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1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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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칼 12세는 1682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국왕으로, 1697년 15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대북방 전쟁을 이끌었으나, 1718년 노르웨이 원정 중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스웨덴의 쇠퇴를 가져왔고, 왕위는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에게 넘어갔다. 칼 12세는 생애 대부분을 전쟁에 헌신했으며, 유능한 군사 지도자이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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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1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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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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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 12세 |
칭호 | 스웨덴 국왕 |
재위 기간 | 1697년 4월 5일 ~ 1718년 11월 30일 |
대관식 | 1697년 12월 14일 |
대관식 종류 | 대관식 |
이전 통치자 | 칼 11세 |
다음 통치자 | 울리카 엘레오노라 |
섭정 |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1697년 4월 5일 – 1697년 12월 15일) |
왕가 | 팔츠-츠바이브뤼켄 |
아버지 | 칼 11세 |
어머니 | 덴마크의 울리카 엘레오노라 |
출생일 | 1682년 6월 17일 |
출생지 | 트레 크로노르, 스톡홀름, 스웨덴 |
사망일 | 1718년 11월 30일 |
사망지 | 프레드릭스할드, 덴마크-노르웨이 |
매장일 | 1719년 2월 26일 |
매장지 | 리다르홀멘 교회, 스톡홀름 |
종교 | 루터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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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정보 | |
소속 | 스웨덴 |
군종 | 스웨덴 육군 |
주요 전투 | § 카를 12세의 전투 |
기타 정보 | |
다른 칭호 | 브레멘 및 페르덴 공작, 팔츠-츠바이브뤼켄 공작 |
2. 어린 시절
칼 12세는 1682년 6월 27일(율리우스력 6월 17일) 스웨덴 스톡홀름의 트레 크로노르 왕궁에서 칼 11세와 덴마크의 울리카 엘레오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의 둘째이자 맏아들이었다. 당시 유럽 왕실에서 흔히 있는 일보다 부모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아주 어린 나이부터 그들과 함께 여행을 다녔다.[7]
칼의 어린 시절, 스웨덴은 훌륭한 전사들을 배출한 왕국으로 칭송받았다. 칼은 군사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왕위 계승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통치를 위한 교육을 받았다. 4살 때 말을 타는 법을 배웠고,[10] 청소년기에는 엄격한 신체 훈련을 받았다. 그는 매우 의지가 강했고, 국왕으로서 도덕적, 종교적 교육에 의해 심어진 기준을 종종 완고하게 고수했다.
1693년 어머니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사망하자, 아버지 칼 11세는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위안을 찾았다. 칼 11세는 아들을 사찰과 다른 공식 업무에 데려갔다. 1697년 4월, 칼 11세가 사망했고, 칼 왕자는 스웨덴 왕위에 올랐다. 칼 11세는 십 대의 상속자를 위해 섭정을 마련했지만, 같은 해 11월에 릭스다그(스웨덴의 신분 의회)는 15세의 칼의 성년을 인정했다. 칼 12세는 전임자로부터 절대 군주 권력을 물려받은 최초이자 마지막 스웨덴 통치자였다.[9]
2. 1. 출생과 가족
스웨덴 스톡홀름의 트레 크로노르 성에서 칼 11세와 덴마크의 울리카 엘레오노라 사이에서 태어난 칼 12세는 부모의 둘째이자 맏아들이었다. 1681년에 태어난 누나 헤드비그 소피아가 있었고, 1683년 구스타프, 1684년 울리크, 1685년 프레데릭, 1686년 칼 구스타부스 등 4명의 남동생이 태어났지만 모두 유아기에 사망했다. 1688년에는 여동생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태어났는데, 훗날 스웨덴의 통치자가 되었다.[8]칼 12세는 행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당시 스웨덴은 훌륭한 전사들을 배출한 왕국으로 존경받았으며,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군사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통치 교육을 받았다. 4살 때 말을 타는 법을 배웠고,[10] 청소년기에는 엄격한 신체 훈련을 받았다.
