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원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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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은원융기는 중국 명나라 시대에 태어나 황벽산 완푸 사찰에서 승려가 된 인물로, 1654년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가 오바쿠 선종을 창시했다. 그는 1661년 교토 우지에 오바쿠 본산 만푸쿠지를 세웠으며, 일본 선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은원융기는 1673년 만푸쿠지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여러 차례 시호를 받았다. 그는 서예가로서도 명성이 높았으며, 저서로는 『황벽청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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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승 - 선사
선사는 불교에서 수행 승려에 대한 존칭으로, 특히 선 수행을 통해 높은 경지에 이른 승려를 지칭하며, 선종의 스승이나 전법을 인정하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 선승 - 보디다르마
보리달마는 5~6세기경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종을 전파한 승려로, 남인도 출신으로 추정되며, 양나라 무제와의 문답, 소림사 9년 면벽좌선, 혜가에게 법을 전한 이야기 등으로 유명하고, 좌선과 벽관을 강조하며 돈오와 불성을 중요시하여 동아시아 선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명나라의 승려 - 요광효
요광효는 명나라 초기의 승려이자 정치 전략가로, 영락제를 도와 정난의 변을 성공시켜 명나라 건국에 공헌했으며, 영락제 즉위 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문학적 재능을 발휘하며 만년에는 성리학을 비판한 《도여록》을 저술했다. - 명나라의 승려 - 지선선사
지선 선사는 북송 시대 소림사 승려로, 남소림사 멸망 이후 혁명가로 활동하거나 푸젠성에 두 번째 남소림사를 세웠다는 설이 있으며, 청나라 전복을 시도하다 사망하고 소설과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 선불교의 조사 - 혜가
혜가는 중국 선종의 제2대 조사로, 보리달마를 만나 제자가 되기 위해 팔을 자르는 일화로 유명하며, 달마로부터 법을 전수받아 선종을 널리 알리다가 승려의 모함으로 처형되었다. - 선불교의 조사 - 백장회해
백장회해는 당나라 시대 마조도일의 제자로, 선 수행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하고 최초의 독립적인 선 사찰을 발전시켰으며, 노동과 농사를 수행 생활에 포함시키고 《백장청규》를 제정하여 선종 발전에 기여한 선승이다.
은원융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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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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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린 쩡빙 (Lin Zengbing) |
속명 | 린 쩡빙 |
법명 | 인위안 롱치 (Yinyuan Longqi) |
시호 | 대광보조국사, 불자광감국사, 경산수출국사, 각성원명국사 |
존칭 | 진공대사, 화광대사, 엄통대사, 황벽기선사 |
출생일 | 1592년 12월 7일 |
출생지 | 푸젠성푸저우시푸칭시 완안향 영득리 동림 (중국 명나라) |
사망일 | 1673년 5월 19일 |
사망지 | 우지시, 교토부, 일본 |
국적 | 명나라 |
종교 | 불교 |
종파 | 선종 |
가계 | 임제종 |
사원 | 고후쿠지, 후몬지, 황벽산 만푸쿠지 |
법맥 | |
스승 | 미윈 위엔우, 페이인 통롱, 지엔위안 싱쇼우 |
제자 | 모쿠안 쇼토, 소쿠히 뇨이츠, 에린 쇼키, 류케 쇼센, 도쿠탄 쇼케이, 도쿠리츠 쇼에키, 테츠가이 도쿠 |
저서 | |
주요 저서 | 『인겐 선사 어록』, 『황벽청규』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기타 겐키 |
2. 생애
은원 융기는 1592년 12월 7일 명나라 푸젠성 푸칭에서 태어나 1673년 5월 21일 일본 교토 만푸쿠지에서 사망한 임제종 승려이다. 1654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선종의 한 분파인 황벽종을 창시하고 만푸쿠지를 건립하는 등 일본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은원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불교에 귀의하여 미운 원오와 페이인 통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637년 황보 산 완푸 사찰의 주지가 되어 사찰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1654년 잇센 쇼유의 요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1]
일본에서 은원은 1661년 교토 우지에 만푸쿠지를 건립하고,황벽청규를 통해 당시 혼란스러웠던 일본 선종 각 파의 종통과 규구를 바로잡는 데 기여했다. 고미즈노오 법황을 비롯한 황족, 막부 요인, 다이묘, 상인 등 많은 이들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2] 1664년 주지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만푸쿠지에서 여생을 보내다 1673년 82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2. 1. 중국에서의 삶 (1592-1654)
1592년 12월 7일, 명나라 푸젠성 푸칭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린쩡빙이며, 아버지 린더룽은 6세 때 후난·후베이 방면으로 떠난 후 소식이 끊겼다. 10세에 불교에 뜻을 두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출가는 하지 못했다. 20세에 결혼을 권유받았지만 아버지와 만난 후에 하겠다며 거절하고, 21세 때 아버지를 찾아 저장으로 떠났으나 찾지 못했다.[6] 23세에 닝보부 푸퉈산 차오인동 주지에게 참배하여 재가 신자로 1년 정도 다두(茶頭)로 봉사했다.28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인린사에서 젠위안싱쇼우를 만나 황벽산만복사에서 출가할 것을 권유받아 1620년 출가했다.[6] 29세에 황벽희운도 주석했던 황벽산 만복사의 젠위안싱쇼우에게서 득도했다.[5]
33세에 금속산 광혜사에서 미운원오에게 참선했고,[5] 미운이 만복사에 진산할 때 그를 따라갔다. 35세에 황벽산의 페이인퉁롱에게서 인가를 받았다.[5] 38세에 미운은 제자인 페이인퉁롱에게 만복사를 잇게 하고 은퇴했지만, 은원은 그대로 만복사에 남아 45세에 페이인에게 법을 이었다.
