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방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적방진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법가와 유학에 모두 능통하고 천문에도 밝아 성제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엄격한 정치로 많은 관료를 탄핵했으며, 승상 자리까지 올랐으나, 결국 자결했다. 적방진은 춘추좌씨전과 천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사마천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의 아들 적선이 작위를 이었지만, 적방진 가문은 왕망 시대에 몰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7년 사망 - 전한 성제
전한 성제는 원제와 왕정군 사이에서 태어나 환관 세력을 약화시켰지만 외척 세력이 커져 왕망의 찬탈 요인이 되었고, 사치스러운 생활과 후사 문제, 조비연·조합덕 자매 총애 등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전한의 제12대 황제이다. - 기원전 7년 사망 - 소의 조씨
소의 조씨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소개를 작성할 수 없습니다. - 전한의 승상 - 소하
소하는 전한 초기의 정치가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으며, 군수 보급, 내정 담당, 한신 천거, 승상으로서 국가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한 인물이다. - 전한의 승상 - 공손홍
공손홍은 전한 무제 시대의 정치가로, 40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승상에 올랐으나, 검소한 생활과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며 사마천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 전한의 어사대부 - 복식
복식은 전한 무제 시대에 재산을 기부하고 관직에 나아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으며, 염철 전매 정책 폐지를 주장하다가 좌천되었다. - 전한의 어사대부 - 장탕
장탕은 전한 무제 시대에 율령 정비, 염철 전매 정책, 고민령 제정을 주도하여 국가 재정 확보에 기여했으며, 무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모함으로 자살했다.
| 적방진 |
|---|
2. 생애
대대로 한미한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적공(翟公)이 학문에 힘써 군의 문학(文學)이 되었다.[1] 적방진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태수의 하급 관리가 되었는데, 다른 관원들은 그를 두고 멍청하다며 무시하였다.[1] 그러나 그의 관상을 본 채보(蔡父)는 열후에 봉해질 상이니 유학을 공부하라고 하였고, 적방진은 계모와 함께 장안으로 떠났다.[1] 계모는 신을 삼아서 학비를 마련했고, 적방진은 두각을 드러내어 의랑(議郞)에 임명되었다.[1]
하평 연간에 박사가 되었고, 삭방자사, 승상사직으로 승진했다. 황제를 따라 감천으로 향할 때 사례교위인 진경의 탄핵을 받아 수레와 말을 몰수당했지만, 반대로 진경의 과거 과실을 알고 이를 폭로하여 진경을 파면시켰다. 게다가, 부임 시 승상에게 예를 다하지 않은 후임 사례교위 연훈을 탄핵하여 연훈을 좌천시켰다. 사례교위를 잇따라 파면시킨 탓에 대신들도 적방진을 두려워했고, 승상 설선은 그를 매우 중히 여겨, 부하들에게 "그는 조만간 승상이 될 것이니, 삼가 그를 섬기도록 하라"라고 말했다.
적방진은 황제 능 조영과 관련된 부정부패를 적발했고, 황제는 그에게 삼공구경을 맡기려고 하여, 경조윤에 임명하여 그의 능력을 시험했다. 그곳에서도 엄격한 자세로 임했지만, 친구인 청주자사 호상의 조언을 듣고 다소 엄격함을 풀었다.
영시 2년(기원전 15년), 전임자 왕준의 죽음으로 어사대부가 되었다. 수개월 후, 적방진은 경조윤 시절의 과실로 집금오로 좌천되었지만, 이어서 승상 설선이 파면되자, 후임으로 적방진을 추천하는 목소리가 많았기에, 적방진이 승상으로 발탁되어 고릉후가 되었다.
승상이 된 그는 엄격한 정치를 펼쳐, 많은 태수와 구경이 탄핵되었다. 또한, 외척인 왕씨와 대립하는 한편, 왕씨의 친척인 순우장과 친교를 맺었다. 적방진은 법률과 유학에 모두 통달했고, 천문에도 밝았으며, 황제는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
수화 2년(기원전 7년), "형혹성이 심성을 지킨다"[1]라는 천문의 이변이 일어나자, 그 천변으로 인한 재앙을 황제를 대신하여 대신이 받아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황제는 적방진에게 지금까지 그의 정치를 엄하게 질책하는 책서를 내리고, 자결을 강요했다. 적방진은 즉시 자살했다. 황제는 적방진의 자살을 숨기고, 황제 스스로 여러 번 조문하는 등, 이례적인 대우를 했다.