1693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칼 왕자는 왕국 문제에 더욱 진지해졌고, 아버지 칼 11세를 따라 정치 및 공식 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칼 11세는 아들을 사찰과 다른 공식 업무에 데려갔으며, 칼은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왕위를 준비했다.[9]
1697년 칼 11세가 사망하고 칼 12세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섭정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섭정들은 7개월 만에 칼이 스스로 통치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왕관을 씌웠다. 15세의 칼은 우수한 교사와 정치인들에게 교육받았고, 군사 훈련도 받았다. 그는 전임자로부터 절대 군주 권력을 물려받은 최초이자 마지막 스웨덴 통치자였다.[9]
2. 2. 어머니의 죽음과 섭정
1692년 7월, 칼 12세는 10세 때 어머니 울리카 엘레오노라를 여의었다. 칼 12세는 주로 어머니에게 교육받았으며, 어머니는 그의 인격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9] 어머니가 사망한 후, 칼 왕자는 왕국 관련 문제에 더욱 진지하게 임했으며, 정치적 행보와 공식 행사에 아버지를 동행하기 시작했다.1697년 4월, 아버지 칼 11세마저 사망하자, 칼 12세는 14세 10개월의 나이로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6명의 섭정이 임명되었으나, 의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수개월 만에 칼 12세에게 모든 권한이 위임되어 직접 통치를 시작하게 되었다.[9]
3. 스웨덴의 국왕
1692년 7월, 10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4년 뒤인 1697년 4월에는 아버지 칼 11세마저 사망하면서 14세 10개월의 나이로 스웨덴 국왕에 즉위했다. 어린 나이였기에 6명의 섭정이 배정되었지만, 의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수개월 만에 칼 12세에게 모든 권한이 위임되어 친정을 시작했다.[11] 칼 12세는 친정 이후 심문 과정에서의 고문을 폐지하는 등 인도적인 면모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11] 당시 잉글랜드 대사(재임: 1683년 – 1703년) 역시 본국에 보내는 보고에서 칼 12세의 통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11]
칼 12세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통치자로서, 스웨덴 백성들의 부와 번영에 기여한 여러 세금 및 입법 개혁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1. 즉위 초기
칼 12세 즉위 당시 스웨덴 제국은 유럽에서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며 유럽 최강국 중 하나로 알려졌다. 초기 칼 12세의 통치는 평화로웠다. 처음 몇 년 동안 어린 국왕은 사냥과 파티에 전념하며 인생을 즐겼는데, 이웃 적국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11]
덴마크, 폴란드와 러시아는 오랜 세월 동안 스웨덴의 적국이었고, 어리고 경험 없는 국왕이 스웨덴 왕좌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스웨덴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700년,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 3국의 군주들은 동맹을 맺고 스웨덴에 대한 주요 공격을 계획했다. 덴마크는 홀슈타인을, 폴란드는 리가를, 러시아는 나르바를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스웨덴은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고, 적들의 침략에 즉시 대응했다. 이것이 대북방 전쟁의 시작이었다.[12]
덴마크의 홀슈타인 공격은 첫 6주 안에 반격되었고 칼 12세는 승리했다. 이후 리가 침공을 처리하려 했으나, 나르바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 소식을 듣고 빠르게 그곳으로 이동했다. 러시아 군대는 스웨덴 군대보다 훨씬 컸지만, 칼 12세는 훌륭한 군사 실력을 보여 러시아를 패배시켰다.
칼 12세는 자신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군사 사령관임을 증명했다. 그는 또한 군대의 규모와 상관없이 자신이 군대를 지휘하면 무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700년경, 덴마크-노르웨이,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가 통치했으며, 그는 또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이기도 했다)과 러시아의 군주들은 스웨덴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12]
칼의 첫 번째 원정은 그의 사촌 덴마크 국왕 프리드리히 4세가 통치하는 덴마크-노르웨이를 상대로 했다. 칼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원을 확보하여, 8,000명의 병력과 43척의 배를 이끌고 셸란을 침공, 1700년 8월 트라벤달 평화 조약을 통해 덴마크를 신속하게 굴복시켰다.[13] 덴마크-노르웨이를 몇 달 안에 평화 조약으로 묶은 후, 칼 12세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12]
러시아는 스웨덴이 점령한 리보니아와 에스토니아를 침공하면서 전쟁을 시작했다. 칼은 1700년 11월 나르바 전투에서 러시아의 포위군을 공격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러시아군은 1만 명의 스웨덴군보다 거의 4배나 많았다. 칼은 눈보라를 틈타 공격하여 러시아군을 효과적으로 둘로 나누고 승리했다. 전장에서 도망친 표트르의 많은 군인들이 나르바 강에서 익사했다. 러시아 측의 전체 사망자는 전투가 끝날 무렵 약 10,000명에 달했고, 스웨덴군은 667명을 잃었다.[14]
3. 2. 대북방 전쟁 발발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는 오랜 기간 스웨덴의 적국이었으며, 이들은 어리고 경험 없는 칼 12세가 스웨덴 왕위에 오른 것을 기회로 여겨 스웨덴 침공 계획을 세웠다.
