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울리카 엘레오노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스웨덴의 공주이자 여왕으로, 칼 11세와 울리카 엘레오노라 애 단마르크 왕녀의 딸이다. 오빠 칼 12세가 스웨덴에 부재 중일 때 섭정으로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했으며, 칼 12세의 사망 후 왕위를 계승하여 여왕으로 즉위했다. 여왕으로서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에 동의하고, 대북방 전쟁 중 통치를 수행했다. 남편 프레드리크 1세에게 양위한 후에는 왕비로서 생활했으며, 그녀의 통치는 스웨덴 역사에서 "자유의 시대"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2. 어린 시절

젊은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초상화


칼 11세와 울리카 엘레오노라 애 단마르크 왕녀의 막내딸로 태어나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어린 시절에는 외향적이고 재능이 많았던 언니 헤드비그 소피아 공주에게 가려져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다. 언니들은 승마와 춤을 즐겼으나,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언니들의 활동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눈물을 보여 언니들에게 다소 얕보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친절하고 겸손하며 위엄 있는 태도를 지녔고, 좋은 자세와 아름다운 손을 가졌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지적이거나 외적으로 매력적인 인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할머니 헤드비히 엘레오노라는 그녀를 고집스럽다고 평가했으며, 불만이 있을 때는 아픈 척을 하여 표현하기도 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궁정 콘서트에서 언니 헤드비그 소피아가 노래를 부를 때 클라비어를 연주하며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3]

1693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할머니 헤드비히 엘레오노라의 보살핌을 받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언니 헤드비그 소피아를 더 아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평생 동안 국왕이었던 오빠 칼 12세와 매력적인 언니 헤드비그 소피아의 그늘 아래에서 살았다.

3. 공주와 섭정



칼 11세와 울리카 엘레오노라 애 단마르크 왕녀의 막내딸로 태어나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1693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할머니인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드비히 엘레오노라의 보살핌 아래 자랐다. 그러나 할머니는 외향적이고 재능이 많았던 언니 헤드비히 소피아 공주를 더 아꼈다고 알려져 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언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으며, 승마나 춤을 즐기는 언니들과 달리 내성적인 성격으로 쉽게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3] 그녀는 친절하고 겸손하며 위엄 있는 태도와 아름다운 손을 가졌다고 묘사되었지만, 지적이거나 매력적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할머니 헤드비히 엘레오노라는 그녀를 고집스럽다고 묘사했으며, 불만이 있을 때 아픈 척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반면 음악에는 재능이 있어 궁정 연주회에서 언니가 노래를 부를 때 클라비어를 연주하기도 했다.[3]

1700년부터 시작된 대북방 전쟁으로 오빠 칼 12세가 오랫동안 나라를 비우자,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스웨덴에 남아 할머니 헤드비히 엘레오노라를 돌보았다. 당시 왕위 계승 서열 1위는 언니 헤드비히 소피아였다. 칼 12세가 미혼이고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울리카 엘레오노라 역시 미래의 왕위 계승 가능성을 가진 인물로 여겨져 여러 혼담이 오갔다.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주요 혼담
연도상대국가결과
1698년덴마크의 카를 왕자덴마크-노르웨이오빠와 덴마크의 소피아 헤드비히 공주의 결혼과 함께 추진되었으나 1700년 폐기
1700년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프로이센협상이 있었으나 오빠 칼 12세의 반대로 무산[1]. 이후 그녀의 이름을 딴 루이제 울리케 폰 프로이센의 대모가 됨.[1]
1702년조지 2세 (훗날 영국 국왕)하노버 선제후령 / 영국제안되었으나 연기 후 무산[3]
?작센고타의 요한 빌헬름 공작작센고타 공국칼 12세의 허락을 받았으나, 공작이 국왕 앞에서 결투를 벌인 사건으로 중단[3]
1710년헤센의 프리드리히 공자헤센카셀 방백령1714년 1월 23일 약혼, 1715년 3월 24일 결혼[2]



