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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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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조는 조선의 제16대 왕으로, 임진왜란 중에 태어나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했다. 그는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며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다. 특히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소현세자를 잃는 등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인조는 친명배청 정책을 펼쳤으나, 결과적으로는 청나라에 굴복하여 조선 역사상 최악의 왕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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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인조의 무덤인 장릉
인조의 무덤인 장릉
이종 (李倧)
화백 (和伯)
묘호인조 (仁祖)
시호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 (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존호개천조운정기선덕 (開天肇運正紀宣德)
군호능양군 (綾陽君)
출생1595년 12월 7일 (음력 11월 7일)
출생지조선 황해도 해주 정원군 잠저
사망1649년 6월 17일 (음력 5월 8일)
사망지조선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능묘장릉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장릉로 90
신상 정보
아버지정원군
어머니인헌왕후 구씨
배우자인열왕후 한씨
장렬왕후 조씨
자녀6남 1녀 (8남 2녀)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효명옹주
숭선군
낙선군
재위 정보
즉위1623년 4월 12일 (음력 3월 14일)
즉위 장소경운궁
재위 기간1623년 4월 12일 ~ 1649년 6월 17일 (음력 1649년 5월 8일)
선대 군주광해군
후대 군주효종
기타 정보
묘호 (한자)仁祖
휘 (한자)李倧
시호 (한자)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2. 생애

2. 1. 출생과 즉위 전

1595년 12월 7일(음력 11월 7일) 임진왜란 중에 선조의 다섯째 서자인 정원군과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구사맹(具思孟)의 딸 군부인 구씨사이에서 장남으로 조선 황해도 해주부(海州府) 관사에서 태어났다.[11] 당시 임진왜란 난중으로 전란이 계속되어 왕자 제궁(王子諸宮)이 모두 해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11] 실록 즉위일 기록에 의하면 그가 탄강할 때 붉은 광채가 빛나고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으며, 그 외모가 비범하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무수히 많았다고 한다.[11] 첫 이름은 천윤(天胤)으로 정해졌다.

황해도 해주부 몽진 관사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황해도 개성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기도 하였으며 그 후 한성부 정원군 사저에서 성장한 그의 이름은 이종(李倧)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천윤(天胤), 화백(和伯)이라 하였으며 호는 송창(松窓)이었다. 그의 자(字, 본이름 대신 부르던 이름) 중 천윤(天胤)이라는 자는 당시 국왕이었던 그의 할아버지 선조가 종(倧)이라는 이름과 함께 친히 직접 지어준 것이다.[11] 나중에 광해군이 누군가에게 이 말을 듣고, “어찌 이름지을 만한 뜻이 없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이름지어야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언짢아했다 한다.[11] 할아버지 선조에게는 여러 아들들이 있었으나 그 중 정원군이 일찍 결혼하여 얻은 서손자였다. 선조는 그 자신이 방계출신에 서출인 탓에 손자인 그가 서손(서자 정원군의 아들)이었음에도 특별히 불러다 왕궁에서 기르며 총애하였다.

능양군은 태어나면서 모습이 범상하지 않고 오른쪽 넓적다리에 사마귀가 많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할아버지 선조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이것은 한 고조(漢高祖)와 같은 상(相)이니 누설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11] 그러나 선조의 이와 같은 말은 곧 누설되었고,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는 등의 소문과 함께 퍼지면서 훗날 그의 친동생 능창군 전이 사형당하는 빌미를 제공한다.[11]

2, 3세가 지나서는 사저에서 자라지 않고 할아버지 선조의 배려로 곧 궁중에서 자랐는데, 의인왕후는 그를 귀여워하였다.[11] 그는 장난을 좋아하지 않고 우스갯말이 적어 이 때문에 사랑이 날로 융성해져 다른 왕자들이 비교되지 못하였고, 특히 할머니뻘인 의인왕후는 사랑하고 귀엽게 여겼다고 한다.[11] 5, 6세가 되어서는 선조가 직접 그를 품안에 두고 가르치며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일찍부터 글자를 해독하고 말귀를 알아듣자 선조가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11] 선조는 그의 외삼촌이기도 한 능해군 구성(綾海君 具宬)을 왕손사부로 삼아 어린 능양군의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다.[11] 어느정도 자란 뒤에도 그는 스스로 글읽기를 힘쓰고, 왕손이라는 지위를 내세우지 않았으며 내외척 사이에서 귀한 체한 적이 없었다.[11]