1700년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 3국의 군주들은 동맹을 맺고 스웨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덴마크는 홀슈타인을, 폴란드는 리가를, 러시아는 나르바를 공격했다. 하지만 스웨덴은 이에 대비하고 있었고,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침략자들에 맞섰다. 이것이 대북방 전쟁의 시작이었다.
개전 후 6주 안에 덴마크의 홀슈타인 공격은 격퇴되었고, 칼 12세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리가 침공을 처리하려 했으나, 나르바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 소식을 듣고 급히 이동했다. 러시아 군대는 스웨덴 군대보다 훨씬 규모가 컸지만, 칼 12세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러시아는 패배했다.
칼 12세는 자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군사 지휘관임을 증명했다. 그는 또한 군대의 규모와 상관없이 자신이 지휘하면 무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701년과 1707년 사이, 칼 12세는 유럽에서 여러 협상에 참여하여 덴마크와 폴란드의 위협을 크게 줄였다. 이후 그는 스웨덴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러시아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1707년 러시아에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칼 12세는 가능한 가장 큰 군대를 모아 모스크바로 진군했다. 러시아 군대는 스웨덴 군대의 진군을 돕는 수단들을 파괴했다. 이에 칼 12세는 우크라이나로 이동하여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려 했다.
1708년 칼 12세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했는데, 그중 중요한 것은 홀로프친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2배나 되는 러시아군을 물리친 것이다.

1709년 칼 12세는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우크라이나에 있었다. 혹독한 겨울로 인해 칼의 군대는 크게 약화되었지만, 칼 12세는 후퇴 대신 결정적인 전투를 원했다. 결국 그해 7월 폴타바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준비 중 칼 12세는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폴타바에서 군대를 직접 지휘할 수 없었다. 그의 부재 속에 스웨덴군은 다시 2배나 되는 러시아군에 패배했다. 스웨덴은 전투에서 패했지만, 칼 12세와 일부 부하들은 오스만 제국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요한 파트쿨의 공작으로 작센 선제후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하 "폴란드"로 표기), 덴마크-노르웨이, 러시아 차르국이 북방 동맹을 결성하면서, 1700년에 대북방 전쟁이 시작되었다.
개전 직후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4세가 슐레스비히 공국 (홀슈타인 공국)을 포위했지만, 덴마크 해군 총대리관이 신중하여 포위전이 진행되지 않자, 칼 12세는 포위전 중에 외레순 해협을 건너, 1700년 8월 4일 코펜하겐에서 수 마일 북쪽에서 훔레베크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3. 3.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 (1701~1706)
