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야마현은 일본 혼슈 남부에 위치한 현으로, 효고현, 돗토리현, 히로시마현과 접하며 세토 내해를 사이에 두고 시코쿠의 가가와현과 마주한다. 현 북부에는 산악 지대가, 남부에는 오카야마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구라시키시와 오카야마시를 중심으로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1871년 설치되어 1876년 현 경계가 확정되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 산요 지방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주요 산업으로는 농업, 임업, 수산업,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발달한 중화학 공업이 있으며, 최근에는 IT 및 바이오 관련 산업도 육성하고 있다. 오카야마현은 모모타로 전설, 비젠야키 도자기, 빗추 검 등으로 유명하며, 다양한 향토 음식과 전통 공예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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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야마현 - 산요 신문 1879년 창간된 산요 신문은 오카야마현을 중심으로 배포되는 지방 신문으로, 방송사와 라디오 방송국을 산하에 둔 산요 신문 그룹의 핵심이다.
오카야마현에는 역사적인 도시인 구라시키시가 있으며, 인구 대부분은 구라시키시와 오카야마시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 북부 산간 지역의 작은 마을들은 고령화와 인구 감소를 겪고 있으며, 현 지자체의 절반 이상이 공식적으로 인구 감소 지역으로 지정되었다.[7]
중국산맥(中国山地)과 세토나이카이에 둘러싸인 남부 평야 지대는 전형적인 세토나이카이식 기후를 보이며 온난하고 강수량이 적다. 눈은 매우 드물게 내린다. 반면, 북부의 중국산맥 연안은 일본해 측 기후에 속하며 폭설 지대로 지정되어 있다. 마니와시 닌잔에서는 겨울철에 1m가 넘는 적설이 되는 경우도 있으며, 영하 10℃ 이하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25][26] 현 북부 산간 지역에는 4곳의 스키장이 있다. 중국산맥과 세토나이카이 중간에 위치한 기비 고원이나 와케정은 양쪽 기후의 중간적인 특징을 보이며, 남부보다 다소 서늘하고 강수량도 많다.[27] 겨울 추위는 심하다.[28]
일본 열도에 상륙하는 태풍이나 그 영향에 따른 강풍과 폭우는 중국산맥과 시코쿠 산맥에 의해 약해지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여름에는 세토나이카이에서 발생하는 "잔잔한 바다"나 산지를 넘는 푄 현상의 영향으로 도시 지역이나 내륙 분지 중심으로 폭염이 되는 날이 많다. 현청 소재지인 오카야마시는 기비고원에 속하는 구 켄부정·미쓰정 지역을 제외하고 일조 시간이 연간 약 2,100시간으로 길고, 연간 강수량은 약 1,100mm로 일본에서 손꼽히게 강수량이 적은 지역이다. 강수량 1mm 이상인 날짜가 일본에서 가장 적다는 점이 오카야마현의 캐치프레이즈인 "맑은 나라 오카야마"의 근거가 되고 있다.[24]
오카야마현 각 지역의 평년치는 다음과 같다. (통계 기간: 1981년(쇼와 56년)(니치오우지: 2003년(헤이세이 15년)) - 2010년(헤이세이 22년), 출처: [https://www.jma.go.jp/jma/menu/menureport.html 기상청·기상 통계 정보])
현 북부에는 중국산맥(中国山地)의 산악 지대가 솟아 있으며, 아사히카와, 고량강, 요시이강의 현내 발원지가 있다. 해발 500~1,000m의 중앙부에는 종유동 등의 카르스트 지형이 보이는 기비 고원(吉備高原)의 고지가 연속적으로 펼쳐져 있다. 남부에는 3대 하천에 의해 형성된 넓은 오카야마 평야(岡山平野)가 펼쳐져 있다. 오카야마 평야에는 예전에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에 떠 있던 작은 섬들이 구릉지로 남아 있으며, 간척으로 에도 시대(江戸時代)에 연결된 고지마 반도(児島半島)가 현의 남단에 있다. 현 남서부에는 국영 가사오카만 간척 사업으로 1650ha에 달하는 전국 굴지의 대간척 지역이 조성되었다.
주요 산지는 히루젠산(蒜山)(표고(標高) 1,122m)과 우시로야마(後山) (표고 1,345m) 등이 있다. 주요 호소로는 오쿠즈코, 온바라코, 유하라코, 고지마만(児島湾) 안쪽의 폐쇄 제방화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고지마호(児島湖) 등이 있다.
효고현과는 산지 및 비젠시(備前市)의 토리야게지마(取揚島)에서, 돗토리현과는 산지에서, 히로시마현과는 산지 및 시가지에서, 가가와현과는 해상 및 다마노시(玉野市)의 이지마(井島)(이시지마)에서 인접하고 있다.
가가와현: 세토 내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세토대교로 연결되어 있으며, JR 세토대교선 쾌속 마린라이너가 오카야마~다카마쓰 구간을 약 60분 만에 자주 운행하여 상호 통근·통학권을 형성하고 있으며, 지상파 방송이 상호 연계되는 등 유대가 크다.
히로시마현: 특히 이가사 지방(이바라시·가사오카시)은 히로시마현 동부의 비고 지역과의 유대가 강하며 후쿠야마 도시권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가사 지방은 후쿠야마시의 베드타운이 되고 있다. 또한 이바라시, 가사오카시는 히로시마현과 시가지가 연속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돗토리현: 인접해 있지만 그 사이에는 주고쿠 산지가 있어 교통과 물류의 장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요나고 자동차도 개통 및 하쿠비선 특급 야쿠모 운행 등 교통은 확보되어 있다. 관광, 출장 등으로 왕래도 있다.
효고현: 인접한 현 경계에는 산요 본선·아카호 선·히메신 선의 편수가 매우 적은 것에서 보듯이 지역 간 교류는 적다. 다만, 비젠시 히나세정·미이시 지구는 아코시와, 미마사카시 오하라 지구·히가시아와쿠라 지구와 니시아와쿠라촌은 사요정과 유대가 강하다. 비젠 현민국 관내와 미사쿠 현민국 관내가 효고현 니시하리마 현민국 관내와 관광으로 연계하고 있다.[33] 또한 히메지·오카야마·돗토리 3개 도시는 에도 시대 이케다가의 국교체 등 역사적으로 깊은 인연으로 맺어져 있으며, 3개 도시가 하나 되어 시민 교류를 촉진하고 각 도시가 가진 다양한 자원을 연계한 정보 발신을 통해 지역 발전을 목표로 하고 있다.[34]
3. 역사
오카야마 성하, 오카야마 지명의 유래 비석
현 이름은 현청 소재지인 오카야마시(岡山市)에서 유래했다. "오카야마(岡山)"는 원래 현재 오카야마성(岡山城)이 있는 곳에 있던 작은 언덕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전국 시대에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오카야마"에 성을 쌓고, 그 후 형성된 성하마을(城下町)을 포함하여 오카야마라고 부르게 된 데서 유래한다. 히데이에의 서장으로 보아 "오카야마"가 성하마을의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1594년경부터로 추측된다.