1601년(선조 34년) '''능양수'''(綾陽守)에 첫 책봉되었으며 1604년(선조 37년) 임진왜란 당시 관료와 의병장, 장수들을 포상할 때 그를 특별히 선무원종공신 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넣어 책록되었고[12], 1608년(광해군 즉위) 유영경의 옥사 직후 정운원종공신 1등(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몽학의 난 진압에 참여한 관원들을 청난공신(淸難功臣)에 녹훈할 때는 청난원종공신 1등(淸難原從功臣一等)에 각각 녹훈되었다. 해당 원종공신록은 즉위하면서 소각되었지만 누군가 해당 훈작을 보고 작성한 어휘원종공신첩(御諱原從功臣帖)이 현대까지 전해져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1607년(선조 40년)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가 이어 '''능양군'''에 봉해졌다. 할아버지 선조가 별세하면서 정원군 일가는 경희궁으로 나와 살았고, 부모를 따라 경희궁으로 갔다.

1610년(광해군 2)에 영돈녕부사 서평부원군으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추증청주 한씨 한준겸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자기보다 1년 연상인 한씨는 1594년(선조 27) 7월 1일 원주 읍내 사제에서 태어났다. 가례를 행하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하여졌는데, 선조가 일찍이 왕자 부인으로 뽑았다가 낙방하였으나 관상을 보고 귀하게 될 것을 안 선조가 그대로 다시 능양군을 위하여 배필로 간택하였다고 한다. 한씨와 가례를 올린 뒤 경행방 향교동 사저로 분가하고 1612년(광해군 4) 18세 때 장자인 소현세자를 낳았다.

1613년(광해군 5) 임해군의 옥사 직후 익사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둘째 아우인 능창군이 죽임을 당하였다. 능창군은 일찍이 인빈 김씨 소생 왕자들 중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 물망에 올랐던 신성군이 일찍 죽자 정원군에 의해 그의 양자로 들어갔었는데, 당시 17살이던 능창군은 수안군수 신경희 등이 획책하는 모반에 추대되었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 무렵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성하다, 인빈의 묘자리가 좋다, 정원군의 집터가 좋다 등의 소문이 돌았고, 광해군은 이를 신경희의 옥사 직후 능창군이 사전에 왕위에 뜻을 두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능창군이 사사되자 아버지 정원군은 화병을 얻어 몸져누웠고, 술도 좋아했던 정원군은 1619년(광해군 11)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때 능양군은 빈소에서 곡을 하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집안의 풍비박산을 초래한 이 사건은 반정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1620년(광해군 12) 무인 이서, 신경진, 김류와 그의 외척인 구굉, 구인후 등이 반정을 모의하고 능양군을 추대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능양군은 이들과 비밀리에 만나며 정변을 모의하였고 서인남인계 인사들의 지지와 자문을 구하였다. 반정을 감행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1622년 가을 정변 계획이 누설되어, 평산부사 이귀·신경진 등이 거사를 계획한다 하여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다. 동년 겨울에는 이귀·김자점 등이 유폐된 서궁(西宮, 인목왕후를 일컬음)을 비호한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1623년 4월 11일(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 서인의 김류·이귀·이괄·최명길 등이 일으킨 정변을 준비하고 그해 4월 12일(음력 3월 13일) 새벽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진입, 반정군에 힙입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반정의 명분을 확립하여 정통성을 다지는 동시에 서인계를 중심으로 정부를 재구성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다. 반정의 명분은 광해군 정권의 부도덕성과 실정에서 구했다.

반정의 명분인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의 근거자료가 작성된 광해군 실록과 둘째 아들인 효종 시대에 작성한 실록이 그 근거이므로 자신의 역모를 정당화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농후할 수 있으나 광해군일기는 정초본과 중초본, 정초본은 역사적 사료 즉 사초이며 중초본은 사초를 엮어서 만든 완성본이기 때문에 그들이 광해군의 행적을 왜곡했더라면 당연히 사초를 남기지 않고 없애야 마땅하므로 광해군일기는 그만큼 신뢰성이 높다. 한편 반정의 주요 명분 중의 하나는 광해군인목왕후 폐모론이었다. 반정 후 형식적으로 인목왕후를 복귀시킨 뒤 그녀의 교서를 받아 즉위하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즉위 이후 그녀에 대한 예우는 소홀하였다.

