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니스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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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안니스 7세는 비잔틴 제국의 황족으로, 아버지 안드로니코스 4세가 반란에 실패한 후 시력을 잃는 형벌을 받았으나 회복했다. 그는 1376년 아버지의 찬탈로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1379년 폐위되었다. 이후 부황제로서 셀림브리아를 통치했으며, 1390년 오스만 제국과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황위에 올랐으나, 5개월 만에 폐위되었다. 이후 마누엘 2세와 화해하고 테살로니카의 데스포테스로 임명되어 자율적인 통치를 했으며, 140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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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니스 7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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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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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로마인의 황제 |
출생 | 1370년 |
사망 | 1408년 9월 22일 (38세) |
사망 장소 | 테살로니카 |
통치 | |
동로마 황제 | 재위: 1390년 4월 14일 – 1390년 9월 17일 이전: 요안니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이후: 요안니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
섭정 | 1377년 (공동 황제) |
섭정 유형 | 선포 |
테살로니카의 동로마 황제 | 재위: 1403년 – 1408년 9월 22일 이전: 없음 이후: 안드로니코스 팔라이올로고스 (테살로니카의 데스포트) |
섭정 유형 | 공동 황제 |
섭정 | 안드로니코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1403년–1407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이리니 가틸루시오 |
왕조 |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
아버지 | 안드로니코스 4세 팔라이올로고스 |
어머니 | 불가리아의 케라차 |
자녀 | 안드로니코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
2. 생애
요안니스 7세는 황위 계승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373년 아버지 안드로니코스 4세가 할아버지 요안니스 5세에게 반역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면서 그 여파로 어린 나이에 시력을 잃었다. 다행히 시술이 불완전하게 이루어져 아버지처럼 나중에 시력을 회복했다.
1376년 아버지 안드로니코스 4세가 황위 찬탈에 성공하자 공동 황제이자 황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3년 후 아버지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쫓겨나 트라키아 연안의 셀림브리아로 도망쳐 오스만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138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셀림브리아에 머물며 권력 탈환의 기회를 엿보았다. 1390년 바예지드 1세(재위 1389년-1403년)와 제노바인의 지원을 받아 할아버지를 공격하여 수도에서 추방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 4월 14일에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찬탈은 아버지 안드로니코스 때보다 더 오스만 제국의 힘에 의존했으며, 수도 시민들의 지지는 극히 낮았기 때문에, 소수의 신하를 동원하여 황제에 대한 환호(황제 즉위 시 관례)를 강요해야 했다. 베네치아의 지원을 받은 할아버지 요안니스 5세는 테살로니키 함락(1387년) 이후 유랑하던 삼촌 마누엘 2세와 합류하여 요안니스 7세를 공격했다. 요안니스 7세의 정권은 지지했던 오스만 제국이 손을 떼면서 9월 17일에 5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수도에서 쫓겨난 요안니스는 오스만 제국에 구원받아 그들의 보호 아래 셀림브리아에 정착했다. 1397년 이전, 아마도 1390년 이른 시기에 레스보스 섬 영주 프란체스코 2세 가틸루시오의 딸 이레네 가틸루시오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안드로니코스 5세 (1400년 - 1407년)가 태어났다.
1399년 오스만 제국에 포위된 수도를 떠나 서유럽으로 향하게 된 마누엘 2세는 조카 요안니스와 화해하여 요안니스가 마누엘 부재 기간 동안 섭정을 맡는 것으로 합의했다. 요안니스는 섭정 기간동안 심해지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 앞에서 중신들과 은밀히 수도 개성(開城) 협상 계획을 꾸몄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고 해체되자 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포위 압박과 멸망의 위기에서 해방되었다. 급히 귀국한 마누엘 2세는 오스만 왕자 쉴레이만 첼레비와 협정을 맺어 수도 근교의 트라키아 영토, 테살로니키와 주변 연안 지역의 반환, 세비(歲費) 지불을 받아냈다. 그리고 마누엘은 요안니스에게 테살로니키의 행정권 위임을 약속했다. 후에 이 약속은 요안니스가 오스만 제국과의 개성 협상을 진행했다는 것이 드러나 파기되었기 때문에, 장인 가티루시오와의 연계로 테살로니키를 군사 점령했다는 설도 있다. 이 사이의 사정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점이 많지만, 요안니스의 테살로니키 통치가 시작된 것은 확실하다.
