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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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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은 1960년 10월 12일 일본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극우 단체 대일본애국당 당원 야마구치 오토야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아사누마는 친중 발언과 미일 안보 조약 반대 운동으로 우익 세력의 반발을 샀으며, 야마구치는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3당 합동 연설회에서 아사누마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사건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고, 야마구치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후 감방에서 자살했다. 이 사건은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쳐 정부의 대응, 여론의 변화, 정치·경제계의 혼란을 야기했으며, 요인 경호 방식과 흉기 규제 강화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언론 보도와 사진을 통해 사건이 널리 알려졌고, 대중 매체에도 영향을 미쳐 소설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야마구치는 극우 단체에게 순교자로 추앙받았으며, 사건은 일본 외의 극우 단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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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기본 정보
야마구치가 아사누마를 두 번째로 찌르려고 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
야스시 나가오의 퓰리처상 수상 사진, 야마구치가 아사누마를 두 번째로 찌르려고 시도하는 모습
발생 위치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히비야 공회당
날짜1960년 10월 12일
시간오후 3시 5분
시간대UTC+09:00
유형암살
공격 방법칼로 찌름
사망자1명
가해자오토야 야마구치
사용 무기와키자시
동기아사누마의 중국 방문과 안보 투쟁 중의 언행에 대한 반감
일본에서 좌익 운동 확산을 막으려는 의도
사건 관련
관련 사건안보 투쟁 반대 시위와 전후 일본 극우 암살 사건
피해자
목표 대상일본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
수사
기타
사건명 (일본어)浅沼稲次郎暗殺事件
추가 정보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순간

2. 사건 배경

1959년 아사누마 이네지로중국 베이징에서 미국을 "중국과 일본의 공동의 적"이라고 발언하여 일본 내에서 논란을 일으켰다.[3][4] 또한,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안보 투쟁을 주도하면서 일본 우익 세력의 반발을 샀다.[3][4]

야마구치 오토야대일본애국당 당원이었으나 탈당하고, 1960년 7월 전아시아반공연맹 도쿄 지회에 가입했다. 그는 일본 사회당의 친중국, 친노조, 사회주의적 성향에 반감을 품고 당 인사들의 암살을 계획했다. 1960년 6월 17일, 우익 청년들이 사회당 고문 가와카미 조타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야마구치는 암살 결심을 더욱 굳혔다. 같은 해 7월 1일, 야마구치는 동지들과 함께 전아시아반공연맹 도쿄 지회 조직에 참여했다. 10월 4일에는 우연히 발견한 와키자시(脇差)를 보고 사회당 요인들을 살해하기로 결심했다.

2. 1. 아사누마 이네지로와 일본 사회당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으로 일본 사회당 내 여러 파벌을 통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9년, 아사누마는 중국 베이징에서 미국을 "중국과 일본의 공동의 적"이라고 선언하여 일본에서 논란을 일으켰다.[3][4] 일본으로 돌아온 후,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다.[3][4]

1960년 6월 15일에는 시위대가 국회 의사당을 습격하여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5][6] 아사누마의 이러한 활동은 극우 단체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대일본애국당아카오 빈은 아사누마의 언행에 분노하여, 여러 차례 공개 연설을 통해 젊은이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했다.[3][4]

암살 사건 이후, 총선거는 안보 투쟁의 열기에서 벗어나 이케다 내각의 소득배증계획등 경제 정책 중심으로 흘러갔다. 이케다 내각은 아사누마 암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추궁받았지만, 이케다 총리의 추도 연설로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1960년 11월 20일에 치러진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압승을 거두었고, 사회당은 의석 수를 늘렸지만 민사당 분당의 타격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이후 사회당은 구조개혁을 둘러싼 당내 갈등에 돌입했다.

2. 2. 미일 안보 조약과 안보 투쟁

1959년, 일본 좌파의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 아사누마 이네지로중국을 방문, 베이징 연설에서 미국을 "중국과 일본의 공동의 적"이라고 선언하며 일본에서 논란을 일으켰다.[3][4] 귀국 후 아사누마는 일본 사회당(日本社会党, Nihon Shakai-tō, JSP) 당수로서 1960년 미일 안보 조약(日米安全保障条約, Anpo)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안보 투쟁의 주요 지도자이자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3][4]

