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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안토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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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 안토니우스는 3세기 이집트에서 태어난 기독교 은수자이며, 초기 기독교 수도원주의의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은둔 생활을 시작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저술한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통해 그의 삶이 널리 알려졌다. 안토니우스는 사막에서의 고독한 생활, 악마의 유혹, 그리고 다양한 기적적인 경험들을 겪었으며, 금욕적인 삶을 통해 많은 제자들을 모았다. 그는 "수도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며, 서양 미술과 문학에서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고, 중세 시대에는 맥각병 등 질병의 치유를 위한 수호성인으로 숭배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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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안토니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6세기 미카엘 다마스키노스 작 성 안토니오 대성인
이름안토니오 대성인
다른 이름안토니오 아빠스
이집트의 안토니오
사막의 안토니오
은수자 안토니오
테베의 안토니오
모든 수도자의 아버지
로마자 표기Antonius
그리스어 표기Ἀντώνιος
아랍어 표기القديس أنطونيوس الكبير
콥트어 표기Ⲁⲃⲃⲁ Ⲁⲛⲧⲱⲛⲓ
출생일251년 1월 12일경
사망일356년 1월 17일
탄생지코마, 이집트 속주, 로마 제국
사망지콜짐 산, 이집트 속주, 로마 제국
공경하는 교파가톨릭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ELCA)
축일1월 17일 (동방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회, 성공회, 루터교 (ELCA))
토비월 22일 (콥트력)
칭호공경하는, 하느님을 지닌
수도생활의 아버지
모든 수도승의 아버지
상징
돼지

타우 십자가
수호동물
피부병
농부
정육업자
가난한 사람들
바구니 제작자
붓 제작자
무덤 파는 일꾼
로마 교황청립 교회 아카데미
주요 성지성 안토니오 수도원, 이집트
생앙투안라베이, 프랑스
추가 정보
기타안토니오 파도바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

2. 생애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360년경에 저술한 ''안토니우스의 생애''라는 책에서 비롯되었다.[46] 이 책은 안토니우스를 문맹이지만 신성한 인물로 묘사하며, 원시적인 풍경 속에서의 그의 삶을 통해 신성한 진리와 절대적인 연결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374년 이전 안티오케이아의 에바그리우스가 이 책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이 번역본 덕분에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 작품 중 하나가 되었으며, 중세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9] 이 책 외에도, 진본으로 여겨지는 여러 설교문과 서신들이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대한 부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안토니우스는 251년에 하 이집트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 근교의 쿠마에서 부유한 토지 소유주 콥트족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와 돼지와 관련된 많은 전설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가 한때 양돈인으로 일했다는 것이다.

285년, 34세가 된 그는 나일강 유역 피스피르의 더 먼 산에 있는 로마의 오래된 버려진 요새에서 약 20년 동안 엄격히 폐쇄된 채 생활했다.[49]

네덜란드 바르푸이젠에 있는 은수처 성당의 이전 본 제단, 아빠스 안토니우스의 벽화와 그의 성유물 일부가 담긴 성해함. 이후 특별히 만들어진 측면 제단에 있는 황금 전당으로 이전되었다.


어느 날, 그는 주민들의 도움으로 요새의 문을 허물었다. 사람들은 그가 혼자 유폐되어 쇠약해졌거나 미쳐버렸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그는 건강하고, 평온하며, 개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안토니우스는 파이윰으로 가서 믿음을 가진 교우들을 확인한 다음에, 그의 옛 로마 요새로 되돌아갔다.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투옥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했다. 총독은 그가 공공연하게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도시에 나타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계속 머물렀다. 그는 총독에게 반박하여 고문당하고 순교당할 뻔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해 끝에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로마의 옛 요새로 되돌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방문객들 때문에 예배를 멀리하게 되자, 이집트의 동부 사막으로 더 들어갔다. 그는 샘과 종려나무 몇 그루를 발견하고 정착했는데, 그 자리가 오늘날의 성 대 안토니우스 수도원이다. 거기서 그는 약 200년 뒤에 있을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의 규칙을 예견했고, "기도와 일"을 했다. 그는 뜰을 경작하고 등심초 깔개를 짰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직접 전해진 서신들 중 하나는 안토니우스의 명성이 국외로 전파되어 황제에게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황제는 그를 찬사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글을 썼다. 교우들은 황제의 편지에 만족했지만, 안토니우스는 "하느님의 책들, 왕들 중에 왕 그리고 영주들 중에 영주가 날마다 우리에게 명령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무엇을 유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황제를 축복하고 제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편지를 작성했다.

