히로히토의 혈통 전체가 북조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중의 문장을 착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독죄로 체포되지 않았다. 그는 요시노의 고다이고 천황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혈통을 상세히 기록한 호적을 제시할 수 있었지만, 그의 주장과 주장은 동정심 외에는 아무것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14]
가마쿠라 시대에 황통은 지묘인통과 다이가쿠지통의 두 갈래로 분열하는 양통질립이 일어났다. 고다이고 천황이 삼종신기를 가지고 가사오키야마에 들어가 봉기하자, 막부의 청으로 지묘인통의 광곤 천황이 즉위한다.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자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로 돌아와, 광곤 천황을 폐지하고 겐무 신정을 시작한다. 겐무 2년(1335년) 7월에 중선대의 난이 일어나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 머물며 겐무 정권으로부터 이반한다. 다카우지는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을 격파하고 입경한다. 고다이고 천황은 히에이잔으로 도망쳐 저항하지만, 8월에는 고묘 천황이 즉위하여 북조가 성립하고, 11월 귀경한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삼종신기를 접수한 다카우지는 교토에 무가정권(후의 무로마치 막부)을 성립시키고, 고다이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겐무 정권은 와해되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교토를 탈출하여 요시노로 피신하여 조정을 열고, 고묘 천황에게 전해진 삼종신기는 위조품이라고 주장하며 남북조 시대가 성립한다. 이후 요시노의 조정을 남조, 교토의 조정을 북조라고 부른다. 고다이고 천황 사후 고무라카미 천황이 즉위한다. 한편, 다카우지는 1338년에 북조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된다. 고다이고 천황의 승하 후에는 키타바타케 친부 등이 남조를 지휘하지만, 시조나와테 전투에서 구스노키 마사쓰라 등이 다카시 나오타다에게 패배하고, 더 나아가 요시노마저 빼앗긴 남조는 가나나오로 이동한다.
아시카가 정권에서는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 고모로 나오타다, 그리고 실질적인 정무를 담당했던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나오요시가 대립하여, 전국적인 혼란인 관응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남조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다. 정평일통이 성립하여 연호가 통일되었다.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서 나오요시를 추격하여 모살하였으나, 남조는 이 기회에 교토와 가마쿠라를 동시에 탈환하는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여, 북조 신기의 접수, 북조의 고코곤 천황·고묘 천황·스코 천황 세 상황과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의 납치를 감행하여 일통은 결렬되었다. 교토와 가마쿠라는 아시카가 측에 탈환되었고, 북조는 신기와 치텐이 부재하였으나 고코곤 천황의 즉위로 재건되었다.
이 무렵, 규슈에서 쇼니씨에 의해 옹립되었던 아시카가 나오후유는 규슈에서 축출되었고, 같은 해 11월 남조에 속하여 다카우지에 저항했다. 1353년에는 구스노키 마사노리, 야마나 토키우지 등이 두 번째 교토 탈환을 이루었지만 단기간에 축출되었다. 이듬해 1354년 4월에는 주도적인 인물이었던 키타바타케 친부가 사망하고, 10월에는 고무라카미 천황이 가나오에서 금강사로 이동했다. 1355년에도 야마나 토키우지 등이 교토 침공을 감행하지만 유지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1358년에 북조에서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사망하고, 2대 쇼군이 된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본격적인 남조 소탕을 시작했다. 1361년에는 호소카와 키요우지가 남조에 속하여, 구스노키 마사노리 등과 네 번째 교토 침공을 감행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한다. 그 후, 고무라카미 천황이 스미요시타이샤 궁사 쓰모리씨의 정인전을 약 10년간 행궁(스미요시 행궁)으로 삼고, 스미요시 대신을 받드는 세토나이카이의 수군을 휘하에 두어 시코쿠, 규슈와의 연락망을 확립하고, 남조는 각지에서 활동하지만, 1363년에는 야마나씨와 오우치씨의 북조 귀순 등으로 쇠퇴하고, 납치한 삼상황을 반환하는 등 강화적인 태도도 보였다.