아사누마와 일본 사회당은 국회(日本国会議事堂, Japanese National Diet)에 대한 대규모 시위 행진을 여러 차례 주도했다.[3] 특히 주목할 만한 사건은 1960년 6월 15일, 반조약 시위대가 국회 의사당을 습격하여 의사당 남문을 통해 진입한 사건이다.[5] 이로 인해 반대 시위대와 난투극이 벌어져 심각한 부상자가 발생했다.[6]

2. 3. 일본 우익 세력의 반발

1959년, 일본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 아사누마 이네지로중국을 방문하여 베이징에서 연설하면서 미국을 "중국과 일본의 공동의 적"이라고 말하여 일본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일본으로 돌아온 아사누마는 일본 사회당(日本社会党, Nihon Shakai-tō, JSP) 당수로서 1960년 미일 안보 조약(日米安全保障条約, Anpo) 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안보 투쟁의 주요 지도자이자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3][4]

아사누마와 일본 사회당은 국회(日本国会議事堂, Japanese National Diet)에 대한 대규모 시위 행진을 여러 차례 주도했다.[3] 특히 1960년 6월 15일에는 반조약 시위대가 국회 의사당을 습격하여 의사당 남문을 통해 진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 이로 인해 반대 시위대와 난투극이 벌어져 심각한 부상자가 발생했다.[6]

아카오 빈(赤尾敏)과 그의 대일본애국당(大日本愛国党, Dai Nippon Aikoku Tō)과 같은 극우 단체와 개인들은 아사누마가 중국 방문에서 미국을 일본의 주요 적이라고 묘사한 것과 안보 조약에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에 대해 크게 분노했다. 대규모 좌파 시위는 아카오와 그의 당, 그리고 다른 많은 극우 단체들로 하여금 일본이 공산주의 혁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들 단체는 시위, 반(反)시위 및 기타 정치 활동을 시작하고 참여했다. 아카오는 여러 차례 공개 연설을 했는데, 특히 정치적 라이벌에 저항하는 데 있어 젊은이의 역할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이러한 연설 중 하나가 야마구치 오토야의 관심을 끌었고, 그는 이후 당에 가입하여 활동에 참여했으며 나중에 아사누마를 암살했다.[3][4]

3. 암살범 야마구치 오토야

야마구치 오토야는 1943년 도쿄도 다이토구에서 일본 제국 육군 고위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을 갖고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했다.[7] 16세에 아카오 빈이 이끄는 극우 정당인 대일본애국당에 가입하여 안보 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7][8][9] 아카오 빈의 지도력에 환멸을 느껴 탈당하고, 이후 독자적으로 암살을 계획하게 되었다.[10]

체포 후 야마구치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논리정연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건 3주 후인 11월 2일 밤, 도쿄 소년분별소 독방에서 "칠생보국 天皇陛下万歳" (칠생보국 천황폐하 만세)라는 글씨를 남기고 자살했다.[26][27] 12월 15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사 야마구치 니야 군 국민 위령제"가 거행되었으며, 약 3천 명이 참석했다.[28]

이 사건으로 경시청은 야마구치 외에도 요시마츠 노리토시(전 아시아 반공 청년 연맹 책임자), 후쿠다 스스무(우익 단체 방공정신대 대장), 아카오 빈 등을 체포했다.

3. 1. 유년 시절과 정치적 성향

야마구치 오토야는 1943년 2월 22일 도쿄도 다이토구 야나카에서 일본 제국 육군 고위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7] 어린 시절부터 신문을 읽고 정치인들을 맹렬히 비판했으며,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7] 형의 영향으로 우익 시위와 반시위에 참여하고 연설을 들었다.[7] 16세에 아카오 빈의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대일본애국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7][8]

야마구치는 안보 반대 시위에 참여했고, 1959년과 1960년에 걸쳐 10차례 체포와 석방을 반복했다.[9] 안보 투쟁 과정에서 아카오의 지도력에 환멸을 느껴 당에서 탈당했다.[10] 경찰 진술에서 그는 "무기를 손에 넣고" 더 "결정적인 행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아카오의 당에서 탈당했다고 진술했다.[10]

3. 2. 대일본애국당 가입과 탈퇴

야마구치 오토야는 1943년 2월 22일 다이토구 야나카에서 일본 제국 육군 고위 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7] 어린 시절부터 신문을 읽기 시작했고, 그 내용에 분노하여 정치인들을 맹렬히 비판했으며 나중에는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7] 형의 영향으로 우익 시위와 반시위에 참여하고 연설을 듣기 시작했다.[7] 16세에 아카오 빈의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대일본애국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7][8]