성 안토니우스의 그림, 피에로 디 코시모가 그린 ''성 니콜라우스와 아빠스 안토니우스의 방문''의 일부, 1480년경 작품.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나가서 보아라."라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십자가가 있는 허리띠를 맨 천사를 보았고, 그는 앉아서 종려잎을 땋다가, 일어서서 기도하고 다시 앉아서 땋았다. 한 음성이 "안토니우스여, 그것을 하고 너는 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 그는 그가 본 튜닉을 입고 종려 잎을 엮기 시작했다.

338년에, 그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논박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소환되었다.[49]

안토니우스는 그가 떠날 날이 다가옴을 느꼈을 때,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지팡이를 성 마카리우스에게 주고, 양피 망토 한 개는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다른 양피 망토는 그의 제자 세라피온에게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2. 1. 초기 생애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대부분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360년경에 저술한 ''안토니우스의 생애''라는 책에서 비롯되었다.[46] 이 책은 안토니우스를 문맹이지만 신성한 인물로 묘사하며, 원시적인 풍경 속에서의 그의 삶을 통해 신성한 진리와 절대적인 연결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전기 작가인 아타나시우스의 견해와도 일치한다.[6] 374년 이전 안티오크의 에바그리우스가 이 책을 라틴어로 번역했고, 이 번역본 덕분에 ''안토니우스의 생애''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 작품 중 하나가 되었으며, 중세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9] 이 책 외에도, 진본으로 여겨지는 여러 설교문과 서신들이 안토니우스의 생애에 대한 부가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안토니우스는 251년에 하 이집트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 근교의 쿠마에서 부유한 토지 소유주 콥트족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약 18세쯤 되었을 때 부모가 사망했고, 그는 미혼인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와 돼지와 관련된 많은 전설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그가 한때 양돈인으로 일했다는 것이다.

285년, 34세가 된 그는 예수의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47]라는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안토니우스는 가문의 소유지 일부를 이웃들에게 거저 주고, 남은 재산을 팔아 빈자를 위한 기금에 기부했으며, 그의 여동생을 당시 최초의 수녀회 중 하나인 그리스도의 처녀단에 맡기고,[48] 자신은 지역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49]

"수도원주의의 교부"라는 명칭은 이미 이집트의 사막에서 실행되고 있던 기독교 수도원주의로 오인되기도 한다. 금욕주의는 도시 변두리의 고립된 장소에서 은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토니우스는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채 순전히 사막에서 생활하려 한 최초의 금욕주의자들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그의 은수자적인 생활 방식은 그의 선배들보다 현저히 더 엄격했다. 2세기경 성 테클라와 같은 유명한 기독교 금욕주의자도 있었다. 성 안토니우스는 그러한 전통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서부 사막 끝자락에 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약 95km 거리에 있는, (니트리아와 켈리아 그리고 스케티스 수도원들의 소재지가 된) 알칼리성의 니트리아 사막 지역으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13년을 지냈다.[49]

1세기에 그리스의 유대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테라페우테파를 이교도 금욕주의 은수자들로 느슨하게 조직된 케노비테 공동체로 묘사했는데,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근교 마리우트 호수의 혹독한 환경과 접근하기 어려운 다른 지역들에서 수립되었다. 필론은 "그리스와 야만족의 국가들 모두의 여러 곳들에서 만날 수도 있는 그 부류의 사람들은 아주 좋은 것이면 무엇이든 즐기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50]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악마는 지루함, 게으름, 여성의 혼령으로 안토니우스를 괴롭혔지만, 안토니우스는 기도의 힘으로 이를 극복했다. 이후 그는 문을 닫은 무덤으로 거처를 옮겼고, 지역 주민들이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악마는 그를 폭행하여 의식을 잃게 만들었지만, 지역 마을의 친구가 그를 발견하고 교회로 옮겼다.

