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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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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근안은 대한민국의 전직 경찰관으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공, 방첩, 공안 분야 수사 담당관으로 활동하며 '고문 기술자'라는 악명을 얻었다. 그는 군 복무 후 순경으로 임용되어, 야당 인사와 학생 운동가들을 고문한 혐의로 수배를 받았다. 10년간 도피 생활을 하다가 자수하여 징역형을 선고받고 출소 후 목사가 되었으나, 고문 행위를 미화하는 발언으로 목사직에서 면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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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별명고문기술자, 박중령, 불곰, 반달곰, 김철수
출생일1938년 3월 21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조선 인천 송현동
배우자신옥영
자녀슬하 3남
종교불교 → 개신교(예장합동개혁)
병역
군복무공군
복무기간1959년 10월 1일 ~ 1962년 9월 30일
계급공군 사병
정당
정당무소속
학력
학력한밭중학교 졸업
경력
경력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개혁) 전직 목사(경찰 출신이며 전직 개신교 목사)
직책대한민국 경기지방경찰청 공안분실 실장
임기 시작1984년 2월 29일
임기 종료1987년 1월 8일
주요 직위
대통령전두환
국무총리진의종 국무총리
신병현 국무총리 권한대행
노신영 국무총리 서리
노신영 국무총리
내무부 장관서정화 내무부 장관
노태우 내무부 장관
주영복 내무부 장관
내무부 차관이춘구 내무부 차관
김창식 내무부 차관

2. 생애

이근안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대한민국 공군에서 복무한 뒤 대한민국 경찰 순경으로 임용되었다. 가명은 김철수이고, 별칭은 박중령, 불곰, 반달곰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8년까지 대공, 방첩, 공안 분야 수사 담당관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 7월 서울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순경으로 발령받았으며, 1972년 8월 치안국 대공분실 형사로 발령받았다. 이후 1988년까지 경기도지방경찰청 등에서 대공, 강력계, 살인사건, 방첩 전문 수사관 등을 맡았다. 경찰 재직 중 수많은 야당 인사와 학생 운동가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고문 기술자'''로 불렸다. 1979년 남민전 사건1981년 전노련 사건을 수사했다.

1988년 3월 퇴임 이후, 불법 체포 및 고문 혐의로 수배되었고, 약 10년간 도피생활을 하다 1999년 검찰에 자수하여 구속되었다. 이듬해 재판 결과 징역 7년과 자격 정지 7년 형을 선고받았다. 2006년 11월에 출감한 후, 2008년목사 안수를 받고 개신교 목사가 되었으나, "차라리 고문은 예술이었다."라는 등의 망언으로 논란이 되었고, 결국 목사 자격이 박탈되었다.[5][6][7]

2. 1. 초기 생애와 경찰 투신

1955년 한밭중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했다.[4]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대한민국 공군에서 복무하였고, 이후 대한민국 경찰 순경에 임명되었다. 1970년 7월 서울경찰학교를 졸업하고 순경으로 발령받았다.

그의 출생지는 인천 송현동이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를 따라 대전으로 이주했다. 유년 시절 유도태권도, 합기도 등을 배웠으며, 경찰 인사기록카드에 의하면 그의 주특기는 합기도라 한다. 대전에서 유년기를 보낸 뒤 초등학교를 거쳐 1955년 3월 대전 한밭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3월 고등학교를 서울 경동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생활했다. 1958년 3월 서울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10월 1일 대한민국 공군에 입대하여 공군기술교육단(대전비행장)에서 훈련을 받고 공군기술교육단 사령부 감찰감실에서 복무하다 1962년 9월 30일 사병으로 전역하였다.

1960년대 초, 충청남도 공주군 출신의 부인 신옥영을 만나 결혼하였다.[8] 결혼 초기에는 종업원 2~3명을 두는 등 미용실을 제법 크게 운영하기도 했지만 순경으로 경찰에 투신한 이근안이 고속승진을 하면서 생활에 안정을 찾자 미용실을 그만뒀다.[8] 1970년 7월 경찰 공무원에 채용, 순경으로 임용되었다. 군인 출신으로 경찰 재직 중 '''박중령'''이라는 별명과 '''불곰''', '''반달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경찰 재직 중 사기꾼, 도박사범, 마약사범 등을 여러 명 검거하여 실적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았다.

2. 2. 경찰관 시절: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치다

이근안은 1959년부터 1962년까지 대한민국 공군에서 복무한 뒤 대한민국 경찰 순경으로 임용되었다. '김철수'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며, '박중령', '불곰', '반달곰' 등의 별칭으로 불렸다. 경찰 재직 중 야당 인사와 학생 운동가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고문 기술자'로 악명이 높았다. 1988년 3월, 5공 청산 과정에서 그의 고문 행위에 대한 진술이 쏟아져 나오면서 퇴임하였다.

