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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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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모는 삼국 시대 오나라의 인물로, 육손의 동생이다. 그는 학문을 숭상하고 의로운 행실을 실천했으며, 손권의 요동 정벌 계획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이를 무산시키기도 했다. 육모는 손권의 부름을 받아 관직에 나아가 의랑, 선조상서를 역임했으며, 239년에 사망했다. 진수는 육모를 군자에 비견될 만하다고 평가했다. 그의 후손들은 서진 시대에도 관료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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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모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육모
원어 이름陸瑁
자장(子璋)
상세 정보
출생지쑤저우, 장쑤성
사망년도239년
직책의랑(議郎)
임기 시작232년
통치자손권
가족 관계
아버지육준
육손
자매고승의 어머니
종조부육강
재종손육기
친척육개
자녀이름 미상 첫째 아들
육희
육영

2. 생애

삼국시대 오나라의 관료. 자는 자장(子璋)이며, 양주 오군 오현(현재 장쑤성 쑤저우시) 출신이다.[2] 동오의 명장 육손의 동생으로,[2]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종조부 육강 밑에서 자랐다.[10]

젊은 시절 학문과 의로움을 중시하고 청빈한 선비들과 교류했으며,[18][3] 서원의 아들과 사촌 육적의 자녀들을 돌보는 등[4][18][5]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여러 차례 관직 제의를 사양하다[5][18] 가화 원년(232년) 손권의 부름으로 출사하여[18][7] 의랑, 선조상서 등을 역임했다.[18][7]

주요 활동으로는 손권의 무리한 요동 정벌 계획을 상소를 통해 중단시킨 일이 있다.[18][7][8] 당시 공손연이 오나라를 배신하고 위나라에 귀순하자 손권이 원정을 계획했으나, 육모는 원정의 위험성과 국내 산월 문제 등을 지적하며 반대했다. 또한 동료 관료 기엄에게 충고하거나[6] 인물(문인민)을 정확히 평가하는[9] 등 직언과 안목을 보여주었다.

적오 2년(239년)에 형 육손보다 먼저 사망했다.[1][18]

2. 1. 어린 시절과 학문

육손(陸遜)의 동생으로,[2] 오군 오현(吳縣) (현재 장쑤성 쑤저우시) 출신이다.[2]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의로움을 중시했으며,[18][3] 청빈한 선비들과 고락을 함께 나누었다.[18]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가난하지만 야심이 컸던 친구들인 진융(陳融), 복양일(濮陽逸), 장찬(蔣纂), 원적(袁迪) 등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며 교류했다.[3]

그의 덕행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가지 전해진다. 동향 사람인 서원(徐原)은 회계군으로 이주했는데, 평소 육모와 안면이 없었음에도 죽기 전 편지를 보내 어린 아들을 부탁했다. 육모는 이를 받아들여 서원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그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길렀다.[4][18] 또한 숙부인 육적(陸績)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자녀들을 거두어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여 가문을 잇게 했다.[5][18]

이러한 행실로 명성이 높아져 군(郡)에서 여러 차례 초빙과 천거가 있었으나, 육모는 모두 거절하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5][18] 그러나 가화(嘉禾) 원년(232년)에 조카인 고승(顧承)과 함께 손권(孫權)의 부름을 받아 마침내 출사하여 의랑(議郞)과 선조상서(選曹尙書)를 역임했다.[18][7]

2. 2. 출사와 관직 생활

젊은 시절 여러 차례 관직 제의를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던 육모는 가화 원년(232년)에 이르러 손권의 부름을 받고 조카 고승과 함께 출사하였다.[18][5] 그는 의랑과 선조상서를 역임했는데,[18][7] 선조상서는 오늘날의 인사 담당관에 해당한다.[6]

관직 생활 중 육모의 가장 중요한 활동 중 하나는 공손연 정벌을 반대한 것이었다. 당시 요동의 군벌 공손연이 손권이 보낸 사신을 살해하고 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8][7] 이에 격분한 손권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18][7] 육모는 손권의 계획에 반대하며 두 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첫 상소에서 그는 공손연을 '예의를 모르는 금수와 같은 자'로 칭하며, 섣불리 공격하면 공손연이 위나라와 동맹을 맺을 수 있고, 내부적으로는 산월의 준동을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18][7] 손권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자, 육모는 다시 상소를 올려 전쟁의 어려움을 강조했다. 그는 오나라가 안으로는 산월 문제를, 밖으로는 와의 충돌을 안고 있는 상황에서, 먼 곳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정을 떠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황제의 부재 시 산월 부족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지적하며 국정 안정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18][7][8] 손권은 육모의 논리 정연하고 진심 어린 간언을 받아들여 마침내 요동 정벌 계획을 철회했다.[18][8]