회복 후, 안토니우스는 나일강 유역 피스피르의 더 먼 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로마의 오래된 버려진 요새에서 약 20년 동안 엄격히 폐쇄된 채 생활했다.[49]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악마는 다시 안토니우스와 전쟁을 재개했고, 야수, 늑대, 사자, 뱀, 전갈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들을 비웃으며 "만일 너희들 중에 누가 나를 제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그 한 놈은 나와 싸울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고, 그들은 연기처럼 사라졌으며, 하느님은 그에게 승리를 주었다. 그는 요새에 있는 동안 벽틈을 통해 바깥세상과 소통했고, 6개월 동안 먹을 빵을 마련했으며, 누구도 그의 수도실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주민들의 도움으로 요새 문을 허물었다. 사람들은 그가 쇠약해졌거나 미쳐버렸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그는 건강하고 평온하며 개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영웅으로 찬사를 받았고, 그의 전설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는 파이윰으로 가서 교우들을 확인한 후, 옛 로마 요새로 되돌아갔다.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투옥된 사람들을 만나 위로했다. 총독은 그가 공공연하게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도시에 나타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계속 머물렀다. 그는 총독에게 반박하여 고문당하고 순교당할 뻔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해 끝에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로마의 옛 요새로 되돌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방문객들 때문에 예배를 멀리하게 되자, 이집트의 동부 사막으로 더 들어갔다. 그는 샘과 종려나무 몇 그루를 발견하고 정착했는데, 그 자리가 오늘날의 성 대 안토니우스 수도원이다. 거기서 그는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의 규칙을 예견했고, "기도와 일"을 했다. 그는 뜰을 경작하고 등심초 깔개를 짰다. 그는 정기적으로 계몽의 말을 찾았고, 이러한 언사들은 사막 교부들의 고담집으로 집성되었다. 그는 세속적인 방문자들을 마카리우스에게 보내고, 스스로 영적인 성향에 대해 말했다. 가끔 그는 교우들을 만나러 나일강 사막 외곽의 수도원으로 간 후, 사막 내 수도원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직접 전해진 서신들 중 하나는 그의 명성이 국외로 전파되어 황제에게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황제는 그를 찬사하고 기도를 부탁하는 글을 썼다. 교우들은 황제의 편지에 만족했지만, 안토니우스는 "하느님의 책들, 왕들 중에 왕 그리고 영주들 중에 영주가 날마다 우리에게 명령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무엇을 유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황제를 축복하고 제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편지를 작성했다.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나가서 보아라."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십자가가 있는 허리띠를 맨 천사를 보았고, 그는 앉아서 종려잎을 땋다가, 일어서서 기도하고 다시 앉아서 땋았다. 한 음성이 "안토니우스여, 그것을 하고 너는 쉬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 그는 그가 본 튜닉을 입고 종려 잎을 엮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는 교회와 이교도의 지배, 교회의 승리와 형식적인 영광, 그리고 이 시대의 끝에서의 박해에 대해 예언했다. 성 마카리우스가 안토니우스를 찾아왔을 때,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수사 복장을 입혀주고 그의 일을 예언했다. 최초의 은수자 성 파올로가 사막에서 떠날 날이 가까워 오자, 안토니우스는 그에게로 갔고, 그가 죽자, 20번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사도좌의 아타나시우스에게 선물 받았던 튜닉을 입힌 후, 그를 묻었다.[49]

338년에, 그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논박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소환되었다.[49]

2. 2. 은수 생활

안토니우스는 285년, 34세 때 예수의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47]라는 말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그는 가문의 소유지 일부를 이웃에게 주고, 남은 재산을 팔아 빈자를 위한 기금에 기부했다. 그의 여동생은 당시 최초의 수녀회인 그리스도의 처녀단의 일원이 되었고,[48] 자신은 지역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49]

수도원주의의 교부"라는 명칭은 이미 이집트 사막에서 실행되고 있던 기독교 수도원주의로 오인되기도 한다. 금욕주의는 도시 변두리의 고립된 장소에서 은거하는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채, 순전히 사막에서 생활하려 한 최초의 금욕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은수자적 생활 방식은 선배들보다 현저히 더 엄격했다. 2세기 경 성 테클라와 같은 유명한 기독교 금욕주의자도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러한 전통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서부 사막 끝자락, 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약 95km 거리에 있는, (니트리아와 켈리아 그리고 스케티스 수도원들의 소재지가 된) 알칼리성의 니트리아 사막 지역으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13년을 지냈다.[49]

