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카 미쓰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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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즈카 미쓰노부는 1902년 에히메현에서 태어나, 쌀 소동을 계기로 일본 공산당에 가입하여 노동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모스크바의 동방노동자공산대학에서 유학했으나, 공산당에 환멸을 느껴 귀국 후 경찰의 스파이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스파이로서 공산당에 잠입하여 아타미 사건을 일으키는 등 활동했으며, 이후 만주에서 건축업을 하다가 종전 후 가명으로 숨어 살았다. 1976년 국회에서 그의 스파이 활동과 도피 생활에 대한 증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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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카 미쓰노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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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이즈카 미쓰노부 (飯塚盈延) |
출생 | 1933년 1월 26일 |
사망 | 2002년 12월 14일 (69세) |
출생지 | 일본 후쿠오카현 |
사망지 | 일본 후쿠오카현 |
국적 | 일본 |
직업 | 기업가 |
배우자 | 이즈카 세쓰코 (飯塚勢津子) |
자녀 | 3남 |
경력 | |
주요 경력 | 다이아 건설 회장 다이아 그린랜드 회장 규슈 리조트 기업 사장 |
수상 | |
주요 수상 | 후쿠오카 현 공로자 표창 훈4등 서보장 |
2. 생애
1902년 에히메현에서 태어나 1909년 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 1918년 쌀 소동 등을 계기로 일본 공산당 최초의 노동자 당원이 되었고, 노동 운동에 관여했다. 일본 공산당(제2차) 파견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동자공산대학(쿠트베)에 유학했으나, 공산당에 환멸을 느껴 귀국 후 검거되어 전향한 뒤 경찰 스파이가 되었다.[1]
이후 당에 잠입하여 비상시 공산당 시대에 다양한 권력 도발적 방침을 지시했고, 아타미 사건으로 공산당 대표자들을 일제 검거로 몰아넣었다. 카자마 조키치 위원장 등은 그가 스파이임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이후 당원들은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아타미 사건 후 만주에서 형과 건축업을 했다.[1]
1976년 10월 28일 제78회 국회 징벌 위원회에서 곤노 요지로 중의원 의원은 이즈카가 거액을 받고 종적을 감춘 뒤 도망자 생활을 하다 쇼와 40년에 사망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출생지 본적에는 생존한 것으로 되어 있다.[1]
2. 1. 초기 생애 (1902년 ~ 1920년대 초)
1902년 에히메현 슈소군 고마쓰정에서 태어나 1909년 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이 좋아 '천재'로 불렸다. 쌀 소동 등을 계기로 일본 공산당 최초의 노동자 당원이 되었고, 와타나베 마사노스케가 이끌던 도쿄 합동조합에 몸을 던지면서 노동 운동에 관여했다.2. 2. 노동 운동 및 일본 공산당 활동 (1920년대 초 ~ 1930년대 초)
와타나베 마사노스케가 이끌던 도쿄 합동조합에서 활동하며 노동 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젊은 노동 운동 활동가로서 일본 공산당(제2차)의 파견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동자공산대학(쿠트베)에 유학했다(유학 중 가명은 '표도로프').[1]2. 3. 경찰 스파이 활동 (1930년대 초 ~ 1945년)
검거되어 전향한 뒤 경찰의 스파이가 되었다고 한다. 마쓰무라(이즈카)는 스파이로서 당에 잠입하여 비상시 공산당 시대의 공산당에서 가옥 자금국의 책임자가 되어 다양한 권력 도발적 방침을 지시했다. 그 후 아타미 사건으로 공산당의 대표자들을 일제 검거로 몰아넣었다.[1]같은 동방노동자공산대학(쿠트베) 출신이었던 카자마 조키치 위원장을 비롯한 당 간부들은 마쓰무라가 스파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일반 당원들도 그의 과격한 활동 방침에 거의 의심을 품지 않고 따랐다. 그러나 아타미 사건 전후의 일제 검거 후, 취조나 공판 등에서 마쓰무라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은 당원들은 그가 경찰의 스파이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1]