오카야마현은 초기 메이지 시대(1868~1912)의 대규모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1871년에 설치되었고, 현의 경계는 1876년에 확정되었다.[4][6]
오카야마현의 광역 행정 구역은 구(舊) 지방 진흥국(地方振興局) 단위로 나뉘며, 다음과 같다.
현재 오카야마현 지역에는 와시와산 유적(구라시키시) 등 원시부터 유적이 존재하고 있으며,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 최북단 조사이하라무라(현 가가미노초)에는 구석기 시대의 온하라 유적이 있다. 그 유적의 하층(약 2만 5000년 전의 토층)에서 나이프형 석기가 출토되었고, 그 상층에서 약 1만 년 전의 세석엽도 출토되었다. 온하라 유적에서는 2기의 화덕 자취가 검출되었는데, 그 중 1기는 10개 정도의 작은 돌을 반원형으로 나열하고 있으며, 불을 지피는 입구의 너비 40센티미터, 깊이 35센티미터의 소규모 화덕으로, 돌 쌓임 안에 목탄 덩어리가 있고, 화덕 주변에 재토가 넓게 퍼져 있어 2만 2000년 전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흔적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구이다.[36]
; 縄文時代
지구의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세토나이카이가 출현했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세토나이시 우시마도초의 기시마 조개무지이다. 그 후 사람들은 수렵·채집·어로의 자연으로부터의 선물로 생활하며 풍요로워졌다. 조몬 시대 후기에 접어들면서 쓰쿠모 조개무지에서 170구 이상의 인골이 발굴되었다. 후기에는 오카야마시 기타구의 쓰시마에도 유적에서는 논 유구 자체가 검출되었다. 조몬 시대 말기에는 수렵·채집 활동을 하면서 벼농사도 행해졌다.
; 弥生時代
히코사키 조개무지(오카야마시 남구)에서는 조몬 시대 전기의 토층에서 벼의 식물 규산체가 다량 출토되었고, 아사네하나 유적(오카야마시 북구)에서도 같은 발견이 있어, 조몬 시대 전기에는 밭농사에 의한 벼 재배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고분 시대
고대에는 기비쿠니라고 불리며, 관내 지역이나 북큐슈 지역, 이즈모 지역 등과 함께 일본 열도의 중심지 중 하나로 번영했다. 기비쿠니는 관내 세력과 동맹 관계를 맺고 일본 열도의 통일기(4세기 중엽)에 영향을 미쳤다. 뛰어난 철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배 지역은 현재의 오카야마현·히로시마현 중동부·가가와현 도서부·효고현 하리마 지방에 이르고, 가코가와를 경계로 하며, 더 나아가 시코쿠나 게이요 제도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크기가 전국의 고분 중에서 제4위, 일반인도 출입할 수 있는 고분으로서는 전국 제1위의 규모를 가진 조산 고분(오카야마시 기타구)이나 전국 제9위의 사쿠야마 고분(소사시), 료구야마 고분(아카이와시) 등 대형 고분이 오카야마현에 남아 있다.
6세기 전반에 야마토 조정에 복속한 후, 기비국은 세력 억압을 위해 비젠국, 비추국, 비고국의 3개 국으로 분할되었고, 더 나아가 비젠국에서 미마사카국이 분국되었다.
3. 2. 중세
가마쿠라 시대에 관동을 근거지로 하던 나스씨(那須氏)・마쓰다씨(松田氏)・미무라씨(三村氏)・쇼씨(庄氏)・아카기씨(赤木氏) 등 유력한 고케닌(御家人)들이 지토(地頭) 직 등을 얻어 이주하여 토착하였다. 이들은 세이센고케닌(西遷御家人)이라고 불린다.
남북조 시대에는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이 오키로 유배될 때의 통행로가 된 덕분에 고지마 타카토쿠(児島高徳) 등 궁방(宮方)에 호응하는 무사가 나타났다. 관응의 난(観応の擾乱)으로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분열되자 야마나씨(山名氏)가 침공하여 북부 미사쿠를 중심으로 야마나씨의 세력하에 놓였다. 그러나 야마나씨는 명덕의 난에서 쇠퇴하였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타도에 활약한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가 하리마・비젠・미사쿠 3국의 슈고직에 임명되어, 이후 아카마쓰씨(赤松氏)가 대대로 3국의 슈고직을 계승하였다. 아카마쓰 만스케(赤松満祐)가 가키쓰의 난(嘉吉の乱)에서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를 살해하여 아카마쓰씨는 일시적으로 쇠퇴하였고, 그 후에는 야마나씨(山名氏)가 3국을 영유하였다. 부활한 아카마쓰씨는 오닌의 난(応仁の乱)에서 동군(東軍)에 가담하여, 간료(管領) 호소카와 가쓰모토(細川勝元)로부터 3국 슈고직을 약속받고, 아카마쓰 마사노리(赤松政則)가 서군(西軍) 야마나씨의 세력을 몰아내어 다시 3국 슈고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전국 시대에 슈고다이(守護代)였던 우라가미 무라무네(浦上村宗)에 의해 마사노리의 자식이 살해당하여 아카마쓰씨는 쇠퇴하였다. 우라가미씨(浦上氏)는 가신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의 게코쿠조(下剋上)에 의해 멸망하였고, 비젠과 미사쿠에서는 우키타씨(宇喜多氏)가 세력을 넓혔다.
비추에서는 무로마치 시대는 슈고 호소카와씨(細川氏)가, 전국 시대는 니고씨(尼子氏)가 쇼씨(庄氏) 등 유력한 고쿠진(国人)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후, 모리씨(毛利氏)의 지원을 얻은 미무라 이에치카(三村家親)가 비추의 대부분을 통일하고, 미사쿠・비젠 일부도 세력하에 다스렸지만, 1566년 미무라 이에치카가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의 수하에 의해 암살당했다. 뒤를 이은 미무라 모토치카(三村元親)는 묘젠지 합전(明善寺合戦)에서 패배하였다. 그 후, 오다씨(織田氏)의 권유를 받아 모리씨와 싸우게 되어 미무라씨는 멸망하였다(비추 헤이란(備中兵乱)). 비추 남서쪽 가사오카 등은 무라카미 수군(村上水軍)의 지배지가 되어 무라카미 타케시게(村上隆重)에 의해 가사오카 성이 축성되었다.