1세기에 그리스의 유대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테라페우테파가 알렉산드리아 근교의 마리우트 호수의 혹독한 환경과 접근하기 어려운 다른 지역들에 수립되었다고 묘사했다. 필론은 "그리스와 야만족의 국가들 모두의 여러 곳들에서 만날 수도 있는 그 부류의 사람들은 아주 좋은 것이면 무엇이든 즐기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다.[50]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악마가 지루함, 게으름, 여성의 혼령으로 괴롭히며 안토니우스와 싸웠는데, 안토니우스는 기도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한다. 이는 기독교 미술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그가 살았고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지역 주민들에게 의지하는 자신의 문을 닫은 곳의 한 무덤으로 갔다. 악마가 그의 금욕주의와 열렬한 예배를 알았을 때, 그를 시기하여 폭행하였고, 의식을 잃은 채로 버려졌다. 지역 마을에서 그의 친구가 그를 만나러 와서 그의 그런 상태를 보고는, 그를 한 교회로 이송했다.

회복 후, 그는 다시 노력하기 위해 사막에서 크로코딜로폴리스 맞은편의 피스피르 (오늘날 데르 엘 메눔) 나일강 유역의 더 먼 산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그는 로마의 오래된 버려진 요새에서 약 20년 동안 엄격히 폐쇄된 채 생활했다.[49]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악마가 다시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을 재개했고, 그 때 만큼은 유령들이 야수들과 늑대들, 사자들, 뱀들, 전갈들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들을 경멸적으로 비웃으며 "만일 너희들 중에 누가 나를 제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그 한 놈은 나와 싸울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그들은 연기 속으로 사라졌고, 하느님은 그에게 악마를 이긴 승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가 그 요새에 있는 동안, 음식이 들어오는 벽틈을 통해 바깥 세계와 소통했는데, 그는 몇 마디의 말을 하곤 했다. 안토니우스는 6개월 동안 먹을 다량의 빵을 마련했다. 그는 어느 누구도 그의 수도실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에게 오는 사람은 누구든 바깥에서 그의 조언을 들었다.

어느 날, 그는 주민들의 도움으로 요새의 문을 허물었다. 그 무렵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혼자 유폐되어 쇠약해졌거나 미쳐버렸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그는 건강하고, 평온하며, 개화되어 나타났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시련을 통해 영적으로 활기를 되찾은 모습에 놀라워했다. 그는 영웅으로 찬사를 받았으며, 그 이후부터 안토니우스의 전설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는 파이윰으로 가서 믿음을 가진 교우들을 확인한 다음에, 그의 옛 로마 요새로 되돌아갔다.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투옥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했다. 총독은 그가 개의치 않고 공공연하게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보고, 그가 도시에 나타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그의 위협에 유의하지 않고 계속 머물렀다. 이후 그는 다시 총독을 만났는데, 그가 총독의 분노를 돋굴 정도로 그에게 반박하므로, 고문당하고 순교당할 뻔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해 끝에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로마의 옛 요새로 되돌아갔다. 거기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 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예배를 멀리하는 방문객들을 보았다. 그 결과, 그는 이집트의 동부 사막으로 더 들어갔다. 그는 샘과 종려나무 몇 그루를 찾을 때까지 3일 동안 깊은 광야를 여행했고, 샘과 종려나무 몇 그루를 발견하고 거기서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그 자리에 오늘날의 성 대 안토니우스 수도원이 있다. 거기서, 그는 약 200년 뒤에 있을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의 규칙을 예견했고, 스스로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수공일에 참여하게 하여 "기도와 일"을 했다.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뜰을 경작하고 등심초 깔개를 짰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정기적으로 계몽의 말을 찾았다. 그러한 언사들은 사막 교부들의 고담집으로 집성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세속적인 방문객들을 마카리우스에게 보내고, 스스로 영적인 성향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가끔, 그는 교우들을 만나러 나일강 사막의 외곽에 있는 한 수도원으로 간 다음에, 사막 내에 있는 그의 수도원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직접 전해진 잔존하는 서신들 중 하나의 배경 내용은 안토니우스의 명성이 어떻게 국외로 전파되었고 황제 콘스탄티누스에게 도달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황제는 그에 대한 찬사와 그를 위한 기도를 묻는 글을 작성했다. 교우들은 황제의 편지에 만족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으며, 그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책들, 왕들 중에 왕 그리고 영주들 중에 영주가 날마다 우리에게 명령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무엇을 유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사랑한다."라고 그에게 말한 교우의 고집으로 인해, 그는 황제를 축복하고 제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편지를 작성해야 함을 받아들였다.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안토니우스가 그에게 "나가서 보아라."라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나가서 거룩한 에스케엠(체발 또는 스케마)와 닮았고 머리에는 두건을 썼으며, 십자가가 있는 허리띠를 맨 한 천사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앉아서 종려잎을 땋다가, 일어서서 기도하고 다시 앉아서 그것을 땋았다. 한 음성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안토니우스여, 그것을 하고 너는 쉬게 될 것이다." 그 후에, 그는 그가 본 튜닉을 입기 시작했고, 종려 잎을 엮기 시작했다고 한다. 안토니우스는 교회에 그리고 이교도의 지배로 인해 발생할, 교회가 승리하고 형식적인 영광이 돌아올, 그리고 이 시대의 끝에서의 박해에 대해서 예언했다고 한다. 성 마카리우스가 안토니우스를 찾아왔을 때,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수사 복장을 입혀주었고 그의 일을 예언했다. 최초의 은수자 성 파올로가 사막에서 떠날 날이 가까워 오자, 안토니우스는 그에게로 갔고, 그가 죽자, 20 번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사도좌의 아타나시우스에게 선물받았던 튜닉을 입힌 후에, 그를 묻었다.[49]