2. 2. 즉위 초: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인조는 즉위 직후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 임해군을 죽인 것과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을 문제삼아 반정을 합리화했다. 또한 광해군을 폐위시켜 강화도로 유배보내고, 광해군대의 정국을 주도했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을 처형했다.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을 수십 명 처형한 기록은 연산군 때의 사화 등에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조선시대의 왕이 즉위 직후에 수십 명의 고관대작들을 처형한 기록은 인조가 유일하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하고 관직을 내렸다. 이와 함께 광해군대의 정치를 비판, 자진해서 물러났거나 대북계로부터 축출당했던 서인·남인의 사림들을 중앙 정계로 불러들였다. 서인계의 정엽·오윤겸·이정구·김상헌 등과 남인계의 이원익·정경세·이수광 등이 그들이었다.

즉위 초기인 1623년 7월 기자헌·유몽인북인계 인사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 하옥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이유림 등의 역모가 있었다.

1624년에는 반정공신이던 이괄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반정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도감대장 이수일이 내응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 자신은 2등으로 평가받고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괄은 흥안군을 추대, 그는 공주까지 피난할 정도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이괄의 난) 1624년 이괄의 난 이후 피난가던 인조는 전 영의정 기자헌, 유몽인 등 옥에 갇힌 북인계 인사 40명을 전격 처형했다.

인조는 이러한 반왕권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제어함으로써 비정통적인 방법에 의해 승계한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왕권을 세워 신료를 장악하거나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 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행사를 제약했다.

인조 반정 공신 세력이 정국을 장악하면서 공신 세력의 과도한 세력 강화에 위협을 느낀 그는 공신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독재 김집송준길, 송시열로 대표되는 산림 세력을 중용한다.

현명한 외교관으로 여겨졌던 광해군은 조선의 전통적인 우방인 명나라와 세력이 커져가는 여진족(후에 만주족,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적인 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광해군이 폐위된 후, 보수적인 서인 세력은 여진족이 이끄는 후금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며 명나라와의 동맹을 유지했다. 이때까지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후금은 조선을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한윤은 만주로 도망쳐 후금의 지배자 누르가치에게 조선을 공격할 것을 촉구했고, 이로 인해 후금과 조선의 우호 관계는 종식되었다.

1627년, 장군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 명의 만주 기병과 전직 조선 장군 강홍립조선을 침략하여 광해군의 복위를 주장하고 김자점을 포함한 서인 세력의 처형을 요구했다. 장군 장만은 다시 후금에 맞서 싸웠지만, 침략을 격퇴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했다. 한편, 후금은 조선을 공격할 이유가 없어 명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철수했고, 곧 평화가 찾아왔다. 후금과 조선은 형제 국가임을 선언했고, 후금은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정묘호란).

서인 정권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고, 친명 반후금 정책을 분명히 했다.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철산(평안도) 진주를 인정했다. 모문룡은 철산을 근거지로 삼아 종종 후금의 배후를 공격했기 때문에, 후금은 조선을 공격했다.

2. 3.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정축하성 이후 청나라에서는 인조에게 삼전도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신하들은 모두 꺼려하였으나 결국 이경석이 자처하여 삼전도비의 비문을 쓰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치욕적인 상징물로 남게 된다.

45일간의 항전 끝에 항복을 결의한 인조는 1637년 음력 1월 30일 한강 남안의 삼전도에 있는 청군 본영으로 나아가, 홍타이지가 천자임을 삼궤구고두례로 인정하는 굴욕적인 성하의 맹약을 맺어야 했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청의 책봉국이 된다. 게다가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인질로 청에 억류되었다. 현재도 삼전도(현 서울 송파구석촌동)에는 홍타이지가 세운 맹약비(삼전도비)가 남아 있다. 청군은 50만 명의 조선인 포로를 끌고 만주로 귀환했다.

2. 3. 1. 삼전도비

병자호란정축하성 이후 청나라에서는 인조에게 대청황제 공덕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신하들은 모두 꺼려하였으나 결국 이경석이 자처하여 삼전도비의 비문을 쓰게 되었다. 이는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치욕적인 상징물로 남게 된다.