2. 2. 1. 박정희 정권

1970년대 후반부터 1988년까지 대공, 방첩, 공안 분야 수사 담당관으로 활동하였다. 1970년 7월 서울경찰학교를 마치고 순경으로 발령받았다. 1972년 8월 내무부 치안국 대공분실 형사로 발령받으면서 이후 1988년까지 경기도지방경찰청 등에서 대공, 강력계, 살인사건, 방첩 전문 수사관 등을 맡았다. 1979년 남민전 사건을 수사했다.[5][6][7]

1972년 8월 경찰청 치안국 대공분실 형사로 발령되었고, 1973년 2월 간첩, 강도, 깡패 등의 검거 유공으로 경장으로 특진하였다. 1974년 7월 경기도경찰청 대공분실로 발령받았으며 경기도지방경찰청 대공전문 수사관, 강력범죄 수사관, 살인전담 수사관, 방첩전문 수사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1976년 8월 경사로 승진하고, 1970년대 후반 경기도경찰청 대공분실장으로 승진했다. 1979년 3월 경위로 승진했다. 1979년 간첩 용의자가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자,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위장 취업하기도 했다. 이후 신분을 숨기고 7개월간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며 용의자의 동태를 파악하여 검거했다. 1979년 10월, 남민전 사건을 수사하였다.

그는 간첩 용의자와 야당 인사, 민주화 운동가들을 감시, 불법 체포하기 위해 엿장수, 월부책장사, 강냉이 장수 등으로 변장하여 활동하였다. 1979년 치안본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발령받았다. 1979년 성실 근무로 청룡봉사상과 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경기도 경찰청 공안분실장으로 있으면서 김근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수배 후 불법 체포하였다. 범인 취조 과정에서 관절 빼기, 볼펜심 꽂기 등의 고문 기술로 사람들을 고문하여 '''고문 기술자'''로 불렸다.[5][6][7]

2. 2. 2. 전두환 정권

1980년 9월 전두환이 집권하자 그해 9월 1일부로 기존의 군인 장교 및 경찰관들을 대대적으로 예편, 해임시켰지만, 이근안은 강력범죄 및 간첩 검거, 운동권 검거 능력을 인정받아 해임되지 않고 계속 유임되었다. 1981년 부림 사건, 전노련 사건을 수사하여 그 관련자들을 전원 체포하기도 하였다.

1985년 김근태열린우리당 의장을 고문했던 혐의는 1999년 검찰 조사에서 자수 이후 일부 인정하였다.[9] 그 외에도 1983년 함주명 조작 간첩사건 관련자들에게 고문하였다는 증언도 있다.[10] 2003년 3월 31일에는 1984년 간첩조작사건에 간첩으로 몰렸던 전직 예비역 군인 출신 이장형 등이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11][12] 그 외에 반제동맹 사건 의혹도 받아왔다.[13]

1986년 10월 23일 경찰의 날에 대통령 전두환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같은 해 경기도 화성군 일대에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하였으나, 경찰이 용의자의 정체를 찾아내지 못하자 당시 내무부는 이근안을 화성경찰서로 발령하여 살인자를 잡게 하였다.

2. 3. 퇴임 이후: 10년간의 도피와 자수

1988년 3월 화성경찰서에 사직서를 내고 스스로 경찰관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1988년 12월 퇴직 이후, 여러 차례 공소가 제기되어 경찰은 그를 공개 수배하였다. 그는 10년 10개월 동안 집 근처 창고 뒤에 은신하고 있다가[14] 1999년 10월 28일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자수하였고,[9][15] 1999년 11월에 구속 기소되었다.[16] 2000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16]과 자격 정지 7년이 확정되었다.[15]

이에 그는 사과문을 발표하였는데, 정치인 김근태는 그의 사과를 받아들여 옥중에 수감된 그를 면회하기도 했다. 수감 생활 중 그는 자신이 고문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인 김근태에게 사과하였으나, 김근태는 "이 전 경감이 제게 ‘눈을 감을 때까지 용서를 빈다’고 했지만, ‘이 양반이 진심으로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왜 눈물을 안 흘리는 것이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김근태는 "이제 두려움은 많이 가셨지만 1980년대 중반에 무참하게 짓밟혔던 악몽이 되살아 났다. 면회가 끝난 후 돌아와서 이근안 전 경감의 용서를 빌고 싶다는 이야기가 진심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조금 괴로웠다"라며 이근안의 사과에 대해 그 진의를 의심하였다.[16]

그 후 2005년 10월 법무부에서 가석방 부적격 결정을 받았다.[16] 여주교도소[17]에서 복역을 하였고, 2006년 11월 7일 오전 0시 25분 경에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현 여주시 가남읍) 여주교도소에서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였다.[16] 이근안은 출소 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라고 출소의 변을 대신했다.[18] 하지만 11월 16일 오전, 민가협유가협 회원 20여 명이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경찰청 민원실에서 그와 관련하여, 경찰의 사죄 및 철저한 진상조사를 주장하며 경찰청장 면담을 요구하며 항의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16]

2. 4. 수감 생활과 목회 활동, 그리고 면직

2005년 6월 이근안은 옥중에서 통신 과정으로 신학교에 입학했다.[23] 수감 당시 신학 공부에 열중했던 이근안은 한때 모범수로 지목되기도 했다. 교도소에서 한국교정선교회를 통해 개신교를 접한 그는 출소 후 총신디지털신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전도사 시절에는 신앙 간증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2008년 10월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개혁) 산하 한 분파의 목사 임직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정식 목사가 되었다.[23][24]

3. 논란과 비판

이근안은 경찰 재직 중 수많은 야당 인사와 학생 운동가들을 가혹하게 고문하여 '고문 기술자'로 불렸다.[5][6][7] 이후 목사 안수를 받았으나, 고문 행위를 "예술"이라고 표현하는 등 망언으로 논란이 되어 목사직이 면직되었다.[25] 일베저장소, 디씨인사이드 등에서는 이근안을 애국자로 칭송하기도 했다.