1708년 언니 헤드비히 소피아가 사망하면서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그녀는 할머니를 제외하고 스웨덴 내 유일한 성인 왕족이 되었고, 왕위 계승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미 1712년 말부터 칼 12세는 그녀를 부재 중 섭정으로 임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1713년 11월 2일, 왕실 의회는 그녀를 회의에 참석시켜 지지를 얻으려 했고, 결국 정부와 그녀의 할머니는 국왕 부재 동안 그녀를 섭정으로 임명했다.[3] 이로써 그녀는 공식적인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여러 정치 세력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왕위 계승을 두고 그녀와 그녀의 조카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칼 프레데리크 사이의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다.

섭정이자 의회 의장으로서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국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그녀는 국정 상황을 파악하고 오빠에게 꾸준히 귀국을 촉구했으며, 오빠의 허락 하에 대부분의 국정 문서에 서명했다. 다만 스스로를 오빠의 대리인으로 여겨 독자적인 정책 제안은 삼갔다.[3] 그녀는 여러 차례 오빠를 만나러 가길 원했지만 허락받지 못했고, 1716년 바드스테나에서 16년 만에, 그리고 1718년 크리스티네함에서 마지막으로 오빠를 만났다. 당시 스웨덴 의회전제군주제를 폐지하고 의회의 권력을 회복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칼 12세에게 비판적이었고,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섭정 활동에 기대를 걸었다.

1715년 할머니 헤드비히 엘레오노라가 사망하자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궁정의 명실상부한 중심 인물이 되었으며, 이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 중 하나로 여겨진다. 같은 해 3월 24일, 그녀는 헤센카셀 방백령의 프리드리히 공자와 결혼했다.[2] 결혼 협상은 그녀가 신뢰하던 시녀 에메렌시아 폰 뒤벤이 주도했으며, 할머니 헤드비히 엘레오노라는 이 결혼을 통해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스웨덴을 떠나 조카의 왕위 계승 가능성을 높이려 했다는 시각도 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에게는 사랑에 기반한 결혼이었지만, 남편 프리드리히에게는 정치적 야심이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그녀와 결혼했으며, 결혼 직후부터 조카 대신 울리카 엘레오노라를 왕위 계승자로 만들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왕위 계승을 둘러싼 "헤센파"(프리드리히 지지 세력)와 "고토르프파"(조카 지지 세력) 간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결혼식 날 칼 12세는 "오늘 밤 내 여동생이 왕관을 춤으로 날려버리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2]

4. 여왕 즉위와 통치

1718년 오빠 칼 12세가 사망하자[3],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헤센파의 지지를 받아 왕위 계승권을 확보했다. 당시 스웨덴 의회(릭스다그)는 1680년 수립된 절대군주제를 종식시키고 의회 중심의 통치를 복원하고자 했으며, 헤센파는 이러한 의회 야당의 지지를 얻었다.

1718년 12월 5일,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칼 12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즉시 우데발라에서 자신이 여왕임을 선언했다. 그녀는 국정을 장악하고 칼 12세의 측근이었던 게오르크 하인리히 폰 괴르츠 남작 등 홀슈타인파를 축출했다. 헤센파는 러시아와의 강화를 거부하고 영국(하노버), 프로이센 등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의회는 절대군주제와 왕위 세습권 폐지를 결정하는 대신, 울리카 엘레오노라를 선거 군주로 인정하기로 했다. 왕위 계승 경쟁자였던 조카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를 견제하고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군주의 권력을 크게 제한하는 새로운 헌법에 동의해야 했다.

1719년 1월 23일 여왕으로 선출되었고, 2월 19일에는 정부 헌장 (1719년)에 서명하여 왕위 계승권을 공고히 했다. 1719년 3월 17일 웁살라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으며, 4월 11일 스톡홀름에 공식 입성하여 의회의 환영을 받았다.

