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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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원거는 조선 인조~현종 시기의 문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이수광의 칭찬을 받았다. 김장생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익혔으며,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병자호란 이후 학문에 전념하며 벼슬을 사양했으나, 효종 때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고, 현종 때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어 수기치인의 도를 논했다. 예송 논쟁에서 남인을 옹호했으며, 시율에 능했으나 저술은 즐겨하지 않았다. 1672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구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윤원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이수광(李睟光)의 칭찬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2. 생애
1633년(인조 11)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 유생 시절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文廟從祀) 운동에 참여했으나, 반대파와의 논쟁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주전론을 주장했으나, 부친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후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1658년(효종 9)부터 여러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했다. 공조좌랑, 정랑, 종부시주부, 성균관사업, 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복제예송에서 남인 권시(權諰)를 옹호하여 송시열 일파의 비난을 받았다. 1661년부터 여러 차례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1670년(현종 11)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 내용은 솔선수범, 입지(立志), 정심(正心), 면학(勉學), 휼민(恤民), 근검절약, 무사봉공(無私奉公) 등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청요직(淸要職)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산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종형제인 윤문거, 윤선거, 윤순거 등과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시율(詩律)에는 뛰어났으나 저술은 즐겨하지 않았다. 1672년(현종 13)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생애
윤원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이수광(李睟光)의 칭찬을 받았다. 가정에서 학문을 익힌 뒤 1625년(인조 3)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2. 2. 학문 활동과 관직 진출
1633년(인조 11)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성균관 유생 시절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文廟從祀)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반대파와의 논쟁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주전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부친이 강화도에서 순절한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658년(효종 9)부터 학문과 덕행으로 여러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하였다. 공조좌랑, 정랑, 종부시주부, 성균관사업, 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2. 3. 예송 논쟁과 남인 옹호
1660년(현종 1) 복제예송에서 남인 권시(權諰)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가 송시열 일파의 비난을 받았다. 1661년부터 여러 차례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2. 4. 후기 생애
1670년(현종 11) 세자시강원 진선에 임명되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 내용은 솔선수범, 입지(立志), 정심(正心), 면학(勉學), 휼민(恤民), 근검절약, 무사봉공(無私奉公) 등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청요직(淸要職)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산에서 가난하게 살면서 종형제인 윤문거, 윤선거, 윤순거 등과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시율(詩律)에 뛰어났으나 저술은 즐겨하지 않았다. 1672년(현종 13)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고조부 윤선지(尹先智) 병마절도사 증조부 윤돈(尹暾) 증좌승지 조부 윤창세(尹昌世) 증참판 조모 청주 경씨 대제학 경혼의 딸 아버지 윤전(尹烇) 어머니 해평 윤씨 윤환(尹晥)의 딸, 윤근수(尹根壽)의 손녀 첫째 부인 안동 권씨 정자 권경(權儆)의 딸 둘째 부인 영일 정씨 진사 정유번(鄭維藩)의 딸 셋째 부인 광산 김씨 군수 김현(金灦)의 딸 장녀 - 김화진(金華鎭)에게 출가 차녀 - 민중재(閔仲才)에게 출가 삼녀 - 김세성(金世聲)에게 출가 사녀 - 조석우(曺錫禹)에게 출가 오녀 - 박여성(朴汝聖)에게 출가 장남 윤주(尹拄) 차남 윤유(尹揄) 삼남 윤부(尹拊) 백부 윤수(尹燧) 사촌형 윤순거 중부 윤황(尹煌) 사촌동생 윤문거 사촌동생 윤선거
4. 행력