이처럼 현재의 오카야마현 지역에서는 수많은 전국 무장이 군웅할거하였고, 전국 시대를 통틀어 이 지역을 통일하는 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오카야마현이 전국 전기에 니고씨(尼子氏)・오우치씨(大内氏) 등의 잔혹한 전쟁터가 되고, 후기에는 동쪽의 오다씨(織田氏)와 서쪽의 모리씨(毛利氏)의 충돌 지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추 다카마쓰 성 전투(備中高松城の戦い)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키타씨(宇喜多氏)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인연으로 전국 말기(근세 초기)까지 가문을 유지・성장시킨 예외적인 경우이다.
3. 3. 근세
구라시키 미관지구
현재 오카야마 지역은 “오카야마”, “이시야마”, “덴진야마(덴만야마)”라고 불리는 세 개의 작은 언덕이 있는 비젠국 서부 농촌 지역의 일각에 불과했지만, 우키타 나오이에는 오카야마 지역의 지리적 이점에 주목했다. 그는 “이시야마”에 소규모 성을 쌓고 있던 금광씨 당주 금광종고를 계략으로 할복시켜 성을 함락한 후, 오카야마 지역에 입봉했다. 나오이의 아들 우키다 히데이에는 비젠, 비추, 미마사카 3국의 수호직에 올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허락을 얻어 “오카야마”에 성을 쌓고, 비젠 후쿠오카에서 상인들을 불러들이는 등 성하 마을을 형성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배하자, 도요토미 가문 오대장 중 하나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우키다 씨는 영지를 몰수당하고 하치조지마로 유배되었다.[4][6]
전승측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가 3국 51만 석을 영유했지만 2년 만에 후계 없이 사망하여 단절되었고, 1603년 히메지 번 번주 이케다 테루마사의 차남 이케다 타다쓰구가 분가로서 비젠 38만 석에 들어왔다. 타다쓰구·타다오 이후 이케다 본가의 돗토리 번에서 영지 교환으로 31만 5,000석으로 오카야마에 입봉한 이케다 미쓰마사(테루마사의 손자)가 비젠 오카야마 번의 기초를 쌓았고, 이후 메이지 유신을 맞이할 때까지 미쓰마사의 가계가 번정을 담당했다. 영내에는 이케다가의 가로의 진야가 각지에 있었는데, 이키가 3만 3,000석의 무시아케 진야, 이케다가 3만 2,000석의 아마기 진야, 이케다가 2만 2,000석의 스사이 진야, 히키가 1만 6,000석의 가나가와 진야, 이케다가 1만 4,000석의 타테베 진야, 도구라가 1만 1,000석의 사에키 진야가 있었다. 성하 마을인 오카야마는 발전을 거듭하여, 제4대 이케다 쓰나마사의 통치 시대인 1707년에는 마을 사람 인구가 3만 635명(무가·사찰을 포함한 총 인구는 추정 4만 명에서 5만 명)에 달하여,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경제력을 가진 성하 마을이 되었다. 현재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로 꼽히는 고라쿠엔이 조성된 것도 이 시기이다. 1856년에는 비젠 일국을 휩쓰는 시부소메 익키가 발생했다.
비추에는 코바야카와씨 개역 후, 일국을 관할하는 번이 설치되지 않고 막령과 다이묘령·기본령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비추 마쓰야마 번을 필두로, 아시모리 번, 니와세 번, 신미 번, 오카다 번, 아사오 번, 오카야마 번의 지번인 오카야마 신덴 번(카모가타 번) 및 오카야마 신덴 번(이나사카 번)이 성립했다. 현 이가사 지역의 대부분은 비고 후쿠야마 번령이었고 비고와 일체적으로 취급되어, 후쿠야마 번 주도의 신전 개발에 의해 간척이 진행되었다. 교대기합의 야마자키가의 나루하 진야(막말에 나루하 번이 됨), 교대기합의 토가와가의 나데카와 진야가 설치되었고, 토가와가는 기본으로서도 하야시마, 오비에, 이모토, 나카지마(나카쇼)에 각각 진야를 설치했다. 구라시키는 덴료(막부의 직할)가 되었고, 비추는 물론 이요, 사누키 등 주변 여러 국의 막령을 관할 통치하는 막부 진야가 설치되어, 그 번영은 오카야마 이상이라고도 했다.
미마사쿠에는 모리가가 18만 6,000석으로 입봉했다. 4대 만에 단절된 후, 에치젠 마쓰다이라가의 종가인 쓰야마 번 10만 석, 미우라가의 가쓰야마 번 2만 3,000석이 성립했다.
막말이 되어 사쓰마 번이나 조슈 번에 의한 막부 타도의 움직임이 확산되자, 외양이었던 오카야마 번은 근황파에, 친번·보대였던 쓰야마 번·비추 마쓰야마 번은 조막파로 나뉘었다. 1868년에 발발한 보신 전쟁 당시에는 당시 번주인 이타쿠라 가쓰시즈가 로중직에 있던 비추 마쓰야마 번을 조적으로 오카야마 번 등이 공격했다.
3. 4. 근대 ~ 태평양 전쟁기
1871년 7월 14일(양력 1871년8월 29일) 메이지 신정부의 폐번치현에 따라 岡山藩을 계승하여 비젠국을 관할하는 오카야마현이 설치되었다. 초기에는 현재의 오카야마현 지역에 14개의 현이 설치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오카야마현, 후카즈현, 호죠현의 3개 현으로 재편되었다.[4][6]
1875년 12월 10일 비추국과 비고국에 해당하는 오다현(구 후카즈현)을 편입하고, 1876년 4월 18일 비고국 6군을 히로시마현으로 이관하고 미사카국에 해당하는 호죠현을 합병하였다. 이후 1896년 요시노군 이시이촌을 효고현사요군으로 편입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4][6]
현청은 오카야마시에 설치되었으며, 철도망 정비와 舊制제6고등학교・舊制오카야마 의과대학(오카야마번 의학관을 문부성이 이어받음) 등의 교육기관 설립을 통해 산요 지방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자유민권운동에서는 가타야마 센, 이누카이 쓰요시, 히라누마 기이치로 등 많은 운동가와 정치가를 배출했고, 경제계에서는 제일생명 창업자 야노 코우타 등을 배출했다.
전쟁 전에는 농업이 주 산업이었으며, 남부에서는 고지마만 간척으로 벼농사 면적을 확대하고 이구사・면화 재배와 과수 재배가 이루어졌다. 북부에서는 양잠이 성행했다. 고지마 지역(구라시키시)에서는 염전 개발이 성행하여 노자키 가문이 재산을 모았다.
