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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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60년 11월 20일에 치러졌으며, 자유민주당의 압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선거는 미일 안보 조약 개정, 사회당 분열,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등 혼란스러운 사회적 배경 속에서 진행되었다. 선거 결과, 자유민주당은 '소득 배증 계획'을 내세워 경제 성장을 강조하며 296석을 얻어 의석을 늘린 반면, 일본사회당은 145석으로 대폭 감소하며 참패했다. 민주사회당은 17석, 일본공산당은 3석을 획득했으며, 투표율은 73.51%로 1947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선거 후 이케다 하야토 내각이 출범했고, 일본은 고도 경제 성장 시대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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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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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가 | 일본 |
선거 유형 | 의회 |
이전 선거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58년 |
다음 선거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63년 |
선거일 | 1960년 11월 20일 |
선출 의석 | 467석 |
과반 의석 | 234석 |
투표율 | 73.50% ( 3.48pp) |
선거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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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당 대표 | 이케다 하야토 |
제1당 | 자유민주당 |
제1당 이전 선거 결과 | 287석, 57.80% |
제1당 선거 전 의석 | 283석 |
제1당 획득 의석 | 296석 |
제1당 의석 증감 | 13 |
제1당 득표수 | 22,740,272 |
제1당 득표율 | 57.56% |
제1당 득표율 증감 | 0.24 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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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당 대표 | 에다 사부로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 사망 후 대행) |
제2당 | 일본사회당 |
제2당 이전 선거 결과 | 166석, 32.94% |
제2당 선거 전 의석 | 122석 |
제2당 획득 의석 | 145석 |
제2당 의석 증감 | 23 |
제2당 득표수 | 10,887,134 |
제2당 득표율 | 27.56% |
제2당 득표율 증감 | 5.38 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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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당 대표 | 니시오 스에히로 |
제3당 | 민주사회당 |
제3당 이전 선거 결과 | 신당 |
제3당 선거 전 의석 | 40석 |
제3당 획득 의석 | 17석 |
제3당 의석 증감 | 23 |
제3당 득표수 | 3,464,148 |
제3당 득표율 | 8.77% |
제3당 득표율 증감 | 8.77 p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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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당 대표 | 미야모토 겐지 |
제4당 | 일본공산당 |
제4당 이전 선거 결과 | 1석, 2.55% |
제4당 선거 전 의석 | 1석 |
제4당 획득 의석 | 3석 |
제4당 의석 증감 | 3 |
제4당 득표수 | 1,156,723 |
제4당 득표율 | 2.93% |
제4당 득표율 증감 | 0.38 pp |
총리 정보 | |
직책 | 내각총리대신 |
선거 전 총리 | 이케다 하야토 |
선거 전 총리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선거 후 총리 | 이케다 하야토 |
선거 후 총리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2. 배경
일본사회당 극우파였던 니시오 스에히로는 제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패배 원인으로 '계급정당론, 용공, 친중·소 노선'을 들며 비판했다. 게다가 미·일안전보장조약의 폐지를 주장하던 사회당에, 조약 개정에 반대한다면 그를 대신하는 안전보장체제를 명확히 할 것이나 안보개정저지국민회의의 주도권을 총평에서 사회당으로 옮긴 뒤 일본공산당을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니시오 스에히로 및 가와카미 조타로 등의 파벌 일부는 1959년에 연달아 탈당한 뒤, 다음 해에 민주사회당을 결성한다.[1]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진 직후였지만, 투표율은 오히려 하락했다. 안보 투쟁은 선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일·미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 투쟁이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투표율은 73.51%로 1947년 총선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안보 투쟁은 선거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사회당과 민사당의 분열로 자유민주당이 의석을 늘렸다.
1960년 선거는 미쓰이 미이케 탄광의 격렬한 노동쟁의(미이케 투쟁), 수정된 미일 안보 조약을 국회에서 강행 처리한 (안보 투쟁의 격화를 야기한) "5.19 사건" (기시 노부스케와 자민당 의원들이 의회에서 강행 처리), 그리고 일본 사회당(JSP) 당수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와키자시를 든 극우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에 의해 암살당하는 등 격동의 한 해 말에 치러졌다.[2] 선거 전에는 좌익의 거리 시위와 우익의 자경단 활동이 여러 차례 있었다.[2]
3. 선거 운동
자유민주당은 제1차 이케다 내각의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온건하고 실용적인 이미지로 인기를 얻었다. 자민당은 경제 성장을 강조하며 '소득배증계획'을 제시했고, 이는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2]
반면, 일본 사회당은 좀 더 온건하고 반공적인 민주사회당이 창당되면서 표가 분산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자민당은 사회당의 분열로 인해 어부지리를 얻었다. 아사누마 위원장 암살 사건으로 동정 여론을 얻었지만, 민사당으로 이탈한 당원의 몫을 만회하는 데 그쳤다.
