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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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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운테이는 모노노베 씨의 후예인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가 설립한 교육 기관으로, 781년 사망 기사에 창설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야카쓰구는 자신의 저택을 아축사로 개축하고, 한적을 중심으로 한 서적을 소장하여 열람을 허가했는데, 이것이 운테이의 시작이다. 유불일체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의 묘제를 체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속일본기》에 운테이가 존속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야카쓰구 사후 헤이안쿄 천도와 이소노카미 씨의 몰락으로 쇠퇴하여, 828년에는 이미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나라 시립 이치조 고등학교 부지가 운테이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며, 학교 내에 석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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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테이
지리 정보
기본 정보
명칭운테이 (芸亭)
위치나라현나라시 호케지초
설명유력 귀족이었던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石上宅嗣)가 자신의 저택에 설치한 서고
역사
개설 시기772년경
역할서적 열람, 필사 등을 위한 시설
특징국내 최초의 공개 도서관으로 여겨짐
명칭 관련 정보
'芸'의 의미본래 '藝'(예)의 신자체와는 다른 글자임
'芸亭'의 발음'게이테이'는 잘못된 발음임
관련 시설
芸亭院 (운테이인)운테이와 관련된 시설 (추가 정보 필요)

2. 역사

모노노베씨의 후예인 이소노카미씨 출신의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토벌 등에 활약하여 대납언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열심인 불교 신자였다.[6]

만년에 야카쓰구는 자신의 저택을 아축사(阿閦寺, あしゅくじ일본어)로 개축하면서, 부지 한 쪽에 한적을 중심으로 한 서적을 소장하고 희망자에게 열람을 허가했는데, 이것이 운테이의 시작이라고 한다.[6] 운테이는 유불일체 사상에 기초하여 불교의 묘제를 체득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는 설이 있다.[6]

열람자 중 한 명인 가야노 도요토시는 학문에 대한 열의가 깊어 야카쓰구로부터 직접 지식을 전수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운테이는 일종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6] 야카쓰구는 도요토시를 운테이에 초대해서 몇 년에 걸쳐 연구를 시켰다.[6]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역사서 《속일본기》에는 덴오 원년(781년) 6월 야카쓰구의 사망 기사에 그의 업적과 함께 운테이 창설 경위를 적은 글이 전재되어 있다.

{{quotation|內外兩門本爲一體. 漸極似異 善誘不殊. 僕捨家爲寺 歸心久矣. 爲助內典 加置外書. 地是伽藍 事須禁戒. 庶以同志入者 無滯空有 兼忘物我 異代來者 超出塵勞 歸於覺地矣.

'''〔현대어역〕'''

내(內: 불교)와 외(外: 유교) 그들의 뿌리는 같다. 점짐작과 급진적이라고 하는 다름은 있었어도 잘 이끌어 갈 수 있으면 (그들의 길은) 디를 바는 없다. 나가 이 집을 기진해서 절으로 해서 불교에 신앙을 깊이면서부터 오래 지다. 내전(內典: 불교의 경전)을 보다 이해하기 쉽기 위해서 외서(外書: 유교등 그 밖의 분야의 서적)도 아울러 여기에 놓을 것으로 하다. 여기는 (부교 수업을 위한) 절이니 그 수업을 바해함만 아무 갓도 필연코 금계하는 것아다. 아무쪼록 나과 같은 뜻 (불교 신앙) 을 품어 여기에 온 분들에게는 (여러 견해에 있는) 공(空)인가 유(有)인가 (고 하는 사소한 일)를 논구해 (그 초지(初志)을) 지체하게 하는 것 없어 자기 욕망을 잊어 (학문이나 수업에 힘써) 후진들에게 세속 노고 따위 초월해 해오 경지에 이르기 바라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야카쓰구의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과 운테이의 이념을 알 수 있다. 《속일본기》가 완성된 엔랴쿠 16년(797년) 당시에는 운테이가 존속하고 있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야카쓰구 사후 3년 뒤 나가오카쿄로, 그 후 헤이안쿄천도가 이루어지면서 헤이조쿄는 쇠퇴하였다. 이소노카미씨 또한 야카쓰구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면서, 운테이 역시 황폐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덴초 5년(828년) 구카이가 슈게이슈치인을 설치했을 때 쓰인 〈슈게이슈치인시키〉에는, 기비노 마키비의 "이교원"과 함께 운테이를 언급하며 "시작이 있어 끝 없어, 사람들이 가 치워 그 터가 거칠어져 치워 있다"라고 적혀 있어, 이미 소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라시립 이치조 고등학교 대지 안 동쪽 국도 제24호선에 석비가 서 있다. (나라시 홋케지초)


현재의 나라시립 이치조 고등학교 부지가 운테이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며, 학교 내에 석비가 세워져 있다.