1870년대 이후 구라시키 방적(클라보) 등 제사 공장이 현내에 입지하며 근대 공업이 발달했다. 오하라 손사부로는 구라시키 견직(현재의 클라레), 중국 수력전기회사(현재의 중국전력) 등을 설립했다. 또한 오하라 미술관, 구라시키 중앙병원 등을 설립하고 이시이 주지의 고아 양육 사업을 지원하는 등 메세나 사업을 실시하였다.
1891년 산요 철도(현재의 JR산요선)가 오카야마를 경유하여 히로시마현 오노미치까지 개통되었고, 이후 몇몇 사철 노선이 개통되었다.
1920년 7월, 현내에서 장티푸스가 대유행하여 환자 1,322명, 사망자 291명이 발생했다.[37]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중화학공업이 발달하여 사쿠하라에서는 광산이 개척되고, 타마노에서는 조선업이 활황을 보였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제세 고문 제도를 발족하여 오사카부의 방면위원 제도와 함께 후의 민생위원 제도로 이어졌다. 가타야마 센은 일본 최초의 인보관을 설립했으며, 야마무로 군페이는 구세군에서 폐창 운동을 펼쳤다. 토메오카 코우스케는 가정학교를 설립했고, 앨리스 페티 아담스는 오카야마 박애회 병원을 설립했다. 이시이 주지는 일본 최초의 고아원(아동양호시설)을 만들었다. 이들 4명은 "오카야마 사성인"으로 불린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5년6월에는 미국군의 공습으로 구라시키시 미즈시마 지역과 오카야마시 중심부가 거의 괴멸되었고, 오카야마시에서만 1,700명 이상의 시민이 희생되었다.
3. 5. 전후
전후에는 고지마 만, 가사오카 만 등 대규모 간척 사업이 계속 진행되어, 연안 지역에 거대한 농업 지대와 공업 지대가 나타났다.[4][6]
1960년대, 미키 유키하루 지사 시절 전국 종합 개발 계획에 맞춰 미즈시마 지역에 대형 선박이 입항 가능한 항만과 석유 정유 시설을 조성하여 제철, 석유화학, 자동차 등의 공장을 유치했다. 같은 시기에 가사오카 시는 비고 공업 정비 특별 지역으로 지정되어 JFE스틸 서일본 제철소(구 일본강관 후쿠야마 제철소)를 비롯한 제철 관련 산업이 진출했다. 이처럼 현 남부 연안 지대를 중심으로 중화학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업 중심의 현에서 공업 중심의 현으로 변모했다. 한편, 1970년대에는 대기 오염, 세토나이카이(기름 유출 사고), 적조, 고지마 호의 수질 악화 등에 시달렸다.
1970년대 이후 산요 신칸센 개통과 세토 대교 개통에 따른 고속도로·철도망 정비, 그리고 현이 관리하는 공항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3,000m 활주로를 갖춘 오카야마 공항 개항에 따른 항공망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교통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높였다. 남부 지역에서는 인구 증가가 두드러져 오카야마시와 구라시키시 등이 150만 도시권(오카야마 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오카야마 인터체인지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의 인구는 약 1,640만 명으로 도쿄도 인구보다 많다. 그 범위의 총생산액은 약 97조엔으로 캐나다를 웃도는 규모이다.
2000년대에는 방적공장 터 등을 전용한 이온몰 구라시키 등의 교외·준교외형 쇼핑몰이 크고 작은 것을 포함해 오카야마 현 각지에 건설되었다. 한편, 상점가가 폐점 상가가 되고, 다이에 오카야마점·미쓰코시 구라시키점과 같은 시가지 중심부의 대형 점포가 잇따라 철수한 것을 상징하는 시가지 공동화(도넛화)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2020년 12월 20일, 오카야마 현과 현 의사회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급속한 확대에 대응하여 의료 긴급사태 선언을 발표했다.[38]
3. 6. 21세기
메이지 유신 이전, 오늘날의 오카야마현 지역은 비젠, 비추, 미마사카 3개 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오카야마현은 메이지 시대(1868~1912)의 대규모 행정 개혁의 일환으로 1871년에 설치되었고, 현의 경계는 1876년에 확정되었다.[4][6]
오카야마현을 진원으로 하는 지진은 1711년(일본 보영 8년/정덕 원년)에 돗토리현과의 현 경계 부근을 진원으로 하는 M6.5~6.8의 지진이 기록[35]되어 있다. 오카야마현에 큰 피해를 입힌 사례로는 868년의 하리마국 지진, 1927년(쇼와 2년) 북단고 지진, 1946년(쇼와 21년) 쇼와 난카이 지진 등이 있다.
4. 인구
일본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9] 그리고,[10] 오카야마현은 2005년 이후 지속적인 인구 감소를 경험하고 있다. 오카야마현의 인구는 전후 165만 명에서 꾸준히 증가하여 2002년에는 최대 약 195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현 전체적으로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2020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오카야마현의 인구 증가율은 -1.8%로 나타났으며, 1925년 이후 국세조사 데이터 중 가장 낮은 수치이다.
2005년 국세조사를 정점으로 인구 감소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 2024년 현재 약 183만 명으로, 1976년(쇼와 51년)의 인구 수준과 거의 같다. 오카야마현의 최근 인구 동태는 2010년대 전반에는 연간 5,000명, 후반에는 7,000명 정도의 인구 감소 수준에 머물렀지만, 2024년 연간 감소 수는 약 14,000명까지 증가하여 인구 감소 추세가 급격히 강화되고 있다.
히로시마에 이어 중국·시코쿠 지방 제2의 도시인 오카야마시(약 71만 명)와 제3위의 구라시키시(약 47만 명)를 포함하는 남부 지역은 오카야마 도시권을 중심으로 인구 증가가 꾸준하다. 다만, 오카야마시와 함께 오카야마 도시권의 중심을 담당하는 구라시키시는 2019년부터 감소세로 돌아섰다. 반면, 소우사시는 매년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39] 기비 고원과 중국 산지의 산들로 둘러싸인 지역에서는 고령화가 진행되고 인구 감소가 두드러지고 있다. 현 전체적으로는 1990년(헤이세이 2년)경부터 인구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사회 동태 측면에서는 1998년(헤이세이 10년) 이후 전출 초과로 인한 사회적 감소가 나타났다. 2011년(헤이세이 23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이주민 증가로 일시적으로 전입 초과로 전환되었지만,[40][41]2013년(헤이세이 25년) 다시 사회적 감소로 돌아섰다.