요한 파트쿨의 공작으로 작센 선제후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하 "폴란드"로 표기), 덴마크-노르웨이, 러시아 차르국이 북방 동맹을 결성하면서, 1700년에 대북방 전쟁이 시작되었다. 칼 12세는 그 젊음을 틈타 주변 국가들을 제압하고 국외로 진출하여 각지를 전전하며 북방 동맹을 격파했다.개전 직후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4세가 슐레스비히 공국 = 홀슈타인 공국을 포위했지만, 덴마크 해군 총대리관이 신중하여 포위전이 진행되지 않자, 칼 12세는 포위전 중에 외레순 해협을 건너, 1700년 8월 4일 코펜하겐에서 수 마일 북쪽에서 상륙에 성공했다.[12] 칼 12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코펜하겐 점령을 검토했지만, 결국 8월 18일 트라벤탈 조약으로 덴마크와 강화에 동의했다.[13] 프레데리크 4세는 이 조약으로 고토르프 공국의 할양, 배상금 20만 릭스달러, 재참전을 금지하는 것에 동의했다.[13] 칼 12세는 이어서 8천의 군세를 이끌고 리보니아로 급행, 10월 6일에 파르누에 도착했다.[12] 리가를 구원하려 했지만, 나르바의 상황을 듣고 11월 13일에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19일의 나르바 전투에서 러시아에 승리했다.[14] 나르바 전투 이후, 칼 12세의 자문단은 러시아군 추격, 러시아 영토에서의 겨울 작전, 표트르 1세에 대한 불만을 선동하여 러시아를 약화시키는 등 러시아 대책을 권했지만, 칼 12세는 폴란드 국왕 겸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투스 2세를 벌하기로 결정, 1701년 7월 드비나 강에서 작센군을 격파, 게다가 쿠를란트 공국을 점령하여 병합했다.[15] 1702년 초, 칼 12세는 아우구스투스 2세의 폴란드 왕 퇴위를 요구하며 바르샤바로 진군, 5월 14일에 입성했다.[15] 직후 바르샤바에서 물러나 아우구스투스 2세 추격을 선택, 7월 2일 크리슈프 전투에서 폴란드-작센 연합군을 패주시켰다.[15] 1703년의 전역에서도 푸워투스크 전투와 토룬 포위전에서 승리, 특히 후자에서는 8개월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군의 전사자가 50명밖에 없었다.[15]
1704년 7월, 바르샤바 주재 대사 알비드 호른은 뇌물을 사용하여 아우구스투스 2세를 퇴위시키고, 대신 폴란드의 대귀족 (마그나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의 폴란드 왕위 획득을 실현했다.[15] 그리고, 칼 12세가 포니에츠 전투에서 작센군을 다시 격파하자 1705년 9월 24일에 스타니스와프의 대관식을 실현했다.[15] 아우구스투스 2세와는 1706년 알트란슈테트 조약이라는 형태로 강화가 성립되었다. 스타니스와프는 괴뢰 군주였으며, 칼 12세의 신하와, 공화국의 반 국왕파였던 리투아니아 연맹의 사피에하 가(사피에하 가는, 1700년의 리투아니아 내전으로 인해, 리투아니아에서의 패권을 잃었다)에 의해 1709년까지 스웨덴의 종속국으로 통치되었다. 서유럽에서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진행 중이었으며, 칼 12세가 동쪽에서 작센을 침공했기 때문에 루이 14세에게 매수되어 침공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지만, 영국의 말버러 공작이 알트란슈테트에서 칼 12세를 방문하자 그 의심은 사라졌다.[15] 한편 합스부르크 가의 요제프 1세와는 슐레지엔에서의 개신교의 권리를 둘러싸고 대립, 최종적으로는 요제프 1세가 프랑스 측으로 돌아설 것을 두려워한 반 프랑스 동맹국들이 요제프 1세를 설득하여, 개신교 권리 보장에 동의하게 했다.[15]
칼 12세는 이 시점까지의 전투를 유리하게 진행, 전쟁 초기에는 스웨덴이 압도했다. 이 시기 스웨덴의 침공 범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작센 선제후국에까지 이르렀다. 스웨덴군이 주둔한 작센은 유럽의 주목을 받았고, 알트란슈테트에서는 칼 12세와의 교섭을 위해 서유럽의 외교관들이 끊임없이 방문했지만, 칼 12세는 러시아 원정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러시아와의 강화도 거절했다.
3. 4. 러시아 원정과 몰락
1707년, 칼 12세는 러시아에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가능한 가장 큰 군대를 모아 모스크바로 진군했다. 러시아군은 스웨덴군이 러시아 공격을 돕는 수단을 파괴했다. 이에 칼 12세는 우크라이나로 이동하여 필요한 물자를 확보했다.
