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호 (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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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은호는 동진 시대의 인물로, 뛰어난 식견과 넓은 도량으로 명성을 얻었다. 여러 차례 관직 제안을 고사하다가 결국 받아들였으나, 환온과의 갈등, 북벌 실패로 실각했다. 실각 후에도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했으나, 환온의 계략으로 관직 복귀에 실패하고 신안현에서 사망했다. 사후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그의 일화와 환온과의 관계, 조카와의 이별 등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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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 (동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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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은호는 깊은 식견과 넓은 도량을 갖춘 인물이었다. 20세에 이미 명성이 널리 알려졌으며, 숙부 은융과 함께 도덕경과 주역을 즐겨 읽었다. 은호는 토론에는 은융보다 뛰어났지만, 글을 쓰는 능력은 은융이 더 뛰어났다고 한다.[1]
처음에는 여러 관직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은거 생활을 했다. 함화 9년(334년), 유량의 초빙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나, 곧 유익의 요청과 조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로 다시 은거했다.[1] 10년 가까이 은거하며 관중이나 제갈량에 비유될 정도로 명성이 높아졌지만, 유익은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1] 왕몽과 사상이 벼슬할 뜻을 물었으나 은호는 확고히 거절했고, 유익의 강력한 권유에도 응하지 않았다.[1]
건원 원년(343년)부터 영화 2년(346년) 사이에 유빙 형제와 하충 등이 사망하고, 사마욱 (후의 간문제)이 재상이 되면서 정세가 변했다.[1] 저포의 천거와 사마욱의 요청으로 양주 자사에 임명되었으나, 은호는 여러 차례 사퇴하다가 결국 받아들였다.[1]
영화 3년(347년), 환온이 성한 정벌에 성공하자 조정에서는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은호를 등용했다. 은호는 높은 명성을 바탕으로 사마욱의 지지를 받았으나, 이는 환온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1] 아버지 은선의 사망으로 잠시 관직을 떠났다가 복귀한 후, 순선과 왕희지를 발탁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왕희지는 환온과의 협력을 권했지만, 은호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1]
영화 5년(349년), 후조의 혼란을 틈타 동진 조정은 은호를 중군장군에 임명하여 북벌을 맡겼다. 은호는 중원 탈환을 목표로 삼았으나, 환온 또한 북벌을 주장하며 조정에 군 동원을 요청했다. 조정은 은호를 통해 환온을 견제하려 했고, 환온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1] 영화 7년(351년), 환온은 군사를 이끌고 건강을 위협하며 불만을 표출했고, 조정은 은호를 통해 환온에게 실권을 넘겨주려 했으나 왕표지의 설득으로 중단되었다.[1]
352년, 은호는 허창과 낙양 공략을 위한 북벌을 시작했으나,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공엄과 왕희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벌을 강행했으나, 장우의 반란과 요상과의 갈등으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 특히 요상을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산상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1]
결국 북벌 실패로 인해 은호는 백성들의 원망을 샀고, 환온은 이를 기회로 은호를 파면시켰다. 은호는 관직을 잃고 신안현으로 유배되었으나, 원망하지 않고 평소처럼 지냈다.[1][2] 이후 환온이 은호를 다시 등용하려 했으나, 은호의 실수로 무산되었다.[3]
영화 12년(356년), 은호는 신안현에서 사망했다.[4] 사후 그의 신하였던 고열의 청원으로 명예가 회복되어 생전 관위가 추증되었다.[5] 아들 은견은 환온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했다.[6]
2. 1. 초기 생애와 은거
깊은 식견과 넓은 도량을 갖추고 있었으며, 청명함은 원대했다.[1]20세에 그의 평판이 널리 퍼졌고, 특히 청담에서 그 이름을 떨쳤으며, 숙부인 은융과 함께 『도덕경』과 『주역』을 즐겨 읽었다.[1] 은호는 설전에서는 은융을 능가했지만, 글을 저술하여 설을 세우는 것에서는 은융이 이겼다고 한다.[1] 이로 인해 풍류로운 변사들로부터 숭배를 받았다.[1]
