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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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봉룡은 일제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작곡가로, 가수 이난영의 오빠이다. 그는 남인수의 '낙화유수', '남아일생' 등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곡들을 작곡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군국가요 작곡에도 참여했다. 6.25 전쟁 중에는 동생 이난영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전쟁 이후에는 김해송의 곡들이 금지되자 자신의 곡으로 이름을 바꿔 발표하기도 했다. 1956년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이후 미국으로 이민하여 1987년에 사망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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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룡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봉룡 |
원어 이름 | 李鳳龍 |
본명 | 아명(兒名): 이봉용(李鳳用) |
출생일 | 1914년 8월 3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목포 |
사망일 | 1987년 1월 9일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장르 | 트로트 |
활동 시기 | 1934년 ~ 1969년 |
종교 | 천주교(세례명: 모세) |
직업 | 가수, 작곡가 |
악기 | 기타, 피아노 |
가족 | 자녀는 슬하 3남 2녀 막내딸 이민자(가수) 동생 이난영(가수) 매제 김해송(가수 겸 작곡가) |
2. 생애
전라남도 목포 출생으로,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의 오빠였다.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음반 상점을 운영하며 동생 이난영을 가수로 데뷔시켰다.[1]
1934년 가수로 먼저 데뷔하였고 1930년대 후반 작곡가로 전향, 남인수의 〈낙화유수〉, 〈남아일생〉 등 인기곡을 작곡했다. 동생 이난영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1942)는 〈목포의 눈물〉과 함께 목포를 상징하는 곡으로 남았다.[4][5]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군국가요 작곡에 참여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2][3]
광복 후에는 남북 분단을 묘사한 〈달도 하나 해도 하나〉로 명성을 유지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김해송이 행방불명되자, 동생 이난영과 부산으로 피난했다. 김해송의 곡 중 일부는 이봉룡이 작곡한 것으로 이름을 바꾸어 발표되기도 했다.
1956년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 1958년 센츄리레코드 전속작곡가를 역임했다. 1961년부터 엘케엘(LKL)레코드를 운영하다 1969년 미국으로 이민,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 1986년 일시 귀국, 1987년 1월 9일 사망했다.[4][5]
2. 1. 초기 생애 및 활동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다. 이난영의 오빠였다. 아버지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외지에 나가 있는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1]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음반 상점을 운영하였고, 두 살 아래의 여동생 이난영을 가수로 데뷔시켰다.이봉룡은 남인수의 〈낙화유수〉, 〈남아일생〉 등 널리 불리는 노래를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군국가요 작곡에 참여했다.[2][3] 기생 출신 가수 이화자의 〈마지막 필적〉(1942)과 같은 해 발표된 장세정의 〈아가씨 위문〉 등이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2. 2. 광복 이후와 한국전쟁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1] 이봉룡은 김해송 실종 이후 동생 이난영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이난영은 7남매를 혼자 키우며 어렵게 생활해야 했다.전쟁이 끝나도 김해송은 조선인민군에게 사살되었다는 소문만 남긴 채 돌아오지 않았고, 월북했을 가능성도 있는 김해송의 곡들은 대한민국에서 자유롭게 부를 수 없었다. 이 가운데 이봉룡이 작곡한 것으로 작곡자 이름을 바꾸어 살아남은 곡도 있었다.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고운봉의 〈선창〉, 백년설의 〈고향설〉, 이화자의 신민요 〈화류춘몽〉 등이 있다.
2. 3. 한국전쟁 이후와 말년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김해송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봉룡은 동생 이난영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난영은 7남매를 혼자 키우며 어렵게 생활해야 했다.전쟁이 끝난 후에도 김해송은 조선인민군에게 사살되었다는 소문만 남긴 채 돌아오지 않았고, 월북했을 가능성도 있는 김해송의 곡들은 대한민국에서 자유롭게 부를 수 없었다. 이 가운데 이봉룡이 작곡한 것으로 작곡자 이름을 바꾸어 살아남은 곡도 있었다. 장세정의 〈연락선은 떠난다〉, 고운봉의 〈선창〉, 백년설의 〈고향설〉, 이화자의 신민요 〈화류춘몽〉 등이 대표적이다.
이후 이난영과 김해송의 딸들이 결성한 음악 그룹 김시스터즈의 멤버 중에는 이들과 외사촌 사이인 이봉룡의 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봉룡은 1956년에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58년에는 센츄리(Century)레코드 전속작곡가로 있었으며, 이후 음반 기업을 운영하다가 1960년대 후반에 딸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하여 생활했다.
말년까지 작곡 활동을 계속했으며, 1961년부터는 직접 엘케엘(LKL)레코드를 운영하기도 했다. 1969년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 1986년 잠시 귀국하여 여관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1월 9일 사망했다.[4][5]
3. 가족 관계
이봉룡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김해송은 이난영과 악극단에서 만나 결혼하였으며, 이봉룡에게 작곡을 가르쳐주었다.[4][5] 1950년 한국 전쟁 때 김해송은 납북되었고, 이후 이난영은 남인수와 동거 생활을 하였다.[4][5] 이난영은 1965년 4월에 5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4][5]
참조
[1]
뉴스
항구의 딸로 목포에서 태어나다 - “목포의 눈물”의 가수 이난영 평전②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6-03-30
[2]
뉴스
이화자의 '결사대의 아내'를 아십니까 -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다시 보기 (26)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3-12-08
[3]
뉴스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다시 보기 (12)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3-08-25
[4]
간행물
문화원형백과
한국콘텐츠진흥원
2009
[5]
서적
한국 작곡가 사전
시공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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