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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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자이이는 청나라 도광제의 서자이자 혁종의 아들로, 서태후의 지지를 받아 광서제의 폐위 후 그의 아들 부준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의화단 운동을 지지하며 서태후와 의화단 지도자 조복전의 만남을 주선하고, 호신영을 창설하여 베이징 야전군을 지휘했으나, 의화단 패배 후 실각하여 신장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베이징으로 초청받았으나, 반외세적 태도로 인해 다시 닝샤로 돌아가 여생을 보냈으며, 양루찬 등 무술가들을 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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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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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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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이신 교로 자이이 (愛新覺羅 載漪) |
만주어 이름 | Dzai-i () |
작위 | 이혁단군왕 (已革端郡王) |
호 | 설락희 (薛落曦) |
신분 | |
직책 | 청나라 의화단 지지 세력의 지도자, 군왕, 대신 |
봉호 | 단군왕 (端郡王) |
생애 | |
출생 | 1856년 8월 26일 |
출생지 | 청나라 직례성 베이징 |
사망 | 1923년 1월 10일 |
사망지 | 중화민국 장쑤성 난징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돈근친왕 (생부), 서민군왕 (양부) |
배우자 | 대복진 이이근각라씨 (본부인), 그 외 측실 3명 |
자녀 | 슬하 2남 (차남 보국공) |
친척 | 서회친왕 (양조부), 도광제 (친조부), 선통제 (삼종질) |
경력 | |
재위 기간 (서열) | 1861년–1900년 (예친왕 가문의 수장) |
재위 유형 | 임기 |
선임자 | 이혁 |
후임자 | 화석예친왕 재심 |
재위 기간 (관직) | 1900년 6월 10일–1900년 9월 25일 |
재위 유형 (관직) | 임기 |
군주 | 광서제 |
직책 | 내각 대학사, 총리아문 대신 |
군사 경력 | |
소속 | 청나라 |
참전 | 의화단 운동 |
기타 | |
종교 | 유교(성리학) → 불교 |
2. 생애
도광제의 서자이자 돈각친왕(惇恪親王)의 양자인 돈근친왕(惇勤親王)의 아들이다. 양부는 서회친왕(瑞懷親王)의 아들인 서민군왕(瑞敏郡王)이다. 6촌 재종형인 동치제의 추정상속인이기도 한 보국공 푸쥔(輔國公 溥儁)은 그의 둘째아들이다.
1861년 5세 때 5촌 종숙부 함풍제에 의하여 '''이혁단군왕'''(已革端郡王)에 책봉되었다.
서태후는 1899년 3월 18일을 기하여 이혁단군왕의 둘째아들 부준을 보경제(保慶帝)로 가제 참칭하였으나, 1900년 1월 24일을 기하여 결국 서태후에 의하여 가제위에서 폐위되었고, 부준은 보국공으로 강등되었다. 청나라 멸망 후 이혁단군왕과 부준은 중화민국 국민정부로부터 배척되었다.
1922년 5월 29일을 기하여 향년 66세로 훙서하였다.
자이이는 아이신 교로 씨족 출신으로, 도광제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총(돈친왕)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팔기 중 정백기에 속했다. 그는 아들이 없어 예친왕의 작위를 물려줄 사람이 없었던 아버지의 사촌 이지(奕誌; 1827–1850)에게 입양되었다. 1894년 이지의 뒤를 이어 "제2계단 단군왕"(端郡王)이라는 작위로 군왕 (2계단 친왕)이 되었다.
단친왕은 서태후 편에 서서 광서제와 그의 동맹자들이 시작한 백일유신 운동에 반대했다. 개혁 운동이 좌절된 후, 1899년 서태후는 광서제를 폐위시키고 푸준을 그 자리에 앉히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단친왕의 아들 푸준을 대아거(大阿哥)로 지명했다. 그러나 다른 국가의 대사들이 푸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자 서태후는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1][3]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자이이는 아이신 교로 씨족 출신으로, 도광제의 서자이자 돈각친왕(惇恪親王)의 양자인 돈근친왕(惇勤親王)의 아들이다.[1][3] 양부는 서회친왕(瑞懷親王)의 아들인 서민군왕(瑞敏郡王)이다. 팔기 중 정백기에 속했다.[1] 그는 아들이 없어 예친왕의 작위를 물려줄 사람이 없었던 아버지의 사촌 이지(奕誌; 1827–1850)에게 입양되었다.[1]1861년 5세 때 5촌 종숙부 함풍제에 의하여 '''이혁단군왕'''(已革端郡王)에 책봉되었다.[1] 1894년 이지의 뒤를 이어 "제2계단 단군왕"(端郡王)이라는 작위로 군왕 (2계단 친왕)이 되었다.[1]
서태후는 1899년 3월 18일을 기하여 이혁단군왕의 둘째아들 부준을 보경제(保慶帝)로 가제 참칭하였으나,[1] 다른 국가의 대사들이 푸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자[3] 1900년 1월 24일을 기하여 결국 서태후에 의하여 가제위에서 폐위되었고, 부준은 보국공으로 강등되었다.[1] 6촌 재종형인 동치제의 추정상속인이기도 한 보국공 푸쥔(輔國公 溥儁)은 그의 둘째아들이다.