1708년, 칼 12세는 러시아군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했다. 그중 하나인 홀로프친 전투에서는 스웨덴군이 2배나 많은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1709년, 칼 12세는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우크라이나에서 혹독한 겨울을 맞았다. 후퇴 대신 칼 12세는 7월 폴타바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 며칠 전, 칼 12세는 다리에 큰 부상을 입어 군대를 지휘할 수 없었다. 스웨덴군은 러시아군에 비해 병력 수가 2배나 적었고, 결국 전투에서 패했다. 칼 12세와 몇몇 부하들은 오스만 제국으로 피신했다.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에서 몇 년을 보내며 러시아 공격을 위한 군대를 모으려 했다. 그는 덴마크가 러시아를 돕는 것을 막기 위해 노르웨이 공격을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칼 12세는 스웨덴으로 돌아갔지만, 제국은 외세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웨덴은 자유 국가로 남아 있었다.
그는 1년간 머무른 후 1718년 다시 노르웨이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주변 국가들의 지원을 받았고, 칼 12세의 승리 가능성은 낮았다. 노르웨이의 프레드릭스텐 전투에서 그는 머리에 총을 맞아 사망했고, 이는 스웨덴의 적국에 대한 전쟁 종식을 의미했다.
또한 스웨덴 제국의 종말을 상징했고, 국가는 의회 정부로 전환되었다. 복잡한 전쟁 조직과 군주는 모두 파괴되었다. 하지만 스웨덴의 왕실 독재는 구스타브 3세에 의해 회복되었다.
4. 오스만 제국 망명과 귀환
칼 12세는 러시아 침공을 계획하며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헤트만인 이반 마제파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는 레스나야 전투에서 아담 루드비히 레벤하우프트의 군대를 기습하여 보급품, 포병, 병력의 절반을 잃게 했다. 또한 러시아군은 마제파의 코사크 반란을 진압하고 수도 바투린을 파괴했다.[19]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칼 12세는 부상을 입고 보병의 3분의 1을 잃었으며, 카를 구스타프 렌셸드가 지휘하는 스웨덴군은 표트르 1세의 군대에 크게 열세였다.[20] 결국 스웨덴군은 패배했고, 칼 12세는 소수의 측근과 함께 오스만 제국의 벤데르로 피신했다. 나머지 스웨덴 군대는 페레볼로치나에서 항복했다.
폴타바 전투의 패배는 스웨덴 제국의 몰락과 러시아 제국의 건국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21][22]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의 아흐메트 3세를 설득하여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게 했으나(프루트강 전투), 표트르 1세를 풀어주면서(프루트 조약) 관계가 악화되었다. 1713년 벤데르 전투에서 칼 12세는 오스만군에게 일시적으로 포박되기도 했다. 이후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간청으로 1714년 오스만 제국을 떠나 슈트랄준트에 도착했으나,[31] 프로이센 왕국의 참전으로 슈트랄준트 포위전에서 패배하고 스웨덴으로 귀국했다.
영국은 하노버 왕조 성립 이후 스웨덴과의 동맹을 파기했고, 덴마크와 하노버, 프로이센 왕국이 스웨덴에 선전포고하면서 스웨덴은 북유럽 여러 국가와 교전 상태에 놓였다. 칼 12세는 러시아와 단독 교섭을 시도하여 발트 지방을 포기하고 독일 방면의 권익 회복을 꾀했으며, 러시아도 이에 응했다.