시기 내용 1601년(선조 34) 4월 10일, 충청도 이산현(伊山縣衙)에서 태어났다. 1617년(광해군 9) 안동 권씨 권경(權儆)의 딸과 혼인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4월, 부인 권씨(權氏)를 곡(哭)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영일 정씨 정유원(鄭維垣)의 딸과 혼인하였다. 1623년(인조 1) 성문준에게 편지를 보내 이기(理氣)를 논하였다. 1625년(인조 3) 형 윤순거와 함께 연산(連山)으로 김장생을 찾아가 《주역》의 의문점에 대해 배웠다. 1628년(인조 6) 7월, 모친상을 당하였다. 1631년(인조 9) 8월, 김장생을 곡(哭)하였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1635년(인조 13) 관학 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를 문묘에 배향하기를 청하였다. 1636년(인조 14) 7월, 아들 윤주(尹拄)가 태어났다. 1637년(인조 15) 1월, 부친상을 당하였다. 1638년(인조 16) 부친의 묘지명(墓誌銘)을 조익에게 청하였다. 1639년(인조 17) 복(服)을 마치고 노산(魯山) 동쪽 계룡산(鷄龍山) 서쪽에 마련한 집으로 돌아왔다. 뒤에 계룡지서(鷄龍之西)의 ‘용서(龍西)’로 호를 삼았다. 6월, 중부(仲父) 윤황(尹煌)을 곡(哭)하였다. 1641년(인조 19) 8월, 부인 정씨(鄭氏)를 곡(哭)하였다. 1643년(인조 21) 광산 김씨 군수 김현(金灦)의 딸과 혼인하였다. 1645년(인조 23) 4월, 종질(從姪) 윤증의 관례(冠禮)에 빈(賓)이 되었다. 1646년(인조 24) 연산(連山) 봉황촌(鳳凰村)으로 이주하였다. 6월, 신독재 김집을 찾아뵈었다. 이때에 종제(從弟)인 노서 윤선거와 함께 둔암서원에 가서 송시열, 이유태 등과 강론(講論)하였다. 백강 이경여를 전송하는 시를 지었다. 1647년(인조 25) 7월, 아들 윤유(尹揄)가 태어났다. 1650년(효종 1) 3월, 아들 윤부(尹拊)가 태어났다. 1653년(효종 4) 3월, 심지원(沈之源)과 이행진(李行進)의 천거로 제릉 참봉(齊陵 參奉)이 되었다. 윤선거와 함께 보광사(普光寺)로 시남 유계를 방문하고 역전의의(易傳疑義)와 후천설(後天說)을 강론하였다. 7월, 윤선거 등과 둔원에 모여 태극도(太極圖)를 강론하였다. 윤7월, 유계 등과 황산(黃山)에서 만났다. 8월, 후당(後塘)에서 종회(宗會)를 하였다. 1654년(효종 5) 4월, 윤선거, 유계, 송시열 등과 고란사(皐蘭寺)에서 만났다. 1655년(효종 6) 3월, 조익을 곡(哭)하였다. 1656년(효종 7) 종형제(從兄弟)인 윤순거, 윤선거와 함께 보인당(輔仁堂)을 개수(改修)하고 향음의(鄕飮儀)를 강(講)하였다. 윤5월, 신독재 김집을 곡(哭)하였다. 6월, 금부 도사(禁府 都事)가 되었다. 1657년(효종 8) 5월, 윤선거, 유계, 이유태 등과 둔원에 모여 주자주장(朱子奏狀)을 강(講)하였다. 9월, 김제시|김구(金溝)에 가서 종형(從兄) 윤순거를 문안하였다. 1658년(효종 9) 12월,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1659년(효종 10) 윤3월, 공조정랑(工曹正郞)이 되었다. 8월, 종부시 주부(宗簿寺 主簿)가 되었다. 10월, 성균관 사업(成均館 司業)이 되었다. 1660년(현종 1) 5월, 지평(持平)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였다. 9월, 다시 지평에 제수되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예론(禮論)으로 송시열과 사이가 어긋난 윤휴, 권시(權諰) 등과 친밀했으므로 당시 여론의 배척을 받았다. 1661년(현종 2) 1월, 정장(呈狀)하여 체직(遞職)되었다. 1662년(현종 3) 2월, 보인당(輔仁堂)에서 강학(講學)하였다. 1663년(현종 4) 8월, 동춘 송준길을 방문하였다. 9월, 장령(掌令)으로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정장(呈狀)하여 체직되었다. 12월, 사(司業)가 되었다. 1664년(현종 5) 2월, 장령(掌令)으로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정장(呈狀)하여 체직되었다. 3월, 시남 유계를 곡(哭)하였다. 우암 송시열의 손자 송주석(宋疇錫)의 관례(冠禮) 모임에 참여하였다. 1665년(현종 6) 3월, 임천(林川) 笠浦에 있는 민성휘(閔聖徽)의 별업(別業)을 빌려 이주하였다. 9월, 장령(掌令)을 제수받아 서울로 가는 윤순거를 전송하였다. 1666년(현종 7) 장령(掌令)으로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정장(呈狀)하여 체직되었다. 1667년(현종 8) 4월, 사도시 정(司䆃寺 正)이 되었다. 1668년(현종 9) 2월, 笠浦에서 봉촌(鳳村) 옛집으로 돌아왔다. 12월, 윤순거를 곡(哭)하였다. 1669년(현종 10) 1월, 특별 유지(有旨)를 내려 불렀으나 정장(呈狀)하여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4월, 장령(掌令)으로 소명(召命)을 받았으나 정장(呈狀)하여 체직되었다. 노서 윤선거를 곡(哭)하였다. 1670년(현종 11) 4월, 시강원 진선(侍講院 進善)에 제수되어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다가 얼마 뒤 정장(呈狀)하여 체직되었다. 1671년(현종 12) 7월, 장령(掌令)에 제수되었으나 체직되었다. 조복양을 곡(哭)하였다. 1672년(현종 13) 7월 12일, 졸(卒)하였다. 8월, 공주(公州) 판치(板峙)에 장사 지냈다. 1775년(영조 51) 문집이 간행되었다. (윤광소(尹光紹)의 서(序))
4. 1. 주요 행적
尹元擧|윤원거중국어는 1601년(선조 34) 충청도 이산현(伊山縣衙)에서 태어났다. 1625년(인조 3) 형 윤순거(尹舜擧)와 함께 연산(連山)으로 김장생을 찾아가 《주역》의 의문점에 대해 배웠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윤원거는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1658년(효종 9) 공조좌랑 등 여러 관직이 내려졌으나, 대부분 사양하였다. 1660년(현종 1) 예송 논쟁에서는 남인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여 당시 여론의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1670년(현종 11)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1672년(현종 13) 7월 12일에 사망하였으며, 공주 판치(板峙)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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