야마구치는 안보 반대 시위에 참여했고, 1959년과 1960년에 걸쳐 10차례 체포와 석방을 반복했다.[9]

안보 투쟁 과정에서 야마구치는 아카오의 지도력에 환멸을 느껴 나중에 당에서 탈당했다.[10] 경찰 진술에서 그는 "무기를 손에 넣고" 더 "결정적인 행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아카오의 당에서 탈당했다고 진술했다.[10]

3. 3. 암살 계획

1960년 7월, 야마구치 오토야는 전아시아반공연맹 도쿄 지회에 가입했다.[7] 1960년 10월 4일, 야마구치는 집에서 와키자시(일본도)를 발견하고 일본사회당 요인 암살을 결심했다. 그는 메이지 신궁을 참배하고 일본교직원조합 위원장과 노사카 의장에게 면회를 신청했지만 실패했다.

1960년 10월 12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3당 합동 연설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접한 야마구치는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34]

4. 암살 사건

일본의 극우단체 대일본애국당 당원이었던 야마구치 오토야는 전아시아반공연맹 도쿄 지회에 가입(1960년 7월)하는 등 극우적 활동을 이어갔다. 야마구치는 친중국 정책, 친노조,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일본사회당에 반감을 품고, 사회당 인사 암살을 계획했다.

1960년 6월 17일, 우익 청년들의 가와카미 조타로 사회당 고문 습격 사건은 야마구치에게 "매국노를 처단하는 의로운 행위"로 인식되어, 암살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0월 4일, 와키자시를 발견하고 사회당 요인 암살을 결심, 메이지 신궁 참배 후 일본교직원조합 위원장과 일본 공산당 의장에게 면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60년 10월 12일,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3당 합동 연설회에 칼을 숨겨 잠입한 야마구치는 아사누마 이네지로 일본사회당 당수의 연설 도중 단상에 난입, 아사누마를 칼로 찔렀다. 아사누마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했고, 야마구치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야마구치는 도쿄 소년감별소[34] 수감 중 치약으로 "칠생보국 천황폐하만세"라는 글을 남기고 자살했다. 우익단체들은 그의 죽음을 미화하며 성대한 장례식을 치렀다. 야마자키 이와오 자치 대신 겸 공안위원회 위원장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4. 1. 3당 합동 연설회

1960년 10월 12일, 히비야 공회당에서는 자민당, 사회당, 민사당 3당 당수 합동 연설회인 '총선거에 임하는 우리 당의 태도'가 열렸다.[23] 이 연설회는 도쿄도 선거관리위원회, 공명선거연맹, 일본방송협회(NHK)가 공동 주최했다.[23] 총선거를 앞두고 열린 이 연설회에는 2,500명의 청중이 모였다.

민사당 위원장 니시오 스에히로,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 자유민주당 총재 이케다 하야토 순으로 연설이 예정되어 있었다.[23] 아사누마는 오후 3시경 연단에 올라 '의회주의 수호'를 호소하는 연설을 시작했다.[23] 그러나 곧 우익 단체의 야유가 격렬해졌고, "·소 앞잡이", "용공 사회당 타도" 등이 적힌 삐라가 뿌려지기도 했다.[23]

사회를 맡은 NHK 아나운서 고바야시 도시미쓰는 회장이 소란스러워 연설이 들리지 않는다며 자제를 요청했고, 회장은 박수와 함께 잠시 조용해졌다.[23] 그 틈을 타 아사누마는 자민당의 선거 공약에 대한 비판 연설을 이어갔다.[23]

4. 2. 아사누마 이네지로 피습

오후 3시경,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연단에 서서 연설을 시작하자, 우익 단체들은 야유를 퍼붓고 "·소의 앞잡이, 용공 사회당을 타도하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렸다.[23] 사회자였던 NHK 아나운서 고바야시 토시미쓰는 회장이 소란스러워 연설이 들리지 않는다며 자제를 요청했고, 청중들은 박수로 호응하며 잠시 소란이 잦아들었다.