4. 1. 오스만 제국에서의 생활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에는 환영받았다. 압두르라흐만 파샤가 지휘하는 외주 성에 들어가기 직전, 러시아 군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칼 12세는 가까스로 성으로 피신했고, 이후 총독 아가 유수프 파샤의 초청으로 벤데르에 정착했다.[23]칼 12세는 스타니스와프 포니아토프스키와 토마스 펑크 (1672–1713)|토마스 펑크|svsv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사신으로 보냈다.[23] 이들은 술탄 아흐메드 3세의 어머니인 귈누슈 술탄과 간접적으로 접촉했는데, 귈누슈 술탄은 칼 12세에게 흥미를 느껴 벤데르에서 그와 서신을 주고받았다.[23]
오스만 제국에 머무는 동안 칼 12세는 데미르바쉬tr (직역하면 "강철 머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별명은 완고함이나 끈기를 의미하며, 터키인들이 칼 12세에게 이러한 별명을 붙인 이유로 추정된다. 그러나 데미르바쉬tr는 국가 소유 물건, 특히 관공서 가구 등을 지칭하기도 하여, 칼 12세가 오스만 정부 관청을 오랫동안 방문한 것을 풍자한 것일 수도 있다.[24]
벤데르 근처에는 스웨덴인들이 늘어나면서 칼스타드 (바르니차)라는 작은 마을이 건설되었다.[25]
귈누슈 술탄은 아들인 술탄에게 칼 12세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설득하여 러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하도록 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는 프루트 조약과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체결하여 적대 행위를 종식했다. 그러나 이 조약들은 칼 12세와 스타니스와프 포니아토프스키가 지지하는 전쟁 옹호 세력에게 불만을 안겨주었고, 이들은 분쟁을 다시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술탄 아흐메드 3세의 신하들은 칼 12세의 책략에 지쳤고, 그의 측근들은 벤데르 상인들에게 막대한 빚을 졌다. 결국, 마을 주민들이 벤데르의 스웨덴 식민지를 공격했고, 칼 12세는 폭도와 관련된 오스만 예니체리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이 봉기는 칼라발르크tr (터키어로 군중)라고 불렸고, 이후 스웨덴어 어휘에 소란을 의미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예니체리들은 벤데르 전투에서 칼 12세에게 발포하지 않았지만, 그를 포로로 잡아 디메토카 (현재의 디디모티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택 연금했다. 칼 12세는 반 감금 상태에서 체스를 두었고, 오스만 해군과 오스만 갤리선의 해군 건축술을 연구했다. 그의 스케치와 디자인은 스웨덴 전함 ''야르마스''(Yaramaz)와 ''질데림''(Yıldırım)으로 이어졌다.
칼 12세는 5년간 오스만 제국에 머물면서 여동생이자 후계자인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는 편지에서 미래 스웨덴 세대의 눈으로 볼 때 방어 가능한 평화 조약을 원한다고 밝혔지만, 유럽에서 스웨덴에 대한 더 큰 존중만이 그러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스웨덴 국무원과 신분 의회는 곤경에 처한 스웨덴을 조직적이고 독립적으로 유지하려 노력했다. 1714년 가을, 이들은 칼 12세에게 경고 서한을 보내, 그가 신속하게 스웨덴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러시아, 폴란드, 덴마크와 독립적으로 평화 조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경고는 칼 12세가 스웨덴으로 급히 돌아가도록 촉구했다.[27][28]
칼 12세는 오스만인, 호위병, 사업가 등 군인들을 데리고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머무는 동안 빚을 갚겠다고 약속했지만, 채권자들은 몇 년을 기다려야 했다. 당시 스웨덴 교회법에 따라 스웨덴 국교회 신자가 아닌 사람은 세례를 받아야 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채권자들이 이를 피하도록, 칼 12세는 그들이 처벌받지 않고 종교를 실천할 수 있도록 "자유 서한"을 썼다. 군인들은 어려운 귀국길 대신 스웨덴에 남기로 했고, "아스케르손" (터키어로 ''아스케르''는 군인)이라고 불렸다.[29] 그러나 칼 12세가 빚을 갚기 위해 오랫동안 머물렀다가 돈을 받고 나라를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다.[30]
4. 2. 귀환과 노르웨이 원정
칼 12세는 오스만 제국을 떠나 1714년 11월 11일 슈트랄준트에 도착했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국이 참전하면서 슈트랄준트 포위전에서 패배하고 스웨덴으로 귀국했다.영국은 1714년 하노버 왕조가 탄생하고 프로이센이 대 스웨덴 전쟁을 시작하면서 스웨덴과의 동맹 관계를 파기했다. 덴마크도 러시아의 요구로 전선에 복귀하여 슐레스비히를 침공했다. 하노버, 프로이센이 스웨덴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독일 측 스웨덴 영토는 덴마크, 하노버, 프로이센군에 의해 빼앗겼다.
스웨덴은 북유럽 여러 국가와 교전 상태였고, 마그누스 스텐보크 장군은 1710년 덴마크의 스웨덴 침공을 저지하고(헬싱보리 전투), 1712년 가르데부슈 전투에서 덴마크군을 격파했지만 1713년 항복했다. 칼 12세는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러시아와 단독 교섭을 시작하여 발트 지방을 포기하고 독일 방면의 권익 회복을 꾀했다. 러시아도 발트해 진출로 동맹국의 경계를 받았기 때문에 스웨덴의 타진에 응했다.