45일간의 항전 끝에 항복을 결의한 인조는 1637년 음력 1월 30일 한강 남안의 삼전도에 있는 청군 본영으로 나아가, 홍타이지가 천자임을 삼궤구고두례로 인정하는 굴욕적인 성하의 맹약을 맺어야 했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청의 책봉국이 된다. 게다가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는 인질로 청에 억류되었다. 현재도 삼전도(현 서울 송파구석촌동)에는 홍타이지가 세운 맹약비(삼전도비)가 남아 있다. 청군은 50만 명의 조선인 포로를 끌고 만주로 귀환했다.

2. 4. 내정 개혁과 북벌론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는 그곳에서 선교사 아담 샬 등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접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다. 1644년 11월 석방된 소현세자1645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인망이 높은 그가 자신을 왕위에서 쫓아낼 것을 두려워한 인조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씨(후일의 귀인 조씨)와 김자점 일파는 소현세자를 공격했고, 1645년 그를 독살하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가 세자를 독살하고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소문을 이유로 민회빈과 그녀의 친족들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보낸다. 이후 유배간 세 아들 중 장남 경선군(慶善君)과 차남 경완군(慶完君)은 제주도에서 죽고 막내 경안군(慶安君)만이 살아남는다.[3]

경선군과 경완군이 제주도에서 죽자, 세인의 비난 여론을 무마하고자 인조는 손자들이 유배될 때 따라가 그 시중을 들던 나인들을 잡아다가 문초, 장살하는 것으로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조가 손자들을 죽게 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퍼졌다.

1645년초 석방되어 귀국한 소현세자는 부왕과 언쟁, 갈등하다가 그해 갑자기 사망한다. 소현세자의 죽음의 원인은 독살로, 진원군 이세완 내외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독살 증상이 나타나 있었다.[33]

소현세자는 왕의 처소에서 머리에 심한 출혈을 보이며 의문사했다. 전설에 따르면, 인조는 소현세자가 중국에서 가져온 벼루로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한다.[3]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소현세자의 사망 후 온몸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시신이 급속도로 부패한 점을 들어 독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의 부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밝히려 했으나, 인조는 즉시 장례를 치르도록 명령하고 세자의 장례 절차를 대폭 축소했다. 인조는 심지어 아들의 장례 기간도 단축했다.[4]

인조는 소현세자의 맏아들인 경선군 대신에 봉림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했다(후에 효종이 됨).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고(막내 아들인 경안군만이 살아 돌아왔다), 역모죄로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를 사형에 처했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8년에 걸친 억류 생활을 보낸 후, 1644년에 청군과 함께 북경에 입성하여 아담 샬 등 예수회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서양 문물을 가지고 1645년에 귀국했다. 이미 명나라가 멸망했으므로 인질의 필요는 없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친청적이라고 본 (오랑캐인 서양 문물에 마음이 흔들린 것을 미워했다는 설도 있다) 인조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갔다. 소현세자 사후 그의 아들이 아닌 동생인 봉림대군(후의 제17대 국왕 효종)이 세자가 됨으로써, 현재에도 인조에 의한 독살을 의심하는 소문이 있다.

2. 4. 1. 소현세자 독살 의혹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昭顯世子)는 그곳에서 선교사 아담 샬 등을 통해 서구의 문물을 접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바뀌게 된다. 1644년 11월 석방된 소현세자1645년 2월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백성들로부터 인망이 높은 그가 자신을 왕위에서 쫓아낼 것을 두려워한 인조는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소용 조씨(후일의 귀인 조씨)와 김자점 일파는 소현세자를 공격했고, 1645년 그를 독살하였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는 그 아내인 민회빈 강씨가 세자를 독살하고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소문을 이유로 민회빈과 그녀의 친족들을 죽이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보낸다. 이후 유배간 세 아들 중 장남 경선군(慶善君)과 차남 경완군(慶完君)은 제주도에서 죽고 막내 경안군(慶安君)만이 살아남는다.[3]

경선군과 경완군이 제주도에서 죽자, 세인의 비난 여론을 무마하고자 인조는 손자들이 유배될 때 따라가 그 시중을 들던 나인들을 잡아다가 문초, 장살하는 것으로 여론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인조가 손자들을 죽게 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퍼졌다.