1719년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 즉위 기념 메달


대관식 of Queen Ulrika Eleonora in 1719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자신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귀족을 서임했다. 15개월 동안 181개의 귀족 작위를 수여했는데, 이는 매달 백작 1명, 남작 2명, 하급 귀족 8명에 해당하는 수치로 스웨덴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였다. 또한 오빠인 칼 12세가 3~5명만을 임명했던 육군 원수를 7명이나 두었다. 그녀가 가장 총애했던 인물은 어린 시절 간호사였던 에메렌티아 폰 뒤벤 (1669년–1743년)이었다. 1707년 시녀로 임명된 뒤벤은 여왕의 조언자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둘의 관계는 자매와 같았다고 묘사된다.[3]

사실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절대군주제를 선호했으며, 조카로부터 왕위를 확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새로운 헌법에 동의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의회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고, 추밀원 의장 아르비드 호른 등 주요 인사들과 갈등을 겪었다. 호른은 여왕이 남편과 국사를 논의하는 것을 비판하며 헌법 준수를 압박했고, 이는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더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남편 프레드리크 1세잉글랜드윌리엄 3세메리 2세처럼 공동 통치자로 만들고자 했으나, 15세기 이래 공동 통치가 금지되었던 스웨덴 의회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4] 헌법 존중에 어려움을 느끼고 의회와 지속적으로 갈등하며 남편과 국사를 상의하는 모습은, 결국 의회가 프레드리크를 단독 군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1720년 2월 29일, 공동 통치자 요청이 다시 거부되자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남편보다 먼저 사망할 경우 그가 그녀를 계승한다는 조건 하에 남편에게 양위했다.[3] 이는 1720년 3월 24일 의회에 의해 확정되었으며, 프레드리크 1세가 즉위했다. 그녀는 종종 이 양위를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희생이라고 언급했다.[3]

1720년 프레드리크 대관식 메달


그녀의 퇴위와 프레드리크 1세의 즉위는 스웨덴 역사에서 자유 시대로 알려진 시기의 시작을 알렸으며, 이 시기 왕권은 의회에 의해 크게 제약되었다. 그녀의 통치는 대북방 전쟁이 종결되는 시점과 맞물려 있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국정을 운영해야 했다. 헤센파의 집권으로 스웨덴은 스톡홀름 조약(1719-1720)을 통해 하노버, 프로이센 등과 강화를 맺었으나, 러시아와의 전쟁은 이후 뉘스타드 조약(1721년)으로 마무리되었다.

5. 퇴위와 왕비 시절

1718년 오빠 칼 12세가 대북방 전쟁 중 전사하자,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왕위 공백을 막기 위해 스웨덴 여왕으로 즉위했다. 당시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색이 짙었고 절대 왕정은 붕괴된 상태였다.

칼 12세 사후, 그의 조카인 홀슈타인-고토르프 공 카를 프리드리히를 지지하는 홀슈타인파와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남편 프리드리히를 지지하는 헤센파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헤센파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러시아와의 강화를 추진하던 칼 12세의 측근 하인리히 폰 게르츠 남작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헤센파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지속하는 한편, 하노버(영국) 및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1719년부터 1720년에 걸쳐 강화 협상을 진행했다.