1392년 명덕의 난에서 유력한 수호 다이묘인 야마나 가문을 약화시키고 무가 세력을 장악한 요시미쓰는, 오우치 요시히로의 중개로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한다. 1392년 초, 하타케야마 모토쿠니의 공격으로 남조의 지휘관 구스노키 마사카쓰가 지하야 성을 상실한 것도 협상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조에서 북조로의 신기 인계, 국가령을 다이고쿠지통의 영지로, 장강당령을 지묘인통의 영지로 하는 것, 황위는 양통질립으로 하는 것 등 3개 조항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고, 1392년 윤10월에 고카메야마 천황은 교토로 가서 고코마쓰 천황에게 신기를 양위하여 남조가 해소되는 형태로 남북조 합일이 성립되었다(명덕의 화약). 남조에 속했던 구게는 일부가 북조에서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은 이미 북조의 구게들로 채워져 있었고, 많은 이들은 공가 사회로의 복귀가 어려웠다고 여겨진다.
4. 남북조 시대의 사회·문화적 특징
1412년 칭광천황이 즉위하면서 양통협립의 조건은 폐기되었다. 이에 반발한 남조의 후손과 유신들은 15세기 중반까지 조정과 막부에 대한 반항을 계속하였는데, 이를 후남조라고 한다. 남북조 시대는 잦은 전쟁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4. 1. 정치
남조와 북조의 대립은 중앙 권력의 약화와 지방 세력의 성장을 초래했다. 무로마치 막부는 초기에는 불안정했지만, 점차 권력을 강화하며 전국을 통제해 나갔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다음 표와 같이 연호의 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서력 | 북조 연호 | 남조 연호 |
---|---|---|
1331년 | 겐표(元弘) 원년 | 겐표(元弘) 원년 |
1332년 | 쇼케이(正慶) 원년(4월 28일) | 겐표(元弘) 2년 |
1333년 | 겐표(元弘) 3년(5월 25일[1]) | 겐표(元弘) 3년 |
1334년 | 겐무(建武) 원년 | 겐무(建武) 원년(1월 29일) |
1335년 | 겐무(建武) 2년 | 겐무(建武) 2년 |
1336년 | 겐무(建武) 3년(6월 14일[2]) | 엔겐(延元) 원년(2월 29일) |
1337년 | 겐무(建武) 4년 | 엔겐(延元) 2년 |
1338년 | 레키오(暦応) 원년(8월 28일) | 엔겐(延元) 3년 |
1339년 | 레키오(暦応) 2년 | 엔겐(延元) 4년 |
1340년 | 레키오(暦応) 3년 | 코쿠(興国) 원년(4월 28일) |
1341년 | 레키오(暦応) 4년 | 코쿠(興国) 2년 |
1342년 | 코에이(康永) 원년(4월 27일) | 코쿠(興国) 3년 |
1343년 | 코에이(康永) 2년 | 코쿠(興国) 4년 |
1344년 | 코에이(康永) 3년 | 코쿠(興国) 5년 |
1345년 | 테이와(貞和) 원년(10월 21일) | 코쿠(興国) 6년 |
1346년 | 테이와(貞和) 2년 | 코쿠(興国) 7년/쇼헤이(正平) 원년(12월 8일[3]) |
1347년 | 테이와(貞和) 3년 | 쇼헤이(正平) 원년/쇼헤이(正平) 2년 |
1348년 | 테이와(貞和) 4년 | 쇼헤이(正平) 3년 |
1349년 | 테이와(貞和) 5년 | 쇼헤이(正平) 4년 |
1350년 | 칸오(観応) 원년(2월 27일) | 쇼헤이(正平) 5년 |
1351년 | 쇼헤이(正平) 6년(11월 7일[4]) | 쇼헤이(正平) 6년 |
1352년 | 분와(文和) 원년(9월 27일) | 쇼헤이(正平) 7년 |
1353년 | 분와(文和) 2년 | 쇼헤이(正平) 8년 |
1354년 | 분와(文和) 3년 | 쇼헤이(正平) 9년 |
1355년 | 분와(文和) 4년 | 쇼헤이(正平) 10년 |
1356년 | 엔분(延文) 원년(3월 28일) | 쇼헤이(正平) 11년 |
1357년 | 엔분(延文) 2년 | 쇼헤이(正平) 12년 |
1358년 | 엔분(延文) 3년 | 쇼헤이(正平) 13년 |
1359년 | 엔분(延文) 4년 | 쇼헤이(正平) 14년 |
1360년 | 엔분(延文) 5년 | 쇼헤이(正平) 15년 |
1361년 | 코안(康安) 원년(3월 29일) | 쇼헤이(正平) 16년 |
1362년 | 테이지(貞治) 원년(9월 23일) | 쇼헤이(正平) 17년 |
1363년 | 테이지(貞治) 2년 | 쇼헤이(正平) 18년 |
1364년 | 테이지(貞治) 3년 | 쇼헤이(正平) 19년 |