그 후 만복사를 나와 사자암에서 수행하다가, 페이인이 물러난 후 황벽산 주지로 초빙되어 1637년부터 7년간 황벽산 주지를 역임했다.[5] 이후 물러났지만, 명말 청초의 혼란이 푸젠에도 미치자 1646년에 다시 주지로 복귀하여 9년간 역임했다.[5]
1654년, 잇센 쇼유의 거듭된 요청으로 제자 무옌 등 약 30명의 승려 및 장인들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갔다.
2. 2. 일본으로 건너감 (1654)
1654년 잇센 쇼유의 거듭된 요청으로, 제자 무옌 등 약 30명의 승려 및 장인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갔다.[1] 에도 시대 초기, 나가사키의 당인사였던 소후쿠지 주지 자리가 비게 되자, 먼저 일본으로 건너와 있던 고후쿠지 주지 이츠넨쇼우융이 잉겐을 일본으로 초청했다.[5]처음에 잉겐은 제자 야랑쇼우케이를 파견했지만, 도중에 배가 좌초되어 객사했다. 잉겐에 대한 일본 초청은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정성공이 준비한 배를 타고 20명 이상의 제자를 이끌고[6] 쇼오 3년 (1654년) 7월 5일 밤에 나가사키에 입항했다. 수행한 제자로는 료세이, 료켄, 도쿠치, 다이비, 도쿠겐, 료엔, 이츠이치, 무죠, 난겐, 도쿠코 등이 있으며, 겟슈히쓰 『보조국사래조지도』에 이 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잉겐이 들어간 고후쿠지에는, 묘젠의 새로운 풍조와 잉겐의 고덕을 사모하는 안목 있는 승려와 학자들이 운집하여, 승속 수천 명에 달하는 활황을 보였다.
2. 3. 일본에서의 활동 (1654-1673)
1654년, 잇센 쇼유의 거듭된 요청으로 은원 융기는 제자 무옌을 포함한 약 30명의 승려 및 장인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갔다. 그는 일본에서 선종을 창시했다.[1] 처음에는 제자인 야랑쇼우케이를 파견했지만, 도중에 배가 좌초되어 객사하였다. 은원에 대한 일본 초청은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20명 이상의 제자를 이끌고[6], 정성공이 준비한 배를 타고 1654년 7월 5일 밤에 나가사키에 입항했다.은원이 들어간 고후쿠지에는 묘젠의 새로운 풍조와 은원의 고덕을 사모하는 승려와 학자들이 운집하여, 수천 명에 달하는 활황을 보였다. 1655년에는 소후쿠지로 옮겼다.[5] 같은 해, 묘신지 전 주지인 류케이쇼우센의 간청에 따라, 셋쓰 시마카미 (현재의 오사카부다카츠키시)의 후몬지에 진산했지만,[5] 은원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에도 막부에 의해 절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당했으며, 절 내의 회중도 200명 이내로 제한되었다.
은원은 처음에는 3년 간 일본에 머무를 약속이었으며, 본국에서 거듭 귀국 요청을 하여 귀국을 결심했지만, 류케이 등이 만류하였고, 1658년에는 막부 제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츠나와 회견했다.[5] 그 결과, 1660년, 야마시로국우지군 오와다에 절 부지를 하사받아, 이듬해 새 절을 개창하고, 옛것을 잊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아 모국의 절과 같은 이름인 '''황벽산 만푸쿠지'''라고 이름지었다. 1661년 교토 우지에 오바쿠 본산 만푸쿠지를 세웠다.[2]
1663년에는 완성된 법당에서 축국 개당을 행하고, 민중에게는 일본 최초의 수계인 "황벽 삼단계회"를 엄수했다. 이로 인해 은원은 일본 선계의 한 파의 개조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황벽종이라고 자칭한 것은 아니었다. 본인은 엄연한 임제종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므로 임제정종을 자칭했다. 다만, 종풍이나 총림으로서의 규구청규는 당시 중국·명나라 시대의 임제선에 따랐기 때문에 이미 일본에 뿌리내린 임제종과는 취향을 달리했고, 그 차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한 파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은원의 『황벽청규』는 혼란을 겪고 있던 당시 선종 각 파의 종통·규구의 쇄신에 큰 영향을 미쳤고, 특히 만산도백 등에 의한 조동종의 종문 개혁에서는 중요한 본보기로 여겨졌다.