3. 1. 고문 행위 정당화 및 미화

이근안은 일베저장소, 디씨인사이드 등에서 자신을 애국자로 칭송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목사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고문 활동을 "애국", "예술"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을 일으켰다.[25] 2012년 12월 14일 자신의 저서 출판 기념회에서는 "과거를 회개하며, (고문) 행위 자체가 잘못이었다"라고 말하면서도, 자서전에 사죄한다는 내용이 없다는 지적에 "'사죄', '사과' 대신 '회개'라는 말을 사용했다"라고 답했다.[26] 2013년 1월 7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간첩을 소탕하며 공적을 쌓고 국가에서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다 한순간에 도망자 신세에 ‘씹다 버린 껌’이 되니 처음에는 분한 마음도 들었다"라며 "내가 고문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죄인이라 생각한다. 일일이 찾아가 사죄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교인으로서 참회, 회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사과라는 의미다"라고 말했다.[27]

3. 2. '회개' 발언의 진정성 논란

이근안은 2008년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설교에서 "고문은 예술"이었다는 등의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25] 2012년 자신의 저서 출판 기념회에서는 "과거를 회개하며, (고문) 행위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말했지만, 자서전에 사죄 내용이 없다는 지적에 "전반적으로 다 회개를 하는 것이지 한 건 한 건에 대해서 말하기는…"이라며 '사죄'나 '사과' 대신 '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26]

2013년 서울신문 인터뷰에서는 "잘못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은 사실이다. 간첩을 소탕하며 공적을 쌓고 국가에서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다 한순간에 도망자 신세에 ‘씹다 버린 껌’이 되니 처음에는 분한 마음도 들었다"며 "내가 고문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죄인이라 생각한다. 일일이 찾아가 사죄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교인으로서 참회, 회개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사과라는 의미다"라고 말했다.[27]

4. 이근안을 연기한 배우

5. 저서


  •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참조

[1] 서적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도서출판 강남 2013
[2] 서적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도서출판 강남 2013
[3] 서적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도서출판 강남 2013
[4] 서적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도서출판 강남 2013
[5] 웹사이트 http://www.ohmynews.[...]
[6] 웹사이트 http://www.hani.co.k[...]
[7] 웹사이트 http://news.sbs.co.k[...]
[8] 간행물 10년동안 숨죽인 은거생활, 이근안 가족은 어떻게 살았나 http://www.donga.com[...] 여성동아 1999-12
[9] 뉴스 '고문기술자' 이근안 전 경감, 목사됐다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8-11-01
[10] 뉴스 이근안이 자백하는 걸 보니 측은하기도 하대요. 하지만 지금 화해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http://info.peoplepo[...] 참여연대 1999-12-01
[11] 웹사이트 묻혀진 진실, '이장형 간첩조작사건' http://www.ohmynews.[...]
[12] 웹사이트 http://www.cathright[...]
[13] 뉴스 이근안씨 직권구속..“10년간 집에서 은신”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14] 뉴스 이근안씨, 집창고 상자뒤에 숨어 http://www.munhwa.co[...] 문화일보
[15] 뉴스 출소 이근안씨 "그땐 애국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역적"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6-11-07
[16] 웹사이트 김근태 “용서 빈 이근안, 진심이었을까” 심경 토로 http://www.hani.co.k[...]
[17] 문서 구. 수원교도소
[18] 서적 만기 출소한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알려지지 않은 가족사 http://lady.khan.co.[...] 레이디경향 2006-12
[19] 뉴스 '고문기술자'소재 드라마 만든다 https://newslibrary.[...] 한겨레신문 1995-03-19
[20] 뉴스 MBC 고석만PD 사표 프리랜서 선언 https://newslibrary.[...] 한겨레신문 1995-03-30
[21] 뉴스 MBC 고석만PD 사표 프리랜서 선언 https://newslibrary.[...] 한겨레신문 1995-03-30
[22] 뉴스 MBC 고석만PD 사표 프리랜서 선언 https://newslibrary.[...] 한겨레신문 1995-03-30
[23] 뉴스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 목사 됐다 https://archive.toda[...] 중앙일보
[24] 뉴스 '고문기술자' 이근안, 목사됐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8-10-31
[25] 뉴스 예수교장로회, 이근안 목사직 면직 결정 http://media.daum.ne[...] 연합뉴스 2012-01-19
[26] 뉴스 이근안 "고문자체가 잘못"…자서전서는 '시대탓' 변명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7] 뉴스 ‘고문 기술자’ 이근안 마지막 언론 인터뷰 https://news.naver.c[...]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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