338년에, 그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논박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소환되었다.[49]

2. 3. 말년

성 안토니우스는 떠날 날이 다가옴을 느꼈을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성 마카리우스에게 주고, 양피 망토 한 개는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다른 양피 망토는 제자 세라피온에게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24] 또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비석 없는 비밀 에 묻으라고 유언했다.[22]

3. 유혹

미켈란젤로의 1487년 ~ 1498년 작품인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은 사막에서 성 안토니우스가 겪은 시련을 묘사한 많은 미술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은 마르틴 숀가우어의 조각을 바탕으로 젊은 미켈란젤로가 복제한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사막을 순례하는 동안 일련의 초자연적인 유혹을 경험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처음 기록한 사람은 동시대의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이다. 그러나 일부 현대 학자들은 안토니우스가 경험한 악마와 유혹이 실제로는 순례자들의 이야기에서 비롯되었거나, 풍부한 비유, 또는 사막 동물들의 환상이나 꿈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49]

마르틴 숀가우어, 히에로니무스 보스,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등 많은 미술가들이 안토니우스의 생애에서 이러한 사건들을 묘사했으며,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그의 소설 ''성 앙트완의 유혹''에서 이 이야기를 다시 썼다.[4]

안토니우스는 그의 선배 테베스의 성 파울로스를 찾아 사막을 여행하던 중 켄타우로스사티로스 형태의 두 악마들을 만났다.

3. 1. 사티로스와 켄타우로스

테베스의 성 파울로스를 찾아 사막을 여행하던 성 안토니우스는 켄타우로스사티로스 형상을 한 두 생물을 만났다.[51] 서방 신학에서는 이들을 악마로 간주하지만,[27] 기록에 따라 살아있는 존재로 추측되기도 한다.[27]

안토니우스가 먼저 만난 켄타우로스는 반은 말, 반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안토니우스가 길을 묻자, 켄타우로스는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려다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고 사라졌다.[27] 이는 악마의 장난이거나 사막에서 태어난 생물로 해석되었다.[28]

성 안토니우스와 성 바울의 만남, 오세르반차파 화가, 15세기, 배경에 켄타우로스가 있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구부러진 주둥이, 뿔 달린 이마, 염소 발"을 가진 사티로스를 만났다. 사티로스는 평화롭게 과일을 건네며 자신을 필멸자이자 사막 주민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그는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파우누스, 사티로스, 인큐부스로 숭배한다고 말하며, 안토니우스에게 자신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27] 안토니우스는 사티로스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것에 기뻐하며, 알렉산드리아를 비난했다.[27]

3. 2. 금과 은

성 안토니우스가 사막을 여행하던 어느 날, 길에서 은화 한 판을 발견했다. 아무도 여행한 적 없는 사막에 은화가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그는 악마가 자신을 유혹하려고 은화를 놓아두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악마야, 네가 나를 유혹하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은판이 사라졌다.[29]

얼마 후, 안토니우스는 길에서 악마가 놓아둔 황금 더미를 보았다. 그는 황금 더미를 불 속에 집어 던졌고, 황금 더미는 은화처럼 사라졌다.

