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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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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팔리는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로 표기되는 불교 인물로, 석가모니의 제자이자 율(계율) 전문가로 묘사된다. 그는 수드라 계급 출신으로, 석가모니의 제자들과 함께 출가하여 승가 율법 제정에 기여했다. 우팔리는 계율을 엄격하게 실천하며 승가 내 규율 위반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역할을 했으며, 제1차 불교 결집에서 율장을 편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계보는 율을 옹호하는 계보로 이어져 중국 율종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불교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우팔리는 율장 전문가로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가르침은 다양한 경전에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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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팔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우팔리, 보드가야, 인도
다른 이름'율장의 으뜸'(; '율에 가장 뛰어남' ()
종교불교
학파모두, 그러나 주로 팔리어 불교에서 논의됨
혈통비나야다라
존칭장로
스승붓다, Kappitaka
계승자Dāsaka
제자Sattarasavaggiyā, Dāsaka
알려진 이유승가 규율에 대한 전문성, 제1차 공의회 동안 승가 규율 검토
출가 장소아누피야
발의자붓다
시대초기 불교
일본어 이름優波離 (우파리)
일본어 (로마자)Upāli
범어 이름Upāli
팔리어 이름Upāli
존칭지율제일
출생지코살라국카필라성
종파성문 (초기 불교)
스승석가모니

2. 이름

산스크리트어 Upāli|우팔리sa, 팔리어 Upāli|우팔리pi[1], 다른 음차로는 우파리, 오파리, 오파이, 화리 등이 있으며, 의역하면 근집, 근취 등이다.

3. 초기 생애 및 출가

우팔리는 고대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하층 계급인 수드라 출신으로, 카필라바스투(카필라성)에서 샤카족 왕자들의 이발사였다. 일부 기록에서는 석가모니가 태자였을 때 그의 집사였다고도 전해진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카필라성으로 돌아온 후, 아나율(아누룻다), 바드리카 등 여러 왕자들이 출가할 때 우팔리도 그들을 따라 아누피야 숲에서 부처에게 출가했다.

근본설일체유부 율장 등에 따르면, 왕자들은 우팔리에게 모든 소유물을 넘겨주었으나, 우팔리는 왕자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쓸까 두려워 출가를 결심했다. 팔리어 버전에서는 왕자들이 우팔리가 먼저 출가하도록 허락하여, 출가 순서에서 그에게 선배 자격을 부여하고 계급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애착을 버렸음을 강조한다.

3. 1. 샤카족의 자존심과 우팔리

샤카족 왕자들의 이발사였던 우팔리는 수드라 출신이었다. 석가가 카필라성에 돌아와 여러 왕자들이 출가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팔리도 왕자들을 따라 아누피야 마을의 석가를 찾아갔다. 그는 왕자들보다 먼저 출가했고, 왕자들은 석가의 명에 따라 우팔리에게 예배했다. 이를 본 석가는 "샤카족의 오만한 마음을 잘 꺾었다"라고 칭찬했다.

틸라우라코트의 유적, 카필라바스투였을 가능성이 있는 두 장소 중 하나


인도 학자 T.W. 리스 데이비즈는 우팔리를 "고타마가 계급의 중요성을 무시한 결과의 현실에 대한 놀라운 증거"라고 평가했다.[1] 이는 불교에서 계급이나 출신보다 수행과 깨달음이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된다.

4. 승가에서의 역할 및 계율 전문가

모든 불교 학파의 문헌에서 우팔리는 계율(vinaya)과 파티목차(pratimokṣa, 승가 율)에 정통한 것으로 묘사되며, 부처는 그를 계율을 기억하는 사람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선언했다. 그는 '율장의 보고'라고 불렸으며, 일부 불교 학파에서는 보살(bodhisattva)보살계 전문가로 여겨지기도 했다. 우팔리는 계율을 엄격하게 실천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며, 승려들은 그에게서 계율을 배우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그는 승가의 규율 위반 혐의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데 자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례로, 새로 서품받은 비구니가 임신한 것이 발견되자, 승려 데바닷타는 그녀가 비구니가 되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부처는 우팔리에게 재조사를 요청했고, 우팔리는 비사카 등 여러 재가자의 도움을 받아 그 비구니가 비구니가 되기 전에 남편과 관계를 맺어 아이를 가졌으므로 무죄라고 결론지었다. 부처는 이 문제에 대한 우팔리의 신중한 고려를 칭찬했다.