공후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열후는 아들 적선이 이었다.
적선의 동생에 해당하는 인물이 적의이며, 그는 왕망 시대에 반란을 일으켜 패배했다. 왕망은 적방진 등의 묘를 파헤치고, 삼족을 멸했다.
적방진은 『춘추곡량전』을 공부한 한편, 『춘추좌씨전』과 천문도 좋아했다. 『춘추좌씨전』에서는 유흠의, 천문에서는 전종술의 스승에 해당한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대대로 한미한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적공(翟公)이 학문에 힘써 군의 문학(文學)이 되었다.[1] 적방진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태수의 하급 관리가 되었는데, 다른 관원들은 그를 두고 멍청하다며 무시하였다.[1] 그러나 그의 관상을 본 채보(蔡父)는 열후에 봉해질 상이니 유학을 공부하라고 하였고, 적방진은 계모와 함께 장안으로 떠났다.[1] 계모는 신을 삼아서 학비를 마련했고, 적방진은 두각을 드러내어 의랑(議郞)에 임명되었다.[1]2. 2. 승진과 정치 활동
대대로 한미한 집안 출신인 적방진은 하평 연간에 박사가 되었고, 승상사직으로 승진하였다. 사례교위 진경을 탄핵하여 파면시키고, 후임 사례교위 연훈도 좌천시키는 등 강직한 면모를 보였다.[1] 대신들은 적방진을 두려워하였고, 승상 설선은 그를 중용하였다.영시 2년(기원전 15년), 왕준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경조윤 시절의 잘못으로 집금오로 좌천되기도 했으나,[1] 곧 승상 설선이 파면되면서 신하들의 추천으로 후임 승상이 되고 고릉후(高陵侯)에 봉해졌다.
승상이 된 후, 엄격한 정치를 펼쳐 많은 태수와 구경들을 탄핵했고, 외척 왕(王)씨와 대립하며 순우장과 친교를 맺었다.[1] 법가·유가에 모두 통달하고, 천문에도 밝아 성제의 중용을 받았다.
2. 3. 자결과 가문의 몰락
수화 원년(기원전 8년), 순우장이 죄를 지어 주살되자 순우장과 가까웠던 적방진은 파면될 위기에 처했으나 성제의 용서를 받았다.[1] 다시 정무를 보아 평소 순우장과 가까웠던 고관 20여 명을 탄핵하였다.[1]이듬해, 형혹성(화성)이 심수(心宿)에 접근하는 현상이 일어났다.[1] 이로 인해 황제가 입을 재앙을 대신(大臣)이 대신 입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고, 성제는 적방진에게 그동안의 혹독한 정치를 비난하는 글을 내리는 한편 자결을 명하였다.[1] 적방진은 바로 목숨을 끊었고, 성제는 적방진의 자결을 숨기는 한편 여러 차례 조문하였다.[1] 시호(諡號)를 공(恭)이라 하였고, 아들 적선이 작위를 이었다.[1]
막내아들 적의는 왕망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결국 적방진의 가문은 주멸되었다.[1] 왕망은 적방진 등의 묘를 파헤치고, 삼족을 멸했다.
3. 평가
적방진은 법가와 유가에 모두 통달하고 천문에도 밝아 성제의 중용을 받았다. 일을 엄하게 처리하여 많은 태수와 구경들이 탄핵되었고, 외척 왕씨와 대립하였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적방진을 두고 "봉작이 열후에 이르렀고, 지위는 삼공에 이르렀으니, 천하의 명사다."라고 평했다.
『춘추곡량전』을 공부하고, 『춘추좌씨전』과 천문도 좋아했다. 『춘추좌씨전』에서는 유흠의, 천문에서는 전종술의 스승에 해당한다.
4. 가계
5. 관련 인물
5. 1. 긍정적 관계
5. 2. 부정적 관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