1365년 | 테이지(貞治) 4년 | 쇼헤이(正平) 20년 |
1366년 | 테이지(貞治) 5년 | 쇼헤이(正平) 21년 |
1367년 | 테이지(貞治) 6년 | 쇼헤이(正平) 22년 |
1368년 | 오안(応安) 원년(2월 18일) | 쇼헤이(正平) 23년 |
1369년 | 오안(応安) 2년 | 쇼헤이(正平) 24년 |
1370년 | 오안(応安) 3년 | 켄토쿠(建徳) 원년(7월 24일) |
1371년 | 오안(応安) 4년 | 켄토쿠(建徳) 2년 |
1372년 | 오안(応安) 5년 | 분츄(文中) 원년(4월 1일?) |
1373년 | 오안(応安) 6년 | 분츄(文中) 2년 |
1374년 | 오안(応安) 7년 | 분츄(文中) 3년 |
1375년 | 에이와(永和) 원년(2월 27일) | 텐슈(天授) 원년(5월 27일) |
1376년 | 에이와(永和) 2년 | 텐슈(天授) 2년 |
1377년 | 에이와(永和) 3년 | 텐슈(天授) 3년 |
1378년 | 에이와(永和) 4년 | 텐슈(天授) 4년 |
1379년 | 코우랴쿠(康暦) 원년(3월 22일) | 텐슈(天授) 5년 |
1380년 | 코우랴쿠(康暦) 2년 | 텐슈(天授) 6년 |
1381년 | 에이토쿠(永徳) 원년(2월 24일) | 코와(弘和) 원년(2월 10일) |
1382년 | 에이토쿠(永徳) 2년 | 코와(弘和) 2년 |
1383년 | 에이토쿠(永徳) 3년 | 코와(弘和) 3년 |
1384년 | 시토쿠(至徳) 원년(2월 27일) | 겐츄(元中) 원년(4월 28일) |
1385년 | 시토쿠(至徳) 2년 | 겐츄(元中) 2년 |
1386년 | 시토쿠(至徳) 3년 | 겐츄(元中) 3년 |
1387년 | 카케이(嘉慶) 원년(8월 23일) | 겐츄(元中) 4년 |
1388년 | 카케이(嘉慶) 2년 | 겐츄(元中) 5년 |
1389년 | 코안(康安) 원년(2월 9일) | 겐츄(元中) 6년 |
1390년 | 메이토쿠(明徳) 원년(3월 26일) | 겐츄(元中) 7년 |
1391년 | 메이토쿠(明徳) 2년 | 겐츄(元中) 8년 |
1392년 | 메이토쿠(明徳) 3년 | 메이토쿠(明徳) 3년(윤10월 5일[5]) |
4. 2. 사회
잦은 전쟁으로 인해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고다이고 천황이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화친을 맺고 삼종신기를 건네준 뒤 요시노로 가서 남조 정권을 수립하고 북조에 건네준 삼종신기는 위조품이라고 선언하면서 혼란은 더욱 커졌다.[21] 1351년에 화약을 맺었으나,[21] 남조의 군대가 교토를 공격하면서 화약은 곧 깨졌다. 막부 군대가 교토를 수복하자, 남조는 1353년에 다시 교토로 진격했다. 고코곤 천황은 망명 생활을 해야 했고, 1354년 12월 24일에는 남조의 반격으로 다시 교토를 탈출해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막부 군대가 1362년에 교토를 완전히 수복할 때까지 남조는 총 4회나 교토를 점거하였다.참조
[1]
서적
A Topical History of Japan
https://books.google[...]
UM Libraries
[2]
서적
Japanese Historians and the National Myths
https://books.google[...]
UBC Press
[3]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Reconfiguring modernity: concepts of nature in Japanese political ideology
https://books.google[...]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Embracing Defeat: Japan in the Wake of World War II
https://archive.org/[...]
[15]
서적
Jinnō Shōtōki
[16]
서적
Jinnō Shōtōki
[17]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https://books.google[...]
[18]
서적
[19]
간행물
[[師成親王|恵梵]]書写『[[新葉和歌集]]』奥書、「南部文書」所収[[北畠顕信]]書状など。
[20]
간행물
吉野
日本書房
[2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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