아타미 사건 후에는 만주에서 잠시 형과 건축업을 했다고 한다.[1]
2. 4. 아타미 사건 이후 행적 (1930년대 중반 ~ 1976년)
아타미 사건 이후 이즈카 미쓰노부는 만주에서 잠시 형과 함께 건축업을 했다고 한다.[1] 1976년 10월 28일에 열린 제78회 국회 징벌 위원회에서 일본 공산당 곤노 요지로 중의원 의원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특고 수뇌부는 스파이 이즈카 미쓰노부에게 거액을 주고 종적을 감추게 했고, 그 후 이즈카는 평생 사회로부터의 도망자로서의 생활을 하며, 요정에 숨어, 홋카이도와 만주를 왕복하며, 종전 후 가명으로 귀국한 이래 본적을 숨기고 가명을 계속 사용하며, 전 특고들에게 제거될 것을 두려워하여 한 방에 틀어박혀, 쇼와 40년 술에 빠져 도망자로서 생애를 마감했다. 그러나, 출생지의 본적상 이즈카 미쓰노부는 지금도 살아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1]
3. 평가 및 의혹
이즈카 미쓰노부는 일본 공산당 최초의 노동자 당원 출신으로, 동방노동자공산대학(쿠트베)에서 유학까지 한 엘리트였다. 그러나 유학 중 공산당에 환멸을 느끼고 귀국 후 전향, 경찰의 스파이가 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1] 그는 당에 잠입하여 비상시 공산당 시대에 가옥 자금국 책임자가 되어 권력 도발적인 방침을 지시했고, 아타미 사건으로 공산당 대표자들을 검거되게 하였다.[1] 아타미 사건 이후에는 만주에서 형과 함께 건축업을 했다고 한다.[1]
3. 1. 스파이 활동의 진위 여부
이즈카 미쓰노부가 일본 공산당에 잠입하여 아타미 사건을 통해 공산당 대표자들을 일제 검거로 몰아넣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나, 그의 스파이 활동에 대한 명확한 물증은 부족하다. 다만 여러 정황 증거와 증언들이 존재한다.[1]카자마 조키치를 비롯한 당 간부들은 이즈카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고, 일반 당원들 역시 그의 과격한 활동 방침에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아타미 사건 이후, 취조나 공판 과정에서 이즈카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자, 일부 당원들은 그가 경찰의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1]
1976년 10월 28일 제78회 국회 징벌위원회에서 공산당 곤노 요지로 중의원 의원은 "특고 수뇌부가 스파이 이즈카 미쓰노부에게 거액을 주고 종적을 감추게 했다"라고 발언했다. 곤노 의원에 따르면, 이즈카는 이후 평생 사회로부터 도망치는 생활을 했으며, 종전 후에는 가명을 사용하고 본적을 숨긴 채 전 특고들에게 제거될 것을 두려워하며 살다가 쇼와 40년에 술에 빠져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러나 출생지의 본적상 이즈카 미쓰노부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1]
3. 2. 일본 공산당에 미친 영향
이즈카 미쓰노부는 일본 공산당에 심각한 타격을 입혀 당의 분열과 와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비상시 공산당 시대에 당에 잠입하여 가옥 자금국의 책임자가 되었고, 다양한 권력 도발적인 방침을 지시했다.[1] 아타미 사건을 통해 공산당 대표자들을 일제 검거로 몰아넣었다.[1]카자마 조키치 위원장을 비롯한 당 간부들은 이즈카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일반 당원들도 그의 과격한 활동 방침에 거의 의심을 품지 않았다.[1] 그러나 아타미 사건 이후, 취조나 공판 과정에서 이즈카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자, 일부 당원들은 그가 경찰의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1]
1976년 10월 28일에 열린 제78회 국회 징벌 위원회에서 공산당 곤노 요지로 중의원 의원은 "특고 수뇌부가 스파이 이즈카 미쓰노부에게 거액을 주고 종적을 감추게 했다"고 발언했다.[1] 곤노 의원에 따르면, 이즈카는 그 후 평생 사회로부터 도망치는 생활을 했으며, 종전 후에는 가명을 사용하고 본적을 숨긴 채 전 특고들에게 제거될 것을 두려워하며 살다가 1965년에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1]
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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