2020년 오카야마현 인구 피라미드
국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오카야마현 인구 추이
실시 연도
인구 (명)
증감 인구 (명)
인구 증감률 (%)
국내 증감률 (%)
증가율 전국 순위
1960년
1,670,454
-
-
-
-
1965년
1,645,135
-25,319
-1.52
5.20
28위
1970년
1,707,026
61,891
3.76
5.54
16위
1975년
1,814,305
107,279
6.28
7.92
18위
1980년
1,871,023
56,718
3.12
4.57
29위
1985년
1,916,906
45,883
2.45
3.40
23위
1990년
1,925,877
8,971
0.47
2.12
24위
1995년
1,950,750
24,873
1.29
1.58
20위
2000년
1,950,828
78
0.00
1.08
24위
2005년
1,957,264
6,436
0.33
0.66
13위
2010년
1,945,276
-11,988
-0.61
0.23
17위
2015년
1,921,525
-23,751
-1.22
-0.75
14위
2020년
1,888,432
-33,093
-1.72
-0.75
15위
오카야마현의 시정촌 인구, 면적, 인구 밀도 (2024년) ※ 자치체 순서는 전국 지방 공공 단체 코드 순서
오카야마현의 행정기관 본청인 오카야마현청(岡山県庁)은 오카야마시 기타구 우치야마시타에 있다. 오카야마현에는 비젠(備前), 미마사카(美作), 비추(備中) 각 현민국이 설치되어 있고, 그 하부 조직으로 각 지역 사무소가 있다. 과거에는 지방진흥국이 있었지만 통합·재편되었다.
2008년 6월 2일, 오카야마현은 정례 기자회견에서 2011년에 지방자치단체 재정건전화법에 따라 채권 발행 제한 등 국가의 관리를 받는 재정재생단체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며 재정위기 선언을 했다.[43] 이에 따라 구조적으로 예상되는 400억엔 규모의 재원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2008년 8월 「오카야마현 재정구조개혁 플랜(안)」을 발표했고,[43] 같은 해 11월 「오카야마현 행정재정구조개혁대강 2008」을 책정했다.
이 행정개혁 대강은 (1) 직원 수 감축, (2) 조직 체제 재구축, (3) 직원 의식 개혁과 인사 제도, (4) 사무 사업 감축, (5) 공공사업 감축, (6) 세입 확보, (7) 공공 시설 폐쇄·양도·집약화, (8) 시정촌의 사무·권한 이양, (9) 외곽 단체 등의 획기적인 재검토, (10) 효과적인 행정 평가 시스템 구축 등 10개 분야에 걸쳐 있다.
이러한 노력을 2012년(직원 수는 2013년)까지 실시해 일반 재원으로 3960억엔의 수지 부족을 해소하고, 세입과 세출의 균형을 이룬 지속 가능한 재정 구조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향후 재정 운영 목표로 「수입에 맞는 예산 편성」, 「현채 잔고를 더 이상 늘리지 않음 ('''프라이머리 밸런스의 흑자화)'''」, 「동규모 현과 비교해 가장 슬림한 체제 목표」, 「행정개혁 추진 채권 등의 긴급피난적인 대책에 의한 재정 운영과 결별」, 「향후 4년간 개혁의 총정리」라는 5가지 목표를 내걸고, 이에 따른 재정 운영에 임하고 있다.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현 의회'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가 없고, 오카야마현청에 대한 정보만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현 의회 섹션에는 내용을 작성할 수 없다. 섹션 제목과 관련된 내용을 찾을 수 없으므로, 빈 문자열을 반환한다.
5. 3. 재정
2008년 6월 2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2011년에 지방자치단체 재정건전화법에 따라 채권 발행 제한 등 국가의 관리를 받는 재정재생단체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며 재정위기 선언을 했다.[43] 이에 따라 구조적으로 예상되는 400억 엔 규모의 재원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2008년 8월에 「오카야마현 재정구조개혁 플랜(안)」을 발표했다.[43] 같은 해 11월에 「오카야마현 행정재정구조개혁대강 2008」이 책정되었다.
이 행정개혁 대강의 구체적인 틀은 (1) 직원 수 감축, (2) 조직 체제 재구축, (3) 직원 의식 개혁과 인사 제도, (4) 사무 사업 감축, (5) 공공사업 감축, (6) 세입 확보, (7) 공공 시설 폐쇄·양도·집약화, (8) 시정촌의 사무·권한 이양, (9) 외곽 단체 등의 획기적인 재검토, (10) 효과적인 행정 평가 시스템 구축 등 10개 분야에 걸쳐 있다.
이러한 노력을 2012년(직원 수는 2013년)까지 실시함으로써 일반 재원으로 396억 엔의 수지 부족을 해소하고, 세입과 세출의 균형을 이룬 지속 가능한 재정 구조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향후 재정 운영의 목표로서 「수입에 맞는 예산을 편성합니다」, 「현채 잔고를 더 이상 늘리지 않습니다 ('''프라이머리 밸런스의 흑자화)'''」, 「동규모 현과 비교해 가장 슬림한 체제를 목표로 합니다」, 「행정개혁 추진 채권 등의 긴급피난적인 대책에 의한 재정 운영과 결별합니다」, 「향후 4년간 개혁의 총정리를 합니다」라는 5가지 목표를 내걸고, 이 목표에 따른 재정 운영에 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카야마현은 에도 시대부터 쇼와 시대 전후까지 세토 내해의 대규모 간척으로 넓은 농지가 조성되어, 쌀, 밀, 과수 생산이 활발하다. 특히 하쿠토(백도), 머스캣 오브 알렉산드리아, 피오네 등은 생산량 일본 1위이며, 품질이 높아 국내외에서 고가로 판매된다. 현 북부 히루젠 고원에서는 저지종 소를 대규모 방목하여 치즈,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등으로 가공한다.[16]
현 남서부 이바라시, 가사오카시 등 이가사 지방은 메이지의 부현 통합 이전까지 현의 대부분 지역과 다른 역사를 가졌다. 현재도 이들 지역은 히로시마현후쿠야마시의 베드타운으로, 경제권과 생활권이 히로시마현 동부와 일체화되어 후쿠야마 도시권을 구성한다.
전전까지는 1차 산업과 방적 등 경공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전후 미즈시마 지역에 가와사키 제철(현 JFE 스틸 구라시키 지구), 가사오카 지역에 일본강관(현 JFE 스틸 후쿠야마 지구) 등 대규모 선강 일관 제철소가 건설되면서 중공업 중심으로 공업현으로 변모했다. 특히 후쿠야마 지구의 연간 조강 생산 능력은 1200만 톤 규모로 일본 최대이며, 단일 제철 공장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미즈시마 임해 공업 지대는 전국 종합 개발 계획에 따라 지정된 신산업 도시 "오카야마현 남부 지역"의 중심지로 개발되어, 국제 컨테이너 터미널, 석유 화학 콤비나트가 정비되고 자동차 등 가공 조립형 기업군이 진출했다.[17] 가사오카 지역은 전국 종합 개발 계획에서 공업 정비 특별 지역 "비고 공업 정비 특별 지역"으로 지정되어, 연안 매립으로 대규모 국제 항만, 제철소를 포함한 공장군이 건설되었다. 항만 수출입액은 미즈시마 항이 중시코쿠 1위[18], 후쿠야마 항이 2위로 중시코쿠 상위 2개 항을 오카야마현 항만이 차지한다.[19] 가사오카 항은 후쿠야마 항에 포함되며, JFE 스틸 후쿠야마 제철소 부지는 가사오카시에서 후쿠야마시에 걸쳐 있다.