2. 1. 설립 배경

모노노베씨의 후예인 이소노카미씨 출신의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토벌 등에 활약하여 대납언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자 열심인 불교 신자였다.[6]

만년에 야카쓰구는 자신의 저택을 아축사(阿閦寺, あしゅくじ일본어)로 개축하면서, 부지 한 쪽에 한적을 중심으로 한 서적을 소장하고 희망자에게 열람을 허가했는데, 이것이 운테이의 시작이라고 한다.[6] 운테이는 유불일체 사상에 기초하여 불교의 묘제를 체득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는 설이 있다.[6]

열람자 중 한 명인 가야노 도요토시는 학문에 대한 열의가 깊어 야카쓰구로부터 직접 지식을 전수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로 운테이는 일종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6]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역사서 《속일본기》에는 덴오 원년(781년) 6월 야카쓰구의 사망 기사에 그의 업적과 함께 운테이 창설 경위를 적은 글이 전재되어 있다.

{{quotation|內外兩門本爲一體. 漸極似異 善誘不殊. 僕捨家爲寺 歸心久矣. 爲助內典 加置外書. 地是伽藍 事須禁戒. 庶以同志入者 無滯空有 兼忘物我 異代來者 超出塵勞 歸於覺地矣.

'''〔현대어역〕'''

내(內: 불교)와 외(外: 유교) 그들의 뿌리는 같다. 점짐작과 급진적이라고 하는 다름은 있었어도 잘 이끌어 갈 수 있으면 (그들의 길은) 디를 바는 없다. 나가 이 집을 기진해서 절으로 해서 불교에 신앙을 깊이면서부터 오래 지다. 내전(內典: 불교의 경전)을 보다 이해하기 쉽기 위해서 외서(外書: 유교등 그 밖의 분야의 서적)도 아울러 여기에 놓을 것으로 하다. 여기는 (부교 수업을 위한) 절이니 그 수업을 바해함만 아무 갓도 필연코 금계하는 것아다. 아무쪼록 나과 같은 뜻 (불교 신앙) 을 품어 여기에 온 분들에게는 (여러 견해에 있는) 공(空)인가 유(有)인가 (고 하는 사소한 일)를 논구해 (그 초지(初志)을) 지체하게 하는 것 없어 자기 욕망을 잊어 (학문이나 수업에 힘써) 후진들에게 세속 노고 따위 초월해 해오 경지에 이르기 바라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야카쓰구의 불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과 운테이의 이념을 알 수 있다. 《속일본기》가 완성된 엔랴쿠 16년(797년) 당시에는 운테이가 존속하고 있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야카쓰구 사후 3년 뒤 나가오카쿄로, 그 후 헤이안쿄천도가 이루어지면서 헤이조쿄는 쇠퇴하였다. 이소노카미씨 또한 야카쓰구의 죽음과 함께 몰락하면서, 운테이 역시 황폐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덴초 5년(828년) 구카이가 슈게이슈치인을 설치했을 때 쓰인 〈슈게이슈치인시키〉에는, 기비노 마키비의 "니쿄인(二敎院)"과 함께 운테이를 언급하며 "시작이 있어 끝 없어, 사람들이 가 치워 그 터가 거칠어져 치워 있다"라고 적혀 있어, 이미 소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나라시립 이치조 고등학교 부지가 운테이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며, 학교 내에 석비가 세워져 있다.

2. 2. 운영 및 활동

이소노카미씨 출신의 이소노카미노 야카쓰구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토벌 등에서 활약하여 대납언까지 오른 인물로, 당시 대표적인 지식인이자 열렬한 불교 신자였다.[6] 만년에 그는 자신의 저택을 아축사(阿閦寺)로 개축하면서, 부지 한쪽에 한적을 중심으로 한 서적을 소장하고 희망자에게 열람을 허가했는데, 이것이 운테이의 시작이라고 한다.[6] 운테이 창설은 유불일체 사상에 의거하여 불교의 묘제를 체득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설이 있다.[6]

열람자 중 한 명인 가야노 도요토시는 학문에 대한 열의가 깊어 야카쓰구에게 직접 지식을 전수받았다고 전해진다.[8] 이러한 이유로 운테이는 일종의 교육기관으로서의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6]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역사서 《속일본기》에는 덴오 원년(781년) 6월 야카쓰구의 사망 기사와 함께 운테이 창설 경위를 적은 야카쓰구의 글이 전해져 온다.