귀국 후 1716년 스쿠네를 지켰고, 1717년과 1718년에는 강화에서 유리해지기 위해 노르웨이에 침공했다. 1718년 11월 30일, 프레데릭스할 요새를 포위 공격하던 중 칼 12세는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5. 죽음과 유산
칼 12세는 평생을 전쟁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그의 누이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결국 남편 프레데리크 1세에게 왕위를 양위해야 했다.[17] 칼 12세는 성적인 관계와 술을 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0]
젊은 시절, 칼 12세는 왕위 계승을 위해 적합한 배우자를 찾으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성과 결혼에 대한 주제를 회피했다. 가능한 후보로는 덴마크의 조피아 헤드비히 공주, 루이즈 마리아 스튜어트, 마리 엘리자베스 폰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주 등이 있었지만, 그는 후자에 대해 "사탄처럼 추하고 악마처럼 큰 입"을 가진 사람과는 절대 결혼할 수 없다고 말했다.[40] 대신 그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왕조의 압력보다는 사랑으로 결혼할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그의 독신은 강한 종교적 신념 때문일 수 있다.[41] 칼 12세는 악셀 뢰벤과의 대화에서 평화가 확보될 때까지 어떤 중매도 적극적으로 거부했으며,[42] 어떤 의미에서는 군생활과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제안했다.[43][44]
그는 뢰벤과의 대화에서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절제하지 않으면 성적 욕망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될까 두려워했고, 만약 그런 것에 헌신한다면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42][46]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홀슈타인고토르프를 왕조적으로 선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족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덴마크와의 결혼을 거부했다고 주장한다.[47] 블래닝과 몬테피오레와 같은 역사가들은 그가 동성애자였다고 믿는다.[48][49] 칼 12세가 작센 선제후 뷔르템베르크의 막시밀리안 에마누엘과의 친밀함을 나타냈다는 편지가 있는데, 칼은 그를 "매우 예쁘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해튼은 1960년대에 뷔르템베르크가 매우 이성애적이었으며, 그 관계는 스승과 제자 관계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45]
대북방 전쟁은 칼 12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스웨덴은 영국의 지원으로 저항을 계속했지만, 러시아군의 스웨덴 본토에 대한 공격은 이어져 스톡홀름에 대한 상륙전에서는 격퇴했지만, 1720년의 그렌감 해전에서의 러시아 해군에 패배 및 러시아군의 파상 공격 앞에서 굴복하여 강화를 모색했고, 1721년의 러시아와의 니스타드 조약에 의해 완전히 종결되었다. 이로 인해 스웨덴은 발트해의 권익을 잃고, 대국의 지위에서 전락했다. 이 사건 전후로 1720년에 왕권을 제어하려는 의회에 반발하여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퇴위하고, 남편 헤센-카셀 방백 세자 프리드리히에게 양위하여 프레드리크 1세가 즉위했기 때문에, 절대 군주제도 종언, 입헌 군주제가 시작되었다.
칼 12세는 독일, 네덜란드, 영국의 외교에 큰 영향을 미쳤고, 러시아를 비롯한 북유럽의 위협으로 남아 있었지만, 그의 죽음은 스웨덴 왕국의 패권의 종말을 의미했다. 볼테르가 쓴 "''Histoire de CharlesXII, roi de Suéde''"(1731년)가 대표적인 전기이다.