처음에는 삼부(태위, 사도, 사공)로부터 초빙을 받았지만, 모두 사퇴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1]
함화 9년(334년) 6월, 정서장군 유량에게 초빙되어 기실참군이 되었고, 더욱 승진하여 사도좌장사에 임명되었다.[1] 이윽고 안서 유익으로부터 사마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조칙에 의해 시중·안서군사에도 임명되었지만, 모두 병을 칭하며 받아들이지 않고, 묘소가 있는 황산에서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1]
그 후 10년 가까이 은거 생활을 계속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행위를 관중이나 제갈량에 비유하며, 차츰 그 재능과 명성이 유익·두예와 나란히 시대를 대표할 정도가 되었다.[1] 다만 유익만은 "이런 부류는 높은 누각에 묶어두고(이름만 유명하니 장식용 관직을 주는 의미), 천하의 태평을 기다린 후에, 그런 후에 그 직책에 대해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다지 평가하지 않았다고 한다.[1]
왕몽·사상은 더욱 은호에게 벼슬을 할 의사가 있는지 알아보고, 동진의 흥망에 대해 함께 점을 쳐보려고 그의 거처를 방문했다.[1] 그러나 은호의 확고한 피세의 뜻을 알고 발길을 돌렸다.[1] 그 귀로에서 그들은 서로 "심원(은호의 자)은 일어나지 않았다. 창생(서민)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1] 유익 또한 은호에게 서신을 보내 강력하게 벼슬을 권했지만, 은호는 굳게 사퇴하며 응하지 않았다.[1]
건원 원년(343년)부터 영화 2년(346년)에 걸쳐 조정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던 유빙 형제와 하충 등이 잇따라 죽자, 회계왕 사마욱 (후의 간문제)이 재상이 되어 정무를 관장하게 되었다.[1]
영화 2년(346년) 2월, 위장군 저포는 사마욱에게 은호를 천거하여 등용을 권했고, 사마욱 또한 이에 동의했다.[1] 3월, 은호는 초빙을 받아 건무장군·양주 자사에 임명되었지만, 은호는 또 상소를 올려 사퇴하겠다는 뜻을 알리는 동시에, 사마욱에게도 서신을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1] 그러나 사마욱 또한 이에 답서를 보내 자신의 생각을 알리고, 다시 벼슬에 나설 것을 요청했다.[1] 은호는 여러 번 사퇴를 반복했지만, 3월부터 7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직책을 받아들였다.[1]
2. 2. 정계 진출과 환온과의 갈등
영화 3년(347년), 환온이 성한 정벌로 큰 공을 세우자 조정에서는 그를 견제하기 위해 은호를 등용하려 했다. 은호는 명성이 높았고, 사마욱은 그를 통해 환온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로 인해 은호와 환온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1]은호는 아버지 은선의 사망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상을 치렀다. 사마욱은 채모에게 양주를 맡기고 은호의 복귀를 기다렸다. 상이 끝나자 은호를 건강으로 불러 상서복야에 임명했으나, 은호는 이를 거절했다. 이후 건무장군·양주자사로 복귀하여 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1]
당시 순선과 왕희지는 명성이 높았는데, 은호는 순선을 의흥군 태수·오군내사로, 왕희지를 호군장군으로 발탁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왕희지는 은호와 순선에게 환온과의 협력을 권하며 내부 대립을 경계했지만, 은호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1]
영화 5년(349년) 6월, 후조 황제 석호가 사망하고 후조가 분열되자, 동진 조정은 황하 유역과 관중 탈환을 위해 은호를 가절·도독양예서연청오주제군사·중군장군에 임명하여 북벌을 맡겼다. 은호는 중원 탈환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다.[1]
한편, 환온 역시 중원 탈환을 위해 안륙으로 출진하여 조정에 군 동원을 요청했으나, 은호를 비롯한 조신들은 환온의 출정을 반대했다. 환온은 이에 분노했지만, 은호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위협으로 느끼지는 않았다.[1]
영화 7년(351년) 12월, 환온은 조정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5만 군사를 이끌고 무창에 주둔하며 건강을 위협했다. 조정은 은호를 통해 환온에게 실권을 넘겨주려 했으나, 왕표지의 설득으로 중단되었다. 사마욱은 환온에게 서신을 보내 국가의 방침을 설명하고, 조정의 의심을 받고 있음을 충고했다. 환온은 군대를 돌리고 상소를 올려 무창으로 군대를 움직인 것은 조·위의 땅을 소탕하기 위한 준비였다고 변명하며, 북벌이 허가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과 조정 내 간신(은호)의 존재를 비판했다.[1]
2. 3. 북벌 추진과 실패
352년 1월, 은호는 허창과 낙양을 공략하기 위해 북벌을 상소했고, 조서에 따라 허가를 받았다. 공엄은 은호에게 북방 출신 항복자를 중용하지 말 것을 권했고, 왕희지는 서신을 보내 북벌에 반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은호는 군을 발동하여 진궤와 채예를 선봉으로 삼고, 사상과 순선을 군의 총독으로 삼았다. 출정 직전, 은호가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발생하여 당시 사람들은 이를 불길하게 여겼다.[1]같은 달, 은호는 먼저 수춘에 도착했다.[1]