아사누마는 자민당의 선거 공약을 비판하는 연설을 이어갔다.[23] 그러나 오후 3시 5분경, 아사누마가 "선거 시에는, 국민에게 평판이 나쁜 정책은 모두 감추고, 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야마구치 오토야가 연단으로 뛰어 올라왔다. 야마구치는 약 33cm 길이의 와키사시 형태의 칼[1]로 아사누마의 왼쪽 옆구리를 깊숙이, 왼쪽 가슴을 얕게 찔렀다.[23]

아사누마는 몇 걸음 걷다가 쓰러졌고,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대동맥이 절단되어 내출혈로 인한 과다출혈로 거의 즉사 상태였다. 병원에 도착한 오후 3시 40분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23] 야마구치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23]

이 사건은 NHK 라디오 제1방송을 통해 일본 전국에 생중계되었으며, NHK 종합일본 시리즈 중계를 중단하고 긴급 뉴스를 보도했다.[31][32] 범행 장면은 여러 번 방송되었으며, 이에 대한 찬반 논란이 있었다. NHK는 보도 영상으로서의 의미를 중시하여 방송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각 방송사는 정규 프로그램을 긴급 뉴스 특보로 변경하여 민주주의와 의회 제도를 부정하는 폭력을 비난하고, 폭력 배제를 호소했다.

4. 3. 야마구치 오토야 체포와 유서

야마구치 오토야는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찌른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범행 직후 품속에 있던 유서를 발표하려 했다.[34] 야마구치가 소지했던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야마구치 오토야 유서 원문 및 번역
일본어 원문한국어 번역
汝、浅沼稲次郎は日本赤化をはかっている。自分は、汝個人に恨みはないが、社会党の指導的立場にいる者としての責任と、訪中に際しての暴言と、国会乱入の直接のせん動者としての責任からして、汝を許しておくことはできない。ここに於て我、汝に対し天誅を下す。너,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 적화(공산화)를 꾀하고 있다. 나는 너 개인에게 원한은 없지만, 사회당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자로서의 책임과, 방중 시의 폭언과 국회 난입의 직접적 선동자로서의 책임 때문에,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이에 나는 너에게 천벌을 내린다.



이는 야마구치가 아사누마의 친중국, 친노조, 사회주의적 성향에 대한 반감과, 아사누마의 과거 발언 및 행동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범행을 저질렀음을 보여준다.[11]

5. 사건의 경과

해산 및 총선거를 앞둔 1960년 10월 12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자민당, 사회당, 민사당 3당 당수 합동 연설회가 열렸다. 2500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일본 사회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오후 3시경 연단에 서서 "의회주의 수호"를 호소하는 연설을 시작했다.[23]

그러나 곧 우익 단체의 야유가 격렬해졌고, "·소의 앞잡이, 용공 사회당을 타도하라"는 내용의 삐라가 뿌려지기도 했다. 사회자 고바야시 토시미쓰(NHK 아나운서)는 청중에게 자제를 요청했고, 아사누마는 자민당의 선거 공약에 대한 비판 연설을 이어갔다.[23]

오후 3시 5분경, 아사누마가 "선거 시에는, 국민에게 평판이 나쁜 정책은 모두 감추고, 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야마구치 오토야가 연단으로 뛰어 올라 와키사시 형태의 흉기로 아사누마의 왼쪽 옆구리와 가슴을 찔렀다.[23] 아사누마는 몇 걸음 걷다가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대동맥이 절단된 상태였다. 내출혈에 의한 출혈 과다로 거의 즉사 상태였으며, 오후 3시 40분경 사망했다. 야마구치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23]

사건 직후 대일본애국당 총재 아카오 빈 등이 연단에 올라 항의했고, 주최 측은 휴식을 선언하며 막을 내렸다. 회장에서는 아사누마의 부상이 경미하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총리 비서관에게 아사누마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연설회는 중단되었다.

6. 정부와 여당의 대응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직후, 이케다 내각은 긴급 대책 회의를 열어 사태 수습에 나섰다. 소득 배가 계획으로 인기를 얻고 있던 이케다 내각은 사건 당일 밤 약 2만 명의 시위대가 도쿄 거리에 쏟아져 나와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자, 기시 노부스케 내각을 무너뜨렸던 안보 투쟁의 재림을 우려했다.

오히라 마사요시 관방장관은 이케다 총리에게 직접 담화 발표와 책임자 경질을 즉시 실시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케다는 경솔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날 저녁 관방장관이 "폭력을 근절한다"는 정부 성명을 발표하고, 호리 시게루 자민당 총무회장이 여당 대표로 기자회견을 하는 것으로 그쳤다.

다음날, 오히라의 강한 설득으로 임시 각의를 열고 야마자키 이와오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을 경질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공안위원회가 경찰 당국에는 책임이 없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에, 경찰청장과 경시총감은 경질되지 않았다.