1407년 아들이자 황위 계승자인 안드로니코스가 요절했다. 요안니스는 이 아들에게 야심을 품으려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죽음에 실망하여 죽음을 앞당겼다. 다음 해 1408년 9월 22일 테살로니키에서 사망했다. 마누엘 2세는 즉시 시를 확보하고 그 행정을 자신의 셋째 아들 안드로니코스에게 위임했다.
요안니스 7세는 아버지 안드로니코스 4세와 더불어 야심가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오스만 제국과 제노바인의 꼭두각시이기도 했다. 그의 야심의 근원은 아마도 자신의 눈이 멀게 된 것, 그리고 아버지가 실의 속에 죽은 것에 대한 복수심이었을 것이다.
2. 1. 어린 시절과 배경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는 1370년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와 불가리아 황제 이반 알렉산더르의 딸인 불가리아의 케라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황제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재위 1341년-1391년)의 장남이었으며, 따라서 비잔티움 제국의 정통 후계자였다.
1259년/1261년부터 권력을 잡고 있던 팔레올로고스 왕조는 종종 내분으로 고통받았으며, 제국의 황제들과 왕자들은 종종 서로 협력할 수 없었고, 이는 제국에 해를 끼쳤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주요 적은 14세기 내내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정복한 오스만 제국이었다. 요안니스 5세는 심지어 오스만 술탄 무라드 1세(재위 1362년-1389년)에게 조공을 바치는 봉신으로 섬기기로 동의했다. 지정학적 역경에도 불구하고, 당시 비잔티움과 오스만 귀족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요안니스가 무라드 1세와의 봉신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아나톨리아 원정에 참전하는 동안, 안드로니코스와 무라드 1세의 아들 중 한 명인 사브즈 베이는 아버지에 대항하여 동시다발적인 반란을 공모했다. 두 왕자는 패배하여 몇 달 안에 체포되었고 투옥되었으며, 아버지들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 안드로니코스와 사브즈는 혹독한 처벌을 받았다. 사브즈는 무라드 1세에게 눈이 멀고 참수되었으며, 술탄은 요안니스 5세에게 그의 아들의 눈을 멀게 하라고 명령했지만, 비잔티움 황제는 이를 꺼려 부분적으로만 따랐다. 안드로니코스는 부분적으로만 눈이 멀었고, 한쪽 눈만 잃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세 살에 불과했던 안드로니코스의 어린 아들 요안니스, 즉 훗날의 요안니스 7세도 같은 방식으로 부분적으로 눈이 멀었다고 한다. 또한 안드로니코스는 왕위 계승권을 잃었고, 그의 동생인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가 요안니스 5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아네마스 감옥에 가족과 함께 투옥된 안드로니코스는 1376년 7월 아내, 아들과 함께 갈라타로 탈출하여, 금각만 건너편에 있는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지에서 제노바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제노바인들은 최근 테네도스 섬을 경쟁국인 베네치아 공화국에 양도하여 상업적 이익을 해친 요안니스 5세보다 안드로니코스를 선호했다. 안드로니코스는 또한 반란 행위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사회의 상당 부분의 지지를 유지했으며, 같은 해 8월 12일에 제노바와 오스만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요안니스 5세와 마누엘은 투옥되었고, 안드로니코스는 3년 동안 황제로 통치하다가 탈출하여 그를 폐위시켰다. 아버지의 통치 기간(1376년 8월 12일 – 1379년 7월 1일) 동안 요안니스 7세는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으며, 아마도 1377년에 선포되었을 것이다. 폐위된 후에도 안드로니코스는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갈라타에 머물면서 수도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안드로니코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제들 사이의 대립은 1381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안드로니코스와 그의 아들 요안니스가 요안니스 5세의 후계자가 된다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또한 안드로니코스는 다시금 부황제로 인정받았으며, ''바실레우스''(황제)라는 칭호를 유지하고 사용할 수 있었다. 안드로니코스는 또한 1382년에 셀림브리아 주변의 토지를 분봉지로 받았다.