또한 육모는 동료 관료였던 기엄의 행동에 대해 충고하기도 했다. 기엄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를 즐겨 했고, 특히 선조상서로 있을 때 동료들의 약점을 들추어 자신의 날카로움을 과시하려 했다. 육모는 기엄에게 타인의 과거 잘못을 덮어주고 장점과 공헌을 칭찬하며, 오나라의 발전을 위해 건설적인 문화를 조성하라고 조언했으나, 기엄은 이를 듣지 않고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다.[6]

육모는 사람을 보는 안목도 지녔다. 같은 고향 출신인 문인민(聞人敏)이라는 인물이 수도에서 실제 능력 이상으로 칭송받으며 과분한 대접을 받았을 때, 육모는 그의 실체를 간파하고 예법에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훗날 문인민은 육모의 평가대로 실제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임이 드러났다.[9]

육모는 적오 2년(239년)에 형 육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1][18]

2. 3. 공손연 정벌 반대

가화(嘉禾) 연간(232년[7] 또는 233년[18]), 요동(遼東)의 군벌 공손연(公孫淵)이 오나라와의 동맹 약속을 저버리고 손권(孫權)이 보낸 사신을 살해한 뒤 위나라(魏)에 귀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8][7] 이에 손권은 크게 분노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18][7]

당시 선조상서(選曹尙書)였던 육모는 이러한 손권의 계획이 무모하다고 판단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첫 번째 상소에서 공손연을 "예의를 모르는 금수와 같은 자"라고 칭하면서도, 성급하게 정벌에 나설 경우 공손연이 위에 완전히 의탁하게 될 위험성과 내부적으로 산월(山越)의 위협에 노출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18][7] 또한 먼 거리를 원정하는 것 자체의 어려움과 군주가 자리를 비웠을 때 국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혼란 가능성도 지적했다.[7]

하지만 손권은 육모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8][7] 이에 육모는 다시 한번 상소를 올려 간언했다. 그는 "전쟁이란 국가가 안정된 상황에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현재 오나라는 안으로 산월 문제와 밖으로 위나라와의 끊임없는 마찰을 겪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하며, 이러한 상황에서 먼 곳의 반역을 이유로 원정을 떠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주장했다.[18][8] 그는 공손연을 공격하기보다는 오나라 내부의 안정을 다지고 장기적인 방어 태세를 갖추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8]

손권은 육모의 거듭된 간언과 그 논리가 타당하다고 판단하여[18][8], 결국 요동 정벌 계획을 철회하였다.[18][8]

2. 4. 말년

가화(嘉禾) 원년(232년), 육모는 조카인 고승(顧承)과 함께 손권(孫權)에게 소환되어 출사하여 의랑(議郎)과 선조상서(選曹尚書)의 관직에 올랐다.[7]

당시 요동의 군벌 공손연(公孫淵)이 오나라와의 맹세를 어기고 위나라에 귀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손권은 격노하여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요동 원정을 계획했지만, 육모는 상소를 올려 간언했다.[7] 그는 원정의 위험성과 산월(山越)의 배후 교란 가능성 등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7]

> "공손연은, 말하자면 예의를 모르는 금수와 같은 부류입니다.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러한 짐승이나 도적 때문입니다. 지금, 상께서는 그 자를 정벌하실 생각을 하시지만, 함부로 쳐들어가면 공손연은 위와 결탁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원정에 정신이 팔려서는, 우리 역시 산월(山越)에게 발목을 잡힐 것입니다."[7]

그러나 손권은 듣지 않았으므로, 육모는 다시 상소를 올렸다.[8]

> "전역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국내가 다스려져도 어려운 것입니다. 현재, 오나라는 산월 등 이민족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으며, 밖으로는 위와의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득히 먼 곳에서 반역이 일어났다고 원정을 가는 것은, 어떠하겠습니까?"[8]

이것을 읽은 손권은 육모의 논리 정연한 의견에 납득하고, 원정을 취소했다.[8]

육모와 같은 군 출신인 문인민(聞人敏)이 도성에서 칭송받고, 소양이 있는 인물 이상으로 평가받은 적이 있었다. 다만 육모만이 그를 그 정도의 인물로 평가하지 않았는데, 후에 문인민은 육모의 예상대로 실체를 드러냈다.[9]

육모는 적오(赤烏) 2년(239년)에 사망했다.[1] 이는 형인 육손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3.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육모의 공식 전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육모는 의를 중시하고 적절한 조언을 했다. 그는 군자로 여겨질 만하다."[14]