은원에게는 고미즈노오 법황[5]을 시작으로 하는 황족, 막부 요인을 비롯한 각지의 다이묘, 많은 상인들이 앞다투어 귀의했다.
만복사의 주지 지위에 있었던 것은 3년이었고, 1664년 9월에 후임은 제자인 목암성도에게 이양하고 송은당으로 물러났다.
송은당에 물러난 후, 82세를 맞이한 1673년 정월, 은원은 죽음을 예지하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3월이 되자 건강이 더욱 악화되어, 1673년 5월 21일(엔포 1년, 4월 5일)에 만복사에서 사망했다.[2]
2. 4. 황벽종 개창
은원은 일본 선종의 한 파인 황벽종의 개조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임제종을 잇는다는 자부심으로 임제정종을 자칭했다. 그러나 종풍이나 총림의 규구(청규)는 당시 중국 명나라 시대의 임제선을 따랐기 때문에, 이미 일본에 뿌리내린 임제종과는 차이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파를 형성하게 되었다.은원의 『황벽청규』는 혼란스러웠던 당시 선종 각 파의 종통·규구 쇄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만산도백 등에 의한 조동종 종문 개혁의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5]
고미즈노오 법황을 비롯하여 황족, 막부 요인, 각지의 다이묘, 많은 상인들이 은원에게 앞다투어 귀의했다.[5]
2. 5. 만년과 죽음
隱元|은원중국어은 1664년 9월에 주지 자리를 제자인 목암성도에게 물려주고 송은당으로 은퇴했다.[1]隱元|은원중국어은 송은당에서 은거하던 중, 82세가 되던 1673년 1월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해 3월, 건강이 더욱 악화되자 4월 2일에는 고미즈노오 법황으로부터 "대광보조 국사"라는 호를 받았다.[5] 4월 3일에는 유게(遺偈, 죽음에 이르러 남기는 게송)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향년 82세.[2]
3. 사후
1673년 고미즈노오 법황으로부터 "대광보조국사" 호를 받은 후, 50년마다 황실로부터 시호를 받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연도 | 천황 | 시호 |
---|---|---|
1722년 | 레이겐 상황 | 불자광감국사 |
1772년 | 고사쿠라마치 상황 | 경산수출국사 |
1822년 | 코카쿠 상황 | 각성원명국사 |
1872년 | 당시 불교 배척 정책으로 시호가 내려지지 않음. 국사호·대사호 선하는 1876년에 재개됨. | |
1917년 | 다이쇼 천황 | 진공대사 |
1972년 | 쇼와 천황 | 화광대사 |
2022년 | 현 천황 | 엄통대사[7] |
4. 사상과 영향
인겐은 명나라 서예 양식을 일본에 소개한 뛰어난 서예가였다.[1] 그는 목안과 석희여일과 함께 '황벽 삼필'("황벽의 세 붓") 중 한 명이었다. 인겐은 진헌의 그림을 일본으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저서
『은원선사어록』|殷元禪師語錄|은원선사어록중국어 16권[3]
『보조국사광록』|普照國師廣錄|보조국사광록중국어 30권[3]
『황벽은원선사운도집』|黃檗隱元禪師雲濤集|황벽은원선사운도집중국어 1권[3]
『홍계법의』|弘戒法儀|홍계법의중국어 1권[3]
『황벽산사지』|黃檗山寺志|황벽산사지중국어 1권[3]
『황벽청규』|黃檗清規|황벽청규중국어[3]
『보조국사어록』|普照國師語錄|보조국사어록중국어 3권[3]
『보조국사법어』|普照國師法語|보조국사법어중국어 2권[3]
『송당집』|松堂集|송당집중국어 2권[3]
『태화집』|太和集|태화집중국어 2권[3]
6. 제자
은원융기의 법을 이은 제자는 23명이며, 그 중 3명이 일본인이다.[1]
- 목암성담
- 즉비여일
- 혜림성기
- 용계성잠
- 독담성형
- 대미성선
- 독조성원
- 독본성원
- 독립성역
참조
[1]
서적
"Japan encyclopedia," p. 387.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2]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https://books.google[...]
Google books
[3]
웹사이트
WorldCat Identities
http://www.oclc.org/[...]
[4]
웹사이트
隠元隆琦
[5]
서적
総合仏教大辞典
法蔵館
1988-01
[6]
뉴스
【グローバルウオッチ】中国 インゲン豆の禅僧に脚光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22-07-27
[7]
웹사이트
隠元禅師が大師号を賜りました。
https://www.hozen.or[...]
宝善院
2022-02-25
[8]
웹사이트
日本にインゲン豆と木魚を伝えた隠元さん
https://shuchi.php.c[...]
[9]
웹사이트
フジマメとは
https://kotobank.jp/[...]
[10]
웹인용
중국 불교계, 일본에 마스크 4만장 보시
http://www.hyunbulne[...]
현대불교신문사
20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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