일본공산당은 의석과 득표를 늘리며 침체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4. 선거 결과
자유민주당은 “소득배증계획”을 내걸고 안보에서 경제로 쟁점을 전환하며 고도경제성장 시대를 맞이했다. 이전 선거보다 후보를 14명 줄인 399명을 공천했고, 23만 표 정도(보수계 무소속 포함 100만 표)를 덜 얻었지만, 사회당과 민사당의 분열로 296석(추가 공천 포함 300석, 의석률 64.2%)을 확보하며 의석을 늘렸다.
사회당은 아스누마 위원장 암살로 동정 여론을 얻었으나, 민사당 분당으로 후보자 수를 줄여 186명을 공천, 18석을 만회하는 데 그쳤다. 구조개혁 논쟁으로 당내 파벌 항쟁이 시작되었다.
민사당은 사회당 대체 의지를 갖고 105명의 후보를 냈으나, 자유민주당과 사회당 사이에서 23석 감소라는 참패를 겪었다. 사회당과 민사당은 적극적인 공천으로 득표수는 늘렸지만(125만 표, 혁신계 무소속 포함 119만 표),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일본공산당은 2석 증가한 3석, 14만 표를 늘리며 침체에서 벗어났다. 이후 선거에서 득표수를 늘려갈 기반을 마련했다.
기타 정당에서는 사가 현 농업인 정치 연맹이 1석을 획득했다.
4. 1. 정당별 득표 및 의석 변화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의석 | 의석 변화 |
---|---|---|---|---|
자유민주당 | 22,740,272 | 57.56 | 296 | +9 |
일본사회당 | 10,887,134 | 27.56 | 145 | -21 |
민주사회당 | 3,464,148 | 8.77 | 17 | +17 |
일본공산당 | 1,156,723 | 2.93 | 3 | +2 |
기타 정당 | 141,941 | 0.36 | 1 | 0 |
무소속 | 1,118,905 | 2.83 | 5 | -7 |
4. 2. 현별 결과
현 | 총 의석 수 | 획득 의석 수 | |||||
---|---|---|---|---|---|---|---|
자유민주당 | 일본사회당 | 민주사회당 | 일본공산당 | 기타 | 무소속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style="background:;" | | |||
아이치 현 | 19 | 12 | 6 | 1 | |||
아키타 현 | 8 | 5 | 3 | ||||
아오모리 현 | 7 | 6 | 1 | ||||
지바 현 | 13 | 10 | 3 | ||||
에히메 현 | 9 | 7 | 2 | ||||
후쿠이 현 | 4 | 3 | 1 | ||||
후쿠오카 현 | 19 | 10 | 7 | 2 | |||
후쿠시마 현 | 12 | 7 | 4 | 1 | |||
기후 현 | 9 | 5 | 3 | 1 | |||
군마 현 | 10 | 6 | 4 | ||||
히로시마 현 | 12 | 8 | 3 | 1 | |||
홋카이도 | 22 | 12 | 10 | ||||
효고 현 | 18 | 10 | 6 | 1 | 1 | ||
이바라키 현 | 12 | 9 | 3 | ||||
이시카와 현 | 6 | 5 | 1 | ||||
이와테 현 | 8 | 6 | 2 | ||||
가가와 현 | 6 | 4 | 1 | 1 | |||
가고시마 현 | 11 | 9 | 2 | ||||
가나가와 현 | 13 | 8 | 3 | 2 | |||
고치 현 | 5 | 4 | 1 | ||||
구마모토 현 | 10 | 7 | 3 | ||||
교토 부 | 10 | 4 | 3 | 2 | 1 | ||
미에 현 | 9 | 5 | 2 | 1 | 1 | ||
미야기 현 | 9 | 6 | 3 | ||||
미야자키 현 | 6 | 4 | 2 | ||||
나가노 현 | 13 | 8 | 5 | ||||
나가사키 현 | 9 | 6 | 3 | ||||
나라 현 | 5 | 4 | 1 | ||||
니가타 현 | 15 | 8 | 7 | ||||
오이타 현 | 7 | 5 | 2 | ||||
오카야마 현 | 10 | 7 | 3 | ||||
오사카 부 | 19 | 7 | 7 | 3 | 2 | ||
사가 현 | 5 | 3 | 1 | 1 | |||
사이타마 현 | 13 | 8 | 4 | 1 | |||
시가 현 | 5 | 2 | 2 | 1 | |||
시마네 현 | 5 | 4 | 1 | ||||
시즈오카 현 | 14 | 10 | 4 | ||||
도치기 현 | 10 | 6 | 4 | ||||
도쿠시마 현 | 5 | 4 | 1 | ||||
도쿄 도 | 27 | 15 | 11 | 1 | |||
돗토리 현 | 4 | 3 | 1 | ||||
도야마 현 | 6 | 4 | 2 | ||||
와카야마 현 | 6 | 4 | 2 | ||||
야마가타 현 | 8 | 6 | 2 | ||||
야마구치 현 | 9 | 6 | 2 | 1 | |||
야마나시 현 | 5 | 4 | 1 | ||||
합계 | 467 | 296 | 145 | 17 | 3 | 1 | 5 |
기타 - 1석: 사가 현 농업인 정치 연맹
5. 선거 후
일·미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 투쟁 직후 치러진 선거였지만, 자유민주당은 소득배증계획을 내걸고 안보에서 경제로 쟁점을 전환하며 승리했다. 자유민주당은 의석을 늘려 추가 공천을 합쳐 300석을 확보했고, 의석률은 64.2%로 자유민주당 최고 기록이었다. 이 선거 결과로 일본은 고도경제성장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사회당은 아스누마 위원장 암살로 동정 여론을 얻었으나, 민사당 분당의 여파로 이전 의석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후 구조개혁 논쟁으로 당내 파벌 항쟁이 시작되었다.
