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진 (16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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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상진(李尙眞, 1614년 ~ 1690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숙종 때 우의정을 지냈다. 1645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경상도관찰사, 한성부 우윤, 대사간,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서인의 영수로 활동했으나 기사환국으로 유배되었고, 사후 갑술환국으로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정이다.
이상진은 1645년(인조 2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효종 때 정언을 시작으로 사서, 지평, 집의, 승지,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했다. 현종 때는 대사간, 대사성, 경상도관찰사, 이조참판, 한성부우윤, 대사헌, 동지춘추관사를 지냈다. 함경도관찰사, 공조참판, 수원부사를 거쳐 예조참판,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참찬을 역임했다.
1645년(인조 2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대교, 정언, 사서, 지평, 집의, 승지, 동부승지를 거쳤다. 경상도관찰사, 한성부우윤, 대사간, 형조참판, 이조참판, 대사성을 역임했다. 다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가 이조참판, 한성부우윤, 대사간, 대사헌,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였다. 대사헌, 한성부우윤, 함경도관찰사, 대사간, 공조참판을 거쳐 수원부사가 되었다.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참찬, 숙종 때 대사헌, 좌침찬, 병조판서, 공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이후 좌참찬, 우참찬, 판의금부사,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고 곧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2. 생애
숙종 때는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좌참찬, 병조판서, 공조판서, 판중추부사, 좌참찬, 우참찬, 판의금부사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이후 판중추부사와 영중추부사를 역임하며 서인의 실질적인 영수가 되었으나, 기사환국으로 유배되었다. 1690년에 용서받아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갑술환국 이후 복권되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이상진은 1645년(인조 2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효종 때 정언으로 올랐고, 사서, 지평, 정언, 집의를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2. 2. 관직 진출과 활동
1645년(인조 2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과 대교를 거쳤다. 효종, 현종, 숙종 대에 걸쳐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2. 2. 1. 효종 시대
효종 때 정언으로 임명되었고, 사서, 지평, 정언, 집의를 거쳐 승지가 되었다. 이후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한성부우윤, 대사간, 형조참판,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2. 2. 2. 현종 시대
효종 때 정언에 제수되었고, 사서, 지평, 집의를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이후 동부승지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한성부우윤, 대사간, 형조참판,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현종 때 대사간이 되었고, 대사성을 거쳐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이후 이조참판, 한성부우윤, 대사간, 대사헌, 동지춘추관사를 지냈고,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연이어 한성부우윤, 함경도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이조참판, 공조참판을 역임했다. 수원부사를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외직에 있다가 예조참판, 대사헌,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2. 2. 3. 숙종 시대
숙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좌참찬을 거쳐 병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후 좌참찬, 우참찬, 판의금부사,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고, 곧 판중추부사를 거쳐 영중추부사가 되면서 서인의 실질적인 영수가 되었다. 그러나 기사환국 이후 귀양을 갔다가 1690년, 소결로 용서되어 옛집에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2. 3. 유배와 죽음
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각하면서 유배되었다가 1690년 소결로 용서되어 옛집에 은거하다 세상을 떠났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3. 정치 활동 및 사상
3. 1. 서인(西人)의 영수
1645년(인조 2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효종, 현종, 숙종 대에 걸쳐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기사환국으로 귀양을 갔으나, 1690년 용서받고 은거하다 사망했다. 사후 갑술환국으로 복권되었다.
우의정을 역임하였으며, 기사환국 이전까지 서인의 실질적인 영수였다.
3. 2. 북벌론
이상진은 효종 때부터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나, 이는 송시열과 송준길의 북벌론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산당의 영수로서 서인 강경파의 입장을 대변했지만, 이상진은 한당에 속해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다. 그는 효종에게 북벌을 강하게 주장하면서도, 군사력 증강과 함께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종 즉위 후 대사헌에 임명되었을 때, 이상진은 자원의 부족과 군사 훈련의 미흡함을 지적하며 북벌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는 북벌을 위해서는 군사력 강화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4. 평가 및 영향
이상진은 서인의 실질적인 영수가 되었지만, 기사환국 이후 귀양을 갔다가 1690년 소결로 용서되어 옛집에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5. 기타
이상진은 1690년 소결로 용서받아 옛집에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5. 1. 사후 복권
1690년 소결로 용서되어 옛집에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사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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