1645년초 석방되어 귀국한 소현세자는 부왕과 언쟁, 갈등하다가 그해 갑자기 사망한다. 소현세자의 죽음의 원인은 독살로, 진원군 이세완 내외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독살 증상이 나타나 있었다.[33]

소현세자는 왕의 처소에서 머리에 심한 출혈을 보이며 의문사했다. 전설에 따르면, 인조는 소현세자가 중국에서 가져온 벼루로 자신의 아들을 죽였다고 한다.[3] 그러나 일부 역사가들은 소현세자의 사망 후 온몸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시신이 급속도로 부패한 점을 들어 독살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의 부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밝히려 했으나, 인조는 즉시 장례를 치르도록 명령하고 세자의 장례 절차를 대폭 축소했다. 인조는 심지어 아들의 장례 기간도 단축했다.[4]

인조는 소현세자의 맏아들인 경선군 대신에 봉림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했다(후에 효종이 됨).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고(막내 아들인 경안군만이 살아 돌아왔다), 역모죄로 소현세자의 부인인 민회빈 강씨를 사형에 처했다.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8년에 걸친 억류 생활을 보낸 후, 1644년에 청군과 함께 북경에 입성하여 아담 샬 등 예수회 선교사들과 교류하며 서양 문물을 가지고 1645년에 귀국했다. 이미 명나라가 멸망했으므로 인질의 필요는 없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친청적이라고 본 (오랑캐인 서양 문물에 마음이 흔들린 것을 미워했다는 설도 있다) 인조와의 관계는 악화되어 갔다. 소현세자 사후 그의 아들이 아닌 동생인 봉림대군(후의 제17대 국왕 효종)이 세자가 됨으로써, 현재에도 인조에 의한 독살을 의심하는 소문이 있다.

2. 5. 죽음과 평가

인조는 1649년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55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죽기 직전, 병석에 누운 인조는 적장자인 왕세자 효종 내외를 찾지 않고 서녀 효명옹주와 서자 숭선군, 낙선군을 불렀다. 인조는 효종에게 이들을 벌하지 말고, 친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며 많이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인조의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장릉은 인조와 그의 원비 인렬왕후가 같이 합장된 능이다. 1635년 인렬왕후가 승하하자 이듬해 1636년 파주 운천리에 장릉을 조성되었고, 인조는 자신의 능을 미리 마련해 두었다. 1649년 인조 사후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화재와 뱀, 전갈이 무리를 짓는 이변이 계속되어 1731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장릉


1649년 6월 24일(음력 5월 15일)에 열조(烈祖)의 묘호를 받았으나, 8일 뒤 '''인조'''(仁祖)로 개정되었다. 묘호 변경 당시 남당 서지고의 묘호와 겹친다는 이유로 논란이 있었다.[21] 심대부는 조(祖)와 종(宗) 사이에 우열이 없다고 주장했고,[22] 유계는 인종의 묘호와 겹친다고 주장했다.[23] 조빈은 남송 고종의 예를 들어 반대했다.[24] 이후에도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효종은 인조로 결정했다.

인조의 시호는 '''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이며, 이후 존호가 더해져 정식 시호는 '''개천조운정기선덕헌문열무명숙순효대왕'''(開天肇運正紀宣德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이다.

인조는 조선 최악의 왕으로 평가받는다. 병자호란은 그가 세계정세에 조금만 관심이 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라는 평가가 있다. 인조는 친명배청 외교 정책으로 광해군의 밀명을 받아 청에 항복했던 강홍립, 박난영의 일가친척을 몰살시키고 척화파를 중용하였다.

인조는 청을 형의 나라로 인정하겠다고 타협하면서도, 강홍립의 숙부인 강인을 가짜 형조판서로 꾸며 청을 자극하는 내용의 회답서를 보냈다. 분노한 청나라 사신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조선은 결국 조건을 받아들였다. 병자호란 중 청나라가 세자를 인질로 요구한 일화는 인조가 손해를 보는 외교를 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인조는 유약하고 우유부단하며 불안정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이괄의 난, 두 차례의 대청 전쟁, 경제 파탄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는 폐위된 광해군과 비교되곤 하는데, 재위 기간 동안 거의 업적이 없었음에도 묘호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은 인조를 따르지 말아야 할 정치인의 전형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대를 개혁하고 국가의 방어를 확대한 공로는 인정받는다.

3. 가족 관계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서자 정원군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인헌왕후이다. 1607년(12세) 능양군(綾陽君)에 봉해졌다.