사건 이후 치러진 선거에서 이케다가 이끄는 자민당은 의석 수를 늘리며 승리했지만, 아사누마가 속했던 일본 사회당도 선전했다.[14]

6. 1. 이케다 하야토 총리의 추도 연설

1960년 10월 18일, 이케다 하야토 총리는 국회 본회의에서 아사누마 이네지로 추도 연설을 했다.[12] 사회당 국회의원들은 이 연설에 강하게 반대했다. 이케다는 대중 연설에 서툴다는 평판이 있었고, 형식적인 짧은 연설을 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아사누마의 조국과 일본 국민에 대한 애정과 그의 성실한 근면성을 칭찬하는 장황한 연설을 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12] 이 연설은 많은 국회의원들을 눈물짓게 했다고 전해진다.[13]

7. 정치·경제계에 미친 영향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은 일본 정치·경제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건 직전, 이케다 내각은 소득배증계획 등 경제 정책을 앞세워 여론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자유민주당은 총선거에서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아사누마 암살 사건으로 인해 이케다 내각은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사회당은 이케다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했고, 여론의 악화를 우려한 이케다는 1960년 10월 18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아사누마 추도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명연설로 평가받으며 여론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는 데 기여했다.[24] 이는 일본 정치에서 여론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사건으로 평가받는다.[25]

한편,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회장 이시자카 다이조는 암살범 야마구치 오토야에게 동정적인 발언을 하여 비판을 받았다. 경단련은 자민당의 주요 지원 조직이었지만, 사회당에도 소액의 정치 헌금을 하고 있었다. 이시자카의 발언으로 인해 경단련은 민사당뿐만 아니라 사회당에도 계속 헌금을 하게 되었다.

7. 1. 총선 결과

1960년 11월 20일에 치러진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추가 공인을 포함하여 300석을 획득하며 압승을 거두었다.[24] 사회당은 18석이 증가한 145석을 얻었지만, 민사당 이탈의 타격을 극복하지는 못했다.[24] 민사당은 23석이 감소한 17석으로 참패했다.[24]

7. 2. 사회당의 분열

일본 사회당은 1955년 자유민주당 창당에 맞서 극좌, 중도, 우파 사회주의자들이 결합한 불안정한 연합이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카리스마를 통해 당내 여러 파벌을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16] 그의 지도 아래 사회당은 1950년대 후반 모든 선거에서 의석을 늘려나갔다. 그러나 아사누마 사망 이후, 에다 사부로가 당을 이끌면서 좌파 사회주의자들의 반발을 샀다.[16] 이는 당내 분열 심화와 대중적 메시지 전달 능력 저하로 이어졌다. 결국, 사회당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의석 감소를 겪으며 1996년 해체되었다.[17]

1960년 11월 20일 제2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300석을 확보하며 압승했다. 사회당은 145석으로 의석이 증가했지만, 민사당 분당의 타격을 극복하지 못했다. 민사당은 17석으로 참패했다. 이후 사회당은 아사누마 추도 분위기가 사라지자 구조개혁을 둘러싼 당내 갈등에 돌입했다.

8. 야마구치 오토야의 수감과 자살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범 야마구치 오토야는 범행 직후 체포되어 도쿄 소년감별소에 수감되었다. 야마구치는 조사 과정에서 자신의 범행 동기를 상세히 진술했으며,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1960년 11월 2일, 야마구치는 감방 벽에 치약으로 "칠생보국 천황폐하만세"(七生報国 天皇陛下万歳|칠생보국 천황폐하만세일본어)라는 글귀를 남기고 침대 시트를 이용해 목을 매 자살했다.[34][15][26][27]

야마구치의 죽음 이후, 일본 우익 단체들은 그를 '열사'로 추앙하며 12월 15일 사건이 발생했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사 야마구치 니야 군 국민 위령제"를 개최했다. 이 위령제에는 약 3천 명이 참석했다.[28]

8. 1. 수감 생활과 조사

암살 사건 이후, 야마구치 오토야(山口二矢)는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수감되었다. 수감 기간 내내 그는 침착하고 태연하게 경찰에게 자세한 진술을 했다. 야마구치는 끊임없이 자신이 단독으로 행동했으며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5]

체포 후 야마구치는 조사에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논리정연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건 3주 후인 11월 2일 밤, 도쿄 소년분별소의 독방에서 흰색 치약을 푼 용액으로 “七生報国 天皇陛下万歳”(칠생보국 천황폐하 만세)라는 글씨를 감방 벽에 남긴 후 시트로 목을 매 자살했다.[26][27] (일부에서 “혈서”라고 하지만 오류임.)