또 다른 사건으로, 승려 바루카차는 여자와 성관계를 맺는 꿈을 꾸는 것이 승복을 벗어야 하는 위반 행위에 해당하는지 우팔리에게 자문했고, 우팔리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다. 승려 아쥬카의 경우, 그는 부동산 분쟁에 대해 판결했는데, 한 부유한 거주자가 자신의 유산을 경건한 조카와 자신의 아들 중 누구에게 상속해야 할지 의심하여 아쥬카에게 둘 중 신앙심이 깊은 사람을 초대하도록 요청했다. 아쥬카는 조카를 초대했고, 이에 화가 난 아들은 아쥬카가 편파적이라고 비난하며 아난을 찾아갔다. 아난다는 아쥬카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고 아들을 더 정당한 상속자로 판단했지만, 우팔리가 개입하여 아쥬카를 지지하는 판결을 내렸다. 그는 아난다에게 재가자를 초대하는 행위는 승가의 규율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고, 결국 아난다는 우팔리에게 동의했다. 부처는 이 사건을 처리한 우팔리를 칭찬했다.

4. 1. 제1차 불교 결집과 율장 편찬

동굴에 많은 승려들이 앉아 있고, 그 중 한 명은 벤치에 앉아 있는 벽화
20세기 후반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제타바나 공원, 나와 제타바나 사원 벽화. 초기 불교 결집 장면.


석가모니 입멸 후 열린 제1차 불교 결집에서, 마하가섭의 주도로 아난을 낭송할 때, 우팔리는 계율을 낭송하여 율장 편찬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우팔리는 제1차 불교 결집 당시 44세에 출가했다. 결집에서 우팔리는 승려와 비구니의 ''비나야''(계율)를 암송하도록 요청받았는데, 여기에는 ''빠띠목카''(계율 모음)가 포함되었으며, 이에 따라 Vinayapiṭaka(수도 규율에 관한 텍스트 모음)이 편찬되었다.

우팔리는 부처가 어떤 규칙을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만들었는지, 파생된 부차적인 규칙과 규칙이 깨진 조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대중부의 제1차 결집 기록에 따르면, 우팔리는 부처의 시자인 아난다에게 여러 잘못을 묻는 역할을 했다.

우팔리와 그의 제자들은 ''사타라사바기야''라고 불렸으며, 이들은 수도 규율 모음을 바나카의 방식으로 보존하고 암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부처의 열반 16년 후, 우팔리는 다사카라는 제자를 출가시켰는데, 그는 수도 규율에 대한 전문 지식을 우팔리로부터 물려받았다.

5. 율 옹호자 계보와 한국 불교

우팔리의 계승자들은 '율을 옹호하는 자' 또는 '율의 수호자'로 불리는 계보를 형성했다.[1] 이들은 초기 불교 경전에서 ''율''에 대한 숙련도와 엄격함으로 알려진 승려들이었다. 4~5세기 실론에서 붓다고사는 우팔리와 다른 ''율 옹호자''를 마하비하라 전통의 중요한 특징으로 확립했으며, 이들의 계보와 연관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버마에도 영향을 미쳤다. 점차 ''율 옹호자''는 계보가 지역 역사와 통합되면서 더 우수한 전통의 징표로 여겨졌고, 나중에는 ''율''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판사이자 중재자의 지위가 되었다.

우팔리의 계보는 현대 학자들이 "점 기록"으로 알려진 시간 기록 방식 때문에 학문적 주목을 받았다. 중국 자료에 따르면 우팔리와 그의 계승자들은 제1차 불교 결집 이후 매년 원고에 점을 찍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 전통은 일부 현대 학자들이 부처의 열반을 계산하는 데 사용했지만, 현재는 역사적으로 가능성이 낮다고 밝혀졌다.

5. 1. 율 옹호자 계보

우팔리의 계승자들은 '율을 옹호하는 자' 또는 '율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계보를 형성했다.[1] ''율 옹호자''는 초기 불교 경전에서 특히 ''율''에 대한 숙련도와 엄격함으로 알려진 승려들이었다. 4~5세기 실론에서 붓다고사는 우팔리와 다른 ''율 옹호자''를 마하비하라 전통의 중요한 특징으로 확립했으며, 이들의 계보와 연관되었다. 이러한 ''율 옹호자'' 계보 개념은 버마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올바른 계보에서 서품을 받은 사람만이 ''율 옹호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점차 ''율 옹호자''는 계보가 지역 역사와 통합되면서 더 우수한 전통의 징표로 여겨졌고, 나중에는 ''율'' 문제에 대한 공식적인 판사이자 중재자의 지위가 되었다.