최근 세토우치시에서 2018년 가동된 "[http://www.setouchimegasolar.com 세토우치 Kirei 태양광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20], 2019년 가동된 일본 최대 257.7메가와트 태양광 발전소인 사쿠토 메가 솔라 발전소[21], 마니와시의 목질 바이오매스 발전 사업 등 자연 에너지를 활용하는 재생 가능 에너지 추진이 활발하다.[22]
현청 소재지의 맑은 날씨와 강수량 1mm 미만 일수가 전국 최다인 점을 바탕으로, 1989년부터 '''"맑은 나라 오카야마"'''를 현의 캐치프레이즈로 사용하고 있다.[23][24]
오카야마현에 본사를 두거나 주요 거점을 둔 주요 기업, 금융기관 및 사업체는 다음과 같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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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레 - 구라시키시에서 창업. 현재 본사는 도쿄에 있지만(등기상 본점은 현재도 구라시키시에 있음), 현재도 구라시키 사업소, 오카야마 사업소를 두고 있다.
구라시키 방적(클라보) - 구라시키시에서 창업. 현재 본사는 오사카에 있지만(등기상 본점은 현재도 구라시키시에 있음), 현재도 오카야마 공장을 두고 있다. 공장 터에 구라시키 아이비 스퀘어 호텔과 구라시키 중앙병원을 설립하였고, 2021년 현재에도 구라시키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이다.
미쓰이 E&S 홀딩스 - 다마노시에서 창업. 현재 본사는 도쿄에 있다. 현재도 창업지인 다마노시에 다마노 사업소를 두고 있다.
농업 생산액 비율은 닭(계란·브로일러)이 전체 생산액의 23.7%로 가장 많고, 쌀이 22.8%, 과일이 17.5%, 채소가 15.3%를 차지한다.[44] --
오카야마현 남부의 고지마만 간척지를 중심으로 한 오카야마 평야와 북부의 쓰야마 분지 등에서는 예부터 벼농사가 성행하여 현재까지 농산물의 중심을 벼가 차지하고 있으며, 고시히카리, 아사히마이, 히노히카리 등의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또한 남부에서는 오카야마시 나다자키 지역의 가지와 구라시키시 렌지마 지역의 연근을 비롯하여 대도시로 출하되는 화훼류와 전국적으로도 드문 노란 쪽파 등이 생산되고 있다.
국내산 머스캣의 약 9할은 오카야마현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로는 오카야마시 쓰타카 지역·가야타니 지역 등의 구릉지에서 포도와 복숭아의 온실 재배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전국 도도부현의 출하량을 보면 포도는 4위(서일본 1위), 복숭아는 6위(와카야마현에 이어 서일본 2위)로 전체 시장 점유율이 5%에도 미치지 못하지만,[45] 일부 품종에 한정하면 포도의 머스캣 오브 알렉산드리아, 뉴피오네와 흑콩의 사쿠슈쿠로의 생산량은 전국 최고 수준이며,[46] 현재는 오카야마현의 주요 특산품이 되고 있다. 현내에서는 그 외에도 오카야마시 히가시구에서 오세치 시즌의 아타고나시(아타고 배)와 야리(야리 배) 등의 과일이 전국 시장 점유율 1위로 재배되고 있으며, 높은 생산 기술과 온화한 기후에 혜택을 받아 고품질의 상품을 생산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농산물을 중국, 대만 등 해외에 수출하여 판매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축산은 중국 산지 연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신미시 센야 지역에서 육우의 "센야규" 등의 와규가 사육되고 있다. 낙농은 히루젠 고원(마니와시)에서는 저지 소의 방목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방분을 많이 함유한 진한 우유 등을 출하하고 있으며, 기비추오정에서는 기후에 맞춘 브라운 스위스 품종의 우유를 사용하여 요시다 목장(요시다목장(岡山県))이 고품질의 치즈를 생산하고 있다. 그 외에도 야마다 양봉장을 중심으로 양봉도 이루어지고 있다.
옛날에는 이구사, 곤약, 담배의 생산도 성행하였지만, 전후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점차 생산량을 줄이고 있다. 북부를 중심으로 한 산간 지역에서는 젊은이들의 도시로의 유출과 고령화에 의한 과소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농업의 일손 부족이 과제가 되고 있다.
국유림은 적고 사유림이 9할을 차지한다. 온난하고 건조한 기후를 좋아하는 고급 목재인 편백(히노키)이 많지만, 습윤 기후를 좋아하는 삼나무(스기)는 적다. 사유림 면적의 7할 가까이가 편백 숲으로 되어 있다.[47] 편백 원목의 생산량은 고치현, 에히메현, 구마모토현 등과 함께 상위권에 있으며 1위를 차지하는 해도 많다.
옛날에는 비슷한 기후와 세토나이카이 연안에 많은 풍화 화강암의 마사토(真砂土)에 적응하는 곰솔(아카마쓰)이 많았고, 현재도 현목(県木)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것은 기후나 지질적인 요인 외에도 요리, 제염, 다타라 제철 등에서 땔나무의 과다 이용에 의해 식생 천이가 후퇴하고 소나무류가 우세하게 된 결과이며, 오카야마에 국한되지 않고 옛부터 사람이 살았던 서일본에서는 자주 볼 수 있었던 광경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고온에서 타는 곰솔 재목으로 구워내는 비젠야키와 나가후네의 일본도 단조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48] 치명적인 전염병인 소나무 재선충병(솔잎혹파리)의 만연에 따라 1970년대 이후 곰솔 숲은 감소하고 일부는 편백 숲으로 전환되었다.
옛날에는 곰솔과 공생하는 송이버섯의 대산지이기도 하여 연간 500t 이상을 생산하였지만, 1960년대 이후 생산량이 급감했다.[49] 2010년대 이후로는 2대 산지인 나가노현과 이와테현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만, 전국 생산량은 3위에 드는 해가 많다.