칼 12세는 10대에 '''곰 사냥꾼'''이라는 이명을 얻었고, 몇 배나 많은 러시아군을 여러 번, 그것도 전선에서 지휘하여 격파했다. 또한 전쟁에 대해 "곰 사냥보다 즐겁다"고 언급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단순한 저돌적인 맹장이 아니라, 그가 진두 지휘를 한 것은 "평범한 일반 스웨덴인을 용감하게 싸우게 하고, 또한 전기를 잡아 승리하기 위해서는 사령관인 왕이 전선에 나가는 것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79]
5. 1. 의문의 죽음
칼 12세는 1718년 11월 30일 노르웨이군과 싸우던 전장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1]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고 여겨져, 1994년 이후의 조사에서는 전쟁에 반대했던 스웨덴 귀족이나 왕위 계승자 파벌의 음모에 의한 암살설이 강해졌지만, 2005년 이후에는 암살설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어 결론이 나지 않았다.[78] 칼 12세의 통솔력으로 인해 스웨덴은 장기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반전 세력을 억제했지만, 그의 죽음으로 혐전 기운이 높아졌다. 1718년에 시작된 러시아와의 휴전 교섭은 주전파인 헤센 파가 스웨덴의 실권을 잡으면서 게르츠가 처형되고 교섭이 중단되었다.[78]헬싱보리에서의 패전 이후 덴마크는 단독으로 스웨덴에 반격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북방 동맹의 붕괴로 순드 해협 남부의 이전 영토를 되찾을 군사적 상황도 없었고, 스웨덴군의 노르웨이 공격에도 수비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칼 12세의 죽음으로 위기를 벗어나 스웨덴의 간섭이 종료되어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주군을 잃은 스웨덴군도 철수 시의 맹렬한 눈보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캐롤리언 죽음의 행진" ''karolinernas dödsmarsch'').[78]
5. 2. 유산과 평가
칼 12세는 평생을 전쟁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고 자녀도 없었다. 1718년 11월 30일, 노르웨이군과 전투 중 전장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6] 그의 누이 울리카 엘레오노라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결국 남편 프레데리크 1세에게 양위해야 했다.[17]칼 12세는 성적인 관계와 술을 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0] 젊은 시절 왕위 계승을 위해 적합한 배우자를 찾으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그는 성과 결혼에 대한 주제를 회피했다. 가능한 후보로는 덴마크의 조피아 헤드비히 공주, 루이즈 마리아 스튜어트, 마리 엘리자베스 폰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주 등이 있었지만, 그는 후자에 대해 "사탄처럼 추하고 악마처럼 큰 입"을 가진 사람과는 절대 결혼할 수 없다고 말했다.[41] 대신 그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 왕조의 압력보다는 사랑으로 결혼할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그의 정부 부재는 강한 종교적 신념 때문일 수 있다.[42] 칼 12세는 악셀 뢰벤과의 대화에서 평화가 확보될 때까지 어떤 중매도 적극적으로 거부했으며,[43] 어떤 의미에서는 군생활과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제안했다.[44]
그는 뢰벤과의 대화에서 아름다운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절제하지 않으면 성적 욕망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될까 두려워했고, 만약 그런 것에 헌신한다면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45]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홀슈타인고토르프를 왕조적으로 선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족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덴마크와의 결혼을 거부했다고 주장한다.[46] 블래닝과 몬테피오레와 같은 역사가들은 그가 동성애자였다고 믿는다.[47] 칼 12세가 작센 선제후 뷔르템베르크의 막시밀리안 에마누엘과의 친밀함을 나타냈다는 편지가 있는데, 칼은 그를 "매우 예쁘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해튼은 1960년대에 뷔르템베르크가 매우 이성애적이었으며, 그 관계는 스승과 제자 관계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한다.[48]
칼 12세는 그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1731년, 볼테르는 칼 12세의 전기인 ''샤를 12세의 역사''를 저술했다. 볼테르는 표트르 대제의 잔혹함에 대비하여 스웨덴 왕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65]
사무엘 존슨은 그의 시 "인간적 욕망의 허무"에서 칼 12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스웨덴 작가 프란스 G. 벵트손과 라그닐드 해튼 교수는 스웨덴의 칼 12세의 전기를 저술했다.[66][67]
칼 12세의 죽음에 관해서는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고 여겨져, 1994년 이후의 조사에서는 이 전쟁에 반대했던 스웨덴 귀족이나 왕위 계승자의 파벌에 의한 음모에 의한 암살설이 강해졌지만, 2005년 이후에는 암살설에 대한 반론도 제기되어 결론이 나지 않았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평가할 때 카를 12세를 비교 대상으로 삼아, 그는 위대한 천재라고 부를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대가 아시아였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같은 명성을 얻었을 것이라고 평가하며, 독일 군사학적 관점에서 카를 12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선구자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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