인조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4. 인조가 등장하는 작품

4. 1. 드라마

1981년 KBS 드라마 《대명》에서 김동훈이, 1986년 MBC 드라마 《회천문》에서 유인촌이, 1995년 KBS 드라마 《서궁》에서 박진형이 인조를 연기했다.[10] 2003년 SBS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는 안홍진이, 2008년 SBS 드라마 《일지매》에서는 김창완이, 같은 해 KBS 드라마 《최강칠우》에서는 최정우가 인조 역을 맡았다.[10] 2010년 KBS 드라마 《추노》에서는 김갑수가, 2012년 MBC 드라마 《마의》에서는 선우재덕이, 2013년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 - 꽃들의 전쟁》에서는 이덕화가 인조를 연기했다.[10] 2014년 tvN 드라마 《삼총사》에서는 김명수가, 2015년 MBC 드라마 《화정》에서는 김재원이, 2019년 KBS 드라마 《조선로코 - 녹두전》에서는 강태오가 인조 역을 연기했다.[10] 2021년 MBN 드라마 《보쌈 - 운명을 훔치다》에서는 이민재가, 2023년 MBC 드라마 《연인》에서는 김종태가 인조를 연기했다.[10]

2017년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박해일이 인조를 연기했다.[10]

4. 2. 영화

1962년 영화 《인목대비》에서 배우 신영균이 인조를 연기했다.[10] 1967년 영화 《인조반정》에서도 신영균이 인조를 연기했다.[10] 2017년 개봉한 영화 《남한산성》에서는 배우 박해일이 인조 역을 맡았다.[10] 2022년 영화 《올빼미》에서는 배우 유해진이 인조를 연기했다.[10]