건조지라는 점에서 오카야마현 주변에서 특필되는 수종에 아베마키가 있다. 아베마키는 건조지에 견디는 굴참나무의 근연종으로, 주고쿠 지방에서는 굴참나무보다 일반적이다. 나무껍질의 코르크층이 두껍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산의 코르크 참나무의 대용으로 국산 코르크의 제조가 이루어졌다. 전후에는 질 좋은 코르크 참나무의 유입으로 아베마키 코르크는 단절되었지만, 이 잔재로 일본의 코르크 메이커는 오카야마현을 중심으로 하는 주고쿠 지방에 많다. 최대 기업인 우치야마 코교(内山工業)도 본사가 오카야마시에 있다. 또한 히로시마현을 대표하는 자동차 메이커인 마쓰다도 코르크 가공에서 시작되어, 후에 코르크 제조 부문은 분사하여 우치야마 코교 계열이 되었다.[50]
; 수산업
세토나이카이에 면한 오카야마현에서는 고지마만 등에서 얕은 바다를 이용한 연안 어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옛날에는 삼치(사와라)와 타이(도다이) 등의 중형 어류가 주로 잡혔지만,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걸친 간척 사업에 의한 어장 축소와 도시화의 영향에 의한 세토나이카이의 수질 오염이 발생하여, 이전만큼 풍부한 어장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현재도 구라시키시 시모쓰이 항을 비롯하여 메바루, 이이다코, 가레이 등의 좋은 어장이 되고 있으며, 세토우치시 오쿠마치, 우시마도정 등에서는 복잡하게 들어간 해안을 이용한 김과 굴(카키)의 양식이 성행하고 있다. 굴의 생산량은 전국 2위이다. 세토나이카이에서 잡히는 해산물을 사용한 향토 요리로는 바라스시(축제 스시로 역전 판매), 타코메시, 마마카리(사파의 초절임) 등이 있다.
또한 비젠시 히나세마치 등에서는 굴을 오코노미야키에 넣은 "카키오코"를 새로운 명물로 오카야마현 내와 타현에 PR하고 있으며, 수산 자원을 마을 일으키기의 계기로 연결하는 새로운 시도도 보인다.
최근의 새로운 시도로서, 오카야마 이과대학의 연구로 육상에서의 하타(농어과 어류) 등의 해수어 양식도 이루어지고 있다.[51]
6. 2. 2차 산업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오카야마현은 농업 중심 지역이었다. 대규모 항만이 없어 구라시키 방적 등 제사·방적업 중심의 경공업이 주를 이루었으나, 전후 현 차원에서 주고쿠·시코쿠 지방의 다른 현에 비해 뒤처진 공업화를 추진했다. 구라시키시 수시마(水島) 공업지대를 매립 조성하고, 석유 정제소, 대형 제철소, 자동차 공장 등을 유치하여 급속한 공업 발전을 이루었다. 현내에는 JFE스틸의 구라시키 지구와 후쿠야마 지구(가사오카시 포함)에 두 개의 용광로 일관 제철소가 있다.
소자시 등 내륙부에도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자동차 부품 제조 및 전자기기 공장이 들어섰다. 오카야마시에는 식품, 인쇄 등 시장 지향형 경공업 공장이 오카나미(岡南) 지구, 니시다이지(西大寺) 지구 등에 위치하며, 구라시키시 고지마(児島) 지구에는 청바지, 학생복 등 봉제업이 발달했다. 오카야마현은 학생복 출하량 전국 1위이다.
현 서부 가사오카시에는 히로시마현 JFE스틸 서일본 제철소 후쿠야마 제철소 관련 기업 등 히로시마현 기업의 진출이 많다. JFE스틸 후쿠야마 제철소 부지 일부는 가사오카시에 걸쳐 있다.
1980년대 이후 기비 고원 등 내륙 지역을 새로운 산업 지대로 만들기 위해 고속도로 정비, 오카야마 공항 교외 이전 등 개발이 추진되었고, 현 차원에서 IT 기업, IC 등 전자 디바이스 공장 유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개발 후 수십 년이 지난 현재도 입주 공장이 많지 않아 당초 예상대로 사업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현 주도의 공업화를 위한 적극적인 설비 투자로 공업현으로 변모했으나, 이 사업으로 늘어난 부채가 최근 현 재정을 압박하고 있다.
6. 3. 3차 산업
오카야마현의 제3차 산업은 바이오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의약품 및 IT 정보통신 산업 등이 발달하였다. 독자적인 정밀 가공 생산을 지원하는 기술 기업과 식품·건강·의료·환경·복지 및 바이오 관련 기업·연구기관 등이 산학관 협력으로 새로운 고용 산업 창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3년에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고속 대용량 기간 광섬유망을 현내 전역에 8자 형태로 연결하고, 전국 기가비트 네트워크에도 연결된 오카야마 정보 하이웨이를 정비하였다. 서비스업, 소매업, 금융업 등은 본사나 사업소를 주로 오카야마시를 중심으로 한 현 남부에 두고 있다.[38]
1960년대까지는 전통적인 개인 경영 소매점이 대부분이었다. 1970년대 이후 도시화와 자동차 보급이 늘어나고, 대량 소비 사회가 확산되면서 전국 또는 중국·시코쿠 지방 규모로 전개하는 슈퍼마켓, 편의점, 전기점 등의 체인점이 교외의 간선도로변에 많이 출점하였다. 생활의 편리성은 높아졌지만, 중심 시가지의 공동화를 초래했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에는 도시 지역의 땅값이 하락했다. 최근에는 중심 시가지에 고층 맨션 건설이 잇따르고 있다. 또한, 소매점의 중심 시가지 신규 출점과 도시 재개발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인구 증가[40][41]도 나타나고 있으며, 현재는 다시 땅값이 상승하고 있다.[52]
오카야마시에서는 에도 시대의 성하 마을에서 유래하는 오카야마 오마치 상점가 지역과 1972년(쇼와 47년) 산요 신칸센 개업 후 발전한 JR 오카야마역 주변 지역이 2대 상업 지역을 이루고 있다. 오카야마현 남부 도시권은 현재 인구 150만 명을 보유하고 있으며, 지방 도시로서는 드물게 성장이 기대되는 도시권 중 하나이다. 오카야마시의 정령지정도시 이행을 계기로 앞으로도 재개발 등 활성화가 기대되고 있다.
현 남서부의 이바라시·가사오카시는 에도 시대에 비고후쿠야마번 영지였던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히로시마현 동부와의 상업적인 일체감이 크고, 상대적으로 현내 다른 시정촌(오카야마시 등)과의 연결이 적다. 이들 지역은 현재에도 완전히 후쿠야마 도시권에 속하고, 많은 주민이 일상적인 쇼핑 등을 후쿠야마시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그 밖의 지역에서는 인구 유출·감소를 동반한 과소화로 인해 상업 시설의 철수·폐쇄, 대형 상업 시설의 교외 출점에 의한 스폰지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지역 활성화가 큰 과제가 되고 있다.