이전에 염위의 장우와 악홍은 동진에 항복을 청했으나, 사상이 장우를 제대로 위무하지 못하여 장우는 허창에서 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은호는 진군할 수 없게 되었다. 3월, 은호는 순선에게 준음을 진수하게 하고 청주 제군사를 감시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선은 연주자사에 임명되어 하비를 진수하게 되었다.[1]
5월, 염위가 전연과 항쟁하며 업이 포위되자, 대장군 장간은 사상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사상은 구원의 대가로 전국새를 얻었다.[1]
6월, 사상은 강족 추장 요상과 함께 허창을 공격했으나, 전진 군주 부건이 보낸 부웅과 부정의 구원군에 대패하여 1만 5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회남으로 도주했다. 은호는 사상의 패전 소식을 듣고 수춘까지 후퇴했다.[1]
8월, 은호가 다시 북벌을 감행하려 하자 왕희지와 사마욱이 반대했지만, 은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9월, 은호는 사구에 주둔하고, 대시에게 석문을, 유돈에게 창원을 지키게 했다. 은호는 북벌군을 일으킬 때 태학의 학생들을 모두 파면하고 종군시켰기 때문에 학교는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1]
10월, 사상은 왕협을 파견하여 허창을 함락시켰고, 전진의 양군은 홍농군까지 후퇴했다.[1]
강족 추장 요상은 동진에 귀순했지만, 은호는 그의 세력을 질투하고 위명을 두려워했다. 은호는 요상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부하인 위경을 시켜 요상을 습격하게 했지만 오히려 위경이 요상에게 죽임을 당했다. 은호는 사만을 시켜 요상을 공격하게 했지만, 요상은 이를 물리쳤다.[1]
353년 7월, 전진에서 장우가 반란을 일으키고, 부황미가 낙양에서 서쪽으로 도주했다.[1]
이전에 은호는 전진의 뇌약아와 양안에게 몰래 사자를 보내 부건을 죽이면 관중의 통치를 인정하겠다고 제안했었다. 뇌약아는 거짓으로 이를 받아들였고, 은호는 장우의 반란을 뇌약아 등의 계획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했다.[1]
10월, 은호는 낙양으로 진격하여 원릉을 수복할 것을 청하고, 양주자사 해임과 낙양 주둔을 요구했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왕표지와 사마욱은 뇌약아 등의 수용은 거짓이며 경솔하게 진격하지 말라고 했지만, 은호는 따르지 않았다.[1]
은호는 군을 발동하고 요상을 선봉으로 삼았으나, 요상은 은호를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은호는 이를 알아채고 요상을 쫓아 산상까지 이르렀지만 반격을 받아 대패하고 초성으로 도주했다. 요상은 1만여 명을 포로로 잡고 참살했으며, 물자를 모두 손에 넣었다. 요상은 요익에게 산상의 요새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회남으로 향했다.[1]
11월, 은호는 유계와 왕빈지를 파견하여 산상을 공격하게 했으나, 요상은 회남에서 구원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죽였다. 그 후, 요상은 진군하여 작피에 의거했다.[1]
2. 4. 실각과 죽음
殷浩|은호중국어는 북벌 실패로 병량과 물자를 소진하여 관민들의 원성을 샀다.[1] 환온은 이를 기회로 殷浩|은호중국어의 파면을 상주하여 승인받았다.[1] 殷浩|은호중국어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인(庶人)이 되어 동양군 신안현으로 유배되었다.[1] 이로써 내외의 대권은 모두 환온에게 넘어가, 그의 북벌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졌다.[1]殷浩|은호중국어는 실각 후에도 원망을 표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는 언행을 유지했다.[2] 담론과 음영을 즐기며 가신들에게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2] 다만, 항상 하늘을 보며 "咄咄怪事(매우 불가사의하다)"라는 글자를 썼다고 한다.[2]
이후 환온은 殷浩|은호중국어의 인망과 능력을 인정하여 상서령에 임명하려 지초에게 뜻을 밝히고 서신을 보냈다.[3] 殷浩|은호중국어는 기뻐하며 답장을 보내려 했으나, 오탈자를 염려하여 봉함을 수십 번 여닫다가 결국 편지를 넣지 않은 채 보내는 실수를 저질렀다.[3] 이에 환온은 크게 분노하여 관직 복귀는 무산되었다.[3]
영화 12년(356년), 殷浩|은호중국어는 신안현에서 사망했다.[4]
훗날 殷浩|은호중국어의 장례를 치를 때, 그의 신하였던 고열이 상소를 올려 명예 회복을 청원했다.[5]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殷浩|은호중국어에게 생전 관위를 추증했다.[5]
아들 은견 역시 명망이 높았으나, 환온의 모함으로 무릉왕 사마희, 유청(유빙의 아들) 등과 반란을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살해되었다.[6]
3. 평가
은호에 대한 평가는 당대와 후대에 걸쳐 다양하게 나타난다.