안드로니코스는 1385년 6월 25일 또는 28일에 사망하여 요안니스 5세보다 먼저 사망했다. 요안니스 7세는 아버지의 셀림브리아 주변의 토지를 상속받았고, 1381년 협정에 따라 ''바실레우스'' 칭호를 사용할 권리도 상속받아 비잔티움 제국의 부황제가 되었다. 그는 또한 요안니스 5세의 정당한 후계자라는 아버지의 주장도 상속받았다. 요안니스 7세는 부황제의 지위에서 오스만 제국, 특히 바예지드 1세의 즉위(1389년) 이후, 그리고 제노바인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제노바인들의 지원은 요안니스 5세의 눈에 띄었다. 1387년에서 1391년 사이에 요안니스 5세는 갈라타의 주민들이 자신에게 적절한 경의를 표하지 않고 요안니스 7세를 수석 황제로 칭송하고 인사하는 것에 대해 제노바인들에게 불만을 제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 2. 제위 찬탈과 통치 (1390년)
1385년, 아버지 안드로니코스 4세가 사망하자 요안니스 7세는 셀림브리아 주변의 토지와 '바실레우스' 칭호를 상속받고 비잔티움 제국의 부황제가 되었다. 1390년, 요안니스 7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와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 4월 14일에 황제로 즉위했다.
당시 20세였던 요안니스 7세는 마누엘 2세가 아나톨리아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스스로를 유일한 황제로 선포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동시대 러시아 연대기 작가인 스몰렌스크의 이그나티우스에 따르면, 1390년에는 요안니스 7세에 대한 여론이 강하게 형성되었다고 한다. 요안니스 7세는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와 제노바의 지지를 확보했는데, 포위 직전(아마도 1389년 말) 그는 직접 제노바에 가서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육로로 비잔틴 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요안니스 7세는 불가리아를 거쳤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곳에서 비딘과 터르노보의 불가리아 차르인 이반 스라치미르와 이반 시쉬만의 지원을 구했을 수도 있다.
외부 동맹 외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 내 인구의 상당수가 요안니스 7세를 지지했고,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은밀한 개입을 승인했을 수도 있다. 요안니스는 1390년 4월 14일에 도시에 입성했는데, 짧은 포위 공격은 평민들이 카리시우스 문을 힘없이 열어 그를 들여보내면서 끝났다. 약간의 강압이 사용되었지만, 곧 도시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요안니스 7세를 황제로 인정하고 칭송하며 그의 통치에 복종했다.
요안니스 7세가 찬탈 당시 '안드로니코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동시대 증거가 있다. 스몰렌스크의 이그나티우스는 요안니스 7세의 군인들이 "Polla ta eti Ioannou!" 대신 "Polla ta eti Andronikou!"를 외쳤고, 1390년 갈라타의 지출 기록에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Andronico Paleologo''라고 언급되어 있다. 요안니스 7세는 1385년에 아버지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혹은 1390년에 왕좌 찬탈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이 이름을 채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실제 통치 기간 동안에는 출생 이름으로 통치했으며, 서명한 조약과 동시대 비잔틴 작가들의 기록에서도 일관되게 '요안니스'로 언급된다.
요안니스 7세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오랫동안 통치할 것이라고 믿었음을 시사하는 몇 안 되는 활동을 수행했다. 6월에 그는 베네치아와 조약을 체결했고, 황제로서 Prostagma|프로스타그마grc(황제의 결정/명령)를 발행하고 동전을 주조했다. 또한 마카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로 복귀시키는 것을 지원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낮은 지지 속에 5개월 만에 마누엘 2세와 요안니스 5세에 의해 전복되었다. 성 요한 기사단과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마누엘은 9월 17일에 요안니스 7세를 폐위시키고 요안니스 5세의 통치를 복원했다.
2. 3. 셀림브리아 통치와 마누엘 2세와의 화해 (1390년 ~ 1403년)
요안니스 7세는 폐위된 후 오스만 제국의 보호 아래 셀림브리아에 정착했다. 1397년 이전, 아마도 1390년 이른 시기에 요안니스는 레스보스 섬 영주 프란체스코 2세 가틸루시오의 딸인 이레네 가틸루시오와 결혼했다.
1399년, 오스만 제국에 포위된 수도를 떠나 서유럽으로 원조를 요청하러 가게 된 마누엘 2세는 조카 요안니스 7세와 화해를 시도하여, 요안니스 7세가 마누엘 2세 부재 기간 동안 섭정을 맡는 것으로 합의했다. 요안니스 7세는 섭정 기간 동안 베네치아 및 제노바와 조약을 체결하고, 총대주교 마태오 1세를 폐위시키는 등 황제의 권한을 행사했다. 마태오 1세는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많은 적을 두고 있었고, 반 마태오 파벌은 요안니스 7세를 설득하여 그를 폐위시켰다. 그는 후에 마누엘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면서 복위되었다. 비잔틴 제국에서 총대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최종 권한은 황제에게만 있었다.