단친왕은 서태후 편에 서서 광서제와 그의 동맹자들이 시작한 백일유신 운동에 반대했다.[1][3]
2. 2. 의화단 운동
도광제의 서자이자 돈각친왕의 양자인 돈근친왕의 아들이다. 5세 때였던 1861년에 5촌 종숙부 함풍제에 의하여 '''이혁단군왕'''(已革端郡王)에 책봉되었다.보수적이며 외국에 강하게 반대하는 정치가인 단친왕은 1899년부터 1901년까지 이어진 의화단(義和團)의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서태후와 의화단의 지도자 조복전 사이의 만남을 주선했다. 1899년, 단친왕은 자신의 사병 부대인 호신영을 창설했는데,[4] 이는 여러 근대화된 만주 팔기군 중 하나였다.[5] 1900년 6월의 위기 동안 그는 총리아문(외교부)을 이끌었고 서식구 성당을 포위한 의화단을 지휘했다. 그는 또한 팔국 연합군에 맞서 베이징 야전군[6]을 지휘했다. 단친왕의 동생인 재란(載瀾) 역시 의화단 운동의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의화단이 패배하고 청 정부가 의화단에 대항하여 팔국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단친왕은 황실의 총애를 잃었다. 승리한 팔국 연합군은 단친왕을 반란의 배후 조종자 중 한 명으로 지목했다. 1902년 청 정부는 단친왕의 의화단 연루를 규탄하는 황제를 내렸다. 단친왕과 그의 가족은 신장으로 유배되었다.[7] 서태후의 시녀인 유덕령 공주에 따르면, 서태후는 의화단 사태와 그녀의 승인이나 지시 없이 모든 외국인을 죽이라는 황제를 내린 것에 대해 단친왕을 비난했다.[8]
의화단 운동 동안 동복상과 단친왕이 간쑤를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9][10] 또 다른 소문은 동복상이 은퇴했다는 것이었다.[11][12]
2. 3. 실각과 유배
5세 때였던 1861년에 그는 5촌 종숙부 함풍제에 의하여 '''이혁단군왕'''(已革端郡王)에 책봉되었다.서태후는 1899년 3월 18일을 기하여 이혁단군왕의 둘째아들 부준을 보경제(保慶帝)로 가제 참칭하였으나, 1900년 1월 24일을 기하여 결국 서태후에 의하여 가제위에서 폐위되었고, 부준은 보국공으로 강등되었다. 청나라 멸망 후 이혁단군왕과 부준은 중화민국 국민정부로부터 배척되었다.
단친왕은 망명 기간 동안 신장에 머물지 않고, 닝샤 서쪽에 위치한 알라산으로 가서 몽골 왕자의 저택에서 살았다.[13] 1911년경 신해혁명 당시 무슬림이 닝샤를 장악하자 닝샤로 이주했다.[13] 그 후, 그는 성윈과 함께 신장으로 이동했다.[13]
단친왕은 장쉰 장군이 1912년에 퇴위한 마지막 황제 푸이를 잠시나마 청나라 황제 자리에 복위시켰던 1917년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14] 그는 공격적인 반외세적 태도로 인해 집권 엘리트들로부터 민족 영웅으로 여겨졌다.[14] 중화민국의 베이양 정부는 그를 베이징으로 초청하여 협력했다.[14] 그러나 단친왕의 중국에 이질적인 것에 대한 혐오는 변하지 않았다.[14] 그는 한 군 장교가 서양식으로 연 파티에서 음식을 거부했다.[14] 그는 또한 손자들이 기차를 타는 것에 대해 분노했는데, 기차가 중국에 이질적인 물건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14] 외국인들은 단친왕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베이양 정부에 항의하기 시작했다.[15] 그 결과, 단친왕은 다시 닝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15] 베이양 정부는 그의 생활비를 50% 인상했다.[15]
1922년 5월 29일을 기하여 향년 66세로 훙서하였다. 그는 1923년에 사망했다.