1719년부터 1720년 사이 스웨덴 의회는 왕권을 크게 제한하고 의회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했다. 절대 왕정의 약화에 불만을 품은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1720년, 즉위 2년 만에 남편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스스로 퇴위했다. 이는 의회가 신헌법 제정을 조건으로 프리드리히를 프레드리크 1세로 추대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스웨덴의 헤센 왕조가 시작되었고, 왕권 약화는 결정적이 되었다. 프레드리크 1세의 통치기는 군주가 의회(귀족)에게 대부분의 권력을 넘겨준 자유의 시대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왕비가 된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남편 프레드리크 1세에게 매우 충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후계자를 낳기를 희망했으나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프레드리크 1세는 1723년 왕권의 대부분을 잃은 후 혼외 관계가 늘어났고, 1730년에는 헤드비그 타우베를 공식 정부로 삼아 백작 부인 칭호까지 주었다. 이는 스웨덴 역사상 국왕이 공식 정부를 둔 첫 사례였다. 남편의 외도에 대한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반응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녀는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궁정 활동에서 물러나 종교 활동과 자선 사업에 헌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1731년1738년 남편이 부재중일 때 섭정을 맡았다. 1738년 섭정 기간에는 성직자들의 반대를 이유로 새로 설립된 스웨덴 극장의 공연을 금지하기도 했으나, 극장은 다음 해 다시 문을 열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1741년 11월 24일 천연두로 사망하여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죽음 이후 스웨덴에서는 왕위 계승 문제가 다시 불거지게 되었다. 한편, 헤센파의 집권은 스웨덴이 프로이센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반세기 동안 의회 내에서 친러시아파와 친서유럽파(친프로이센파)의 대립이 계속되면서 스웨덴의 국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6. 개인 생활

어린 시절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외향적이고 재능 있는 언니 헤드비히 소피아 공주에 비해 눈에 띄지 않았다. 언니들은 승마와 춤을 즐겼지만,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놀이에 참여할 용기가 없어 쉽게 눈물을 보였고, 이 때문에 언니들에게 다소 얕보였다고 전해진다.[3] 그녀는 친절하고 겸손하며 위엄 있고, 좋은 자세와 아름다운 손을 가졌다고 묘사되었지만, 지적이거나 매력적이라고 여겨지지는 않았다. 할머니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드비히 엘레오노라는 그녀를 고집스럽다고 묘사했으며, 그녀는 타인이나 사건에 대한 불만을 질병을 흉내 내는 것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었다.[3]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보석, 음악, 동전 수집에 흥미를 가졌다. 특히 음악에 재능이 있어, 궁정 콘서트에서 언니 헤드비히 소피아가 노래를 부를 때 클라비어를 연주하기도 했다.[3] 그녀는 궁정 무도회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스톡홀름의 볼후세트 극장에서 공연할 독일프랑스 극단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종교적으로 매우 독실하여, 기도하기 위해 국회 회의를 중단하기도 했다. 궁정 환영회에서는 젊은 여성들에게 성경에 대해 질문하고 정답을 맞히면 보상하는 등 신앙심을 드러냈다. 왕실의 자부심이 강했으며, 모욕감을 느낄 때는 아픈 척하며 자신의 거처에 머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시녀이자 가장 신뢰하는 친구였던 에메렌티아 폰 뒤벤에게 크게 의존했다. 헤세카셀 방백령의 프리드리히 공자와의 결혼 협상도 에메렌티아 폰 뒤벤이 처리했다.[3]

7. 유산 및 평가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통치는 스웨덴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그녀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1680년에 확립된 절대 왕정을 끝내고 스웨덴 의회 중심의 통치를 복원하려는 헤센파의 지지를 받았다. 이를 위해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군주의 권력을 크게 제한하는 새로운 헌법에 동의해야 했다. 그녀는 1719년 3월 웁살라에서 공식적으로 군주로 선출되어 즉위했다.