참조

[1] 간행물 Besieged on a Frozen Mountain Top: Opposing Records from the Qing Invasion of Chosŏn, 1636–1637 https://muse.jhu.edu[...] 2018-06
[2] 서적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 : Yu Hyŏngwŏn and the late Chosŏn dynasty https://books.google[...] Univ. of Washington Press 1995
[3] 뉴스 '[FICTION VS. HISTORY] Mysterious death of Crown Prince Sohyeon reimagined in ''The Owl''' https://koreajoongan[...] 2023-01-15
[4] 웹사이트 '[한국여성인물사전] 155. 귀인 조씨(貴人趙氏)' https://www.etoday.c[...] 2017-07-17
[5] 뉴스 조선 후기 왕들, 청나라로부터 받은 시호 철저히 숨겼다 https://www.chosun.c[...] 2007-09-11
[6] 뉴스 清の諡号を隠した朝鮮後期の国王たち http://www.chosunonl[...] 2007-09-16
[7] 웹사이트 仁祖 https://kotobank.jp/[...]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2022-09-27
[8] 문서 次いで第21代国王・英祖 (朝鮮王)|英祖の2回。
[9] 문서 「丁未/遣義禁府都事, 賜宮女眞伊, 貞敏等死. 先是, 臺諫累月力爭, 請殺之, 上不從, 流眞伊于南海, 貞敏于珍島. 至是下敎于內需司曰:「貞敏等罪大惡極, 決難容貸, 竝賜自盡.」 貞敏卽尙宮李也. 國家命令, 必由政院, 而貞敏等賜死之命, 直下內需司, 移牒禁府施行, 聞者無不駭歎. 」朝鮮王朝実録 仁祖実録44巻 仁祖21年7月16日 丁未1回目
[10] 영화 天命の城 https://eiga.com/mov[...]
[11] 문서 인조실록 1권 1년 3월 13일 즉위일 기록
[12] 문서 그가 임진왜란 당시 혹은 임진왜란 수습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13] 문서 인조의 정원군 추숭에 반대하는 김장생에 대해, 이정구는 인조가 선조를 아버지로 불러야 하고 정원군을 백숙부로 불러야 한다는 김장생의 논리를 반박하였다.
[14] 문서 평안 감사 윤훤이 의주가 금나라에게 함락되었다고 아뢰다 http://sillok.histor[...]
[15] 문서 융복으로 갈아입고 노량에 행차하다 http://sillok.histor[...]
[16]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7]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8]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9]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20] 웹인용 출륙 금지령 http://www.grandcult[...]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01-22
[21] 문서 《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5월 23일 신사 1번째기사
[22] 문서 《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5월 23일 신사 2번째기사
[23] 문서 《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5월 23일 신사 3번째기사
[24] 문서 《효종실록》 1권, 효종 즉위년(1649년 청 순치(順治) 6년) 5월 23일 신사 4번째기사
[25] 문서 "《[[효종실록]]》 7권, 효종 2년(1651년 청 순치(順治) 8년) 12월 14일 (정사)\n----'''역적 조씨를 스스로 자결하게 하고 특별히 예장하도록 하다'''\n----삼사와 백관이 역적 조씨 모녀를 안율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n\n"아, 용서해 주고자 하나 일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고, 은혜를 온전히 하고자 하나 여러 사람의 노여움은 막기가 어렵다.\n\n죄가 종묘 사직과 자전([[장렬왕후]])에 관계되니 내가 어찌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부득이해서 공의를 따른다. 그러나 역시 차마 전형(典刑)을 가하지는 못하겠다.\n\n[[귀인 조씨 (인조)|귀인 조씨]]는 자진하게 하라. 옹주의 일은 결단코 따를 수 없다."\n\n하였다."
[26] 문서 "《[[인조실록]]》 44권, 인조 21년(1643년 명 숭정(崇禎) 16년) 4월 17일 (경진)\n----'''양사가 합계하여 저주 옥사의 괴수를 처단할 것을 청하다'''\n----이 당시 대궐 안에서 저주한 사건이 발각되어 상('''인조''')이 궁녀 애향 등을 국문하라고 명하여 애향 등이 모두 복죄되었다.\n\n애향은 상궁 이씨(尙宮 李氏)의 여종이다.\n\n[[귀인 조씨 (인조)|조귀인]]이 총애를 독차지하자 후궁 이씨가 원망을 품고 애향 등으로 하여금 저주하게 한 것이다.\n\n대개 조씨를 해치려는 속셈이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조씨가 스스로 저주하여 이씨를 모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한다."
[27] 문서 "《[[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1646년 청 순치(順治) 3년) 11월 15일 (무오)\n----'''간원이 광주부윤 구오가 궁인을 데리고 사는 이유로 죄를 정하도록 청하다'''\n----당초 참판 이성길(李成吉)에게 천첩(賤妾) 소생의 딸이 있었다.\n총명하고 재주가 있었으며 또 문자(文字)를 해독하므로 후궁(後宮)으로 뽑혀 들어갔었는데, 일찍이 상의 시중을 든 적이 있었다.\n\n얼마 안 되어 [[인열왕후]](仁烈王后)에게 미움을 받아 쫓겨났는데\n\n(중략)"
[28] 문서 "《[[인조실록]]》 21권, 인조 7년(1629년 명 숭정(崇禎) 2년) 8월 29일 (신사)\n----'''승지 심액이 대군의 상을 예조로 하여금 주관케 할 것을 청하다'''\n----승지 심액(沈詻)이 아뢰기를,\n"대군(大君)의 상(喪)이 아직 상(殤)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체가 중대한 만큼 장례에 관한 일을 귀후서(歸厚署)에만 전담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조 낭관 1원(員)으로 하여금 주관케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n\n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당시 대군은 태어난 지 한 달도 못되어 죽었다."
[29] 문서 "《[[인조실록]]》 31권, 인조 13년(1635년 명 숭정(崇禎) 8년 12월 5일 (신사)\n----'''대군이 태어나자 죽으니, 예조가 예로 장사지낼 것을 아뢰다'''"
[30] 문서 [[신흠]]의 손녀이며, [[신익전]]과 부인 조씨의 딸이다. 영풍군부인 신씨의 어머니인 조씨가 [[장렬왕후]]의 언니이므로, 장렬왕후는 신씨의 이모가 된다.
[31] 문서 "《[[승정원일기]]》 14책 (탈초본 1책) 인조 4년(1626년 명 천계(天啓) 6년) 7월 15일 (을유)\n----'''새로 태어난 공주를 잃은 성상의 안부를 묻는 약방의 계'''\n----약방제조 서성, 부제조 조익이 가로되,\n"삼가 듣자오니 새로 태어나신 공주께서 불의에 요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삼가 생각컨대 성상께서 슬프고 괴로우신 중에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아오나, 신들이 근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감히 문안을 올립니다." 하니\n\n"알았다." 하고 답하였다."
[32] 문서 김자점의 손자이며 효종 2년(1651년) 처형됨
[33] 문서 성종의 서자 양원군(楊原君)의 증손이며 [[인열왕후]]의 서제부, [[한준겸]]의 서녀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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