오카야마현은 산요 본선(山陽本線), 산요 신칸센(山陽新幹線), 중국 자동차도(中国自動車道), 1997년 전선이 개통된 산요 자동차도(山陽自動車道) 등 서일본의 교통 대동맥이 현을 가로지르고 있다. 1988년에는 본토와 시코쿠를 잇는 세토 대교(瀬戸大橋)도 개통되었다.
오카야마현은 산인 지방과 시코쿠의 중간에 위치하고, 예로부터 주요 간선도로인 산요도가 지나가 도로망이 잘 정비되어 있다. 2007년(헤이세이 19년) 기준 면적 1,000km²당 고속도로 연장은 41km로 전국 5위를 기록하고 있다.
(철도, 도로, 항공, 항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조)
7. 1. 철도
오카야마현의 철도는 1891년(메이지 24년) JR 산요 본선이 미이시 역에서 오카야마 역까지 개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중국철도(중철버스), 사이다이지 철도, 가타가미 철도(도와광업 가타가미 철도선), 시모쓰이 전철 등이 차례로 개통되었다. 전후에는 자동차 보급과 이용객 감소로 많은 사철 노선이 폐지되었다. 1972년(쇼와 47년)에는 일본국유철도(국철) 산요 신칸센 신오사카-오카야마 구간이, 3년 후에는 오카야마-하카타 구간이 개업했고, 1988년(쇼와 63년)에는 세토대교 개통과 함께 JR 세토대교선이 개업했다. 이후 JR 오카야마 역은 혼슈와 규슈, 그리고 산인 지방과 시코쿠를 잇는 거대한 터미널 역이 되었다. 현재, 가가미노정, 기비추오정, 신조촌, 나기정을 제외한 모든 자치단체에 철도역이 존재하며, 오카야마시에서는 전국적으로 드물어진 노면전차도 운행되고 있다.[1]
도쿄, 삿포로, 나하 3개 도시를 연결하는 국내선과 서울, 상하이를 매일 운항하는 국제선, 그리고 베이징, 다롄을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국제선을 보유하고 있다. 도쿄 노선은 거리와 요금 면에서 항공기와 신칸센 간의 경쟁이 치열한 지역이며, 공항 내 주차장이 무료(일부 유료)라는 점 때문에, 같은 주고쿠 지방의 제2종 공항인 히로시마 공항에는 크게 뒤처지지만, 최근 이용객이 증가하고 있으며, 다른 지방 제3종 공항들이 경영난에 시달리는 가운데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히로시마 공항은 히로시마현 중앙에 위치해 있어, 히로시마현 서부인 이가사 지방은 히로시마 공항과 오카야마 공항의 거의 중간에 위치한다. 1988년(쇼와 63년) 오카야마 공항 개항 전까지 주요 공항이었던 오카나미 비행장은 현재 세스나기 등 소형기의 비행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가사오카 후레아이 공항은 전국 최초의 농도 공항으로 개항했지만, 이용률이 저조하여 여객기가 취항한 적이 없으며, 현재는 정기편이 운항되지 않는다.
쇼와 시대까지는 장거리 항로를 포함한 많은 여객선이 기항했지만, 신칸센, 고속도로 등 육상 교통의 정비에 따라 장거리 항로는 전폐되었고, 세토나이카이(세토 내해)의 섬들을 잇는 단거리 항로만 남게 되었다. 우노항은 다카마쓰항을 향하는 우고연락선이 발착하여 시코쿠 지방의 관문 역할을 했지만, 2019년(헤이세이 31년/레이와 원년)에 우고연락선은 폐지되었다.
* 카사오카 제도(카사오카 제도에서 가가와현다도쓰까지의 항로)(산요기선, 시라카와 페리 등)
8. 문화
오카야마현은 민담 영웅 모모타로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이야기는 기비쓰히코노미코토와 우라의 전설적인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전해진다. 백제 우라 왕자가 기노조(악마의 성)에 살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안겨주었는데, 황제의 명으로 기비쓰히코노미코토(모모타로)가 우라를 물리쳤다고 한다. 오카야마시는 매년 모모타로 축제(Momotarō-matsuri)를 개최한다.[5][12]
에도 시대 초기, 오카야마에는 이케다 씨(池田氏), 쓰야마에는 모리 씨(森氏)가 외양 대명(外様大名)으로 입봉하여 성하 마을을 형성했다. 특히 이케다 쓰나마사(池田綱政)는 일본 3대 정원(日本三名園) 중 하나인 고라쿠엔(後楽園)을 조성하고, 간야가쿠샤(閑谷学校)를 여는 등 문화·교육 면에 큰 공적을 남겼다.
메이지 시대에는 1870년 오카야마번 의학관이 설치되었고, 1900년 제6고등학원이, 1922년 오카야마번 의학관을 계승한 관립 오카야마 의과대학이 개교하는 등 고등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당시 취학률은 전국 최고 수준이었다.
여자 교육과 관련해서는, 메이지 초기까지 대부분 지역에서 초등 교육 이상의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카야마현에서 여자 중등 교육의 시초는 1885년 후쿠니시 시게코가 연 순정여학교(현 오카야마현립 고야마 고등학교)로 여겨진다.[60][61]
현재 오카야마현에는 3개의 국립대학, 15개의 사립대학이 설치되어 있다. 2007년 현재 인구 10만 명당 대학·단대 설치 수는 전국 6위이다.[46]오카야마시는 중국·시코쿠 지방에서 히로시마시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오카야마시와 인접한 구라시키시를 중심으로 한 오카야마 도시권은 히로시마 도시권을 웃도는 규모이다. 오카야마현은 "맑은 나라 오카야마"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사용하고 있다.[23][24]
오카야마현에서는 지역 방송인 NHK와 전파 상호 이용에 따른 5개의 민영 방송국을 시청할 수 있다.
주로 표준어식 악센트의 오카야마 사투리가 사용된다. 현내 사투리는 옛 국(國)에 따라 비젠벤(備前弁), 비추벤(備中弁), 미사쿠벤(美作弁)(사쿠슈벤, 쓰야마벤)의 3종류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서로 대립하여 분포하는 현상이 반드시 많다고는 할 수 없다. 카사오카시·이하라시 등은 옛 비추쿠니(備中国)이지만 비고후쿠야마한(備後福山藩) 영지였던 역사적 배경으로 히로시마현 쪽과 공통의 사투리(후쿠야마벤(福山弁), 비고벤(備後弁))가 사용된다.[65] 이 때문에 현내에서는 이가사 지역에만 히로시마현으로부터의 연속적인 분포에 의해 독자적인 현상 분포가 인정되며, 쿠라시키시 등의 비추벤과는 어휘 등 많은 차이가 있다. 카사오카시의 마나베섬 등에서는 독특한 악센트가 사용된다.[66]
8. 2. 식문화
오카야마현은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하여 농산물과 수산물이 풍부한 지역이다. 주요 향토 요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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