그러나 울리카 엘레오노라 자신은 전제군주제를 선호했으며, 새로운 헌법에 동의한 것은 홀슈타인-고토르프 공 카를 프리드리히와의 왕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녀는 남편 프리드리히를 공동 통치자로 세우려 했으나, 스웨덴 의회는 15세기 이래 공동 통치가 금지되었다는 이유로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즉위한 지 불과 1년여 만인 1720년에 남편에게 왕위를 넘겨주며 퇴위했다. 이 왕위 계승은 의회의 승인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프레드리크 1세는 왕권이 현저히 제한된 신헌법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즉위했다. 이로써 스웨덴의 절대 왕정은 막을 내리고, 이후 약 반세기 동안 의회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자유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종종 자신의 퇴위를 일생의 큰 희생으로 이야기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자신의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귀족 작위를 수여했다. 15개월 동안 매달 평균 백작 1명, 남작 2명, 하급 귀족 8명을 포함하여 총 181개의 귀족 작위를 만들어냈는데, 이는 스웨덴 역사상 다른 어떤 군주보다도 많은 수였다. 또한, 오빠 칼 12세가 3명에서 5명 사이의 육군 원수를 둔 것과 달리, 그녀는 7명의 육군 원수를 임명했다. 그녀가 가장 총애했던 인물은 어린 시절 간호사였던 Emerentia von Dübensv (1669년 ~ 1743년)으로, 1707년 시녀로 임명된 이후 평생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고문 역할을 했다.

정치적으로는 친러시아 성향의 홀슈타인파 대신 친서유럽 및 친프로이센 성향의 헤센파가 권력을 잡게 되었다. 이는 대북방 전쟁 이후 러시아와의 강화 협상 과정에도 영향을 미쳐, 칼 12세의 측근이자 홀슈타인파의 협상가였던 게르츠 남작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헤센파는 러시아와의 강화를 거부하고 하노버, 영국, 프로이센1719년부터 1720년에 걸쳐 강화 협상을 진행했고, 여왕 퇴위 후 스톡홀름 조약으로 정식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스웨덴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에서 손을 떼고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으며, 카를 프리드리히 공은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사실상 상실했다. 일각에서는 헤센파의 집권으로 스웨덴이 프로이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후 반세기 동안 스웨덴 의회에서는 친러시아파와 친서유럽파의 항쟁이 계속되며 국력이 약화되었다.

개인적으로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외모가 오빠 칼 12세와 매우 닮아, 칼 12세를 알던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남편 프레드리크 1세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두지 못했으며, 남편보다 21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8. 계보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스웨덴의 팔츠 왕조 출신 국왕인 칼 11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오빠는 스웨덴의 국왕 칼 12세이다. 울리카 엘레오노라는 이후 헤센 왕조 출신의 프레드리크 1세와 결혼하였다.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부계 혈통은 다음과 같이 바사 왕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아버지: 칼 11세
  • 할아버지: 칼 10세 구스타브 (팔츠 왕조)
  • 증조할머니: 카타리나
  • 고조할아버지: 칼 9세 (바사 왕조)
  • 현조할아버지: 구스타브 1세 (바사 왕조)


칼 10세 구스타브는 칼 9세의 손자이자,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딸인 크리스티나 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카타리나는 칼 9세의 자녀들이다. 칼 9세의 다른 형제로는 에리크 14세와 요한 3세가 있으며, 요한 3세의 아들은 폴란드의 국왕 지그문트 3세이다.

참조

[1] 서적 Lovisa Ulrika, drottning av Sverige 1945
[2] 서적 Berömda och glömda Stockholmskvinnor: sju stadsvandringar : 155 kvinnoporträtt MBM förl. 2001
[3] 서적 Den glömda drottningen. Karl XII:s syster. Ulrika Eleonora D.Y. och hennes tid Affärstryckeriet, Norrtälje 1976
[4] 웹사이트 Emerentia Düben, von – Svenskt Biografiskt Lexikon https://sok.riksarki[...]
[5] 서적 Ulrika Eleonora d. y. Karl XII's syster Wahlström & Widstrand, Stockholm 1956
[6] 서적 Hedvig Taube: en bok om en svensk kunglig mätress Wahlström & Widstrand, Stockholm 1919
[7] 서적 Kvinnan börjar vakna: den svenska kvinnans historia från 1700 till 1840-talet. Bonnier 1973
[8] 서적 Svenska komedien 1737–1754 Centraltryckeriet AB 1981
[9] 서적 Jämmerdal & Fröjdesal. Kvinnor i stormaktstidens Sverige Atlantis AB 199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