야마구치 오토야가 자살하기 전 감방 벽에 치약으로 쓴 메모


11월 2일, 야마구치는 치약을 이용하여 감방 벽에 "천황폐하 만세"(天皇陛下万歳, tennōheika banzai|텐노헤이카 반자이일본어)와 "조국을 위해 목숨 일곱 개라도 바치고 싶다"(七生報国, shichisei hōkoku|시치세이 호코쿠일본어)라고 적었다. 후자는 14세기 사무라이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유언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묶은 침대 시트로 자살했다.[15]

이 사건으로 경시청은 야마구치 외에도 “전 아시아 반공 청년 연맹” 책임자 요시마츠 노리토시(당시 32세)를 공갈 혐의로, 우익 단체 “방공정신대”의 후쿠다 스스무 대장(당시 32세)을 공정증서원본부실기재 및 강요 혐의로, 또한 아카오 빈을 위력업무방해 혐의로 각각 체포했다.

8. 2. 자살과 유서

야마구치는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도쿄 소년감별소[34]에 입소, 개실 2호실에 수감되어 2명의 동료와 함께 생활하였다. 11월 2일 야마구치는 도쿄 소년감별소의 개실 2층 2호실에서 지급된 치약으로 벽에 ‘七生報国 天皇陛下万歳|칠생보국 천황폐하만세일본어’라고 쓴 뒤 목을 메 자살했다.[15] 우익단체는 야마구치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르며 그를 영웅으로 미화하였다.

체포 후 야마구치는 조사에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논리정연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건 3주 후인 11월 2일 밤, 야마구치는 도쿄 소년분별소의 독방에서 흰색 치약을 푼 용액으로 “七生報国 天皇陛下万歳”(칠생보국 천황폐하 만세)라는 글씨를 감방 벽에 남긴 후 시트로 목을 매 자살했다.[26][27]

야마구치의 위령제는 “열사 야마구치 니야 군 국민 위령제”라는 이름으로 12월 15일 오후 1시, 사건이 발생했던 히비야 공회당에서 거행되었다. 명사를 포함하여 도쿄에 있는 우익 거의 전원이 모였고, 약 3천 명이 참석했다.[28]

8. 3. 우익 단체의 추모



암살 사건 이후, 야마구치 오토야는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수감되었다. 수감 기간 내내 그는 침착하고 태연하게 경찰에게 자세한 진술을 했다. 야마구치는 끊임없이 자신이 단독으로 행동했으며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1월 2일, 그는 치약을 이용하여 감방 벽에 "천황폐하 만세"(天皇陛下万歳|텐노헤이카 반자이일본어)와 "조국을 위해 목숨 일곱 개라도 바치고 싶다"(七生報国|시치세이 호코쿠일본어)라고 적었다. 후자는 14세기 사무라이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유언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묶은 침대 시트로 자살했다.[15]

체포 후 야마구치는 조사에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논리정연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건 3주 후인 11월 2일 밤, 도쿄 소년분별소의 독방에서 흰색 치약을 푼 용액으로 “七生報国|칠생보국일본어 천황폐하 만세”라는 글씨를 감방 벽에 남긴 후 시트로 목을 매 자살했다.[26][27] (일부에서 “혈서”라고 하지만 오류임.)

야마구치의 위령제는 “열사 야마구치 니야 군 국민 위령제”라는 이름으로 12월 15일 오후 1시, 사건이 발생했던 히비야 공회당에서 거행되었다. 명사를 포함하여 도쿄에 있는 우익 거의 전원이 모였고, 약 3천 명이 참석했다.[28]

9. 사건 이후

이 사건은 NHK 라디오 제1방송을 통해 생중계되었고, NHK 종합 텔레비전에서도 녹화 중계될 예정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 NHK는 1960년 일본 시리즈 중계를 중단하고 긴급 뉴스를 통해 아사누마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31] 범행 장면은 여러 차례 방송되었는데, 이에 대해 찬반 양론이 엇갈렸다. NHK는 보도 영상으로서의 가치를 중시하여 방송을 결정했다고 밝혔다.[32]

이 사건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폭력 장면을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또한, 당시 미성년자였던 범인 야마구치 오토야를 고려하여, 언론에서는 그의 이름을 숨기거나 얼굴을 가리는 등의 편집을 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요인 경호 방식과 흉기 규제 강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9. 1. 요인 경호 방식 변화

요인 경호 실패가 문제되어[1], 이후 경호 방식은 "눈에 띄지 않게"에서 "보이는 경호"로 바뀌었다.