2. 4. 테살로니키 통치 (1403년 ~ 1408년)
1403년 마누일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자, 요안니스 7세는 그에게 권력을 돌려주었다. 일부 동시대 사람들은 요안니스 7세가 권력 이양을 거부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요안니스 7세는 3년 반 동안 비잔틴 수도를 통치한 후 자신의 책임을 기꺼이 내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마누엘 2세는 요안니스 7세의 결정 중 일부를 번복했는데, 예를 들어 오스만 제국에게 종교적, 재정적 특권을 부여한 요안니스 7세와 오스만 제국 간의 조약을 부인했다.
1403년 마누엘 2세 귀국 후, 그와 요안니스 7세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마누엘 2세는 요안니스 7세가 더 이상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를 황제 직위에서 완전히 배제하려 했다. 그는 요안니스 7세에게서 '바실레우스' 칭호를 박탈하고, 셀림브리아와 테살로니카에서 약속한 영토를 빼앗았다. 마누엘 2세가 요안니스 7세를 배제한 이유는 요안니스 7세가 1402년 바예지드 1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항복에 대해 협상을 시작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당대 카스티야 여행가 루이 곤잘레스 데 클라비호는 요안니스 7세와 바예지드 1세가 바예지드 1세가 티무르 제국을 물리치면 요안니스 7세가 도시를 항복하기로 합의했다고 기록했다. 특히 요안니스 7세가 섭정으로 재임하는 동안 충성을 증명하고 오스만 제국의 왕자 쉴레이만 첼레비와 매우 유리한 조약을 체결했기에 그러한 합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독일 역사가 페터 비르트에 따르면, 마누엘 2세가 귀국한 후 요안니스 7세와 마누엘 2세 사이에 다시 불화가 일어난 이유는 마누엘 2세가 자신이 무시당하고 이러한 중요한 협상에서 배제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일 수 있다.
요안니스 7세는 굴욕적인 모습으로 렘노스 섬으로 보내졌지만, 근처 레스보스 섬에 있는 장인 프란체스코 2세 가틸루시오에게 도망쳤다. 그 직후인 1403년 9월, 요안니스 7세와 프란체스코 2세는 테살로니카에 대한 해상 원정을 시작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원정은 마누엘 2세의 통제 하에 있는 도시를 탈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오스만 제국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기에 그들로부터 테살로니카를 해방하려는 것이었다. 요안니스 7세와 프란체스코 2세는 레스보스로 돌아왔고, 당시 프랑스 기사 부시코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부시코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서 마누엘 2세로부터 도시를 무력으로 탈취할 계획을 세웠다.
비록 결국 도시를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요안니스 7세의 과감한 행동은 황족들 간의 새로운 정치적 합의를 요구했다. 그 결과 요안니스 7세와 마누엘 2세 사이에 1403년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1399년에 그들이 했던 합의와 유사했다. 마누엘 2세의 양아들인 요안니스 7세는 첫 번째 공동 황제로 남았고, 마누엘 2세의 친아들인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는 두 번째 공동 황제를 유지했다. 요안니스 7세의 테살로니카에 대한 권리 또한 확정되었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던 클라비호는 마누엘 2세와 요안니스 7세 모두 완전한 황제로 지정되었으며, 마누엘 2세 사후 요안니스 7세가 단독 통치하고, 그 뒤를 마누엘 2세의 아들 요안니스 8세가 이으며, 다시 요안니스 7세의 갓 태어난 아들 안드로니코스 5세 팔레올로고스가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 합의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격렬했던 것으로 보인다. 클라비호는 두 황제 중 누구도 이 합의를 존중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적었다.
요안니스 7세는 테살로니카에서 독자적인 금고를 만들고, 자신의 초상화가 새겨진 동전을 발행하는 등 자율적인 통치를 했다. 1407년, 아들 안드로니코스 5세가 사망하고, 1408년 9월 22일, 요안니스 7세도 테살로니카에서 사망했다.
3. 유산
요안니스 7세는 테살로니키에서 긍정적으로 기억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테살로니카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항하는 일종의 대항 수도 역할을 한 마지막 시기였다. 그는 테살로니키의 방어를 강화하고 지역 교회의 재산을 규제하는 데 기여했다.
테살로니카의 시메온은 요안니스 7세가 "모든 면에서 트리에메와 외벽으로 [도시를] 요새화"했으며 "[도시를] 훌륭한 규정과 제도로 장식"했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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