우팔리의 계보는 현대 학자들이 "점 기록"으로 알려진 시간 기록 방식 때문에 학문적 주목을 받았다. 중국 자료에 따르면 우팔리와 그의 계승자들은 제1결집 이후 매년 원고에 점을 찍는 관습이 있었다. 각 계승자는 이 전통을 기원후 489년까지 지속했으며, 이 해에 설일체유부 학자 상가바드라가 원고에 마지막 점을 찍었다고 한다. 이 전통은 일부 현대 학자들이 부처의 열반을 계산하는 데 사용했지만, 현재 역사적으로 가능성이 낮다고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 옹호자''와 관련된 데이터는 인도학자 리처드 곰브리치가 제안한 것과 같은 부처의 생애와 죽음의 시기에 대한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된다.

6. 기타

우팔리는 고대 및 중세 인도에서 숭배 대상이었으며, 특히 ''율장''을 전문으로 하는 승려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다. 그는 팔대 제자 중 한 명이며, 미얀마 의식에서 존경받는다.

붓다와 우팔리는 승가의 규율(결정 및 회의의 적법성, 경고와 보호 관찰 시스템을 포함)에 관해 많은 논의를 하였다. 이 내용은 주로 후기 ''비나야'' 텍스트인 ''파리바라''에서 발견된다. 바레우는 붓다와 우팔리가 분열에 관해 나눈 대화가 ''비나야피타카''에서 이 주제에 대한 전통의 기원이라고 제안했다. 설일체유부 전통의 ''비나야'' 텍스트인 ''우트라그란타''와 5세기 대승 불교에서 영감을 받은 ''우팔리파리프르차''는 팔리어 ''파리바라''와 거의 동일한 질문을 다룬다. 다만, 후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팔리어 텍스트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다. 투르키스탄 산스크리트 버전의 ''우트라그란타''는 팔리어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질문이 우팔리로부터 비롯되었고, 어떤 것이 그의 명성 때문에 그에게 귀속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기술적인 논의 외에도, 팔리어 ''밀린다왕문경''에 우팔리의 가르침이 언급되어 있다.

6. 1. 이전 생애

Upāli|우팔리sa는 이전 천 번의 생 동안 모든 권능을 가진 전륜성왕이었고, 또 다른 천 번의 생 동안 신의 왕이었다. 그러나 이전 생에 벽지불(pratyekabuddha|sa)을 모욕한 업으로 인해 고타마 붓다 시대에는 낮은 카스트 이발사로 태어났다.[1]

6. 2. 유산

모든 불교 학교 문헌에서 우팔리는 계율(vinaya|위나야pi)과 파티목카(pratimokṣa|프라티목샤sa; 승려 계율) 전문가로 묘사되며, 부처는 그를 계율을 기억하는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선언했다(; ). 그는 '율장의 보고'()라고 불렸다. 일부 학교에서는 그를 '보살'(; 미래 부처)의 보살계 전문가로도 여겼다.

우팔리는 고대 및 중세 인도에서 숭배 대상이었으며, 특히 ''율장''을 전문으로 하는 승려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졌다. 그는 팔대 제자 중 한 명이며, 미얀마 의식에서 존경받는다.

6. 3. 관련 경전

빨리 전통에서, 수많은 담론은 붓다와 우팔리가 승가의 규율(결정 및 회의의 적법성, 경고와 보호 관찰 시스템을 포함)에 관해 논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내용의 상당 부분은 후기 ''비나야'' 텍스트인 ''파리바라''에서 발견된다. 바레우는 붓다와 우팔리가 분열에 관해 나눈 대화가 ''비나야피타카''에서 이 주제에 대한 전통의 기원이라고 제안했다. 설일체유부 전통의 ''비나야'' 텍스트, ''우트라그란타''와 5세기의 대승 불교에서 영감을 받은 ''우팔리파리프르차''는 팔리어 ''파리바라''와 거의 동일한 질문을 특징으로 한다. 비록 후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팔리어 텍스트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반면에, 투르키스탄 산스크리트 버전의 ''우트라그란타''는 팔리어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련의 질문과 관련하여, 이 질문들 중 어떤 것이 우팔리로부터 비롯되었고, 어떤 것이 그의 명성 때문에 그에게 귀속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기술적인 논의 외에도, 팔리어 ''밀린다왕문경''에 언급된 우팔리의 가르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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