{{quotation|내외(內外) 양 문(兩門)은 본래 일체(一體)이다. 점차 극에 달하면 다른 듯하지만 잘 이끌면 다르지 않다. 나는 집을 버리고 절로 삼아 마음을 귀의한 지 오래되었다. 내전(內典, 불교 경전)을 돕기 위해 외서(外書, 유교 등의 타 분야의 책)를 더하여 둔다. 땅은 곧 가람이며, 일은 마땅히 금하고 경계해야 한다. 바라건대, 뜻을 같이하여 들어오는 자는 공(空)과 유(有)에 머무르지 않고, 겸하여 물아(物我)를 잊고, 이대(異代, 후세)에 올 자는 진로(塵勞, 속세의 고생)를 초월하여 각지(覺地)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현대어 번역〉'''

내(內, 불교)와 외(外, 유교)는 그 근본이 같다. 점진성(漸進性)과 급진성(急進性)의 차이는 있지만, 능숙하게 이끌어 가면 (그 길은) 다르지 않다. 내가 집을 기부하여 절로 삼아 불교에 대한 신앙을 깊게 한 지 오래되었다. 내전(불교의 경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외서(유교 등의 다른 분야의 책)도 함께 두기로 한다. 여기는 (불교 수행을 위한) 절이므로, 그 수행을 방해하는 일은 무엇이든 금하고 경계해야 한다. 부디 나와 같은 뜻(불교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여기 온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생각의) 공(空)인가 유(有)인가 (하는 사소한 일)를 논하여 (뜻을) 머무르게 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잊고 (학문이나 수행에 힘쓰며), 후진들에게는 세속의 고생 등을 초월하여 깨달음의 경지를 열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글을 통해 야카쓰구의 불교 신앙과 운테이의 이념을 알 수 있다. 《속일본기》가 완성된 엔랴쿠 16년(797년) 당시에는 운테이가 존속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야카쓰구 사후 3년 뒤 나가오카쿄로, 이후 헤이안쿄천도가 이루어지면서, 이전 수도였던 헤이조쿄는 쇠퇴하였다. 이소노카미씨 역시 야카쓰구의 죽음과 함께 후지와라씨 등 다른 유력 귀족에게 밀려 몰락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운테이도 황폐화, 소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덴초 5년(828년) 구카이가 슈게이슈치인을 설치할 때 쓴 글에 따르면, 기비노 마키비의 "이교원"과 함께 운테이를 언급하며 "시작은 있었으나 끝이 없고, 사람은 떠나가고 흔적만 남았다"라고 기록하여, 당시 이미 소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나라시립 이치조 고등학교 부지가 운테이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며, 학교 내에 석비가 세워져 있다.

2. 3. 소멸

물부씨의 후예인 이소노카미 타쿠시는 후지와라 나카마로 토벌 등에서 활약하여 다이나곤에까지 올랐으며, 당시를 대표하는 지식인·문인이자 열렬한 불교 신자였다.[3] 만년에 자신의 옛 저택을 아슈쿠지(阿閦寺)로 개축하면서, 부지 한 구역에 고금의 한적을 중심으로 한 서적을 수장하여 희망자에게 열람을 허가한 것이 운테이의 시작이라고 여겨진다.[3]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역사서 『쇼쿠니혼기』에는 덴오 원년(781년) 6월의 타쿠시의 사망 기사와 함께, 타쿠시의 업적과 예정의 창설 경위를 적은 타쿠시의 글이 전재되어 있다. 『쇼쿠니혼기』가 완성된 엔랴쿠 16년(797년) 당시에는 예정이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타쿠시의 사망 3년 후 나가오카쿄로, 다음으로 헤이안쿄로의 천도가 이루어졌고, 옛 수도가 된 헤이죠쿄는 쇠퇴해갔다. 또한 이소노카미 씨도 타쿠시의 죽음과 함께 후지와라 씨 등 다른 유력 귀족에게 밀려 몰락해 갔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함께 예정도 황폐화·소멸의 운명을 겪은 것으로 여겨진다. 덴초 5년(829년)에 구카이가 종예종지원을 설치했을 때 쓰여진 「종예종지원식」의 문중에, 자신의 학교의 선구로서 기비노 마키비의 「이교원」과 함께 이소노카미 타쿠시의 「예정원」을 언급한 뒤, 예정의 현 상황을 「시작은 있었으나 끝이 없고, 사람은 떠나가고 흔적만 남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 당시에는 이미 소멸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현재의 나라 시립 이치조 고등학교 부지 내가 예정의 소재지로 추정되며, 동교 내에는 비문이 서 있다.