4. 가계

육모는 동오의 저명한 장군이자 승상이었던 육손의 동생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 외종조부인 후한 말 여강군(廬江郡) 태수 육강 밑에서 자랐다.[10] 육모는 오나라와 이후 서진 시대에 걸쳐 활동한 여러 인물을 배출한 가문의 일원이다. 그의 아들 육희[11][12][13]와 육영(陸英), 그리고 손자 육엽과 육완 등은 서진에서 관직을 지냈다.[12][13] 자세한 가계와 인물 정보는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4. 1. 친족 관계

육모의 형 육손


육모의 형 육손은 동오의 저명한 장군이자 정치가였으며, 245년 사망하기 전까지 약 1년간 오나라의 세 번째 승상을 지냈다. 육손과 육모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외종조부인 육강의 손에서 자랐다. 육강은 후한 말기 여강군(廬江郡)의 태수였다.[10] 육강의 아들 육기는 오나라의 창업 황제 손권 휘하에서 활동한 학자이자 관료였으며, 이십사효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육모는 육기가 사망한 후 그의 딸 육유생과 어린 아들들을 돌보았다.

육모에게는 아들이 최소 세 명 있었다. 맏아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둘째 아들 육희(陸喜)의 자는 공중(恭仲) 또는 문중(文仲)이었으며, 학문에 정진했으며 사교적인 성격으로 알려졌다. 그는 손호 치세 동안 선조상서(選曹尚書)와 이부에서 벼슬을 지냈다.[11] 280년 서진이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육희는 서진 조정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다.[12][13]

셋째 아들 육영(陸英)은 서진에서 산기상시와 고평상(高平相)을 지냈다. 육영의 아들로는 육엽(陸曄)과 육완(陸玩)이 있었다. 육엽의 자는 사광(士光)으로, 서진 조정에서 거기장군 및 의동삼사(儀同三司)의 지위에 올랐다. 육엽의 동생 육완의 자는 사요(士瑤)였으며, 관대함으로 알려졌다. 육완 역시 서진 조정에서 사공(司空)을 지냈고, 사후에는 태위(太尉)로 추증되었다. 『진양추』에 따르면 육완은 넓은 도량과 정당한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12][13]

4. 2. 가계도



육모의 형인 육손은 동오의 저명한 장군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245년 사망하기 전까지 약 1년 동안 오나라의 세 번째 승상을 지냈다. 육손과 육모는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외종조부인 육강의 손에서 자랐는데, 육강은 후한 말기에 여강군(廬江郡)의 태수였다.[10] 육강의 아들 육기는 오나라의 창업 황제 손권 휘하에서 관료로 활동한 학자였으며, 이십사효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육모는 육기가 사망한 후 그의 딸 육유생과 어린 아들들을 돌보았다.

육모에게는 최소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맏아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둘째 아들 육희(陸喜)는 자(字)가 공중(恭仲) 또는 문중(文仲)이었으며, 학문에 정진하고 사교적인 성품으로 알려졌다. 그는 손호 치세 동안 선조상서(選曹尚書)와 이부에서 벼슬을 지냈다.[11] 280년 서진이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서진 조정에서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다.[12][13]

셋째 아들 육영(陸英)은 서진에서 고평상(高平相)과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를 지냈다. 육영에게는 아들 육엽(陸曄)과 육완(陸玩)이 있었다. 육엽의 자는 사광(士光)이었으며, 서진에서 거기장군과 의동삼사(儀同三司)의 지위에 올랐다. 육완의 자는 사요(士瑤)였으며, 도량이 넓고 교양이 바르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서진에서 사공(司空)을 지냈고, 사후에는 태위(太尉)로 추증되었다.[12][13]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57
[2] 서적 Sanguozhi vol. 58
[3] 서적 Sanguozhi vol. 57
[4] 서적 Sanguozhi vol. 57
[5] 서적 Sanguozhi vol. 57
[6] 서적 Sanguozhi vol. 57
[7] 서적 Sanguozhi vol. 57
[8] 서적 Sanguozhi vol. 57
[9] 서적 Sanguozhi vol. 57
[10] 서적 Sanguozhi vol. 58
[11] 서적 Sanguozhi vol. 57
[12] 서적 Wu L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7
[13] 서적 Jin Shu vol. 77
[14] 서적 Sanguozhi vol. 57
[15] 서적 三国志巻58
[16] 서적 三国志巻57
[17] 서적 三国志巻61
[18] 서적 삼국지 http://zh.wiki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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