2. 4. 유배 생활과 귀환
1861년 5세 때 5촌 종숙부 함풍제에 의하여 '''이혁단군왕'''(已革端郡王)에 책봉되었다. 서태후는 1899년 3월 18일을 기하여 이혁단군왕의 둘째아들 부준을 보경제(保慶帝)로 가제 참칭하였으나, 1900년 1월 24일 부준은 서태후에 의하여 가제위에서 폐위되었고, 보국공으로 강등되었다. 청나라 멸망 후 이혁단군왕과 부준은 중화민국 국민정부로부터 배척되었다.단친왕은 망명 기간 동안 닝샤 서쪽에 위치한 알라산으로 가서 몽골 왕자의 저택에서 살았다. 1911년경 신해혁명 당시 무슬림이 닝샤를 장악하자 닝샤로 이주했고, 그 후 성윈과 함께 신장으로 이동했다.[13]
1917년, 장쉰 장군이 1912년에 퇴위한 마지막 황제 푸이를 잠시나마 청나라 황제 자리에 복위시키면서, 단친왕은 베이징으로 초청받았다.[14] 그는 공격적인 반외세적 태도로 인해 집권 엘리트들로부터 민족 영웅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14] 중화민국의 베이양 정부는 그를 베이징으로 초청하여 협력했으나, 단친왕은 중국에 이질적인 것에 대한 혐오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한 군 장교가 서양식으로 연 파티에서 음식을 거부했고, 손자들이 기차를 타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14] 외국인들은 단친왕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베이양 정부에 항의했고, 그 결과 단친왕은 다시 닝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베이양 정부는 그의 생활비를 50% 인상했다.[15] 1922년 5월 29일 향년 66세로 훙서하였다. 1923년에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15]
3. 가계
단친왕은 광서제의 사촌이었다. 광서제의 생부인 순친왕은 단친왕의 생부인 단친왕의 일곱 번째 형제였기 때문이다. 단친왕은 또한 광서제와 추가적인 가족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아내인 예헤나라 씨의 징팡은 예헤나라 씨 출신으로, 서태후의 남동생인 구이샹(桂祥)의 셋째 딸이었다. 구이샹의 둘째 딸인 징펀은 광서제의 황후였다.[1]
그러나 ''아이신 교로 가계도(愛新覺羅宗譜)''에는 단친왕의 아내가 서태후의 조카인 징팡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단친왕의 정실 부인은 사오창(紹昌)의 딸로, 이르겐 기오로 씨(伊爾根覺羅氏) 출신이었다. 단친왕의 측실 부인은 몽골 보르지긴 씨족 출신이었다.
4. 기타
양식 태극권의 창시자인 양루찬을 포함한 여러 유명 중국 무술가들은 단친왕의 후원을 받았다. 단친왕의 저택에서 양루찬의 아들 양반후와 오식 태극권의 첫 번째 스승인 오전우를 위해 태극권 원리에 대한 40장짜리 고전 텍스트의 사본이 만들어졌다.
1963년 미국 역사 영화 ''북경 55일''에서 듀안 친왕 역은 호주 배우 로버트 헬프만이 연기했다.
《중국 권투당 지도자 돤 왕자 초상》, in: 《도이체 하우샤츠》, XXVI, 1899/1900, No. 46, p. 861-864 (초상: p. 862) 에도 해당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Manchus & Han: Ethnic Relations and Political Power in Late Qing and Early Republican China, 1861–1928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1
[2]
서적
The foreigner in China
Hutchinson
[3]
서적
The Boxer Rebellion: The Dramatic Story of China's War on Foreigners that Shook the World in the Summer of 1900
https://archive.org/[...]
Bloomsbury Publishing
[4]
서적
The Origins of the Boxer War: A Multinational Study
Routledge
2002
[5]
서적
Manchus & Han: Ethnic Relations and Political Power in Late Qing and Early Republican China, 1861-1928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6]
서적
China and the allies, Volume 1
Charles Scribner's sons
[7]
서적
Peking 1900: The Boxer Rebellion
Osprey Publishing
2001
[8]
서적
Two Years in the Forbidden City
Moffat Yard & Company
1911
[9]
서적
Japan Weekly Mail
https://books.google[...]
1900
[10]
서적
The Japan Daily Mail
https://books.google[...]
1900
[11]
서적
Japan Weekly Mail
https://books.google[...]
1900
[12]
서적
The Japan Daily Mail
https://books.google[...]
1900
[13]
서적
Travels Of A Consular Officer In North-West China
CUP Archive
[14]
서적
The origins of the Boxer War: a multinational study
Psychology Press
[15]
서적
The origins of the Boxer War: a multinational study
Psycholog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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