민사당은 사회당을 대체하겠다는 각오로 많은 후보를 냈지만, 자유민주당과 사회당 사이에 끼여 의석이 크게 줄었다. 일본공산당은 소수였지만 의석과 득표를 늘리며 침체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선거 후 이케다 하야토가 이끄는 제2차 이케다 내각이 출범했다.
5. 1. 국회 구성
제37회 국회(특별회)는 1960년 12월 5일부터 12월 22일까지 열렸다.- 1960년 12월 7일 '''중의원 의장 선거''' (투표자 수: 450, 과반수: 226)
- 1960년 12월 7일 '''중의원 부의장 선거''' (투표자 수: 453, 과반수: 227)
후보 | 정당 | 득표수 |
---|---|---|
쿠보타 츠루마츠 | 사회당 | 375 |
야마구치 키쿠이치로 | 자민당 | 9 |
호소다 요시아스 | 사회당 | 4 |
야마구치 로쿠로지 | 자민당 | 2 |
요시다 시게루 | 자민당 | 1 |
하마지 붕페이 | 자민당 | 1 |
쿠보타 후지마로 | 무소속 | 1 |
쿠로다 토시오 | 사회당 | 1 |
무효 | 59 |
- 1960년 12월 7일 '''내각총리대신 지명 선거''' (중의원 의결, 투표자 수: 454, 과반수: 228)
제38회 국회(정회)는 1960년 12월 26일부터 1961년 6월 8일까지 열렸다.
- 1961년 6월 8일 '''중의원 부의장 선거''' (투표자 수: 368, 과반수: 185)
후보 | 정당 | 득표수 |
---|---|---|
하라 켄사부로 | 자민당 | 260 |
쿠보타 츠루마츠 | 사회당 | 105 |
다나카 이조미 | 자민당 | 1 |
무효 | 2 |
5. 2. 당선자 정보
5. 3. 보궐 선거
1960년 12월 21일, 교토 제1구에서 보궐 선거가 실시되었다. 미즈타니 쵸사부로(민주사회당) 의원이 1960년 12월 17일에 사망하면서 공석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선거에서는 자유민주당의 나카무라 미노스케 후보가 당선되었다.1961년부터 1963년까지는 여러 의원들의 사망 또는 사퇴로 인해 보궐 선거가 실시되지 않은 지역구가 많았다. 다음은 보궐선거가 실시되지 않은 선거구 목록이다.
6. 주요 정당 정보
정당 | 계 | 전 | 원 | 신 | 남성 | 여성 | 공시전 | |
---|---|---|---|---|---|---|---|---|
bgcolor="" | | 자유민주당 | 399 | 280 | 394 | 5 | 283 | ||
bgcolor="" | | 일본사회당 | 186 | 118 | 179 | 7 | 122 | ||
bgcolor="" | | 민주사회당 | 105 | 40 | 99 | 6 | 40 | ||
bgcolor="#DB001C" | | 일본공산당 | 118 | 1 | 118 | 0 | 1 | ||
기타정당 | 34 | 34 | 0 | 0 | ||||
bgcolor="#808080" | | 무소속 | 98 | 2 | 95 | 3 | 2 | ||
colspan="9" bgcolor="#E9E9E9" | | ||||||||
계 | 940 | 441 | 919 | 21 | 448 |
; 제파: 1석
- '''사가현 농업자 정치연맹''': 고가 료 (사가 전현구)
참조
[1]
서적
Elections in Asia: A data handbook, Volume II
(출판사 정보 없음)
2001
[2]
논문
Behind the 1960 Japanese Diet Election
https://www.jstor.or[...]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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