3. 현대의 위치

4. 명칭에 대한 고찰

'芸'를 '운'으로 읽는 것은 상용한자표에 없는 독음이지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원예예술의 '芸'(게이)는 과거에 '藝'라는 자체였으며, 당용 한자표의 공포에 의해 자형이 '芸'으로 고쳐진 글자이다. '芸亭'의 '芸'(운)은 芸/藝(게이)와는 다른 계열의 글자이며, '풀을 베다'(잡초를 베다)나 '루타'(서적의 벌레를 막는 데 사용하는 향초)의 의미를 가진 글자이다. 따라서, '芸'(운)과 '芸/藝'(게이)는 '''자형은 완전히 동일하지만 다른 의미를 가진 글자'''(동형 충돌)이다. 비슷한 예로, 欠(欠=켄과 欠/缺=케츠)나 缶(缶=후와 缶/罐=칸) 등이 있다(신자체#기존의 글자와의 충돌 참고).

일부 서적에서는 '芸'(운)의 활자 초두를 '十'을 가로로 두 개 나란히 한 4획으로 표현하여 芸/藝(게이)와 구별하고 있다. 이것은, 芸/藝(게이)는 상용한자이지만 '芸'(운)은 상용한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근거한 것으로, 그 때문에 초두를 상용한자표에 따르지 않고 강희자전에 엄밀하게 따라 4획으로 표현하여 '芸'(운)을 芸/藝(게이)와 구별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상용한자표는 자형과 음훈만을 정하고 자의를 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芸'(운)이 상용한자에 없는 글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상용한자표에 있는 글자의, 상용한자표에 없는 음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JIS X 0208에서는 자형이 같은 글자는 같은 문자 코드로 나타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芸'라는 자형의 글자는 '芸'(운)과 芸/藝(게이)를 모두 나타내며, 서로 구별할 수 없다.

어쨌든, '芸'(운)의 초두를 4획으로 표현하는 것은 '芸'(운)과 芸/藝(게이)를 굳이 구별하려는 의도에 의한 것이며, 원래는 단순한 활자 디자인 차이, 손글씨의 버릇 차이 정도이므로, 초두의 형태 차이에 의해 글자가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5. 평가

6. 대중문화 속 운테이

쓰쿠다 잇카(쓰쿠다 잇카/佃一可일본어)의 소설 『고켄 천황의 유언 - 게이테이 도서관 비문서』(주손보(수촌방/樹村房}}일본어, 2017년)에 운테이가 등장한다.[9][5]

참조

[1] 뉴스 西大寺旧境内から国内初の図書館開設者の肩書き木簡が出土 http://sankei.jp.msn[...] 産経ニュース 2009-12-03
[2] 웹사이트 芸亭(うんてい)とは - 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朝日新聞社 2017-10-09
[3] 서적 総合仏教大辞典 법장관 1988-01
[4] 문서 凌雲集에 수록된 豊年의 漢詩 작품은 小野岑守와 동수의 13首로, 嵯峨天皇에 차いで 많다
[5] 웹사이트 『孝謙女帝の遺言 芸亭図書館秘文書』 http://www.jusonbo.c[...] 樹村房 2018-04-06
[6] 서적 총합 불교 대사전(総合仏教大辞典) 호조칸(法藏館) 1988-01
[7] 뉴스 西大寺旧境内から国内初の図書館開設者の肩書き木簡が出土 http://sankei.jp.msn[...] 산케이 신문사(産経新聞社) 2009-12-03
[8] 문서 능운집에 수록된 도요토시의 한시 작품수은 오노노 미네모리(小野岑守)와 같은 13수이어 사가 천황(嵯峨天皇) 다음으로 많다.
[9] 웹인용 孝謙女帝の遺言 書籍データ 樹村房 http://www.jusonbo.c[...] 樹村房 2018-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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