9. 2. 흉기 규제 강화

당시 일본에서는 해마다 늘어나는 흉기에 의한 청소년 범죄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날은 마침 총리부의 부속 기관인 중앙청소년문제협의회가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 개최한 간토·고신에쓰 블록 회의에서 "흉기를 소지하지 않도록 하는 운동"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전개하기로 결의했던 날이었다. 이 사건으로 흉기류와 청소년 범죄의 관련성이 사회의 관심을 더욱 끌게 되었다.[29] 그 후 "흉기를 소지하지 않는 운동"은 같은 해 말부터 1년 동안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30]

9. 3. 언론 보도와 영향

NHK는 범행 장면을 담은 영상을 여러 차례 방송하여 찬반 양론이 엇갈렸다. 당시 NHK의 사노 히로키치 보도국장은 보도 영상으로서의 의미를 중시하여 방송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날 NHK와 민영 방송 각국은 정규 프로그램을 변경하여 긴급 뉴스 특보를 편성했다. 특별 프로그램에서는 모두 민주주의와 의회 제도를 부정하는 폭력을 비난하고, 폭력의 배제를 강력하게 호소했다.[31][32]

이 사건은 방송 자체에도 영향을 미쳐, 사건 이전부터 논의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의 폭력 장면 추방 운동을 가속화시켰다.

마이니치 신문의 사진기자 나가오 야스시(長尾靖)는 야마구치가 아사누마를 찌르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을 UPI 통신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했고, 일본인 최초로 퓰리처상(1961년 사진 부문)과 세계보도사진대상을 수상했다.[33]

10. 대중 매체에 미친 영향

이 사건은 오에 겐자부로야마구치 오토야를 모델로 한 소설 《세븐틴》과 《정치 소년 죽다》를 발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시마나카 사건 등 이 사건을 모방한 범죄가 발생하기도 했다.

10. 1.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오에 겐자부로는 1961년에 《정치와 성》(政治と性일본어)의 주제를 집대성한 작품인 《세븐틴》(セヴンティーン일본어)을 《문학계(文學界)》 1월호에, 《정치소년 죽다(政治少年死す일본어)-세븐틴 제 2부》를 익월호에 발표하였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에서 촉발되어 범인인 야마구치 오토야를 모델로 '성을 탐닉하고, 정치에 도취한 우익소년' (문고본 뒷면 소개글에서)을 그렸으나, 풍류몽담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을 둘러싸고 문예춘추 등이 우익단체로부터 협박을 받았다.[34] 이 때문에 오에 겐자부로는 계속 싣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나 잡지사에서는 이를 게재 거부했고, 《정치소년 죽다》는 그 이후 어떠한 단행본으로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단, 《오에 겐자부로 전작품 1》에 수록된 오에 겐자부로의 자필연보에 따르면, 본 작품이 “현재까지 단편집에 실리지 않은 것은 작가 스스로의 의지 때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아사누마 암살 사건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몇 주 동안 반복적으로 방영되어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본인이 목격했다. 암살 사건 발생 후 몇 주 만에 노벨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야마구치의 행동에서 영감을 받은 두 편의 소설, 《세븐틴》(Seventeen)과 《정치 청년의 죽음》(The Death of a Political Youth)을 썼지만, 소설에서는 야마구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15]

10. 2. 모방 범죄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몇 주 동안 반복적으로 방영되어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본인이 목격했다. 암살 사건 발생 후 몇 주 만에 노벨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야마구치의 행동에서 영감을 받은 두 편의 소설 《세븐틴》(Seventeen)과 《정치 청년의 죽음》(The Death of a Political Youth)을 썼지만, 소설에서는 야마구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야마구치의 행동과 그로 인한 엄청난 대중적 관심은 모방 범죄의 급증을 불러왔다.[15] 이후 몇 년 동안 여러 정치인들이 암살 음모와 시도의 표적이 되었다.[15] 야마구치의 공격에서 영감을 받은 주목할 만한 범죄 중 하나는 1961년 2월 1일에 발생한 시마나카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대일본애국당의 17세 당원 고모리 가즈타카는 천황과 그의 가족의 참수 장면을 묘사한 섬뜩한 꿈의 연출을 발표한 중앙공론 잡지 사장을 암살하려 했다. 이 사건은 이후 국화 금기로 알려지게 된 것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8][19]

