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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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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기방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친일 관료이다. 평안북도 태천군과 전라북도 출신으로 기록되며, 1908년 주사로 관직에 입문하여 한일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 지방행정 관리로 근무했다. 전라북도, 경기도, 황해도, 함경북도 등에서 서기, 군수, 부윤, 도 이사관, 참여관, 지사 등을 역임했으며, 1935년 《조선공로자명감》에 수록되었다. 중일 전쟁 시기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전쟁 지원 단체에 가담했고, 1942년에는 《동양지광》에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글을 기고했다.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 발효 당시 체포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고,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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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방
기본 정보
한글이기방
한자李基枋
가타카나이 기방
로마자 표기I Gi-bang
기타 정보
참고 자료인사흥신소, 1943, 마108쪽

2. 생애

이기방은 평안북도 태천군과 전라북도 두 곳에서 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1908년 주사직으로 관직에 입문하여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지방행정 관리로 근무했다.

1910년 전라북도 장곤관방 서기에 임명되었고, 1912년부터 1920년까지 부안군, 고창군, 정읍군, 무주군 등 전라북도 각 군의 서기를 지냈다. 1921년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여 진안군, 임실군, 김제군 군수를 역임했다. 1928년에는 도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평안북도경기도 산업부장을 역임했다.

1933년 개성부 부윤으로 발령받았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으며[3][4], 당시 정6위 훈5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이후 황해도함경북도 참여관을 거쳐 충청남도 지사를 역임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전쟁 지원 단체에 가담했다. 1941년 조선경찰협회 충청남도지부후원회 이사, 부여사적현창회 이사, 대전자강회 이사, 공주사적현창회 이사, 부여신궁조영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했다. 1942년동양지광》의 싱가포르 함락 특집 기사에 축하 메시지를 싣기도 했다.[5]

광복 후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체포 또는 소환되었으나,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6] 그러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 무산되면서 처벌은 받지 않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88년 평안북도 태천군에서 태어났다.[2] 출신지가 평안북도 태천군과 전라북도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1904년에 일어 속성 과정을 졸업하고, 1906년일본 메이지 대학으로 유학하여, 조선인 유학생이 조직한 太極學會|태극학회일본어에 참여했다.[2] 1908년에 귀국하여 전라북도 전주군 주사로 임명되었다.[2]

2. 2. 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 관료 생활

1908년 주사직으로 관계에 입문하여 한일 병합 조약 이후에도 조선총독부 지방행정 관리로 근무했다.[2] 1910년 전라북도 장곤관방 서기에 임명되었고, 1912년에는 전라북도 부안군 서기를, 1914년에는 고창군 서기를, 1918년에는 정읍군 서기를, 1919년1920년무주군 서기를 거쳤다.[3] 1921년에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여 전라북도의 진안군, 임실군, 김제군에서 군수로 근무했다.[3] 1922년에는 군수 내지 시찰에 참여했다.[2]

1928년에는 도 이사관이 되어 평안북도경기도 산업부장을 역임했다.[3] 1933년에 경기도 개성부 부윤으로 발령받았다.[3] 개성부윤을 맡고 있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3][4] 1935년을 기준으로 정6위 훈5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이후 황해도함경북도 참여관을 거쳐 충청남도 지사를 역임했다.[3] 중일 전쟁 발발 후 국민총력조선연맹과 같은 전쟁 지원 단체에 가담한 일이 있고, 1941년에는 재단법인 조선경찰협회 충청남도지부후원회 이사, 재단법인 부여사적현창회 이사, 재단법인 대전자강회 이사, 재단법인 공주사적현창회 이사, 부여신궁조영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했다.[3] 1942년에는 충남지사로 재직하면서 《동양지광》의 싱가폴 함락 특집 기사에 필진으로 참여해 축하 메시지를 실었다.[5]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하였다.[2] 1941년 충청남도 지사로 임명되었고, 1942년 퇴관하였다.[2] 퇴관 후에는 조선 마사회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조선 유연탄 주식회사 감사를 역임했다.[2]

2. 3. 친일 행적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조선총독부 지방행정 관리로 근무했다. 전라북도 장곤관방 서기, 부안군 서기, 고창군 서기, 정읍군 서기를 거쳐 1921년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여 진안군, 임실군, 김제군 군수를 역임했다. 1928년에는 도 이사관이 되어 평안북도경기도 산업부장을 역임했다.[3][4]

1933년 경기도 개성부 부윤으로 발령받았으며,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 1935년을 기준으로 정6위 훈5등에 서위되어 있었다.[3][4] 이후 황해도함경북도 참여관을 거쳐 충청남도 지사를 역임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국민총력조선연맹과 같은 전쟁 지원 단체에 가담했고, 1941년에는 재단법인 조선경찰협회 충청남도지부후원회 이사, 재단법인 부여사적현창회 이사, 재단법인 대전자강회 이사, 재단법인 공주사적현창회 이사, 부여신궁조영위원회 위원 등을 겸임했다. 1942년에는 충남지사로 재직하면서 《동양지광》의 싱가포르 함락 특집 기사에 필진으로 참여해 축하 메시지를 실었다.[5]

1940년에 창씨개명을 하였다.

일제 패망 후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발효되었을 때 체포 또는 소환된 총독부 도지사 20명 중 한 명이었으며,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6] 그러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 무산되면서 처벌은 받지 않았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중 도지사, 도 참여관, 총독부 사무관의 세 부문에 선정되었고,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서는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004년대한민국에서 제정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인정되었다.[2]

2. 4. 광복 이후

일제 패망 후 1949년까지 생존해 있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발효되었을 때 체포 또는 소환된 총독부 도지사 20명 중 한 명이었으며,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6] 그러나 반민특위 활동이 무산되면서 처벌은 받지 않았다.

1949년 1월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지만,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다.[2]

참조

[1]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기방(李基枋) http://people.aks.ac[...]
[2] 韓国民族文化大百科事典 이기방(李基枋) http://encykorea.aks[...]
[3] 뉴스 ‘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s://web.archive.[...] 일요시사 2004-03-18
[4]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s://web.archive.[...] 일요시사 2004-03-18
[5] 서적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민족문제연구소 2004-12-27
[6] 서적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도서출판선인 2003-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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