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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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승굉은 당나라 시대의 인물로, 빈왕 이수례의 장남이자 당 고종의 손자였다. 당 현종 치세에 광무군왕에 봉해졌으며, 비서감과 종정경 등 명예직을 역임했다. 763년 토번군이 장안을 점령하고 당 대종이 피신하자 토번군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곽자의의 군대에 의해 토번군이 철수하면서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화주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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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굉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성 | 이 (李) |
휘 | 승굉 (承宏) |
재위 기간 | 763년 11월 18일 - 763년 11월 30일 |
왕조 | 당나라 (唐) |
이름 | 성굉 (Chénghóng) |
가계 | |
부친 | 빈왕 이수례 |
기타 | |
이전 황제 | 대종 |
목록 | 당나라의 임시 (비정통) 황제 |
2. 생애
이승굉은 당나라의 황족으로, 아버지는 빈왕 이수례이며 할아버지는 당 고종의 아들 장회태자 이현이다.[4] 당 현종 때 광무군왕(廣武郡王)에 봉해졌으나, 서자였기에 아버지의 빈왕 작위는 잇지 못했다. 명예직인 비서감과 종정경 등을 지냈으나 실권은 없었고, 부적절한 교류를 이유로 후베이성 방주로 좌천되기도 했다.[5][6]
763년, 토번 군대가 수도 장안을 점령하고 당 대종이 피난하는 혼란 속에서, 토번군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1] 당시 토번군은 100여 명의 관리를 임명하는 등 잠시나마 이승굉을 중심으로 한 정권을 세우려 했으나, 곽자의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의 반격으로 토번군은 곧 철수했다.[3] 토번군이 물러가자 황야에 숨었던 이승굉은 곽자의에게 체포되었고, 당 대종은 그를 사면하는 대신 산시성 화주로 유배 보냈다.[7] 그는 유배지 화주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이승굉의 출생 연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빈왕 이수례이고, 할아버지는 당 고종의 아들이자 한때 황태자였던 이현이다.[4] 이승굉은 이수례의 장남이었으나, 정실 부인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741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빈왕 작위를 잇지 못했다. 빈왕 작위는 동생 이승녕에게 돌아갔다.당 현종 재위 시기인 개원 연간(713년~741년) 초기에 광무군왕(廣武郡王)에 봉해졌다. 한때 명예직인 비서감(秘書監) 벼슬을 받았으나, 실제 궁궐 도서관 관련 업무를 맡지는 않았다.[5] 이후 부적절한 교류를 이유로 방주(房州, 현재의 후베이성 스옌시) 지사 비서감으로 좌천되었다.[6] 나중에 수도 장안으로 다시 불려와 명예직인 종정경(宗正卿) 벼슬을 받았지만, 이때도 실제 종정부를 운영하지는 않았다.[5]
2. 2. 토번에 의한 황제 옹립 (763년)
763년, 토번 군대가 당나라 수도 장안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당시 황제였던 당 대종은 산주(현재의 허난성 산먼샤시)로 피난했다. 763년 11월 18일, 토번군은 장안에 입성했다.[1]토번에 투항한 당나라 장군 가오후이(高暉)와 토번 장군 응안람 탁드라 루콩(마중영, 馬重英)은 광무군왕(廣武郡王)이었던 이승굉을 황제로 추대하고 연호를 대룡(大龍)이라 정했다. 또한 어사 유커펑(于可封)과 훠구이(霍瓌)를 재상으로 삼는 등 100여 명을 관리로 임명했다. 하지만 토번군은 병 때문에 장안에 남아 있던 재상 묘진경에게 새 정권에 협력하도록 강요하지는 못했다.
곧 당나라의 명장 곽자의가 군사를 일으켜 저항하자, 토번군은 장안을 약탈한 뒤 763년 11월 30일에 철수했다.[3] 이승굉은 토번군이 철수하자 달아나 황야에 숨었으나 곽자의의 군대에게 붙잡혔다. 당 대종은 그를 죽이지는 않고 화주(현재의 산시성 웨이난시)로 유배 보냈다.[7] 이승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배지인 화주에서 사망했다.
2. 3. 몰락과 죽음
763년, 토번 군대가 당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장안을 점령하였다. 당시 황제였던 당 대종은 산주(陝州)로 피신하였다. 763년 11월 18일,[1] 장안에 입성한 토번군은 당나라에서 투항한 장군 가오 후이(高暉)와 토번 장군 응안람 탁드라 루콩(馬重英)을 앞세워 광무군왕 이승굉을 황제로 추대하고 연호를 대룡(大龍)이라 하였다. 또한 유커펑(于可封)과 훠구이(霍瓌)를 재상으로 삼는 등 100여 명의 관리를 임명하였다.그러나 토번군은 병으로 장안에 남아 있던 재상 묘진경에게 이승굉 정권에 협력하도록 강요하였으나, 묘진경은 이를 거부하였다. 곧 당나라 장군 곽자의가 군사를 일으켜 저항하자, 토번군은 도시를 약탈하고 763년 11월 30일에 철수하였다.[3]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이승굉은 황야에 숨었지만, 곧 곽자의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당 대종은 그를 사면하였으나, 화주(華州)로 유배 보냈다.[7] 이승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배지인 화주에서 사망하였다.
3.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www.sinica.ed[...]
[2]
서적
Zizhi Tongjian
[3]
웹사이트
中央研究院
http://www.sinica.ed[...]
[4]
서적
New Book of Tang
http://www.sidneyluo[...]
2012-02-18
[5]
서적
Old Book of Tang
http://www.sidneyluo[...]
2007-12-10
[6]
서적
New Book of Qing
http://www.sidneyluo[...]
2007-12-26
[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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