긍정적 평가:
- 뛰어난 식견과 도량: 은호는 어려서부터 사안과 왕몽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식견과 도량을 지녔다고 평가받았다.[1] 넓은 도량과 포용력으로 사람들을 대했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2]
- 청담(淸談) 능력: 은호는 유담과 함께 당대 최고의 청담가로 손꼽혔다.[3] 그의 청담 능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동진의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4]
부정적 평가:
- 북벌 추진의 한계: 은호는 북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군사적 재능과 경험 부족으로 인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5] 이는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 환온과의 관계: 은호는 환온과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었으며, 이는 그의 경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6] 환온은 은호를 견제하고 비판했으며, 결국 은호는 실각하게 되었다.[7]
종합적으로 볼 때, 은호는 뛰어난 식견과 청담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군사적 능력 부족과 환온과의 갈등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북벌 추진은 이상적이었지만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혔으며, 이는 후대에도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4. 일화
어떤 사람이 은호에게 "관직을 원하면 꿈에서 관을 보고, 재물을 얻으려면 꿈에서 똥을 본다고 합니다. 어째서일까요?"라고 묻자, 은호는 "관직이란 본래 냄새나고 썩은 것이므로, 관직을 원하면 꿈에서 시체를 보는 것입니다. 돈이란 본래 똥 흙과 같은 것이므로, 돈을 얻으려고 하면 꿈에서 더러움을 보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명언이라고 칭찬했다.[2]
은호가 실각한 후, 환온은 "어릴 적에, 나와 호(은호)는 함께 죽마를 타고 놀았는데, 내가 죽마를 버리자 은호가 그것을 주워 썼다. 그러니 내 아래에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은호는 조카 한백을 귀여워하여, 신안현으로 이주할 때에도 동행시켰다. 그러나 얼마 후 한백이 건강으로 돌아가게 되자, 은호는 강가까지 배웅하며 '부귀하면 남들이 따르고, 빈천하면 친척도 떠난다'는 조저의 시를 읊으며 눈물을 흘렸다.
4. 1. 환온과의 관계
은호는 어릴 적부터 환온과 명성을 다투었으며,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 왕희지가 이 둘을 화해시키려 했으나 은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환온은 은호를 얕잡아 보면서, 대나무로 엮어 만든 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의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죽마고우는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벗을 가리킨다.[6][7]5. 한국과의 관계
죽마고우(竹馬故友)는 대나무로 엮어 만든 말을 타고 놀던 벗이라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같이 놀며 자란 벗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진(晉)나라 간문제 때의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6][7]
왕희지가 은호와 환온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려 했으나 은호가 받아들이지 않자, 환온이 은호를 비하하는 발언으로 이 표현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6][7]
참조
[1]
서적
Ancient and Early Medieval Chinese Literature (vol. 3 & 4): A Reference Guide, Part Three & Four
https://books.google[...]
BRILL
2014-09-18
[2]
문서
晋書』では『我は君との付き合いが長い』という言葉になっており、意味が通らなくなっている
[3]
웹사이트
而送別探望他的外甥韓伯時聽他詠「富貴他人合,貧賤親戚離」時亦哭起來。後來桓溫打算徵召殷浩作尚書令,並寫信徵求他的同意,殷浩大為高興,連忙回信表示接受,但殷浩擔心回信寫得不恰當,又拆信修改,閉開十數次,最後竟然只寄出空的信封,令桓溫十分不滿,殷浩最後沒有被徵召。永和十二年(356年),殷浩逝世。(晉書 殷浩專) 浩甥韓伯,浩素賞愛之,隨至徙所,經歲還都,浩送至渚側,詠曹顏遠詩云:「富貴他人合,貧賤親戚離。」因而泣下。後溫將以浩為尚書令,遺書告之,浩欣然許焉。將答書,慮有謬誤,開閉者數十,竟達空函,大忤溫意,由是遂絕。永和十二年卒。
https://zh.wikisourc[...]
[4]
문서
(桓溫)少時吾與浩共騎竹馬,我棄去,浩輒取之,故當出我下也。
[5]
문서
(殷浩)富貴他人合,貧賤親戚離
[6]
웹사이트
《晉書》〈殷浩專〉浩少與溫齊名,而每心競。溫嘗問浩:「君何如我?」浩曰:「我與君周旋久,寧作我也。」溫既以雄豪自許,每輕浩,浩不之憚也。至是,溫語人曰:「少時吾與浩共騎竹馬,我棄去,浩輒取之,故當出我下也。」又謂郗超曰:「浩有德有言,向使作令僕,足以儀刑百揆,朝廷用違其才耳。」
https://zh.wikisourc[...]
[7]
문서
(世說新語) 品藻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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