11. 나가오 야스시의 사진

마이니치 신문의 사진기자 나가오 야스시는 야마구치 오토야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찌르려는 순간을 포착했다. 야마구치가 아사누마에게 달려들자 나가오는 본능적으로 렌즈 초점 거리를 4.5m에서 3m로 조절하여 암살 장면을 선명하게 담았다. 이 사진은 UPI통신을 통해 전 세계에 배포되었고, 나가오는 이 사진으로 일본인 최초로 1961년 퓰리처상 사진 부문과 세계보도사진대상을 수상했다.[33]

야마구치가 아사누마를 찌른 직후의 사진. 나가오 야스시(왼쪽)와 퓰리처상 수상 사진 (1961)


이 사진 덕분에 나가오는 당시 해외 여행이 제한되었던 시기에 일본을 떠나 세계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는 1962년 마이니치 신문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12. 야마구치 오토야의 순교자화

야마구치 오토야는 여러 일본 극우 단체들에게 영웅이자 순교자로 추앙받았다.[15] 1960년 12월 15일, 많은 일본 극우 단체들이 암살이 일어났던 히비야 공회당에 모여 "우리의 순교자 야마구치 오토야를 위한 국가 추도식"을 거행했다.[15] 대일본애국당은 매년 11월 2일, 야마구치의 자살 기념일에 그의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다.[2] 특히 2010년 11월 2일, 자살 50주년에는 대규모 행사가 열렸다.[15]

13. 일본 외의 영향

2018년 10월 12일, 미국의 극우 단체 프라우드 보이스(Proud Boys) 회원들은 개빈 맥킨네스(Gavin McInnes)를 포함하여 메트로폴리탄 공화당 클럽에서 1960년 암살 사건 재연 행사에 참여했다.[20]

참조

[1] 서적 『テロルの決算』文藝春秋 Bunshun Bunko 1982
[2] 웹사이트 山口二矢烈士墓参 http://aikokutou.net[...] Greater Japan Patriotic Party 2015-11-02
[3]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4] 서적 戦後文学の作家たち 1995
[5] 웹사이트 Tokyo 1960: Days of Rage & Grief https://visualizingc[...]
[6]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7]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8] 서적 戦後文学の作家たち 1995
[9]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0]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1] 웹사이트 山口二矢烈士御命日墓参 http://aikokutou.net[...] 2020-11-02
[12]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3]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4]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5]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6]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7]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8]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9] 웹사이트 Self-censorship is biggest threat to free speech in Japan https://www.japantim[...] 2015-01-22
[20] 웹사이트 Gavin McInnes 'Personally I think the guy was looking to get beat up for optics' https://spectator.us[...] 2018-10-13
[21] 웹사이트 「真面目の標本」17歳による社会党委員長へのテロル 1960(昭和35)年・浅沼稲次郎氏暗殺事件〈サンデー毎日〉 https://weekly-econo[...]
[22] 서적 国政選挙と政党政治: 総合分析1945年-1976年 1977
[23] 뉴스 浅沼委員長刺殺さる 三党首立ち会い演説会で 犯人(大東文化大学学生)を逮捕 1960-10-12
[24] 웹사이트 社会ニュース/よくわかる政治 自民党の歴史 長期政権化とそのひずみ https://allabout.co.[...] 2005-10-14
[25] 서적 日本労働年鑑 1962版 https://oisr-org.ws.[...] 労働旬報社 1961
[26] 뉴스 山口二矢が自殺 浅沼刺殺犯人 練馬の少年鑑別所で 1960-11-03
[27] 뉴스 家裁送りの夜の自殺 山口 監視36分のスキに シーツを裂き、より合わせる 1960-11-03
[28] 뉴스 山口二矢の慰霊祭 1960-12-15
[29] 서적 刃物を持たない運動 東京法令出版 1961-01
[30] 뉴스 刃物の犯罪は減る 成果あがった防犯運動 1960-12-06
[31] 비디오 プロ野球日本選手権試合実況~川崎球場から~ 第2試合 大洋ホエールズ 対 大毎オリオンズ NHK
[32] 비디오 三党首立会演説会 「総選挙に臨むわが党の態度」 ~日比谷公会堂で収録~ NHK
[33] 웹사이트 1961 Yasushi Nagao WY https://www.worldpre[...] 世界報道写真財団
[3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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