이 사건들 이후, 안토니우스는 온 세상이 덫과 함정으로 가득 찬 꿈을 꾸었다. 그는 주님께 "오, 좋으신 주님, 누가 이러한 덫들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겸손은 더없이 그것들을 피할 것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30]

3. 3. 동굴의 악마

안토니우스는 악마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동굴에 숨으려고 하였다. 동굴에는 많은 작은 악마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성 안토니우스를 죽도록 때리고 있었기 때문에, 성 안토니우스의 하인이 그를 밖으로 옮겼다.[52] 은수자들이 성 안토니우스의 죽음을 애도하려 그 시신으로 모여들었을 때, 그는 소생되었다. 그는 그의 하인에게 악마들이 그를 구타하던 동굴로 데려갈 것을 요구했다. 그가 거기서 악마에게 소리쳣을 때, 그들은 그를 갈기갈기 찢으려 야수들로 돌아왔다. 갑자기, 환한 빛이 번쩍이더니, 그 악마들이 도망쳤다. 성 안토니우스는 그 빛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알고, 그는 전에 악마들이 공격할 때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셨는지 물었다. 하느님은 "나는 여기에 있었지만, 나는 그대의 전투를 보았고,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신이 그 전투에서 남자답게 싸우며 잘 견뎠으므로, 나는 그대의 이름이 온 세상에 두루 퍼지도록 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52]
콥트 성 안토니우스 이콘


수도자였던 안토니우스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에서 살기 위해 나갔다. 그러나 동굴에는 악마들이 너무 많아서, 안토니우스의 지인들이 그를 폭행당해 죽은 채로 동굴에서 옮겨야 했다. 수도자들이 안토니우스의 시신에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자, 안토니우스는 소생했다.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을 악마들이 때렸던 그 동굴로 다시 데려가 달라고 요구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그는 악마들을 불렀고, 악마들은 야수처럼 나타나 그를 갈기갈기 찢으려 했다. 갑자기 밝은 빛이 번쩍였고, 악마들은 도망쳤다. 안토니우스는 그 빛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악마들이 공격했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은 "내가 거기에 있었지만, 네 싸움을 보고 지켜보고 싶었다. 네가 용감하게 싸워 잘 버텼기 때문에, 네 이름이 온 세상에 퍼지도록 하겠다."라고 대답했다.[31]

4. 시성 및 유산

안토니우스는 생전에 봐뒀던 산 꼭대기에 비밀히 묻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유해는 361년에 발견되었고, 알렉산드리아로 이송되었다.[49] 얼마 후, 사라센의 침입으로 인한 파괴를 피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다. 11세기에, 비잔티움 황제가 프랑스 백작 조셀린에게 유해를 주었고, 조셀린은 그것을 라모트생디디에로 이송했는데, 그후에 그 지역의 이름은 생앙트완느라베이로 개명되었다.[49]

바르푸이젠의 성당 순례 기치


생트앙투안라베, 이제르, 프랑스


안토니우스는 "성안토니열"이라고 알려진 맥각중독을 비롯한 많은 기적적인 치유에 도움을 준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이 질환을 앓고 있던 두 명의 지방 귀족들의 치유를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그들은 그를 기리는 성 안토니오 병원 형제회를 설립했다.[49]

성 안토니오가 동물, 빈자, 병자를 축복함


동방 교회에서 안토니우스의 시성은 더 제한적이었다. 그의 성화상과 그림은 비교적 적다. 그러나 그는 "사막의 첫 번째 스승이자 거룩한 수사들의 정점"으로 존경받는다. 마론파, 칼데아파, 정교회 교단 중에는 그의 수도원 규칙을 따른다고 주장하는 곳도 있다.[49] 중세 시대에, 안토니우스는 네우스의 퀴리누스, 코르넬리우스, 후베르투스와 함께 라인란트에서 4인의 성 전례관(''Vier Marschälle Gottes'')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53][54]

중세 유럽에서는 맥각병, 중독, 단독, 괴저를 "성 안토니우스의 불"이라고 불렀다. 성 안토니오에게 기도하면 치유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동물수호성인으로 여겨지며, 성명 축일인 1월 17일[42]에는 "안토니오 축제"로서 애완동물과 가축을 축복하는 동물의 축복이 행해진다.[43][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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